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9. 왕언장王彦章화상畫像에 대한 기문記文
以敍事 行議論하니 其感慨處 多情이라
서사敍事의 방법으로 의론議論을 펼쳤으니, 감개感慨한 부분에 정회情懷가 많다.
王公 諱彦章이요 字子明이니 人也
태사太師 왕공王公언장彦章이요 자명子明이니, 운주鄆州 수장壽張 사람이다.
事梁爲하야 以身死國하야 葬於하고二年 始贈太師하니라
후량後梁을 섬겨 선의군절도사宣義軍節度使가 되어 자신의 몸을 바쳐 순국殉國하여 정주鄭州관성管城에 장사 지냈고 후진後晉 천복天福 2년(937)에 비로소 태사太師로 증직되었다.
公在梁 以智勇聞하니之爭數百戰 其爲勇將 多矣로되 而晉人獨畏彦章이러라
공이 후량에 있을 적에 지혜와 용맹으로 알려졌으니, 후량과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수백여 차례의 전쟁에 용맹한 장수가 많았지만 진인晉人들은 유독 왕언장을 두려워하였다.
常與晉戰하야 屢困於河上하고
건화乾化 이후로부터는 항상 나라와 전투하여 여러 차례 하상河上에서 장종莊宗을 곤경에 빠뜨렸다.
及梁末年하야 하야 梁之大臣老將 多以讒不見信하야 皆怒而有怠心하고 而梁亦盡失河北하야 事勢已去
그리고 후량 말년에 이르러 소인小人조암趙巖 등이 권력을 잡고서 정사를 마음대로 하여 후량의 대신大臣노장老將들이 대부분 참소로 신임을 받지 못하게 되자 모두 노여워하며 나태한 마음이 생겼고, 후량 또한 하북河北의 땅을 거의 잃어 사세가 이미 기울어지게 되었다.
諸將多懷顧望하되 獨公奮然自必하야 不少屈懈하니 志雖不就 卒死以忠이라
그리하여 여러 장수들이 대부분 사세를 관망하는 마음을 품었으나 공만은 분연히 굳건하게 흔들림 없는 자세를 취하여 조금도 굽히거나 나태하지 않았으니, 뜻은 비록 성취하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죽음으로 충성하였다.
公旣死 而梁亦亡矣 悲夫
공이 죽고 나자 후량 또한 멸망하였으니 슬프도다!
五代終始 纔五十年 而更十有三君하야 五易國而八姓하니 士之不幸而出乎其時하야 能不汙其身하고 得全其節者鮮矣
오대五代 시기가 겨우 50년밖에 되지 않는데 13명의 황제가 교체되면서 다섯 번 나라가 바뀌고 여덟 개의 성씨가 갈렸으니, 선비로 불행히도 그때에 태어나 그 몸을 더럽히지 않고 그 절의를 온전히 할 수 있었던 자가 드물다.
公本武人이니 不知書하고 其語質이라
공은 본래 무인武人이니 글을 알지 못하고 그 말도 질박하였다.
平生嘗謂人曰 豹死留皮하고 人死留名이라하니 蓋其義勇忠信 出於天性而然이라
평소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 의용義勇충신忠信이 천성에서 나와 그러한 것이었다.
予於 竊有善善惡惡之志
내가 《오대사기五代史記》를 편찬할 적에 한 것을 선하게 여기고 한 것을 미워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至於公傳하야 未嘗不感憤歎息호되 惜乎舊史殘略하야 不能備公之事러니
그리하여 공의 을 지음에 이르러 비분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되, 아쉽게도 《구오대사舊五代史》의 기록은 누락되고 소략하여 공의 사적을 자세히 기록하지 못하였다.
하야 求於滑人하야 得公之孫睿所錄家傳하니 頗多於舊史
강정康定 원년(1040)에 내가 절도판관節度判官으로 이곳에 와서 활주滑州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공의 손자 가 기록한 가전家傳을 얻어 보니, 《구오대사舊五代史》의 기록보다 사적이 퍽 많았다.
其記 尤詳하고
덕승德勝 전투를 기록한 것은 더욱 상세하였고,
또 ‘말제末帝가 공을 쓰려 하지 않는 것에 경상敬翔이 노하여 말제 앞에서 스스로 목을 매려고 하였으며, 공이 을 가지고 산천山川을 그어 보인 일로 인하여 어사御史의 탄핵을 받고 폐출을 당하였다.’고 하였으며,
又言公五子 其二 同公死節이라하니 此皆舊史無之
또 ‘공의 다섯 아들 중에 두 아들이 공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구오대사舊五代史》에는 없는 기록이다.
