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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7)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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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劉旻傳多風神
劉旻 母弟也 初名이니 爲人美鬚髯이요 少無賴하야 嗜酒好博이라가 嘗黥爲卒이라 高祖事晉하야 爲河東節度使 以旻爲都指揮使러니
高祖卽帝位하야 以爲尹 北京留守 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累加中書令이라
隱帝少하야 政在大臣이러니 爲樞密使하야 이어늘
而與旻素有隙일새 旻頗不自安하야 謂判官鄭珙曰 主上幼弱하야 政在權臣이어늘 而吾與郭公不叶하니 時事如何오하니
珙曰 漢政將亂矣 晉陽兵雄天下하고 而地形險固 十州征賦足以自給이니 公爲宗室老하야 不以此時爲計 後必爲人所制라한대
旻曰 子言乃吾意也라하고 乃罷上供征賦하고 收豪傑하고 籍丁民以益兵하다 三年 周太祖起魏하야 隱帝遇弑하니 旻乃謀擧兵이라
後周 太祖後周 太祖
周太祖之自魏入也 反狀已白이로되 而漢大臣不卽推尊之 故未敢卽立하고 乃白漢太后하야 立旻子贇爲漢嗣하고 遣宰相迎贇于徐州
當是時하야 人皆知太祖之非實意也로되 旻獨喜曰 吾兒爲帝矣 何患고하고 乃罷兵하고 遣人至京師
周太祖少賤하야 黥其頸上爲飛雀하니 世謂之郭雀兒 太祖見旻使者하고 具道所以立贇之意하고 因自指其頸以示使者曰 自古豈有雕靑天子리오 幸公無以我爲疑라하니 旻喜하야 益信以爲然이라
太原少尹李驤曰 郭公擧兵犯順하니 其勢不能爲漢臣이라 必不爲劉氏立後라하고 因勸旻以兵下하야하야 以俟變이면 庶幾贇得立이니 贇立而罷兵可也라하야늘
旻大罵曰 驤 腐儒 欲離間我父子라하고 命左右牽出斬之하니 驤臨刑歎曰 吾爲愚人畫計하니 死誠宜矣 然吾妻病하야 不可獨存이니 願與之俱死라하니 旻聞之하고 卽幷戮其妻于市하고 以其事白漢하야 以明無他
已而 周太祖果代漢하고 降封贇湘陰公하니 旻遣牙將李䛒奉書周太祖하야 求贇歸太原이어늘 而贇已死 旻卽慟哭하고 爲李驤立祠하야 歲時祠之
乃以周元年正月戊寅 卽皇帝位於太原하야 以子承鈞爲太原尹하고 判官鄭珙趙華爲宰相하고 都押衙陳光裕爲宣徽使하고李䛒間行使于契丹하다
契丹永康王 與旻約爲父子之國이라 旻乃遣宰相鄭珙致書兀欲하야 稱姪皇帝하야 以叔父事之
兀欲遣燕王政事令하야 以冊尊旻爲大漢神武皇帝하고 幷冊旻妻爲皇后하다 兀欲性豪雋하야 漢使者至 輒以酒肉困之 珙素有疾이러니 兀欲彊之飮하야 一夕而以醉卒이라
然兀欲聞旻自立하고 頗幸中國多故 乃遣其貴臣述軋高勳하야 이라
已而 兀欲爲述軋所弑하야 代立이라 旻遣樞密直學士王得中聘于述律하야 求兵以攻周하니 述律遣蕭禹厥率兵五萬助旻이라
是歲 大寒이라 旻軍凍餒하야 亡失過半이라 明年 又攻라가 爲折德扆所敗 德扆因取하다
周太祖崩한대 旻聞之喜하야 遣使乞兵于契丹하니 契丹遣楊衮將鐵馬萬騎及奚諸部兵五六萬人號稱十萬하야 以助旻이라
旻以張元徽爲先鋒하고 自將騎兵三萬攻潞州하니 이어늘 元徽擊敗之하고 遂圍潞州
是時 世宗新卽位하야 以謂旻幸周有而天子新立하여 必不能出兵하리니 宜自將以擊其不意라하다 自宰相馮道等으로 多言不可어늘 世宗意甚銳
할새 李重進白重贊將左하고 樊愛能何徽將右하며 向訓史彦超居中軍하고 張永德以禁兵衛蹕이라 旻亦列爲三陣하야 張元徽居東偏하고 楊衮居西偏하고 旻居其中이라
衮望周師하고 謂旻曰 勍敵也 未可輕動이라하야늘 旻奮髥曰 時不可失이니 無妄言也하라하니 衮怒而去
旻號令東偏先進한대 王得中叩馬諫曰 南風甚急하니 非北軍之利也 宜少待之라하야늘 旻怒曰 老 毋妄沮吾軍이라하고 卽麾元徽하니 元徽擊周右軍이라
兵始交 愛能徽退走하야 其騎軍亂하고 步卒數千棄甲叛降元徽하니 呼萬歲聲振川谷이라 世宗大駭하야 躬督戰士하니 士皆奮命爭先而風勢愈盛이라 旻自麾赤幟收軍하되 軍不可遏이라 旻遂敗 日暮 旻收餘兵萬人하야 阻澗而止하다
是時 周之後軍 劉詞將之하야 在後未至어늘 而世宗銳於速戰하야 戰已勝 詞軍繼至 因乘勝追擊之하니 旻又大敗하야 乘輿服御物 皆爲周師所獲이라
旻獨乘契丹黃騮하고間道馳去라가 夜失道山谷間이러니 得村民爲鄕導하야 誤趨이라가 得他道以歸로되 而張元徽戰歿于陣이라
楊衮怒旻하야 按兵西偏不戰이라 故獨全軍而返이라 旻歸하야 爲黃騮治廏하고 飾以金銀하고 食以하고 號自在將軍이라
世宗休軍潞州하야 大宴將士할새 斬敗將樊愛能何徽等七十餘人하니 軍威大振이라 進攻太原할새 遣符彦卿史彦超北控하야 以斷契丹援路
太原城 方四十里어늘 周師去城三百步 圍之匝하야 自四月至於六月 攻之不克하고 而彦卿等爲契丹所敗하고 彦超戰歿이라 世宗遽班師하다
周師之圍城也 旻遣王得中送楊衮以歸하고 因乞援兵于契丹하니 契丹發數萬騎助旻하야 遣得中先還이라 至代州 將桑珪殺防禦使鄭處謙하고 以城降周하고 幷送得中於周
世宗召問得中虜助兵多少한대 得中言送衮歸 無所求也라하니 世宗信之 已而 契丹敗符彦卿于忻口 得中遂見殺하다 하니 年六十이라 子承鈞立하다
或問十國 固非中國有也 然猶命以封爵而稱中國年號來朝貢者 亦有之矣어늘 本紀之不書 何也 曰 封爵之不書 所以見其非中國有也 其朝貢之來如하야 以夷狄書之則甚矣
問者曰 四夷十國 皆非中國有也어늘 四夷之封爵朝貢則書하고 而十國之不書 何也 曰 以中國而視夷狄인댄 夷狄之可也어니와 以五代之君而視十國인댄 夷狄之則未可也
故十國之封爵朝貢 不如夷狄인댄 則無以書之 書如夷狄인댄 則五代之君 未可以夷狄之也 是以 外而不書하여 見其自絶於中國焉爾
問者曰 外而不書 則東漢之立 何以書 曰 吾於東漢 常異其辭於九國也 春秋因亂世而立治法하고 本紀以治法而正亂君이라 世亂則疑難之事多하니 正疑處難 敢不愼也 周漢之事 可謂難矣哉인저
