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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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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16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傳曰 이라하니 善乎 管生之能言也
禮義 治人之大法이요 廉恥 立身之大節이니 蓋不廉則無所不取 不恥則無所不爲
人而如此 則禍亂敗亡 亦無所不至어든 況爲大臣而無所不取하고 無所不爲 則天下其有不亂이며 國家其有不亡者乎
予讀馮道하야 見其自述以爲榮하니 其可謂無廉恥者矣 則天下國家可從而知也로다
而怪士之被服儒者 以學古自名하야 而享人之祿하며 任人之國者多矣 然使忠義之節 獨出於武夫戰卒하니
豈於儒者 果無其人哉 豈非高節之士 惡時之亂하야 薄其世而不肯出歟 抑君天下者 不足顧而莫能致之歟
이라하니 豈虛言也哉
予嘗得五代時小說一篇 載王凝妻李氏事하니 以一婦人으로도 猶能如此하니 則知世固嘗有其人而不得見也
凝家靑齊之間하야 爲虢州司戶參軍이라가 以疾卒于官하니 凝家素貧하고 一子尙幼
李氏携其子하고 負其遺骸以歸할새 東過開封하야 止旅舍러니 旅舍主人 見其婦人獨携一子而疑之하야 不許其宿한대 李氏顧天已暮하야 不肯去어늘 主人牽其臂而出之하니
李氏仰天長慟曰 我爲婦人이어늘 不能守節하야 而此手爲人執耶 不可以一手幷汚吾身이라하고 卽引斧自斷其臂하니 路人見者 環聚而嗟之하야 하고 或爲之泣下
開封尹聞之하고 白其事于朝하니 官爲賜藥封瘡하며 厚卹李氏하고 而笞其主人者하다
嗚呼 士不自愛其身而忍恥以偸生者 聞李氏之風이면 宜少知愧哉인저
覽道傳컨대 到底是一鄕愿中之最深而滑者
馮道 字可道 瀛州景城人也하야 爲參軍이러니 守光敗 去事宦者張承業이라
承業監河東軍할새 以爲巡官하고 以其文學으로 薦之晉王하야 爲河東節度掌書記하다 莊宗卽位 拜戶部侍郎하고 充翰林學士하다
道爲人 能自刻苦爲儉約이라 當晉與梁夾河而軍하야 道居軍中하야 爲一茅庵하야 不設牀席하고 臥一束芻而已 하야 意恬如也
諸將有掠得人之美女者以遺道어늘 道不能却하야 置之別室하고 訪其主而還之하다
其解學士하여 居父喪于景城할새 遇歲饑이어늘 悉出所有하야 以賙鄕里하고 而退耕于野하고 躬自負薪이라
有荒其田不耕者 與力不能耕者어든 道夜往하야 潛爲之耕하니 其人後來愧謝어늘 道殊不以爲德하다
服除 復召爲翰林學士한대 行至汴州하야
勸道少留以待하니 道曰 吾奉詔赴闕하니 豈可自留아하고 乃疾趨至京師
莊宗遇弑하고 明宗卽位 雅知道所爲하야 問安重誨曰 先帝時馮道何在오하니 重誨曰 爲學士也라하야늘
明宗曰 吾素知之 此眞吾宰相也라하고 拜道端明殿學士하고 遷兵部侍郎하고 歲餘 拜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之間 歲屢豐熟하야 中國無事어늘 道嘗戒明宗曰 臣爲河東掌書記時 奉使中山이라가 懼馬蹶失하야 不敢怠於銜轡러니 及至平地하야 謂無足慮라가 遽跌而傷이라 凡蹈危者 慮深而獲全하고 居安者 患生於所忽하나니 此人情之常也라하니
明宗問曰 天下雖豐이나 百姓濟否아라하야늘 道曰 穀貴餓農하고 穀賤傷農이라하고 因誦文士하니 其言近而易曉 明宗顧左右하야 錄其詩하야 常以自誦하다
水運軍將 於臨河縣 得一玉杯한대 有文曰傳國寶萬歲杯 明宗甚愛之하야 以示道하니 道曰 此前世有形之寶爾 王者 固有無形之寶也라하야늘
明宗問之하니 道曰 仁義者 帝王之寶也 故曰 이라하다
明宗武君이라 不曉其言이어늘 道已去 召侍臣하야 講說其義하고 嘉納之하다
明宗崩하고 相愍帝 이라 愍帝出奔衛州어늘 道率百官하야 迎潞王以入하니 是爲廢帝
遂相之하다 廢帝卽位時 愍帝猶在衛州어늘 後三日 愍帝始遇弑崩이라 已而 廢帝出道爲同州節度使하고 踰年 拜司空하다
道又事晉하니 晉高祖拜道司空同中書門下平章事하고 加司徒하고 兼侍中하고 封魯國公하다
高祖崩 道相出帝하니 加太尉하고 封燕國公하고 罷爲匡國軍節度使하고 徙鎭威勝하다
道又事契丹하야 朝耶律德光於京師하니 德光責道事晉無狀이어늘 道不能對
又問曰 何以來朝오하니 對曰 無城無兵이어니 安敢不來오라하다
德光誚之曰 爾是何等老子오하야늘 對曰 無才無德癡頑老子라하니 德光喜하야 以道爲太傅하다
德光北歸 從至常山한대 하니 乃歸漢하야 以太師奉朝請하다
道又事周하니 周太祖拜道太師兼中書令하다
道少能矯行하야 以取稱於世러니 及爲大臣하야 尤務持重以鎭物하야 事四姓十君하야 益以自處 然當世之士 無賢愚 皆仰道爲元老하야 而喜爲之稱譽
耶律德光嘗問道曰 天下百姓 如何救得고하야늘 道爲俳語以對曰 此時 佛出이라도 救不得이오 惟皇帝라야 救得이라하니 人皆以謂契丹不夷滅中國之人者 賴道一言之善也
周兵反하야 犯京師어늘 隱帝已崩이라 太祖謂漢大臣必行推戴러니 及見道 道殊無意
太祖素拜道 因不得已拜之하니 道受之如平時 太祖意少沮하야 知漢未可代하야 遂陽立湘陰公贇爲漢嗣하야 遣道迎贇于徐州러니
贇未至 太祖將兵하야 北至澶州하야 擁兵而反하야 遂代漢이라 議者謂道能沮太祖之謀而緩之하야 終不以晉漢之亡責道也 然道視喪君亡國 亦未嘗以屑意
當是時하야 天下大亂하야 戎夷交侵하야 이어늘
道方自號長樂老하고 著書數百言하야 陳己更事四姓 及契丹所得階勳官爵以爲榮하야
自謂 孝於家하고 忠於國하며 爲子爲弟爲人臣爲長爲夫爲父하고 有子有孫이라 時開一卷하고 時飲一杯하며 하야 老安於當代하야 老而自樂하니 何樂如之리오하니 蓋其自述如此
馮道馮道
道前事九君 未嘗諫諍이러니 하니 世宗曰 劉旻少我하야 謂我新立而國有大喪하니 必不能出兵以戰이오 且善用兵者 出其不意하나니 吾當自將擊之호리라하야늘 道乃切諫以爲不可
