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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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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소씨蘇氏문집文集에 대한 서문
予讀此文 往往欲流涕
내가 이 글을 읽음에 왕왕 눈물이 나려고 하였다.
專以悲憫子美爲世所擯死上立論이라
오로지 자미子美가 세상에 버림받아 죽은 것을 슬퍼하는 것으로 입론立論한 것이다.
予友蘇子美之亡後四年 始得其平生文章遺稿於之家하야 而集錄之하야 以爲十卷이라
나의 벗 소자미蘇子美가 죽은 뒤 4년에 태자태부太子太傅 두공杜公(두연杜衍)의 집에서 그가 평생에 남긴 문장의 유고遺稿를 비로소 얻어 집록集錄하여 10권으로 만들었다.
子美 杜氏壻也 遂以其集歸之하고 而告于公曰
자미子美두씨杜氏의 사위이므로, 마침내 집록한 10권을 주고 에게 말하기를
斯文 金玉也 棄擲埋沒糞土하야 不能銷蝕하야 其見遺于一時하니 必有收而寶之于後世者리라
“이 글은 금옥金玉과 같은지라 거름 속에 버려지고 매몰되더라도 손상되어 한때에 버림받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후세에 거두어 보배로 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雖其埋沒而未出이나 其精氣光怪 已能常自發見하야 而物亦不能揜也
비록 매몰되어 세상에 나오지 않더라도 정기精氣의 광채가 이미 늘 절로 발현되어 사물이 또한 가릴 수 없을 것입니다.
故方其擯斥摧挫流離窮厄之時 文章已自行於天下하야 雖其怨家仇人及嘗能出力而擠之死者라도 至其文章하얀 則不能少毁而揜蔽之也
그러므로 한창 배척排斥좌절挫折, 유리流離곤액困厄을 당할 때에도 문장은 이미 천하에 절로 유행되어 비록 원한이 있는 집안, 원수로 여기는 사람 및 일찍이 힘을 써서 죽음에 몰아넣었던 사람이라도 그의 문장에 대해서는 조금도 비난하여 엄폐하지 못하였습니다.
凡人之情 忽近而貴遠이니
사람들의 상정常情은 가까이 있는 것을 소홀히 하고 멀리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입니다.
子美屈于今世하되 猶若此하니 其伸於後世 宜如何也
자미子美가 당대에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도 문장에 대한 평가가 이와 같은데, 후세에 제대로 인정을 받게 된다면, 문장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겠습니까.
公其可無恨이로다
공은 아마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予嘗考前世文章政理之盛衰하고 而怪이로되 而文章不能革之餘習하고 後百有餘年 之徒出하니 然後元하고
내 일찍이 전세前世의 문장과 정치의 성쇠를 상고해보고 태종太宗치세治世를 이룬 것은 삼왕三王의 성대함에 가까웠지만 문장은 오대五代여습餘習을 혁파하지 못하였고, 100여 년 뒤에 한유韓愈이고李翶 등이 나온 뒤에야 원화元和의 문장이 비로소 고문을 회복하였다.
唐衰兵亂 又百餘年 而聖宋興하야 天下一定하야
그리고 당나라가 쇠퇴하고 병란이 일어난 지 또 100여 년 만에 성송聖宋이 흥기하여 천하가 한 번 평정되었다.
晏然無事 又幾百年 而古文始盛于今이라
그래서 편안하고 무사한 지 또 거의 100년 만인 지금에서야 고문이 융성한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自古治時少而亂時多 幸時治矣로되 文章或不能純粹하고 或遲久而不相及하니 何其難之若是歟
예로부터 잘 다스려진 시기는 적고 혼란했던 시기는 많았는데, 다행히 당시는 잘 다스려졌지만 문장은 혹 순수하지 못했고, 혹 문장의 성장이 더뎌 정치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이와 같이 어렵단 말인가.
豈非難得其人歟
아마도 그만 한 사람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苟一有其人 又幸而及出于治世 世其可不爲之貴重而愛惜之歟
만일 한 명이라도 그만 한 사람이 또 다행히 치세治世에 나온다면 세상이 그를 귀중하게 여기고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嗟吾子美 以一酒食之過 至廢爲民하야 而流落以死하니 此其可以歎息流涕하고 而爲當世仁人君子之職位宜與國家樂育賢材者 惜也로다
아! 우리 자미子美는 한 번 술을 마신 과실로 벼슬에서 쫓겨나 서민이 되어 유락流落하다 죽었으니 이는 탄식하고 눈물을 흘릴 만하고, 직위職位가 의당 국가와 함께 현재賢材를 육성할 수 있는 당세當世인인仁人군자君子가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다.
子美之齒 少於予 而予學古文 反在其後
자미子美의 나이는 나보다 적으나 내가 고문을 배운 것은 도리어 그보다 뒤이다.
