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之書는 本於兵하니 兵之術非一이요 而以不窮爲奇하니
然前世言善用兵稱曹公하니 曹公嘗與董呂諸袁으로 角其力而勝之하야 遂與吳蜀分漢而王이라
傳言魏之諸將이 出兵千里에 每坐計勝敗하야 授其成算이어든 諸將用之에 十不失一이요 一有違者면 兵輒敗北라
然武嘗以其書干
어늘 闔閭用之
하야 西破楚
하고 北服齊晉
하야 而霸諸侯
하니
夫使武自用其書에 止於彊霸하고 及曹公用之하얀 然亦終不能滅吳蜀하니 豈武之術이 盡於此乎아
後之學者徒見其書하고 又各牽於己見이라 是以로 注者雖多而少當也라
獨吾友聖兪는 不然하야 嘗評武之書曰 此戰國相傾之說也라
然亦愛其文略而意深하고 其行師用兵料敵制勝이 亦皆有法하고 其言甚有次序로되
乃自爲注하야 凡膠於偏見者를 皆排去하고 傅以己意而發之하니 然後武之說不汨而明이라
吾知此書當與三家竝傳이요 而後世取其說者 往往於吾聖兪多焉이라
매성유梅聖兪가 주석을 단 《손자孫子》에 서문을 쓴 것이므로 그 의론이 이와 같은 것이다.
세상에 전하는 《손자孫子》 13편은 대부분 조공曹公‧두목杜牧‧진호陳皥의 주석을 쓰니, 《삼가손자三家孫子》라고 부른다.
내가 근자에 《사고서목四庫書目》의 편찬에 참여하였는데 《손자》에 주석을 단 자가 〈삼가 외에도〉 더욱 많음을 보았다.
손무孫武의 책은 병법兵法에 근본한 것이니, 병술兵術은 한 가지가 아니요 무궁無窮함을 뛰어난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해설한 자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릇 사람이 지혜를 쓰는 것은 장단長短이 있고 그 베푸는 것도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그 해설이 편견에 사로잡히기도 하나 이른바 삼가三家에서 벗어나는 자는 없다.
삼가三家의 주석 가운데 진호의 주석이 가장 나중에 나왔으니, 그 해설이 때때로 두목의 단점을 공박하였다.
두목은 또한 개연히 병법에 대해 논하기를 가장 좋아하여 병법을 시험해보고자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자이니, 그 학문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일을 매우 폭넓고 상세하게 말해내었다.
그러나 지난 세상에 용병用兵을 잘한 이를 말할 때에는 조공曹公을 일컬으니, 조공은 일찍이 동탁董卓‧여포呂布‧원씨袁氏들과 힘을 겨루어 승리하여 마침내 오吳나라‧촉蜀나라와 함께 한漢나라의 땅을 나누어 왕이 된 사람이다.
전하는 말에 위魏나라의 장수들이 천 리 바깥으로 출병함에 조공이 매양 앉아서 승패를 헤아려 계책을 내려주면 장수들이 그 계책을 씀에 열에 하나도 잘못되지 않았고, 하나라도 어기는 것이 있으면 군대가 번번이 패배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위나라 시대에 용병할 때 모두 《맹덕신서孟德新書》를 따랐으니 그가 병법에 정묘함이 이와 같았다.
두목은 조공이 주석을 단 《손자》에 대해 더욱 요략要略하다고 하였다.
대개 조공은 자신이 터득한 병법이 알려지지 못하는 것을 애석해하여 스스로 한 권의 책을 지었으니, 이는 조공이 손무孫武의 병술兵術을 모두 터득한 것이다.
그러나 손무가 일찍이 자신이 지은 병서兵書를 가지고 오왕吳王 합려闔閭에게 자신을 써줄 것을 청하였는데, 합려가 손무와 그의 병법을 써서 서쪽으로는 초楚나라를 격파하고 북쪽으로는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를 굴복시켜 제후들을 제패制霸하였다.
대저 손무에게 스스로 그 병서를 사용하게 함에 오吳나라는 강한 패자가 되는 데 그쳤고, 조공이 그 병법을 씀에 이르러서는 위魏나라 역시 끝내 오吳나라와 촉蜀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손무의 병술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그 병법을 사용하는 자가 그 능력을 다하지 못한 것인가?
후세의 학자들은 한갓 그 책을 보기만 하고 또 각기 자기 견해에 구애拘礙되었기 때문에 주석을 낸 자들은 비록 많았으나 합당한 것은 적었다.
오직 나의 벗 매성유梅聖兪는 그렇지 않아 일찍이 손무의 병서를 평하여 이르기를 “이는 전국戰國시대 때 여러 나라들이 서로 다툴 때의 학설이다.
삼대三代 때 왕자王者의 군대에서 대사마大司馬가 아홉 가지 경우에 주벌誅伐하는 법에는 손무가 미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또한 그 글이 간략하고 뜻은 깊으며, 군대를 움직이고 병사를 부리고 적을 헤아려 승리를 거두는 것이 또한 모두 법도가 있으며, 그 말이 매우 차서次序가 있음을 좋아하였다.
그런데 주석을 내는 자들이 원의를 혼란시켜서 그 참뜻을 잃기도 하였다.
이에 스스로 주석을 달아 무릇 편견에 사로잡힌 것을 모두 제거하고 자신의 생각을 붙여서 그 뜻을 밝히니, 이렇게 한 뒤에야 손무의 학설이 혼란스럽지 않고 그 진의가 분명해졌다.
나는 〈매성유梅聖兪가 주석을 단〉 이 책이 마땅히 삼가三家의 책과 나란히 후세에 전해질 것이고, 후세에 《손자》의 해설을 볼 때에 왕왕往往 우리 매성유가 지은 주석을 보는 자가 많을 것임을 알겠다.
매성유는 사람됨이 근엄하고 질박하고 온후하고 공손하며 의관을 갖추고 행동하는 모습은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유자儒者의 모습이니, 후세에 이 책을 보는 자가 〈매성유를 생각하는 것이〉 장자방張子房이 장부壯夫일까 의심한 태사공太史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