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一子
는 曰衛王宗仁 簡王元膺 趙王宗紀 豳王宗輅 韓王宗智 莒王宗特 信王宗傑 魯王宗鼎 興王宗澤 薛王宗平
이오 而鄭王宗衍最幼
어늘 其母徐
也
라
以母寵
으로 得立爲皇太子
하야 開
하야 置官屬
이러니 後更曰天策府
라
衍爲人方頤大口
요 垂手過膝
하고 顧
見耳
요 頗知學問
하야 能爲浮艷之詞
라
元膺死에 建以豳王宗輅貌類己하고 信王宗傑於諸子最材賢이라하야 欲於兩人擇立之로되
而徐妃專寵하고 建老昏耄라 妃與宦者唐文扆로 敎相士言衍相最貴하고 又諷宰相張格贊成之하니 衍由是得爲太子라
建卒
에 衍立
하야 諡建曰神武聖文孝德明惠皇帝
라하고 廟號高祖
하고 陵曰
이라하다
太后太妃以敎令賣官일새 自刺史以下로 每一官闕이면 必數人竝爭호되 而入錢多者得之하고 通都大邑에 起邸店하야 以奪民利라
衍年少荒淫
하야 委其政於宦者宋光嗣 光葆 景潤澄 王承休 歐陽晃 田魯儔等
하고 而以韓昭 潘在迎 顧在洵 嚴旭等爲
하고 起宣華苑
하니
苑有重光太淸延昌會眞之殿과 淸和迎僊之宮과 降眞蓬萊丹霞之亭과 飛鸞之閣과 瑞獸之門이오 又作怡神亭하야 與諸狎客婦人으로 日夜酣飮其中이라
嘗以九日宴宣華苑할새 嘉王宗壽以社稷爲言하니 言發流涕라
韓昭等曰 嘉王酒悲爾라하고 諸狎客共以慢言謔嘲之하니 坐上諠然이어늘 衍不能省也러라
蜀人富而喜遨러니 當王氏晩年하야 俗競爲小帽하니 僅覆其頂하야 俛首卽墮라 謂之危腦帽라
衍以爲不祥
이라하야 禁之
라 而衍好戴大帽
하야 每
出游民間
에 民間以大帽識之
라 因令國中皆戴大帽
라
又好裹尖巾하니 其狀如錐요 而後宮皆戴金蓮花冠하고 衣道士服한대 酒酣免冠에 其髻髽然하고 更施朱粉이라 號醉粧하니 國中之人皆效之라
嘗與太后太妃로 游靑城山할새 宮人衣服에 皆畫雲霞하니 飄然望之若僊이라
衍自作
하야 述其僊狀
하니 上下山谷
에 衍常自歌
하고 而使宮人皆和之
라 衍立之明年
에 改元
이라
乾德元年正月에 祀天南郊하고 大赦하고 加尊號爲聖德明孝皇帝하다
二年冬에 北巡하야 至于西縣하니 旌旗戈甲이 連亘百餘里라 其還也에 自閬州로 浮江而上할새 龍舟畫舸가 照耀江水어늘 所在供億을 人不堪命이라
五年
에 起上淸宮
하고 塑
像
하야 尊以爲聖祖至道玉宸皇帝
하고
又塑建及衍像하야 侍立於其左右하고 又於正殿에 塑玄元皇帝及唐諸帝하고 備法駕而朝之하다
承休以宦者得幸하야 爲宣徽使러니 承休妻嚴氏有絶色이라 衍通之라
是時에 唐莊宗滅梁하니 蜀人皆懼라 莊宗遣李嚴聘蜀하니 衍與俱朝上淸한대 而蜀都士庶와 簾帷珠翠가 夾道不絶이라
嚴見其人物富盛而衍驕淫하고 歸乃獻策伐蜀이라 明年에 唐魏王繼岌 郭崇韜伐蜀이어늘 是歲에 衍改元曰咸康하다
衍自立
으로 歲常獵于子來山
이러니 是歲
에 又幸彭州
漢州
이라가 以王承休妻嚴氏故
로 十月
에 幸秦州
하니 群臣切諫
이어늘 衍不聽
이라
行至
에 大風發屋拔木
한대 太史曰 此
는 貪狼風也
니 當有敗軍殺將者
라하야늘 衍不省
하다
