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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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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1. 증공曾鞏에게 보내 씨족氏族에 대해 논한 편지
明辨이라
분명하게 변석辨析하였다.
脩白하노라
는 말씀드립니다.
貶所僻遠하야 不與人通이러니 辱遣專人惠書甚勤하니 豈勝媿也리오
적소謫所가 외지고 멀어 사람들과 소식을 통할 수 없었는데, 특별히 사람을 보내 편지를 보내주심이 매우 지성스러우니, 부끄러움을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
示及見託撰次碑文事 脩於人事多故하야 不近文字 久矣 大懼不能稱述世德之萬一하야 以滿足下之意
편지에서 비문碑文찬술撰述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은, 제가 인사人事에 변고가 많아 글 짓는 일을 가까이하지 않은 지가 오래라 세덕世德의 만분의 일도 제대로 기술하여 족하의 마음에 들게 하지 못할까 크게 두렵습니다.
然近世士大夫於氏族 尤不明其遷徙世次하야 多失其序하고 至於하야도 亦或不眞이라
그러나 근세 사대부들이 씨족氏族에 있어서 그 천사遷徙세차世次를 잘 알지 못하여 보계譜系의 순서를 잘못 쓰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처음 봉지封地를 받아 성씨姓氏를 얻은 것조차도 혹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如足下所示之曾孫樂 爲漢하고 至四世孫據하야 遭王莽亂하야 始去都鄕而家豫章이라하되 考於史記 皆不合이라
족하가 보여주신 글에 “증원曾元의 증손인 증악曾樂나라 도향후都鄕侯가 되었고, 4세손世孫 증거曾據에 이르러 왕망王莽난세亂世를 만나 비로소 도향都鄕을 떠나 예장豫章에 가서 살았다.”라고 하였는데, 역사의 기록을 고증해보면 모두 사실에 맞지 않습니다.
蓋曾元去漢 近二百年이니 自元至樂 似非曾孫이라
증원이 살던 때는 나라 때와 거의 200년에 가까운 기간이니, 증원으로부터 증락까지의 기간을 보면 아마도 증락이 증원의 증손은 아닐 듯합니다.
然亦當仕漢初 則據遭莽世하야 失侯而徙 蓋又二百年이니 疑亦非四世
뿐만 아니라 증락은 응당 나라 초기에 벼슬하였을 터인데, 왕망의 세상을 만나 도향후의 작위를 잃고 이사한 때와는 또 200년의 거리가 있으니, 역시 4는 아닐 듯합니다.
推之컨대 雖大功德之侯라도 亦未有終前漢而國不絶者하며 亦無自高祖之世至平帝時侯纔四傳者
사기史記》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로 추측해보건대 비록 큰 공덕을 세운 일지라도 전한前漢시대가 끝날 때까지 봉국封國을 잃지 않은 경우는 없었으며, 또한 고조高祖 때로부터 평제平帝 때에 이르기까지 의 작위가 겨우 4를 이어 전해진 경우도 없습니다.
宣帝時 分宗室趙頃王之子景하야 封爲都鄕侯하니 則據之去國 亦不在莽世 而都鄕已先別封宗室矣
선제宣帝 때에 종실宗室 조경왕趙頃王의 아들 유경劉景분봉分封하여 도향후都鄕侯를 삼았고 보면, 증거曾據도향都鄕을 떠난 것도 왕망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 아니고 도향에는 이미 이보다 앞서 종실의 사람을 따로 했던 것입니다.
又樂據姓名 皆不見於年表하니 蓋世次久遠而難詳如此
게다가 증락과 증거의 성명은 모두 〈십이제후연표〉에 보이지 않으니, 세차世次가 오래되어 자세히 알기 어려움이 이와 같습니다.
