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直敍
諱襄이요 字君謨 人也
天聖八年 擧進士甲科하야 爲漳州軍事判官 西京留守推官하고 改著作佐郞 館閣校勘하다
慶曆三年 以祕書丞集賢校理知諫院兼修起居注하다 是時 天下無事하야 士大夫弛於久安이러니 一日이어늘 師久無功이라
天子慨然厭兵하야 思正百度하야 以修太平이라 旣已排群議하야 進退二三大臣하고
又詔增置諫官四員하야 使拾遺補闕하야 所以遇之甚寵이어늘 公以材名在選中이라
遇事感激하야 無所廻避하니 權倖畏斂하야 不敢撓法干政이라 而上得益與大臣圖議러라
明年屢下詔書하야 勸農桑興學校하고 革弊修廢하니 而天下悚然하야 知上之求治矣
於此之時 言事之臣 無日不進見이로되 而公之補益爲尤多러라
四年以右正言直史館으로 出知福州라가 以便親으로 遂爲福建路轉運使하야 復古五塘하야 以漑田하니
民以爲利하야 爲公立生祠于塘側이라 又奏減閩人五代時之半하다
丁父憂하야 服除 判三司鹽鐵勾院하고 復修起居注하다
今參知政事 時爲御史라가 以直言忤旨하야 貶春州別駕한대
廷臣無敢言者어늘 公獨論其忠하니 人皆危之로되 而上悟意解하야 唐公得改英州하고 遂復召用하다
皇祐四年 遷起居舍人 知制誥 兼判流內銓하다
御史 坐論하야 適罷臺職하고 除他官이어늘 公封還辭頭하야 不草制하다
其後屢有除授 非當者 必皆封還之하니
而上遇公益厚하야 曰 有子如此하니 其母之賢 可知라하고 命特賜以寵之러라
至和元年 遷龍圖閣直學士 知開封府하고 三年 以樞密直學士 知泉州하고 徙知福州라가 未幾 復知泉州하다
公爲政精明하고 而於閩 尤知其風俗하야 至則禮其士之賢者하야 以勸學興善而變民之故하고 除其甚害
往時 閩人多好學하되 而專用賦以應科擧러니 公得先生하야 以經術傳授하니 學者常至數百人이라
公爲親至學舍하야 執經講問하야 爲諸生率하다
延見處士陳烈하야 尊以師禮하고 方以德行으로 著稱鄕里어늘 公皆折節下之하다
閩俗重凶事하야 其奉浮屠會賓客하야 以盡力豐侈爲孝하고 否則深自愧恨하야 爲鄕里羞
而姦民游手無賴子 幸而貪飮食利錢財하니 來者無限極하야 往往至數百千人이라 至有親亡 祕不擧哭하고 必破産辦具而後敢發喪者하니
有力者乘其急時하야 賤買其田宅하고 而貧者立券擧債하야 終身困不能償이라
公曰 弊有大於此邪아하고 卽下令禁止하고 至於巫覡主病蠱毒殺人之類하야도 皆痛斷絶之러니
然後 擇民之聰明者하야 敎以醫藥하야 使治疾病하고
其子弟有不率敎令者어늘 條其事하야 作五戒하야 以敎諭之하니 久之 閩人大便이라
公旣去 閩人相率詣州하야 請爲公立德政碑한대 吏以法不許謝어늘
卽退而以公善政으로 私刻于石하고 曰 俾我民不忘公之德이라하다
嘉祐五年 召拜翰林學士權三司使하니 三司開封 世稱省府 爲難治而易以毁譽
居者不由以遷이면 則由以敗 而敗者十常四五어늘 公居之 皆有能名이러라
其治京師 談笑無留事하고 尤喜破姦發隱하니 吏不能欺러라
至商財利하얀 則較天下盈虛出入하야 量力以制用하야 必使下完而上給하고
下曁百司因習蠧弊하야 切磨剗剔하니 久之 簿書纖悉하고 紀綱條目皆可法이러라
七年季秋 하다 後數月 仁宗崩하고 英宗卽位하야 數大賞賚하고
及作하얀 皆猝辦於縣官經費外어늘 公應煩愈閒暇若有餘하니 而人不知勞
遂拜하야 居二歲 以母老求知杭州하야 卽拜端明殿學士以往하다
