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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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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1. 관문전대학사 행병부상서 서경유수 증사공 겸시중 안공의 신도비명
至和元年六月 觀文殿大學士 行兵部尙書 西京留守 以疾歸于京師하야 八月 疾少間入見하니
지화至和 원년元年(1054) 6월에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 행병부상서行兵部尙書 서경유수西京留守 임치공臨淄公이 병으로 경사京師에 돌아왔다가 8월에 병이 조금 낫자 입조入朝하여 천자를 알현하니,
天子曰 噫 予舊學之臣也라하고
천자가 말하기를 “아, 내가 옛날에 가르침을 받은 신하였다.”라 하고,
乃留侍講하야 詔五日一朝前殿이러니
이에 머물며 이영각邇英閣에서 시강侍講하게 하고서 5일에 한 번 정전正殿에서 조회하라고 조서를 내렸다.
明年正月疾作하야 不能朝
이듬해 정월에 병이 생겨 조회할 수 없었다.
勅大醫하야 朝夕往視하고 有司除道하야 將幸其家어늘
태의太醫에게 칙명을 내려 아침저녁으로 가서 살펴보게 하고, 유사有司에게 길을 청소하게 하여 천자가 장차 안공晏公의 집에 행행行幸하려고 하였다.
公歎曰 吾無狀 乃以疾病憂吾君이라하고 卽馳奏曰 臣疾少間하니 行愈矣라하니 乃止하다
그러자 안공晏公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보잘것없는 내가 질병으로 우리 군주에게 근심을 끼쳤다.”라 하고, 곧 서둘러 사람을 보내 아뢰기를 “신이 병이 조금 호전되었으니 곧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이에 천자가 행행行幸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其月丁亥 以公하니 天子震悼하야 亟臨其喪하야 以不卽見公爲恨하고 贈公司空兼侍中하고 諡曰元獻이라
그달 정해일丁亥日에 공이 훙서薨逝했음을 아뢰니 천자가 몹시 슬퍼하여 급히 공의 집에 가서 조문하고 즉시 공을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고, 사공司空 겸시중兼侍中증직贈職하고 원헌元獻이란 시호를 내렸다.
유사有司가 하루 동안 철조輟朝할 것을 청하자 조서를 내려 특별히 이틀 동안 철조輟朝하게 하였다.
以其年三月癸酉葬公于麥秀鄕之北原이라
그해 3월 계유일癸酉日허주許州 양적현陽翟縣 맥수향麥秀鄕의 북쪽 언덕에 공을 안장安葬하였다.
旣葬 賜其墓隧之碑首曰 舊學之碑라하고 旣又勅史臣脩考次公事하야 具書于碑下
장례를 마치자 ‘구학지비舊學之碑’라고 쓴 묘비의 액자額字를 하사하고, 이윽고 또 사신史臣구양수歐陽脩에게 공의 사적을 상고하고 서술하여 아래에 모두 기록할 것을 명하였다.
臣脩伏讀國史라가 見眞宗皇帝時 天下無事 天子方推讓功德하야 祠祀天地山川하고 講禮樂하야 以文頌聲이러니 而儒學文章儁賢偉異之人出이라
구양수歐陽脩가 삼가 국사國史을 읽다가 진종眞宗황제 때에 천하가 무사無事하였는지라 천자가 바야흐로 공덕功德을 미루어 사양하고서 천지天地산천山川에 제사 지내고, 예악禮樂을 강론하여 문치로 칭송되었는데 어질고 훌륭한 유학자儒學者문장가文章家들이 배출되었음을 보았다.
公世家江西之臨川하야 年始十四 一日起田里하야 進見天子하니 時方親閱天下
공은 대대로 강서江西임천臨川에 살면서 나이 겨우 14세에 하루아침에 전리田里에서 일어나 나아가 천자를 알현했으니, 이때에 바야흐로 천자가 천하의 공사貢士를 직접 검열하고 있었다.
會廷中者千餘人 與夫衛官 擁列圜視하되 公不動聲氣하고 操筆爲文辭하야 立成以獻하니 天子嘉賞하야이라
조정에 모인 천여 명과 궁신宮臣과 호위하는 군관들이 빙 둘러 앉아 보고 있는데도 공은 음성과 기색이 동요되지 않고 붓을 잡고 글을 지어 즉시 완성하여 바치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을 하사하였다.
遂登館閣掌書命하야 以文章爲天下所宗이러니
마침내 관각館閣에 올라 조서詔書명령命令을 관장하여 문장으로 천하에 존숭尊崇을 받았다.
逮陛下養德東宮하야 先帝選用臣屬 卽以公遺陛下
인종폐하仁宗陛下동궁東宮에서 덕을 기르고 있을 때에 미쳐 선제先帝께서 동궁東宮의 신하를 선발할 때에 즉시 공을 폐하陛下에게 남겨주셨다.