世宗曰 吾見唐太宗平定天下 敵無大小 皆親征이라하니 道曰 陛下未可比唐太宗이라하야늘
世宗曰 劉旻烏合之衆 若遇我師 如山壓卵이라하니 道曰 陛下作得山定否아하야늘 世宗怒하야 起去하야 卒自將擊旻하야 果敗旻于高平이라
世宗取淮南하고 定三關하니 威武之振 自高平始 어늘 葬畢而道卒하니 年七十三이라 諡曰文懿 追封瀛王하다
道既卒 時人皆相稱歎以謂與孔子同壽라하니 其喜爲之稱譽 蓋如此 道有子吉이라


에 이르기를 “예의염치禮義廉恥는 국가의 사유四維이니 사유가 신장되지 못하면 국가가 이에 멸망한다.” 하였으니, 훌륭하도다! 관생管生이 말을 잘함이여.
는 사람을 다스리는 대법大法이고 입신立身대절大節이니, 청렴하지 않으면 취하지 못하는 바가 없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
사람이고서 이와 같으면 화란禍亂패망敗亡이 또한 이르지 않는 바가 없는데, 하물며 대신大臣이 되어서 취하지 못하는 바가 없고 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면, 천하가 혼란하지 않을 리 있겠으며 국가가 망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내가 풍도馮道의 〈장악로자서長樂老自序〉를 읽고서 풍도가 스스로 자신의 사적을 서술하여 영광이라 한 것을 보았으니, 염치廉恥가 없는 자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당시의 천하와 국가가 어떠했는지를 이를 통해 알 만하다.
내가 오대五代에 있어서 절개를 온전히 한 선비 세 사람과 국사國事에 목숨을 바친 신하 열다섯 사람을 얻었다.
괴이한 점은, 선비로서 유자儒者의 옷을 입은 이들이 옛 법도를 배워서 스스로 이름이 알려져 남의 녹봉을 먹고 남의 나라를 맡은 사람이 많은데도, 충의忠義의 절개를 지닌 이는 유독 무부武夫와 병졸 출신에서 나오게 한 것이다.
어찌 유자儒者 중에 정말로 그런 사람이 없었겠는가. 아마도 높은 절개를 지닌 선비가 혼란한 시대를 싫어하여 당시 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나오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천하의 군주 된 자들이 돌아볼 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여겨서 이들을 초치하지 못한 것인가?
공자孔子가 “열 가구쯤 사는 작은 마을에도 충신忠信한 사람은 반드시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빈말이겠는가.
내가 일찍이 오대五代 때의 단편短篇 잡기雜記를 읽은 적이 있는데 왕응王凝의 아내 이씨李氏의 사적이 실려 있었다. 일개 부인婦人으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할 수 있었으니, 세상에는 진실로 항상 그런 사람이 있으나 보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왕응이 청주靑州제주齊州 사이에 살면서 괵주虢州사호참군司戶參軍이 되었다가 병으로 임지에서 하니, 왕응의 집은 본디 가난하고 아들 하나는 아직 어렸다.
이씨李氏가 그 아들을 이끌고 남편의 유해를 지고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동쪽으로 개봉開封을 지나가다가 여관에 머물게 되었는데, 여관 주인이 부인이 홀로 아들 하나만 이끌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겨 투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씨가 돌아보니 날이 이미 저물었기에 떠나려 하지 않자 여관 주인이 이씨의 팔을 잡고 끌어서 쫓아내었다.
이씨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길게 통곡하고 말하기를 “나는 부인婦人인데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이 손이 남에게 잡혔단 말인가. 이 한 손 때문에 내 몸까지 더럽힐 수는 없다.”라고 하고, 즉시 도끼를 가져와서 스스로 자기 팔뚝을 끊으니, 길 가던 사람들이 보고서 둘러 모여 탄식하면서, 어떤 사람은 손가락을 퉁기며 격분하였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렸다.
개봉부윤開封府尹이 듣고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관가에서 약을 하사하여 상처를 치료해주고 후하게 보살펴주었으며, 여관 주인에게는 태형笞刑을 가하였다.
오호라! 선비로서 스스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수치를 참아가며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는 자가 이씨의 풍도風度를 듣는다면 응당 조금이나마 부끄러워할 줄 알 것이다.
01. 풍도馮道전기傳記
풍도전馮道傳〉을 보건대 결국 일개 향원鄕愿 중에서도 가장 처세술이 깊고 교활한 자이다.