三年 徙南京留守할새 未行 丁母夫人憂하고 明年八月某日 以疾卒于家하니 享年五十有六이라
蔡氏之譜 自晉以來 世有顯聞이라
其後中衰하야 隱德不仕러니 公年十八 以農家子擧進士하야 爲開封第一하니 名動京師
後官于閩하야 典方州하고 領使一路하니 二親尙皆無恙이라 閩人瞻望咨嗟하야 不榮公之貴而榮其父母러라
母夫人尤有壽하야 年九十餘 飮食起居 康強如少者 歲時爲壽母할새 子鬢髮皆皤然而命服金紫煌煌如也
至今閩人之爲子者必以夫人祝其親하며 爲父母者必以公敎其子也
公於朋友 重信義하야 聞其喪하면 則不御酒肉하고 爲位以哭하야 盡哀乃止
嘗會飮會靈東園이러니 坐客有射矢誤傷人者 客遽指爲公矢하니 京師喧然이라
事旣聞 上以問公하니 公卽再拜媿謝하고 終不自辯하며 退亦未嘗以語人이러라
公爲文章 淸遒粹美하고 이라 工於書畫하되 頗自惜하야 不妄爲人書
故其殘章斷稿 人悉珍藏하고 而仁宗尤愛稱之하야 御製碑文 詔公書之하고
其後命學士撰碑文할새 又勅公書하니 則辭不肯書曰 此待詔職也라하다
公累官至禮部侍郞하고 旣卒 翰林學士等十餘人 列言公賢하고 其亡可惜이라하다
天子新卽位하야 未及識公이나 而聞其名久也 爲之惻然하야 特贈吏部侍郞하고 官其子旻爲祕書省正字하며
孫傳及弟之子均皆守將作監主簿하되 而優以賻卹하고 以旻尙幼라하야 命守吏助給其喪事하다
曾祖諱顯皇 不仕하고 祖諱恭 贈工部員外郞이요 父諱琇 贈刑部侍郞이라
母夫人盧氏 長安郡太君이요 夫人葛氏 永嘉郡君이라 子男三人이니 曰勻 將作監主簿 曰旬 大理評事 皆先公卒이라 幼子 旻也
女三人이니 一適著作佐郞謝仲規하고 二尙幼 以某年某月某日 葬公于莆田縣某鄕將軍山하다
銘曰 誰謂閩遠 而多奇産이로다 産非物寶 惟士之賢이로다 嶷嶷蔡公이여 其人傑然이라
奮躬當朝하야 讜言正色이라 出入左右하야 彌縫補益이라 間歸于閩하니 有政在人이라
食不畏蠱하고 喪不憂貧이라 疾者有醫하고 學者有師로다 問誰使然 孰不公思리오
有高其墳이요 有拱其木이니 凡閩之人 過者必肅이니라


02. 端明殿學士 蔡公墓誌銘
있는 그대로 서술하였다.
공은 휘가 이고 자가 君謨이니 興化軍 仙遊縣 사람이다.
蔡襄(≪晩笑堂畫傳≫)蔡襄(≪晩笑堂畫傳≫)
天聖 8년(1030)에 進士試甲科로 급제하여 漳州軍事判官 西京留守推官이 되었고 著作佐郞 館閣校勘으로 改差되었다.
慶曆 3년(1043)에 祕書丞 集賢校理 知諫院으로 修起居注兼帶하였다. 이때에 천하가 無事하여 사대부들이 오래 평안한 나머지 해이 해져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元昊가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들이 오랫동안 戰功을 거두지 못했다.
천자가 慨然히 오랜 전쟁에 싫증이 나서 각종 제도를 바로잡아 태평성세를 이루려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사람들의 의론들을 물리치고서 두세 명 大臣을 교체하고,
諫官 4增員하여 빠진 것을 수습하고 결점을 보충하도록 詔命을 내려 이들을 매우 융숭하게 대우하였는데, 공은 才能과 명망으로 諫官에 선발되었다.
