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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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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4. 자정전대학사 상서좌승 증이부상서 정숙 오공의 묘지명
嘉祐四年十一月丁未 資政殿大學士 金紫光祿大夫 尙書左丞 知河南府 兼西京留守司 上柱國 渤海郡開國公 食邑二千八百戶 食實封八百戶 贈吏部尙書 諡曰正肅吳公 葬于崇義鄕朝村之原이라
가우嘉祐 4년 11월 정미丁未자정전대학사資政殿大學士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서좌승尙書左丞 지하남부知河南府 겸서경유수사兼西京留守司 상주국上柱國 발해군개국공渤海郡開國公 식읍食邑 3,800호 실제 식읍 800호 증리부상서贈吏部尙書이자 시호가 정숙正肅오공吳公정주鄭州 신정현新鄭縣 숭의향崇義鄕 조촌朝村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吳氏世爲하니 自高曾以來 皆葬이러니
오씨吳氏는 대대로 건안建安 사람이었으니 고조高祖증조曾祖 이래로 모두 건주建州포성浦城에 안장하였다.
至公하야 始葬其皇考于新鄭이러라
그런데 공의 대에 이르러 비로소 신정현新鄭縣에 공의 부친을 안장하였다.
諱育이요 字春卿이니 爲人明敏勁果하며 强學博辯하고
공은 이고 춘경春卿이니, 사람됨이 명민하고 과감하였으며 힘써 학문하여 박학하고 언변이 있었다.
能自忖度하야 不可어든 守不發하고 已發 莫能屈奪이라
그리고 스스로 헤아려보아서 해서는 안 될 일이면 절조를 지키며 하지 않았고, 이미 어떤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그 뜻을 굽히거나 빼앗을 수 없었다.
天聖中 與其弟京方으로 俱擧進士하야 試禮部爲第一하야 遂中甲科하고 而京方皆及第하니 當是時하야 吳氏兄弟 名聞天下러라
천성天聖 연간에 그 아우 과 함께 진사시에 응시하여 예부시禮部試에서 1등을 하여 마침내 갑과甲科에 합격하고 두 아우도 모두 급제하니 이때가 되어 오씨吳氏 형제들의 명성이 천하에 알려졌다.
公初以大理評事二縣이라가 遷本寺丞 知襄城縣하고하야 入三等하고
공은 처음에 대리평사大理評事임안臨安제기諸曁 두 현의 지현知縣이 되었다가 대리시승大理寺丞양성지현襄城知縣으로 자리를 옮겼고, 재식겸무명어체용책才識兼茂明於體用策에 응시하여 3등으로 입격入格하였다.
遷著作佐郎 直集賢院 通判蘇州 同知太常禮院 三司戶部度支二判官 知諫院 修起居注 知制誥 判太常大理二寺 吏部流內銓 史館修撰하고 累遷起居舍人하고 爲翰林學士
그리고서 저작좌랑著作佐郎 집현원직학사集賢院直學士 통판소주通判蘇州 동지태상례원同知太常禮院 삼사호부三司戶部탁지이판관度支二判官 지간원知諫院 수기거주修起居注 지제고知制誥 판태상시判太常寺대리시大理寺 이부유내전吏部流內銓 사관수찬史館修撰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여러 차례 승진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자리를 옮기고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久之 遷禮部郎中하야 以學士 知開封府하다
오래 지나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자리를 옮겨 학사學士의 신분으로 지개봉부知開封府가 되었다.
公爲政簡嚴하야 所至 民樂其不擾하야
공은 정사를 처리하는 것이 간략하고 엄정하여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들이 그 번거롭지 않음을 좋아하였다.
去雖久 愈思之러라
그리하여 공이 떠난 지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더욱 공을 그리워하였다.