풍도馮道가도可道이니 영주瀛州 경성景城 사람이다. 유수광劉守光을 섬겨 참군參軍이 되었는데 유수광이 패하자 유수광을 떠나 환자宦者 장승업張承業을 섬겼다.
장승업이 하동河東감군監軍할 때 풍도를 순관巡官으로 삼고 그의 문학文學을 들어 진왕晉王에게 천거하여 하동절도장서기河東節度掌書記로 삼았다. 장종莊宗이 즉위하자 호부시랑戶部侍郎에 배수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충임充任하였다.
풍도는 사람됨이 스스로 힘써 고생을 견뎌내며 검약하였다. 나라가 나라와 황하黃河를 끼고 대치할 때 풍도가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띠풀로 초막을 짓고서 상석床席은 차리지 않고 꼴을 묶은 자리 위에 누울 뿐이었고, 받은 봉록俸祿을 가지고 자신이 부리는 사람과 한솥밥을 먹으면서 편안해하였다.
장수들이 남의 미녀美女를 빼앗아 풍도에게 주었는데 풍도는 물리치지 못하고 미녀를 별실別室에 두고서 주인을 찾아가 돌려주었다.
풍도가 학사學士에서 해직되어 경성景城에서 부친의 상을 치를 때 기근이 들자 자신의 소유를 다 내어 향리 사람들을 구휼하고 물러나 들판에서 농사를 짓고 몸소 땔감을 져 날랐다.
전답이 황폐해져 경작하지 못하는 자와 경작할 능력이 없는 자가 있으면 풍도가 밤에 가서 몰래 경작 해주니 사람들이 뒤에 와서 부끄러워하며 사례하였는데 풍도는 전혀 덕을 베풀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풍도馮道탈상脫喪하자 조정에서 다시 불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는데, 길을 가다 변주汴州에 이르렀을 때 조재례趙在禮가 난을 일으켜 명종明宗위주魏州에서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 경사京師를 범하는 상황을 만났다.
공순孔循이 풍도에게 잠시 머무르며 기다리라고 권하니, 풍도가 말하기를 “내가 조명詔命을 받들어 대궐로 급히 가는 터이니 어찌 제 마음대로 머무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이에 빠르게 달려 경사에 이르렀다.
장종莊宗이 시해 당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평소 풍도의 행실을 알고 있던 터라 안중회安重誨에게 묻기를 “선제先帝 때 풍도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니, 안중회가 말하기를 “학사學士로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명종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부터 알고 있으니 이 사람은 참으로 나의 재상宰相감이다.”라고 하고는 풍도를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에 배수하였다. 그리고 병부시랑兵部侍郎으로 승진하고 한해 남짓 지나 중서시랑中書侍郎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되었다.
천성天成장흥長興 연간年間에 해마다 자주 풍년이 들어 중국中國에 별 일이 없었는데 풍도가 일찍이 명종을 경계하기를 “신이 하동장서기河東掌書記로 있을 때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산中山으로 가다가 험준한 정형井陘을 지날 적에 말이 실족失足하여 넘어질까 두려워하여 감히 고삐와 재갈 당기는 일을 게을리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평지에 이르러 걱정할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넘어져 다쳤습니다. 무릇 위험한 곳을 지나는 자는 깊이 염려하여 안전을 확보하고 편안한 곳에 거하는 자는 소홀히 여기는 데서 환란이 생겨나는 법이니, 이는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라고 하였다.
명종이 묻기를 “천하가 풍요롭기는 하나 백성들이 구제되겠는가?”라고 하자, 풍도가 말하기를 “곡물이 귀하면 농부는 굶주리고 곡식이 남아돌면 농부가 손해를 봅니다.”라고 하고서 문사文士 섭이중聶夷中의 〈전가시田家詩〉를 암송하였다. 그 말이 천근淺近하고 이해하기 쉬우므로 명종이 좌우를 돌아보며 그 시를 기록하게 하여 항상 스스로 암송하였다.
수운군장水運軍將임하현臨河縣에서 옥술잔 하나를 얻었는데 ‘전국보傳國寶 만세배萬歲杯’라는 명문銘文이 있었다. 명종明宗이 술잔을 몹시 아끼면서 풍도馮道에게 보여주니, 풍도가 말하기를 “이것은 전세前世유형有形의 보배일 뿐입니다. 왕자王者에게는 본디 무형無形의 보배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명종이 무엇인지 묻자 풍도가 말하기를 “인의仁義제왕帝王의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대보大寶라 하니, 무엇으로 를 지키는가? 이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명종은 무인武人 출신의 임금이라 그 말뜻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풍도가 나가고 난 뒤에 시신侍臣을 불러 그 뜻을 강설講說하게 하고 가납嘉納하였다.
풍도가 명종의 재상으로 10여 년을 지냈을 때 명종이 붕어崩御하였고, 민제愍帝의 재상으로 있을 때 봉상鳳翔에서 노왕潞王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민제가 위주衛州로 피신하였는데 풍도가 백관을 인솔하여 노왕을 맞이하여 들이니 이 사람이 폐제廢帝이다.
폐제가 마침내 풍도를 재상으로 삼았다. 폐제가 즉위하였을 때 민제가 아직 위주에 있었는데 3일 뒤에 민제가 비로소 시해 당해 붕어하였다. 얼마 뒤 폐제廢帝가 풍도를 외직으로 보내 동주절도사同州節度使로 삼고 한해를 넘겨 사공司空에 배수하였다.
나라가 나라를 멸망시키자 풍도가 다시 진나라를 섬기니 고조高祖가 풍도를 수사공守司空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하고 사도司徒를 더해주고 시중侍中을 겸직하게 하고 노국공魯國公에 봉하였다.
고조가 붕어하자 풍도가 출제出帝의 재상이 되니 태위太尉를 더해주고 연국공燕國公에 봉하고 파직하여 광국군절도사匡國軍節度使로 삼고 자리를 옮겨 위승군威勝軍진수鎭守하게 하였다.