공은 일을 맡을 때마다 천자의 은혜에 감격하여 피하는 바가 없었으니, 權倖들이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감히 법을 어지럽히거나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더욱더 大臣들과 많은 일을 도모하고 의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에 누차 詔書를 내려 農桑을 권장하고 學校를 일으키며 폐단을 혁파하고 폐기된 정사들을 정비하니 천하가 두려워하여 상이 治世를 이루고자 하는 뜻을 알았다.
이때에 言事를 담당한 신하들은 천자를 進見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공이 補益한 것이 더욱 많았다.
4년에 右正言 直史館으로 知福州가 되었다가 老親을 봉양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마침내 福建路轉運使가 되어 예전부터 있던 다섯 개의 저수지를 복구하여 밭에 물을 대니
백성들이 이롭게 여겨 공을 위하여 저수지 곁에 生祠를 세웠다. 공은 또 의 백성들이 五代 때부터 내오던 丁口稅를 반으로 줄여줄 것을 조정에 아뢰었다.
부친상을 당하여 상복을 벗자 判三司鹽鐵勾院이 되었고 다시 修起居注가 되었다.
지금 參知政事 唐介가 이때 御史로 있으면서 直言으로 상의 뜻을 거슬러 春州別駕로 폄적되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감히 이를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공만 홀로 唐介忠臣이라 말하니 사람들은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그러나 상이 뉘우치고 오해를 풀어 唐公을 다시 英州別駕로 개차하였고 마침내 다시 조정에 불러 등용하였다.
皇祐 4년(1052)에 起居舍人 知制誥 兼判流內銓으로 옮겼다.
御史 呂景初, 吳中復, 馬遵梁丞相을 논죄한 일에 연루되어 마침 臺職을 파면하고 다른 관직에 제수하자 공은 辭頭를 봉함하여 돌려보내고 制書를 쓰지 않았다.
그 뒤에 누차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지만 합당한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모두 辭頭를 봉함하여 돌려보내니,
상이 공을 더욱 후하게 우대하여 말하기를 “아들이 이와 같으니 그 어머니의 어짊을 알 수 있다.”라고 하고 명하여 특별히 冠帔를 하사하여 공을 총애하였다.
至和 元年(1054)에 龍圖閣直學士 知開封府로 옮겼고 3년에 樞密直學士知泉州가 되었으며 知福州로 옮겼다가 얼마 뒤에 다시 知泉州가 되었다.
공은 정무를 처리할 때에 정밀하고 분명하였고 閩州의 풍속에 대해 더욱 잘 알아 閩州에 도착하자 즉시 그곳의 선비 중에 현명한 이를 예우하여 학문을 권장하고 선을 일으켰으며 백성들의 옛 습속을 변화시키고 심한 폐해는 제거하였다.
과거에는 閩州의 사람들 대부분 학문을 좋아하였지만 전적으로 로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공이 선생 周希孟을 얻어 經術로 전수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늘 수백 명이나 되었다.
공이 직접 學舍에 가서 經傳을 가지고 講問하여 諸生을 위하여 솔선수범하였다.
處士 陳烈을 맞이하여 스승의 예로 존중하였고, 陳襄鄭穆은 바야흐로 德行으로 鄕里에서 알려졌는데, 공은 모두 자신을 낮추고 예우하였다.
閩州의 풍속은 喪禮를 중시하여 승려들을 모셔놓고 빈객들을 모아 힘을 다해 풍족하고 호화롭게 을 치르는 것을 효도라 여기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깊이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한스러워하여 향리의 수치라 여겼다.
간악한 주민, 놀고먹는 사람, 무뢰배들이 요행으로 음식을 탐하고 재물을 노려 찾아오니, 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한량없어 왕왕 수백 수천 명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어버이가 사망하면 감추고 을 하지 않다가 반드시 가산을 털어서 에 필요한 물품들을 갖춘 뒤에야 감히 을 알리는 자가 있었다.
힘이 있는 자는 이런 급한 틈을 타 싼값에 그들의 田宅을 사들이니 가난한 자는 계약서를 쓰고 빚을 빌려 종신토록 고생하여도 빚을 다 갚지 못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폐단 중에 이보다 더 큰 폐단이 있는가.”라고 하고 즉시 명을 내려 금지시키고, 무당으로 병을 다스리게 하는 것과 毒蟲으로 사람을 죽이는 등의 일에 대해서도 모두 엄격히 금지시켰다.
