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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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化源이라
十一子 曰衛王宗仁 簡王元膺 趙王宗紀 豳王宗輅 韓王宗智 莒王宗特 信王宗傑 魯王宗鼎 興王宗澤 薛王宗平이오 而鄭王宗衍最幼어늘 其母徐
以母寵으로 得立爲皇太子하야하야 置官屬이러니 後更曰天策府
衍爲人方頤大口 垂手過膝하고見耳 頗知學問하야 能爲浮艷之詞
元膺死 建以豳王宗輅貌類己하고 信王宗傑於諸子最材賢이라하야 欲於兩人擇立之로되
而徐妃專寵하고 建老昏耄 妃與宦者唐文扆 敎相士言衍相最貴하고 又諷宰相張格贊成之하니 衍由是得爲太子
建卒 衍立하야 諡建曰神武聖文孝德明惠皇帝라하고 廟號高祖하고 陵曰이라하다
建正室周氏 號昭聖皇后어늘 後建數日而卒이라
衍因尊其母徐氏爲皇太后하고 后妹淑妃爲皇太妃
太后太妃以敎令賣官일새 自刺史以下 每一官闕이면 必數人竝爭호되 而入錢多者得之하고 通都大邑 起邸店하야 以奪民利
衍年少荒淫하야 委其政於宦者宋光嗣 光葆 景潤澄 王承休 歐陽晃 田魯儔等하고 而以韓昭 潘在迎 顧在洵 嚴旭等爲하고 起宣華苑하니
苑有重光太淸延昌會眞之殿 淸和迎僊之宮 降眞蓬萊丹霞之亭 飛鸞之閣 瑞獸之門이오 又作怡神亭하야 與諸狎客婦人으로 日夜酣飮其中이라
嘗以九日宴宣華苑할새 嘉王宗壽以社稷爲言하니 言發流涕
韓昭等曰 嘉王酒悲爾라하고 諸狎客共以慢言謔嘲之하니 坐上諠然이어늘 衍不能省也러라
蜀人富而喜遨러니 當王氏晩年하야 俗競爲小帽하니 僅覆其頂하야 俛首卽墮 謂之危腦帽
衍以爲不祥이라하야 禁之 而衍好戴大帽하야出游民間 民間以大帽識之 因令國中皆戴大帽
又好裹尖巾하니 其狀如錐 而後宮皆戴金蓮花冠하고 衣道士服한대 酒酣免冠 其髻髽然하고 更施朱粉이라 號醉粧하니 國中之人皆效之
嘗與太后太妃 游靑城山할새 宮人衣服 皆畫雲霞하니 飄然望之若僊이라
衍自作하야 述其僊狀하니 上下山谷 衍常自歌하고 而使宮人皆和之 衍立之明年 改元이라
乾德元年正月 祀天南郊하고 大赦하고 加尊號爲聖德明孝皇帝하다
二年冬 北巡하야 至于西縣하니 旌旗戈甲 連亘百餘里 其還也 自閬州 浮江而上할새 龍舟畫舸 照耀江水어늘 所在供億 人不堪命이라
三年正月 還成都하다
五年 起上淸宮하고하야 尊以爲聖祖至道玉宸皇帝하고
又塑建及衍像하야 侍立於其左右하고 又於正殿 塑玄元皇帝及唐諸帝하고 備法駕而朝之하다
六年 以王承休爲天雄軍節度使하니
承休以宦者得幸하야 爲宣徽使러니 承休妻嚴氏有絶色이라 衍通之
是時 唐莊宗滅梁하니 蜀人皆懼 莊宗遣李嚴聘蜀하니 衍與俱朝上淸한대 而蜀都士庶 簾帷珠翠 夾道不絶이라
嚴見其人物富盛而衍驕淫하고 歸乃獻策伐蜀이라 明年 唐魏王繼岌 郭崇韜伐蜀이어늘 是歲 衍改元曰咸康하다
衍自立으로 歲常獵于子來山이러니 是歲 又幸彭州漢州이라가 以王承休妻嚴氏故 十月 幸秦州하니 群臣切諫이어늘 衍不聽이라
行至 大風發屋拔木한대 太史曰 此 貪狼風也 當有敗軍殺將者라하야늘 衍不省하다
衍至綿谷 而唐師入其境하니 衍懼하야 遽還이라 唐師所至 州縣皆迎降하니 衍留王宗弼守綿谷하고 遣王宗勳宗儼宗昱率兵以拒唐師어늘 宗勳等至三泉하야 望風退走
衍詔宗弼誅宗勳等한대 宗弼反與宗勳等合謀하야 送欵於唐師 衍自綿谷還至成都하니 百官及後宮迎謁七里亭이어늘 衍雜宮人作以入이라
明日 御文明殿하야 與其群臣相對涕泣이어늘 而宗弼亦自綿谷馳歸하야 登大玄門하야 收成都尹韓昭 宦者宋光嗣 景潤澄 歐陽晃等殺之하고 函首送于繼岌이라 衍卽上表乞降하니 宗弼遷衍于天啓宮이라
魏王繼岌至成都 衍君臣하고 出降于七里亭이라
莊宗召衍入洛하야 賜衍詔曰 固當列土而封이니 必不薄人于險이라 三辰在上하니 一言不欺라하다
衍捧詔하고 欣然就道하야 率其宗族及僞宰相王鍇 張格 傳素 許寂 翰林學士李昊等及諸將佐家族數千人以東하다
四年四月 行至秦川驛 莊宗用伶人景進計하야 遣宦者向延嗣誅其族이라 衍母徐氏臨刑呼曰 吾兒以一國迎降이어늘 反以爲戮하니 信義俱棄 吾知其禍不旋踵矣라하다
衍妾劉氏而有色이라 行刑者將免之어늘 劉氏曰 家國喪亡 義不受辱이라하고 遂就死하다
宗弼 本姓魏 名弘夫 建錄爲養子 建攻顧彦暉할새 宗弼常以建語 泄之彦暉者어늘 彦暉敗 建待之如初
建病且卒 宗弼守太師兼中書令 判六軍하야 輔政이라
宗壽 許州民家子也 建以同姓이라하야 錄之爲子 宗壽好學하고 工琴奕하며 爲人恬退하야 喜道家之術러니 事建時 爲鎭江軍節度使
衍旣立 宗壽爲太子太保 奉朝請하야 以煉丹養氣自娛 衍爲淫亂 獨宗壽常切諫之러니 後爲武信軍節度使러라
唐師伐蜀 所在迎降이라 魏王常以書招之어늘 獨宗壽不降이라가 聞衍已하고 大慟하고 從衍東遷하야 至岐陽하야 以賄賂守者하야 得入見衍이라