或謂劉旻嘗致書于周하야 求其子贇不得而後自立이라 然則旻之志 不以亡漢爲讎 而以失子爲讎也
曰 漢嘗詔立贇爲嗣 則贇爲漢之國君이요 不獨爲旻子也 旻之大義 宜不爲周屈이라 其立雖未必是 而義當不屈于周 此其可以異乎九國矣
하니 則旻之志 豈不可哀也哉리오


유민劉旻세가世家
유민전劉旻傳〉은 풍격과 운치가 많다.
유민劉旻 고조高祖의 동복아우이다. 초명初名이니 사람이 수염鬚髯이 아름답고 눈이 중동重瞳이었다. 어려서 무뢰배로 지내면서 술과 도박을 좋아하다가 묵형墨刑을 당하여 병졸兵卒이 되었다. 고조가 나라를 섬겨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가 되었을 때 유민을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삼았다.
고조가 제위帝位에 오르고서 그를 태원윤太原尹 북경유수北京留守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았다. 은제隱帝 때에 누차 승진하여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은제隱帝가 어려서 국정國政대신大臣들의 손에 있었는데 태조太祖추밀사樞密使가 되어 삼진三鎭의 반란을 막 토벌하여 대공大功을 세웠다.
그런데 유민劉旻과 평소 사이가 나빴기에 유민이 몹시 마음이 불안하여 판관判官 정공鄭珙에게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유약幼弱하여 국정이 권신權臣의 손에 있는데 나와 곽공郭公이 화합하지 못하니 이 시국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하니
정공이 말하기를, “나라의 정사政事는 장차 혼란해질 것입니다. 진양晉陽의 군대가 천하天下에 위력을 떨치고 지형地形험고險固한 데다 10에서 걷는 부세賦稅자급自給하기에 충분합니다. 종실宗室원로元老가 되어 이때에 계책을 세우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남에게 제압을 당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민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바로 나의 뜻이다.”라고 하고서 부세를 조정에 올리는 일을 정지하고서 천하의 호걸豪傑을 모으고 장정壯丁군적軍籍에 등재하여 군대를 보강하였다. 건우乾祐 3년(950)에 주 태조가 위주魏州에서 반란을 일으켜 은제가 시해를 당하니 유민이 그제야 거병擧兵할 것을 도모하였다.
태조太祖위주魏州에서 경사京師로 들어갈 때 반란反亂정상情狀이 이미 명백하였는데도 나라 대신大臣들이 곧장 그를 추존推尊하지 않았다. 그래서 감히 즉위하지 못하고 이에 한나라 태후太后에게 아뢰어 유민劉旻의 아들 유빈劉贇을 세워 나라의 후사後嗣로 삼고 재상宰相 풍도馮道를 보내 서주徐州에서 유빈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때에 사람들이 모두 이 일이 태조의 본뜻이 아님을 알고 있었는데도 유민만 홀로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내 아들이 황제가 되니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하고서 이에 출병出兵을 그만두고 사람을 보내 경사京師에 이르렀다.
태조太祖가 젊은 시절 미천微賤하여 묵형墨刑을 당해 목 위에 비작飛雀을 새기니 세상 사람들이 곽작아郭雀兒라고 불렀다. 태조太祖유민劉旻사자使者를 보고 유빈劉贇을 세우려는 뜻을 자세히 말해주고 인하여 자기 목을 직접 가리켜 사자에게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어찌 문신文身을 한 천자天子가 있었는가. 부디 공은 나를 의심하지 말기 바라오.”라고 하니 유민이 기뻐서 더욱 믿어 그 말을 사실로 여겼다.
태원太原소윤少尹 이양李驤이 말하기를, “곽공郭公이 군대를 일으켜 임금을 범하였으니 그 형세가 나라의 신하가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유씨劉氏를 위해 후사後嗣를 세워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이어 군대를 거느리고 태항산太行山을 내려가 맹진孟津을 장악하여 변란變亂에 대비하면 거의 유빈이 즉위할 수 있을 것이니 유빈이 즉위하고 나서 출병을 그만두면 된다고 유민에게 권하였다.
그런데 유민이 그를 크게 나무라기를, “그대는 부유腐儒이다. 우리 부자지간을 이간하려 하는구나.”라고 하고 좌우左右의 수하들에게 그를 끌어내 참수斬首하라고 명하니 이양이 형벌에 임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 일을 계획하였으니 죽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다. 그렇지만 내 아내가 병들어 혼자 살아갈 수 없으니 아내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라고 하니 유민이 이 말을 듣고 즉시 저자에서 그의 아내까지 아울러 죽이고 그 일을 한나라 조정에 보고하여 〈주 태조에게 자신은〉 다른 뜻이 없음을 밝혔다.