그런 뒤에 백성 중에 총명한 사람을 가려 醫藥을 가르쳐 그들에게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子弟들 중에 敎令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늘 그 일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五戒를 만들어 그들을 敎導하니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 閩州의 사람들이 매우 편안하게 여겼다.
공이 떠나고 나자 閩州 사람들이 줄지어 로 나아와 공을 위하여 德政碑를 세우기를 청하였는데, 관리가 법으로 보아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즉시 물러나와 공의 善政을 사적으로 돌에 새기고 이르기를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공의 덕을 잊지 않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嘉祐 5년(1057)에 내직으로 불러 翰林學士 權三司使에 제수하였다. 三司開封은 세상에서 중에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져 쉽게 명예가 훼손되는 곳이었다.
이 관직에 있던 사람은 이 관직으로 말미암아 좌천되지 않으면 파직을 당하는지라 파직당한 사람이 열 명 중에 네다섯 명이나 되었는데 공이 직임을 맡음에 모두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京師를 다스릴 때에 담소를 나누면서도 公務를 적체시키지 않았고, 더욱이 간사한 일을 없애고 숨은 비리를 적발하기를 좋아하니 관리들이 속일 수가 없었다.
財物貨利를 헤아리는 데에 이르러서는 천하의 풍족과 부족, 출입 등을 비교하여 역량을 헤아려 재용을 절제해 사용하여 반드시 아래가 완전하고 위가 넉넉하게 하였다.
아래로 百司에서 인습하여 재물을 침탈해가는 폐단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혁파하니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관서의 簿書가 세밀해지고 紀綱條目들이 모두 본받을 만하게 되었다.
7년 季秋明堂에서 큰 제사를 지냈다. 몇 개월 뒤에 仁宗崩御하고 英宗이 즉위하여 수차례 크게 行賞賜與를 시행하였다.
永昭陵을 만들 때에 모두 관청의 경비 외에 경비를 급히 마련해야 했었는데, 공은 번거로운 일을 하면서 오히려 마치 여유가 있는 듯 더욱 한가하게 일을 하니 사람들이 수고하는 줄을 몰랐다.
마침내 三司使에 제수되어 2년 만에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知杭州가 되기를 청하자 즉시 端明殿學士를 배수하여 杭州로 갔다.
3년 만에 南京留守로 옮기게 되었는데, 길을 떠나기 전에 母夫人의 상을 당하였고, 이듬해 8월 모일에 병으로 집에서 하니 향년 56세였다.
蔡氏譜系나라 從事中郞 蔡克 이래로 대대로 현달하여 이름이 알려진 이가 있었다.
그 뒤 중간에 쇠미해져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는데, 공이 나이 18세에 農家의 자제로 進士試에 급제하여 開封府 1등이 되니 명성이 京師에 진동하였다.
뒤에 閩州에서 관직생활을 하며 地方州郡을 다스렸고 一路를 관장하니 兩親이 오히려 모두 無恙한지라 閩州 사람들이 바라보며 부러워하여 이 귀해진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그 부모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母夫人이 더욱 장수를 누려 나이 90여 세에 음식과 기거가 젊은 사람처럼 건강하였다. 歲時에 공이 어머니께 祝壽할 때에 아들의 머리는 모두 백발이 되었지만 命服에 장식된 黃金 印章紫色 綬帶가 찬란하게 빛났다.
지금 閩州 사람들 중에 자식이 된 자들은 반드시 공의 母夫人같이 장수하도록 자신의 어버이에게 축수하고, 부모가 된 자들은 반드시 공과 같이 되도록 자신의 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공은 朋友에게 信義를 중시하여 訃告를 들으면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고 자리를 만들어 곡하여 슬픔을 다 쏟아낸 뒤에 곡을 그만두었다.
일찍이 會靈 東園에서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坐客 중에 활을 쏘다 잘못하여 사람을 다치게 한 사람이 있었다. 객이 대번에 공의 화살이라고 지적하니 京師가 떠들썩하였다.