衍泣下霑襟曰 早從王言이면 豈有今日이리오하다 衍死 宗壽至러니 聞莊宗遇弑하고 亡入이라
二年 出詣京師하야 上書求衍宗族하야 葬之 明宗嘉其忠하야 以爲保義軍行軍司馬하고 封衍順正公하고 許以諸侯禮葬이라
宗壽得王氏十八喪하야 葬之長安南三趙村하다
嗚呼 自秦漢以來 學者多言祥瑞하니 雖有善辯之士라도 不能祛其惑也
予讀라가 至於龜龍麟鳳騶虞之類 世所謂王者之嘉瑞하야는 莫不畢出於其國하니 異哉 然考王氏之所以興亡成敗者 可以知之矣
或以爲一王氏不足以當之하니 則視時天下治亂하면 可以知之矣
龍之爲物也 以不見爲神이요 以升雲行天爲得志어늘 今偃然暴露其形하니 是不神也 不上於天而下見於水中하니 是失職也 然其一何多歟 可以爲妖矣
鳳凰 鳥之遠人者也 昔舜治天下 政成而民悅한대 命䕫作樂하니 樂聲和하야 鳥獸聞之 皆鼓舞
하니 後世因以鳳來爲有道之應이러니 其後 鳳凰數至하야 或出於庸君繆政之時하고 或出於危亡大亂之際하니 是果爲瑞哉
獸之遠人者也 昔魯哀公出獵하야 得之而不識하니 蓋索而獲之 非其自出也 西狩 非其遠也 獲麟 惡其盡取也
狩必書地어늘 而哀公馳騁所涉地多 不可徧以名擧 故書西以包衆地하니 謂其擧國之西皆至也
人罕識之獸也 以見公之窮山竭澤而盡取 至於不識之獸 皆搜索而獲之 故曰 譏之也
聖人已沒 而異端之說興하야 乃以麟爲王者之瑞하야 而附以詭怪之言이라 鳳嘗出於舜하야 以爲瑞 猶有說也어니와 及其後出於亂世하야는 則可以知其非瑞矣
若麟者 前有治世如堯舜禹湯文武周公之世하야 未嘗一出이라가 其一出而當亂世하니 然則孰知其爲瑞哉리오
玄物也 汚泥川澤 不可勝數로되 其死而貴於卜官者 用適有宜爾어늘
夫破人之惑者 難與爭於篤信之時 待其有所疑焉이니 然後從而攻之可也니라 麟鳳龜龍 王者之瑞어늘 而出於五代之際하고 又皆萃於蜀하니
此雖好爲祥瑞之說者라도 亦可疑也 因其可疑而攻之 庶幾惑者有以思焉이라


03. 왕연王衍세가世家
왕연王衍화원化源이다.
왕건王建의 아들 열한 명은 위왕衛王 왕종인王宗仁, 간왕簡王 왕원응王元膺, 조왕趙王 왕종기王宗紀, 빈왕豳王 왕종로王宗輅, 한왕韓王 왕종지王宗智, 거왕莒王 왕종특王宗特, 신왕信王 왕종걸王宗傑, 노왕魯王 왕종정王宗鼎, 흥왕興王 왕종택王宗澤, 설왕薛王 왕종평王宗平, 정왕鄭王 왕종연王宗衍이고, 왕종연이 가장 어렸는데 그 모친은 서현비徐賢妃이다.
모친이 총애를 받음으로 해서 왕연이 황태자皇太子책립冊立되어 숭현부崇賢府를 열고서 관속官屬을 두었는데 뒤에 천책부天策府개칭改稱하였다.
왕연은 위인爲人이 네모난 턱에 입이 컸고 팔을 늘어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내려갔고 눈을 돌려 귀를 볼 수 있었으며 자못 학문學問을 알아 부화浮華하고 염려艶麗한 글을 지을 수 있었다.
왕원응이 죽자 왕건은 빈왕 왕종로가 용모가 자신과 닮았고 신왕 왕종걸이 아들들 중에 가장 재주 있고 현능賢能하다고 하여 두 사람 중에서 뽑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서비徐妃가 총애를 독차지하였고 왕건이 늙어서 정신이 흐릿한지라 서비가 환관 당문의唐文扆와 함께 관상쟁이에게 왕연이 가장 귀상貴相이라고 아뢰게 하고 또 재상宰相 장격張格에게 찬성하도록 넌지시 말하니 왕연이 이로 인해 태자太子가 될 수 있었다.
왕건王建하자 왕연王衍이 즉위하여 왕건에게 신무성문효덕명혜황제神武聖文孝德明惠皇帝라고 시호諡號를 올리고 묘호廟號고조高祖라고 하고 능묘陵墓영릉永陵이라고 하였다.
왕건의 정실正室 주씨周氏소성황후昭聖皇后로 칭하였는데 왕건이 졸한 며칠 뒤에 졸하였다.
왕연이 이에 자기 모후母后 서씨徐氏를 높여 황태후皇太后로 삼고 황태후의 여동생 숙비淑妃황태비皇太妃로 삼았다.
태후太后태비太妃교령敎令으로 관직을 팔았기에 자사刺史 이하로 관직 하나가 비기만 하면 반드시 여러 사람이 함께 다투되 돈을 많이 바치는 자가 관직을 차지하였고, 사통팔달四通八達도회都會여관旅館을 세워 백성들의 이익을 가로챘다.
왕연王衍연소年少한 데다 황음荒淫하여 국정國政을 환관 송광사宋光嗣, 송광보宋光葆, 경윤징景潤澄, 왕승휴王承休, 구양황歐陽晃, 전로주田魯儔 등에게 맡겨 두고 한소韓昭, 반재영潘在迎, 고재순顧在洵, 엄욱嚴旭 등을 압객狎客으로 삼았고 선화원宣華苑을 만드니
선화원에는 중광전重光殿, 태청전太淸殿, 연창전延昌殿, 회진전會眞殿청화궁淸和宮, 영선궁迎僊宮강진정降眞亭, 봉래정蓬萊亭, 단하정丹霞亭비란각飛鸞閣서수문瑞獸門이 있었고 또 이신정怡神亭을 지어 압객, 부인婦人 들과 함께 밤낮으로 그 안에서 술에 취해 지냈다.