이윽고 주 태조가 과연 한나라를 대신하고 유빈을 상음공湘陰公강봉降封하니 유민이 아장牙將 이변李䛒에게 서신을 받들어 주 태조에게 보내 유빈을 태원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였으나 유빈은 이미 죽었으므로 유민이 곧바로 통곡慟哭하고 이양을 위해 사당을 세워 세시歲時마다 제사 지냈다.
이에 광순廣順 원년元年(951) 정월正月 무인일戊寅日태원太原에서 황제皇帝에 즉위하여 아들 유승균劉承鈞태원윤太原尹으로 삼고 판관判官 정공鄭珙, 조화趙華재상宰相으로 삼고 도압아都押衙 진광유陳光裕선휘사宣徽使로 삼고 통사사인通事舍人 이변李䛒을 보내 몰래 사잇길로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거란의 영강왕永康王 올욕兀欲유민劉旻부자지간父子之間의 나라가 되기로 맹약하니 유민이 이에 재상 정공을 보내 올욕에게 서신을 보내 질황제姪皇帝라고 자칭하면서 숙부叔父로서 그를 섬겼다.
이윽고 올욕이 연왕燕王 술알述軋, 정사령政事令 고훈高勳을 보내 책서冊書로 유민을 추존推尊하여 대한신무황제大漢神武皇帝로 삼고 유민의 처를 아울러 책봉冊封하여 황후皇后로 삼았다. 올욕은 성품이 호방豪放하여 나라 사신이 이르면 번번이 술과 고기를 많이 먹여 힘들게 하였다. 정공은 평소 질병이 있었는데 올욕兀欲이 억지로 그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하룻밤 사이에 술에 취하여 하였다.
그러나 올욕은 유민이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못 중국中國변고變故가 많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이에 자기의 귀신貴臣 술알, 고훈을 보내 자신이 아끼던 황류마黃騮馬, 구룡십이도옥대九龍十二稻玉帶를 가지고 답방答訪하게 하였다.
이윽고 올욕兀欲술알述軋에게 시해를 당하여 술률述律이 이어 즉위하였다. 유민劉旻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왕득중王得中을 보내 술률에게 빙문聘問하게 하여 파병派兵하여 나라를 공격할 것을 청하니 술률이 소우궐蕭禹厥을 보내 군대 5만 명을 거느리고 유민을 도왔다.
유민이 음지陰地에서 출병하여 진주晉州를 공격하였다가 왕준王峻에게 패배하였다. 이해에 추위가 심하여 유민의 군사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서 병력 손실이 절반을 넘었다. 이듬해 다시 부주府州를 공격하다가 절덕의折德扆에게 패배하니 절덕의가 이를 인하여 가람군岢嵐軍을 취하였다.
태조太祖붕어崩御하자 유민劉旻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거란契丹에 파병을 요청하니 거란이 양곤楊衮을 보내 철마鐵馬 1만 제부諸部 군대 5~6만 명을 거느리고 10만이라 호칭하고서 유민을 도왔다.
유민이 장원휘張元徽선봉군先鋒軍으로 삼고 직접 기병騎兵 3만을 거느리고서 노주潞州를 공격하니 노주의 이균李筠목령균穆令鈞을 보내 보병步兵기병騎兵 3천을 거느리고 태평역太平驛에서 장원휘를 막게 하였는데 장원휘가 쳐서 패배시키고 마침내 노주를 포위하였다.
이때에 세종世宗이 막 즉위卽位하여, 유민劉旻나라에 대상大喪이 있고 천자天子가 막 즉위하여 절대로 출병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기회로 여기고 있을 것이니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예측하지 못한 틈을 노려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재상宰相 풍도馮道 등 이하로 대다수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는데 세종世宗이 뜻이 매우 확고하였다.
후주後周 세종世宗후주後周 세종世宗
현덕顯德 원년元年(954) 3월에 친정親征하여 갑오일甲午日고평高平에서 전투할 때 이중진李重進, 백중찬白重贊좌군左軍을 거느리고 번애능樊愛能, 하휘何徽우군右軍을 거느리며 향훈向訓, 사언초史彦超중군中軍에 자리하고 장영덕張永德금병禁兵을 거느리고 황제를 호위하였다. 유민 역시 세 개의 군진軍陣을 펼쳐서 장원휘張元徽가 동쪽에 자리하고 양곤楊衮이 서쪽에 자리하고 유민이 그 가운데에 자리하였다.
양곤이 주나라 군대를 바라보고 유민에게 “강적强敵이니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유민이 수염을 손으로 떨치면서 말하기를, “적기適期를 놓쳐서는 안 되니 맘대로 지껄이지 말라.”라고 하니 양곤이 노하여 떠났다.
유민이 동군東軍에 먼저 전진하라고 호령號令하자 왕득중王得中이 말고삐를 잡고 간하기를, “남풍南風이 매우 세차니 북군北軍에게 유리하지 않습니다. 조금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유민이 노하여 말하기를, “늙은 조대措大는 함부로 우리 군대를 저지하지 말라.”라고 하고 곧장 장원휘를 지휘하니 장원휘가 주나라의 우군右軍을 쳤다.
양군兩軍이 처음 접전接戰하자 번애능과 하휘가 물러나 달아나서 그들의 기병騎兵들이 혼란해지고 보졸步卒 수천 명이 갑옷을 버리고 배반하여 장원휘에게 투항하니 만세萬歲를 외치는 소리가 천곡川谷을 진동하였다. 세종이 크게 놀라 몸소 전사戰士들을 독려督勵하니 사졸士卒들이 모두 목숨을 바쳐 앞을 다투었고 남풍의 기세가 더욱 거세어졌다. 유민이 직접 붉은 기를 휘두르며 군대를 수습하였으나 궤멸하는 군대를 막지 못하여 유민이 마침내 패배하였다. 저녁 무렵에 유민이 남은 병졸 1만 명을 수습하여 계곡에 의지하여 멈춰 쉬었다.