衍至綿谷에 而唐師入其境하니 衍懼하야 遽還이라 唐師所至에 州縣皆迎降하니 衍留王宗弼守綿谷하고 遣王宗勳宗儼宗昱率兵以拒唐師어늘 宗勳等至三泉하야 望風退走라
衍詔宗弼誅宗勳等
한대 宗弼反與宗勳等合謀
하야 送欵於唐師
라 衍自綿谷還至成都
하니 百官及後宮迎謁七里亭
이어늘 衍雜宮人作
以入
이라
明日에 御文明殿하야 與其群臣相對涕泣이어늘 而宗弼亦自綿谷馳歸하야 登大玄門하야 收成都尹韓昭 宦者宋光嗣 景潤澄 歐陽晃等殺之하고 函首送于繼岌이라 衍卽上表乞降하니 宗弼遷衍于天啓宮이라
莊宗召衍入洛하야 賜衍詔曰 固當列土而封이니 必不薄人于險이라 三辰在上하니 一言不欺라하다
衍捧詔
하고 欣然就道
하야 率其宗族及僞宰相王鍇 張格
傳素 許寂 翰林學士李昊等及諸將佐家族數千人以東
하다
四年四月
에 行至秦川驛
에 莊宗用伶人景進計
하야 遣宦者向延嗣誅其族
이라 衍母徐氏臨刑呼曰 吾兒以一國迎降
이어늘 反以爲戮
하니 信義俱棄
라 吾知其禍不旋踵矣
라하다
衍妾劉氏
而有色
이라 行刑者將免之
어늘 劉氏曰 家國喪亡
에 義不受辱
이라하고 遂就死
하다
宗弼은 本姓魏요 名弘夫니 建錄爲養子라 建攻顧彦暉할새 宗弼常以建語로 泄之彦暉者어늘 彦暉敗에 建待之如初라
建病且卒에 宗弼守太師兼中書令 判六軍하야 輔政이라
宗壽는 許州民家子也니 建以同姓이라하야 錄之爲子라 宗壽好學하고 工琴奕하며 爲人恬退하야 喜道家之術러니 事建時에 爲鎭江軍節度使라
衍旣立에 宗壽爲太子太保 奉朝請하야 以煉丹養氣自娛라 衍爲淫亂에 獨宗壽常切諫之러니 後爲武信軍節度使러라
唐師伐蜀
에 所在迎降
이라 魏王常以書招之
어늘 獨宗壽不降
이라가 聞衍已
하고 大慟
하고 從衍東遷
하야 至岐陽
하야 以賄賂守者
하야 得入見衍
이라
衍泣下霑襟曰 早從王言
이면 豈有今日
이리오하다 衍死
에 宗壽至
러니 聞莊宗遇弑
하고 亡入
이라
二年
에 出詣京師
하야 上書求衍宗族
하야 葬之
라 明宗嘉其忠
하야 以爲保義軍行軍司馬
하고 封衍順正公
하고 許以諸侯禮葬
이라
嗚呼라 自秦漢以來로 學者多言祥瑞하니 雖有善辯之士라도 不能祛其惑也라
予讀
라가 至於龜龍麟鳳騶虞之類 世所謂王者之嘉瑞
하야는 莫不畢出於其國
하니 異哉
라 然考王氏之所以興亡成敗者
면 可以知之矣
라
或以爲一王氏不足以當之하니 則視時天下治亂하면 可以知之矣라
龍之爲物也는 以不見爲神이요 以升雲行天爲得志어늘 今偃然暴露其形하니 是不神也요 不上於天而下見於水中하니 是失職也라 然其一何多歟아 可以爲妖矣라
鳳凰은 鳥之遠人者也라 昔舜治天下에 政成而民悅한대 命䕫作樂하니 樂聲和하야 鳥獸聞之에 皆鼓舞라
하니 後世因以鳳來爲有道之應
이러니 其後
에 鳳凰數至
하야 或出於庸君繆政之時
하고 或出於危亡大亂之際
하니 是果爲瑞哉
아
麟
은 獸之遠人者也
라 昔魯哀公出獵
하야 得之而不識
하니 蓋索而獲之
요 非其自出也
라 라 西狩
는 非其遠也
요 獲麟
은 惡其盡取也
라
狩必書地어늘 而哀公馳騁所涉地多라 不可徧以名擧라 故書西以包衆地하니 謂其擧國之西皆至也라
麟은 人罕識之獸也니 以見公之窮山竭澤而盡取요 至於不識之獸히 皆搜索而獲之라 故曰 譏之也라