又云公在滑 以讒自歸於京師라하야늘 而史云召之
또 가전에는 ‘공이 활주滑州에 있을 때에 참소를 받고 스스로 경사京師로 돌아왔다.’고 하였는데, 《구오대사舊五代史》에서는 ‘소명召命을 받았다.’고 하였다.
是時 梁兵盡屬段凝이요 京師羸兵 不滿數千이라
그리고 이때에 후량의 병사들이 모두 단응段凝에게 귀속되어 있었고, 경사京師는 나약한 병졸이 수천도 되지 않았다.
公得保鑾五百人하야 之鄆州하야 以力寡敗於어늘
공이 황제의 근위병 500명을 얻어 운주鄆州로 가서 병력이 부족하여 중도中都에서 패하였다.
而史云將五千以往者 亦皆非也
그런데 《구오대사舊五代史》에서는 ‘5,000명을 거느리고 갔다.’고 하였으니 또한 모두 잘못된 기록이다.
公之攻德勝也 初受命於帝前하야 期以三日破敵하니 梁之將相聞者皆竊笑러니
공이 덕승德勝을 공격할 때, 처음에 말제末帝 앞에서 명을 받으면서 3일 만에 적을 격파하겠노라고 약속하니 이 말을 들은 후량의 장상將相들이 모두 몰래 비웃었다.
及破南城 果三日이라
그러나 덕승德勝남성南城을 격파하는 데에 과연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是時 莊宗在魏라가 聞公復用하고 料公必速攻하야 自魏馳馬來救로대 已不及矣
이때에 장종莊宗 땅에 있다가 공이 다시 기용되었다는 사실을 듣고는 공이 반드시 신속하게 공격할 것이라 예측하고서 에서 말을 달려 구원하러 왔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莊宗之善料 公之善出奇 何其神哉
장종이 예측을 잘하고 공이 기습을 잘 펼친 것이 어쩌면 그리도 신묘한가.
지금 나라에서 전쟁이 그친 지 40년인데 하루아침에 원호元昊가 반란하여 군사들이 패주하고 장수들이 살해되는 사태를 4, 5년이나 끌고 있으면서 공수攻守의 계책을 지금까지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予嘗獨持用奇取勝之議호되 而歎邊將屢失其機하니
내가 일찍이 기습하여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논의를 홀로 주장해왔는데, 변방의 장수들이 누차 그 기회를 놓쳐버린 것을 탄식하였다.
時人聞予說者 或笑以爲狂하고 或忽若不聞이라
당시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이 혹은 미쳤다고 비웃고 혹은 무시하면서 듣지 못한 것처럼 대하였다.
雖予 亦惑不能自信이러니 及讀公家傳이라가 至於德勝之捷하야 乃知古之名將 必出於奇然後能勝이라
나 자신조차도 나의 논의를 의혹스러워하면서 자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의 가전을 읽다가 덕승에서 승첩勝捷한 부분에 이르러서야 옛날의 명장은 반드시 기습을 펼친 후에 이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然非審於爲計者 不能出奇
그러나 계책을 자세하게 짜지 못하는 자라면 기습을 펼칠 수 없다.
奇在速하고 速在果하니 此天下偉男子之所爲 非拘牽常算之士可到也
기습은 신속함에 달려 있고 신속함은 과감함에 달려 있으니, 이는 천하의 위대한 대장부가 할 수 있는 일이지 평범한 계책에 얽매여 있는 선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每讀其傳 未嘗不想見其人이러니 後二年 予復來通判州事하야 歲之正月 過俗所謂鐵槍寺者라가 又得公畫像而拜焉하니
내가 그 을 읽을 때마다 공의 모습을 상상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더니, 2년 뒤 내가 다시 활주滑州통판주사通判州事로 와서 올해 정월에 세간에서 이른바 철창사鐵槍寺라고 하는 곳을 지나다가 다시 공의 화상畫像을 보고 절하였다.
歲久磨滅이로되 隱隱可見이라
화상은 세월이 오래되어 마멸되었으나 은은히 공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亟命工完理之하되 而不敢有加焉하니 懼失其眞也일새라
그리하여 급히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수선하게 하되 감히 채색을 더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공의 진모眞貌를 잃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公尤善用槍하니 當時號王鐵槍이라
공은 특히 창을 잘 다루었으니 당시에 왕철창王鐵槍이라고 불렸다.