이때에 나라의 후군後軍유사劉詞가 거느리고서 후방에서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세종世宗속전速戰하는 데 급급하여 전투를 이기고 나서 유사의 군대가 이어 이르렀다. 이를 인하여 승세를 타고 추격追擊하니 유민劉旻이 또 크게 패하여 치중輜重, 기갑器甲승여乘輿, 복어服御 등의 물품이 모두 나라 군대에 노획되었다.
유민이 혼자 거란契丹황류마黃騮馬를 타고 조과령雕窠嶺의 샛길로 내달려 가다가 밤에 산곡山谷 사이에서 길을 잃었는데 촌민村民을 길잡이로 삼아 평양平陽으로 잘못 내달렸다가 다른 길을 찾아 돌아왔으나 장원휘張元徽군진軍陣에서 전몰戰歿하였다.
양곤楊衮은 유민에게 노하여 서쪽에서 군대를 머무르게 한 채 싸우지 않았으므로 혼자 군대를 온전히 지켜 돌아왔다. 유민이 돌아와서 황류마를 위해 마구간을 수리하고 금은金銀으로 장식하고 삼품三品마료馬料를 먹이고 자재장군自在將軍이라고 불렀다.
세종世宗노주潞州에서 군대를 휴식시키면서 장사將士들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 때 패장敗將 번애능樊愛能, 하휘何徽 등 70여 인을 참수斬首하니 군대의 위엄威嚴이 크게 떨쳤다. 진군하여 태원太原을 공격할 때 부언경符彦卿, 사언초史彦超를 보내 북쪽으로 흔구忻口를 장악하여 거란契丹원병援兵이 오는 길을 차단하였다.
태원성太原城은 둘레가 40인데 나라 군대가 에서 300 거리를 두고 포위하여 4월에서 6월까지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부언경 등이 거란에게 패배하고 사언초가 전몰戰歿하니 세종世宗이 급거 회군하였다.
당초 나라 군대가 성을 포위했을 때 유민劉旻왕득중王得中을 보내 양곤楊衮을 호송하여 돌아오게 하고 인하여 거란契丹원병援兵을 청하니 거란이 기병 수만 명을 출동하여 유민을 도우면서 왕득중을 보내 먼저 돌아오도록 하였다. 왕득중이 대주代州에 이르렀을 때 대주 장수 상규桑珪방어사防禦使 정처겸鄭處謙을 죽이고 성을 가지고 주나라에 투항하면서 왕득중까지 주나라에 호송하였다.
세종世宗이 왕득중을 불러 그에게 거란 원병의 수효를 묻자 왕득중이 양곤을 호송하여 돌아가는 길이었고 거란에게 요구한 것이 없다고 하니 세종이 이 말을 믿었다. 그런데 이윽고 거란이 흔구忻口에서 부언경符彦卿을 패배시키니 왕득중이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유민이 고평高平에서 패하고 얼마 있다 포위를 당한 뒤로 근심으로 병을 얻어 이듬해 11월에 하니 향년 60세였다. 아들 유승균劉承鈞이 즉위하였다.
어떤 이가 묻기를, “십국十國은 본래 중국中國의 소유가 아니다. 그런데도 명하여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중국의 연호年號를 쓰면서 와서 조공朝貢하는 자도 있는데 본기本紀에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봉작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중국의 소유가 아님을 보이기 위한 것이니 그들이 이적夷狄처럼 와서 조공하였다고 이적으로서 기록하면 지나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묻는 자가 말하기를, “이적과 십국이 모두 중국의 소유가 아닌데 이적의 봉작과 조공은 기록하고 십국은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중국의 입장에서 이적을 본다면 이적이라 할 수는 있지만 오대五代의 군주의 입장에서 십국을 본다면 이적이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십국의 봉작과 조공이 이적만 못하다면 기록할 것이 없고, 이적처럼 기록할진댄 오대의 군주가 그들을 이적으로 여길 수 없다. 이 때문에 제외하여 기록하지 않아서 그들이 중국과 스스로 관계를 끊었음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묻는 자가 말하기를, “제외하여 기록하지 않았다면 동한東漢(북한北漢)의 건국은 어찌하여 기록한 것인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동한에 대해서는 늘 구국九國에 대해 쓰던 말과 다르게 썼다. ≪춘추春秋≫는 난세亂世에 근거하여 치법治法을 세웠고 본기本紀치법治法을 가지고 난군亂君을 바로잡았다. 세상이 혼란하면 의난疑難할 일이 많으니 의난疑難을 바로잡고 처리함에 감히 신중하지 않겠는가. 후주後周후한後漢의 일은 서술하기 어렵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유민劉旻이 일찍이 후주에 서신을 보내 그 아들 유빈劉贇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가 그렇게 할 수 없게 된 뒤에 스스로 즉위하였다. 그렇다면 유민의 뜻은 후한을 멸망시킨 것을 원수로 여긴 것이 아니고 아들을 잃은 것을 원수로 여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후한이 일찍이 유빈을 세워 후사後嗣로 삼도록 조명詔命을 내렸으면 유빈은 후한의 국군國君이지 유민의 아들만은 아니다. 유민의 대의大義로는 의당 후주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그 즉위가 비록 꼭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의리상 마땅히 후주에 굴복하지 않아야 하니 이것이 동한이 구국九國과 다를 수 있는 점이다. 유민이 생을 마치도록 건우乾祐를 연호로 쓰다가 유승균劉承鈞이 즉위한 뒤에 개원改元하였으니 유민의 뜻이 어찌 서글프게 여길 만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劉旻世家 : 劉旻(895~954)은 太原 沙陀部 사람으로, 다른 이름은 劉崇이다. 劉旻의 事跡은 ≪舊五代史≫에는 卷135 〈僭僞列傳 第2〉에 수록되어 있고, ≪新五代史≫에는 卷70 〈東漢世家 第10〉에 수록되어 있다.