界中이러니 其後子孫當從葬者與其歲時上冢者不絶이라
이에 앞서 진도왕秦悼王여주汝州 경내에 장사 지냈는데, 그 뒤에 그의 장지를 따라 장사 지내야 할 자들과 세시의 묘제를 지내기 위해 봉분에 오르는 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故宗室宦官 常往來하야 爲州縣患이라
그러므로 종실宗室과 환관들이 늘 왕래하여 주현州縣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公在襄城 每裁折之하니 宗室宦官怒하야 或夜半叩縣門하야 索牛駕車以動之하되
공이 양성襄城지현知縣으로 있을 적에 매번 이들을 제어하니, 종실과 환관들이 노여워하여 혹 야밤중에 현청縣廳의 문을 두드리며 수레에 맬 소를 요구하면서 소란을 일으켰다.
公輒不應하고 及旦하야 徐告曰 牛不可得也라하니 由是 宗室宦官曰 此不可爲也라하다
그러나 공이 번번이 이에 응하지 않고 아침에 천천히 말하기를 “소는 가져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이 일로 말미암아 종실과 환관들이 “이 사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凡過其縣者 不敢以鷹犬犯民田하고 至他境矣然後敢縱獵이러라
그리고 무릇 양성현을 지나는 자들은 감히 매와 사냥개를 풀어서 백성들의 밭을 침범하며 수렵하지 못하였고, 양성현을 지나 다른 지역 경계에 다다른 뒤에야 매와 사냥개를 풀어 수렵하였다.
其治開封 尤先豪猾하야 曰 吾何有以及斯人
공이 개봉부開封府를 다스릴 때에 호강豪强하고 교활한 자들을 다스리는 일을 특히 우선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 백성들에게 은택을 미칠 수 있겠는가.
去其爲害者而已라하더니 居數日 發大姦吏一人하야 流于하니 一府股栗하고
해악을 일삼는 자를 제거할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며칠이 지나 몹시 간악한 관리 한 사람을 적발하여 영외嶺外로 유배보내니 온 개봉부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又得巨盜積贓萬九千緡하야 獄具而輒再變이라 衆疑以爲寃이어늘
그리고 또 큰 도적이 적취積聚해둔 장물贓物 19,000을 찾아내어 도적에 대한 옥안獄案이 이미 갖추어졌는데 도적이 문득 공초供招를 다시 번복하니 사람들이 그 도적이 억울하겠다고 의심하였다.
天子爲遣他吏按之하니 卒伏法이라
그러자 천자가 다른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하게 하니 마침내 도적이 법대로 처결되었다.
由是 京師肅淸이러라
이 일로 말미암아 경사京師가 엄숙하고 맑아졌다.
方元昊叛河西하야 契丹亦乘間墮盟이라
이때에 바야흐로 조원호趙元昊하서河西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거란 역시 틈을 타서 맹약을 저버렸다.
朝廷多故어늘 公數言事하며 獻計劃하다
그리하여 조정이 다사다난했는데 공이 자주 시사時事를 논하였으며 계책을 올렸다.
自元昊初遣使上書 有不順語 朝廷亟命將出師할새 而群臣爭言豎子卽可誅滅이어늘
원호가 처음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렸을 때부터 불순한 말이 있었는지라 조정에서 급히 장수들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동하게 하였을 때, 신하들이 원호 같은 하찮은 자는 즉시 주멸誅滅해야 한다고 다투어 말하였다.
獨公以謂元昊雖名藩臣이나 而實夷狄이니 其服叛荒忽不常이라
그러나 공만은 “원호가 비록 번신藩臣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적夷狄이니, 그가 복종과 반란을 반복함이 일정하지 않다.
宜示以不足責하야 外置之 且其已僭名號하야 誇其大하니 勢必不能自削하야 以取羞種落이니
마땅히 책망할 만한 일이 못 된다는 뜻을 보인 다음 치지도외置之度外해야 할 것이요, 또 그가 이미 황제의 명호를 참칭하면서 크게 떠벌렸으니 형세상 반드시 스스로를 깎아내려서 그 종족들에게 수치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第可因之하야 賜號若國主者 且故事也
그저 이렇게 된 상황을 말미암아 그에게 국주國主와 같은 정도의 명호를 내려주는 것이 좋으니 이는 또 예전에도 그랬던 일이다.