하야 見時學者務以 號爲時文하야 以相誇尙이어늘 而子美獨與으로 作爲古謌詩雜文하니
천성天聖 연간에 나는 진사시進士試에 참여하도록 유사有司에게 천거되어 〈경사京師에 가서〉 보니, 당시의 학자들이 언어言語성운聲韻대우對偶전고典故 등에 힘을 쏟아 시문時文이라 하면서 서로 자랑하였는데, 자미子美만은 그의 형 재옹才翁목참군穆參軍 백장伯長과 함께 고시가古詩謌잡문雜文을 지었다.
時人頗共非笑之로되 而子美不顧也러라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비웃었지만 자미子美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其後하니 由是 其風漸息而學者稍趨於古焉이어늘
그 뒤에 천자天子시문時文의 풍조에 대한 폐단을 걱정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학자들에게 고문古文에 가깝게 글을 쓰도록 면려하니, 이를 계기로 시문時文의 풍조는 차츰 사라지고 학자들은 차츰 고문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獨子美爲於擧世不爲之時 其始終自守하야 不牽世俗趨舍하니 可謂特立之士也로다
그런데 유독 자미子美만은 온 세상이 하지 않았던 시기에 시종일관 스스로 지켜 세속의 호오好惡에 휩쓸리지 않았으니, 이른바 특립독행特立獨行한 선비라 이를 만하다.
子美官至大理評事集賢校理而廢하고 後爲湖州長史以卒하니 享年四十有一이라
자미子美는 관직이 대리평사大理評事 집현교리集賢校理에 이르렀다 파직罷職되었고, 후에 호주장사湖州長史가 되어서 죽었으니 향년 41세였다.
其狀貌奇偉하야 望之昂然하되 而卽之溫溫하고 久而愈可愛慕
그의 용모는 뛰어나고 훤칠하여 멀리서 보면 우뚝하여 범접하지 못할 것 같지만 가까이 가면 온화하였고, 사귐이 오래될수록 더욱 아끼고 경모할 만하였다.
其材雖高 而人亦不甚嫉忌하니
그의 재주가 비록 높았지만 사람들은 또한 심하게 시기하지 않았으니, 그를 배격하여 조정에서 내친 것은 목적이 자미子美에게 있지 않았다.
賴天子聰明仁聖하야 凡當時所指名而排斥二三大臣而下欲以子美爲根而累之者 皆蒙保全하야 今竝列於榮寵하고 雖與子美同時飮酒得罪之人 多一時之豪俊하되 亦被收采하야 進顯于朝廷이어늘
천자天子총명聰明인성仁聖에 힘입어, 무릇 당시에 지명되어 배척을 받은 한두 명의 대신 이하, 자미子美근주根柱로 삼아 연루시키고자 했던 이들은 모두 몸을 보전하여 지금 조정의 높은 자리에 있고, 비록 자미子美와 함께 술을 마신 일로 죄를 얻은 사람도 대부분 한때의 준걸이라 또한 모두 등용되어 조정에 나아와 현달하였다.
而子美獨不幸死矣 豈非其命也
그러나 자미子美만은 불행히도 죽었으니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悲夫
슬프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宋 仁宗 皇祐 3년(1051)에 지은 것이다. 歐陽脩가 蘇舜欽 死後 4년에 그의 遺文을 모아 10권으로 만들고 이 서문을 지었다.
蘇氏는 蘇舜欽(1008~1048)이다. 北宋 綿州 鹽泉 사람으로 字는 子美, 號는 滄浪翁이다. 蘇舜元의 동생이다. 仁宗 景祐 원년(1034) 進士에 합격했다. 天聖 연간에 학자들이 對偶에 얽매이는 병폐를 보였는데, 홀로 穆修와 함께 古文詩歌를 즐겨 지으면서 당시 호걸들과 많이 교유했다. 慶曆 4년(1044) 范仲淹의 천거로 集賢校理로 있으면서 進奏院을 감독했다. 杜衍과 范仲淹이 新政을 주도하자 자주 모함을 받았는데, 故紙를 판 公錢을 사용하여 妓樂을 불러 빈객과 연회를 열다가 제명되었다. 이후 蘇州에 은거하면서 滄浪亭을 짓고 시와 술로 시름을 달랬다. 西昆體의 화려한 문풍에 반대하고 고문운동을 제창했다. 풍격은 호방하고 朴實했다. 나중에 湖州長史로 있다가 죽었다. 저서에 《蘇學士集》이 있고, 梅堯臣과 함께 ‘蘇梅’로 불렸다.
역주2 太子太傅杜公 : 杜公은 杜衍(978~1057)이다. 北宋 越州 山陰 사람으로 字는 世昌, 시호는 正獻이다. 進士 甲科를 거쳐 慶曆 3년(1043) 吏部侍郞樞密使가 되어 富弼‧范仲淹 등과 함께 폐정을 개혁하였다. 다음 해 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太子少傅로 致仕하였다. 祁國公에 봉해졌다. 獄訟 심리를 잘했고, 특히 관리의 부정을 용납하지 않는 청렴한 정치가로 이름이 났다. 詔書를 10여 회나 도로 봉하여 황제 앞에 바친 일로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은 신하의 표본으로 후세에 알려졌다.