거란契丹이 진나라를 멸망시키자 풍도가 다시 거란을 섬겨 경사京師에서 야율덕광耶律德光조현朝見하였다. 야율덕광이 풍도가 진나라를 섬긴 형편 없는 작태를 책망하자 풍도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야율덕광이 다시 묻기를 “어찌하여 조현하러 왔는가?”라고 하니, 풍도가 말하기를 “성도 없고 병사도 없는데 어찌 감히 오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야율덕광이 꾸짖기를 “너는 어떤 노인인가?”라고 하자, 풍도가 대답하기를 “재능도 덕도 없는 어리석고 완악한 노인입니다.”라고 하니, 야율덕광이 기뻐하면서 풍도를 태부太傅로 삼았다.
야율덕광이 북쪽으로 돌아갈 때 풍도가 배종陪從하여 상산常山에 이르렀는데 고조高祖가 즉위하자 이에 한나라에 귀부歸附하여 태사太師봉조청奉朝請이 되었다.
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자 풍도가 다시 주나라를 섬기니 태조太祖가 풍도를 태사太師 겸중서령兼中書令에 배수하였다.
풍도馮道는 소싯적에 감정을 절제하고 외면의 행실을 잘 꾸며 당세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는데 대신大臣이 되어서는 더욱 무게 있게 행동하여 사람들을 진정鎭定시켜 네 의 열 임금을 섬기면서 구덕舊德으로 더욱 자처하였다. 그러나 당세의 선비들은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할 것 없이 모두 풍도를 원로元老로 우러르며 좋아하여 칭양稱揚하였다.
야율덕광耶律德光이 일찍이 풍도에게 묻기를 “천하의 백성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풍도가 재담才談으로 대답하기를 “이런 시대는 부처가 나와도 구제할 수 없고, 오직 황제만이 구제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거란契丹이 중국 사람들을 죽여 없애지 않은 것은 풍도가 말 한마디를 잘한 덕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라 병사가 반란을 일으켜 경사京師를 침범하였는데, 은제隱帝가 이미 붕어崩御하였으므로 태조太祖나라의 대신大臣들이 반드시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풍도를 만났을 때 풍도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태조는 평소 풍도에게 절을 올리던 관계였으므로 부득이 풍도에게 절을 올리니 풍도가 평소 때처럼 태조의 절을 받았다. 그러자 태조는 뜻이 조금 꺾여 한나라를 아직 대체할 수 없음을 알고서 마침내 형식적으로 상음공湘陰公 유빈劉贇을 한나라의 후사後嗣로 세워 풍도를 보내 서주徐州에서 유빈을 영접해 오게 하였다.
그런데 유빈이 당도하기 전에 태조가 병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전주澶州에 이르러 병사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한나라를 대체하였다. 의론하는 자들은 풍도가 태조의 계획을 저지하여 늦추었다고 생각하여 끝내 나라와 한나라가 망한 책임을 풍도에게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풍도는 임금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상황을 보면서도 개의한 적이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천하가 크게 혼란하여 오랑캐들이 번갈아가며 침입하여 생민生民의 운명이 거꾸로 매달린 것보다 위급했다.
그런데 풍도는 바야흐로 장락노長樂老라고 자호自號하고 수백 자의 글을 지어서 자신이 번갈아가며 섬긴 사성四姓의 임금과 거란에서 받은 품계와 공훈과 관작을 서술하고서 영화롭게 여겨
스스로 말하기를 “집에서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자식과 아우와 신하와 스승과 지아비와 아비로 지내며 아들과 손자를 두었다. 때때로 한 권의 책을 펼쳐보고 때때로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음식을 맛보고 소리를 분별하고 채색옷을 입으면서 당대에 편안히 늙어 늙어가면서 스스로 즐기니 이 같은 즐거움이 어디 있으랴.”라고 하니, 대개 그가 스스로 서술한 것이 이와 같았다.
풍도馮道가 앞서 아홉 임금을 섬기면서는 간쟁한 적이 없었다. 세종世宗이 막 즉위했을 때 유민劉旻상당上黨을 공격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유민이 나를 업신여겨, 나는 막 즉위하였고 나라는 대상大喪을 당하였으니 반드시 출병하여 싸울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 용병을 잘하는 자는 생각지 못한 틈을 엿보아 공격하는 법이니 내가 응당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겠다.”라고 하자, 풍도가 이에 간절히 간쟁하여 불가하다고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태종太宗이 천하를 평정할 적에 적의 세력이 크건 작건 모두 친정親征하였다.”라고 하니, 풍도가 말하기를 “폐하는 당 태종에 비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유민의 오합지졸이 만약 나의 군대와 조우한다면 마치 산으로 계란을 누르는 격일 것이다.”라고 하니, 풍도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산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세종이 노하여 일어나 나가서 마침내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유민을 공격하여 과연 고평高平에서 유민을 패퇴시켰다.
세종이 회남淮南을 취하고 삼관三關을 평정하였는데 위무威武가 떨쳐지기 시작한 것은 고평 전투에서부터였다. 세종이 유민을 공격할 때 풍도를 비루하게 여겨 종행從行시키지 않고 태조太祖산릉사山陵使로 삼았는데 장사葬事가 끝나자 풍도가 졸하니 향년 73세였다. 시호를 문의文懿라 하고 영왕瀛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풍도가 졸하고 나서 당시 사람들이 모두 서로 칭송하고 탄식하면서 공자孔子와 같은 를 누렸다고 하니, 사람들이 풍도를 좋아하여 칭양稱揚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풍도는 아들 을 두었다.