由王官宮臣으로 卒登宰相 凡所以輔道聖德하며 憂勤國家 有舊有勞 自始至卒五十餘年이라
왕관王官궁신宮臣을 거쳐 마침내 재상에 올랐는데, 성상의 덕을 도와 인도하며 국가의 일에 수고함에 오랫동안 노고한 것이 처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50여 년이었다.
公旣薨 而先帝之名臣與陛下東宮之舊人 皆無在者하니 宜其褒寵優異하야 比公이라
공이 이미 훙서薨逝하자 선제先帝명신名臣들과 폐하陛下의 동궁시절 옛 신하들이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 총애하고 우대하여 감반甘盤을 견준 것은 당연하다.
臣脩 幸得執筆史官하야 奉明詔하야 謹昧死上臨淄公事하노이다
구양수歐陽脩는 다행히 사서史書를 집필하는 관원이 되어 영명英明한 조서를 받들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임치공臨淄公의 일을 올립니다.
曰 公 諱殊 字同叔이요 姓晏氏
이고, 동숙同叔이고, 안씨晏氏이다.
其世次晦顯하고 徙遷不常이라
가세家世의 세차는 분명치 않고, 거주지는 자주 옮겨 일정하지 않았다.
自其高祖諱墉 擧進士하고 卒官江西 始著籍于이러니 其後三世不顯이라
고조부 함통咸通 연간에 진사進士가 되고 마침내 강서江西에서 관직을 마침으로부터 비로소 고안高安관향貫鄕으로 삼았는데, 그 후 3세 동안 현달하지 못하였다.
曾祖諱延昌 又徙其籍于臨川하고 祖諱郜 追封英國公하고 考諱固 追封秦國公하니 自曾祖已下 皆用公貴하야 累贈이라
증조부 연창延昌은 또 임천臨川으로 관향貫鄕을 옮겼고, 조부 영국공英國公추봉追封되었으며, 부친 진국공秦國公추봉追封되었으니, 증조부로부터 이하는 모두 현달顯達함으로 인하여 누차 증직을 받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태사太師 중서령中書令 겸상서령兼尙書令이 되었다.
曾祖妣張氏 이요 祖妣傅氏 許國太夫人이요 妣吳氏 唐國太夫人이라
증조모 장씨張氏진국태부인陳國太夫人이요, 조모 부씨傅氏허국태부인許國太夫人이요, 모친 오씨吳氏당국태부인唐國太夫人이다.
公生七歲 知學問하고 爲文章하니 鄕里號爲神童이라
공은 태어나 7세에 학문學問을 알았고 문장을 지었으니, 향리鄕里에서 신동神童이라 불렀다.
하니 眞宗召見하야 旣賜出身하고 後二日 又召試詩賦論하니 公徐啓曰 臣嘗私習此賦
승상丞相 장문절공張文節公강서江西안무安撫할 때에 공을 보고서 조정에 보고하니, 진종眞宗이 불러 보고서 이미 출신出身을 내려주고 이틀 뒤에 또 불러 면전에서 을 시험하니, 공이 천천히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이 를 제 나름대로 익혔습니다.
不敢隱이로소이다하니
감히 숨기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眞宗益嗟異之하야 因試以他題하고 以爲祕書省正字하야 置之하야 使得悉讀祕書하고 命故하야 視其學하다
진종眞宗이 더욱 찬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인하여 다른 시제試題로 시험해보고 비서성정자祕書省正字로 삼고는 비각祕閣에 머물게 하여 으로 하여금 비서祕書들을 모두 읽어보게 하고 복야僕射 진문희공陳文僖公에게 명하여 의 학문을 살펴보게 하였다.
明年獻其所爲文하니 召試中書하고 遷太常寺奉禮郞하다
이듬해에 공이 지은 글을 올리니 불러 중서성中書省에서 시험하고는 태상시봉례랑太常寺奉禮郞으로 옮겼다.
하야 推恩할새 遷光祿寺丞하고 數月 充集賢校理하다
태산太山봉사封祀하여 추은推恩할 때에 광록시승光祿寺丞으로 옮겼고, 몇 개월 뒤에 집현원교리集賢院校理에 충원되었다.
明年 遷著作佐郞이러니 丁父憂하야 去官이라
이듬해에 저작좌랑著作佐郞으로 옮겼는데, 부친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
已而眞宗思之하야 卽其家하야 命淮南發運使하야 具舟送至京師하야 從祀大淸宮하며하고 하다
이윽고 진종眞宗이 공을 생각하여 공의 집에서 기복起復하여 회남발운사淮南發運使에게 명하여 배를 마련하여 경사京師로 보내게 하고는 대청궁大淸宮 제사에 참여하게 하고 비의緋衣은어銀魚를 하사하였고, 동판태상례원同判太常禮院으로 삼았다.
又丁母憂하야 求去官服喪한대 不許러라
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나 상복을 입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今天子始封昇王 公以選爲府記室參軍하고 再遷左正言하야 直史館하다
지금 천자께서 처음 승왕昇王에 봉해졌을 때에 공은 부기실참군府記室參軍에 선발되었고 다시 좌정언左正言으로 옮겨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다.