聖人已沒
에 而異端之說興
하야 乃以麟爲王者之瑞
하야 而附以
詭怪之言
이라 鳳嘗出於舜
하야 以爲瑞
는 猶有說也
어니와 及其後出於亂世
하야는 則可以知其非瑞矣
라
若麟者는 前有治世如堯舜禹湯文武周公之世하야 未嘗一出이라가 其一出而當亂世하니 然則孰知其爲瑞哉리오
龜는 玄物也라 汚泥川澤에 不可勝數로되 其死而貴於卜官者는 用適有宜爾어늘
夫破人之惑者는 難與爭於篤信之時요 待其有所疑焉이니 然後從而攻之可也니라 麟鳳龜龍은 王者之瑞어늘 而出於五代之際하고 又皆萃於蜀하니
此雖好爲祥瑞之說者라도 亦可疑也라 因其可疑而攻之면 庶幾惑者有以思焉이라
왕건王建의 아들 열한 명은 위왕衛王 왕종인王宗仁, 간왕簡王 왕원응王元膺, 조왕趙王 왕종기王宗紀, 빈왕豳王 왕종로王宗輅, 한왕韓王 왕종지王宗智, 거왕莒王 왕종특王宗特, 신왕信王 왕종걸王宗傑, 노왕魯王 왕종정王宗鼎, 흥왕興王 왕종택王宗澤, 설왕薛王 왕종평王宗平, 정왕鄭王 왕종연王宗衍이고, 왕종연이 가장 어렸는데 그 모친은 서현비徐賢妃이다.
모친이 총애를 받음으로 해서 왕연이 황태자皇太子로 책립冊立되어 숭현부崇賢府를 열고서 관속官屬을 두었는데 뒤에 천책부天策府로 개칭改稱하였다.
왕연은 위인爲人이 네모난 턱에 입이 컸고 팔을 늘어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내려갔고 눈을 돌려 귀를 볼 수 있었으며 자못 학문學問을 알아 부화浮華하고 염려艶麗한 글을 지을 수 있었다.
왕원응이 죽자 왕건은 빈왕 왕종로가 용모가 자신과 닮았고 신왕 왕종걸이 아들들 중에 가장 재주 있고 현능賢能하다고 하여 두 사람 중에서 뽑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서비徐妃가 총애를 독차지하였고 왕건이 늙어서 정신이 흐릿한지라 서비가 환관 당문의唐文扆와 함께 관상쟁이에게 왕연이 가장 귀상貴相이라고 아뢰게 하고 또 재상宰相 장격張格에게 찬성하도록 넌지시 말하니 왕연이 이로 인해 태자太子가 될 수 있었다.
왕건王建이 졸卒하자 왕연王衍이 즉위하여 왕건에게 신무성문효덕명혜황제神武聖文孝德明惠皇帝라고 시호諡號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고조高祖라고 하고 능묘陵墓는 영릉永陵이라고 하였다.
왕건의 정실正室 주씨周氏는 소성황후昭聖皇后로 칭하였는데 왕건이 졸한 며칠 뒤에 졸하였다.
왕연이 이에 자기 모후母后 서씨徐氏를 높여 황태후皇太后로 삼고 황태후의 여동생 숙비淑妃를 황태비皇太妃로 삼았다.
태후太后와 태비太妃가 교령敎令으로 관직을 팔았기에 자사刺史 이하로 관직 하나가 비기만 하면 반드시 여러 사람이 함께 다투되 돈을 많이 바치는 자가 관직을 차지하였고, 사통팔달四通八達의 도회都會에 여관旅館을 세워 백성들의 이익을 가로챘다.