일이 알려져 상이 공에게 이 일에 대해 물어보니 공이 즉시 再拜하고 부끄러워하며 사죄하고 끝내 스스로 변명하지 않았으며 물러나서도 일찍이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공은 文章이 청아하고 굳세며 순수하고 아름다웠고 문집 약간 권이 있다. 書畫에 능하였지만 스스로 몹시 아껴 함부로 남에게 써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의 짧은 글들을 사람들이 모두 소중히 보관하였다. 仁宗이 더욱 아끼고 칭찬하여 御製元舅隴西王碑文을 공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고,
그 뒤에 學士에게 溫成皇后碑文을 찬하도록 명하였을 때에 또 공에게 칙명을 내려 쓰게 하니, 사양하고 쓰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는 待詔의 직무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누차 승진하여 벼슬이 禮部侍郞에 이르렀고 하자 翰林學士 王珪 등 10여 인이 공의 현명함을 열거하여 말하고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였다.
천자가 새로 즉위하여 공을 미처 알지 못했지만 공의 명성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공을 측은하게 여겨 특별히 吏部侍郞으로 증직하고 공의 아들 에게 관직을 내려 祕書省正字로 삼았으며,
손자 과 아우의 아들 을 모두 守將作監主簿로 삼되 넉넉하게 賻儀를 하여 돌봐주었으며, 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문지기에게 명하여 喪事를 돕게 하였다.
曾祖 顯皇은 벼슬하지 않았고, 工部員外郞에 증직되었고, 刑部侍郞에 증직되었다.
母夫人 盧氏長安郡太君이고 夫人 葛氏永嘉郡君이다. 자식은 아들이 세 명이니, 將作監主簿를 지냈고 大理評事를 지냈는데 모두 공보다 먼저 하였다. 어린 아들은 이다.
딸이 세 명이니, 한 명은 著作佐郞 謝仲規에게 시집갔고 두 명은 아직도 어리다. 모년 모월 모일에 莆田縣 某鄕 將軍山에 공을 장사 지냈다.
은 다음과 같다. 누가 閩州가 멀다 하는가 좋은 특산물 많이 생산된다네 생산되는 것 寶物이 아니요 오직 현명한 선비로다 우뚝한 蔡公이여 그 사람 걸출하구나
몸을 일으켜 조정에 나아가 直言하고 正色하였네 성상의 좌우를 출입하며 彌縫하고 補益하였네 중간에 閩州로 돌아왔으니 정사는 사람에게 달려 있구나
음식에 독이 있을까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을 당해도 가난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네 병든 자는 의원이 치료해주었고 학자는 스승이 있게 되었구나 묻노니 누가 이렇게 하였는가 누군들 공을 그리워하지 않으리오
봉분을 높이 만들고 나무를 둘레에 심어놓았으니 閩州의 사람 중에 지나는 사람은 반드시 공경하리라


역주
역주1 端明殿學士蔡公墓誌銘 : 이 글은 熙宇 元年(1068)에 지은 것이다. 蔡公은 蔡襄(1012~1067)이다.
역주2 興化軍仙遊 : 興化軍은 治所가 현재 福建省 莆田에 있다. 仙遊는 縣이름으로 지금 福建省에 속한다.
역주3 元昊叛 : 元昊는 趙元昊로 宋나라 신하 노릇 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다가 仁宗 明道(1032∼1033) 초에 西夏의 왕위를 세습, 顯道란 연호를 쓰고 寶元(1038∼1039) 초에 天授란 연호를 僭稱하여 황제 노릇을 하였다. 뒤에 宋과 싸워 승리하였으나 사상자가 많아 화의를 애걸하여 夏國主로 봉해졌다. ≪宋史 권485≫
역주4 丁口稅 : 丁口는 丁의 다른 말로 각종 조세 및 국역을 부담하던 良人 남자를 말하고, 丁口稅는 이런 양인들에게 賦課하는 세금을 말한다.
역주5 唐公介 : 1010~1069. 唐介는 宋나라 江陵 사람으로 자는 子方이다. 仁宗 天聖 8년(1030) 進士가 되었다. 皇祐 연간에 殿中侍御史가 되어 간쟁할 때 권력자들을 피하지 않다가 재상 文彥博 휘하의 사람을 탄핵해서 英州別駕로 좌천당했다. 神宗 熙寧 元年(1068) 參知政事에 올라 王安石을 중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시호는 質肅이다.