역주3 唐太宗致治 幾乎三王之盛 : 《新唐書》 권2 〈太宗紀〉에 “성대하다. 太宗의 功烈이여. 隨나라의 난을 진압한 것은 湯王과 武王에 비견되고, 정치의 아름다움은 成王과 康王에 가까웠으니, 예로부터 功과 德이 둘 다 융성했던 것은 漢나라 이래로 없었다.”라고 하였다.
역주4 五代 : 唐나라 때에는 宋ㆍ齊ㆍ梁ㆍ陳ㆍ隋로 五代를 삼았으니, 이를 前五代라 하고, 宋나라 이후에는 後梁ㆍ後唐ㆍ後晉ㆍ後漢ㆍ後周로 五代를 삼았으니, 이를 後五代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前五代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역주5 韓李 : 韓愈와 李翶를 가리킨다. 韓愈(768~824)는 唐나라 河南 河陽 사람으로 字는 退之, 시호는 文이며, 昌黎先生으로도 불린다. 德宗 貞元 8년(792) 進士가 되었다. 國子博士와 中書舍人을 거쳐 元和 12년(817) 吳元濟의 반란을 평정할 때 공을 세워 刑部侍郎이 되었지만, 14년(819) 憲宗이 佛骨을 모신 것을 간하다가 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후에 吏部侍郞과 京兆尹까지 올랐다. 宋나라 이후 道學의 선구자가 되었고, 古文運動의 領袖로 唐宋八大家 중에 한 명이다. 저서에 《昌黎先生集》이 있다.
李翶(772~841)는 당나라 隴西 趙郡 사람으로 字는 習之, 시호는 文이다. 貞元 14년(798) 進士가 되고, 考功員外郞, 中書舍人, 山南東道節度使 등을 역임했다. 梁肅에게 수학했고, 韓愈의 친한 벗이자 姪壻로 그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韓李’라 불렸다. 문체가 웅혼하여 당시 명성을 얻었다. 유가사상을 숭상하여 孔孟의 도를 지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라 여겼다. 저서에 《李文公集》이 있다.
역주6 元和之文 始復于古 : 元和는 唐 憲宗의 연호(806~820)로 이때에 韓愈와 李翶가 활동하였다.
역주7 天聖之間 予擧進士于有司 : 歐陽脩의 〈行狀〉에 “仁宗 天聖 원년(1023) 17세 때 처음으로 隨州의 鄕試를 보았지만 그의 用韻이 官韻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낙방하였고, 天聖 5년(1027)에는 禮部試(進士試)에 낙방하였다. 天聖 6년(1028), 당시의 名士인 胥偃을 찾아가 자신이 지은 글을 보여주었다. 胥偃은 歐陽脩의 문장에 감탄하여 歐陽脩를 자신의 문하에 받아들였다. 그해 겨울 歐陽脩는 胥偃과 함께 宋나라의 수도인 開封으로 갔고, 天聖 7년(1029) 봄에 國子監에서 거행한 考試에서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가을에는 國學의 解試에서 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天聖 8년(1030), 24세 때 歐陽脩는 정월에 禮部試에 수석으로 급제하였고 3월에는 崇政殿 御試에서 甲科 14等으로 합격하여 將仕郞, 試祕書省校書郞, 西京留守推官에 임명되었다.”라고 하였다. 有司는 해당 일을 주관하는 관원을 이른다.
역주8 言語聲偶摘裂 : 言語는 言語를 彫琢하여 꾸미는 것을 말하고, 聲偶는 聲韻과 對偶를 강구하는 것을 말하며, 摘裂은 前人의 문장에 있는 語句 등을 따내고 갈라놓는다는 뜻으로 典故를 인용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9 其兄才翁 : 才翁은 蘇舜元(1006~1054)의 字이다. 北宋 綿州 鹽泉 사람이다. 仁宗 天聖 7년(1029)에 進士出身이 내려졌다. 慶曆 3년(1043) 太常博士가 되고, 尙書度支員外郞, 三司度支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詩歌는 豪健했으며, 草書를 잘 썼다.
역주10 穆參軍伯長 : 伯長은 穆修(979~1032)의 字이다. 北宋 鄆州 汶陽 사람이다. 眞宗 大中祥符 2년(1009)에 進士가 되었다. 潁州와 蔡州의 文學參軍을 지냈다. 五代 이래 화려하기만 한 西崑體의 문풍에 불만을 품고 柳開의 뒤를 이어 古文을 회복하기에 전념했다. 韓愈와 柳宗元의 문집을 간행하고, 직접 開封府 相國寺에서 이를 판매했다. 저서에 《穆參軍集》이 있다. 北宋 詩文 혁신운동의 선구자다.
역주11 天子患時文之弊 下詔書諷勉學者以近古 : 《宋史》 권11 〈仁宗紀〉에 “天聖 7년(1029) 5月 庚申日에 조서를 내려 文弊를 경계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시기인 듯하다.
역주12 其擊而去之者 意不在子美也 : 王拱辰 등이 蘇舜欽을 무함한 것은 慶曆 연간에 新政을 추진한 參知政事 范仲淹‧樞密副使 富弼‧宰相 杜衍 등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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