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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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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發首篇所未盡하니 更明透
孔子何爲而修春秋
正名以定分하고 求情而責實하고 別是非明善惡 此春秋之所以作也
自周衰以來 臣弑君하며 子弑父하고 諸侯之國 相屠戮而爭爲君者 天下皆是也
當是之時하야 하니 能好廉而知讓하야 立乎爭國之亂世하야이어든 孔子得之
於經 宜如何而別白之 宜如何而褒顯之
其肯沒其攝位之實하야 而雷同衆君하고 誣以爲公乎
所謂攝者 臣行君事之名也
伊尹周公之臣 嘗攝矣로되 不聞商周之人 謂之王也
使實攝이라도 而稱號無異於正君이면 則名分不正하고 而是非不別이라
夫攝者 心不欲爲君而身假行君事 雖行君事 而其實非君也
今書曰公이라하니 則是息姑心不欲之하고 實不爲之어늘 而孔子加之하야 失其本心하고 誣以虛名하야 而沒其實善이라
夫不求其情하며 不責其實하야 而善惡不明 如此 則孔子之意疎하고 而春秋繆矣
春秋辭有同異하야 尤謹嚴而簡約하니
所以別嫌明微하야 愼重而取信이니 其於是非善惡難明之際 聖人所盡心也
息姑之攝也 會盟征伐 賞刑祭祀 皆出於己하야 擧魯之人 皆聽命於己하니 其不爲正君者幾何
惟不有其名耳 使其名實皆在己 則何從而知其攝也리오
故息姑之攝與不攝 惟在爲公與不爲公이니 別嫌明微 繫此而已
且其有讓桓之志 未及行而見殺하니 其生也 志不克伸하고 其死也 被虛名而違本意하니 則息姑之恨 何申於後世乎리오
其甚高之節 難明之善 亦何望於春秋乎
今說春秋者 皆以名字氏族予奪爲輕重이라
故曰一字爲褒貶이라
且公之爲字 豈不重於名字氏族乎리오
孔子於名字氏族 不妄以加人하니 其肯以公妄加於人而沒其實乎
以此而言컨대 隱實爲攝이면 則孔子決不書曰公이라
孔子書爲公하니 則隱決非攝이라
難者曰 然則何爲不書卽位 曰 惠公之終 不見其事하니 則隱之始立 亦不可知
孔子從二百年後하야 得其遺書而修之하니 闕其所不知 所以
難者又曰 謂爲攝者 左氏耳 公羊穀梁 皆以爲假立以待桓也
故得以假稱公이라 予曰 凡魯之事 出於己 擧魯之人 聽於己하며 生稱曰公하고 死書曰薨이어늘 何從而知其假


02. 《춘추春秋》에 대한
첫째 편에서 다 말하지 못한 바를 밝혔으니, 더욱 밝고 통투通透하다.
공자孔子는 무엇 때문에 《춘추春秋》를 편수編修하였는가.
명분名分을 바로잡아 분수分數를 정하고, 정황情況을 상고하여 사실事實을 탐구하며, 시비是非를 분변하고 선악善惡을 밝히는 것이 《춘추》가 지어진 까닭이다.
나라의 국력이 쇠퇴해진 뒤로 신하가 임금을 시해弑害하고 자식이 아비를 시해하며 제후의 나라가 서로 도륙屠戮하여 다투어 군주가 되려고 한 것은 천하가 모두 그러하였다.
이러한 때에 한 사람이 있었으니, 염치를 좋아하고 양보할 줄 알아 서로 군위君位를 쟁탈하던 난세亂世에 우뚝 서서 군위를 물려주려는 고절高節을 품었다면 공자孔子가 이를 알았을 것이다.
공자가 에 어떻게 분변하여 명백히 하며, 어떻게 찬미하여 드러나게 하였겠는가.
은공隱公섭위攝位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서 여러 군주의 예를 그대로 따라 기록하고 속여서 이라고 하려 하였겠는가.
이른바 섭정攝政이라는 것은 신하가 군주의 일을 대신 행하는 데 대한 명칭이다.
이윤伊尹, 주공周公, 공화共和와 같은 신하가 일찍이 섭정攝政하였지만 나라와 나라 사람들이 이라고 이르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가령 식고息姑가 실제 섭정하였더라도 칭호가 정군正君과 다름이 없었다면 명분이 바르지 않고 시비가 분변되지 않는다.
대저 섭정이라는 것은 마음은 군주가 되려고 하지 않지만 몸은 군주의 일을 대신 행하는 것이니, 비록 군주의 일을 행하더라도 실제는 군주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춘추春秋》에 ‘’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식고息姑의 마음은 군주가 되려고 하지 않았고 실제 군주가 되지 않았는데, 공자孔子가 〈‘’이라는 명칭을〉 더하여 식고의 본심本心을 해치고 허명虛名으로 속여서 실제의 을 없앤 것이다.
식고의 정황을 상고하지 않으며 사실을 탐구하지 않아서 선악善惡이 밝혀지지 않음이 이와 같다면 공자의 뜻은 엉성하고 《춘추》는 그릇된 것이다.
