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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7)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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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廬陵歐陽文忠公年譜
眞宗景德四年丁未
是歲 皇考崇國公觀爲綿州軍事推官이라 六月二十一日寅時 公生이라
大中祥符元年戊申
大中祥符二年己酉
大中祥符三年庚戌
是歲 崇公終於泰州軍事判官이라 公叔父注+時任隨州推官하야 因卜居焉이라 公母夫人鄭氏年方二十九 携公往依之하야 遂家于隨
貧無資하야 以荻畫地하야 教公書字 稍長 多誦古人篇章하니 使學爲詩 叔父後歷閬州推官江陵府掌書記하고 仕至二千石하고 이라
大中祥符四年辛亥
是歲 葬崇公于吉州吉水縣瀧岡注+其後至和元年, 析吉水縣之報恩鎭, 置永豐縣, 遂隷永豐.이라
大中祥符五年壬子
大中祥符六年癸丑
大中祥符七年甲寅
大中祥符八年乙卯
大中祥符九年丙辰
公年十歲 在隨 家益貧하야 借書抄誦이라 州南大姓李氏子好學하야 公多游其家하야 於故書中 得唐韓昌黎文六卷하야 乞以歸하야 讀而愛之이라 爲詩賦 下筆如成人하니 都官曰 奇童也로다 他日必有重名이라하다
天禧元年丁巳
天禧二年戊午
天禧三年己未
天禧四年庚申
天禧五年辛酉
乾興元年壬戌
二月 仁宗卽位
仁宗天聖元年癸亥
是歲 公應擧隨州하야 試左氏失之誣論이라 其略云 라하다 人已傳誦이러니 坐賦逸하야이라
天聖二年甲子
天聖三年乙丑
天聖四年丙寅
公年二十이라
天聖五年丁卯
是春 試禮部不中이라
天聖六年戊辰
是歲 公携文謁胥學士注+於漢陽하니 胥公大奇之하야 留置門下 携公泛江하야 如京師
天聖七年己巳
是春 公從胥公하야 在京師 試國子監爲第一하야 補廣文館生이라 赴國學解試하야 又第一이라
天聖八年庚午
正月 試禮部하니 翰林學士晏公注+知貢擧 公復爲第一이라 三月 御試崇政殿하야 公甲科第十四名이라 五月 授將仕郞秘書省校書郞하고 充西京留守推官이라
天聖九年辛未
三月 公至西京이라 錢文僖公注+惟演爲留守하니 幕府多名士 與尹注+師魯梅注+堯臣聖俞尤善하야 日爲古文歌詩하야 遂以文章名冠天下 胥公許以女妻公이러니 是歲 親迎于東武
明道元年壬申
是春及秋 兩游嵩嶽이라 蓋從通判謝絳하야 奉御香告廟也 禮畢 同游五人 皆見峭壁大書神淸之洞注+ 公又嘗行縣, 視旱蝗.이라
明道二年癸酉
正月 以吏事如京師하야 因省叔父于漢東이라 三月還洛 夫人胥氏卒하니 時生子未逾月이라 九月 할새 公至鞏縣陪祭 十二月 進階承奉郞이라
景祐元年甲戌
三月 西京秩滿하야 歸襄城이라 五月 如京師 會前留守王文康公注+入樞府하야 薦召試學士院이라 閏六月乙酉 授宣德郞試大理評事兼監察御史하고 充鎭南軍節度掌書記館閣校勘이라
秘閣所藏書多脫謬하야 七月甲辰編定하야 하야 著爲總目하니 公預焉이라 是歲 再娶諫議大夫楊公注+大雅
景祐二年乙亥
是歲七月 公同產妹之夫張龜正死于襄城하니 謁告視之 九月 夫人楊氏卒이라
景祐三年丙子
公年三十이라 是歲 天章閣待制權知開封府范仲淹 言事忤宰相하야 落職하야 知饒州 公切責司諫高若訥하니 若訥以其書聞하야 五月戊戌 降爲峽州夷陵縣令이라
公自京師 沿汴絶淮泝江하야 奉母夫人하야 赴貶所하야 十月至夷陵이라
景祐四年丁丑
三月 謁告至許昌하야 娶薛簡肅公注+ 是夏 叔父都官卒이라 九月 還夷陵이라 十二月壬辰 移光化軍乾德縣令이라
寶元元年戊寅注+十一月改元
三月 赴乾德이라 是歲 胥夫人所生子夭
寶元二年己卯
二月 知制誥謝希深注+出守鄧州 梅聖俞將宰襄城하야 與希深偕行이라 五月 公謁告往會하야 留旬日而還이라
六月甲申 復舊官하고 權武成軍節度判官廳公事 公自乾德으로 奉母夫人하야 於南陽이라 暫如襄城이라
康定元年庚辰注+二月改元
是春 赴滑州 時范文正公起爲陜西經略招討安撫使하야 辟公掌書記어늘 辭不就
六月辛亥 召還하야 復充館閣校勘하고 仍修崇文總目이라 十月 轉太子中允이라 癸巳 是歲 子發生이라
慶歷元年辛巳
五月庚戌 權同知太常禮院한대 以見修崇文總目辭하야 許之 八月乙酉 許州對公事回하야 依舊供職注+曾孫建世編年載此, 未詳.이라
十一月丙寅 祀南郊할새 하야 引終獻이라 十二月 加騎都尉 己丑 崇文總目成하야 改集賢校理
慶歷二年壬午
正月丁巳 이라 三月丙辰 御試進士할새 公擬進一首하니 賜勅書獎諭 四月丙子 復差同知禮院이라
어늘 宰相呂夷簡薦富弼報聘하니 人皆危之 公上書引하야 乞留弼한대 不報
五月 復應詔上書하야 極陳弊事 八月 請外하야 九月 通判滑州하야 十月
慶歷三年癸未
是歲 仁宗廣言路하고 修政事하니 人多薦公宜爲臺諫이라 三月 召還하야 癸巳 轉太常丞知諫院이라 四月 至京이라
十二月己亥 어늘 公辭 辛丑 有旨不試하고 直以右正言知制誥하야 仍供諫職이라
丁未 同詳定이라 是月立春할새 爲獻官하고 尋例賜이라
慶歷四年甲申
三月庚午 兼判이라 四月乙未 契丹賀生辰人使御筵於都亭驛하고 己亥 命公使河東하야 計度 及盜鑄鐵錢竝虧額利害
七月 還京師 八月甲午 保州軍叛하고 契丹聲言討西夏 癸卯 除公龍圖閣直學士河北都轉運按察使
九月 三朝典故成書하니 以公嘗預編纂으로 賜詔獎諭 十一月 하야 進階朝散大夫하고 封信都縣開國子食邑五百戶
慶歷五年乙酉
是春 이라杜正獻范文正韓忠獻富文忠公 以黨論相繼去하니 公上書辨之
小人素已憾公이러니 會公하니 諫官錢明逸因以財產事及公하야 下開封鞫治
府尹楊日嚴觀望傅會하니 上命戶部判官蘇安世入內供奉官王昭明監勘하야 得無他어늘 八月甲戌 猶落龍圖閣直學士하고 罷都轉運按察使하야 降知制誥知滁州 十月甲戌 至郡이라 是歲 子奕生이라
慶歷六年丙戌
公在滁 自號醉翁이라
慶歷七年丁亥
十二月 以南郊恩으로 加上騎都尉하고 進封開國伯하고 加食邑三百戶 是歲 子棐生이라
慶歷八年戊子
閏正月乙卯 轉起居舍人하고 依舊知制誥하고 徙知揚州하야 二月庚寅 至郡이라
皇祐元年己丑
正月丙午 移知潁州하야 二月丙子 至郡하야 樂西湖之勝하야 將卜居焉이라 四月丙戌 轉禮部郞中하고 八月辛未 復龍圖閣直學士 是歲 子辯生이라
皇祐二年庚寅
七月丙戌 改知應天府하고 兼南京留守司事 己酉 至府 十月己未 是歲 이라
皇祐三年辛卯
皇祐四年壬辰
三月壬戌 丁母夫人憂하야 歸潁州 四月 舊官이어늘 公固辭하니 八月 許之
皇祐五年癸巳
八月 自潁州護母喪하야 歸葬吉州之瀧岡하고 胥楊二夫人祔焉이라 是冬 復至潁이라
至和元年甲午注+三月改元
五月 服闋하야 除舊官職하야 赴闕이라 六月癸巳 朝京師하야 乞郡이어늘 不許 七月甲戌 權判流內銓이라
하여 戊子 出知同州 判吏部南曹吳充 爲公辨明이로대 不報
知諫院范鎭一再極言하고 而參知政事劉沆方提擧修唐書 亦乞留公修書 八月丙午 沆拜相하고 戊申 詔公修唐書 九月辛酉 遷翰林學士하고 壬戌 兼史館修撰하고 又差勾當三班院이라
十月乙巳 할새 攝侍中하야 捧盤取水 十二月庚戌 臘饗할새 攝太尉行事
至和二年乙未
三月 同孫抃考試諸司寺監人吏 六月己丑 하고 已而 乞外하야 改翰林侍讀學士集賢殿修撰하고 出知蔡州 侍御史趙抃知制誥劉敞上疏留公하니 七月戊午 復領舊職이라
八月辛丑 假右諫議大夫하고 充賀契丹國母生辰使하야 將持送仁宗御容이러니 會虜主殂 癸丑 改充賀登位國信使 十二月庚戌 宿虜界松山이라
嘉祐元年丙申注+九月改元
公年五十이라 二月甲辰 使還하야 進北使語錄이라 閏三月丁亥 判太常寺兼禮儀事 孟夏薦饗 攝太尉行事 五月癸未 知通進銀臺司兼門下封駁事 乙未 免勾當三班院이라
六月甲子 奉勅祈晴醴泉觀이라 八月壬戌 知益州張方平除三司使하고 甲子 詔公三司公事하야 以俟其至하고 而命李淑代知銀臺司
乙亥 車駕詣景靈宮하야 朝拜天興殿할새 充贊導禮儀使하고 又朝謁眞宗及章懿太后할새 攝太常卿이라
九月辛卯 大慶殿行할새 爲贊引太常卿이라 禮成 加上輕車都尉하고 進封樂安郡開國侯하고 加食邑五百戶 十二月 被差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이라
嘉祐二年丁酉
正月癸未 權知禮部貢擧하니 賜御書文儒二字 乙已 하고 轉右諫議大夫 三月癸卯發哀苑中할새 攝太常卿이라