유민은 後漢 高祖 劉知遠의 동생으로, 후한이 後周에 멸망한 뒤 10國 중의 하나인 北漢을 세웠다. 유민은 젊은 시절 도박을 좋아하는 무뢰배였는데 뒤에 군대에 들어갔다가 유지원을 배경으로 삼아 河東馬步軍都指揮使가 되었고 유지원이 후한을 세운 뒤에는 河東節度使가 되었다. 郭威가 후한을 멸망시키자 그는 하동절도사로 점거하고 있던 太原에서 북한을 세워 稱帝하고서 후한의 乾祐 年號를 襲用하였으나 겨우 12州를 지배하는 데 그쳤다. 유민은 후한을 회복하겠다는 생각으로 遼나라에 원군을 청하기 위해 요나라 황제를 숙부로 높이고 자신은 侄皇帝로 낮추었다. 그는 요나라의 원조를 받아 후주와 적지 않은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건우 7년(954) 곽위가 세상을 떠나자 유민은 요나라와 연합하여 후주를 다시 쳤으나 高平의 전투에서 柴榮에게 패배하여 천신만고 끝에 태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시영이 계속하여 여러 달 성을 포위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북한은 국력이 소모되어 다시는 남침하지 못하였다. 이에 유민은 근심과 분노에 휩싸여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유민 사후 그의 아들 劉承鈞이 계승하였는데 요나라 황제를 父皇帝로 받들었다. 하지만 天會 12년(968)에 北宋 군대가 국경을 압박하여 國勢가 날로 위축되는 것을 근심하다 역시 세상을 떠났다. 이어 그의 아들 劉繼恩이 즉위하였으나 侯霸榮에게 시해당하였다. 이후 劉承均의 養子였던 劉繼元이 계승하였는데 결국 북송 太平興國 4년(979)에 太宗 趙光義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북한을 쳐서 요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태원을 猛攻하여 결국 나라를 세운 지 28년 만에 멸망당하였다.
북한은 10國 가운데 최후로 북송에 멸망하였는데 代州, 忻州, 憲州, 嵐州, 石州 등 지금의 山西省 중부와 북부의 12州를 영토로 하였다. 북한은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해서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여 宰相의 月俸은 後梁 때의 200緡에서 줄어들어 100緡에 불과하였고 節度使는 겨우 30緡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다수 관리들이 國庫를 탐내고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빼앗는 일을 일삼았다. 그리고 북한이 다스릴 때 전쟁을 자주 일으켜서 남자들이 兵役에 시달렸고 賦稅를 지나치게 걷어 요나라에 조공으로 바쳤으므로 전쟁과 세금을 피해 도망하는 백성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盛唐 때 279,100여 戶였던 河東 12州의 인구는 북한이 멸망할 때는 겨우 35,200여 戶로, 盛唐 때의 8분의 1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한편 ≪구오대사≫에 유민에 대한 史評이 실려 있는데 참고로 들면 다음과 같다.
“史臣은 말한다. ‘……劉崇(劉旻의 본명)은 나라가 멸망한 뒤의 餘力을 모아 帝王의 칭호를 도적질하였으니 참으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首惡은 비록 죽었지만 남은 후예가 아직 살아 있는데 形勢가 위축되고 民力은 쇠잔해졌으니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史臣曰……劉崇以亡國之餘 竊僞王之號 多見其不知量也 今元惡雖斃 遺孼尙存 勢蹙民殘 不亡何待]”
역주2 漢高祖 : 後晉을 멸망시키고 後漢을 세운 劉知遠(895~948)으로, 河東 太原 사람이다. 沙陀族 출신인데 稱帝한 뒤에 劉暠로 改名하였다. 後唐의 明宗과 後晉의 高祖를 섬겼을 때 戰功이 많았다. 그의 통치 기간에는 각지의 할거 세력들을 제압하기 어려웠고 탐욕스런 부하들이 많아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주3 目重瞳子 : 重瞳이라 약칭하기도 하는데 하나의 눈에 눈동자가 두 개씩 있는 것을 말한다. 舜 임금과 項羽가 重瞳이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帝王을 상징한다.
역주4 太原 : 중국 山西省의 省都로 太原은 매우 큰 평야라는 뜻이다. 春秋時代에는 晉陽이라 하였고, 戰國時代에는 趙나라의 수도였다. 秦나라 때에는 太原郡에 속했으며 唐나라 이후 太原府에 속했다. 五代에는 晉王 李克用 때부터 後唐의 근거지였다.
역주5 隱帝 : 劉承祐(930~951)로, 고조 유지원과 李皇後의 둘째 아들이다. 乾祐 元年(948)에 유지원을 이어 즉위하였는데 專權을 휘두르는 권신을 誅殺하다가 郭威의 반란을 초래하였다. 건우 3년(950) 곽위의 叛軍이 開封을 공격할 때 피살당하여 후한이 멸망하였다.
역주6 周 太祖 : 五代 때 後周를 세운 郭威(904~954)로, 邢州 堯山 사람이다. 字는 文仲이다. 본래 常氏였는데 어릴 때 모친을 따라 郭氏로 고쳤다고 한다. 처음에 李繼韜의 휘하에 들어가서 後唐과 後晉, 後漢에서 벼슬하였다. 後漢 乾祐 3년(950)에 隱帝가 사람을 보내 자기를 해치려는 것을 알고 병사를 일으켜 開封을 쳤다. 은제가 살해된 뒤 劉贇을 세워 황제로 삼으려다가 澶州에 이르러 兵變을 일으키고 돌아와서 제위에 올라 국명을 周라고 하였다.
역주7 新討三叛 立大功 : 河中節度使 李守貞, 永興節度使 趙思綰, 鳳翔節度使 王景崇이 잇따라 일으킨 반란을 처음에 조정에서 누차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마지막에 郭威가 출병하여 李守貞을 시작으로 차례로 이들을 제압하여 위기에 처했던 後漢을 다시 반석에 올려놓은 일을 가리킨다.