公死巳百年이로되 至今俗猶以名其寺하고 童兒牧豎 皆知王鐵槍之爲良將也
공이 죽은 지 이미 백 년 세월이 흘렀는데 지금까지도 세간에서는 오히려 그 이름으로 절의 이름을 붙이고, 어린 아이들과 목동들도 모두 왕철창이 훌륭한 장수라는 것을 알고 있다.
一槍之勇 同時豈無리오마는 而公獨不朽者 豈其忠義之節使然歟
창 한 자루를 잘 다루는 용맹스러운 장수가 당시에 어찌 없었겠는가마는, 공의 이름만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것은 아마도 그 충의忠義의 절조가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畫已百餘年矣 完之 復可百年이라
공의 화상이 이미 백여 년의 세월을 지나왔으니, 보수하여 완전하게 만들면 다시 백 년 세월을 갈 수 있을 것이다.
然公之不泯者 不繫乎畫之存不存也로되 而予尤區區如此者 蓋其希慕之至焉耳이라
그러나 공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화상의 보존 여부와는 상관없을 것인데 내가 이처럼 더욱 정성을 쏟는 것은, 공을 앙모하는 마음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讀其書 尙想乎其人이온 況得拜其像하야 識其面目 不忍見其壞也
그 책을 읽어봄에 오히려 그 사람을 상상해볼 수 있거늘, 더군다나 그 화상에 절하고서 그 면목을 알게 된 터에 그 화상이 훼손된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다.
畫旣完 因書予所得者于後而歸其人하야 使藏之하노라
화상이 완성된 뒤에 내가 뒤에 알게 된 사실들을 기록하여 화상의 주인에게 보내어 보관하게 하노라.
唐荊川曰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此文 凡五段이니 一段是總敍其略이요 二段是言其能全節이요 三段是辨其事이요 四段是言其善出奇策이요 五段是寺中畫像之事
“이 글은 모두 다섯 단락이니, 첫 번째 단락은 그 대략을 총괄하여 서술하였고, 두 번째 단락은 왕언장이 절조를 온전히 했던 것을 말하였고, 세 번째 단락은 왕언장의 사적을 분별하였고, 네 번째 단락은 왕언장이 기습책을 잘 펼쳤던 것을 말하였고, 다섯 번째 단락은 철창사에 있는 왕언장의 화상의 일에 관한 것이다.
而通篇 以忠節善戰으로 分作兩項이나 然不見痕跡이라
그리고 전체 편은 충절忠節선전善戰 두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글을 지었으나 나눈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慶曆 3년(1043)에 지은 것이다. 王彦章(863~923)은 字가 子明 혹은 賢明으로 鄆州 壽長 사람이다. 젊은 시절부터 從軍하여 朱全忠의 휘하에서 무공을 쌓아 승진하였다. 당시 창을 잘 쓰는 것으로 명성이 나 王鐵槍으로 불렸다. 주전충이 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哀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後梁을 건국하자 開國侯에 봉해졌다. 항상 선봉에 서서 수많은 군공을 세웠으며 오랫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澶州刺史에까지 이르렀다. 그 후 참소를 당해 파직되기도 하였으며 後唐의 대군이 兗州를 공격했을 때 사로잡혀 항복을 요구받자 이를 거절하고 참수를 당하였다.
역주2 太師 : 三公 가운데 하나로 太師, 太傅, 太保를 三公이라 한다. 이 관직은 王彦章 사후에 贈職된 벼슬이다.
역주3 鄆州壽張 : 鄆州는 唐나라 때 河南道에 소속된 지역으로 治所가 지금의 山東省 東平 서북쪽인 須昌에 있었다. 壽張은 그 屬縣으로 지금의 山東縣이다.
역주4 宣義軍節度使 : 宣義軍은 治所가 지금의 河南省 滑縣인 滑州에 있었다.
역주5 鄭州之管城 : 鄭州의 治所가 管城으로 지금의 河南省 鄭州이다.
역주6 天福 : 後晉 高祖 石敬瑭의 연호이다.
역주7 : 後梁과 대립하던 後唐의 세력을 가리킨다. 後梁을 세운 朱全忠의 가장 큰 경쟁자는 晉王 李克用이었고 이극용이 병사한 뒤 그 작위를 세습한 李存勗은 마침내 後唐을 건국하여 後梁과 패권을 다투었다. 《新五代史》 〈死節傳〉에는 이존욱이 “왕언장이 용맹하여 나는 일찍이 그의 예봉을 피해 다녔다.[彦章驍勇 吾嘗避其鋒]”고 한 말이 실려 있다.