六月丙寅 進封兗國公主하고 七月壬午 命公攝禮部侍郞하야 以印授冊使 乙未 兼判尙書禮部 九月己卯 兼判秘閣秘書省이라
十一月辛巳 權判史館이라 丙申 權知審刑院하고 하야 辛丑免이라 十二月辛亥 權判三班院이라
癸亥 權奉安明德元德章穆三后御容於하고 車駕行酌獻禮할새 充禮儀使 是月 被差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이라
嘉祐三年戊戌
正月壬午 上幸興國寺及啓聖院하야 朝謁太祖太宗神御殿할새 攝太常卿이라 二月癸卯 契丹遣使告其國母哀하니 差公館伴이라
三月辛未 兼侍讀學士하니 以員多固辭不拜 癸未 充宗正寺同修玉牒官이라 甲午 同陳旭考試在京百司等人이라 六月庚戌 加龍圖閣學士權知開封府
嘉祐四年己亥
二月戊辰 免開封하고 轉給事中同提擧在京諸司庫務 是月 充御試進士詳定官하니 賜御書善經二字 四月丁卯 奏告今冬太廟親行之禮
癸酉 孟夏薦饗할새 竝攝太尉行事 丙子 兼充群牧使 六月甲申 刪定 九月丁酉 奉勅祈晴相國寺
十月壬申 車駕朝饗景靈宮하고 癸酉 祫饗太廟할새 竝攝侍中行事 丁丑 加護軍하고 食實封二百戶
嘉祐五年庚子
四月丁卯 孟夏薦饗太廟할새 攝太尉行事 七月戊戌 上新修唐書二百五十卷하고 庚子 하야 轉禮部侍郞이라 九月丁亥 兼翰林侍讀學士 十月庚午 車駕朝拜景靈宮天興殿하고 朝謁眞宗及章懿太后神御殿할새 攝侍中이라
十一月辛丑 拜樞密副使하고 加食邑五百戶食實封二百戶 甲寅 同修樞密院時政記 十二月 被差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이라
嘉祐六年辛丑
三月戊申 侍上幸後苑하야 賞花華景亭하고 釣魚涵曦亭하고 遂宴太淸樓 閏八月辛丑 轉戶部侍郞參知政事하고 進封開國公하고 加食邑五百戶食實封二百戶어늘 公辭轉官하니 許之
九月庚申 同修中書時政記 十二月丙戌 臘享太廟할새 攝太尉行事
嘉祐七年壬寅
正月己酉朔 大慶殿朝賀할새 攝侍中하야 承旨宣制 三月乙卯 祈雨南郊할새 攝太尉行事 辛酉 이라
四月壬午 上嘉祐編勅이라 七月庚戌 差充明堂 九月戊申 文德殿할새 攝侍中하야이라
己酉 朝饗景靈宮하고 庚戌 朝饗太廟할새 竝攝司徒 辛亥 明堂하고 己未 進階正奉大夫하고 加柱國하고 仍賜推忠佐理功臣이라
十二月丙申 上幸龍圖天章閣하야 召輔臣至待制三司副使以上臺諫官皇子宗室駙馬都尉管軍하야御書하고 又幸寶文閣하야하야 分賜群臣이라
公得雙幅大書歲字한대 下有御押하고 加以御寶하며 王珪夾題八字云 嘉祐御札賜歐陽修하고 仍於絹尾 書翰林學士臣王珪奉聖旨題賜名이라 又出御制觀書詩一首하야 令群臣屬和注+하고 遂宴群玉殿이라
庚子 再召近臣及三館臣僚하야 赴天章閣하야 觀三朝瑞物太宗眞宗御集하고 次赴寶文閣하야 觀御飛白書하고 賜公하고 復燕群玉殿이라 後數日 公以狀進詩謝注+
按兩宴皆有賜書로대 而實錄及하고 當時 亦不及庚子再賜하고 而實錄及序 又不及館職預召하고 惟東齋記事言之
明言群玉殿所賜하니 時子履任集賢校理하야 與東齋記事合이라 但不知是日公得何字 其爲金花牋則無疑
乃云黃絹兩大字 又何也 云 鸞拂라하고 하니 得非預坐者衆하야 所賜或不同耶
實錄 二十三日丙申二十七日庚子로대 而岐公序乃作戊申壬子하니 不應差誤如此 殆傳寫訛耳注+ “黃金塗紙看揮毫.” 又司馬溫公涑水記聞, 亦載兩賜飛白.
是月 差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이라
嘉祐八年癸卯
二月乙亥 奉勅充沈貴妃冊禮使注+不及行禮 四月壬申 英宗卽位 甲戌 奉勅書大行皇帝哀冊謚寶
甲申 覃恩하야 轉戶部侍郞하고 進階金紫光祿大夫하고 加食邑五百戶하고 食實封二百戶하고 仍賜推忠協謀佐理功臣이라
乙酉 奉勅篆受命寶하니 其文曰 皇帝恭膺天命之寶 五月戊辰 爲皇帝祈福於南郊할새 攝太尉行事 七月戊申 押伴契丹祭吊人使御筵於都亭驛이라
八月癸巳 奉勅篆大行皇帝謚寶하니 其文曰 神文聖武明孝皇帝之寶 十月乙酉 이라 十二月庚午 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이라
治平元年甲辰
四月甲午 奉勅祈雨社稷이라 閏五月戊辰 特轉吏部侍郞이라 八月辛丑 奉勅祈晴太社 十二月壬子 差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이라
治平二年乙巳
是春 上表乞外어늘 不允이라 四月辛丑景靈宮奉安仁宗御容 車駕行酌獻之禮할새 攝侍中이라 八月 以大雨水 再乞避位어늘 不允이라
九月辛酉 提擧編纂太常禮書百卷成 詔名太常因革禮하고 賜銀絹이라 十一月庚午 車駕朝饗景靈宮하고 辛未 饗太廟하고 壬申 祀南郊할새 攝司空行事 進階光祿大夫하고 加上柱國食邑五百戶
治平三年丙午
三月三日하니 時初頒明天曆 適值丁巳 是月 以言者指爲邪說하니 力求去어늘 不允이라 七月癸酉 薦饗太廟할새 攝太尉行事
十二月癸未 奉勅篆皇帝尊號寶하니 其文曰 體乾膺曆文武廣孝皇帝之寶 乙巳 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이라
治平四年丁未
正月丁巳 神宗卽位 戊辰 覃恩하야 轉尙書左丞하고 進階하고 加食邑五百戶하고 食實封二百戶하고 仍賜推忠協謀同德佐理功臣이라
二月 第三子棐登進士第 是月 하니 上察其誣하야 斥之어늘 公力求去 三月壬申 除觀文殿學士하고 轉刑部尙書知亳州하고 改賜推誠保德崇仁翊戴功臣이라
閏三月辛巳 宣簽書駐泊公事하고 陛辭過潁少留하니 許之 五月甲辰 至亳이라 六月戊申 視事
熙寧元年戊申
是歲 連上表乞致仕어늘 不允이라 八月乙巳 轉兵部尙書하고 改知靑州하고 充京東東路安撫使 九月丙申 至靑이라 十一月丁亥 郊祀恩하야 加食邑五百戶하고 食實封二百戶 是歲 築第於潁이라
熙寧二年己酉
三月 內侍王延慶便道傳宣撫問하고 仍賜香藥一銀合하고 又遞賜新校定前漢書하니 以公嘗預刊定也 어늘 不允이라
熙寧三年庚戌
四月壬申 除檢校太保宣徽南院使判太原府河東路經略安撫監牧使하고 兼竝代澤潞麟府嵐石路兵馬都總管이어늘 公堅辭不受 七月辛卯 改知蔡州 九月甲寅 至蔡 是歲 更號六一居士
熙寧四年辛亥
公在蔡 累章告老러니 六月甲子 以觀文殿學士太子少師致仕하고 七月 歸潁이라 八月 將祀明堂할새 詔赴闕陪位어늘 公上章乞免하니 從之 禮成 賜衣帶器幣牲餼
熙寧五年壬子
閏七月庚午 公薨이라 八月丁亥 贈太子太師
熙寧七年八月 諡文忠注+諡議見附錄이라
熙寧八年九月乙酉 葬開封府新鄭縣旌賢鄉이라
元豐三年十二月 하야 遇大禮하야 贈太尉
元豐八年十一月 贈太師하고 追封康國公이라
紹聖三年五月 追封兗國公이라
崇寧三年 追封秦國公하고 政和三年 追封楚國公注+皆以子棐遇郊恩이라
文忠公年譜不一이요 惟桐川薛齊誼廬陵孫謙益曾三異三家爲詳하니 雖用舊例 每列其著述 考文力之先後 然篇章不容盡載하니 次序寧免疑混이리오
如公曾孫建世以告勅宣劄爲編年 尙多差互어늘 況餘人乎 今参稽衆譜하고 傍採史籍하야 而取正於公之文이라
凡居士集外集 各於目錄 題所撰歲月하고 而闕其不可知者하며 奏議表章之類 則隨篇注之하야 定爲文集一百五十三卷하니
居士集五十卷 公所定也 故寘于首하고 外集二十五卷次之하고 易童子問三卷注+詩本義別行於世外制集三卷内制集八卷表奏書啟四六集七卷奏議十八卷雜著述十九卷集古錄跋尾十卷又次之하고 書簡十卷終焉이라
考公行狀컨대 惟闕歸榮集一卷이로대 往往散在外集이요 更俟博求 别有附錄五卷하니 紀公德業이라 此譜專敍出處하되 詞簡而事粗備하니 覧者當自得之
慶元二年二月十五日 郡人登仕郞胡柯 謹記하노라


여릉 구양 문충공의 연보
진종眞宗 경덕景德 4년(1007, 진종眞宗10) 정미丁未년 1세
이해에 황고皇考 숭국공崇國公 면주군사추관綿州軍事推官이 되었다. 6월 21일 인시寅時에 공이 태어났다.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1008, 진종11) 무신戊申년 2세
대중상부 2년(1009, 진종12) 기유己酉년 3세
대중상부 3년(1010, 진종13) 경술庚戌년 4세
이해에 숭공崇公태주군사판관泰州軍事判官으로 재직 중에 고종考終하였다. 공의 숙부叔父注+이름은 이다. 당시 수주추관隨州推官을 맡아 그곳에 살고 있었다. 공의 모부인母夫人 정씨鄭氏는 당시 나이 스물아홉으로 공을 이끌고 가서 의탁하여 마침내 수주隨州에 거주하게 되었다.