역주8 馮道 : 字는 可道이다. 20여 년 동안 後唐ㆍ後晉ㆍ契丹ㆍ後漢ㆍ後周 등 五朝의 재상으로 여섯 명의 황제를 섬긴 인물이다. 풍도는 長樂老라고 自號하고서 스스로 매우 영화롭게 여겼는데, 歐陽脩는 ≪新五代史≫를 편찬하면서 풍도의 傳記를 雜傳에 넣고 염치없는 자라고 혹평하였다.
역주9 太行 : 高原 지대인 山西省의 동쪽과 平原 지대인 河北省의 서쪽에 남북으로 띠처럼 길게 경계를 이루는 산맥으로, 河內에서 시작해 동북으로 幽州에 이른다. 남쪽으로는 河南省의 북쪽 경계를 이루며, 백 개의 산봉우리가 있고 13개 주 경계에 걸쳐 있다.
역주10 孟津 : 옛날 黃河에 있었던 나루터 이름이다. 지금의 河南省 孟津縣 동북 孟縣 서남쪽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周 武王이 여기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황하를 건넜기 때문에 盟津이라 불렀는데 訛傳되어 孟津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략상 요충지로 역대로 치열한 戰場이 되곤 하였다.
역주11 廣順 : 後周 太祖 郭威의 開國 연호(951~954)이다.
역주12 通事舍人 : 황제를 朝見할 때 신하를 인도하고 詔命을 출납하는 업무를 관장하였다. 본래 ≪周禮≫ 〈地官․舍人〉에서 宮中의 내부 사무를 관장하였던 舍人에서 비롯한 관직으로 후세에는 황제 가까이에서 侍衛하는 관직으로 발전하였던 바, 秦漢 때 太子舍人은 太子의 屬官이었고 魏晉 이후에는 中書通事舍人을 두어 詔命을 전달하는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으며, 隋唐 때에는 황제의 말을 기록, 정리하는 史官의 역할을 하였던 起居舍人과 아울러 通事舍人을 두었다.
역주13 兀欲 : 遼 世宗 耶律阮(917~951)으로, 兀欲은 初名이다. 遼 太祖 耶律阿保機의 長孫이고 遼 太宗 耶律德光의 조카로 遼나라의 3대 황제이다. 耶律倍의 長子로 모친은 柔貞皇后 蕭氏이다. 946년 後晉의 石重貴가 稱臣하지 않자 태종이 토벌군을 일으켜 이듬해 후진의 國都인 東京 開封府를 점령하여 후진을 멸망시키고 開封 宮中에서 大遼로 국호를 고치고 大同으로 改元하였는데, 이때 올욕도 토벌군에 참여하여 永康王에 봉해졌다. 같은 해 태종이 죽자 南征한 장수들의 추대로 鎭州에서 帝位에 올랐다. 上京에서 述律后(太祖의 妃)와 耶律李胡(太祖의 아들)의 군대를 물리쳤는데 大臣 耶律屋質의 권고로 이들과 화해하여 정식으로 즉위하고 天祿으로 改元하였다. 天祿 5년(951) 南征하였을 때 耶律察割에게 시해당하였다.
역주14 已而 : ≪新五代史≫와 사고전서본에는 ‘而已’로 되어 있다.
역주15 述軋 : 遼나라 초기의 장수 耶律牒䗶으로, 述軋은 그의 字이고 다른 字는 述蘭인데 ‘舒斡’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會同 元年(938)에 後晉에 사신가서 石敬瑭을 英武明義皇帝로 冊立하였다. 회동 6년(943)에 석경당의 아들 石重貴가 이어 즉위한 뒤 契丹에 손자라고 칭하고 신하라고 칭하지 않은 일로 태종을 따라 후진을 토벌하였다.
역주16 高勳 : 字는 鼎臣으로 후진 北平王 高信韜의 아들이다. 후진에서 벼슬하여 閣門使가 되었는데 會同 9년(946)에 杜重威와 함께 거란에 투항하였다. 요 태종이 開封을 침입하였을 때 四方館使에 제수하였는데 天祿 연간에는 樞密使가 되어 軍政을 관장하였다. 應曆 初年에 趙王에 봉해지고 외직으로 나가 上京留守가 되었다가 이윽고 南京으로 옮겼다. 景宗 때 南院樞密使가 되었는데 毒藥으로 駙馬都尉 蕭啜裏를 죽이려다 발각되어 銅州로 유배갔다. 얼마 뒤 尙書令 蕭思溫을 謀害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17 以自愛黃騮九龍十二稻玉帶報聘 : 九龍은 옛날 龍이 자식 아홉을 낳았다는 전설에서 비롯하여 裝飾으로 만들어 祥瑞로운 상징으로 삼은 것으로 여기서는 玉帶에 아홉 용으로 장식을 두른 것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周나라 때 어떤 殿閣의 문 위에 세 개의 銅柱를 세우고 각 銅柱마다 용 3마리를 휘감아 놓은 것을 九龍殿이라고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후로 九龍으로 장식한 九龍燭, 九龍帳, 九龍冠, 九龍輿의 명칭이 생겨났다. 稻는 어떤 물건의 폭을 나타나는 단위로, 腰帶의 폭을 가리킬 때 주로 쓴다.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鐵圍山叢談≫(蔡絛 撰)에서 紫雲樓金帶를 서술하면서 ‘게다가 지난날 腰帶들은 方銙(네모 갈고리)가 크지 않았는데 이 요대는 도리어 유독 크기가 12稻나 된다.’라고 하였고 ≪老學菴筆記≫(陸游 撰)에서 ‘王荊公이 준 玉帶는 폭이 14稻이니 玉抱肚라 부른다.’라고 하였고 ≪猗覺寮雜記≫(朱翌 撰)에서 ‘요대의 폭을 ‘道’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마땅히 ‘稻’字를 써야 한다. ≪五代史≫에 劉旻이 12稻의 玉帶를 漢 高祖에게 드렸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稻는 폭을 말한 것으로, 역시 당시 물건의 제도인 것이다. 의당 대략 해설하는 말을 지어 ‘淸泰는 廢帝의 年號이다.’라고 비교하여 말하는 것이 맞다. 朱新仲(朱翌)이 ‘劉旻이 漢 高祖에게 드렸다.’라고 한 것은 기억나는 대로 우연히 말한 것일 뿐이다.[按鐵圍山叢談 敍紫雲樓金帶曰 且往時諸帶 方銙不大 此帶乃獨大至十二稻 老學菴筆記 王荊公所賜玉帶 闊十四稻 號玉抱肚 猗覺寮雜記 帶闊狹以道言 當用稻字 五代史 劉旻以十二稻玉帶遣漢高祖 是稻以闊狹言 亦當時物制也 宜略作解語 較曰 淸泰廢帝年號也爲有當 朱新仲謂劉旻遣漢高祖 記憶偶談耳]”라고 하였다.