彼得其欲이면 宜不肯妄動이라하다
원호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응당 경거망동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然時方銳意於必討 故皆以公言爲不然이러니
그러나 당시에 반드시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창 강하였으므로 모두들 공의 말이 옳지 않다고 여겼다.
其後師久無功하고 而元昊亦歸過自新이어늘 天子爲除其罪하야 卒以爲夏國主하니 繇是 議者始悔不用公言而虛弊中國이러라
그런데 그 후 정벌군이 오랫동안 을 세우지 못하고 원호도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되자 천자께서 그 죄를 용서하고서 마침내 하국주夏國主로 삼으니, 이 일로 인해 의논했던 자들이 비로소 공의 말을 따르지 않아 헛되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것을 후회하였다.
公在開封 數以職事辨爭하야 或有不得이면 則輒請引去하니 天子惜之
공이 개봉부에 있을 적에 자주 직무와 관련된 일로 쟁변을 하여 혹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문득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천자가 애석해하였다.
慶曆五年正月 以爲諫議大夫 樞密副使하고 三月 拜參知政事하야으로 爭事上前하니 上之左右與殿中人 皆恐色變이로되 公論辯不已라가
경력慶曆 5년(1045) 정월에 간의대부諫議大夫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삼았고, 3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배수拜受되어 가승상賈丞相과 황제 앞에서 시사時事를 논쟁하니, 황제 좌우의 사람들과 전중殿中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안색이 변하였으나 공은 논변을 그치지 않았다.
旣而曰 臣所爭者 職也로되 顧力不能勝矣 願罷臣職하야 不敢爭하소서하니 上顧公直하야 乃復以爲樞密副使러라
그러다가 잠시 후에 “신이 논쟁한 것은 직무인데 직무를 감당할 힘이 없으니, 원컨대 신을 파직하여 감히 논쟁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황제가 공의 강직함을 생각하여 이에 다시 추밀부사로 삼았다.
居歲餘 大旱이라 賈丞相罷去하고
한 해 남짓 지나 큰 가뭄이 들었는지라 가승상賈丞相이 파직되었고,
御史中丞高若訥 하야 言大臣廷爭爲不肅이라 故雨不時若이라하니
어사중승御史中丞 고약눌高若訥이 《서경書經》 〈홍범洪範〉의 말을 인용하여 “대신大臣이 조정에서 논쟁하여 엄숙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비가 때에 맞게 내리지 않는다.”라고 하니,
因幷罷公하야 以給事中으로 知許州하고 又知蔡州
이를 말미암아 공을 아울러 파직하여 급사중給事中으로서 지허주知許州로 삼고 또 지채주知蔡州로 삼았다.
州故多盜어늘 公按令하야 爲民立而簡其法하니 民便安之하고 盜賊爲息이라
에 예로부터 도적이 많았는데 공이 법령을 살펴 백성들을 위해 오보법伍保法을 제정하되 그 법을 간편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고 도적들도 사라졌다.
京師有告妖賊千人聚어늘 上遣中貴人馳至蔡하야 以名捕者十人이라
요망한 적도賊徒 1,000명이 확산確山에 모여 있다고 경사京師에서 고한 자가 있었는데, 황제가 환관에게 채주로 달려가서 이름을 지명한 열 사람을 체포해 오게 하였다.
使者欲得兵自往取之한대 公曰 使者欲藉兵立威
황제의 사자가 병력을 얻어 스스로 가서 도적을 잡고자 하였는데, 공이 “사자는 병력에 빙자하여 위엄을 세우고자 하십니까?
欲得妖人以還報也아하니 使者曰 欲得妖人爾이라한대 公曰 吾在此 雖不敏이나 然聚千人于境內 安得不知리오
아니면 간적을 잡아서 돌아가 보고하고자 하십니까?” 하니, 사자가 “간적을 잡고자 할 뿐이오.”라고 하자, 공이 “내가 이 고을에 있으면서 비록 불민합니다만 경내에 1,000명이 모여 있다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使信有之라도 今以兵往이면 是趣其爲亂也
가령 정말로 1,000명이 모여 있다 할지라도 지금 병사를 거느리고 간다면 이는 난리를 부추기는 꼴입니다.