집이 가난하고 재산이 없어 억새로 땅에 획을 그어 공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조금 자라서 고인古人편장篇章을 많이 외우니 를 배우게 하였다. 숙부는 후에 낭주추관閬州推官강릉부장서기江陵府掌書記를 역임하고 벼슬이 이천석二千石에 이르렀고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중상부 4년(1011, 진종14) 신해辛亥년 5세
이해에 길주吉州 길수현吉水縣 상강瀧岡숭공崇公을 장사 지냈다.注+그 뒤 지화至和 원년元年(1054)에 길수현吉水縣보은진報恩鎭을 분리하여 영풍현永豐縣을 두니 마침내 영풍永豐에 속하게 되었다.
대중상부 5년(1012, 진종15) 임자壬子년 6세
대중상부 6년(1013, 진종16) 계축癸丑년 7세
대중상부 7년(1014, 진종17) 갑인甲寅년 8세
대중상부 8년(1015, 진종18) 을묘乙卯년 9세
대중상부 9년(1016, 진종19) 병진丙辰년 10세
공의 나이 10세였다. 수주隨州에 있었다. 집이 더욱 가난해져 책을 빌려 베껴놓고 외웠다. 고을 남쪽의 대성大姓이씨李氏의 아들이 학문을 좋아하여 공이 그 집에 많이 놀러가 고서古書 가운데에서 나라 때 한창려韓昌黎(한유韓愈)의 문집 6권을 얻어 빌려서 돌아와 읽으며 애호愛好하였다. 시부詩賦를 지으면 성인이 지은 것과 같으니, 도관공都官公이 말하기를 “기특한 아이로다. 훗날 반드시 대단한 명성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희天禧 원년(1017, 진종20) 정사丁巳년 11세
천희 2년(1018, 진종21) 무오戊午년 12세
천희 3년(1019, 진종22) 기미己未년 13세
천희 4년(1020, 진종23) 경신庚申년 14세
천희 5년(1021, 진종24) 신유辛酉년 15세
건흥乾興 원년(1022, 진종25) 임술壬戌년 16세
2월에 인종仁宗이 즉위하였다.
인종 천성天聖 원년(1023, 인종1) 계해癸亥년 17세
이해에 공이 수주隨州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실착은 속임에 있다는 것에 대한 〉으로 시험을 보았다. 그 대략大略에 이르기를 “나라에서 돌이 말하고 땅에 신이 내려왔네. 문 안의 뱀이 다투고 문 밖의 뱀이 상하며 새 귀신은 크고 옛 귀신은 작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이미 이 글을 전하며 외웠는데 관운官韻을 빠뜨리는 결격 사유에 걸려 낙방하였다.
천성 2년(1024, 인종2) 갑자甲子년 18세
천성 3년(1025, 인종3) 을축乙丑년 19세
천성 4년(1026, 인종4) 병인丙寅년 20세
공의 나이 20세였다. 수주隨州에서 공의 이름을 예부禮部에 추천하였다.
천성 5년(1027, 인종5) 정묘丁卯년 21세
이해 봄에 예부시禮部試에 낙방하였다.
천성 6년(1028, 인종6) 무진戊辰년 22세
이해에 공이 자신이 지은 글을 가지고 서학사胥學士注+이름은 이다. 한양漢陽에서 배알拜謁하니 서공胥公이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라 여기고 문하에 머물게 하였다. 겨울에 서공이 공을 데리고 을 건너 경사京師로 갔다.
천성 7년(1029, 인종7) 기사己巳년 23세
이해 봄에 공이 서공胥公을 따라 경사京師에 있었다.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제일등第一等을 차지하여 광문관생廣文館生보임補任되었다. 가을에 국학해시國學解試에 응시하여 또 제일등을 차지하였다.
천성 8년(1030, 인종8) 경오庚午년 24세
정월에 예부시에 응시하니 한림학사翰林學士 안공晏公注+이름은 이다. 지공거知貢擧였다. 공이 다시 제일등을 차지하였다. 3월에 숭정전崇政殿에서 어시御試를 보아 공이 갑과甲科 제14에 올랐다. 5월에 장사랑將仕郞시비서성교서랑試秘書省校書郞을 제수 받고 서경유수추관西京留守推官충임充任되었다.
천성 9년(1031, 인종9) 신미辛未년 25세
3월에 공이 서경西京에 이르렀다. 전문희공錢文僖公注+이름은 유연惟演이다. 유수留守가 되니 막부幕府명사名士들이 많았다. 공은 注+이름은 이다.사로師魯, 注+이름은 요신堯臣이다.성유聖俞와 더욱 친밀하여 날마다 고문가시古文歌詩를 지어 마침내 문장으로 천하에 으뜸이라는 명성이 났다. 당초 서공胥公이 딸을 공에게 시집보내기로 허락했는데 이해에 동무東武에서 친영親迎하였다.
명도明道 원년(1032, 인종10) 임신壬申년 26세
이해 봄과 가을에 두 번 숭악嵩嶽을 유람하였다. 가을에 통판通判 사강謝絳을 따라 어향御香을 받들고 숭악묘嵩岳廟고제告祭하였다. 제례祭禮를 마치고 함께 유람한 다섯 사람이 모두 가파른 절벽에 큰 글씨로 ‘신청지동神淸之洞’이라고 써져 있는 것을 보았다.注+부록附錄 뒤의 사희심謝希深매성유梅聖俞에게 준 편지에 자세히 보인다. 공이 또 일찍이 순행巡行하여 가뭄과 황충해蝗蟲害를 살폈다.
명도 2년(1033, 인종11) 계유癸酉년 27세
정월에 공무로 경사京師에 간 길에 한동漢東에서 숙부叔父를 문안하였다. 3월에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부인 서씨胥氏하니, 아들을 낳은 지 한 달도 넘기지 않은 때였다. 9월에 장헌황후莊獻皇后 유씨劉氏장의황후莊懿皇后 이씨李氏정릉定陵부장祔葬할 때 공이 공현鞏縣에 이르러 성상이 올리는 제사에 참례하였다. 12월에 승봉랑承奉郞으로 품계가 올랐다.
경우景祐 원년(1034, 인종12) 갑술甲戌년 28세
3월에 서경西京의 임기가 만료되어 양성襄城으로 돌아왔다. 5월에 경사京師로 갔다. 마침 유수留守 왕문강공王文康公注+이름은 이다. 추밀원樞密院에 들어가 공을 천거하여 시학사원試學士院으로 부름을 받았다. 6월 을유乙酉일에 선덕랑宣德郞 시대리평사試大理評事감찰어사監察御史를 제수 받고 진남군절도장서기鎭南軍節度掌書記 관각교감館閣校勘충임充任되었다.
삼관三館비각秘閣에 소장된 서적들에 탈락脫落오류誤謬가 많아 7월 갑진甲辰일에 조명詔命으로 위관委官에게 편정編定하게 하여 개원開元 때의 사부서목四部書目을 본떠서 총목總目을 만드니 공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해에 간의대부諫議大夫 양공楊公注+이름은 대아大雅이다. 딸을 재취再娶로 맞았다.
경우 2년(1035, 인종13) 을해乙亥년 29세
이해 7월에 동복同腹 누이의 남편 장귀정張龜正양성襄城에서 죽으니 휴가를 청해 가서 살폈다. 9월에 부인 양씨楊氏하였다.
경우 3년(1036, 인종14) 병자丙子년 30세
공의 나이 30세였다. 이해에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 권지개봉부權知開封府 범중엄范仲淹시사時事를 말하면서 재상宰相을 거슬러 파직되어 지요주知饒州가 되었다. 공이 사간司諫 고약눌高若訥을 준절하게 책망하니 고약눌이 그 글을 성상聖上에게 아뢰어 5월 무술戊戌일에 강등되어 협주峽州 이릉현령夷陵縣令이 되었다.
공이 경사京師에서 변하汴河를 따라 내려가 회수淮水를 건너 장강長江을 거슬러 올라가서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폄소貶所로 향하여 10월에 이릉夷陵에 이르렀다.
경우 4년(1037, 인종15) 정축丁丑년 31세
3월에 휴가를 청해 허창許昌에 이르러 설간숙공薛簡肅公注+이름은 이다. 딸을 아내로 맞았다. 여름에 숙부 도관공都官公하였다. 9월에 이릉夷陵으로 돌아왔다. 12월 임진壬辰일에 광화군光化軍 건덕현령乾德縣令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원寶元 원년(1038, 인종16) 무인戊寅注+11월에 개원改元하였다. 32세
3월에 건덕乾德으로 부임하였다. 이해에 서부인胥夫人이 낳은 아들이 요절하였다.
보원 2년(1039, 인종17) 기묘己卯년 33세
2월에 지제고知制誥 사희심謝希深注+이름은 이다. 지등주知鄧州로 나가게 되었을 때 매성유梅聖俞양성현령襄城縣令으로 나가게 되어 사희심과 함께 갔다. 5월에 공이 휴가를 청해 가서 이들과 모여 열흘을 머무르고 돌아왔다.
6월 갑신甲申일에 옛 관직을 회복하고 권무성군절도판관청공사權武成軍節度判官廳公事가 되었다. 공이 건덕乾德에서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남양南陽에서 대차待次하였다. 겨울에 잠시 양성襄城에 갔다.