역주18 述律 : 耶律璟(931~969)으로, 述律은 初名이다. 後周에서는 信祖 郭璟의 諱를 피하여 耶律明이라고 불렀다. 遼 太宗 耶律德光의 長子로, 모친은 靖安皇後 蕭氏이다. 즉위하기 전에 壽安王에 봉해졌었다. 天祿 5년(951) 遼 世宗 耶律阮이 耶律察割 등에게 시해되었는데 이때 그는 토벌하러 나가 軍中에 있었던 바, 돌아와 야율찰할을 죽이고 帝位에 올랐으니 요나라의 4대 황제이다. 그는 중국 역사상 유명한 昏君이자 暴君으로, 재위 18년 동안은 요나라 정치의 암흑 시기였다. 應曆 19년(969)에 近侍에게 시해당하였다.
역주19 旻出陰地攻晉州 爲王峻所敗 : 陰地는 陰地關으로, 지금의 山西省 靈石縣 서남쪽에 있는 關이다. 晉州는 지금의 山西省 臨汾市에 있던 지명으로, 처음 北魏 建義 元年(528)에 唐州를 고쳐 명명한 것이다. 隋나라 때에는 臨汾郡, 平陽郡으로 고쳤다가 唐나라 武德 元年(618)에 다시 晉州가 되었다. ≪五代史纂誤≫ 卷下에는 “지금 살펴보건대, 〈王峻傳〉에는 劉旻이 周나라 군대가 대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포위를 풀고 떠나 王峻과 칼끝을 맞댄 적이 없었으니 어찌 왕준에게 패배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今按王峻傳 旻聞周兵大至 卽解去 未嘗與峻交鋒 安得云爲峻所敗也]”라고 하였다.
역주20 府州 : 後梁 乾化 元年(911)에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지금의 陝西省 府谷县에 있었다.
역주21 岢嵐軍 : 唐나라 長安 3년(703)에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지금의 山西省 岢嵐縣에 있었다.
역주22 潞州李筠遣穆令鈞以步騎三千拒元徽于太平驛 : 潞州는 北周 宣政 元年(578)에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지금의 山西省 襄垣縣 북쪽에 있었다. 옛날 이곳에 潞子가 세운 나라가 있었던 데서 州名이 유래하였다. 隋나라 때 上黨郡이 되었다가 唐 武德 元年(618)에 다시 노주로 고쳤는데 天寶 初年에 다시 상당군으로 고치고 乾元 元年(758)에 또다시 노주로 고쳤다. 이후에도 隆德府, 노주, 潞安府로 改名을 거듭하였다. 太平驛은 옛터가 지금의 산서성 양원현의 서남쪽 18리 떨어진 太平村에 있었다. ≪二十二史考異≫ 권66에 ‘穆令鈞’에 대해 ‘≪資治通鑑≫에는 令均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南監本과 彭注本에는 ‘三’이 ‘二’로 되어 있다.[按南監本彭注本三作二]”라고 하였다.
역주23 大喪 : 帝王, 皇后, 世子의 喪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954년 1월 崩御한 周 太祖 郭威의 喪을 말한다.
역주24 顯德元年三月……戰于高平 : 顯德은 後周 世宗 柴榮의 연호(954~959)이다. 高平은 지금의 山西省 晉城市에 속하는 지역으로, 산서성 東南部,澤州盆地의 北端,太行山의 서남쪽 기슭에 있다. 漢族의 始祖로 추앙받는 炎帝의 고향이기도 하고, 전국 시대 秦나라 白起가 趙나라 趙括의 군사를 대파하고, 降卒 40여만 명을 땅에 파묻어 통일의 기초를 닦은 長平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二十二史考異≫ 권66에 ‘顯德元年’에 대해, “世家에서는 凡例에 따라 本國의 紀年을 쓰는데 여기서 乾祐를 쓰지 않고 顯德을 쓴 것은 범례와 부합하지 않는다.[世家例書本國之紀年 此不書乾祐而書顯德 亦與例不合]”라고 하였다.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周本紀〉에서 ‘3月 癸巳日에 劉昊과 高原에서 전투하여 패배시키고 추격하여 高平에 미쳐 다시 패배시켰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고원에서 전투한 일을 먼저 서술하지 않고 곧장 고평에서 전투하였다고만 서술하였으니 뒤에서 追擊하였다고 한 곳은 다시 어느 곳이란 말인가? 〈劉詞傳〉에서도 단지 고평만 서술하여, ‘世宗이 고평에서 전투할 때 樊愛能 등의 군대가 패배하여 남쪽으로 달아났다.’라고 하였으니 번애능 등의 패배는 대체로 처음 고원에서 接戰하던 때에 있었던 것이고 고평은 바로 이기고 나서 추격한 곳인 듯하다. 〈本紀〉에 ‘癸巳’로 되어 있는데 이는 甲午日보다 하루 전으로, 뒷부분의 日暮를 가지고 미루어 보면 사실 같은 날에 일어난 일이다. ≪資治通鑑≫에는 바로 ‘癸巳’로 되어 있는데 ≪資治通鑑考異≫에서 ‘≪世宗實錄≫에 甲午日에 賊이 고평 남쪽의 고원에 진을 쳤다고 하였는데 살펴보면 뒷부분에 다시 甲午日이 있으니 이는 필시 癸巳의 착오이다. 지금 ≪十國紀年≫(劉恕 撰)을 따른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甲午’로 되어 있는 것은 착오이다.[按周本紀 三月癸巳 及劉昊戰于高原敗之 追及于高平 又敗之 此不先敍戰高原 直敍戰高平 下曰追擊者 更是何地 劉詞傳亦單敍高平 曰世宗戰高平 樊愛能等軍敗南走 愛能等敗 蓋在高原接戰之始 高平乃旣勝追擊之地也 本紀作癸巳是先甲午一日 以下日暮推之 實是同日事 通鑑正作癸巳 考異曰世宗實錄 甲午賊陳於高平南之高原 按下又有甲午 此必癸巳誤也 今從十國紀年 則此作甲午誤]”라고 하였다.