此不過鄕人相聚爲佛事하야 以利錢財爾
지금 이 일은 향인鄕人들이 모여서 불사佛事를 하면서 재물복을 비는 것에 불과합니다.
召之 可致也라하고
궁수弓手 한 사람이 부르면 그들을 오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乃館使者하야 日與之飮酒하고 而密遣人召十人者하니 皆至
그리고서 사자를 관사館舍에 머물게 하여 날마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은밀히 사람을 보내 지명된 열 사람을 부르니 모두 당도하였다.
送京師하니 告者果伏辜
이들을 경사로 보내니 처음에 간적이 모여 있다고 고했던 자가 과연 그 죄를 시인하고 처벌을 받았다.
拜資政殿學士하고 徙知河南府 兼西京留守司하고 又徙陝府하고 遷禮部侍郎하고하다
공은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에 배수되었고 지하남부知河南府 겸서경유수사兼西京留守司로 옮겼으며, 또 섬부陝府로 옮기고 예부시낭禮部侍郎으로 옮기고 영흥군永興軍으로 옮겼다.
丁父憂하야 去官이라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
懇請終喪服하니 除加拜翰林侍讀學士하야 且召之어늘
조정에서 기복起復시키자 상을 다 마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니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의 벼슬을 추가로 내려 또 조정으로 불렀다.
公辭以疾하니 上惻然하야 遣使者存問 賜以名藥하고 遂以知汝州러니
공이 병으로 사양하니 황제가 측은히 여겨 사자를 보내 안부를 물으면서 명약을 내리고 마침내 지여주知汝州로 삼았다.
居久之 又辭以疾하니 卽以爲集賢院學士 判西京留守司 御史臺하고 疾少間 復知陝府 加拜資政殿大學士러라
오랜 뒤에 공이 또 병으로 사양하니 곧바로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 판서경유수사判西京留守司 어사대御史臺로 삼았고, 병이 조금 낫자 다시 섬부지부陝府知府로 삼고 자정전대학사資政殿大學士를 추가로 배수하였다.
自公罷去 上數爲大臣言吳某剛正可用이라하야 每召之 輒以疾不至라가
공이 파직되었을 때부터 황제가 자주 대신들에게 오모吳某가 강직하여 쓸 만하다고 하여 매번 부를 때마다 번번이 병으로 가지 못하였다.
於是召還하야 始侍講禁中 判尙書都省하고 明年 判延州하다
그러다가 이때에 소명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와 비로소 금중禁中에서 시강侍講하고 판통진은대사判通進銀臺司상서도성尙書都省이 되었고, 이듬해에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 부연로경략안무사鄜延路經略安撫使 판연주判延州에 배수되었다.
經略河東할새 與夏人爭하야 亟築柵於한대 公以謂約不先定而亟城이면 必生事라하야 遽以利害牒河東하고 移書龐公하고 且奏疏論之하니 朝廷皆不報
방승상龐丞相하동河東경략經略으로 있을 때에 서하西夏인주麟州의 경계를 두고 다투어 급히 백초白草방책防柵을 쌓았는데, 공은 대략적으로라도 경계를 먼저 정하지 않고 급히 성을 쌓으면 반드시 사단이 날 것이라고 하여 급히 이해관계를 따져 하동河東으로 첩문牒文을 보내고 방공龐公에게 서찰을 보냈으며 또 소장을 올려 이 문제를 논하니, 조정에서는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已而 夏人果犯邊하야 殺驍將郭恩하니 而龐丞相與其將校十數人 皆以此得罪
얼마 뒤에 서하인들이 과연 변경을 침범하여 효장驍將곽은郭恩을 살해하니 방승상과 그 장교 십수 인이 모두 이 일로 죄를 받았다.