역주
역주1 禮義廉恥……國乃滅亡 : ≪管子≫ 〈牧民〉에 “나라에 四維가 있으니 한 維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維가 끊어지면 나라가 위태하고, 세 維가 끊어지면 나라가 엎어지고, 네 維가 끊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 기운 것은 바로잡을 수 있고, 위태한 것은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엎어진 것은 일으킬 수 있지만, 멸망한 것은 다시 조치할 수 없다. 무엇을 일러 사유라 하는가? 첫째는 禮이고, 둘째는 義이고, 셋째는 廉이고, 넷째는 恥이다.[國有四維 一維絶則傾 二維絶則危 三維絶則覆 四維絶則滅 傾可正也 危可安也 覆可起也 滅不可復錯也 何謂四維 一曰禮 二曰義 三曰廉 四曰恥]”라고 하였다.
역주2 長樂老敍 : 馮道가 자신의 生平을 서술한 〈長樂老自序〉를 가리킨다. ≪新五代史≫의 열전에는 일부만 실려 있고 ≪舊五代史≫의 열전에 내용이 상세하다.
역주3 予於五代……死事之臣十有五 : ≪新五代史≫의 〈死節傳〉과 〈死事傳〉을 가리킨다.
역주4 孔子以謂十室之邑 必有忠信 : ≪論語≫ 〈公冶長〉에 나오는 말이다.
역주5 或爲之彈指 : 彈指는 감정이 격분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新唐書≫ 卷120 〈敬暉傳〉에 “경휘가 매양 앉은 자리를 치고 서글피 한탄하면서 손가락을 퉁기며 피눈물을 흘렸다.[暉每椎坐悵(창)恨 彈指流血]”라고 하였다.
역주6 馮道傳 : 馮道(882~954)는 字가 可道로 瀛州 景城 사람이다. 풍도는 五代의 혼란기 동안에 後唐과 後晉과 契丹의 遼나라와 後漢과 後周 등 5개 왕조 4姓의 황제들을 번갈아 섬기며 재상의 직위를 유지한 立志傳的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를 역으로 말하면 풍도는 절조 없이 임금을 번갈아 섬긴 반복무상한 소인배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점이 풍도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부분인데, 절의가 없이 반복무상한 인물에 대해 강하게 貶懲을 가했던 구양수가 풍도를 어떻게 서술했을 지는 이미 열전을 보지 않아도 대략을 추측해볼 수 있다.
풍도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126 〈周書 第17 列傳6〉과 ≪新五代史≫ 卷54 〈雜傳 第42〉에 실려 있다. 풍도가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을 따져봤을 때 풍도를 〈잡전〉에 배치한 구양수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구양수의 의도는 열전의 서술을 확인하면 더욱 명확해진다. 구양수는 풍도의 열전을 기술하면서 ≪구오대사≫에 비해 공적을 축약하였고 앞부분에 풍도의 사람됨이 근실하고 검약함을 언급하기는 하였으나 풍도의 그릇이 크지 못함과 능수능란한 처세술과 이름에 비해 부족한 능력을 나타내는 일화를 중점적으로 나열하였다. 그리고 구양수는 열전 안에서 “풍도는 임금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상황을 보면서도 개의한 적이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천하가 크게 혼란하여 오랑캐들이 번갈아가며 침입하여 生民의 운명이 거꾸로 매달린 것보다 위급했다. 그런데 풍도는 바야흐로 長樂老라고 自號하고 수백 자의 글을 지어서 자신이 번갈아가며 섬긴 四姓의 임금과 거란에서 받은 품계와 공훈과 관작을 서술하고서 영화롭게 여겼다.”라고 하고, 또 “아홉 임금을 섬기면서 간쟁한 적이 없었다.”라고 하고, 또 “世宗이 劉旻을 공격할 때 풍도를 비루하게 여겨 從行시키지 않고 太祖의 山陵使로 삼았는데 葬事가 끝나자 풍도가 졸하니 향년 73세였다.”라고 하는 등 곳곳에서 풍도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
특히 풍도가 北漢을 공격하려는 後周 世宗을 말리다가 세종이 그를 비루하게 여겨 山陵使로 삼아버렸고 결국 세종은 북한을 격파하였다고 기술한 부분에 대해서 ≪五代史記纂誤續補≫에서는 “풍도는 首相이 되어 故事에 따라 山陵使가 된 것이다.……풍도가 간언한 일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歐陽公이 풍도를 미워하여 말을 심하게 한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구오대사≫에서도 구양수와 마찬가지로 풍도의 절의를 비판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일정부분 균형감을 가졌다. ≪구오대사≫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풍도의 행실은 성대하게 고인의 풍모가 있었고, 풍도의 국량은 깊이 大臣의 체모를 얻었다. 그러나 네 조정을 섬기면서 여섯 황제의 재상이 되었으니 忠이라 할 수 있겠는가. 대저 한 여인이 두 지아비를 섬기는 것은 사람의 불행인데 하물며 두세 번에 있어서이겠는가.[道之履行 郁有古人之風 道之宇量 深得大臣之禮 然而事四朝相六帝 可得爲忠乎 夫一女二夫 人之不幸 況於再三者哉]”
구양수가 풍도를 비판한 이래 수많은 논자들이 일률적으로 풍도를 비판하였으나, 풍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한 이들도 많다. 이제 아래에 朱熹의 비판과 풍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宋나라 당대의 의미 있는 논의를 부기하여 구양수의 비판과 함께 살펴볼 수 있게 하려 한다.