강정康定 원년(1040, 인종18) 경진庚辰注+2월에 개원改元하였다. 34세
이해 봄에 활주滑州로 부임하였다. 당시 범문정공范文正公협서경략초토안무사陜西經略招討安撫使로 기용되어 공을 장서기掌書記로 초빙하였는데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6월 신해辛亥일에 조정으로 불려 돌아가 다시 관각교감館閣校勘충임充任되고 이어서 ≪숭문총목崇文總目≫을 편수編修하였다. 10월에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승전升轉하였다. 계사癸巳일에 예서禮書를 공동 편수하였다. 이해에 아들 이 태어났다.
경력慶歷 원년(1041, 인종19) 신사辛巳년 35세
5월 경술庚戌일에 권동지태상례원權同知太常禮院이 되었는데 현재 ≪숭문총목崇文總目≫을 편수 중이라는 이유로 사양하여 허락받았다. 8월 을유乙酉일에 허주許州에서 공사公事주대奏對하고 돌아와 예전대로 공직供職하였다.注+증손曾孫 건세建世의 〈편년編年〉에 이 사실이 실려 있으나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11월 병인丙寅일에 남교南郊에서 제사를 지낼 때 섭태상박사攝太常博士가 되어 종헌관終獻官을 인도하였다. 12월에 기도위騎都尉가 더해졌다. 기축己丑일에 ≪숭문총목≫이 완성되어 집현교리集賢校理개차改差되었다.
경력 2년(1042, 인종20) 임오壬午년 36세
정월 정사丁巳일에 별두別頭 거인擧人고시考試하였다. 3월 병진丙辰일에 진사進士들에게 〈응천이실부이문應天以實不以文〉이라는 주제로 를 짓게 하는 어시御試를 보일 때 공이 한 수를 의작擬作해 올리니 칭찬하는 칙서勅書를 내려 표창하였다. 4월 병자丙子일에 다시 동지례원同知禮院차임差任되었다.
거란契丹범사泛使를 보내 관남關南의 땅을 요구하자 재상 여이간呂夷簡부필富弼보빙사報聘使로 천거하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공이 상서上書하여 안진경顏眞卿이희열李希烈에게 사신 갔던 일을 들어 부필을 만류할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답하지 않았다.
5월에 다시 조명詔命에 응해 상서上書하여 폐단을 낱낱이 아뢰었다. 8월에 외직을 청해 9월에 활주통판滑州通判이 되어 10월에 활주에 이르렀다.
경력 3년(1043, 인종21) 계미癸未년 37세
이해에 인종仁宗언로言路를 넓히고 정사政事를 정비하니 사람들이 많이들 공을 대간臺諫으로 삼아 마땅하다고 천거하였다. 3월에 조정으로 불려 돌아와 계사癸巳일에 태상승太常丞 지간원知諫院으로 승전升轉하였다. 4월에 경사京師에 이르렀다.
9월 무진戊辰일에 비의緋衣은어銀魚를 하사받고 기사己巳일에 국조훈신國朝勳臣의 명단을 공동으로 상세히 심사하여 정하고 병술丙戌일에 삼조三朝(태조太祖·태종太宗·진종眞宗)의 전고典故를 공동 편수編修하였다. 10월 무신戊申일에 동수기거주同修起居注에 발탁되었다.
12월 기해己亥일에 소시召試하여 지제고知制誥를 삼으려 했는데 공이 사양하였다. 신축辛丑일에 성지聖旨로 시험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우정언右正言으로 지제고知制誥를 삼아 그대로 간관諫官의 직임을 맡게 하였다.
정미丁未일에 편칙編勅을 공동으로 상세히 심사하여 정하였다. 이달 입춘立春서태일궁西太一宮에 제사 지낼 때 헌관獻官이 되고 곧 규례에 따라 자장복紫章服을 하사받았다.
경력 4년(1044, 인종22) 갑신甲申년 38세
3월 경오庚午일에 판등문검원判登聞檢院을 겸하였다. 4월 을미乙未일에 거란契丹하생신사賀生辰使에게 도정역都亭驛에서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이 되었고 기해己亥일에 공에게 명하여 하동河東에 가서 인주麟州폐치廢置와 사사로이 철전鐵錢을 주조하는 일과 반석礬石에 부과하는 세금의 감액減額에 대한 이해利害 관계를 파악하게 하였다.
7월에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8월 갑오甲午일에 보주保州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거란은 서하西夏를 토벌하겠다고 공표하였다. 계묘癸卯일에 공에게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하북도전운안찰사河北都轉運按察使를 제수하였다.
9월에 삼조三朝전고典故가 책으로 완성되니 공이 일찍이 편찬에 참여했으므로 조명詔命을 내려 장유獎諭하였다. 11월에 성상이 남교南郊에서 교제郊祭를 지낸 후 은혜를 베풀어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신도현개국자信都縣開國子 식읍食邑 5백에 봉해졌다.
경력 5년(1045, 인종23) 을유乙酉년 39세
이해 봄에 진정수眞定帥 전황田況진주秦州로 옮기니, 공이 부사府事권지權知한 지 석 달째였다. 당시 이부二府두정헌공杜正獻公(두연杜衍)과 범문정공范文正公(범중엄范仲淹)과 한충헌공韓忠獻公(한기韓琦)과 부문충공富文忠公(부필富弼)이 붕당朋黨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서로 이어서 조정을 떠나니 공이 상서上書하여 변론하였다.
소인들이 평소부터 공에게 유감을 품고 있었는데 때마침 공의 생질녀甥姪女 장씨張氏범법犯法하자 간관諫官 전명일錢明逸이 이를 빌미로 그 집 재산과 관련된 일을 공과 엮어 사건을 개봉부開封府에 내려 심리審理하게 하였다.
부윤府尹 양일엄楊日嚴이 사태를 관망하면서 권세에 영합하니 성상이 호부판관戶部判官 소안세蘇安世입내공봉관入內供奉官 왕소명王昭明에게 명해 조사하게 하여 별다른 혐의가 없음을 확인하였는데, 8월 갑술甲戌일에 도리어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도전운안찰사都轉運按察使에서 파직되어 지제고知制誥 지저주知滁州로 좌천되었다. 10월 갑술甲戌일에 저주滁州에 도착하였다. 이해 아들 이 태어났다.
경력 6년(1046, 인종24) 병술丙戌년 40세
공이 저주滁州에 있으면서 취옹醉翁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경력 7년(1047, 인종25) 정해丁亥년 41세
12월에 성상이 남교南郊에서 교제郊祭를 지낸 후 은혜를 베풀어 상기도위上騎都尉를 더하고 개국백開國伯진봉進封하고 식읍食邑 3백를 더하였다. 이해에 아들 가 태어났다.
경력 8년(1048, 인종26) 무자戊子년 42세
정월 을묘乙卯일에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승전升轉하고 예전대로 지제고知制誥를 맡고 지양주知揚州로 자리를 옮겨 2월 경인庚寅일에 고을에 도착하였다.
황우皇祐 원년(1049, 인종27) 기축己丑년 43세
정월 병오丙午일에 지영주知潁州로 옮겨 2월 병자丙子일에 고을에 도착하여 서호西湖승경勝景을 좋아하여 장차 그곳에 거주하려 하였다. 4월 병술丙戌일에 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 승전升轉하고 8월 신미辛未일에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로 복직하였다. 이해에 아들 이 태어났다.
황우 2년(1050, 인종28) 경인庚寅년 44세
7월 병술丙戌일에 지응천부知應天府개차改差되고 남경유수사사南京留守司事를 겸하였다. 기유己酉일에 에 도착하였다. 10월 기미己未일에 성상이 명당明堂에서 은혜를 널리 베풀어 이부낭중吏部郞中으로 승전升轉시키고 경거도위輕車都尉를 더하였다. 이해에 영주潁州에 전답을 사기로 매성유梅聖俞(매요신梅堯臣)와 약속하였다.
황우 3년(1051, 인종29) 신묘辛卯년 45세
황우 4년(1052, 인종30) 임진壬辰년 46세
3월 임술壬戌일에 모부인母夫人을 당하여 영주潁州로 돌아왔다. 4월에 이전 관직을 내려 기복起復시키자 공이 고사固辭하니 8월에 공의 뜻을 허락하였다.
황우 5년(1053, 인종31) 계사癸巳년 47세
8월에 영주潁州에서 모부인母夫人운구運柩하여 길주吉州상강瀧岡으로 돌아와 장사 지내고 서부인胥夫人양부인楊夫人부장祔葬하였다. 이해 겨울에 다시 영주로 왔다.
지화至和 원년(1054, 인종32) 갑오甲午注+3월에 개원改元하였다. 48세
5월에 을 마치고 이전 관직을 제수 받고 대궐로 나아갔다. 6월 계사癸巳일에 경사京師입조入朝하여 지방 고을 자리를 청하였는데 허락받지 못했다. 7월 갑술甲戌일에 권판류내전權判流內銓이 되었다.
때마침 소인들이 공이 내시內侍들을 태거汰去할 것을 주청奏請했다고 날조하니 내시들이 원망하고 노여워하여 호종요胡宗堯를 승진시켜 임명하는 것은 부당不當하다는 일로 공을 공격하여 무자戊子일에 지동주知同州로 나갔다. 판이부남조判吏部南曹 오충吳充이 공을 위해 변호하였으나 조정에서 답하지 않았다.
지간원知諫院 범진范鎭이 여러 차례 극간極諫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유항劉沆도 ≪당서唐書편수編修제거提擧로 있으면서 공을 조정에 머무르게 하여 ≪당서≫ 편수를 맡길 것을 청하였다. 8월 병오丙午일에 유항이 재상에 배수되고 무신戊申일에 조명詔命으로 공에게 ≪당서≫를 편수하게 하였다. 9월 신유辛酉일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승진하고 임술壬戌일에 사관수찬史館修撰을 겸하고 또 구당삼반원勾當三班院차임差任되었다.
10월 을사乙巳일에 경령궁景靈宮 천흥전天興殿조향朝饗할 때 섭시중攝侍中이 되어 쟁반을 받들고 물을 받았다. 12월 경술庚戌일에 효혜孝惠효장孝章숙덕淑德장회황후章懷皇后의 사당에 납향臘饗할 때 섭태위攝太尉가 되어 제사祭事를 집행하였다.