今天子爲皇太子 以戶部員外郞充太子舍人하야 賜金紫하고 知制誥判集賢院하고 遷翰林學士하야 充景靈宮判官 太子左庶子 兼判太常寺 知禮儀院하다
지금 천자께서 황태자로 있을 때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있던 공을 태자사인太子舍人보임補任하고 금대金帶자의紫衣를 하사하였고, 지제고知制誥 판집현원判集賢院으로 삼았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옮겨 경령궁판관景靈宮判官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 겸판태상사兼判太常寺 지례의원知禮儀院보임補任하였다.
公旣以道德文章으로 佐佑東宮하니 眞宗有所諮訪 多以方寸小紙 細書問之
공이 이미 도덕道德문장文章으로 동궁東宮을 보좌하니, 진종眞宗께서 자문할 것이 있으면 사방 한 치 되는 작은 종이에 잔글씨로 써서 공에게 물은 것이 많았다.
由是 參與機密하야 有所對 必以其稿進하야 示不洩이러니
이로부터 국사의 기밀에 참여하여 대답할 때마다 반드시 천자가 써준 그 원고를 올려 누설하지 않았음을 보였다.
其後悉閱眞宗閣中遺書 得公所進稿하야 類爲八十卷하야 藏之禁中하니 人莫之見也러라
그 후에 진종眞宗어각御閣에 있던 유서遺書를 자세히 열람하면서 공이 올렸던 원고를 찾아서 분류하여 80권을 만들어 금중禁中에 보관하니 사람들은 볼 수가 없었다.
처음 진종眞宗유조遺詔장헌명숙태후章獻明肅太后군국軍國의 일을 임시로 대행하게 하였다.
宰相 樞密使 各欲獨見奏事하니 無敢決其議者
재상 정위丁謂추밀사樞密使 조이용曹利用이 저마다 태후를 알현하여 일을 아뢰고자 하니, 감히 의론을 결정하는 자가 없었다.
公建言群臣奏事太后者 垂簾聽之하니 皆毋得見이라하니 議遂定이러라
공이 건의하기를 “군신들이 태후에게 일을 아뢸 경우에는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니 모두 얼굴을 뵐 수 없다.”라고 하니, 의론이 마침내 정해졌다.
乾興元年 拜右諫議大夫 兼侍讀學士하고 遷給事中 景靈宮副使 判吏部流內銓하야 以易侍講崇政殿하고 遷禮部侍郞 知審官院하야 爲樞密副使하고
건흥建興 원년元年(1022)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겸시독학사兼侍讀學士에 제수되었고, 급사중給事中 경령궁부사景靈宮副使 판이부유내전判吏部流內銓으로 옮겨 시강숭정전侍講崇政殿으로 바뀌었고, 예부시랑禮部侍郞 지심관원知審官院으로 옮겨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었다.
遷刑部侍郞하야 上疏論不可爲樞密使하다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옮겨 장기張耆추밀사樞密使로 삼는 것은 불가하다고 상소上疏하였다.
由是 忤太后旨러니 坐以笏擊其僕하야 誤折其齒하야하고 留守南京하야 大興學校하야 以敎諸生하다
이 일로 말미암아 태후太后의 뜻을 거슬렀는데, 로 노복을 때려 실수로 노복의 치아를 부러뜨린 일로 죄를 받아 파직되었고 남경유수南京留守가 되어 크게 학교를 일으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自五代以來 天下學廢러니 興自公始
오대五代 이래로 천하에 학교가 폐해졌는데, 학교의 흥기가 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召拜御史中丞하고 改兵部侍郞 兼祕書監資政殿學士 翰林侍讀學士하고하다
소명을 받아 어사중승御史中丞에 배수되었고 병부시랑兵部侍郞 겸비서감자정전학사兼祕書監資政殿學士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 관직이 바뀌었고, 천성天聖 8년(1030) 예부禮部공거貢擧를 주관하였다.
明年爲三司使하고 復爲樞密副使하야 未拜 改參知政事하고 遷尙書左丞하다
이듬해에 삼사사三司使가 되었고 다시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었지만 배수되기도 전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바뀌었고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옮겼다.
太后謁太廟할새어늘 太后以問公한대하다
태후太后태묘太廟에 배알할 때에 곤의袞衣관면冠冕 입기를 청하는 자가 있었는데, 태후太后가 공에게 묻자 공은 《주관周官》에 기록된 왕후王后의 복장을 가지고 대답하였다.
太后崩 大臣執政者皆罷
태후太后붕어崩御하자 대신집정大臣執政들이 모두 파직되었다.
以公爲禮部尙書 知亳州하고 徙知陳州하고 遷刑部尙書하고 復召爲御史中丞하고
공을 예부상서禮部尙書 지박주知亳州로 삼고 지진주知陳州로 옮겼고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옮겼는데, 다시 불러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삼았다.