朱熹 ≪朱子語類≫:鄉原은 남을 위해서 좋을 일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지만, 그가 무궁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예컨대 五代 시절의 풍도는 참으로 향원이다.[鄉原者爲他做得好 便人皆稱之 而不知其有無窮之禍 如五代馮道者 此眞鄉原也]
吳曾 ≪能改齋漫錄≫:공자는 말하기를 “伯夷와 叔齊는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라고 하였고, 柳下惠와 少連을 평가하기를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풍도는 구양공에게 비판을 받았으므로 학자들이 일률적으로 그를 평가하여 다시는 분별하지 않았으니, 애석하다. 富鄭公(富弼)과 蘇黄門(蘇轍)과 王荆公(王安石)만은 풍도를 大人으로 칭찬했다. 대개 구양공이 史書를 저술했을 때는 겨우 壯年의 나이였다. 가령 구양공의 만년에 저술했다면 반드시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前輩들이 이르기를 韓魏公(韓琦)은 慶曆 연간(1041~1048)과 嘉祐 연간(1056~1063) 때에 베푼 정사가 마치 서로 다른 두 손에서 나온 것과 같다고들 하니, 어찌 노년과 젊을 때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구양공의 出處는 한위공과 같았다. 구양공이 풍도를 논한 것은, 내 생각에 응당 경력 연간과 가우 연간을 범례로 삼아야 하니, 그랬다면 구양공이 거의 풍도에게 취한 점이 있었다.[孔子曰 伯夷叔齊不降其志 不辱其身 謂柳下惠少連 降志辱身矣……道自爲歐陽公所詆 故學者一律不復分别 惜哉 獨富鄭公蘇黄門王荆公以大人稱之 蓋歐陽公爲史時甫壮歲 使晩爲之 必不爾也 前輩謂韓魏公慶歷嘉祐施設 如出兩手 豈老少之異歟 歐陽公出處與韓同 其論馮道 予以爲當以慶歷嘉祐爲例 則道也庶乎有取於歐陽公矣]
蘇轍 ≪欒城集≫:풍도는 재상이 되어 4姓의 아홉 임금을 섬겼다. 의론하는 자들이 풍도를 비판하기를, 군주를 배반하고 원수를 섬겨 士君子의 절조가 없어 大義가 이미 어그러졌으니 비록 선한 점이 있어도 기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풍도의 行事를 살펴보고 내심 슬퍼하면서 옛사람 중에서 그래도 풍도와 함께 논하여 말할 수 있는 자를 찾아보았다.
齊 桓公이 公子 糾를 살해하자 召忽은 죽고 管仲은 죽지 않았는데, 관중은 또 이어서 환공을 도왔다. 子貢이 관중을 不仁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공자에게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를 제패하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나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匹夫와 匹婦들이 작은 信義를 행하여 스스로 목매 죽어서 시신이 도랑에 뒹굴어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이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관중이 환공을 도운 것을 공자가 이미 허여하였다. 풍도를 관중에게 붙일 수 없는 까닭은 풍도에게 관중과 같은 공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晏嬰은 崔杼와 함께 齊 莊公을 섬겼는데, 최저가 장공을 시해하고 景公을 옹립하였다. 안영이 이 소식을 듣고 최씨의 집 대문 밖에 서자, 그 從者가 “임금을 위해 죽으시려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영은 “죽은 임금이 나 혼자만의 임금이냐. 내가 왜 죽겠느냐.”라고 하였다. 종자가 다시 “그러면 도망가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안영이 “이것이 나의 죄인가. 내가 왜 도망을 가겠느냐.”라고 하였다. 종자가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안영이 “임금이 죽었는데 어디로 돌아가겠느냐. 백성의 임금이 백성을 억압해서야 되겠느냐. 임금은 社稷을 주관해야 하는 것이다. 임금의 신하가 봉록만 탐해서 되겠느냐. 신하는 사직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므로 임금이 사직을 위해 죽으면 신하도 따라 죽고, 임금이 사직을 위해 도망하면 신하도 따라 도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임금이 스스로를 위해 죽고 스스로를 위해 도망할 경우 임금이 사사로이 총애하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감히 함께 죽고 함께 도망하겠느냐.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지금 죽은 임금을 임금으로 세웠다가 시해하였는데 내가 어찌 따라 죽거나 도망가겠느냐. 내가 장차 어디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대문이 열리자 안영은 안으로 들어가서 장공의 시신의 머리 밑에 자신의 다리를 받치고 곡하고서 일어나 세 번 발을 구르고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는 경공을 섬겼다. 안영은 비록 관중과 같은 공은 없지만 차분히 의론을 풍간하고 권면하여 제나라에 보탬이 되었으니, 군자가 名臣으로 허여하였다. 풍도를 안영에게 붙인다면 거의 심한 부끄러움은 없을 것이다.
대개 풍도가 後唐 明宗을 섬겨 처음으로 재상이 되었고 그 후로 여덟 임금을 두루 섬기면서 바야흐로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설 때 혹은 조정에 있고 혹은 외직에 있었다. 그리고 비록 재상이었던 때라 해도 권력이 그에게 있지 않았으니, 禍變이 일어난 모든 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명종은 비록 오랑캐 출신이었지만 성품이 본래 寬厚하였다. 풍도가 매양 恭儉으로 명종을 권면하여 재위한 10년 동안 백성들이 조금 편안하였다.
그리고 契丹이 後晉을 멸망시킬 때 耶律德光이 풍도를 만나 묻기를 “천하의 백성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는가?”라고 하자, 풍도가 오랑캐는 엄정한 의론으로 깨우칠 수 없음을 고려하여 “지금 시대는 비록 부처가 출현한다 해도 구제할 수 없습니다. 오직 황제만이 구제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야율덕광이 기뻐하면서 마침내 살육을 멈추었으니, 중국 사람들이 그 덕을 입었다.