왕연王衍은 연소年少한 데다 황음荒淫하여 국정國政을 환관 송광사宋光嗣, 송광보宋光葆, 경윤징景潤澄, 왕승휴王承休, 구양황歐陽晃, 전로주田魯儔 등에게 맡겨 두고 한소韓昭, 반재영潘在迎, 고재순顧在洵, 엄욱嚴旭 등을 압객狎客으로 삼았고 선화원宣華苑을 만드니
선화원에는 중광전重光殿, 태청전太淸殿, 연창전延昌殿, 회진전會眞殿과 청화궁淸和宮, 영선궁迎僊宮과 강진정降眞亭, 봉래정蓬萊亭, 단하정丹霞亭과 비란각飛鸞閣과 서수문瑞獸門이 있었고 또 이신정怡神亭을 지어 압객, 부인婦人 들과 함께 밤낮으로 그 안에서 술에 취해 지냈다.
일찍이 중양절重陽節이 되어 선화원에서 연회할 적에 가왕嘉王 왕종수王宗壽가 사직社稷이 위태롭다고 상언上言하였는데 말을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한소 등이 말하기를 “가왕께서 술에 취해 감정이 북받치셨을 뿐입니다.”라고 하고는 압객들이 함께 불공不恭한 말로 희학戲謔하고 조소하니 좌중이 소란하였는데 왕연은 깨닫지 못하였다.
촉蜀나라 사람들은 부유하고
오유遨遊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왕씨王氏 왕조의 말엽이 되자 민간에서 앞다투어 작은 모자를 만드니 정수리만 겨우 덮어 머리를 숙이면 바로 떨어지기에 이를
위뇌모危腦帽라고 하였다.
靑城山圖
왕연王衍이 이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금지하였다. 왕연은 큰 모자 쓰기를 좋아하여 매번 미복微服을 입고 민간에 나가 다닐 때면 민간民間에서 큰 모자를 보고 그를 알아보는지라 이로 인해 국중國中에 영令을 내려 모두 큰 모자를 쓰도록 하였다.
또 과첨건裹尖巾을 좋아하니 그 모양이 송곳과 같았다. 그리고 후궁後宮들은 모두 금연화관金蓮花冠을 쓰고 도사道士의 복장을 입었다. 술기운이 올라 관冠을 벗으면 그 상투가 머리 양쪽으로 땋아 올린 모양이고 게다가 붉은 분을 바른지라 취장醉粧이라고 부르니 국중國中 사람들이 모두 따라하였다.
일찍이 태후太后, 태비太妃와 함께 청성산靑城山을 노닐 때 궁인宮人의 의복에 모두 운하雲霞를 그렸는데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양이 바라보면 마치 신선 같았다.
왕연은 직접 〈감주곡甘州曲〉을 지어 그 신선 형상을 묘사하였는데 산곡山谷을 오르내릴 때 왕연이 늘 직접 노래 부르면서 궁인들 모두 따라 부르도록 하였다. 왕연이 즉위한 이듬해에 건덕乾德으로 개원改元하였다.
건덕乾德 원년元年(919) 정월正月에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성덕명효황제聖德明孝皇帝로 존호尊號를 더하였다.
건덕 2년(920) 겨울에 북쪽으로 순행巡行하여 서현西縣에 이르니 정기旌旗와 과갑戈甲이 백여 리에 이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낭주閬州로부터 강江을 따라 올라갈 때 용주龍舟와 채선彩船이 강물에 비춰 번쩍였는데 가는 곳마다 공물을 바치도록 한 명령을 사람들이 감당할 수가 없었다.
건덕 3년(921) 정월正月에 성도成都로 돌아왔다.
건덕 5년(923)에 상청궁上淸宮을 짓고 왕자진王子晉의 상像을 만들고서 높여 성조지도옥신황제聖祖至道玉宸皇帝로 삼고
또 왕건王建 및 왕연王衍의 상像을 만들어 그 좌우左右에 시립侍立하게 하고 또 정전正殿에 현원황제玄元皇帝 및 당唐나라 황제들의 상을 만들고는 법가法駕를 채비하여 가서 조현朝見하였다.
건덕乾德 6년(924)에 왕승휴王承休를 천웅군절도사天雄軍節度使로 삼으니 천웅군天雄軍은 진주秦州이다.
왕승휴는 환관으로 총애를 입어 선휘사宣徽使가 되었는데 왕승휴의 아내 엄씨嚴氏가 절색絶色의 미인이라 왕연王衍이 사통私通하였다.