麟府遂警이러라
그리고 인부麟府는 마침내 서하인들의 침입으로 경보가 있게 되었다.
旣而 公復以疾辭하야 不任邊事하고 且求解宣徽使하니
얼마 지나 공이 다시 병으로 관직을 사양하고서 변경의 일을 맡지 않게 되었고, 또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의 직책에서도 벗어날 것을 요구하였다.
乃復以爲資政殿大學士 尙書左丞 知河中府하고 遂徙河南하다
이에 다시 자정전대학사資政殿大學士 상서좌승尙書左丞 지하중부知河中府로 삼고 마침내 하남河南으로 자리를 옮겼다.
公前在河南 踰月而去어늘 河南人思之러니
공이 앞서 하남河南에 있을 때 한 달을 넘겨 떠났는데도 하남 사람들이 공을 잊지 못하고 사모하였다.
聞其復來하야 皆驩呼하야 逆于路하야 惟恐後하고 其卒也 皆聚哭이러라
그런데 다시 하남으로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모두 환호하며 길에서 공을 맞이하면서 오직 뒤처질까를 걱정하였고, 공이 졸하였을 때에는 모두 모여서 곡하였다.
公享年五十有五
공은 향년 55세이다.
以嘉祐三年四月十五日 卒于位하니 詔輟朝一日하다
가우嘉祐 3년(1058) 4월 15일에 재임 중에 졸하니, 조칙으로 하루 동안 조회를 중지하였다.
曾祖諱進忠 贈太師 妣陳氏 吳國太夫人이라
증조부 진충進忠태사太師에 증직되었고 증조모 진씨陳氏오국태부인吳國太夫人이다.
祖諱諒 贈中書令이요 妣葛氏 越國太夫人이라
조부 중서령中書令에 증직되었고 조모 갈씨葛氏월국태부인越國太夫人이다.
父諱待問 官至禮部侍郎하고 贈太保 妣李氏 楚國太夫人이라
부친 대문待問은 관직이 예부시낭禮部侍郎에 이르렀고 태보太保에 증직되었으며 모친 이씨李氏초국태부인楚國太夫人이다.
娶王氏 太原郡夫人이라
부인 왕씨王氏태원군부인太原郡夫人이다.
子男十人이니 安度安矩安素 皆太常寺太祝이요 安常 大理評事 安正安本安序 皆祕書省正字 安厚 太常寺奉禮郎이요 安憲安節 未仕
자제는 아들은 열 명이니 안도安度안구安矩안소安素는 모두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이고, 안상安常대리평사大理評事이고, 안정安正안본安本안서安序는 모두 비서성정자祕書省正字이고, 안후安厚태상사봉례랑太常寺奉禮郎이고, 안헌安憲안절安節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女三人이니 適集賢校理韓宗彦하고 適著作佐郎龐元英이러니 皆早卒하고 適光祿寺丞任逸이라
딸은 세 명이니 장녀는 집현교리集賢校理 한종언韓宗彦에게, 차녀는 저작좌랑著作佐郎 방원영龐元英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일찍 죽었고, 막내딸은 광록시승光祿寺丞 임일任逸에게 시집갔다.
公在 以列卿으로 하야 父子在廷하니 士大夫以爲榮이로되
공이 이부二府에 있을 적에 태보공太保公열경列卿의 신분으로 조청朝請을 받들어 부자가 함께 조정에 있으니 사대부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而公踧踖不安하야 自言子班父前 非所以示人以法이로되 顧不敢以人子私亂朝廷之制하니 願得罷去라한대 不聽하다
그러나 공은 몸 둘 바를 모르고 불안해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아들이 아버지의 앞 반열에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법으로 보일 것이 아니지만, 감히 자식의 사사로운 사정을 가지고 조정의 제도를 어지럽힐 수 없으니 파직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조정에서 들어주지 않았다.