後周 太祖가 병사를 이끌고 京師를 침범하였을 때 隱帝는 이미 죽었으므로 태조는 後漢의 大臣들이 반드시 자신을 추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태조가 풍도를 만나자 풍도는 평소 때처럼 태조를 대하였다. 태조는 항상 풍도에게 절을 했으므로 이날도 풍도에게 절을 하였는데 풍도는 절을 받고 사양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조는 기운이 꺾여 아직 후한을 대체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湘陰公을 후한의 후사로 삼고 풍도에게 徐州에서 맞이해오게 하였다. 그러자 풍도가 “이 일을 믿어도 됩니까? 나는 평생 망령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공은 내가 망령된 말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태조가 맹세하며 매우 힘들어 하였는데 풍도가 돌아오기 전에 후주가 후한을 대체하였다. 나라를 찬탈하는 시기에는 비록 孟賁과 夏育이라도 그 용맹을 다 펼칠 수가 없는데, 풍도는 절하고 담소하면서 물리쳤으니, 성대한 덕을 지닌 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의론하는 자들이 풍도를 배척하면서 조금의 관용도 베풀지 않으니 심한 태도이다.
선비가 오대 시절에 태어나 폭군과 사나운 장수들 사이에 서서 날마다 범과 들소 같은 이들과 함께 지냈으니, 다 버리고 떠나서 고사리를 캐먹고 사슴이며 고라니와 벗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목매 죽어서 시신이 도랑에 뒹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불행히 조정에서 벼슬한다면 풍도와 같이 되는 것을 오히려 스스로 면하지 못할 것이니, 의론하는 이들은 진실로 조금 너그럽게 보아야 할 것이다.[馮道以宰相事四姓九君 議者譏其反君事仇 無士君子之操 大義既虧 雖有善不錄也 吾覽其行事而竊悲之 求之古人 猶有可得言者 齊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又從而相之 子貢以爲不仁 問之孔子 孔子曰 管仲相桓公霸諸侯 一匡天下 民到於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發左衽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管仲之相桓公 孔子既許之矣 道之所以不得附於管子者 無其功耳 晏嬰與崔杼俱事齊莊公 杼弒公而立景公 晏子立於崔氏之門外 其人曰 死乎 曰 獨吾君也乎 吾死也 曰 行乎 曰 吾罪也乎 吾亡也 曰 歸乎 曰 君死安歸 君民者豈以陵民 社稷是主 臣君者豈爲其口實 社稷是養 故君爲社稷死則死之 爲社稷亡則亡之 若爲己死而爲己亡 非其私暱(닐) 誰敢任之 且人有君而弒之 吾焉得死之而焉得亡之 將庸何歸 門啟而入 枕尸股而哭 興 三踴而出 卒事景公 雖無管子之功 而從容風議 有補於齊 君子以名臣許之 使道自附於晏子 庶幾無甚愧也 蓋道事唐明宗 始爲宰相 其後歷事八君 方其廢興之際 或在內 或在外 雖爲宰相 而權不在己 禍變之發 皆非其過也 明宗雖出於夷狄 而性本寬厚 道每以恭儉勸之 在位十年 民以少安 契丹滅晉 耶律德光見道問曰 天下百姓如何救得 道顧夷狄不曉以莊語 乃曰 今時雖使佛出 亦救不得 惟皇帝救得 德光喜 乃罷殺戮 中國之人賴焉 周太祖以兵犯京師 隱帝已沒 太祖謂漢大臣必相推戴 及見道 道待之如平日 太祖常拜道 是日亦拜 道受之不辭 太祖意沮 知漢未可代 乃立湘陰公爲漢嗣 而使道逆之於徐 道曰 是事信否 吾平生不妄語 公毋使我爲妄語人 太祖爲誓甚苦 道行未返而周代漢 篡奪之際 雖賁育無所致其勇 而道以拜跪談笑却之 非盛德何以致此 而議者黜之曾不少借甚矣 士生於五代 立於暴君驕將之間 日與虎兕爲伍 棄之而去 食薇蕨 友麋鹿 易耳 而與自經於溝瀆何異 不幸而仕於朝 如馮道猶無以自免 議者誠少恕哉]
역주7 劉守光 : ?~914. 幽州節度使 劉仁恭의 아들이다. 부친 유인공을 유폐하고 스스로 大燕皇帝라 칭하였으나 晉王 李存勖의 공격을 받아 부친과 함께 사로잡혀 참살되었다.
역주8 所得俸祿 與僕廝(시)同器飲食 : 이 부분에 대해 ≪五代史記纂誤續補≫ 卷5에 “살펴보건대 이 두 구는 몹시 연결되지 않는다. 薛居正의 ≪舊五代史≫ 〈馮道傳〉에는 ‘부친상을 당해 景城에서 居喪했는데 흉년을 만나자 받은 봉록의 나머지를 모두 鄕里를 진휼하는 데 썼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하루는 풍도가 上謁했다가 물러나간 뒤에 명종이 侍臣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풍도는 성품이 순일하고 검약하다. 지난번 德勝寨에 있을 때 띠풀로 지은 한 초막에서 지내면서 從者와 같은 그릇에 밥을 먹고, 꼴풀 한 단 위에 누워 자면서도 그 마음이 편안하였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글을 절취하여 산삭할 때 잘못한 것이다.[案二語甚不貫一 薛史道傳作丁父憂 持服于景城 遇歲儉 所得俸餘 悉賑於鄉里 又曰一日 道因上謁既退 明宗顧謂侍臣曰 馮道性純儉 頃在德勝寨 居一茅庵 與從人同器食 臥則芻藁一束 其心晏如也 此蓋節刪失當耳]”라고 하였다.
역주9 趙在禮作亂……犯京師 : 趙在禮는 後唐의 大臣으로 처음에는 幽州의 劉仁恭을 섬겼다가 후에 李存勖에게 투항하여 魏博軍效節指揮使가 되었다. 후에 貝州의 戍卒 皇甫暉가 병사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켜 조재례를 겁박하여 鄴都를 공격하였는데 이들을 토벌하러 갔던 明宗 李嗣源이 도리어 반군들과 합세하여 洛陽을 공격하였다. 이에 혼란 중에 莊宗은 군관에게 피살당하였고, 명종이 즉위하여 조재례를 鄴都留守에 제수하였다.
