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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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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唐臣傳
01.
烏震 冀州信都人也 少事趙王王鎔爲軍卒이러니 稍以功遷裨校하야하다
習從莊宗于河上 而鎔爲張文禮所弑한대 震從習討文禮어늘 而家在趙
文禮執震母妻及子十餘人以招震이로되 震不顧 文禮乃皆斷其手鼻하되 割而不殊하고 縱至習軍하니 軍中皆不忍正視
震一慟而止하고 憤激自勵하야 身先士卒하다 晉軍攻破鎭州 震以功拜刺史하야 歷深趙二州하다
震爲人純質하고 少好學하야 通左氏春秋하고 喜作詩하고 善書러니
及爲刺史하야는 以廉平爲政으로 有聲하야 하야 兼北面水陸轉運使하다
明宗聞其名하고 擢拜河北道副招討使하고 領寧國軍節度使하야戍于盧臺軍이라
始至而戍兵龍晊等作亂하야 見殺하니 하다
嗚呼 어니와 若烏震者 可謂忠乎
甚矣 震之不 夫食人之祿而任人之事하야 事有任하고 專其責이면 而其國之利害 由己之爲不爲어니와
爲之雖利於國이라도 而有害於其親者 猶將辭其祿而去之 矧其事 衆人所皆可爲而任不專己
又其爲與不爲 國之利害不繫焉者如是로되 而不顧其親이면 雖不以爲利라도 猶曰 不孝어든 況因而利之乎
夫能事其親以孝然後 能事其君以忠이니 若烏震者 可謂大不孝矣로다 尙何有于忠哉리오


01. 烏震傳記
烏震冀州 信都 사람이다. 젊은 시절 趙王 王鎔을 섬겨 軍卒이 되었는데 점차 戰功으로 裨校에 승진하여 符習의 군대에 소속되었다.
부습이 黃河 가에서 莊宗을 수행하였을 때 王鎔張文禮에게 시해되자 오진이 부습을 수행하여 장문례를 토벌하였는데 그의 집이 趙州에 있었다.
장문례가 오진의 모친과 아내 및 아들 등 10여 사람을 잡아두고서 오진에게 〈항복하라〉 불렀는데도 오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장문례가 이에 그들의 손과 코를 모두 잘라내되 자르기만 하고 죽이지는 않은 채 풀어주어 부습의 軍營에 가게 하니 부습의 軍中 사람들이 모두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진은 한 번 통곡하고 그치고는 憤激하며 스스로 분발하여 몸소 병졸들보다 앞장서서 하였다. 나라 군대가 鎭州를 공격하여 격파하자 오진이 戰功으로 刺史에 배수되어 深州趙州의 자사를 역임하였다.
烏震은 사람됨이 순박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春秋左氏傳≫에 통달하였고 짓기를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는데,
刺史가 되어서는 淸廉하고 公平하게 政事를 펼친다는 평판이 있어 冀州刺史로 승진하여 北面水陸轉運使兼任하였다.
明宗(李嗣源)이 그의 명성을 듣고 발탁하여 河北道副招討使에 배수하고 寧國軍節度使를 맡겨 房知溫을 대신하여 盧臺軍을 지키게 하였다.
그가 처음 부임하였을 때 戍兵 龍晊 등이 난을 일으켜 피살되니 太師에 추증되었다.
오호라! 에 따라 행하면 둘 다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이미 말한 적이 있거니와 烏震과 같은 자는 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심하구나, 오진이 熟考하지 못한 것이! 무릇 남의 祿을 먹고 남의 일을 맡아, 그 하는 일이 자신이 전담하는 책임이 있으면 그 국가의 利害가 자신이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거니와,
그 일을 하는 것이 비록 국가에 利益이 있다 하더라도 그 어버이에게 危害를 끼치는 일이라면 오히려 그 녹을 사양하고 떠나야 할 것이다. 하물며 그 일이 보통 사람들이 모두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책임을 자신이 전담하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자신이 하거나 하지 않거나 간에 국가의 이해가 관계되지 않음이 이와 같은데도 자신의 어버이를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비록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해도 오히려 不孝라고 할 것인데 하물며 이를 통해 이익을 도모하려 함에 있어서이겠는가.