일찍이 중양절重陽節이 되어 선화원에서 연회할 적에 가왕嘉王 왕종수王宗壽사직社稷이 위태롭다고 상언上言하였는데 말을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한소 등이 말하기를 “가왕께서 술에 취해 감정이 북받치셨을 뿐입니다.”라고 하고는 압객들이 함께 불공不恭한 말로 희학戲謔하고 조소하니 좌중이 소란하였는데 왕연은 깨닫지 못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부유하고 오유遨遊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왕씨王氏 왕조의 말엽이 되자 민간에서 앞다투어 작은 모자를 만드니 정수리만 겨우 덮어 머리를 숙이면 바로 떨어지기에 이를 위뇌모危腦帽라고 하였다.
靑城山圖靑城山圖
왕연王衍이 이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금지하였다. 왕연은 큰 모자 쓰기를 좋아하여 매번 미복微服을 입고 민간에 나가 다닐 때면 민간民間에서 큰 모자를 보고 그를 알아보는지라 이로 인해 국중國中을 내려 모두 큰 모자를 쓰도록 하였다.
과첨건裹尖巾을 좋아하니 그 모양이 송곳과 같았다. 그리고 후궁後宮들은 모두 금연화관金蓮花冠을 쓰고 도사道士의 복장을 입었다. 술기운이 올라 을 벗으면 그 상투가 머리 양쪽으로 땋아 올린 모양이고 게다가 붉은 분을 바른지라 취장醉粧이라고 부르니 국중國中 사람들이 모두 따라하였다.
일찍이 태후太后, 태비太妃와 함께 청성산靑城山을 노닐 때 궁인宮人의 의복에 모두 운하雲霞를 그렸는데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양이 바라보면 마치 신선 같았다.
왕연은 직접 〈감주곡甘州曲〉을 지어 그 신선 형상을 묘사하였는데 산곡山谷을 오르내릴 때 왕연이 늘 직접 노래 부르면서 궁인들 모두 따라 부르도록 하였다. 왕연이 즉위한 이듬해에 건덕乾德으로 개원改元하였다.
건덕乾德 원년元年(919) 정월正月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성덕명효황제聖德明孝皇帝존호尊號를 더하였다.
건덕 2년(920) 겨울에 북쪽으로 순행巡行하여 서현西縣에 이르니 정기旌旗과갑戈甲이 백여 리에 이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낭주閬州로부터 을 따라 올라갈 때 용주龍舟채선彩船이 강물에 비춰 번쩍였는데 가는 곳마다 공물을 바치도록 한 명령을 사람들이 감당할 수가 없었다.
건덕 3년(921) 정월正月성도成都로 돌아왔다.
건덕 5년(923)에 상청궁上淸宮을 짓고 왕자진王子晉을 만들고서 높여 성조지도옥신황제聖祖至道玉宸皇帝로 삼고
왕건王建왕연王衍을 만들어 그 좌우左右시립侍立하게 하고 또 정전正殿현원황제玄元皇帝나라 황제들의 상을 만들고는 법가法駕를 채비하여 가서 조현朝見하였다.
건덕乾德 6년(924)에 왕승휴王承休천웅군절도사天雄軍節度使로 삼으니 천웅군天雄軍진주秦州이다.
왕승휴는 환관으로 총애를 입어 선휘사宣徽使가 되었는데 왕승휴의 아내 엄씨嚴氏절색絶色의 미인이라 왕연王衍사통私通하였다.
이때에 장종莊宗나라를 멸망시키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장종이 이엄李嚴을 보내 촉나라에 빙문聘問하니 왕연이 그와 함께 상청궁上淸宮조현朝見하였는데 촉나라 도성의 사인士人과 백성들, 발과 휘장과 주옥珠玉비취翡翠가 길 양편에 끊어지지 않았다.
이엄이 촉나라의 사람과 물자가 부성富盛하고 왕연이 교사驕奢하고 음란淫亂한 것을 보고 돌아가 이에 촉나라를 정벌할 계책을 올렸다. 이듬해에 나라의 위왕魏王 이계급李繼岌곽숭도郭崇韜가 촉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이해에 왕연은 연호를 함강咸康(925)으로 고쳤다.
왕연은 즉위하고부터 해마다 늘 자래산子來山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이해에 다시 팽주彭州 양평산陽平山, 한주漢州 삼학산三學山에 거둥하였다가 왕승휴의 아내 엄씨를 만나려고 10월에 진주에 거둥하니 신료들이 간절하게 간언諫言하였는데도 왕연이 듣지 않았다.
재동梓潼에 이르렀을 때 거센 바람이 집채를 뒤흔들고 나무를 뽑을 정도였는데 태사太史가 말하기를 “이는 탐랑풍貪狼風이니 응당 군대를 패배시키고 장수를 죽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왕연이 깨닫지 못하였다.
왕연이 면곡綿谷에 이르자 나라 군대가 촉나라의 국경에 쳐들어오니 왕연이 두려워서 서둘러 돌아왔다. 당나라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주현州縣들이 모두 맞이하여 투항하니 왕연이 왕종필王宗弼을 남겨 면곡을 지키고 왕종훈王宗勳, 왕종엄王宗儼, 왕종욱王宗昱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를 막게 하였는데, 왕종훈 등은 삼천三泉에 이르러 그들의 위세威勢를 보고는 달아났다.
왕연이 왕종필에게 왕종훈 등을 주벌하라고 조서詔書를 내렸는데 왕종필은 도리어 왕종훈 등과 함께 모의하여 당나라 군대에 화친을 청하는 국서를 보냈다. 왕연이 면곡에서 돌아와 성도成都에 이르니 백관百官후궁後宮 들이 칠리정七里亭에서 맞이하여 알현하였는데 왕연이 궁인宮人들 사이에 섞여 회홀대回鶻隊를 이루어 들어갔다.
이튿날에 문명전文明殿에 나아와 신료들과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왕종필 또한 면곡에서 급히 돌아와 대현문大玄門에 올라 성도윤成都尹 한소韓昭, 환관 송광사宋光嗣, 경윤징景潤澄, 구양황歐陽晃 등을 잡아들여 죽이고 이들의 머리를 담아 이계급에게 보냈다. 왕연이 곧바로 표문表文을 올려 항복하기를 청하니 왕종필이 왕연을 천계궁天啓宮으로 옮겼다.
위왕 이계급이 성도에 이르자 왕연 이하 군신들이 손을 뒤로 묶고 관을 싣고 칠리정에 나와 항복하였다.
장종莊宗왕연王衍을 불러 낙양洛陽에 들어오게 하여 왕연에게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진실로 토지를 나누어 봉해줄 것이니 반드시 험지로 너희들을 몰지 않을 것이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위에 있으니 한 마디도 속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왕연이 조서를 받들고 흔쾌히 길에 올라 자신의 종족宗族위재상僞宰相 왕개王鍇, 장격張格, 유전소庾傳素, 허적許寂, 한림학사翰林學士 이호李昊 등 및 각 장령將領요좌僚佐의 가족 수천 인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갔다.
