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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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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與公參看이라
脩白하노라
人還 惠書及하니 文辭馳騁之際 豈常人筆力可到리오마는
於辨論經旨에는 則不敢以爲是호라
蓋吾子自信甚銳하고 又嘗取信於某하니 苟以爲然이면 誰能奉奪이리오
凡今治經者 莫不患聖人之意不明하고 而爲諸儒以自出之說之也
今於經外 又自爲說하니 則是患沙渾水而投土益之也
不若沙土盡去 則水淸而明矣
하야 治其國하며 臣其吏民者 十餘年이요 死而入廟하야 하니 則當時魯人 孰謂息姑不爲君也리오
孔子修春秋 凡與諸侯盟會行師命將 一以公書之하고 於其卒也 書曰公이라하니 則聖人何嘗異隱於他公也리오
據經컨대 隱公立十一年而薨이어늘이며 이며 吾子亦何從而云云也
故某嘗告學者愼於述作 誠以是也
秋初許相訪이나 此不子細 略開其端하노니 吾子必能自思而得之리라
不宣하노라


09. 서무당徐無黨에게 답한 첫 번째 편지
의 〈춘추론春秋論〉과 참고해 보아야 한다.
는 말씀드립니다.
보낸 사람이 돌아오는 편에 편지 및 〈시은서론始隱書論〉 등과 앞서 기록한 〈획린론獲麟論〉을 주셨는데, 문사文辭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것은 어찌 일반 사람들의 필력筆力이 미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경서經書의 뜻을 변론함에 있어서는 감히 옳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그대는 자신自信하는 것이 너무 빠르고 또 일찍이 나에게 인정을 받았으니, 진실로 그렇다고 여긴다면 누가 그 생각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무릇 오늘날 경서를 연구하는 이들은 성인聖人의 뜻이 밝혀지지 않고 제유諸儒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로 경서의 뜻을 교란시키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서 외에 또 스스로 설을 만든다면 이는 모래가 물을 흐리는 것을 걱정하여 흙을 물에 더 던져 넣는 격입니다.
차라리 모래와 흙이 다 없어지도록 두느니만 못하니, 그렇게 하면 물은 절로 맑고 밝아질 것입니다.
은공隱公남면南面하여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관리와 백성들을 신하로 삼은 것이 10여 년이었고, 죽어서 종묘宗廟에 들어가 시호諡號를 받고 이라 일컬어졌으니, 당시 나라 사람들은 누군들 식고息姑를 임금이라 하지 않았으리오.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편수編修하시면서 무릇 제후와 회맹會盟하고 군대를 출동하고 장수를 임명한 일에 대해 한결같이 ‘’이라 쓰셨고, 그가 했을 때에는 “하였다.”라 썼으니, 성인께서 어찌 은공隱公을 다른 들과 다르게 취급하신 적이 있었으리오.
경문經文에 의거해보면, 은공은 즉위한 지 11년 만에 하였는데, 좌씨左氏는 무엇을 근거로 은공이 섭정했음을 알았으며, 공양公羊곡량穀梁은 또 무엇을 근거로 환공桓公에게 양위讓位한 자취가 있음을 알았으며, 그대는 또한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중니仲尼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동주東周를 만들 것이다.” 하셨으니, 《춘추》가 평왕平王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그대의 주장과 어쩌면 그리도 몹시 상반된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학자들에게 저술에 신중하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초가을에 방문하겠다고 하셨으나 이는 분명치 않으므로 대략 토론의 단서를 열었으니, 그대가 필시 스스로 생각하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역주
역주1 答徐無黨第一書 : 이 편지는 仁宗 慶曆 2년(1042) 10월에서 경력 3년 2월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本集 권68에 徐無黨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가 〈答徐無黨第二書〉란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그 내용 중에 “내가 올해 京師로 돌아와 직임이 言責에 있다.” 하여 諫官을 맡았음을 말했다. 《宋史》 권319 〈歐陽脩傳〉에 의하면, 歐陽脩는 滑州通判으로 있다가 경력 3년에 召命을 받고 4월에 조정에 들어와 知諫院이 되었으니, 두 번째 편지는 경력 3년 4월 이후에 쓴 것임이 분명하다.
徐無黨은 婺州 永康 사람으로 仁宗 皇祐 5년(1053)에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그 아우 徐無逸과 함께 소싯적부터 구양수에게 고문을 배웠고 자주 詩文을 주고받았다. 구양수가 편찬한 《新五代史》에 注를 달았다.
역주2 春秋論 : 본서 권14에 〈春秋論〉 上‧中‧下 세 편과 〈春秋或問〉이 있는데, 이 글과 관련하여 참고할 내용이 많다.
역주3 始隱書論等幷前所記獲麟論 : 〈始隱書論〉과 〈獲麟論〉은 모두 徐無黨이 《春秋》를 연구하여 지은 글이다. 〈시은서론〉의 요지는 《춘추》가 어찌하여 隱公을 起點으로 하여 기록되었는가를 논한 것이고, 〈획린론〉은 《춘추》의 기록이 어찌하여 獲麟, 즉 麒麟을 잡았다는 대목에서 종결되었는가를 논한 것이다.