이때에 당唐 장종莊宗이 양梁나라를 멸망시키니 촉蜀나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장종이 이엄李嚴을 보내 촉나라에 빙문聘問하니 왕연이 그와 함께 상청궁上淸宮에 조현朝見하였는데 촉나라 도성의 사인士人과 백성들, 발과 휘장과 주옥珠玉과 비취翡翠가 길 양편에 끊어지지 않았다.
이엄이 촉나라의 사람과 물자가 부성富盛하고 왕연이 교사驕奢하고 음란淫亂한 것을 보고 돌아가 이에 촉나라를 정벌할 계책을 올렸다. 이듬해에 당唐나라의 위왕魏王 이계급李繼岌과 곽숭도郭崇韜가 촉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이해에 왕연은 연호를 함강咸康(925)으로 고쳤다.
왕연은 즉위하고부터 해마다 늘 자래산子來山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이해에 다시 팽주彭州 양평산陽平山, 한주漢州 삼학산三學山에 거둥하였다가 왕승휴의 아내 엄씨를 만나려고 10월에 진주에 거둥하니 신료들이 간절하게 간언諫言하였는데도 왕연이 듣지 않았다.
재동梓潼에 이르렀을 때 거센 바람이 집채를 뒤흔들고 나무를 뽑을 정도였는데 태사太史가 말하기를 “이는 탐랑풍貪狼風이니 응당 군대를 패배시키고 장수를 죽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왕연이 깨닫지 못하였다.
왕연이 면곡綿谷에 이르자 당唐나라 군대가 촉나라의 국경에 쳐들어오니 왕연이 두려워서 서둘러 돌아왔다. 당나라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주현州縣들이 모두 맞이하여 투항하니 왕연이 왕종필王宗弼을 남겨 면곡을 지키고 왕종훈王宗勳, 왕종엄王宗儼, 왕종욱王宗昱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를 막게 하였는데, 왕종훈 등은 삼천三泉에 이르러 그들의 위세威勢를 보고는 달아났다.
왕연이 왕종필에게 왕종훈 등을 주벌하라고 조서詔書를 내렸는데 왕종필은 도리어 왕종훈 등과 함께 모의하여 당나라 군대에 화친을 청하는 국서를 보냈다. 왕연이 면곡에서 돌아와 성도成都에 이르니 백관百官 및 후궁後宮 들이 칠리정七里亭에서 맞이하여 알현하였는데 왕연이 궁인宮人들 사이에 섞여 회홀대回鶻隊를 이루어 들어갔다.
이튿날에 문명전文明殿에 나아와 신료들과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왕종필 또한 면곡에서 급히 돌아와 대현문大玄門에 올라 성도윤成都尹 한소韓昭, 환관 송광사宋光嗣, 경윤징景潤澄, 구양황歐陽晃 등을 잡아들여 죽이고 이들의 머리를 담아 이계급에게 보냈다. 왕연이 곧바로 표문表文을 올려 항복하기를 청하니 왕종필이 왕연을 천계궁天啓宮으로 옮겼다.
위왕 이계급이 성도에 이르자 왕연 이하 군신들이 손을 뒤로 묶고 관을 싣고 칠리정에 나와 항복하였다.
장종莊宗이 왕연王衍을 불러 낙양洛陽에 들어오게 하여 왕연에게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진실로 토지를 나누어 봉해줄 것이니 반드시 험지로 너희들을 몰지 않을 것이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위에 있으니 한 마디도 속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왕연이 조서를 받들고 흔쾌히 길에 올라 자신의 종족宗族 및 위재상僞宰相 왕개王鍇, 장격張格, 유전소庾傳素, 허적許寂, 한림학사翰林學士 이호李昊 등 및 각 장령將領과 요좌僚佐의 가족 수천 인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갔다.
동광同光 4년(926) 4월에 진천역秦川驛에 이르자 장종이 영인伶人 경진景進의 계책을 따라 환관 상연사向延嗣를 보내 그 가족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왕연의 모친 서씨徐氏가 형벌에 임하여 부르짖기를 “우리 아들이 일국一國을 가지고 맞이하여 투항하였는데 도리어 도륙屠戮하니 신의信義를 모두 팽개쳐 버린 것이다. 나는 그에게 재화災禍가 머지않아 내릴 것임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왕연의 첩妾 유씨劉氏는 검은 머리숱이 구름처럼 많으면서 미색美色이 있었다. 형벌을 집행하는 자가 형벌을 면해주려고 하였는데 유씨가 말하기를 “가국家國이 멸망한 마당에 의리로 볼 때 치욕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형장에 나아가 죽었다.