역주25 措大 : 貧寒하고 失意한 선비나 書生의 뜻으로, 본래 큰 일을 조치할 수 있다[擧措大事]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역주26 輜重器甲 : 輜重은 말이나 수레에 실은 군수용의 물품들 혹은 이를 수송하는 부대를 가리키고 器甲은 무기와 갑옷을 가리킨다.
역주27 雕窠(조과)嶺 : 지금의 山西省 長子縣의 서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역주28 平陽 : 지금의 산서성 臨汾市의 서남쪽 18리 떨어진 金殿鎭에 있었다. 春秋 시대에 晉나라 大夫 羊舌氏의 邑으로, 晉 頃公 12년(B.C. 514)에 平陽縣을 설치하였다. 堯 임금이 도읍하였다고 하는 곳으로 平河의 북쪽에 있었는데 ≪詩經≫에 나오는 唐國이다.
역주29 三品料 : 三品 관원의 봉록에 준할 정도의 좋은 飼料라는 뜻으로, ‘三品芻’, ‘三品蒭豆’라고도 한다. 唐나라 때 奸臣 李林甫가 19년 동안이나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천자의 聰明을 가리고 권력을 제멋대로 부렸는데, 諫官들을 불러 이르기를, “그대들은 儀仗으로 세우는 말들을 보지 못했는가? 종일토록 아무 소리 없이 서 있으면 삼품의 꼴과 콩을 실컷 먹지만, 한 번 울었다 하면 바로 쫓겨나니, 나중에 비록 울지 않으려 한들 되겠는가?[君等獨不見立仗馬乎 終日無聲 而飫三品芻豆 一鳴則黜之矣 後雖欲不鳴 得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唐書≫ 卷223 〈李林甫傳〉
역주30 忻口 : 지금의 山西省 忻州市 북서쪽 15리 떨어진 忻口村이다. 두 산이 끼고 있고 滹沱河가 그 사이를 흐르고 있다. 漢 高祖가 흉노를 치러 갔다가 平城에서 포위되었는데 그곳에서 탈출하고 회군하여 이곳에 이르러 六軍이 忻然하였던 데서 지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역주31 代州 : 隋나라 때 肆州를 고쳐 설치한 곳으로, 治所는 지금의 山西省 代縣에 있었다. 수나라 大業 3년(607)에 雁門郡으로 고쳤다가 唐나라 武德 元年(618)에 다시 대주를 설치하였다. 天寶 初年에 다시 雁門郡으로 고쳤다가 乾元 元年(758)에 다시 대주가 되었다.
역주32 旻自敗于高平……明年十一月卒 : ≪五代史纂誤≫ 卷下에 “지금 〈本紀〉를 살펴보건대, 周 太祖가 廣順 4년 甲寅年(954) 正月 丙子日 초하루에 南郊에서 제사를 지내고 大赦免을 단행하고 改元하여 顯德 元年으로 삼았다. 이달 壬辰日에 太祖가 崩御하고 丙申日에 世宗이 즉위하였고 2월에 漢나라 군대가 와서 토벌하여 潞州부터 공격하였다. 3월 乙酉日에 노주로 가고 癸巳日에 劉旻과 高平에서 전투하여 패배시키고 6월 乙巳日에 회군하였다. 또 〈十國世家年譜〉를 살펴보건대, 甲寅年 세종 현덕 원년 正月에 卽位하였으니 바로 劉旻의 乾祐 7년인데 注에서는 ‘이해에 承鈞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미루어 보면 이는 세종이 현덕 원년 갑인년에 太原을 포위하고 6월이 되어서 회군하였고 이해에 유민이 卒하고 劉承鈞이 즉위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劉旻世家〉에서는 도리어 ‘이듬해 11월에 卒하였다.’고 하였으니 〈本紀〉, 〈年譜〉와 상응하지 않는다. 아마도 〈유민세가〉에 ‘明年’ 2자가 잘못 들어간 듯하다.[今按本紀 周太祖以廣順四年甲寅歲正月丙子朔有事于南郊 大赦改元爲顯德元年 是月壬辰 太祖崩 丙申 世宗卽位 二月 漢人來討 攻自潞州 三月乙酉 如潞州 癸巳 及劉旻戰于高平 敗之 六月乙巳 班師 又按十國年譜 甲寅 世宗顯德元年 正月卽位 卽劉旻之乾祐七年 乃注云是歲承鈞立 以此推之 則是世宗以顯德元年甲寅歲圍太原 至六月班師 是歲旻卒承鈞立也 今世家乃云明年十一月卒 則與本紀年譜不相應 蓋世家誤有明年二字也]”라고 하였다.
역주33 夷狄 : 사고전서본에는 ‘四夷’로 되어 있다. 아래도 같다.
역주34 終旻之世……然後改元 : 劉旻이 자신이 세운 東漢이 後漢의 正統을 이은 왕조임을 표방하였다는 말이다. 乾祐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 隱帝의 연호이다. 건우 7년(954) 유민이 서거한 뒤 劉承鈞(926~968)이 遼나라의 책봉을 받아 제위에 올랐는데 건우 10년(957)에 天會(957~973)로 개원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7)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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