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皇后는 起自側微하야 擅寵黷貨하야 因而濁亂宮中하야 軍士分崩하고 以至君上하얀 身弑國亡이라
莊宗神閔敬皇后劉氏는 魏州成安人也라 莊宗正室은 曰 衛國夫人韓氏요 其次는 燕國夫人伊氏요 其次后也니 初封魏國夫人이라
后父는 劉叟요 黃鬚이며 善醫卜하야 自號劉山人이라
后生五六歲에 晉王攻魏하야 掠成安한대 裨將袁建豐得后하야 納之晉宮하니 貞簡太后가 敎以吹笙歌舞라
旣笄에 甚有色하야 莊宗見而悅之라 莊宗已爲晉王에 太后幸其宮하니 置酒爲壽하고 自起歌舞라
太后歡甚하야 命劉氏吹笙佐酒하고 酒罷去에 留劉氏以賜莊宗하다
先時에 莊宗攻梁軍於夾城이라가 得符道昭妻侯氏하야 寵專諸宮하니 宮中謂之夾寨夫人이라 莊宗出兵四方에 常以侯氏從軍이라
其後에 劉氏生子繼岌하니 莊宗以爲類己하야 愛之라 由是로 劉氏寵益專이라
으로 戰河上十餘年
에 獨以劉氏從
이라 劉氏多智
하야 善迎意承旨
하니 其他嬪御莫得進見
이라
其父가 聞劉氏已貴하고 詣魏宮上謁이라 莊宗이 召袁建豐問之하니 建豐曰 臣始得劉氏於成安北塢하니 時에 有黃鬚丈人護之라하다
乃出劉叟하야 示建豐하니 建豐曰 是也라 然劉氏方與諸夫人으로 爭寵하야 以門望相高라
因大怒曰 妾去鄕時를 略可記憶하니 妾父不幸死於亂兵이라 妾時에 環尸慟哭而去러니 此田舍翁은 安得至此오하고 因命笞劉叟于宮門하다
莊宗已卽皇帝位하야 欲立劉氏爲皇后나 而韓夫人이 正室也요 伊夫人이 位次在劉氏上이라 以故로 難其事而未發이라
宰相豆盧革과 樞密使郭崇韜가 希旨上章하야 言劉氏當立이라하니 莊宗大悅하다
韓夫人等이 皆不平之하니 乃封韓氏爲淑妃하고 伊氏爲德妃하다 莊宗自滅梁으로 志意驕怠하야 宦官伶人亂政이라
后特用事於中이러니 自以出於賤微하야 踰次得立을 以爲佛力이라
又好聚斂하야 分遣人하야 爲商賈하니 至於市肆之間에 薪芻果茹하야도 皆稱中宮所賣라하다
四方貢獻이면 必分爲二하야 一以上天子하고 一以入中宮하니 宮中貨賄山積이라
惟寫佛書
에 饋賂僧尼
러니 而莊宗
도 由此
로 亦佞佛
이라 有胡僧自
來
하니 莊宗
이 率皇后及諸子
하야 迎拜之
라
僧遊五臺山
할새 遣
供頓
하니 所至傾動城邑
이라 又有僧誠惠
하니 自言能降龍
이라
嘗過鎭州할새 王鎔不爲之禮어늘 誠惠怒曰 吾有毒龍五百이라 當遣一龍揭片石하면 常山之人이 皆魚鼈也라하다
會明年에 滹沱河大水하야 壞鎭州關城하니 人皆以爲神이라
莊宗及后가 率諸子諸妃하야 拜之하니 誠惠端坐不起라 由是로 士無貴賤히 皆拜之나 獨郭崇韜不拜也라
是時에 皇太后及皇后가 交通藩鎭하야 太后稱誥令하고 皇后稱敎命하야 兩宮使者가 旁午於道라
許州節度使溫韜가 以后佞佛로 因請以私第爲佛寺하고 爲后薦福이라 莊宗數幸郭崇韜元行欽等私第한대 常與后俱라
其後에 幸張全義第하야 酒酣하야 命后拜全義爲養父하니 全義日遣姬妾하야 出入中宮하야 問遺不絶이라
莊宗有愛姬甚有色而生子하니 后心患之라 莊宗燕居宮中에 元行欽侍側이러니
莊宗問曰 爾新喪婦하니 其復娶乎아 吾助爾聘호리라하다 后指愛姬하야 請曰 帝憐行欽하니 何不賜之오하니 莊宗이 不得已佯諾之라
后趣行欽拜謝하야 行欽再拜한대 起顧愛姬하니 肩輿已出宮矣라 莊宗不樂하야 稱疾不食者累日이라
同光三年秋에 大水하야 兩河之民이 流徙道路하니 京師賦調不充하야 六軍之士가 往往殍踣이라
乃預借明年夏秋租稅하니 百姓愁苦하야 號泣于路어늘 莊宗方與后로 荒于畋遊라
十二月己卯臈
에 畋于白沙
한대 后率皇子後宮畢從
하야 歷
하야 宿龕澗
하고 癸未
에 乃還
이라
是時에 大雪하야 軍士寒凍이라 金鎗衛兵萬騎가 所至責民供給하야 壞什器徹廬舍而焚之하니 縣吏畏懼하야 亡竄山谷이라