무릇 로써 자신의 어버이를 섬긴 뒤에 자신의 임금을 으로써 섬길 수 있는 것이니 오진과 같은 자는 매우 불효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하니 忠誠스러운 점이 어디 있겠는가.


역주
역주1 烏震傳 : 烏震(?~? 冀州 信都 사람이다. 오진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59 〈唐書 第35 列傳11〉과 ≪新五代史≫ 卷26 〈唐臣傳 第14〉에 실려 있는데 둘 다 300자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이다. 오진의 事跡에서 특징적인 점은 그가 忠孝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歐陽脩가 이에 대해 史評까지 가한 것은 충과 효가 相衝하는 데서 발생하는 심각한 윤리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忠孝兩全’의 문제는 明宗 李思源의 아들 李從璟을 두고 구양수가 앞서 논한 적이 있다. 이종경은 莊宗의 휘하에 있었는데 명종이 반란을 일으켜 장종을 치자 당시 임금이었던 장종과 부친 이사원 사이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였다.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장종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명종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결국 元行欽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이종경의 모범적인 사례를 놓고 구양수는 충효를 실천할 때 마음에 私와 義를 구분하여 義를 따르면 충과 효 둘다 온전히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구양수는 몸이 임금에게 있을 때와 부친에게 있을 때의 義에 따른 處身 방법을 구체적으로 예시한 뒤 이종경이 의를 따라 죽었다고 稱賞하였다.
한편 이종경과는 정반대의 사례가 바로 오진의 처신이라고 할 수 있는바, 구양수는 그의 행위가 내포하고 있는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비판하였다. 구양수는 오진이 모친과 처자식에게 가해지는 危害를 무릅쓰고 張文禮를 공격하였던 일이 義를 따르지 않고 私利를 추구하려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구양수는 어버이에게 해가 미치는 상황에서 신하로서 義에 따른 처신 방법을 논한 뒤, 효를 실천하는 자가 충도 실천할 수 있다고 斷言하면서 오진의 그릇된 행위를 깊이 聲討하였다.
≪구오대사≫에도 오진에 대한 史臣의 論評이 있어 참고가 된다. 사신은 오진이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은 일을 매우 어질지 못하다고 질타하면서 그가 비록 樂羊의 행위를 사모하기는 하였으나 어찌 그것이 文侯를 섬기는 의리가 되겠느냐고 비판하였다. 악양은 戰國시대 魏나라의 장수로, 문후의 명으로 中山을 치려고 할 때 그 아들이 중산에 있었다. 중산 임금이 그 아들을 삶아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내자 악양은 그것을 먹었고 이후 3년 만에 중산을 함락하였는데, 그 사이에 신하들의 비방이 들끓었는데도 문후는 악양을 믿고 기다려주었다고 한다. 오진과 악양은 功名에 눈이 멀어 가족을 버린 점에서 같았던 것이다.
역주2 符習 : ?~933. 趙州 昭慶 사람으로 後唐의 大臣이다. 젊은 시절 趙王 王鎔을 섬겨 軍校가 되었다가 後梁에서 벼슬하여 巴州刺史가 되었다. 뒤에 後唐 莊宗에게 투항하여 天平軍節度使‧東南面招討使를 맡았고 앞뒤로 安國節度使‧平盧節度使‧天平節度使‧宣武節度使를 역임하였다. 평소 安重誨에게 시기를 받아 太子太師로 치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역주3 遷冀州刺史 : ≪舊五代史≫에는 ‘冀州’가 ‘易州’로 되어 있다.(≪舊五代史考異≫)
역주4 房知溫 : ?~936. 字는 伯玉이다. 後唐 때 泰寧軍節度使‧靑州節度使를 지냈고 李紹英이라는 성명을 하사받았고 東平王에 봉해졌다. 天福 元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太尉에 추증되었다.
역주5 贈太師 : ≪舊五代史≫에는 ‘太師’가 ‘太傅’로 되어 있다.(≪舊五代史考異≫)
역주6 忠孝以義則兩得 吾旣已言之矣 : 본서 권3 〈唐從璟傳〉에 보인다.
역주7 (忍)[思] : 저본에는 ‘忍’으로 되어 있으나, 사고전서본과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思’로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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