동광同光 4년(926) 4월에 진천역秦川驛에 이르자 장종이 영인伶人 경진景進의 계책을 따라 환관 상연사向延嗣를 보내 그 가족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왕연의 모친 서씨徐氏가 형벌에 임하여 부르짖기를 “우리 아들이 일국一國을 가지고 맞이하여 투항하였는데 도리어 도륙屠戮하니 신의信義를 모두 팽개쳐 버린 것이다. 나는 그에게 재화災禍가 머지않아 내릴 것임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왕연의 유씨劉氏는 검은 머리숱이 구름처럼 많으면서 미색美色이 있었다. 형벌을 집행하는 자가 형벌을 면해주려고 하였는데 유씨가 말하기를 “가국家國이 멸망한 마당에 의리로 볼 때 치욕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형장에 나아가 죽었다.
왕종필王宗弼본성本姓이고 이름이 홍부弘夫왕건王建이 거두어 양자養子로 삼았다. 왕건이 고언휘顧彦暉를 공격할 때 왕종필이 늘 왕건의 말을 고언휘에게 전하였는데 고언휘가 패배하고 나서도 왕건이 처음처럼 그대로 그를 대하였다.
왕건이 병이 들어 졸하려 할 때 왕종필이 태사겸중서령太師兼中書令 판육군사判六軍事를 맡아 국정國政을 보좌하였다.
왕연王衍이 투항한 뒤에 왕종필은 진보珍寶위왕魏王곽숭도郭崇韜에게 바치고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가 되기를 청하니 위왕이 말하기를 “이는 우리 집안의 물건이니 어찌 바쳤다 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며칠 뒤에 곽숭도에게 살해되었다.
왕종수王宗壽허주許州의 평민의 자식이니 왕건王建이 자신과 동성同姓이라고 하여 거두어 양자養子로 삼았다. 왕종수는 공부를 좋아하고 거문고와 바둑에 뛰어났으며 사람됨이 담박淡泊하고 겸손謙遜하여 도가道家방술方術을 좋아하였는데 왕건을 섬길 때 진강군절도사鎭江軍節度使가 되었다.
왕연王衍이 즉위하고 나서 왕종수는 태자태보太子太保 봉조청奉朝請이 되어 스스로 연단煉丹양기술養氣術을 즐기며 살았다. 왕연이 음란淫亂한 짓을 일삼자 유독 왕종수만 항상 간절하게 간언諫言하였는데 뒤에 무신군절도사武信軍節度使가 되었다.
나라 군대가 을 정벌할 때 가는 곳마다 맞이하여 투항하였기에 위왕魏王이 늘 서신을 보내 투항하라고 하였는데 유독 왕종수王宗壽는 항복하지 않다가 왕연王衍이 이미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大聲痛哭하고 동쪽으로 가는 왕연을 뒤따라 기양岐陽에 이르러 지키는 자에게 뇌물을 주고 들어가 왕연을 알현하였다.
왕연이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면서 말하기를 “일찍 그대의 말을 따랐다면 어찌 오늘처럼 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연이 죽자 왕종수가 면지澠池에 이르렀는데 장종莊宗이 시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나 웅이산熊耳山에 들어갔다.
천성天成 2년(927)에 산을 나와 경사京師에 이르러 상서上書하여 왕연의 종족宗族유해遺骸를 청하여 그들을 장사 지냈다. 명종明宗이 그의 충의忠義를 가상하게 여겨 보의군행군사마保義軍行軍司馬로 삼고 왕연을 순정공順正公하고 제후諸侯로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왕종수는 왕씨王氏 종족宗族 18의 유해를 받아 장안長安 남쪽 삼조촌三趙村에 장사 지냈다.
오호라! 진한秦漢 이래로 학자들이 상서祥瑞를 말하는 일이 많았으니 비록 변론을 잘하는 선비라 하더라도 그 미혹迷惑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내가 ≪촉서蜀書≫를 읽다가 세상에서 이른바 왕자王者의 아름다운 상서라고 하는 거북, , 기린麒麟, 봉황鳳凰, 추우騶虞 따위가 그 나라에서 모두 나오지 않은 경우가 없었으니 기이하다. 그러나 왕씨王氏흥망興亡성패成敗의 원인을 상고하면 알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일개 왕씨로는 이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여기는데 그렇다면 당시 천하天下치란治亂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라는 동물은 나타나지 않는 것을 신이神異하게 여기고 구름을 타고 하늘을 다니는 것을 제 뜻을 이루었다고 여기는데 지금 아무렇지 않게 자기 형체를 드러내니 이는 신이하지 않은 것이고 하늘에 오르지 않고 아래로 물속에서 나타나니 이는 본래 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리도 많이 나타난단 말인가. 요물妖物이라고 할 만하다.
봉황鳳凰은 새 가운데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다. 옛날 임금이 천하天下를 다스릴 때 정사政事가 이루어져 백성들이 기뻐하자 에게 음악을 연주하라고 명하니 음악 소리가 화락하여 조수鳥獸들이 이를 듣고 모두 춤을 추었다.
이때에 봉황이 마침 이르렀기에 순임금의 사관史官이 이에 아울러 기록하여 미담美談으로 삼으니 후세에 이로 인해 봉황이 찾아오는 것을 천하에 가 있는 징조로 삼았다. 그런데 그 뒤에 봉황이 자주 이르러 혹은 용렬한 군주가 정치를 망칠 때에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천하가 위태로워 크게 혼란할 때에 나타나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상서祥瑞라 하겠는가.
기린麒麟은 짐승 가운데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다. 옛날 애공哀公이 사냥 나가서 기린을 잡았는데도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수색하여 잡은 것이지 기린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에 쓰기를, ‘서쪽에 사냥 가서 기린을 잡았다’고 한 것은 이를 비판한 것이다. ‘서쪽에 사냥 갔다.’는 것은 멀리 간 것을 비난한 것이고 ‘기린을 잡았다’는 것은 모조리 잡은 것을 미워한 것이다.
사냥하면 반드시 그곳의 지명을 쓰는데 애공이 내달리면서 다닌 곳이 많은지라 다 일일이 지목하여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쪽’이라고 써서 여러 곳을 포괄한 것이니 온나라의 서쪽을 다 다녔음을 이른 것이다.