又爲三司使 知樞密院事하고 拜樞密使하고 再加檢校太尉 同中書門下平章事러라
삼사사三司使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가 되고 추밀사樞密使에 제수되고 검교태위檢校太尉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거듭 제수되었다.
三年三月 遂以刑部尙書 居相位하야 充集賢殿大學士 兼樞密使하다
경력慶曆 3년(1043) 3월에 마침내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겸추밀사兼樞密使보임補任되었다.
自公復召用으로하야 師出陝西 天下弊於兵이라
공이 다시 소명召命을 받아 등용된 뒤로 조원호趙元昊가 반란을 일으켜 군사가 섬서陝西로 출동함에 천하가 전쟁으로 피폐해졌다.
公數建利害하야 請罷하고 兼以하야 使得應敵爲攻守하니 皆有法이라
공이 수차례 이해利害를 건의하여 감군監軍을 폐지하고 겸하여 진도陣圖를 장수들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적과 대치하여 공격과 수비를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재용財用의 지출에 대한 약속을 제정할 것을 청하니 모두 법도가 있었다.
天子悉爲施行하야 自宮禁先하야 以率天下하니 而財賦之職 悉歸有司
천자가 모두 시행하여 궁금宮禁으로부터 선행하여 천하를 통솔하니 재부財賦직무職務가 모두 유사有司에게로 돌아갔다.
끝내 모책謀策으로 원호元昊를 신하로 복종시켜 그로 하여금 약속을 따르게 하고 마침내 왕호王號를 돌려주었다.
公爲人剛簡하고 遇人必以誠하야 雖處富貴라도 如寒士하야 罇酒相對 歡如也러라
공의 사람됨은 강직하고 소탈하였으며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성심을 다하여 자신이 비록 부귀하더라도 한미한 선비처럼 처신하여 술 한 병을 놓고 상대와 마주하더라도 즐거워하였다.
得一善 稱之如己出하니 當世知名之士 如 皆出其門이라
남의 한 가지 선이라도 들으면 자신에게서 나온 듯 칭찬하였으니, 범중엄范仲淹공도보孔道輔 등 당세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이 모두 공의 천거를 받았다.
及爲相하야 益務進賢材러라
재상이 되어서는 더욱 현재賢材를 등용하는 데 힘썼다.
當公居相府時하야 范仲淹 皆進用하고 至於臺閣하얀 多一時之賢이러라
공이 상부相府에 재임할 때에 범중엄范仲淹, 한기韓琦, 부필富弼 등이 모두 등용되었고, 〈공이 뽑은〉 대각臺閣의 인물들로 한때의 현자賢者들이 많았다.
天子旣厭西兵하고 憫天下困弊하야 奮然有意하야 遂欲因群材以更治하야 數詔大臣條天下事하야 方施行 而小人權倖皆不便이라
천자가 이미 서하西夏와의 전쟁을 오래 끄는 데 싫증나고 천하가 곤궁하고 피폐함을 근심하여 분연히 뜻을 두어 마침내 인재들을 통해 정치를 개혁하고자 수차례 대신들에게 천하의 일에 대해 조목별로 아뢰도록 조명詔命을 내렸는데, 바야흐로 시행하려고 할 때에 소인小人권행權幸이 모두 불편하게 여겼다.
明年秋 會公以事罷하고 而仲淹等相次亦皆去하니 事遂已러라
이듬해 가을에 마침 이 일로 인해 관직을 그만두고 범중엄范仲淹 등이 차례로 또한 모두 조정에서 떠나니,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公旣罷 以工部尙書 知潁州하고 徙知陳州하고 又徙許州하고
이 이미 파직됨에 공부상서工部尙書지영주知潁州가 되었고 지진주知陳州로 옮겼고 또 허주許州로 옮겼다.
三遷戶部尙書하고 拜觀文殿大學士 知永興軍하고 充一路都部署安撫使하고 徙知河南府 兼西京留守하고 累進階하야 至開府儀同三司하야 하고 爵臨淄公하야 萬二千戶 三千七百戶러라
세 번 자리를 옮겨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고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 지영흥군知永興軍에 배수되고 일로도부서一路都部署 안무사安撫使보임補任되었으며 지하남부知河南府 겸서경유수兼西京留守로 옮겼고 누차 품계가 올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이르러 봉훈封勳으로 상주국上柱國이 되고 임치공臨淄公이라는 작위爵位를 받아 식읍食邑은 12,000지만 실봉實封은 3,700였다.
公享年六十有五
공은 향년 65세였다.
自少篤學하야 至其病亟하야도 猶手不釋卷하고 有文集二百四十卷이라
어릴 때부터 돈독하게 학문을 하여 병이 심해져서도 오히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문집 240권이 있다.
嘗奉勅修上訓及眞宗實錄하고 又集類古今文章하야하다
일찍이 칙명勅命을 받아 《상훈上訓》 및 《진종실록眞宗實錄》을 편수하였고, 또 고금의 문장을 모아 분류하여 《집선集選》 200권을 만들었다.