지화 2년(1055, 인종仁宗33) 을미乙未년 49세
3월에 손변孫抃과 함께 여러 , , 의 관리들을 고시考試하였다. 6월 기축己丑일에 상서上書하여 재상 진집중陳執中논핵論劾하고 얼마 뒤 외직을 청하여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으로 개차改差되고 지채주知蔡州로 나갔다. 시어사侍御史 조변趙抃지제고知制誥 유창劉敞이 공을 조정에 머물게 해달라고 상소하니, 7월 무오戊午일에 다시 이전 관직을 받았다.
8월 신축辛丑일에 임시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고 거란契丹 국모國母생신生辰을 축하하는 사절使節에 충원되어 장차 인종仁宗어용御容을 가지고 가서 전달하려 했는데 때마침 오랑캐 임금이 죽었다. 계축癸丑일에 거란 군주의 등극을 축하하는 국신사國信使로 바꾸어 충원되었다. 12월 경술庚戌일에 오랑캐 국경인 송산松山에 묵었다.
가우嘉祐 원년(1056, 인종34) 병신丙申注+9월에 개원改元하였다. 50세
공의 나이 50세였다. 2월 갑진甲辰일에 사행使行에서 돌아와 ≪북사어록北使語錄≫을 올렸다. 3월 정해丁亥일에 판태상시判太常寺 겸예의사兼禮儀事가 되었다. 맹하孟夏제향祭享을 올릴 때 섭태위攝太尉가 되어 제사祭事를 집행하였다. 5월 계미癸未일에 지통진은대사知通進銀臺司 겸문하봉박사兼門下封駁事가 되었다. 을미乙未일에 구당삼반원勾當三班院에서 면직되었다.
6월 갑자甲子일에 칙명勅命을 받들어 예천관醴泉觀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8월 임술壬戌일에 지익주知益州 장방평張方平삼사사三司使에 제수하고 갑자甲子일에 조명詔命으로 공에게 권발견삼사공사權發遣三司公事를 맡게 하여 장방평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고 이숙李淑에게 명하여 지은대사知銀臺司대리代理하게 하였다.
을해乙亥일에 성상의 거가車駕경령궁景靈宮에 가서 천흥전天興殿조배朝拜할 때 찬도례의사贊導禮儀使에 충원되고 또 진종眞宗장의태후章懿太后신어전神御殿조알朝謁할 때 섭태상경攝太常卿이 되었다.
9월 신묘辛卯일에 대경전大慶殿에서 공사례恭謝禮를 행할 때 찬인贊引태상경太常卿이 되었다. 예를 다 거행하고 상경거도위上輕車都尉가 더해지고 낙안군樂安郡 개국후開國侯진봉進封되고 식읍食邑 5백호가 더해졌다. 12월에 거란契丹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도정역都亭驛에서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으로 차임差任되었다.
가우 2년(1057, 인종35) 정유丁酉년 51세
정월正月 계미癸未일에 권지례부공거權知禮部貢擧가 되니 성상이 “문유文儒” 두 글자를 적어 하사하였다. 을이乙已일에 마감磨勘하고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승전升轉하였다. 3월 계묘癸卯일에 적청狄靑을 위해 원중苑中에서 애도哀悼를 표할 때 섭태상경攝太常卿을 맡았다.
6월 병인丙寅일에 복강공주福康公主연국공주兗國公主진봉進封하고 7월 임오壬午일에 공에게 명하여 섭례부시랑攝禮部侍郞이 되어 인장印章책사冊使에게 주게 하였다. 을미乙未일에 판상서예부判尙書禮部를 겸하였다. 9월 기묘己卯일에 판비각비서성判秘閣秘書省을 겸하였다.
11월 신사辛巳일에 권판사관權判史館이 되었다. 병신丙申일에 권지심형원權知審刑院이 되고 호숙胡宿이 돌아와 예전대로 복귀하기를 기다려 신축辛丑일에 면직되었다. 12월 신해辛亥일에 권판삼반원權判三班院이 되었다.
계해癸亥일에 명덕明德, 원덕元德, 장목章穆황후皇后어용御容계성원啓聖院에 임시로 봉안奉安하고 성상의 거가車駕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 예의사禮儀使에 충원되었다. 이달에 거란契丹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도정역都亭驛에서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으로 차임差任되었다.
가우 3년(1058, 인종36) 무술戊戌년 52세
정월 임오壬午일에 성상이 흥국사興國寺계성원啓聖院에 거둥하여 태조太祖태종太宗신어전神御殿조알朝謁할 때 섭태상경攝太常卿을 맡았다. 2월 계묘癸卯일에 거란契丹이 사신을 보내 국모상國母喪을 알리니 공을 관반사館伴使차임差任하였다.
3월 신미辛未일에 시독학사侍讀學士를 겸하게 하니, 인원이 많다는 이유로 고사固辭하고 숙배肅拜하지 않았다. 계미癸未일에 종정시宗正寺동수옥첩관同修玉牒官에 충원되었다. 갑오甲午일에 진욱陳旭과 함께 경사京師의 여러 관사官司의 관리들을 고시考試하였다. 6월 경술庚戌일에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 권지개봉부權知開封府를 더하였다.
가우 4년(1059, 인종37) 기해己亥년 53세
3월 무진戊辰일에 지개봉부知開封府에서 면직되고 급사중給事中 동제거재경제사고무同提擧在京諸司庫務승전升轉하였다. 이달에 어시진사상정관御試進士詳定官에 충원되니 성상이 “선경善經” 두 글자를 적어 하사하였다. 4월 정묘丁卯일에 상주上奏하여 이번 겨울에 태묘太廟에서 협향祫饗의 예를 성상이 친히 행해야 함을 고하였다.
계유癸酉일에 맹하孟夏세시제향歲時祭享을 올릴 때 섭태위攝太尉를 아울러 맡아 제사祭事를 집행하였다. 병자丙子일에 군목사群牧使에 겸하여 충원되었다. 6월 갑신甲申일에 ≪경우광악기景祐廣樂記≫를 산정刪定하였다. 9월 정유丁酉일에 칙명勅命을 받들어 상국사相國寺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10월 임신壬申일에 성상이 경령궁景靈宮에서 조향朝饗을 올리고 계유癸酉일에 태묘에서 협향을 올릴 때 섭시중攝侍中을 아울러 맡아 제례를 행하였다. 정축丁丑일에 호군護軍이 더해지고 실제 식읍食邑 3백에 봉해졌다.
가우 5년(1060, 인종38) 경자庚子년 54세
4월 정묘丁卯일에 태묘太廟맹하孟夏세시제향歲時祭享을 올릴 때 섭태위攝太尉제사祭事를 집행하였다. 7월 무술戊戌일에 새로 찬수撰修한 ≪당서唐書≫ 250권을 올리고 경자庚子일에 추상推賞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승전升轉하였다. 9월 정해丁亥일에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를 겸하였다. 10월 경오庚午하원절下元節에 성상이 경령궁景靈宮 천흥전天興殿에 행차하여 조배朝拜하고 진종眞宗장의태후章懿太后신어전神御殿조알朝謁할 때 섭시중攝侍中을 맡았다.
11월 신축辛丑일에 추밀부사樞密副使에 배수하고 식읍食邑 5백를 더하고 실제 식읍 2백호에 봉하였다. 갑인甲寅일에 ≪추밀원시정기樞密院時政記≫를 공동으로 찬수하였다. 12월에 거란契丹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도정역都亭驛에서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으로 차임差任되었다.
가우 6년(1061, 인종39) 신축辛丑년 55세
3월 무신戊申일에 후원後苑에 거둥하는 성상을 모시고서 화경정華景亭에서 꽃을 감상하고 함희정涵曦亭에서 낚시하고 태청루太淸樓에서 연회를 가졌다. 8월 신축辛丑일에 호부시랑戶部侍郞 참지정사參知政事승전升轉시키고 개국공開國公진봉進封하고 식읍食邑 5백를 더하고 실제 식읍 2백호에 봉하였는데, 공이 관직의 승진은 사양하니 허락하였다.
9월 경신庚申일에 ≪중서시정기中書時政記≫를 공동으로 찬수撰修하였다. 12월 병술丙戌일에 태묘太廟납향臘享을 올릴 때 섭태위攝太尉제사祭事를 집행하였다.
가우 7년(1062, 인종40) 임인壬寅년 56세
정월 기유己酉일 초하루에 대경전大慶殿에서 조하朝賀할 때 섭시중攝侍中이 되어 성지聖旨를 받들어 제명制命을 선포하였다. 3월 을묘乙卯일에 남교南郊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 섭태위攝太尉제사祭事를 집행하였다. 신유辛酉일에 삼관三館비각秘閣에서 서적書籍을 필사하고 교정하는 일을 관장하고 동역경윤문同譯經潤文이 되었다.
4월 임오壬午일에 ≪가우편칙嘉祐編勅≫을 올렸다. 7월 경술庚戌일에 명당로부사明堂鹵簿使로 차출되었다. 9월 무신戊申일에 문덕전文德殿에서 주청치재奏請致齋를 할 때 섭시중이 되어 중엄中嚴외판外辦을 아뢰었다.
기유己酉일에 경령궁景靈宮에서 조향朝饗하고 경술庚戌일에 태묘太廟에서 조향할 때 모두 섭사도攝司徒를 맡았다. 신해辛亥일에 명당明堂에서 대향大饗을 올리고 기미己未일에 정봉대부正奉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주국柱國이 더해지고 이어서 추충좌리공신推忠佐理功臣을 하사받았다.
12월 병신丙申일에 성상이 용도각龍圖閣천장각天章閣에 거둥하여 보신輔臣대제待制, 삼사三司부사副使 이상 관원, 대간관臺諫官, 황자皇子, 종실宗室, 부마도위駙馬都尉, 관군管軍을 불러 삼성三聖어서御書를 관람하고 또 보문각寶文閣에 거둥하여 친히 비백서飛白書를 써서 신하들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다.