왕종필王宗弼은 본성本姓이 위魏이고 이름이 홍부弘夫니 왕건王建이 거두어 양자養子로 삼았다. 왕건이 고언휘顧彦暉를 공격할 때 왕종필이 늘 왕건의 말을 고언휘에게 전하였는데 고언휘가 패배하고 나서도 왕건이 처음처럼 그대로 그를 대하였다.
왕건이 병이 들어 졸하려 할 때 왕종필이 태사겸중서령太師兼中書令 판육군사判六軍事를 맡아 국정國政을 보좌하였다.
왕연王衍이 투항한 뒤에 왕종필은 촉蜀의 진보珍寶를 위왕魏王 및 곽숭도郭崇韜에게 바치고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가 되기를 청하니 위왕이 말하기를 “이는 우리 집안의 물건이니 어찌 바쳤다 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며칠 뒤에 곽숭도에게 살해되었다.
왕종수王宗壽는 허주許州의 평민의 자식이니 왕건王建이 자신과 동성同姓이라고 하여 거두어 양자養子로 삼았다. 왕종수는 공부를 좋아하고 거문고와 바둑에 뛰어났으며 사람됨이 담박淡泊하고 겸손謙遜하여 도가道家의 방술方術을 좋아하였는데 왕건을 섬길 때 진강군절도사鎭江軍節度使가 되었다.
왕연王衍이 즉위하고 나서 왕종수는 태자태보太子太保 봉조청奉朝請이 되어 스스로 연단煉丹과 양기술養氣術을 즐기며 살았다. 왕연이 음란淫亂한 짓을 일삼자 유독 왕종수만 항상 간절하게 간언諫言하였는데 뒤에 무신군절도사武信軍節度使가 되었다.
당唐나라 군대가 촉蜀을 정벌할 때 가는 곳마다 맞이하여 투항하였기에 위왕魏王이 늘 서신을 보내 투항하라고 하였는데 유독 왕종수王宗壽는 항복하지 않다가 왕연王衍이 이미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大聲痛哭하고 동쪽으로 가는 왕연을 뒤따라 기양岐陽에 이르러 지키는 자에게 뇌물을 주고 들어가 왕연을 알현하였다.
왕연이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면서 말하기를 “일찍 그대의 말을 따랐다면 어찌 오늘처럼 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연이 죽자 왕종수가 면지澠池에 이르렀는데 장종莊宗이 시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나 웅이산熊耳山에 들어갔다.
천성天成 2년(927)에 산을 나와 경사京師에 이르러 상서上書하여 왕연의 종족宗族의 유해遺骸를 청하여 그들을 장사 지냈다. 명종明宗이 그의 충의忠義를 가상하게 여겨 보의군행군사마保義軍行軍司馬로 삼고 왕연을 순정공順正公에 봉封하고 제후諸侯의 예禮로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왕종수는 왕씨王氏 종족宗族 18구具의 유해를 받아 장안長安 남쪽 삼조촌三趙村에 장사 지냈다.
오호라! 진한秦漢 이래로 학자들이 상서祥瑞를 말하는 일이 많았으니 비록 변론을 잘하는 선비라 하더라도 그 미혹迷惑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내가 ≪촉서蜀書≫를 읽다가 세상에서 이른바 왕자王者의 아름다운 상서라고 하는 거북, 용龍, 기린麒麟, 봉황鳳凰, 추우騶虞 따위가 그 나라에서 모두 나오지 않은 경우가 없었으니 기이하다. 그러나 왕씨王氏의 흥망興亡과 성패成敗의 원인을 상고하면 알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일개 왕씨로는 이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여기는데 그렇다면 당시 천하天下의 치란治亂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용龍이라는 동물은 나타나지 않는 것을 신이神異하게 여기고 구름을 타고 하늘을 다니는 것을 제 뜻을 이루었다고 여기는데 지금 아무렇지 않게 자기 형체를 드러내니 이는 신이하지 않은 것이고 하늘에 오르지 않고 아래로 물속에서 나타나니 이는 본래 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리도 많이 나타난단 말인가. 요물妖物이라고 할 만하다.
