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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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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表處士하고 竝從里人之感欷處着色하니 自是一法이라 長厚之行이요 長厚之言이로다
連處士 人也 以一布衣 終于家어늘 而應山之人 至今思之하야
其長老敎其子弟所以孝友恭謹禮讓而溫仁 必以處士爲法曰 爲人如連公 足矣라하고
其矜寡孤獨凶荒饑饉之人皆曰 自連公亡으로 使吾無所告依而生以爲恨이라하니
嗚呼 處士居應山 非有政令恩威以親其人이로대 而能使人如此하니 其所謂行之以躬하야 不言而信者歟인저
處士 諱舜賓이요 字輔之 其先閩人이라 自其祖光裕 嘗爲應山令하고 後爲二州推官하고 卒而反葬應山으로 遂家焉이라
處士 少擧毛詩하야 一不中한대 而其父正 以疾廢于家 處士供養左右十餘年하고 因不復仕進이라
父卒 家故多貲어늘 悉散以賙鄕里하고 而敎其二子以學曰 此吾貲也라하다
歲饑 出穀萬斛以糶하니 而市穀之價 卒不能增하고 及旁近縣之民 皆賴之러라
盜有竊其牛者 官爲捕之甚急하니 盜窮하야 以牛自歸어늘 處士爲之媿謝曰 煩爾送牛라하고 厚遺以遣之러라
嘗以事之할새 遇盜於西關한대 左右告以處士하니 盜曰 此長者 不可犯也라하고 捨之而去하다
處士有弟居雲夢한대 往省之라가 得疾而卒이라 以其柩歸應山한대 應山之人 去縣數十里迎哭하고 爭負其柩以還할새
過縣市하니 市人皆哭하고 爲之罷市三日曰 當爲連公行喪이라하다
處士生四子하니 曰庶庠庸膺이라 其二子敎以學者하니 後皆擧進士及第러라 今庶爲壽春令이요 庠爲宜城令이라
處士以天聖八年十二月某日卒하고 慶曆二年某月日葬于安陸蔽山之陽이라
自卒至今二十年이라 應山之長老識處士者與其縣人嘗賴以爲生者 往往尙皆在하니 其子弟後生聞處士之風者尙未遠이라
使更三四世하야 至于孫曾하야 其所傳聞有時而失이면 則懼應山之人 不復能知處士之詳也
乃表其墓하야 以告于後云이라 八年閏正月一日 廬陵歐陽脩述하노라


04. 連處士墓表
處士를 드러내고 아울러 마을 사람들이 감격하여 흐느끼는 부분에 주안점을 두었으니, 절로 문장 짓는 한 가지 방법이다. 〈연처사의〉 謹厚한 행실에 〈구양공의〉 근후한 말이로다.
連處士應山 사람이다. 일개 布衣로 집에서 졸하였거늘 응산 사람들이 지금까지 사모하여,
응산의 長老들이 그 자제들에게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손하고 삼가고 예를 지키고 사양하여 온후하고 인애롭게 되는 것을 가르칠 때에, 반드시 처사를 모범으로 삼으면서 말하기를 “사람됨이 連公과 같으면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늙은 홀아비와 늙은 과부와 고아와 늙어서 의지할 데가 없는 이들과 흉년에 기근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연공이 돌아가시고부터 우리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의지할 데 없이 살게 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오호라! 처사가 응산에 살 때에 무슨 政令이나 은혜와 위엄이 있어 그 사람을 친하게 한 것이 아닌데 사람들로 하여금 이와 같이 만드니, 이른바 몸소 행하여 말하지 않아도 믿게 된다는 것이로다.
처사는 舜賓이고 輔之이니, 그 선조는 사람이다. 조부 光裕가 응산 현령이 되었고 뒤에 磁州郢州 推官이 되었으며 졸하여 응산에 反葬한 이래로 마침내 후손들이 응산에 살게 되었다.
처사는 젊어서 ≪毛詩≫로 과거에 응시하여 한 번도 합격하지 못했는데, 그 부친 이 병으로 집에서 몸져눕게 되었다. 처사가 부친의 곁에서 10여 년을 봉양하고 이로 인하여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부친이 죽자, 집안에 본래 재물이 많았는데 다 흩어서 향리 사람들을 구휼하고 두 아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자산이다.”라고 하였다.
흉년이 들자 萬斛의 곡식을 내어 파니, 시장의 곡식 가격이 마침내 오르지 못하였고, 근방의 고을 백성들도 모두 처사의 은덕을 입었다.
처사의 소를 훔쳐간 도둑이 있었는데, 관에서 매우 서둘러 도둑을 잡으려 하니 도둑이 형세가 궁하여 소를 가지고 되돌아왔다. 그러자 처사가 부끄러워하면서 말하기를 “번거롭겠지만 소를 되가져 가시게.”라고 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처사가 일이 있어 信陽으로 가다가 西關에서 도둑을 만났는데, 좌우에서 連處士라고 말하니 도둑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長者이니 범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는 놓아 보내주었다.
처사에게 雲夢에 사는 아우가 있었는데 처사가 아우를 만나러 가다가 병을 얻어 졸하였다. 그리하여 영구를 응산으로 운구하였는데 응산 사람들이 의 수십 리 밖까지 나와 영구를 맞이하며 곡하였고 다투어 영구를 짊어지고 현으로 돌아왔다.
영구가 현의 시장을 지나가니 시장 사람들이 모두 곡하였고, 처사를 위하여 사흘 동안 撤市하고는 “연공을 위하여 상여를 운반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처사는 네 아들을 낳았으니, 이다. 두 아들은 학문을 가르쳤으니 뒤에 모두 진사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지금 壽春令이 되었고 宜城令이 되었다.
처사는 天聖 8년(1030) 12월 某日에 졸하였고, 慶曆 2년(1042) 某月日安陸蔽山 남쪽에 안장하였다.
처사가 졸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20년이다. 응산의 장로들로 처사를 아는 자들과 공 덕분에 생활할 수 있었던 현 사람들이 왕왕 아직도 다 살아 있으니, 그 子弟後生들이 처사의 풍모를 듣는 것이 여전히 멀지 않다.
만일 서너 세대가 지나 손자와 증손 대에 이르러 처사에 관한 이야기가 간혹 실전된다면, 응산 사람들이 다시는 처사에 대해 상세하게 알게 되지 못할까 두렵다.
이에 묘표를 지어 후세 사람들에게 고한다. 慶曆 8년(1048) 閏正月 1일에 廬陵 歐陽脩는 쓰노라.


역주
역주1 連處士墓表 : 이 글은 慶曆 8년(1048)에 지은 것이다. 이해 閏正月에 滁州에 貶黜되어 있던 구양수를 知揚州에 임명하는 명이 내려졌다. 본 묘표의 주인공인 連舜賓의 맏아들은 이때 壽春令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구양수가 아직 滁州를 떠나기 전에 그의 요청을 받고 이 묘표를 지은 것이다.
역주2 應山 : 縣 이름으로 지금은 湖北에 속해 있다.
역주3 磁郢 : 磁州는 지금의 河北 磁縣이고, 郢州는 治所가 지금의 湖北 武漢 武昌에 있었다.
역주4 信陽 : 지금은 河南에 속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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