天子數推恩群臣子弟할새 公每先及宗族疎遠者러니 至公之卒하야 子孫未官者七人이러라
천자가 자주 신하들의 자제에게 은혜를 미루어 관직을 내려줄 때에 공이 매양 먼저 종족 가운데 소원한 자들에게 관직을 내려주도록 하였더니, 공이 졸할 때에 이르러 관직에 오르지 못한 자손이 일곱 사람이었다.
有文集五十卷이요 尤長於論議
문집은 50권인데 논의하는 글을 특히 잘 지었다.
銘曰
은 다음과 같다.
顯允吳公
드러나고 진실한 오공吳公
有家于閩이라
가문이 땅에 있었더니
自我皇考
우리 황고皇考 때로부터
卜玆新原이라
이곳 신정新鄭의 언덕에 음택陰宅을 정했네
두텁고 깊은 묘혈墓穴
樂其寬閒이라
한가롭고 좋은 땅일세
今公其從하니
이제 공이 이곳에 따라 묻히니
公志之安이라
공의 뜻에 편히 여긴 곳이네
公昔尙少
공이 옛날에 아직 어릴 적에
始來京師
처음으로 경사京師에 오셨는데
挾其二季하니
두 아우와 함께 급제하니
名發聲馳
명성이 널리 알려졌네
乃賜之策하야
이에 조정에서 책문策問을 내려
以承帝問하니
공이 황제의 물음을 받드니
語驚于廷
말이 조정을 놀라게 함에
有偉其論이라
그 논변이 훌륭하였네
乃登侍從하고
이에 시종신侍從臣의 자리에 오르고
乃任大臣하니
이에 대신大臣의 직임을 맡으니
出入險夷
내외직 거치고 험난하고 평탄한 길 거침에
周旋屈伸이라
좌천되기도 하고 뜻을 펴기도 하였네
公所策事
공이 일에 대해 계책을 세운 것은
先其利害하니
이해利害를 먼저 알았으니
初有不從이나
처음에는 조정에서 따르지 않았으나
後無不悔
나중에는 모두들 후회하였네
公於臨政
공이 정사에 임해서는
簡以便人하니
간편함으로 사람들을 편하게 하니
人去而思
공이 떠나도 공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마음
愈久彌新이라
오래될수록 더욱 새로웠네
帝曰廷臣
황제께서 말씀하시길 조정의 신하여
汝剛而直하니
그대는 강직하니
來汝予用하야
그대를 불러 내가 써서
斷余不惑하리라
내 결단하여 흔들리지 않으리라 하시니
公曰臣愚
공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신은
부신負薪의 근심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네
帝爲咨嗟하니
황제께서 탄식하시니
公其少休
공이 이에 관직을 쉬었네
優以本邦하야
고향을 맡겨 넉넉하게 하여
寵其秩祿하니
총애하여 관작과 봉록을 내려주니
尙冀公來어늘
공이 다시 오기를 오히려 기대하였건만
公卒不復이라
공은 끝내 다시 오지 않았네
史臣考德하야
사신史臣이 공의 덕을 고찰하여
作銘幽宅하노라
유택幽宅에 묘지명을 짓노라
역주
역주1 : 이 글은 嘉祐 4년(1059) 저자의 나이 53세 때에 지은 것이다. 正肅 吳公은 吳育(1004~1058)이다. 오육은 字가 春卿이며, 正肅은 시호이다. 오육이 嘉祐 3년에 졸하였을 때, 구양수는 〈祭吳尙書文〉을 지어 애도하기도 하였다.
역주2 鄭州新鄭縣 : 지금 河南省에 속해 있다.
역주3 建安 : 治所가 지금의 福建省 建甌에 있었다.
역주4 建州之浦城 : 지금의 福建省 浦城으로 옛날에는 建州에 속해 있었다.
역주5 臨安諸曁 : 두 곳 모두 지금 浙江省에 속해 있다.
역주6 才識兼茂明於體用策 : 宋代 과거고시의 한 과목이다.