公爲政敏하되 而務以簡便其民이라
공은 정무를 처리하는 것이 민첩하되 백성들을 간편하게 해주는 것에 힘썼다.
其於家嚴하야 子弟之見 有時하고 事寡姊孝謹하며 未嘗爲子弟求恩澤이러라
집안에서 근엄하여 자제子弟가 공을 뵙는 것이 일정한 때가 있었고, 과부가 된 누님을 섬김이 효순孝順하였으며, 일찍이 자제를 위하여 관직의 은택恩澤을 구한 적이 없었다.
其在陳州 上問宰相曰 晏某居外 未嘗有所請하니 其亦有所欲邪아한대 宰相以告公하니 公自爲表하야 問起居而已
진주陳州에 있을 때에 이 재상에게 묻기를 “안모晏某는 외직에 있을 때에 일찍이 아무것도 청한 적이 없었는데, 또한 바라는 것이 있는가?”라고 하였는데, 재상이 공에게 말해주니 공이 스스로 표문表文을 지어 황제의 안부만을 물을 뿐이었다.
故其薨也 天子尤哀悼之하야 賜予하고 以其子承裕爲崇文院檢討하고 孫及甥之未官者九人 皆命以官이러라
그러므로 공이 훙서薨逝했을 때에 천자가 더욱 애통해하며 특별히 가등加等을 하사하고, 공의 아들 승유承裕숭문원검토崇文院檢討로 삼고 관직에 오르지 못한 손자 및 생질 9명을 모두 관직에 임명하였다.
公初娶李氏 工部侍郞之女 次孟氏 屯田員外郞虛舟之女 封鉅鹿郡夫人하고 次王氏 太師尙書令之女 封榮國夫人하다
공의 초취初娶 이씨李氏공부시랑工部侍郞 허기虛己의 따님이었고, 재취再娶 맹씨孟氏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 허주虛舟의 따님으로 거록군부인鉅鹿郡夫人에 봉해졌고, 그 다음 부인 왕씨王氏태사상서령太師尙書令 의 따님으로 영국부인榮國夫人에 봉해졌다.
子八人이니 長曰居厚 早卒하고
아들은 여덟이니 장자는 거후居厚이니 대리평사大理評事이고 일찍 죽었다.
次承裕 尙書屯田員外郞이요 宣禮 贊善大夫 崇讓 著作佐郞이요 明遠祗德 皆大理評事 幾道傳正 皆太常寺太祝이라
그 다음 승유承裕상서둔전원외랑尙書屯田員外郞이고, 선례宣禮찬선대부贊善大夫이고, 숭양崇讓저작좌랑著作佐郞이고, 명원明遠지덕祗德은 모두 대리평사大理評事이고, 기도幾道전정傳正은 모두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이다.
女六人이니 長適戶部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富弼하고 次適禮部侍郞三司使하고 其四尙幼
딸은 여섯이니 장녀는 호부시랑戶部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부필富弼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예부시랑禮部侍郞 삼사사三司使 양찰楊察에게 시집갔고, 나머지 넷은 아직 어리다.
孫十有三人이라
손자는 열세 사람이 있다.
公旣樂善이요 而稱爲知人하니 士之顯于朝者 多公所薦達이요 至擇其女之所從하야도 又得二人者하니 如此 可謂賢也已로다
공은 이미 선을 좋아하였고 사람을 볼 줄 알았다고 일컬어지니, 선비 중에 조정에 현달한 사람이 대부분 공이 천거한 사람이었고, 사위를 고름에 이르러서도 또 훌륭한 두 사람을 얻었으니, 이와 같다면 현명하다고 이를 만하다.
銘曰
은 다음과 같다.
有姜之裔
강씨姜氏의 후예가
齊爲晏氏하니
나라 때에 안씨晏氏가 되었으니
齊在春秋
춘추시대에 나라에는
晏顯諸侯
안씨晏氏가 제후들에게 명성이 있었네
춘추春秋》에 환자桓子가 기록되어 있고
안영晏嬰은 공자에게 칭찬받았는데
其後無聞하야
그 후에 드러난 사람이 없어
不亡僅存이라
명맥이 겨우 이어졌네
有煒自公하야
공으로부터 찬란하게 드러나
厥聲以振하니
그 명성 크게 떨쳤으니
公之顯聲
공의 드러난 명성은
實相天子
실로 천자를 보좌하는 재상이었네
天子曰噫
천자가 말씀하기를, 아!