占星者言 御前當有急兵하니 宜散積聚以禳之라하다 宰相請出庫物以給軍이어늘 莊宗許之하되
后不肯曰 吾夫婦得天下는 雖因武功이나 盖亦有天命이라 命旣在天하니 人如我何리오하다
宰相論于
하니 后於屛間耳屬之
하야 因取粧奩及皇幼子滿喜
하야
置帝前하야 曰 諸侯所貢은 給賜已盡하야 宮中所有는 惟此耳라하고 請鬻以給軍하니 宰相惶恐而退라
하니 軍士負而詬曰 吾妻子已餓死
하니 得此何爲
오하다
莊宗이 東幸汴州할새 從駕兵二萬五千이러니 及至萬勝하야 不得進而還하니 軍士離散하야 所失太半이라 至罌子谷하니 道路隘狹이라
莊宗이 見從官執兵仗者하야 皆以好言勞之하야 曰 適報魏王平蜀하야 得蜀金銀五十萬하니 當悉給爾等호리라하니
莊宗泣下
하야 因顧內庫使張容哥
하야 索
以賜之
하니 容哥對曰 盡矣
라하다
軍士叱容哥曰 致吾君至此는 皆由爾輩라하고 因抽刀逐之하니 左右救之而免이라
容哥曰 皇后惜物하야 不以給軍이어늘 而歸罪于我하니 事若不測이면 吾身萬段矣라하고 乃投水而死하다
郭從謙反에 莊宗中流矢傷甚하야 臥絳霄殿廊下라가 渴欲得飮이어늘 后令宦者하야 進飱酪하고 不自省視하다
莊宗崩에 后與李存渥等이 焚嘉慶殿하야 擁百騎하야 出師子門하다 后於馬上에 以囊盛金器寶帶로 欲於太原造寺爲尼라
在道因與存渥姦
하고 及至太原
하야 乃削髮爲尼
러니 明宗入立
에 遣人賜后死
하다 晉
五年
에 追諡曰 神閔敬皇后
라
劉皇后는 미천한 신분에서 황후가 되어 총애를 독차지하고 재화를 탐닉하였다. 이로 인해 궁중을 혼탁하고 혼란하게 만들어 군사들이 분열되고, 君上에 이르러서는 자신은 시해당하고 나라가 망하였다.
사건을 묘사함에 이따금 생동감이 넘치는 부분은 太史公(司馬遷)의 ≪史記≫ 〈呂太后本紀〉와 〈外戚世家〉에 뒤지지 않는다.
莊宗의 神閔敬皇后 劉氏는 魏州 成安 사람이다. 장종의 正室은 衛國夫人 韓氏이고, 그 다음은 燕國夫人 伊氏이고, 그 다음이 后이니 처음에는 魏國夫人에 봉해졌다.
后의 아버지는 劉叟이고 〈유수는〉 수염이 황색이었으며 醫學과 卜筮에 뛰어나 스스로 劉山人이라 불렀다.
后가 태어나 5, 6세에
晉王(뒤의
後唐 莊宗)이 위주를 공격하여 성안을 노략질하였는데,
裨將 袁建豐이
后를 얻어
晉나라
宮에 들이니,
貞簡太后가
笙簧 부는 법, 춤과 노래 등을 가르쳤다.
笙
성인이 되자 몹시 美色이 있어 장종이 보고 좋아하였다. 장종이 이미 진왕이 됨에 정간태후가 궁에 幸行하니, 장종이 酒宴을 베풀어 祝壽하고 스스로 일어나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정간태후가 몹시 기뻐하며 유씨에게 생황을 불고 술을 따르기를 명하고 주연이 파하여 떠날 때에 유씨를 남겨두어 장종에게 내려주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莊宗이 夾城에서 梁나라 군사를 공격하다가 符道昭의 아내 侯氏를 얻어 궁인들 중에 후씨만을 총애하니, 궁중에서 夾寨夫人이라 불렀다. 장종이 四方으로 출병할 때에 늘 후씨를 從軍하게 하였다.
그 뒤에 劉氏가 아들 繼岌을 낳으니, 장종이 자신과 닮았다고 하여 사랑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씨에 대한 총애가 더욱 전일해졌다.
魏博을 함락한 뒤로 黃河 가에서 10여 년 전쟁을 치를 때에 유씨만을 종군하게 하였다. 유씨는 지혜가 많아 능란하게 장종의 뜻에 迎合하니, 다른 처첩과 궁녀들은 나아가 장종을 만날 수가 없었다.