기린은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짐승이니 애공이 산과 못을 샅샅이 다니면서 모조리 잡은 사실을 드러낸 것이고 알아보지 못하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색하여 잡았으므로 ‘이를 비판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성인聖人이 돌아가시고 나자 이단異端의 설이 일어나 이에 기린을 왕자王者의 상서로운 징조로 삼아 부명符命참위讖緯기괴奇怪한 말들을 가져다 부쳤다. 봉황이 일찍이 순임금 때 나타나서 상서로운 징조로 삼은 것은 그래도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뒤로 난세亂世에 나타난 데 이르러서는 봉황이 상서로운 징조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기린의 경우에는 앞서 , , , , 문무文武, 주공周公의 시대 같은 치세治世에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다가 한 번 나타나 난세를 만났으니 그렇다면 기린이 상서로운 징조임을 뉘라서 알 수 있겠는가.
거북은 검은색의 동물이다. 진흙과 천택川澤에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이 있는데도 죽어서 복관卜官에게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마땅한 쓰임이 있어서일 뿐이다.
그런데 ≪대례기戴禮記≫에서는 거북이 궁정宮庭의 연못에 있는 것을 왕자王者에게 있어 불러오기 어려운 상서라고 여겼으니 ≪대례기戴禮記≫가 여러 학자에게서 잡다하게 나온 것인지라 그 잘못된 부분이 또한 많다.
추우騶虞는 내가 어떤 동물인지 알지 못한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 추우로다.”라고 하였는데 가의賈誼문왕文王의 동산이고 는 동산을 관리하는 우관虞官이라고 하였다. 가의 당시에는 그 설이 이와 같았으니 그렇다면 추우를 짐승이라고 한 것은 근세近世에 나온 설일 것이다.
무릇 남의 의혹疑惑을 깨뜨리려는 사람은 상대방이 독실하게 믿고 있을 때에는 그와 쟁론爭論하기 어렵고 그가 의심하는 것이 생기기를 기다린 뒤에 그에 따라 공박攻駁해야 한다. 기린, 봉황, 거북, 용은 왕자王者의 상서로운 징조인데 오대시대五代時代에 나타났고 또 모두 지방에 모였으니
이는 비록 상서祥瑞에 관한 설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라 하더라도 또한 의심할 만하다. 그 의심할 만한 점을 통해 공박하면 거의 의혹하는 자가 생각해 이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주
역주1 王衍世家 : 王衍(853~915)은 前蜀을 개국한 王建의 11번째 아들로, 字는 化源이다. 왕연의 事跡은 ≪舊五代史≫ 卷136 〈僭僞列傳 第3〉과 ≪新五代史≫ 卷63 〈前蜀世家 第3〉에 실려 있다. ≪구오대사≫에는 한 권에 前蜀과 後蜀의 史實을 함께 서술한 반면, ≪신오대사≫에는 권64에 〈後蜀世家〉가 권을 달리하여 실려 있다.
왕연에 대해서 茅坤은 따로 評語를 두지 않았는데 앞의 南唐의 後主 李煜과 마찬가지로 亡國의 顚末을 鑑戒의 자료로 삼게 하려는 취지에서 抄選한 것으로 보인다. 왕연은 이욱과 마찬가지로 막내아들이었는데, 모친 徐賢妃가 王建의 총애를 발판으로 謀略을 써서 왕연의 이복형제들을 내치고 자기 아들을 태자로 삼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蜀나라 王氏 정권이 멸망으로 접어드는 시발점이 되었으니, 秦始皇이 長子 扶蘇를 후사로 삼으려 하였으나 환관 趙高와 승상 李斯가 막내아들 胡亥를 황제로 삼음으로써 진나라가 멸망하게 된 前轍과 흡사하다 하겠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연은 모친과 이모의 권력 농단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고 본인 역시 宦官과 佞臣을 총애하며 酒色에 빠져 지내고 神仙에 현혹되었다. 또한 환관 王承休의 아내 嚴氏와 사통하고 사냥에 빠져 충신들의 諫言을 듣지 않았다. 이렇듯 정치가 문란한 상황 아래서 국력이 쇠퇴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왕연의 사적을 읽다 보면 蜀나라가 後唐 莊宗에게 정벌당한 것이 張本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한편 歐陽脩는 주로 王建의 사적을 놓고 史評을 가하고 있는데 이는 ≪신오대사≫ 〈전촉세가〉에 왕건과 왕연이 함께 묶여 있는 구성으로 볼 때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여기서 구양수가 망국의 군주 왕연보다 창업주 왕건에 초점을 맞춘 것에 유의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특히 本書에서 모곤은 왕건 부분을 생략하고 왕연 부분만 수록하였으므로 독자들이 이해하기 곤란한 점이 있는바, 왕건의 사적과 관련하여 다소 설명이 필요하다.
구양수는 사평에서 ≪蜀書≫를 읽다가 거북, 龍, 麒麟, 鳳凰, 騶虞 같은 이른바 王者의 祥瑞가 蜀에서 다 출현한 것을 기이하다고 하였다. ≪구오대사≫에는 이러한 상서가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데 반해 ≪신오대사≫에는 왕건의 재위 시절 동안 십여 차례나 되는 상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 기록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907년 後梁이 唐나라를 멸망시킨 해 正月에 巨人이 靑城山에 나타나고 6월에 봉황이 萬歲縣에, 黃龍이 嘉陽江에 나타났으며 각 州에서 모두 甘露, 白鹿, 白雀, 龜, 용의 상서가 나타났다고 보고하였다. 추우는 908년에 武定에서, 913년에 壁山에서 나타났다. 기린은 910년에 壁州, 912년에 文州, 913년에 永泰, 914년에 昌州에서 나타났다. 910년에는 용 50마리가 洵陽의 강에 나타나고 912년에는 황룡이 富義江에 나타났으며 913년에는 白龍이 邛州의 강에 나타났다. 이 중에 특히 907년을 보면 9월에 왕건이 황제에 즉위하기 앞서 상서가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이 의미심장하다.
구양수는 五代의 亂世에 유독 촉에서 상서가 많았던 사실을 살펴보면 상서라는 것이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일정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에 더해 당시 왕건이 황제를 참칭하면서 결여된 정통성을 상서를 통해 뒷받침하려 한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이는 왕건이 글자 20여 자가 새겨진 銅牌子를 什仿에서 얻고 이를 符讖이라고 생각하여 이 글자를 가지고 아들들의 이름을 지은 일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한편 ≪구오대사≫에서는 촉을 개국한 왕건보다 망국의 군주 왕연에 초점을 맞춘 史評이 실려 있는데 참고로 들면 다음과 같다.