予考眞宗
나의 부왕父王 진종眞宗께서는
唯多名臣하야
오직 명신들이 많아
以臻盛隆이라
융성한 치세를 이루셨지
汝初事我
네가 처음 나를 섬길 때에
王官東宮으로
동궁東宮의 관원으로부터
以曁相予
나를 재상으로 보좌할 때까지
始卒一躬이라
시종 한 몸을 바쳤네
輔我以德하고
덕으로 나를 보좌하고
有勞于邦이라하다
나라에 큰 공이 있었다 하셨네
公疾在外하야
공이 병으로 지방에 있다가
來歸自洛하니
낙양으로부터 돌아오니
天子曰留하라
천자께서 말씀하시길 머물러 있으라
汝予舊學이니
그대는 나의 옛 스승이니
凡今在庭
지금 조정에는
莫如汝舊
그대만큼 오랜 정을 나눈 이가 없다
孰以畀予
누가 그대를 나에게 주었는가
惟予聖考로다
바로 부왕父王이로다
今旣亡矣
지금 그대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孰爲予老
누가 나의 원로元老인가
何以贈之
무슨 관직을 내려줄까
司空侍中이로다
사공司空시중侍中이로다.
禮則有加
예수禮數는 더해줄 수 있지만
予思何窮이리오하다
나의 그리움 끝이 있을까.
有篆其文
전문篆文으로 쓴 글이
在其碑首하고
비수碑首에 있고
天子之褒
천자의 포장褒獎
史臣有詔하니
사신史臣에게 조명詔命을 내렸으니
銘以述之하야
으로 서술하여
永昭厥後하노라
길이 후세에 밝게 전하노라
역주
역주1 : 이 글은 歐陽脩가 翰林侍讀學士 集賢殿修撰으로 재직 중이던 至和 2년(1055)에 지은 것이다. 晏公은 晏殊(991~1055)이다. 北宋 撫州 臨川 사람으로 字는 同叔, 諡號는 元獻이다.
역주2 臨淄公 : 晏殊의 封爵이다. 臨淄는 上東 淄博市에 있다.
역주3 邇英閣 : 宋나라 때의 禁苑宮에 있던 殿 이름이다. 英才를 직접 맞이한다는 뜻을 취하여 邇英閣이라 이름하였다.
역주4 : 옛날에 천자의 죽음을 崩이라 하고 제후의 죽음을 薨이라 하였다. 唐나라 제도에는 모든 3품 이상 관원의 죽음을 薨이라 하였다.
역주5 有司請輟視朝一日 詔特輟二日 : 《宋史》 〈禮志〉에 “文武官 1품과 2품의 喪에는 이틀 동안 視朝를 정지하고, 文武官 3품의 喪에는 하루 동안 視朝를 정지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職官志〉에는 “觀文殿太學士는 종2품이다.”라고 하였으니, 晏殊의 경우 응당 이틀 동안 視朝를 정지해야 하는데 有司가 무슨 이유로 하루 동안 視朝를 정지해야 한다고 말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역주6 許州陽翟縣 : 許州는 宋나라 때에는 潁昌府에 속해 있었고, 현재는 河南省 許昌에 소속되어 있다. 陽翟縣은 현재 河南 禹縣이다.
역주7 貢士 : 鄕試에 합격한 사람을 州와 縣을 통해 추천하여 京師로 보내 會試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준 선비를 이른다.
역주8 宮臣 : 東宮官을 통칭하는 말이다.
역주9 同進士出身 : 4등으로 급제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송나라 때 과거 급제자를 5등급으로 분류하여, 1등과 2등에게는 進士及第를 내리고, 3등에게는 進士出身을 내리고, 4등에게는 同進士出身을 내리고, 5등에게는 同學究出身을 내렸다.
역주10 甘盤 : 殷나라 때의 賢臣으로 殷 高宗이 즉위하기 전에 高宗의 師傅를 지냈다. 때문에 高宗이 즉위한 후 옛 은혜를 갚기 위해 그를 재상 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여기서는 晏殊가 예전에 仁宗의 師傅였고, 훗날 재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1 咸通 : 唐 懿宗 때의 연호로 860년부터 874년까지이다.
역주12 高安 : 縣 이름으로 宋나라 때에 江南西路 瑞州에 속해 있었다.
역주13 開府儀同三司……兼尙書令 : 開府儀同三司는 文官 중 散官으로 資秩은 從1품이고, 太師는 三師 중의 하나로 常置하지는 않았으며, 中書令은 中書省의 長官이고, 尙書令은 尙書省의 長官을 말한다. 송나라 때의 尙書令은 천자를 보좌하고 국정을 의논하며 詔命을 봉행하는 일을 하였다.
역주14 陳國太夫人 : 宋나라 제도에 宰相, 使相, 三師, 三公, 王, 侍中, 中書令의 從祖母, 祖母, 母는 太國夫人에 봉하였다. 《宋史 職官志》
역주15 故丞相張文節公……得公以聞 : 張知白을 가리킨다. 字는 用晦, 諡號는 文節이다. 景德 초에 江南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에 江西按撫使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晏殊를 보고 神童으로 천거하였다.
역주16 祕閣 : 端拱 元年(988)에 崇文院에 祕閣을 건립하고 三館의 眞本書籍과 書畵 등을 보관하였다.