蓋其支庶自別하야 有爲曾氏者爾 非鄫子之後皆姓曾也 蓋今所謂鄫氏者是也
에서 나온 증씨曾氏의 경우는 지서支庶가 절로 나뉘어 증씨曾氏가 된 가 있는 것이지, 증자鄫子의 후손이 모두 증씨曾氏 을 쓴 것은 아니니, 오늘날 증씨曾氏라 하는 성씨가 바로 이것입니다.
據國史所書컨대 嘗以西京作坊使 爲江浙發運制置茶鹽使하니 乃至道之間耳어늘
양윤공梁允恭국사國史에 쓰인 기록에 의거해보면, 일찍이 서경작방사西京作坊使로서 강절발운제치다염사江浙發運制置茶鹽使가 되었으니, 이는 지도至道(995~997) 연간의 일입니다.
今云洛苑使者 雖且從所述이나 皆宜更加考正이라
그런데 지금 낙원사洛苑使라 한 것은 비록 우선 기록을 따른 것이긴 하지만 모두 다시 고증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無文字尋究하야 不能周悉하니 幸察하라
산골 고을에 상고詳考할 서책이 없어 자세히 알려드리지 못하니, 양찰諒察하시기 바랍니다.
역주
역주1 與曾鞏論氏族書 : 이 글 끝 부분에 “산골 고을에 詳考할 글이 없다.[山州無文字尋究]”라 하였고, 歐陽脩가 曾鞏에게 보낸 다른 편지인 〈與曾舍人〉에 “비록 오래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누차 편지와 새로 지은 글을 보내주셨다.[雖久不相親 而屢辱書及示新文]” 한 것으로 보아, 이 글은 慶曆 6년(1046)에 썼을 것이다.
曾鞏은 자가 子固이고, 그 역시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南豊 사람이므로 曾南豊이라고도 불린다.
역주2 始封得姓 : 옛날의 제도에 封地를 받으면 그 땅으로 인해 姓氏를 얻게 된다.
역주3 曾元 : 孔子의 제자인 曾參의 아들이다.
역주4 都鄕 : 漢나라 때 설치한 縣으로 常山郡에 있었다. 지금의 河北省 안에 있었다.
역주5 諸侯年表 : 《史記》 권14 〈十二諸侯年表〉를 가리킨다.
역주6 曾氏出於鄫者 : 《姓氏略考》에 《世本》을 인용하여, “曾氏는 譜系가 姒姓에서 나왔는데, 夏나라 少康 때 少子인 曲列을 鄫 땅에 封했다. 후에 莒나라에 의해 멸망되고 鄫의 태자 巫가 魯나라 벼슬하면서 鄫자에서 부수인⻏을 떼고 曾으로 썼다.”라고 하였다.
역주7 楊允恭 : 宋나라 때 錦竹 사람으로, 太宗 때 廣連都巡檢使가 되었고, 咸平 연간에 荊湖江浙都巡檢使가 되었다. 《宋史》 〈楊允恭傳〉에 의하면, 淳化 5년(994)에 양윤공이 西京作坊使가 되었고, 그 후에 詔命으로 轉運使가 되었다고 하였다. 歐陽脩가 지은 曾鞏의 조부 曾致堯의 神道碑銘인 〈尙書戶部郞中贈右諫議大夫曾公神道碑銘〉에 “洛苑使 증치요가 言事로 총애를 받아 그의 말은 황제가 모두 들어주었다. 일이 하달되면 공은 그냥 두고 시행하지 않으니, 양윤공이 이 문제를 호소하였다. 황제가 사람을 보내 공에게 물으니, 공이 불가한 까닭을 갖추어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8 山州 : 滁州를 가리키는 듯하다. 구양수의 〈醉翁亭記〉에 “저주를 둘러싼 것은 모두 산이다.”라고 하였고, 구양수가 慶曆 6년(1046)에 증공에게 보낸 편지인 〈與曾舍人〉에 “山州에서 붕우들과 교유가 적다.”라고 하였는데, 이해에 구양수가 저주에 있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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