杜預의 〈春秋序〉에 “‘그렇다면 《춘추》는 어찌하여 魯 隱公으로부터 기록하기 시작했는가?’ ‘周 平王은 본래 東周의 첫 번째 왕이며, 은공은 나라를 양도한 어진 임금이다. 그 시기를 살펴보면 평왕과 은공의 시대가 서로 잇닿아 있으며, 그 지위를 말하면 列國은 그 始祖에 근본을 두니 은공은 周公의 후손이다. 평왕은 국운을 더 이어서 중흥을 이루었고 은공은 조상의 유업을 크게 펼쳐서 周 王室의 힘을 키워주었으니, 西周의 아름다운 문물을 계승할 수 있고 文王과 武王의 자취를 실추하지 않았다.’” 하였고, “기린과 봉황, 五靈은 王者의 祥瑞이다. 그런데 기린이 나온 것은 제때가 아니었으니 감응한 것이 헛되고 돌아갈 곳을 잃었으니, 이것이 聖人이 슬퍼하신 까닭이다. ‘獲麟이란 대목에서 絶筆하였다.’는 대목은 그 사실을 슬퍼하여 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춘추》의 기록을 마친 것이다.” 하였다. 본서 권14 〈春秋或問〉 참조.
역주4 : 골
역주5 魯隱公南面 : 隱公의 이름은 息姑이고 惠公의 庶長子인데, 혜공이 죽었을 때 嫡子인 允은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은공이 혜공의 遺命에 따라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후에 允에 의해 피살되었다. 面은 向과 같은 뜻이다. 南面은 孔子가 “無爲로 다스린 이는 舜임금이실 것이다. 대저 무엇을 하셨으리오. 자신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하셨을 뿐이다.[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한 데서 온 말로, 임금의 자리에 앉음을 뜻한다. 《論語 衛靈公》
역주6 立諡稱公 : 사후에 隱公이란 시호를 받은 것은 정식 임금으로 인정받았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周나라 때 제후의 칭호는 公‧侯‧伯‧子‧男 다섯 가지인데, 魯나라는 公에 속한다.
역주7 : 역사에서 제후의 죽음을 기록할 때 쓰는 말이다. 《禮記》 〈曲禮 下〉에 “天子가 죽으면 崩이라 하고, 諸侯는 薨이라 하고, 大夫는 卒이라 하고, 士는 不祿이라 하고, 庶人은 死라 한다.[天子死曰崩 諸侯曰薨 大夫曰卒 士曰不祿 庶人曰死]” 하였다.
역주8 左氏何從而知其攝 : 《春秋》 隱公 원년 조에 “元年 春 王正月”이라고만 쓴 데 대해, 《左氏傳》에서 “즉위를 쓰지 않은 것은 섭정했기 때문이다.[不書卽位 攝也]”라고 하였다. 左氏는 《春秋左氏傳》을 지은 사람으로, 左丘明이란 설이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역주9 公羊穀梁何從而見其有讓桓之迹 : 公羊은 《春秋公羊傳》을 지은 公羊高를 가리킨다. 공양고는 전국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子夏의 제자라고 한다. 《춘추공양전》은 漢 景帝 때 공양고의 玄孫 公羊壽가 著錄했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춘추공양전》은 《춘추》의 微言大義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두었다고 한다. 穀梁은 《春秋穀梁傳》을 지은 穀梁赤을 가리킨다. 곡량적의 다른 이름은 俶이고 자는 元始이며 역시 子夏의 제자라 한다.
《춘추공양전》 隱公 원년 조에 “‘어찌하여 즉위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공의 뜻을 이루어준 것이다.’ ‘어떻게 공의 뜻을 이루었는가?’ ‘공이 장차 나라를 평안하게 하여 桓公에게 되돌려주려 하였다.’[何以不言卽位 成公意也 何成乎之意 公將平國而反之桓]” 하였고, 《춘추곡량전》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다.
역주10 仲尼曰……何相反之甚邪 : 東周는, 孔子가 季氏의 家臣인 公山弗擾의 부름을 받자 가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나를 부른 것은 어찌 공연히 그런 것이겠는가. 만일 나를 써주는 이가 있다면 나는 東周를 만들겠다.[夫召我者 而豈徒然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陽貨》
朱子는 동쪽 魯나라에 周나라의 도를 일으켜 주나라와 같은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뜻으로 보았는데, 여기서 歐陽脩는 平王 때 洛陽으로 천도한 東周를 공자가 찬양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周나라가 쇠미해지기 시작한 것이 평왕 때이고, 평왕과 魯 隱公은 시대가 가까우므로 평왕을 기점으로 삼아 《춘추》를 기술했다고 주장하는 徐無黨의 설은 공자의 말과 상반된다고 한 것이다. 《史記》에 의하면, 魯 隱公 원년은 周 平王 49년이니, 서무당의 주장은 맞지 않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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