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本之以風土之瘠하고 繼之以登遊之舊하야 以感園之廢興이라
脩友李公佐
는 有亭在其居之東園
이라 에 以書抵洛
하야 命脩志之
러라
然怪其山川土地
가 旣無高深壯厚之勢
하고 封域之廣
이 與
相介
하야 纔一二百里
니 非有古彊諸侯制度
로되 而爲大國
은 何也
오
其春秋世
에 未嘗通中國盟會朝聘
이라가 하고 하고 其後乃希見
이라
故於今
而實下州
요 山澤之産
이 無美材
하며 土地之貢
이 無上物
이라
朝廷達官大人
이 自
出而顯者
가 往往皆是
로되 而隨近在天子千里內
하야 幾百年間
에 未出一士
하니 豈其痺貧薄陋
가 自古然也
아
雖豐年이라도 大族厚聚之家가 未嘗有樹林池沼之樂하야 以爲歲時休暇之嬉로되
獨城南李氏爲著姓이라 家多藏書하야 訓子孫以學이라
予爲童子에 與李氏諸兒로 戱其家하야 見李氏方治東園에 往求美草를 一一手植하고 周視封樹하야 日日去來園間甚勤이러라
李氏壽終에 公佐嗣家하야 又搆亭其間하야 益修先人之所爲라
予亦壯
하야 不復至其家
러니 已而
하고 游京師
하야 久而乃歸
하야 復行城南
하니 公佐引予登亭上
이라
周尋童子時所見하니 則樹之孼者抱하고 昔之抱者枾하며 草之茁者叢하고 荄之甲者今果矣라
噫라 予方仕宦奔走하니 不知再至城南하야 登此亭이 復幾閏이로다
幸而再至
면 則東園之物
이 又幾變也
리니 計亭之梁木其蠹
하고 瓦甓
溜
하고 石物其泐乎
아
06. 이수재李秀才의 동원정東園亭에 대한 기문記文
먼저 풍토가 척박한 것으로 근본을 삼고 정자에 올라 노닐던 옛 일로 이야기를 이어서 동원東園의 흥폐에 대한 감회를 말하였다.
나의 벗 이공좌李公佐는 집의 동쪽 동산에 정자가 있는데, 올해 봄에 낙양洛陽으로 편지를 보내 나에게 기문記文을 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씨李氏는 대대로 수주隨州에 살았으니, 수주隨州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한동군漢東郡 지역의 대국大國으로 일컬어졌다.
노魯 환공桓公 이후에 초楚나라가 비로소 강성해졌으니 수隨나라가 근접해 있었으므로 늘 서로 전쟁을 하여 승패를 다퉜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수隨나라의 산천과 토지가 이미 고심高深하거나 웅장한 형세가 없고, 봉역封域의 넓이가 운鄖나라와 요蓼나라 사이에 끼여 있어 겨우 1, 2백 리뿐이니, 옛날 강성했던 제후의 제도制度가 있는 것도 아닌데, 대국大國이 된 것은 어째서인가.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중국中國과 내왕하여 회맹會盟과 조빙朝聘을 한 적이 없다가 노魯 희공僖公 20년에 비로소 《춘추春秋》에 드러나 정벌당했다는 기록이 있고, 애공哀公 원년元年에 비로소 제후국들과 맹약하여 제후의 반열에 들었으나 한 번 회동하고는 끝났고, 그 뒤에는 또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형이荊夷에 궁벽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 대개 포소蒲騷, 운鄖, 요蓼와 같은 소국의 사이에서 유달리 클 뿐이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비록 번진藩鎭이라 명명하지만 실제는 하주下州일 뿐이고, 산택山澤의 물산物産은 좋은 물건이 없으며 토지의 공물貢物은 상등上等의 물건이 없다.
조정의 달관達官과 대인大人들은 민주閩州 변방 오악五嶽 이남의 지역으로부터 나와 현달한 자가 거의 모두인데, 수주隨州는 천자의 천 리 기내畿內에 근접해 있으면서 거의 백 년간 한 명의 선비도 배출하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빈곤하고 천속賤俗한 것이 예로부터 그랬기 때문이리라.
내가 어릴 때에 생계를 도모하려 강남江南에 와서 이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풍토에 대해 잘 말할 수 있다.
토지는 척박하고 건조하였기에 백성들의 생활이 풍요롭지 못하였다.
그래서 비록 풍년이라도 대족大族으로 수확이 많은 집안조차 일찍이 숲이나 못 등지에서 연회를 열어 세시歲時에 휴식을 즐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성城의 남쪽 이씨李氏만은 명망 있는 성씨였으므로 집안에 장서藏書가 많아 학문으로 자손을 훈도訓導하였다.
나는 동자童子 시절에 이씨李氏의 아이들과 그 집에서 놀면서 이씨李氏가 바야흐로 동원東園을 가꿀 때에 아름다운 화초들을 가서 구하여 하나하나 손수 심고, 날마다 세심히 살펴 나무를 가꾸며 매일 동원東園을 오가는 것이 매우 부지런함을 보았다.
이씨李氏가 세상을 떠나자 공좌公佐가 집안을 계승하여 또 그 동원東園에 정자를 짓고서 선인先人이 만들어놓은 곳을 더욱 잘 가꾸었다.
나도 장성하여 다시 그 집을 방문하지 않았었는데, 이윽고 한동군漢東郡으로 떠나 객지생활을 하였고 경사京師에 가 있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비로소 돌아와 다시 성城의 남쪽으로 가보니 공좌公佐가 나를 이끌고 정자 위에 올라갔다.
동자童子 시절에 보던 것을 두루 살펴보니 묘목이었던 나무는 아름드리가 되었고, 옛날의 아름드리나무는 그루터기가 되었으며, 막 자라던 새싹들은 떨기를 이루었고, 껍질에 싸여 있던 움들은 이제 열매를 맺고 있었다.
저곳에서 노는 아이가 누구냐고 물어보니 내가 동자童子 때의 나이와 같은 아들이었다.
함께 옛날 노닐던 때를 되짚어 계산해보니 지금 21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홀연 어제의 일과 같으므로 인하여 탄식하고 배회하며 떠날 수 없었다.
아, 나는 바야흐로 벼슬살이에 분주하니, 성城 남쪽으로 다시 와 이 정자에 오르는 것이 다시 몇 년 뒤나 될지 모르겠다.
다행히 다시 이곳에 이른다면 동원東園의 사물들이 또 거의 변했을 것이니, 헤아려보건대 정자의 들보는 좀먹고 기와와 벽돌은 물이 새며 석조물은 갈라지지 않겠는가.
수주隨州는 비록 누추한 고을이나 나의 고향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자란 곳이니 어찌 수주隨州를 마음에서 잊을 수 있겠는가.
공좌公佐는 학문을 좋아하고 훌륭한 행실이 있어 향리鄕里에서 추숭推崇하고 나와는 벗이다.
“이 글은 곧장 써내려가서 본론을 이야기할 때에 수습하지 않았다.
남을 위하여 한 편의 원기園記를 지음에 곧장 군郡과 국國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였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배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