역주17 僕射 : 관직명으로 宋나라 때에는 左右僕射를 두어 천자를 보좌하고 국정을 의논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역주18 陳文僖公 : 陳彭年(966~1017)이다. 建昌軍 南城 사람으로 字는 永年, 諡號는 文僖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는데 13살 때 《皇綱論》을 저술했다. 太宗 雍熙 2년(985)에 進士가 되었고, 刑部侍郞, 參知政事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唐紀》와 《江南別錄》 등이 있다.
역주19 封祀太山 : 封祀는 천자가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太山은 泰山이다.
역주20 起復 : 봉건시대에 관리가 喪을 당하여 아직 服을 벗지 않았는데 다시 불러 기용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21 緋衣銀魚 : 緋衣는 홍색 관복으로 宋나라 때에는 문무백관 3품 이상은 紫色의 관복을 입고, 금으로 만든 玉帶를 차며, 4품은 짙은 緋色의 관복을 입고, 5품은 옅은 緋色의 관복을 입었다. 銀魚는 銀魚符라고도 하는데, 은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符信이다. 5품 이상의 관원이 차고 다니는 것으로 品級과 신분을 표시하기도 하고 宮門 및 城門을 출입하는 符信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역주22 同判太常禮院 : 同判은 通判을 가리키는데, 宋 章獻太后 아버지의 諱가 通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通直郞을 同直郞으로 바꾸고 通州를 崇州로 바꾸었으며 通判을 同判으로 바꾸었다. 《齊東野語 避諱》
太常禮院은 唐나라 때에 詩論 및 禮制 등을 담당한 부서였는데, 宋나라 때에는 判院이나 同知院 등에서 이런 일을 관장하였다.
역주23 初眞宗遺詔……權聽軍國事 : 乾興 元年(1022) 봄에 眞宗이 병이 위독해지자 皇太后 劉氏에게 대리청정을 하여 軍國大事를 처리하라고 遺命을 남겼다.
역주24 丁謂 : 966~1037. 宋나라 蘇州 長洲 사람으로 字는 謂之였는데, 나중에 公言으로 고쳤다. 淳化 3년(992) 진사가 되었고 후에 尙書左僕射, 同中書門下平章事 등을 역임하고 晉國公에 봉해졌다. 지모가 뛰어났지만 아주 교활하였고 圖畵나 博奕, 음률에도 정통했다. 仁宗이 즉위하자 崖州司戶參軍으로 좌천되었고 光州에서 죽었다.
역주25 曹利用 : 971~1029. 宋나라 越州 寧晉 사람으로 字는 用之이다. 樞密副使, 樞密使 등을 역임하였다. 仁宗이 즉위하자 左僕射 兼侍中에 올랐는데, 功을 믿고 위세를 함부로 떨쳐 貴戚들에게 많은 원망을 받았다. 《宋史》에 傳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26 張耆 : 宋나라 開封 사람으로 字는 元弼이다. 나이 11세에 眞宗을 潛邸에서 모셨고 벼슬은 左僕射護國軍節度에까지 올랐으며 徐國公에 봉해졌다. 40세가 넘자 太子太師로 치사하였고 諡號는 榮僖이다.
역주27 天聖八年禮部貢擧 : 天聖은 宋 仁宗 때의 연호로 1023년부터 1031년까지이다. 禮部貢擧는 禮部에서 시행하는 科擧考試를 이른다.
역주28 請服袞冕 : 袞冕은 袞衣와 冠冕으로 황제의 복장이다. 태후가 이때에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복장을 입을 것을 청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역주29 以周官后服對 : 《周官》은 《周禮》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晏殊가 《周禮》에 기록되어 있는 王后의 복식 규정을 가지고 대답하여 황제의 복장을 입는 것은 옳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
역주30 慶曆 : 宋 仁宗 때의 연호로 1041년에서 1048년까지 사용하였다.
역주31 趙元昊反 : 仁宗 寶元 元年(1040)에 西夏의 趙元昊가 반란을 일으켰다. 趙元昊는 李元昊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西夏國의 군주로 1038년에 황제를 참칭하였고 國號를 大夏라고 하였다.