后의 아비가 劉氏가 이미 귀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魏州의 宮으로 가서 알현하였다. 莊宗이 袁建豐을 불러 물어보니 원건풍이 말하기를 “신이 처음 成安의 북쪽 마을에서 유씨를 얻었으니, 당시에 누런 수염을 가진 노인이 보호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劉叟를 나오게 하여 원건풍에게 보여주니, 원건풍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맞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씨는 한창 여러 부인과 총애를 다투며 가문의 명망을 서로 비교하고 있었다.
인하여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첩이 고향을 떠날 때를 대략 기억하고 있으니, 첩의 아비는 불행히도 亂兵에게 죽었습니다. 첩이 당시에 시신 주위를 돌며 통곡하고서 떠났는데, 이 시골 늙은이는 어떻게 여기에 왔습니까.”라고 하고, 인하여 宮門에서 유수에게 笞를 칠 것을 명하였다.
莊宗이 이미 皇帝의 지위에 올라 劉氏를 세워 皇后로 삼으려 하였지만, 韓夫人은 正室이고 伊夫人은 位次가 유씨의 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 일을 난처하게 여겨 드러내지 않았다.
宰相 豆盧革과 樞密使 郭崇韜가 장종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疏章을 올려 유씨가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하니, 장종이 크게 기뻐하였다.
同光 2년(924) 4월 己卯日에 황제가 文明殿에 나아가 使者를 보내 유씨를 책봉하여 황후로 삼으니, 황후가 책봉을 받고서 重翟車를 타고 鹵簿를 갖추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행차하여 太廟를 참배하였다.
한부인 등이 모두 불평하니, 이에 韓氏는 淑妃로 삼고 伊氏는 德妃로 삼았다. 장종이 梁나라를 멸한 뒤로 마음이 교만하고 태만해져 환관과 광대들이 조정을 어지럽혔다.
황후가 특히 궁중에서 권력을 천단하였는데 스스로 미천한 신분 출신으로 등급을 넘어 황후의 지위를 얻은 것은 부처의 힘이라고 여겼다.
또 재물을 축척하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나누어 보내 商人으로 만들었으니, 시장 안에 땔감이나 목초, 과일과 채소 등에 이르러서도 모두 中宮이 내다 파는 것이라고들 하였다.
사방에서 貢物을 바치면 반드시 둘로 나누어 하나는 천자에게 올리고 하나는 중궁에 들이니, 宮中에 재화가 산처럼 쌓였다.
오직 佛書를 베껴 쓸 때만은 승려에게 음식과 뇌물을 주었는데, 莊宗도 이로 말미암아 佛敎를 좋아하였다. 于闐에서 온 西域의 승려가 있었는데, 장종이 皇后와 아들들을 데리고 맞이하고 절하였다.
승려가 五臺山을 갈 때에 中使를 보내 음식을 대접하게 하니, 승려가 이르는 곳마다 城邑이 들썩였다. 또 승려 誠惠라는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龍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일찍이 鎭州를 지날 때에 王鎔이 예우하지 않자 성혜가 노하여 “나에게 毒龍 500마리가 있는지라 한 마리 용을 보내 片石을 들어 올리면 常山의 사람들은 모두 물고기와 자라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 이듬해에 滹沱河에 큰 홍수가 나서 鎭州의 성과 관문을 무너뜨리니, 사람들이 모두 神이라고 생각하였다.
장종과 황후가 아들들과 왕비들을 데리고 가 절하니, 성혜는 端坐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선비 중 貴賤을 따질 것 없이 모두 그에게 절하였지만 郭崇韜만은 절하지 않았다.
이때에 皇太后와 皇后가 藩鎭과 서로 내통하였는데, 태후의 命은 誥令이라 하고 황후의 命은 敎命이라 하여 두 궁의 使者가 여기저기로 길을 오갔다.
許州節度使 溫韜가 황후가 불교를 좋아한다고 하여 인하여 자신의 집을 佛寺로 만들고 황후를 위하여 복을 빌 것을 청하였다. 莊宗이 郭崇韜와 元行欽 등의 집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늘 황후와 함께 방문하였다.
그 뒤에 張全義의 집으로 거둥하여 술에 취하여 장전의에게 절하고 養父로 삼으라고 황후에게 명하니, 장전의가 날마다 姬妾을 보내 中宮을 출입하면서 끊임없이 안부를 묻고 뇌물을 바쳤다.
장종에게 몹시 아름다운 愛姬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황후가 마음으로 근심하였다. 장종이 궁중에서 편안히 쉴 때에 원행흠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장종이 묻기를 “그대는 이제 막 부인을 잃었으니 어찌 다시 장가들지 않는가? 내가 그대의 聘禮를 돕겠다.”라고 하였다. 황후가 애희을 가리키며 청하기를 “황제께서 원행흠을 아끼시니 어찌 그에게 내려주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장종이 어쩔 수 없이 거짓으로 허락하였다.
