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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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佳致
脩再拜하노라
人至辱書하니 甚慰
窮僻而多山林之景하고 又嘗得賢士君子居焉이라
脩在滁之三年하야 與處甚樂이라
每登臨覽泉石之際 惟恐其去也러니 其後徙官廣陵하야 忽忽不逾歲而求潁하고 在潁逾年 差自適이라
然滁之山林泉石與杜君共樂者 未嘗輒一日忘于心也
今足下在滁而與居하니 足下 知道之明者 固能達于進退窮通之理하니
能達於此而無累於心然後 山林泉石 可以樂이요 必與賢者共然後 登臨之際 有以樂也
足下所得 與脩之得者 同而有小異者하니
脩不足以知道 獨其遭世憂患多하야 齒髮衰
因得閒處而爲宜爾 此爲與足下異也
不知
足下之樂 惟恐其去 能與脩同否
況足下學至文高하니 宜有所施於當世 不得若某之戀戀이니
此其與某異也
得陳君所寄하야 覽其景物之宛然하고 復思二賢相與之樂하니 恨不得追逐于其間이라
因人還草率호라


08. 이대림李大臨 학사學士에게 답한 편지
운치가 좋다.
재배再拜합니다.
보낸 사람이 와서 편지를 받으니, 매우 위안이 됩니다.
영양永陽은 궁벽하되 산수의 경치가 많고 또 일찍이 어진 사군자士君子를 얻어서 함께 지냈습니다.
내가 저주滁州에 있은 지 3년 동안에 박사博士 두군杜君을 얻어 함께 지냄이 매우 즐거웠습니다.
매양 천석泉石을 유람할 때마다 오직 그가 떠날까 걱정하였는데, 그 후 광릉廣陵으로 이임移任한 뒤 어느덧 한 해를 넘기기도 전에 영주潁州로 이임해달라고 자청하였고 영주에 있은 뒤로 해를 넘기자 다소 편안해졌습니다.
그러나 저주의 산림山林 천석泉石두군杜君과 함께 즐거웠던 시간들이 하루도 마음에 잊힌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족하는 저주滁州에서 진군陳君을 만나 함께 지내고 있으니, 족하는 도를 아는 현명한 분이라 진퇴進退궁통窮通의 이치에 통달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치에 통달해서 마음에 속박이 없어진 뒤에야 산림山林 천석泉石을 즐길 수 있으며, 반드시 어진 이와 함께한 뒤에야 경치를 구경할 때 즐거울 수 있는 법입니다.
족하가 얻은 바가 내가 얻은 바와 같으면서도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나는 도를 알지 못하고 단지 세상의 우환을 많이 만나 치아와 머리털이 쇠하였습니다.
그래서 한적한 곳을 얻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니, 이것이 족하와 다른 점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족하가 즐거워할 때 오직 진군이 떠날까 염려하는 것이 나와 같을 수 있습니까?
더구나 족하는 학문이 지극하고 문장이 고상하니, 의당 당세에 능력을 발휘할 일이 있을 터라 나처럼 연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와 다른 점입니다.
진군陳君이 부친 두 폭의 그림을 받아서 그 완연한 경물을 보고 다시 두 분이 서로 함께 사귀던 즐거움을 상상하노라니, 그곳에서 함께 어울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편지를 갖고 온 사람이 돌아가기에 대략 씁니다.


역주
역주1 答李大臨學士書 : 이 편지에서 “내가 滁州에 있은 지 3년 동안에 博士 杜君을 얻어 함께 지냄이 매우 즐거웠습니다. 매양 泉石을 유람할 때마다 오직 그가 떠날까 걱정하였는데, 그 후 廣陵으로 移任한 뒤 어느덧 한 해를 넘기기도 전에 潁州로 이임해달라고 자청하였고, 영주에 있은 뒤로 해를 넘기자 다소 편안해졌습니다.”라고 하였는데, 歐陽脩는 滁州 수령으로 있다가 慶曆 8년(1048) 閏 정월에 揚州 수령으로 옮겨갔고, 皇祐 원년(1049) 정월에 자청하여 潁州 수령으로 옮겨 皇祐 2년 봄, 여름 사이에 任所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이해 가을 7월에 구양수는 知應天府로 또 이임한다. 따라서 이 편지는 仁宗 皇祐 2년(1050) 봄과 여름 사이에 潁州 수령으로 있을 때 지은 글일 것으로 추정된다.
李大臨은 자가 才元이고 成都 華陽 사람이다. 그는 秘閣校理로 있다가 試官을 맡아서 聲韻이 맞지 않은 답안을 쓴 사람을 잘못 뽑았다가 監滁州稅로 좌천되었는데, 이때 구양수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역주2 永陽 : 滁州의 이칭이다. 唐나라 때 저주가 永陽郡으로 바뀌었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저주가 되었기 때문에 宋나라 때에도 영양이라 부르기도 한 것이다. 지금의 安徽 滁州市 지역이다.
역주3 博士杜君 :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역주4 事陳君 : ‘事’자가 本集에는 ‘得’자로 되어 있는데, ‘得’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陳君이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역주5 : 四庫全書本 《文忠集》과 《唐宋八代家文抄》에는 ‘二’자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자로 생각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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