역주8 乾化 : 911~915년 사이에 사용된 後梁 太祖 朱全忠과 末帝 朱友貞의 연호이다. 애초에 주전충이 이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아들 朱友珪가 주전충을 살해하고 황제가 되어 鳳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주우정이 다시 주우규를 죽이고 황제가 되면서 아버지 주전충의 연호를 회복하였다. 주우정이 貞明으로 開元하기 전까지 2년(913~915) 동안 사용하였다.
역주9 莊宗 : 後唐을 건국한 李存勗을 가리킨다.
역주10 小人趙巖等 用事 : 趙巖은 後梁 末帝 때의 寵臣으로 당시 戶部尙書의 벼슬에 있었다. 張漢杰 등과 함께 권력을 손에 쥐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다. 《新五代史》 〈死節傳〉에 “후량 말제가 혼암할 때 소인인 조암과 장한걸 등이 권력을 잡고서 정사를 마음대로 하여 대신과 장수들이 대부분 참소와 이간질을 당하였다. 왕언장이 비록 招討副使가 되었으나 계책이 쓰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뒤에 후량이 멸망하자 조암은 許州로 달아나 溫韜에게 의지하였는데 온도는 조암을 죽여 莊宗에게 머리를 바쳤다.
역주11 五代書 : 구양수가 편찬한 《五代史記》를 가리킨다. 薛居正이 편찬한 《五代史》와 구분하여 구양수의 것을 《新五代史》, 설거정의 것을 《舊五代史》라고 한다.
역주12 康定元年 予以節度判官來此 : 康定은 宋 仁宗의 연호이다. 당시에 구양수가 武成軍節度判官이 되어 滑州에 갔다.
역주13 德勝之戰 : 德勝은 황하 가에 있던 古城의 이름으로 德勝寨, 夾寨라고도 불렀다. 後梁 貞明 4년(918) 12월에 晉王 李存勗이 濮陽을 취하였고, 그 다음 해에 晉將 李存審이 德勝에서 黃河를 끼고 남북쪽에 두 개의 성을 쌓았다. 그 후 龍德 3년(923)에 왕언장이 군사를 이끌고 기습하여 晉軍이 성의 방어를 위해 만들어놓은 쇠사슬과 부교를 파괴하고 南城을 급습하여 함락시켰다.
역주14 又言敬翔……欲自經於帝前 : 《新五代史》 〈死節傳〉에 “後梁 末帝 龍德 3년(923) 여름에 晉이 鄆州를 취하자 後梁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재상 敬翔이 일이 화급하다고 여겨 노끈을 신발 속에 넣고 들어가 末帝를 알현하고 울며 말하기를 ‘先帝께서 천하를 취하시고서 신을 불초하다 여기지 않으시어 제가 낸 계책을 다 써주셨습니다. 지금 강한 적을 멸하지 못하였는데 폐하께서는 신의 말을 버리고 소홀히 여기시니 신이 쓰이지 못할 바에야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이에 노끈을 꺼내어 스스로 목을 매려 하였다. 말제가 사람을 시켜 중지시키게 하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묻자, 경상이 말하기를 ‘事勢가 위급하니 왕언장이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말제가 이에 왕언장을 불러 招討使로 삼고 段凝을 副使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역주15 公因用笏畫山川 爲御史彈而見廢 : 《新五代史》 〈死節傳〉에 “楊劉에서 패전하자 段凝이 上書하여 말하기를 ‘왕언장이 술에 빠져 적을 경시하여 패배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趙巖 등이 조정에서 밤낮으로 그를 비방하니, 마침내 왕언장을 파직하고 단응을 招討使로 삼았다. 왕언장이 말을 달려 京師에 이르러 궁궐로 들어가 末帝를 알현하고 笏을 땅에다 그으면서 스스로 승패의 상황을 아뢰었는데, 조암 등이 有司에게 不恭罪로 왕언장을 탄핵하게 하여 강제로 집으로 돌려보냈다.”라고 하였다.
역주16 中都 : 唐나라 때 鄆州에 속해 있었던 고을 이름이다. 지금의 山東省 汶上縣 인근 지역이다.
역주17 今國家罷兵四十年……連四五年 : 宋 眞宗 景德 원년(1004)에 거란과 澶淵에서 맹약을 맺고 휴전하였는데, 구양수가 이 글을 쓴 시점이 그때로부터 40년째였다. 한편 仁宗 寶元 원년(1038)에 西夏의 趙元昊가 스스로를 大夏皇帝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글을 쓴 시점이 그로부터 5년째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