역주6 呂景初 : 자는 冲之, 酸棗 사람이다. 進士試에 급제하였고 侍御史를 역임하였다.
역주7 吳中復 : 자는 仲庶, 永興 사람이다. 景祐 연간에 進士試에 급제하였고 殿中侍御史를 역임하였다.
역주8 馬遵 : 자는 仲涂, 樂平 사람이다. 仁宗 때에 吏部의 관직을 지냈고 성격이 낙천적이고 의론을 잘하였다.
역주9 梁丞相 : 梁适이다. 자는 仲賢, 須城 사람이다.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同平章事, 太子太傅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법령에 밝았고 일에 임하여 담력이 있었으며 지략이 뛰어났다.
역주10 冠帔 : 고대 부녀자의 복식으로 冠은 帽子이고 帔는 披肩(어깨받이)이다.
역주11 周希孟 : 宋나라 福州 侯官 사람으로 자는 公辟이다. 九經에 두루 통했고, 특히 ≪周易≫에 뛰어났다. 閩侯敎授 등을 지냈다. 민 땅 사람들이 陳烈, 陳襄, 鄭穆과 함께 四先生으로 불렀다. 知州 劉夔, 曹穎叔, 蔡襄이 모두 와서 經義에 대해 질문하였다. 후에 천거를 받아 將仕郞이 되고, 國子監四門助敎를 거쳐 本州敎授에 올랐다. 저서에 ≪易義≫, ≪詩義≫, ≪春秋義≫ 등이 있다.
역주12 陳襄 : 1017~1080. 북송 福州 侯官 사람으로 자는 述古, 호는 古靈先生이다. 仁宗 慶曆 2년(1042)에 進士가 되고, 神宗 때 侍御史로 여러 일을 처리했다. 후에 銀臺司兼侍讀, 知制誥, 判尙書都省 등을 역임하였다. 평생 학교 교육을 진흥시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고, 蘇軾과 司馬光 등 30여 명의 학자를 조정에 천거했다. 저서로 ≪中庸義≫와 ≪易義≫, ≪古靈集≫이 있다.
역주13 鄭穆 : 자는 閎中, 侯官 사람이다. 성품이 순수하고 근실하며 학문을 좋아하였고 일상생활은 모두 禮를 따라 행하였으며 門人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관직은 寶文閣待制, 國子祭酒를 지냈다.
역주14 大享明堂 : 大享은 대규모의 제사를 이르고, 明堂은 제왕이 政敎를 펴는 곳으로
周明堂圖(≪三禮圖≫)周明堂圖(≪三禮圖≫)
朝會, 祭祀, 賞罰 등을 시행한다.
역주15 永昭陵 : 宋 仁宗의 陵으로 현재 河南 鞏縣 서남쪽에 있다.
역주16 三司使 : 송나라 때에 鹽鐵, 度支, 戶部를 합하여 하나로 만들고 三司라 칭하였는데, 三司의 장관이 바로 三司使이다. 즉 財政을 담당하는 최고 장관이다.
역주17 從事中郞克 : 克은 蔡克으로 자는 子尼, 晉나라 때 考城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성품은 공정하고 명철하였다. 從事中郞을 역임하였다.
역주18 有文集若干卷 : ≪蔡忠惠集≫ 36권이 남아 있다.
역주19 元舅隴西王 : 李用和를 가리킨다. 자는 審禮이고 章懿太后의 아우이다. 元舅는 왕의 외숙을 가리킨다.
역주20 溫成皇后 : 張貴妃를 가리킨다. 宋 高宗의 비이고, 淳熙 7년(1180)에 太上皇淑妃로 봉해졌고, 16년에 貴妃가 되었다.
역주21 王珪 : 1019~1085. 송나라 成都 華陽 사람으로 開封으로 옮겨 살았고, 자는 禹玉, 시호는 文恭이다. 仁宗 經曆 2년(1042)에 진사가 되었고, 神宗 熙寧 3년(1070)에 參知政事에 올랐으며, 元豐 5년(1082) 尙書左僕射 兼門下侍郞에 올랐다. 三朝에서 벼슬하면서 안팎의 정치를 맡은 지 18년 동안 조정의 大典冊이 대개 그의 손에서 나왔다. 저서로 ≪華陽集≫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