황후가 원행흠에게 拜謝를 재촉하여 원행흠이 두 번 절하였는데, 원행흠이 일어나 애희을 돌아보니 肩輿(가마)가 이미 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장종이 불쾌하여 병을 핑계로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다.
同光 3년(925) 가을에 큰 홍수가 나서 河南과 河北의 백성들이 길에서 떠돌아다니니, 京師의 賦稅가 충분치 않아 六軍의 군사들이 왕왕 굶어 죽었다.
이에 이듬해 여름과 가을의 租稅를 미리 거두니,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길에서 부르짖으며 울었는데, 莊宗은 이때에 皇后와 함께 사냥과 遊樂에 빠져 있었다.
12월 己卯日인 臘日에 白沙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황후가 皇子와 後宮을 거느리고 모두 뒤따라 伊闕을 지나 龕澗에서 유숙하고 癸未日에 비로소 돌아왔다.
이때에 큰 눈이 내려 군사들이 추위에 떨었다. 金鎗衛의 군사 1만 騎兵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해달라고 요구하며 집기와 집을 부수고 불을 지르니, 縣의 관리들이 두려워하여 산속으로 도망쳐 숨었다.
이듬해 3월에 客星이 天庫를 범하였고, 유성이 天棓으로 떨어지니,
점성가가 “御前에 갑작스런 전란이 있을 것이니 의당 모아놓은 재물을 풀어 祓除해야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宰相이 창고의 재물을 내어 군사들에게 공급해주기를 청하니 莊宗은 허락하였지만,
皇后가 동의하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 夫婦가 천하를 얻은 것은 비록 武功으로 인한 것이지만 대개 또한 天命이 있었습니다. 命이 이미 하늘에 있으니, 사람들이 우리를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재상이 延英殿에서 〈이 문제를〉 의논하였는데, 황후가 병풍 뒤에서 귀를 대고 듣고서 인하여 화장대와 皇幼子 滿喜를 취하여
皇帝 앞에 두고 말하기를 “諸侯가 바친 공물은 죄다 내려주어 궁중에 남은 것은 오직 이것뿐입니다.”라고 하고 이를 팔아서 군사들에게 지급해주기를 청하니, 재상이 황공하여 물러났다.
趙在禮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출병하여 魏州를 토벌하면서 비로소 물건을 내어 군사들에게 지급하니, 군사들이 물건을 등에 지고 욕하기를 “우리의 妻子는 이미 굶어 죽었으니, 이것을 가져간들 무엇하겠는가.”라고 하였다.
莊宗이 동쪽으로 汴州로 행행할 때에 군사 2만5천 명으로 御駕를 호종하게 하였는데 萬勝에 도착하여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오니, 군사들이 離散하여 잃은 군사가 태반이었다. 罌子谷에 이르니 도로가 더욱 좁아졌다.
장종이 병장기를 잡은 從官들을 보고서 모두 좋은 말로 군사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마침 魏王이 蜀을 평정하여 蜀의 金銀 50만을 얻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이를 모두 너희들에게 지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군사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너무 늦었으니, 받는 사람도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莊宗이 눈물을 흘리며 인하여 內庫使 張容哥를 돌아보고서 袍帶를 뒤져 군사들에게 하사하게 하니, 장용가가 “포대가 바닥이 났습니다.”라고 하였다.
군사들이 장용가를 질타하기를 “우리 임금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모두 너희들 때문이다.”라고 하고 인하여 칼을 뽑아 쫓으니, 좌우 사람들이 막아 죽음을 면하였다.
장용가가 말하기를 “皇后가 재물을 아까워하여 군사들에게 지급하지 않았는데 죄를 나에게 돌리니, 사태가 만약 不測하게 되면 나의 몸은 만 조각이 날 것이다.”라고 하고 이에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郭從謙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장종이 流矢에 맞아 큰 상처를 입어 絳霄殿 행랑 아래에 누워 있다가 갈증이 나 물을 마시려고 하자, 皇后가 환관을 시켜 데운 타락죽을 올리게 하고 자신이 직접 장종을 돌보지 않았다.
장종이 崩하자 황후와 李存渥 등이 嘉慶殿을 불태우고 기병 1백 騎를 데리고 師子門을 빠져 나갔다. 황후가 말 위에서 전대에 金器와 寶帶 등을 담고서 太原에서 절을 짓고 비구니가 되려고 하였다.
길에서 이존악과 간통하고, 태원에 이르러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었는데, 明宗이 즉위하자 사람을 보내 황후를 賜死하였다. 晉나라 天福 5년(940)에 神閔敬皇后라는 追諡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