蜀都圖蜀都圖
“史臣은 말한다. ‘옛날 張孟陽이 〈劒閣銘〉을 지어 말하기를, 「오직 蜀 땅의 門은 외적에 견고하고 내부를 안정시키나니 세상이 混濁하면 반역하고 정치가 淸明하면 귀순한다네.」라고 하였으니 이는 예부터 西南 지방은 動亂의 시대를 만나면 문을 닫아 통하지 않으며 興旺의 시운을 만나면 몸을 굽혀 물건을 줍듯이 취함을 알 수 있다. 後唐이 蜀에 들어갔을 때 兵力이 비록 강성하였지만 帝王의 도가 아직 어두웠으므로 여러 해 사이에 얻었다가 다시 잃어버렸다. 그런데 우리 황제께서 蜀을 평정하실 때에는 堯임금의 해로 따뜻하게 하고 舜임금의 바람으로 온화하게 하였다. 그래서 집집마다 백성들이 기뻐하면서 교화를 따랐다. 게다가 王衍은 末世를 만나 秦川에서 滅族을 당하였지만 孟昶은 밝은 시대를 만나 楚 땅에 封爵을 받았다. 비록 모두 亡國의 군주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리도 행운과 불행이 차이가 난단 말인가.’[史臣曰 昔張孟陽爲劒閣銘云 惟蜀之門 作固作鎭 世濁則逆 道淸斯順 是知自古坤維之地 遇亂代則閉之而不通 逢興運則取之如俯拾 然唐氏之入蜀也 兵力雖勝 帝道猶昏 故數年間得之復失 及皇上之平蜀也 煦(후)之以堯日 和之以舜風 故比戶之民 悅而從化 且夫王衍之遭季世也 則赤族於秦川 孟昶之遇明代也 則受封於楚甸 雖俱爲亡國之主 何幸與不幸相去之遠也]”
역주2 : 王建(847~918)으로, 字는 光圖이고 許州 舞陽 사람이다. 前蜀의 高祖이다. 唐나라 말에 忠武軍에 들어가 忠武八都의 都將 가운데 한 명이 되었고 唐 僖宗을 구원하는 데 공을 세워 神策軍의 將領이 되었다. 이후 成都로 갔는데 陳敬瑄이 저지하자 西川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3년 뒤 西川을 점령하고 西川節度使가 되었다. 이후 武泰節度使 王建肇, 東川節度使 顧彦暉, 武定節度使 拓跋思敬을 제압하여 兩川, 三峽를 점유하여 山南西道를 장악하니 天復 3년(903)에 唐 昭宗이 蜀王으로 봉하였다. 天祐 4년(907) 唐나라가 멸망하자 後梁에 歸復하지 않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國號를 大蜀이라고 하였다. 재위 12년 동안 백성과 休息하는 정책을 펴서 蜀 지방이 크게 다스려졌다.
역주3 賢妃 : 唐代 後宮의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 貴妃, 淑妃, 德妃 등 다른 부인과 함께 1인을 두었는데 品階는 正1品이다.
역주4 崇賢府 : ≪卄二史考異≫ 卷66에 “≪資治通鑑≫에는 ‘崇勳府’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역주5 (自)[目] : 저본에는 ‘自’로 되어 있으나, 사고전서본과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目’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永陵 : 成都에 있는데 1940년에 발견되어 1942년에 발굴하였다. 玉器, 銀器를 비롯한 많은 부장품이 나와 1990년에 박물관을 세웠다. 중국 유일의 地上에 드러나 있는 皇陵이다.
역주7 狎客 : 權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다니며 遊樂을 일삼는 자를 말한다.
역주8 微服 : 禮服이나 官服이 아니라 신분을 숨기고 사람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입는 평상복으로, 古代에 帝王이나 將相 혹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신분을 숨기고 다닐 때 입는 옷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주9 甘州曲 : 詞牌 명칭으로 甘州子, 口脂香이라고도 한다. 王衍이 처음 지은 曲調로, 왕연이 궁인들에게 부르게 하였을 때 그 노랫말이 슬프고 원망스러워 듣는 자들이 애달파 하였다고 한다. 29字, 6句, 平聲 5韻으로 구성된 것이 正體이고 33字로 이루어진 것이 變體이다.
역주10 乾德 : 919~924. 前蜀의 後主 王衍의 연호이다.
역주11 王子晉 : 周 靈王의 太子 晉으로, 王子喬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笙을 불어 鳳凰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伊洛 사이에 노닐다가, 신선 浮丘公을 따라 崇山으로 가서 仙道를 닦은 뒤, 30년이 지난 칠월 칠석에 緱氏山 정상에 白鶴을 타고 내려와서 산 아래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며칠 뒤에 날아갔다고 한다.(≪列仙傳≫ 卷上 〈王子喬〉)
역주12 天雄軍 秦州也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職方考〉 부분에서 이미 주를 달았으니 이 구절은 삭제해도 된다.[按已注職方考 此語可去]”라고 하였다.
역주13 陽平山 : 金城山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四川省 彭州市 서북쪽 46리 되는 곳에 있다. 사고전서본과 ≪資治通鑑≫에는 ‘山’이 ‘化’로 되어 있다. ≪資治通鑑≫의 胡三省 音註에는 “팽주 몽양현의 북쪽 40리 되는 곳에 葛仙山이 있는데 24道觀 가운데 다섯 번째 道觀이다.[彭州濛陽縣北四十里有葛仙山 二十四化之第五化也]”라고 하였다. 참고로 化는 道敎의 神들을 모신 사당인 宮觀, 道觀을 뜻한다.
역주14 三學山 : 棲賢山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四川省 金堂縣의 동쪽 12리 되는 곳에 있다. 法海寺, 普賢寺, 廣濟寺가 있다. 蜀 지방의 名山 가운데 하나이다.
역주15 梓潼 : 戰國시대에 蜀의 고을이었는데 뒤에 秦나라에 편입되었고 前漢 元鼎 元年(B.C. 116)에 梓潼縣이 되었다. 지금의 四川省 梓潼縣이다.
역주16 回鶻隊 : 樂舞를 베풀 때 76인이 하나의 隊를 이루어 춤을 추는 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小兒隊 중에 하나이다. 참고로 小兒隊는 柘枝隊, 劒舞隊, 婆羅門隊, 醉胡騰隊, 譂臣萬歲樂隊, 兒童感聖樂隊, 玉兎軍捝隊, 異域朝天隊, 兒童解紅隊, 射鵰回鶻隊 등 모두 10가지 방식이 있다.(≪記纂淵海≫ 卷78 〈樂舞〉)
역주17 面縛輿櫬(츤) : ≪春秋左氏傳≫ 僖公 6년에 “허남은 손을 뒤로 묶고 입에 옥벽을 물었으며, 대부는 상복을 입고 사는 관을 싣고 따랐다.[許男面縛銜璧 大夫衰絰 士輿櫬]”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보통 전쟁에 패한 군주의 항복을 뜻한다.