공은 ‘’자를 큰 글씨로 쓴 쌍폭雙幅을 얻었는데 아래에는 어압御押이 있고 어보御寶를 찍었으며, 왕규王珪가 글자 곁에 “가우어찰사구양수嘉祐御札賜歐陽脩(가우어찰嘉祐御札구양수歐陽脩에게 하사한다.)”라는 여덟 글자를 적고, 비단 끝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왕규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하사받은 신하의 이름을 쓴다.”라고 적었다. 또 성상이 지은 〈관서觀書〉 시 한 수를 꺼내어 신하들에게 화답하게 하고注+공이 화답한 시가 〈외집外集〉에 실려 있다. 마침내 군옥전群玉殿에서 연회를 열었다.
경자庚子일에 다시 근신近臣삼관三館의 신료들을 불러 천장각으로 가서 삼조三朝서물瑞物, 태종太宗진종眞宗어집御集을 관람하고 다음으로 보문각으로 가서 어비백서御飛白書를 관람하고 공에게 김화전金花牋에 적은 글자를 하사하고 다시 군옥전에서 연회를 열었다. 며칠 뒤 공이 사장謝狀을 올려 시로 사례하였다.注+사장謝狀사륙집四六集에 실려 있고 시는 거사집居士集에 실려 있다.
살펴보건대 두 연회 때 모두 글을 하사하였는데, ≪실록實錄≫과 범촉공范蜀公(범진范鎭)의 ≪동재기사東齋記事≫에는 병신丙申일에 하사한 일만 실려 있고, 당시 왕기공王岐公(왕규王珪)이 친히 조명詔命을 받들어 지은 서문序文에도 경자庚子일에 재차 하사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실록≫과 서문에는 또 관직館職의 신하들이 부름에 참여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고 ≪동재기사≫에서만 언급하였다.
공이 육자이陸子履(육경陸經)의 집에 보관된 비백자飛白字기문記文을 쓰면서 군옥전群玉殿에서 하사받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당시 육자리는 집현교리集賢校理를 맡고 있어 ≪동재기사≫의 내용과 부합한다. 다만 이날 공이 어떤 글자를 얻었는지는 모르나 그것이 김화전金花牋에 쓴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나 진무기陳無己(진사도陳師道)의 〈육일당도서시六一堂圖書詩〉에 “누른 비단의 두 대자大字”라고 한 것은 또 어째서인가? 한충헌공韓忠獻公(한기韓琦)의 사시謝詩에 “난새는 궁초宮綃를 스치며 춤춘다.”라고 하였고 호문공공胡文恭公(호숙胡宿)은 〈사어비백선자謝御飛白扇子〉 시를 지었으니,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아 하사한 물건이 혹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실록≫에는 23일 병신丙申일과 27일 경자庚子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기공岐公의 서문에는 무신戊申일과 임자壬子일이라고 되어 있으니 응당 이처럼 차이가 날 수는 없다. 분명 전사傳寫 과정의 착오일 것이다.注+기공岐公의 〈재관서再觀書〉 시에 “황금을 바른 종이에 글씨 쓰는 것을 보네.”라고 하였고, 또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司馬光)의 ≪속수기문涑水記聞≫에도 두 번 비백飛白을 하사한 일이 실려 있다.
이달에 도정역都亭驛에서 거란契丹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으로 차출되었다.
가우 8년(1063, 인종41) 계묘癸卯년 57세
2월 을해乙亥일에 칙명勅命을 받들어 심귀비책례사沈貴妃冊禮使충임充任되었다.注+행례行禮에 이르지는 않았다. 4월 임신壬申일에 영종英宗이 즉위하였다. 갑술甲戌일에 칙명을 받들어 대행황제大行皇帝(인종仁宗)의 애책哀冊시보謚寶를 썼다.
갑신甲申일에 황제가 은택을 널리 베풀어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승전升轉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식읍食邑 5백가 더해지고 실제 식읍 2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좌리공신推忠協謀佐理功臣을 하사받았다.
을유乙酉일에 칙명을 받들어 수명보受命寶전자篆字로 쓰니 “황제공응천명지보皇帝恭膺天命之寶”라는 글이었다. 5월 무진戊辰일에 황제를 위하여 남교南郊에서 복을 빌 때 섭태위攝太尉제례祭禮를 집행하였다. 7월 무신戊申일에 도정역都亭驛에서 거란契丹제조사祭吊使에게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이 되었다.
8월 계사癸巳일에 칙명을 받들어 대행황제의 시보를 전자로 쓰니 “신문성무명효황제지보神文聖武明孝皇帝之寶”라는 글이었다. 10월 을유乙酉일에 태묘太廟의 증축 수리가 완성되자 명하여 7실七室에 고하게 하였다. 12월 경오庚午일에 도정역에서 거란의 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어연을 베풀 때 압반관이 되었다.
치평治平 원년(1064, 영종英宗1) 갑진甲辰년 58세
4월 갑오甲午일에 칙명勅命을 받들어 사직社稷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5월 무진戊辰일에 특명으로 이부시랑吏部侍郞승전升轉되었다. 8월 신축辛丑일에 칙명을 받들어 태사太社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12월 임자壬子일에 도정역都亭驛에서 거란契丹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으로 차출되었다.
치평 2년(1065, 영종2) 을사乙巳년 59세
이해 봄에 표문表文을 올려 외직外職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4월 신축辛丑일에 경령궁景靈宮인종仁宗어용御容을 봉안하면서 성상이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 섭시중攝侍中이 되었다. 8월에 큰 비가 내린 일로 재차 사직辭職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9월 신유辛酉일에 태상례서太常禮書 100권의 편찬을 주관한 일이 완성되자 조명詔命으로 ≪태상인혁례太常因革禮≫라 이름하고 은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11월 경오庚午일에 성상이 경령궁에 거둥하여 조향朝饗을 올리고 신미辛未일에 태묘太廟에 제향하고 임신壬申일에 남교南郊에 제사할 때 섭사공攝司空으로 제례祭禮를 집행하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상주국上柱國식읍食邑 5백를 더하였다.
치평 3년(1066, 영종3) 병오丙午년 60세
3월 3일에 상사연上巳宴을 내리니 당시 처음으로 ≪명천력明天曆≫을 반포할 때가 마침 정사丁巳일이었다. 이달에 언관言官복의濮議사설邪說로 지목하니 공이 힘써 사직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7월 계유癸酉일에 태묘太廟에 제향을 올릴 때 섭태위攝太尉제례祭禮를 집행하였다.
12월 계미癸未일에 칙명勅命을 받들어 황제皇帝존호보尊號寶전자篆字로 쓰니, “체건응력문무광효황제지보體乾膺曆文武廣孝皇帝之寶”라는 글이었다. 을사乙巳일에 도정역都亭驛에서 거란契丹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이 되었다.
치평 4년(1067, 영종4) 정미丁未년 61세
정월 정사丁巳일에 신종神宗이 즉위하였다. 무진戊辰일에 황제가 널리 은혜를 베풀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승전升轉하고 특진特進으로 품계가 오르고 식읍食邑 5백가 더해지고 실제 식읍 2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동덕좌리공신推忠協謀同德佐理功臣을 하사받았다.
2월에 셋째 아들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이달에 어사御史 팽사영彭思永장지기蔣之奇가 유언비어로 공을 더럽히니 성상이 무함誣陷임을 살피고 물리쳤는데 공이 힘써 사직을 청하였다. 3월 임신壬申일에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에 제수되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지박주知亳州승전升轉하고 추성보덕숭인익대공신推誠保德崇仁翊戴功臣으로 고쳐 하사받았다.
3월 신사辛巳일에 첨서선휘원사僉書宣徽院事 주박공사駐泊公事가 되고 하직 인사를 올릴 때 편도便道영주潁州에 들러 잠시 머물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5월 갑진甲辰일에 박주에 당도하였다. 6월 무신戊申일에 공무를 시작하였다.
희령熙寧 원년(1068, 신종神宗1) 무신戊申년 62세
이해에 연이어 표문表文을 올려 치사致仕를 청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8월 을사乙巳일에 병부상서兵部尙書승전升轉하고 지청주知靑州개차改差되고 경동동로안무사京東東路安撫使충임充任되었다. 9월 병신丙申일에 청주靑州에 당도하였다. 11월 정해丁亥일에 성상이 교사郊祀를 지내고 은혜를 베풀어 식읍食邑 5백를 더하고 실제 식읍 2백호에 봉했다. 이해에 영주潁州에 집을 지었다.
희녕 2년(1069, 신종2) 기유己酉년 63세
3월에 내시 왕연경王延慶편도便道로 와서 성상의 말을 전하며 위문慰問하고서 향약香藥은합銀合을 하사하고 또 새로 교정한 ≪전한서前漢書≫까지 하사하니 공이 이 책의 교정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겨울에 개인적인 생활의 편의를 위해 수주壽州의 관직을 청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희녕 3년(1070, 신종3) 경술庚戌년 64세
4월 임신壬申일에 검교태보檢校太保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 판태원부判太原府 하동로경략안무감목사河東路經略安撫監牧使를 제수하고 대주代州택주澤州노주潞州인주麟州부주府州남주嵐州석주로石州路병마도총관兵馬都總管을 아울러 겸하게 했는데 공이 완고하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7월 신묘辛卯일에 지채주知蔡州개차改差되었다. 9월 갑인甲寅일에 채주蔡州에 당도하였다. 이해에 육일거사六一居士로 호를 고쳤다.
희녕 4년(1071, 신종4) 신해辛亥년 65세
공이 채주蔡州에서 여러 차례 소장을 올려 나이가 들어 사직해야 함을 고했는데 6월 갑자甲子일에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 태자소사太子少師치사致仕하고 7월에 영주潁州로 돌아왔다. 8월에 명당明堂에서 제사祭祀하려 할 때 조명詔命으로 궐에 나와 배위陪位하게 하였는데 공이 소장을 올려 임무를 면해달라 청하니 조정에서 따랐다. 명당의 제례를 지낸 후 공에게 옷과 띠와 기물과 폐백과 제사고기를 하사하였다.
희녕 5년(1072, 신종5) 임자壬子년 66세
7월 경오庚午일에 공이 훙서薨逝하였다. 8월 정해丁亥일에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증직하였다.
희녕 7년(1074, 신종7) 8월에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注+시의諡議부록附錄에 보인다.
희녕 8년(1075, 신종8) 9월 을유乙酉일에 개봉부開封府 신정현新鄭縣 정현향旌賢鄉에 장사 지냈다.