역주7 秦悼王 : 宋 太祖의 아우이다. 원래 이름은 光美였는데 太平興國(976~984) 초년에 延美로 개명하였다. 字는 文化이다. 太宗 때에 太原을 정벌한 공로로 秦王에 봉해졌고 죽은 뒤 涪王으로 追封되었다. 悼는 그의 시호이다. 咸平 2년(999)에 汝州 梁縣의 新豐鄕에 改葬하였다.
역주8 汝州 : 治所가 梁縣에 있었으니, 지금의 河南省 臨汝이다.
역주9 嶺外 : 중국 남방의 五嶺 이남의 遠地이니, 유배지를 가리킨다.
역주10 賈丞相 : 賈昌朝(997~1065)이다. 字는 子明, 시호는 文元이다. 天章閣侍講, 知制誥, 權御史中丞 兼判國子監 등을 역임하고 慶曆 3년(1043)에 參知政事, 다음 해에 樞密使가 되었다. 경력 5년(1045)에 同平章事 兼樞密使가 되었다. 경력 7년(1047)에 재상에서 물러나 大名府를 맡았으며, 英宗이 즉위하자 鳳翔節度使로 옮겼고, 魏國公에 봉해졌다. 변설에 뛰어났고 음운학에 밝았다. 저서에 《群經音辨》, 《本朝時令》, 《通紀》 등이 있다.
역주11 用洪範 : 《書經》 〈洪範〉의 “〈임금이〉 엄숙함〈을 실천하면〉 제때에 비가 내린다.[曰肅時雨若]”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역주12 伍保 : 민가 5집을 1保의 단위로 묶어 상부상조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역주13 確山 : 蔡州의 確山縣 남쪽 6리 지점에 있는 산 이름이다. 浮石山이라고도 한다.
역주14 弓手 : 巡邏 등의 역할을 맡았던 宋代 吏役의 하나이다. 弓箭手라고도 한다.
역주15 永興軍 : 治所가 지금의 陝西省 西安에 있었다.
역주16 起復 : 부모의 喪中에 있는 관리를 脫喪 전에 관직에 나오도록 기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역주17 通進銀臺司 : 通進銀臺司는 章疏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역주18 宣徽南院使 : 唐代에 처음 설치한 관직으로 宮內의 諸司와 三班內侍의 명부 및 郊祀, 朝會, 宴饗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일은 간략한 데 비해 관직은 높았으므로 宋代에는 항상 樞密院의 관원이 겸직하였다.
역주19 鄜延路經略安撫使 : 鄜延路는 康定 2년(1041)에 陝西路를 나누어 설치한 곳이다. 治所가 지금의 延安市인 延州에 있었다.
역주20 龐丞相 : 龐籍이다. 字는 醇之이다. 皇祐 3년(1051)에 재상이 되었으며 후에 潁國公에 봉해졌다.
역주21 麟州 : 治所가 지금의 陝西省 綬德인 吳兒堡의 西北쪽에 있었다.
역주22 白草 : 延安府 延川縣 아래 있던 6개의 성채 중 하나이다.
역주23 二府 : 군무를 관장한 樞密院과 정무를 관장한 中書省을 가리킨다.
역주24 太保公 : 吳育의 부친으로 贈太保인 吳待問을 가리킨다.
역주25 奉朝請 : 고대에 제후가 봄에 천자를 朝見하는 것을 朝, 가을에 조현하는 것을 請이라 하였다. 致仕한 관원이 천자를 조현하는 명분으로 조회에 참석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26 厚壤深泉 : 黃泉 즉 墓穴을 가리키는 泉壤을 분리하여 쓴 말이다.
역주27 負薪之憂 : 질병을 앓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禮記》 〈曲禮〉에 “임금이 선비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할 적에, 만약 능하지 못하면 병을 칭하여 사양하면서 ‘저는 섶나무를 짊어진 근심이 있습니다.[某有負薪之憂].’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는 땔나무를 졌던 피곤함이 있어서 활을 쏠 힘이 없다는 뜻으로 자신의 병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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