역주18 (廋)[庾] : 저본에는 ‘廋’로 되어 있으나, 사고전서본과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庾’로 바로잡았다.
역주19 同光 : 923~926. 後唐 莊宗의 연호이다.
역주20 鬒(진)髪如雲 : ≪詩經≫ 〈鄘風 君子偕老〉에 “검은 머리숱이 구름처럼 많으니, 다리를 달갑잖게 여기네.[鬒髮如雲 不屑髢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21 衍已降……何用獻爲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唐家人傳〉에서 ‘蜀의 王宗弼로부터 이하 貴臣과 大將들이 모두 앞다퉈 蜀의 寶貨와 기녀들로 郭崇韜 父子를 모셨는데, 魏王이 얻은 것은 한 마리의 말과 1束의 비단, 唾壺와 麈柄일 뿐이었다.’라고 하였고 〈郭崇韜傳〉에서 ‘王衍의 아우 王宗弼이 은밀히 곽숭도에게 투항의 뜻을 보내면서 西川兵馬留後가 되기를 구하니 곽숭도가 節度使를 주기로 허락하였다. 唐나라 군대가 成都에 이르니 왕종필이 왕연을 西宮에 옮기고 왕연의 嬪妓와 珍寶를 모두 차지하고서 곽숭도 및 그의 아들 郭廷誨를 받들었다. 또 蜀人들과 함께 연명으로 글을 올려 魏王을 알현하여 곽숭도를 남겨 촉을 鎭守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珍寶를 가지고 魏王을 받들었던 적이 없고 또 절도사가 되기를 구하였던 것도 아니니 이 부분과는 다르다.[按唐家人傳 蜀之貴臣大將自宗弼以下 皆爭以蜀寶貨妓樂奉崇韜父子 而魏王所得 匹馬束帛唾壺麈(주)柄而已 崇韜傳 王衍弟宗弼陰送款于崇韜 求爲西川兵馬留後 崇韜以節度使許之 軍至成都 宗弼遷衍于西宮 悉取衍嬪妓珍寶 奉崇韜及其子廷誨 又與蜀人列狀見魏王 請崇韜留鎭蜀 是未嘗以珍寶奉魏王 且非求爲節度使 與此異]”라고 하였다.
역주22 銜璧 : 본 〈王衍世家〉의 ‘面縛輿櫬’ 주석 참조.
역주23 澠(민)池 : 戰國 초기에는 鄭나라에 속했는데 뒤에 韓나라, 秦나라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河南省 澠池縣 서쪽 13리에 있는 朱城이다.
역주24 熊耳山 : 지금의 河南省 盧氏縣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伊水가 여기서 발원한다. ≪水經注≫ 〈洛水〉에 “낙수의 북쪽에 웅이산이 있는데 두 봉우리가 다투어 솟아올라 모양이 곰의 귀와 같다.[洛水之北有熊耳山 雙巒競擧 狀同熊耳]”라고 하였다.
역주25 天成 : 926~929. 後唐 明宗 李嗣源의 연호이다.
역주26 蜀書 : 唐나라 말엽에 태어나 前蜀과 後蜀에서 벼슬한 李昊(?~965)가 지은 前蜀의 史書로, ≪宋史≫ 卷204 〈藝文志〉에서는 霸史로 분류하면서 20권이라고 하였는데, ≪宋史≫ 卷479 〈李昊列傳〉에는 이호가 다른 신하들과 함께 40권을 편찬하여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通志≫ 卷65 〈藝文略〉에서도 霸史로 분류하면서 ≪前蜀書≫ 40권이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王氏의 本末을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역주27 昔舜治天下……舜之史因幷記以爲美 : ≪書經≫ 〈益稷〉에 순임금의 樂官인 夔가 “堂 아래는 관악기와 도고를 진열하고 음악을 합하고 멈추되 축과 오로써 하며 생과 용을 번갈아 연주하니 새와 짐승이 너울너울 춤추고 소소를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춥니다.[下管鼗鼓 合止柷敔 笙鏞以間 鳥獸蹌蹌 簫韶九成 鳳凰來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28 故孔子書於春秋曰……譏之也 : 春秋時代 魯 哀公 14년(B.C. 481)에 사냥터에서 기린이 잡히자, 공자가 聖王도 없는 세상에 기린이 나오니 周나라의 도가 일어나지 못하고 아름다운 상서도 응험이 없음을 한탄하여 ‘西狩獲麟’이라는 구절로 ≪春秋≫의 집필을 마친 일이 있다.
역주29 符命讖緯 : 符命은 하늘에서 제왕이 될 만한 사람에게 주는 상서로운 징조를 가리키는 말로, ≪漢書≫ 卷87 〈揚雄傳〉에 “왕망이 이미 부명으로 스스로 제왕이 되고 즉위한 뒤에 그 근원을 없애어 앞의 일을 신격화하려고 하였다.[莽旣以符命自立 卽位之後 欲絶其原以神前事]”라고 하였다. 讖緯는 중국 秦나라 때부터 비롯된 일종의 豫言學說로, 陰陽五行說과 日食, 月食 등의 天災之變이나 隱語 등을 뒤섞은 讖錄와 圖緯로 인간의 吉凶禍福을 점치던 학설이다. 대개 河圖, 洛書에서 기원하였으며 前漢 말엽에 크게 성행하였는데, 後漢 光武帝가 이를 좋아하여 이후에 俗儒들이 더욱 부연하여 오류가 날로 심해졌다.
역주30 戴氏禮 以其在宮沼爲王者難致之瑞 : 戴聖이 편찬했다고 하는 ≪禮記≫의 〈禮運〉편에 聖王이 세상을 다스리는 효험을 논하여 “하늘은 그 도를 아끼지 않고 땅은 그 보배를 아끼지 않으며 사람은 그 정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늘은 기름진 이슬을 내리고 땅은 단술의 샘물을 내보내며, 산에서는 보기와 산거가 나오고 하수에서는 용마와 하도가 나오며, 봉황과 기린이 교외의 숲에 있고 거북과 용이 궁중의 못에 있다.[天不愛其道 地不愛其寶 人不愛其情 故天降膏露 地出醴泉 山出器車 河出馬圖 鳳凰麒麟皆在郊棷(추) 龜龍在宮沼]”라고 하였다.