역주10 孔循 : 884~931. 五代 후당의 大臣으로 이 당시 權知汴州의 직임에 있었다. 후에
太行山圖太行山圖
명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橫海軍節度使에 이르렀다.
역주11 天成長興 : 오대 후당 명종의 연호로 天成은 926~930년, 長興은 930~933년 사이에 사용되었다.
역주12 井陘之險 : 井陘은 河北省의 산 이름으로 太行山의 支脈이다. 사면이 높고 중앙이 낮아 우물 형상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山西省과 하북성을 연결하는 통로로 험하기로 유명하다.
역주13 聶夷中田家詩 : 聶夷中(837~884)은 唐나라 때의 시인이자 문관으로 河東 사람이며 자는 坦之이다. 華陰尉를 역임하였다. 농민들의 고통스러운 생활상을 묘사한 〈傷田家〉가 유명하다. 〈상전가〉는 ≪古文眞寶≫ 前集에 실려 있다.
역주14 大寶曰位……曰仁 : ≪周易≫ 〈繫辭傳 下〉의 말로 “천지의 큰 덕을 생이라 하고, 성인의 큰 보배를 지위라 한다. 무엇으로 지위를 지키는가? 인이다.[天地之大德曰生 聖人之大寶曰位 何以守位 曰仁]”라고 하였다.
역주15 道相明宗十餘年 : ≪五代史記纂誤補≫ 卷4에 “삼가 살펴보건대 명종의 재위 기간은 겨우 8년이니 이 말은 오류이다.[謹案明宗在位僅八年 此語誤]”라고 하였다. 명종은 926~933년 사이에 재위하였다.
역주16 潞王反於鳳翔 : 潞王은 後唐 明宗의 養子인 李從珂이다. 명종의 3남인 李從厚가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 사람이 바로 愍帝이다. 민제가 즉위하자 이종가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鳳翔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민제는 낙양을 탈출하여 衛州로 피신하였다.
역주17 晉滅唐 : 五代 後唐 明宗의 駙馬이자 河東節度使로 있던 石敬瑭(892~942)이 契丹의 원조를 받아 末帝 李從珂에게 반란을 일으켜 후당을 멸하고 後晉을 세운 것을 가리킨다.
역주18 (大)[守] : 저본에는 ‘大’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守’로 바로잡았다.
역주19 契丹滅晉 : 契丹의 원조를 받아 後晉을 세운 高祖 石敬瑭은 거란의 太宗 耶律德光과 父子관계를 맺고 자신을 兒皇帝라 칭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出帝 石重貴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강경파의 의견을 따라 거란과 전쟁을 일으켰다가, 946년에 멸망당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20 漢高祖立 : 五代 後漢의 高祖 劉知遠(895~948)이 등극한 것을 가리킨다. 유지원은 본래 後唐 明宗의 신하였으며 後晉 때에는 檢校太傅, 河東節度使 등을 역임했다. 후진이 거란에 멸망하자 다시 거병하여 中原을 수복하고 後漢을 건국했다.
역주21 周滅漢 : 五代 後周 太祖인 郭威(904~954)는 본래 後漢의 權臣으로 후한 高祖 劉知遠의 신임을 받아 樞密使가 되어 兵權을 장악하였다. 유지원이 죽고 隱帝가 즉위하자 곽위의 권한을 두려워하여 곽위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곽위가 반란을 일으켜 도성으로 진군하였다. 은제는 곽위의 반란에 놀란 신하에게 살해되었고 곽위는 汴京에 입성하여 皇族인 劉贇을 황제로 세웠다가 얼마 후 다시 유빈을 살해하고 후주를 열었다.
역주22 舊德 : 德望이 높은 老臣을 가리킨다.
역주23 生民之命 急於倒懸 : 거꾸로 매달린다는 말은 ≪孟子≫ 〈公孫丑 上〉에 “지금과 같은 때에 萬乘의 나라에서 仁政을 행한다면 백성들이 기뻐함이 거꾸로 매달린 것을 풀어 주는 것과 같다.[當今之時 萬乘之國行仁政 民之悅之 猶解倒懸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24 (司)[師] : 저본에는 ‘司’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師’로 바로잡았다.
역주25 食味別聲被色 : ≪禮記≫ 〈禮運〉에 “그러므로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며 오행의 단서이니, 음식을 먹고 소리를 구별하고 색이 있는 것을 입고 사는 것이다.[故人者天地之心也 五行之端也 食味別聲被色而生者也]”라고 하였다.
역주26 世宗初卽位 劉旻攻上黨 : 世宗은 後周를 세운 太祖 郭威의 조카인 柴榮(921~ 959)이다. 後嗣가 없는 곽위의 養子로 황위를 이어받았다. 劉旻(895~954)은 後漢 高祖 劉知遠의 동생으로 곽위와는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곽위가 후주를 세우자 太原에서 北漢을 건국하고 世祖가 되었다. 契丹과 연합하여 후주 정벌에 나섰으나 高平 전투에서 대패한 뒤 울분으로 죽었다.
역주27 其擊旻也……以爲太祖山陵使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5에 “살펴보건대 ≪卄二史攷異≫에 ‘살펴보건대 풍도는 首相이 되어 故事에 따라 山陵使가 된 것이다. 또 〈本紀〉에 근거하면 산릉사로 임명한 일은 2월 丁卯일에 있었고 世宗의 親征은 3월 乙酉일에 출발하였으니 풍도가 간언한 일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歐陽公이 풍도를 미워하여 말을 심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案卄二史攷異案道爲首相 依故事爲山陵使 且據本紀山陵使之命 在二月丁卯 而世宗親征 乃于三月乙酉啓行 則非因道之進諫 而有是命也 歐陽公惡道而甚其辭耳]”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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