역주32 監軍 : 唐나라 중기 이후로 조정에서 장수들을 신임하지 못해 늘 내정의 환관을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 만들어진 관직이다. 그러나 監軍의 권세가 너무 커져 심지어 조정의 권세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이 제도를 宋나라에서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역주33 陣圖授諸將 : 宋나라 때에 장수가 출전하기 전에 조정에서 作戰陣圖를 장수들에게 주어 장수들로 하여금 반드시 陣圖에 따라 군대를 배치하고 작전에 임하게 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역주34 制財用出入之要 : 미리 財用의 용도를 규정하고 규정에 따라 재용을 지출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35 卒能以謀臣元昊……乃還其王號 : 《長編》에 “慶曆 4년 5월 丙戌日에 元昊가 비로소 稱臣하였는데 스스로 夏國王이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고, 또 “12월 乙未日에 元昊를 책봉하여 夏國主로 삼았다.”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36 范仲淹 : 989~1052. 字는 希文, 시호는 文正이다. 仁宗의 親政이 시작되자 부름을 받아 중앙에서 諫官이 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郭皇后의 폐립문제를 놓고 찬성파인 재상 呂夷簡과 대립했기 때문에 다시 지방으로 쫓겨났다. 그 뒤로 歐陽脩‧韓琦 등과 함께 呂夷簡 일파를 비난하였으며, 자기들 스스로 군자의 朋黨이라고 자칭하여 慶曆黨議를 불러일으켰다. 1038년에 元昊가 西夏에서 帝位에 오르자, 陝西經略安撫招討副使가 되어 서하 대책을 맡고, 그 침입을 막았다. 그 공으로 樞密副使가 되고, 이어 參知政事로 승진하여 내정개혁에 힘썼으나, 그를 미워하는 夏悚 일파의 저항이 강하여 다시 地方官을 역임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范文正公集》이 있다.
역주37 孔道輔 : 986~1039. 宋나라 兗州 曲阜 사람으로 字는 原魯, 초명은 延魯, 孔子의 45대손이다. 眞宗 5년(1012) 進士試에 급제하여 仙源縣을 다스렸다. 仁宗 明道 2년(1033) 御史中丞으로 郭后를 폐해야 한다고 간하다가 쫓겨나 泰州를 다스리다가 徐州와 兗州로 옮겼다. 다시 돌아와 御史中丞이 되었다. 성격이 꿋꿋하고 직설적이어서 탄핵을 할 때 가리는 바가 없었다. 程琳의 일로 인해 외직으로 나가 鄆州를 맡았는데, 도중에 죽었다.
역주38 韓琦 : 1008~1075. 字는 稚圭, 시호는 忠獻이다. 젊어서 進士에 합격하여 知州按撫使로서 四川의 기민 190만 명을 구제하고, 이어 西夏의 침입을 격퇴하여 변경방비에도 역량을 과시함으로써, 30세에 樞密副使가 되었다. 1058년에는 재상에 올라 약 10년간 국정에 참여하였는데, 神宗 즉위 후 다시 지방으로 나갔으며, 王安石의 靑苗法 실시를 맹렬히 비난하고, 또 거란이 요구해온 영토할양에도 반대하며 왕안석과 정면 대립함으로써 관직에서 물러났다.
역주39 富弼 : 1004~1083. 宋나라 河南 洛陽 사람으로 字는 彦國, 시호는 文忠이다. 仁宗 天聖 8년(1030) 茂才로 薦擧되었다. 慶曆 2년(1042) 知制誥가 되어 契丹으로 사신을 가 영토를 할양하는 일을 강력히 항의하고 대신 歲幣를 늘리는 것으로 합의했다. 다음 해 樞密使로 옮겨 范仲淹 등과 함께 慶曆新政을 추진했다. 1056년에 재상이 되었지만 王安石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亳州로 나갔는데, 다시 靑苗法을 비난하다 탄핵을 받아 降官당하였다. 韓國公으로 致仕하였다. 저서에 《富鄭公詩集》이 있다.
역주40 勳上柱國 : 勳은 勳官으로 宋나라 때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칭호로 實職은 없다. 上柱國은 宋나라 勳官 중에 최고 등급이다.
역주41 食邑 : 宋나라 때에 종실 및 고급관원들에게 지급했던 加銜이다.
역주42 實封 : 家戶나 田土를 功臣에게 실제로 봉해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주43 集選二百卷 : 《宋史》 本傳에는 “梁나라와 陳나라 이후 명신들의 작품을 산삭하고 편차하여 《集選》 100권을 만들었다.”라고 되어 있다.
역주44 加等 : 品階를 올려주는 것을 말하는데 臨淄公 死後에 司空 兼侍中으로 증직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역주45 虛己 : 宋나라 建安 사람으로 字는 公受이다. 太平興國에 進士가 되었고 殿中丞, 兵部郎中, 工部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역주46 : 越州 사람으로 宋 太宗 때에 殿前都虞候를 역임하였고, 관직은 尙書令에까지 올랐다.
역주47 大理評事 : 漢 宣帝 때에 처음 만들어진 관직으로 주로 獄訟을 관장하였다.
역주48 楊察 : 合肥 사람으로 字는 隱甫, 시호는 宣懿이다. 景祐 연간에 進士가 되었고 御史中丞, 戶部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論事를 할 때에는 꺼리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역주49 傳載桓子 : 傳은 《春秋》를 가리키는데, 桓子의 사적과 언론 등이 《春秋》에 기록되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桓子는 이름이 弱父로 제나라 대부이고 晏嬰의 아버지이다.
역주50 嬰稱于丘 : 嬰은 晏嬰을 가리킨다. 字는 平仲이고 景公의 3세손이다. 공자에게 칭찬받은 일은 《論語》 〈公冶長〉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晏平仲은 남과 사귀기를 잘하는구나! 오래되어도 공경하니.’”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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