춘추春秋》는 말에 차이가 있어서 더욱 근엄謹嚴하고 간이簡易하다.
이 때문에 의혹을 분변하고 미세함을 밝혀서 신중하여 믿음을 받았으니, 시비是非선악善惡이 밝혀지기 어려운 때에 성인이 마음을 다한 것이다.
식고息姑가 섭정할 때에 회맹會盟정벌征伐, 상형賞刑제사祭祀를 모두 자신이 주관하여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명을 들었으니, 정군正君이 되지 못한 것이 얼마였는가.
즉위했다는 명분을 가지지 못하였을 뿐이니, 가령 명분과 실제가 모두 자신에게 있었다면 어떻게 그가 섭정하였다는 사실을 알았겠는가.
그러므로 식고息姑가 섭정을 했는지 섭정을 하지 않았는지는 이라고 하였는지 이라고 하지 않았는지에 달려 있을 뿐이니, 의혹을 분변하고 미세함을 밝히는 것이 여기에 매여 있을 뿐이다.
환공桓公에게 군위를 물려주려는 뜻을 미처 실행하기도 전에 살해되었으니, 살아서는 뜻을 펴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허명虛名을 뒤집어쓰고 본심本心과 어긋났으니, 식고息姑의 한을 어찌 후세에 펼 수 있겠는가.
식고息姑의 매우 높은 절개와 밝히기 어려운 선심善心을 또한 어찌 《춘추》에 바라겠는가.
지금 《춘추春秋》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모두 명자名字씨족氏族이 기록되었느냐 기록되지 않았느냐로 경중輕重을 삼는다.
그러므로 “한 글자가 포폄褒貶이 된다.”라고 한다.
또 ‘’이라는 글자가 어찌 명자名字씨족氏族보다 중하지 않겠는가.
공자孔子명자名字씨족氏族에 있어서 망령되이 남에게 더하지 않았으니, ‘’이라는 글자를 망령되이 남에게 더하여 그 실상을 없애려 하였겠는가.
이로써 말하건대, 은공隱公이 실제로 섭정하였다면 공자가 결코 공이라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가 공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은공은 결코 섭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변론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즉위卽位라고 기록하지 않았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혜공惠公이 세상을 떠난 일이 나라 역사에 보이지 않으니, 은공隱公이 처음 즉위한 시기를 또한 알 수 없다.
공자孔子는 200년 뒤에 태어나서 유서遺書를 얻어서 《춘추春秋》를 편수編修하였으니, 모르는 일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확실한 내용을 후세에 전하려는 의도였다.”라고 하였다.
변론하는 자들이 또 말하기를 “섭정하였다고 이른 자는 좌구명左丘明이고, 공양고公羊高곡량적穀梁赤은 모두 ‘대신 즉위하여 환공桓公이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므로 이라고 가칭假稱한 것이다.’ 하였다.”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라의 정사가 은공 자신에게 비롯되었고 온 노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명을 들었으며, 살아서는 ‘’이라고 일컬었고 죽어서는 ‘’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어떻게 가칭임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春秋論中 : 이 글은 隱公이 攝政한 문제를 중심으로 논술을 전개하였다. 작자가 《春秋》에 은공을 ‘公’이라고 일컬은 것에 포착하여, 여기에 의거하여 사실을 논하고 이치를 분석하여 三傳에 이른바 은공이 섭정했다는 설이 근거가 없음을 밝혔다.
역주2 有一人焉 : 魯 隱公을 가리킨다.
역주3 懷讓國之高節 : 隱公은 惠公의 繼室인 聲子의 소생으로, 仲子의 소생인 桓公을 임금으로 세워 부친의 뜻을 이루어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환공이 어렸기 때문에 그를 太子로 세우고 대신 攝政하였다.
역주4 共和 : 周나라 사람으로 共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共和라고 일컬어지며, 伯爵을 지냈기 때문에 共伯和라고도 일컬어진다. 仁義를 행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제후들이 이를 높이고 어질게 여겼다. 周 厲王이 彘로 달아나자 天子의 일을 攝行하였다. 《竹書紀年 下》
역주5 息姑 : 춘추시대 魯 隱公의 이름이다. 惠公의 長庶子로 혜공이 죽자 태자 軌가 어렸기 때문에 추대되어 11년 동안 攝政하다가 공자 翬의 참소로 시해되었다.
역주6 傳信 : 확실한 내용을 기록해서 후세에 전한다는 말이다. 《春秋左氏傳》 桓公 5년에 “봄 정월 甲戌 己丑에 陳侯 鮑가 죽었다.[春正月 甲戌 己丑 陳侯鮑卒]”라고 하였는데, 《春秋穀梁傳》에 “어찌하여 죽은 날짜를 두 개나 기록하였는가? 《춘추》의 원칙을 보면, 사건이 확실한 것은 확실하게 기록하고 의심되는 것은 의심되는 대로 기록해두기 때문이다.[卒何爲以二日卒之 春秋之義 信以傳信 疑以傳疑]”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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