역주31 戴禮雜出於諸家 : ≪隋書≫ 〈經籍志〉에 의하면, 오늘날 전하는 ≪禮記≫는 孔子의 제자와 後學들이 만든 1백 31편을 漢나라 초기에 河間獻王이 수정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劉向이 여러 경적을 교감하여 1백 30편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明堂位〉 33편과 〈孔子三朝記〉 7편과 王氏와 史氏의 기록인 21편과 〈樂記〉 23편 등을 얻어 5종 2백 14편이었다. 이후 戴德이 그 번잡하고 중복된 것을 깎아버리고 85편으로 만드니 이것을 ≪大戴記≫라 하고, 또 戴聖이 ≪대대기≫를 깎아 46편으로 만드니 이것을 ≪小戴記≫라 하였다. 漢末에 馬融이 小戴의 학문을 전하면서 또 〈月令〉 1편과 〈明堂位〉 1편과 〈樂記〉 1편을 추가하여 도합 49편이 되어 지금의 ≪禮記≫가 되었다 한다.
역주32 騶虞吾不知其何物也……其出於近世之說乎 : ‘吁嗟乎騶虞’는 ≪詩經≫ 〈召南․騶虞〉편에 보이는데 ≪詩經≫에는 ‘吁’가 ‘于’로 되어 있다. 賈誼(B.C.200~B.C. 168)는 前漢 때의 문장가이자 정치가로, 長沙王의 太傅를 지냈고 漢 文帝와 宣室에서 귀신의 이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고사가 유명하다. 〈治安策〉, 〈弔屈原賦〉등의 작품이 있다.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山海經≫ 〈海內北經〉에 ‘林氏國에 珍奇한 짐승이 있는데 호랑이만 한 크기에 다섯 가지 빛깔을 다 갖추었고 꼬리는 몸보다 길었으니 이름을 騶吾라고 하며 그것을 타면 하루에 천 리를 간다.’라고 하였고 그 注에 ‘≪六韜≫에 이르기를, 「紂가 文王을 가두자 閎夭의 무리가 林氏國에 가서 이 짐승을 구해다 바치니 紂가 크게 기뻐하고 이에 문왕을 풀어주었다.」라고 하고, ≪周書≫에 이르기를, 「夾林의 酋耳이다. 酋耳는 범과 같고 꼬리는 몸과 비슷한데 범과 표범을 잡아먹는다.」라고 하고 ≪大傳≫에서는 侄獸라고 하였으니 「吾」는 「虞」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尙書大傳≫ 〈殷傳〉에는 ‘散宜生이 於陵氏에게 가서 怪獸를 잡았는데……꼬리는 몸보다 배나 긴데 이름을 虞라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注에 ‘虞는 騶虞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詩經毛氏傳≫에는 ‘추우는 의로운 짐승이다.’라고 하였고 ≪淮南子≫ 〈道應訓〉에는 ‘산의생이 이에 千金을 가지고 天下의 진기하고 괴이한 것을 구하여 추우와 雞斯之乘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司馬相如의 〈封禪文〉에는 ‘그런 뒤에 추우의 진기한 무리를 가두었다.’라고 하고, 張平子(張衡)의 〈東京賦〉에는 ‘林氏의 추우를 가두었다.’라고 하였다. ≪說文解字≫에는 ‘虞는 추우이다. 白虎의 모습에 검은 무늬가 있고 꼬리는 몸보다 긴데 인자한 짐승으로 저절로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는다.’라고 하였다. ≪周禮≫ 〈鍾師〉에는 ‘王은 추우를 연주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注에〉 ‘鄭司農(鄭衆)이 이르기를, 「추우는 성스러운 짐승이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장평자 및 許愼과 정사농은 모두 漢代 사람이고 毛公(毛萇)과 淮南子는 모두 가의와 동시대이며 司馬相如는 가의가 살던 때에서 멀지 않고 伏生은 가의보다 더 이른 시기에 살았다. ≪산해경≫과 ≪육도≫가 비록 僞書인 것은 면치 못하지만 실제로 秦漢시대에 나왔으니 近世의 說이 아니다. ≪尙書≫에 이르기를, ‘우리는 봉황새의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孔子께서 이르기를, ‘봉황새가 이르지 않고 河水에서 圖가 나오지 않으니 나는 그만이로구나.’라고 하였으니 모두 태평한 세상의 단서로 본 것이다. 다만 天道는 알기 어려운지라 거북, 용, 기린, 봉황, 추우 같은 부류들은 만일 합당하지 않은 때 나온다면 祥瑞가 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古說에서 나왔느니, 近說에서 나왔느니 따질 것이 있겠는가. 文忠公은 태평성대의 단서가 아니라는 說을 펴고자 하여 반드시 일체 물리치고는 다시 자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내가 속인다고 여긴다면 ≪육도≫, 〈봉선문〉, ≪회남자≫, 〈동경부〉를 ≪野客叢書≫(王楙 撰)에서 이미 引用하여 歐陽公의 ≪詩本義≫ 및 이 책의 착오를 증명한 적이 있다.[按山海經海內北經 林氏國有珍獸 大若虎 五彩畢具 尾長于身 名曰騶吾 乘之日行千里 注六韜云 紂囚文王 閎夭之徒詣林氏國 求得此獸獻之 紂大悅 乃釋之 周書曰 夾林酋耳 酋耳若虎 尾參於身 食虎豹 大傳謂之侄獸 吾宜作虞也 尙書大傳殷傳 散宜生之於陵氏 取怪獸……尾倍其身 名曰虞 注虞蓋騶虞也 詩毛傳 騶虞 義獸也 淮南子道應訓 散宜生乃以千金求天下之珍怪 得騶虞雞斯之乘 司馬相如封禪文 然後囿騶虞之珍群 張平子東京賦 圉林氏之騶虞 說文 虞 騶虞也 白虎黑文 尾長於身 仁獸也 食自死之肉 周禮鍾師 王奏騶虞 鄭司農云騶虞聖獸 平子及許鄭 皆漢人 毛公淮南皆賈同時 相如去賈未遠 伏于賈更早生 山海經六韜雖不免于僞 實出秦漢閒 非近世說 書曰 我則鳴鳥不聞 孔子曰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 皆視爲盛世之端也 但天道難知 龜龍麟鳳騶虞之類 苟非其時 不得爲瑞 何問出古說近說 文忠公欲伸非端之說 必一切闢之 又未暇致詳 人將謂我誣矣 六韜封禪文淮南子東京賦 野客叢書已嘗引之 證公詩本義及此書之誤]”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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