원풍元豐 3년(1080, 신종13) 12월에 아들이 조정에 나아가 국가의 대례大禮를 만나 태위太尉를 증직하였다.
원풍元豐 원년(1085, 신종18) 12월에 태사太師를 증직하고 강국공康國公추봉追封하였다.
소성紹聖 3년(1096, 철종哲宗11) 5월에 연국공兗國公추봉追封하였다.
숭녕崇寧 3년(1104, 휘종徽宗3)에 진국공秦國公추봉追封하고, 정화政和 3년(1113, 휘종13)에 초국공楚國公추봉追封하였다.注+모두 아들 교은郊恩을 만났기 때문이다.
문충공文忠公연보年譜는 한 종류가 아닌데 오직 동천桐川 설제의薛齊誼여릉廬陵 손겸익孫謙益증삼이曾三異 세 사람의 것이 상세하니, 비록 구례舊例를 준용하였으나 매번 저술著述을 나열하면서 문장력의 선후先後를 고찰하였다. 그러나 공의 저작이 다 실리지 못했으니 차서次序에 어찌 의심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공의 증손曾孫 건세建世칙서勅書차자箚子로 연대 순서를 맞춘 것조차도 착오가 많거늘 하물며 나머지 사람이겠는가. 이제 여러 연보를 참고하고 사적史籍을 두루 채집한 다음 공의 글에 맞추어보았다.
무릇 〈거사집居士集〉과 〈외집外集〉은 각각 목록에 작품을 지은 연도와 달을 적고, 알 수 없는 것은 빼놓았으며, 주의奏議표장表章 종류는 편마다 주석하여 문집 153권으로 찬정撰定하였다.
〈거사집〉 50권은 공이 찬정한 것이므로 머리에 두고 〈외집〉 25권은 그 다음에 두고 〈역동자문易童子問〉 3권,注+시본의詩本義〉가 별도로 세상에 유행한다.외제집外制集〉 3권, 〈내제집内制集〉 8권, 〈표주서계사륙집表奏書啟四六集〉 7권, 〈주의奏議〉 18권, 〈잡저술雜著述〉 19권, 〈집고록발미集古錄跋尾〉 10권은 또 그 다음에 두고 〈서간書簡〉 10권은 마지막에 두었다.
공의 행장行狀을 살펴보건대 오직 〈귀영집歸榮集〉 1권이 빠졌는데 왕왕 〈외집〉에 흩어져 있고 다시 널리 수집하기를 기다린다. 별도로 〈부록附錄〉 5권이 있으니 공의 덕업德業을 기록하였다. 이 연보는 전적으로 공의 출처出處를 서술하되 글이 간이簡易하고 사적이 대강 갖추어져 있으니, 살펴보는 사람이 응당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원慶元 2년(1196, 영종寧宗2) 2월 15일에 군인郡人 등사랑登仕郞 호가胡柯는 삼가 쓴다.


역주
역주1 終都官員外郞 : 본 譯書 4책의 〈尙書都官員外郞歐陽公墓誌銘〉에 따르면, 歐陽曄은 分司西京을 兼帶하던 중에 隨州에서 家居를 허락받았으며, 가거하던 도중 도관원외랑으로 승진하여 致仕하고서 景祐 4년(1037) 4월 9일에 졸하였다.
역주2 石言于晉……新鬼大而故鬼小 : 돌이 말했다는 것은 ≪春秋左氏傳≫ 昭公 8년 기사에 보이고, 신이 내려왔다는 것은 莊公 32년 기사에 보이고, 문 안팎의 뱀은 장공 14년 기사에 보이고, 귀신은 文公 2년 기사에 보인다. 모두 괴이하고 虛誕한 사건들이다.
역주3 官韻 : 과거를 볼 때 답안에 넣도록 官에서 정한 운을 말한다. 宋나라 때는 ≪禮部韻略≫이 있어 이를 표준으로 삼았다.
역주4 自隨州薦名禮部 : 당시 시험 절차상 州에서 보는 秋試를 통해 貢士로 선발되어 禮部로 명단이 보내지는 것을 말한다.
역주5 : 정식 임명되기 전에 임시로 맡는 벼슬을 가리키는 말로 試官, 試秩이라고 한다.
역주6 ) [역주] 詳見附錄後謝希深與梅聖俞書 : ≪文忠集≫ 附錄 권4의 〈遊嵩山寄梅殿丞書〉를 가리킨다.
역주7 莊獻劉后莊懿李后祔(부)葬定陵 : 莊獻皇后는 眞宗의 妃로 진종 사후에 황태후로서 攝政하며 정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莊懿皇后는 장헌황후의 궁녀로 들어왔다가 진종의 후궁이 되어 仁宗을 낳았다. 그러나 인종은 장헌황후의 아들로 길러졌고 장의황후는 宸妃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인종이 등극하고 장헌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종의 숙부 趙元儼이 신비가 인종의 생모임을 알려 인종이 황후로 추봉하였다. 定陵은 진종의 능이다.
역주8 三館 : 唐나라 때부터 두었던 昭文館, 集賢館, 史館으로, 宋나라가 그대로 이어받아 太宗 3년(979)에 합쳐서 모두 崇文院 안에 두었다.
역주9 委官 : 특별한 사안으로 인해 임시로 선임한 관원이다.
역주10 倣開元四部 : 開元은 唐 玄宗의 연호이다. 개원 5년(717)에 乾元殿에 學士를 모아 甲乙丙丁 四部의 서적을 經史子集의 四庫로 만들고 8명의 관원을 두어 관장하도록 하였다.(≪舊唐書≫ 卷47 〈經籍志下〉)
역주11 待次 : 관리에게 관직을 임명한 후 차례에 따라 경력과 자격을 살펴 闕員에 補任하는 것이다. 또한 이 기간 동안 관리가 대기하는 것을 가리킨다.
역주12 同修禮書 : ≪宋史全文≫ 卷7下에 따르면 이때 館閣校勘 刁約과 구양수에게 禮書를 함께 편수하게 하였다.
역주13 攝太常博士 : 攝은 攝職의 의미로 특정한 일을 위해 임시적으로 직무를 맡는 것이다. 본 연보에서는 대체적으로 祭禮 때 한시적으로 맡은 祭官의 職官에 이 표기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역주14 考試別頭擧人 : 唐宋 때에 과거 응시자가 試官과 親故 관계가 있거나 기타 이유로 避嫌의 사유가 있는 경우 이런 사람들에 대해 따로 치르던 시험을 別頭試라 했다.
역주15 應天以實不以文 : 漢 哀帝 때 승상인 王嘉가 “신은 듣건대 백성을 감동시킬 때에는 행동으로 하고 말로 하지 않으며, 하늘에 응답할 때에는 실제로써 하고 겉치레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臣聞動民以行不以言 應天以實不以文]”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漢書≫ 卷45 〈蒯伍江息夫傳〉) 당시 구양수가 지은 글이 ≪文忠集≫ 권74 〈進擬御試應天以實不以文賦〉이다.
역주16 契丹遣泛使求關南地 : 泛使는 宋代에 사용되던 용어로 他國에 파견되어 와서 임시로 사무를 처리하던 사신을 가리킨다. 關南은 지금의 河北省 雄縣 서남쪽에 있던 瓦橋關 남쪽을 가리킨다.
역주17 顏眞卿使李希烈事 : 唐 德宗 때 李希烈이 汝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顏眞卿을 미워하던 盧杞가 안진경을 보내 반란군을 회유하자고 건의하였다. 사람들이 안진경을 만류하였으나 안진경은 皇命을 거역할 수 없다 하여 이희열에게 가서 그를 설득하였는데, 이희열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충절을 지키다가 죽었다.(≪新唐書≫ 卷153 〈安眞卿列傳〉)
역주18 (上)[至] : 저본에는 ‘上’으로 되어 있으나, ≪文忠集≫에 의거하여 ‘至’로 바로잡았다.
역주19 緋衣銀魚 : 緋衣는 紅色의 관복으로 宋나라 때 4품은 짙은 緋色의 관복을 입고 5품은 옅은 緋色의 관복을 입었다. 銀魚는 銀魚符라고도 하는데, 은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符信이다. 5품 이상의 관원이 차고 다니는 것으로 品級과 신분을 표시하기도 하고 宮門 및 城門을 출입하는 符信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역주20 己巳同詳定國朝勳臣名次……擢同修起居注 : 이 구문에서 同詳定, 同修 등을 풀어 쓸지 관명으로 쓸지 원문의 구조만 두고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다만 同修起居注는 확실하게 ≪宋史≫ 〈職官志〉에 보이므로 관명으로 쓸 수 있다. 同詳定國朝勳臣名次와 同修三朝典故의 경우에도 國朝勳臣名次나 三朝典故를 편찬하는 임시적인 직무 앞에 同詳定, 同修를 붙여 쓴 관직명이라 볼 수도 있다. 宋代의 官制는 복잡하고 그 표기 역시 다단하므로 본 연보에서는 우선 〈직관지〉에 명확히 보이는 관직과 다수의 용례가 있는 경우 및 문맥에 따라 명사형 관직명으로 표기하고 그 외에는 풀어 번역하였다. ≪續資治通鑑長編≫ 권143에 따르면 이때 天章閣侍講 王洙와 함께 國朝勳臣의 名次를 상세하게 정하였고, ≪資治通鑑後編≫ 권53에 따르면 이때 富弼이 관원을 정해 三朝의 典故를 취합하여 책으로 만들 것을 청하여 그후 王洙와 余靖과 孫甫와 歐陽脩 등에게 명하여 ≪祖宗故實≫을 함께 편수하게 하였다.
역주21 召試知制誥 : 특별히 황제가 관원을 불러 면대하여 시험해보고 관직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宋代에 知制誥는 관례상 시험을 거쳐 선임되었다.
역주22 編勅 : 宋나라 때 특히 勅命에 의해 成文된 법률을 가리키던 말로, 관습법에 해당하는 祖宗法에 대비되는 것이다.
역주23 西太一宮 : 道家의 天神인 太一을 받드는 宮觀으로, 宋代에는 東太一宮과 西太一宮을 두었다.