봉황鳳凰은 새 가운데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다. 옛날 순舜임금이 천하天下를 다스릴 때 정사政事가 이루어져 백성들이 기뻐하자 기䕫에게 음악을 연주하라고 명하니 음악 소리가 화락하여 조수鳥獸들이 이를 듣고 모두 춤을 추었다.
이때에 봉황이 마침 이르렀기에 순임금의 사관史官이 이에 아울러 기록하여 미담美談으로 삼으니 후세에 이로 인해 봉황이 찾아오는 것을 천하에 도道가 있는 징조로 삼았다. 그런데 그 뒤에 봉황이 자주 이르러 혹은 용렬한 군주가 정치를 망칠 때에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천하가 위태로워 크게 혼란할 때에 나타나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상서祥瑞라 하겠는가.
기린麒麟은 짐승 가운데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다. 옛날 노魯 애공哀公이 사냥 나가서 기린을 잡았는데도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수색하여 잡은 것이지 기린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에 쓰기를, ‘서쪽에 사냥 가서 기린을 잡았다’고 한 것은 이를 비판한 것이다. ‘서쪽에 사냥 갔다.’는 것은 멀리 간 것을 비난한 것이고 ‘기린을 잡았다’는 것은 모조리 잡은 것을 미워한 것이다.
사냥하면 반드시 그곳의 지명을 쓰는데 애공이 내달리면서 다닌 곳이 많은지라 다 일일이 지목하여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쪽’이라고 써서 여러 곳을 포괄한 것이니 온나라의 서쪽을 다 다녔음을 이른 것이다.
기린은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짐승이니 애공이 산과 못을 샅샅이 다니면서 모조리 잡은 사실을 드러낸 것이고 알아보지 못하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색하여 잡았으므로 ‘이를 비판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성인聖人이 돌아가시고 나자 이단異端의 설이 일어나 이에 기린을 왕자王者의 상서로운 징조로 삼아 부명符命과 참위讖緯의 기괴奇怪한 말들을 가져다 부쳤다. 봉황이 일찍이 순임금 때 나타나서 상서로운 징조로 삼은 것은 그래도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뒤로 난세亂世에 나타난 데 이르러서는 봉황이 상서로운 징조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기린의 경우에는 앞서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무文武, 주공周公의 시대 같은 치세治世에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다가 한 번 나타나 난세를 만났으니 그렇다면 기린이 상서로운 징조임을 뉘라서 알 수 있겠는가.
거북은 검은색의 동물이다. 진흙과 천택川澤에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이 있는데도 죽어서 복관卜官에게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마땅한 쓰임이 있어서일 뿐이다.
그런데 ≪대례기戴禮記≫에서는 거북이 궁정宮庭의 연못에 있는 것을 왕자王者에게 있어 불러오기 어려운 상서라고 여겼으니 ≪대례기戴禮記≫가 여러 학자에게서 잡다하게 나온 것인지라 그 잘못된 부분이 또한 많다.
추우騶虞는 내가 어떤 동물인지 알지 못한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 추우로다.”라고 하였는데 가의賈誼는 추騶는 문왕文王의 동산이고 우虞는 동산을 관리하는 우관虞官이라고 하였다. 가의 당시에는 그 설이 이와 같았으니 그렇다면 추우를 짐승이라고 한 것은 근세近世에 나온 설일 것이다.
무릇 남의 의혹疑惑을 깨뜨리려는 사람은 상대방이 독실하게 믿고 있을 때에는 그와 쟁론爭論하기 어렵고 그가 의심하는 것이 생기기를 기다린 뒤에 그에 따라 공박攻駁해야 한다. 기린, 봉황, 거북, 용은 왕자王者의 상서로운 징조인데 오대시대五代時代에 나타났고 또 모두 촉蜀 지방에 모였으니
이는 비록 상서祥瑞에 관한 설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라 하더라도 또한 의심할 만하다. 그 의심할 만한 점을 통해 공박하면 거의 의혹하는 자가 생각해 이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