역주24 紫章服 : 자줏빛의 章服이다. 章服은 日月星辰 등을 수놓은 禮服으로 章은 장식의 단위가 된다. 天子는 12章이었고 신하들은 品級에 따라 9章, 7章, 5章, 3章의 차등이 있었다.
역주25 登聞檢院 : 宋代에 門下省에 딸린 기관으로 관원과 백성들이 올린 章奏表疏를 관장하였다. 登聞檢院과 함께 登聞鼓院이 있었는데 먼저 등문고원에 上訴하고 이에 불복하면 등문검원으로 올라갔다.
역주26 押伴 : 외국 사신을 인도하여 접대하는 일이다.
역주27 廢麟州 : 麟州는 唐나라 때 설치한 행정구역으로 陝西省과 甘肅省의 경계에 있었으며 宋代에 西夏와 맞닿은 邊塞였다. 인주를 폐하는 일에 대해서는 〈先公事跡〉에 보인다.
역주28 礬(반)課 : 礬石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반석은 유황이 함유된 광물의 일종으로 염료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역주29 南郊恩 : 郊恩은 郊祭를 지내고 황제가 관례적으로 신하와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푸는 것이다.
역주30 眞定帥田況移秦州 公權府事者三月 : 당시 知成德軍眞定府였던 田況이 保州의 반란을 평정하고 知秦州가 된 것을 가리킨다. 〈先公事跡〉에 근거할 때 보주 사건 당시 구양수는 權知鎭州府事로 있으면서 보주 사건의 사후 처리를 맡았다.
역주31 二府 : 中書省과 樞密院이다.
역주32 孤甥張氏犯法 : 孤甥이라 한 것은 당시 張氏의 부친 張龜正이 세상을 떠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張龜正이 세상을 떠난 후 구양수의 누이는 죽은 남편의 전처 소생인 장씨를 데리고 구양수에게 의지하였고, 누이의 의붓딸인 장씨가 성장하자 구양수가 族兄의 아들 歐陽晟에게 시집보냈는데, 장씨가 구양성의 노비와 사통하는 일이 발생했다. 구양수의 政敵들이 이 일을 구양수와 연결시키려다 여의치 않자 마침내 구양수가 장귀정의 재산을 편취했다고 모함하였다. 〈先公事跡〉의 譯註에 자세하다.
역주33 明堂覃恩……加輕車都尉 : 이때 올린 謝表가 본 譯書 2책의 〈謝明堂覃恩轉官表〉이다.
역주34 約梅聖俞買田於潁 : 구양수가 이때 應天府에 부임하면서 潁水를 거슬러 올라갔는데 潁州가 좋은 곳임을 알고 그리워하며 梅堯臣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장차 맑은 영수 가에 전답을 사서 그대와 함께 서로 짝하여 호미잡고 밭을 갈리.[行當買田淸潁上 與子相伴把鋤犁]”라고 하였다.(≪文忠集≫ 卷5 〈寄聖俞〉)
역주35 起復(복) : 부모의 喪中에 있는 관원을 다시 出仕시키는 것을 말한다.
역주36 會小人詐爲公奏請汰內侍……以胡宗堯不當改官事中公 : 모두 〈先公事跡〉에 자세하다.
역주37 朝饗景靈宮天興殿 : 朝饗은 朝享으로도 쓴다. 追享과 더불어 禘祫(체협)의 제사에 해당하며 遷廟한 遠祖의 신주와 아직 천묘하지 않은 近祖의 신주를 한곳에 모셔 놓고 지내는 大祭이다. 景靈宮은 宋 眞宗이 太祖가 臨御했던 곳이라 하여 궁을 세우고 天地와 社稷과 宗廟의 제사를 지낸 곳이다.
역주38 孝惠孝章淑德章懷皇后廟 : 孝惠皇后와 孝章皇后는 太祖, 淑德皇后는 太宗, 章懷皇后는 眞宗의 황후이다.
역주39 上書論宰相陳執中 : 〈先公事跡〉에 자세하다.
역주40 權發遣 : 맡은 직무보다 품계가 2등급이 낮을 때 관직 앞에 붙이는 명칭이다.
역주41 神御殿 : 宗廟 이외의 별도의 사당인 原廟를 가리키는 말로, 선대 제왕의 御容과 신주를 봉안하고 歲時에 제사 지내던 곳이다.
역주42 恭謝禮 : 황제가 거행하는 郊祭 등의 큰 의식이다.
역주43 磨勘 : 마감은 관리의 功績을 심사하여 이에 따라 승진과 좌천을 결정하는 행위를 가리키기도 하고, 鄕試와 會試의 試券을 심사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바로 앞에 知貢擧가 되었다고 한 말로 미루어보아 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역주44 狄靑 : 1008~1057. 汾州 西河 사람으로 字는 漢臣, 諡號는 武襄이다. 일반 兵卒 출신으로 발신하여 西夏와의 전쟁에서 혁혁하게 전공을 세웠다. 평민 출신으로 이례적으로 樞密副使에 발탁되었으며 儂智高의 난을 평정하여 樞密使에 올랐다. 빠른 출세와 병사들의 信望으로 인해 의심을 받아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후 죽었다.
역주45 福康公主 : 仁宗의 長女이다.
역주46 候胡宿回依舊 : ≪宋史≫ 卷12 〈仁宗紀〉에 따르면 이해 10월 乙巳일에 胡宿을 契丹으로 사신 보냈다. 이에 의거하면 호숙이 사신 가 있는 동안 구양수가 임시로 知審刑院이 되었던 듯하다.
역주47 啓聖院 : 開封에 있는 宋 太宗의 탄생지에 세운 寺院이다.
역주48 祫(협)饗 : 멀고 가까운 선대 조상의 신주를 모두 太廟에 모아놓고 거행하는 대규모 合祭이다.
역주49 景祐廣樂記 : 翰林侍講學士 馮元등이 편찬한 것으로, 鍾律 등의 樂律을 재정비하여 기록한 책이다.
역주50 推賞 : 관직을 승급시키고 賞給을 수여하는 것이다.
역주51 下元節 : 음력 10월 15일에 해당하는 절기이다. 정월 15일인 上元節, 7월 15일인 中元節과 함께 三元節로 불렸으며 이날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역주52 提擧三館秘閣寫校書籍 同譯經潤文 : “提擧三館秘閣”의 경우 다수의 용례가 있으므로 명사형 관직명으로 표기해도 무방하겠으나 “寫校書籍”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우선 풀어 번역하였다. 宋代에는 傳法院이 있어 佛經의 번역과 윤문을 관장하였다.
역주53 鹵簿使 : 鹵는 방패, 簿는 행렬의 차례를 기록한 장부를 뜻하며, 천자가 거둥할 때 따르는 의장과 행렬을 가리킨다. 鹵簿使는 이러한 일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역주54 奏請致齋 : 祭禮에 앞서 황제에게 절차에 따라 齋戒하기를 奏請하는 것이다.
역주55 中嚴外辦 : 中嚴은 齋戒하는 신호로 북을 칠 때 두 번째에 해당한다. 의식에 앞서 의식에 참여한 이들에게 재계를 위해 세 번 북을 치는 것을 嚴鼓라고 한다. 外辦은 바깥의 의식의 준비가 모두 갖추어져 거둥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역주56 大饗 : 天地神明과 선조에게 올리는 大祭이다.
역주57 三聖 : 宋 太祖, 太宗, 眞宗이다.
역주58 飛白書 : 書法의 일종이다. 後漢 靈帝 때에 鴻都門을 장식하는 匠人이 白粉을 바르는 빗자루로 글자를 썼는데, 蔡邕이 이것을 보고 돌아가 만들었다고 한다. 필획 가운데 마치 실낱을 늘여놓은 것처럼 하얀 부분이 드러나 몽당붓으로 쓴 것 같이 보이는 서법이다.
역주59 金花牋 : 金泥를 박은 최상급의 牋紙이다.
역주60 ) [역주] 公和篇在外集 : ≪文忠集≫ 卷57 〈外集7 觀龍圖閣三聖御書應制〉이다.
역주61 ) [역주] 狀在四六集 詩在居士集 : 狀은 ≪文忠集≫ 卷91 〈表奏書啓四六 謝賜飛白并賜宴詩狀〉이고, 詩는 권13 〈居士集13 群玉殿賜宴〉이다.
역주62 范蜀公東齋記事 止載丙申有賜 : ≪東齋記事≫ 卷1에 보인다.
역주63 王岐公親奉詔爲序 : ≪華陽集≫ 卷46 〈御製龍圖天章閣觀三聖御書詩序〉이다.
역주64 公記陸子履家藏飛白字 : ≪文忠集≫ 卷40 〈仁宗御飛白記〉이다.
역주65 陳無己六一堂圖書詩 : ≪後山集≫ 卷1 〈觀兗文忠公家六一堂圖書〉이다.
역주66 韓忠獻公謝詩 : ≪安陽集≫ 卷9 〈天章閣觀御飛白五言十韻〉이다.
역주67 宮綃(초) : 皇宮에서 만든 가볍고 얇은 비단이다.
역주68 胡文恭公亦有謝御飛白扇子詩 : ≪文恭集≫ 卷1 〈謝御書飛白扇子歌〉이다.
역주69 ) [역주] 岐公再觀書詩 : ≪華陽集≫ 卷2 〈再召至龍圖閣觀書〉이다.
역주70 增修太廟成 命告七室 : ≪宋朝事實≫ 卷6에는 당시 太廟가 제도가 협소하여 이때 증축하여 수리하고서 七室에 다시 神主를 되돌렸는데 參知政事 歐陽脩에게 명하여 이를 고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송조사실≫에는 10월 을유가 아니라 8월 을유로 되어 있다.
역주71 上巳宴 : 上巳는 節日의 하나로 음력 3월 上旬에 巳日이 드는 것이다. 이날 물가에서 몸을 씻고 놀면서 액운을 막았다.
역주72 濮(복)議 : 英宗의 生父인 濮安懿王의 典禮에 대한 논의이다. 영종은 복안의왕의 열셋째 아들로 後嗣가 없는 仁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후 영종은 생부의 崇奉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구양수 등은 복안의왕을 皇考라 불러야 한다 하였고 司馬光 등은 皇伯이라 불러야 한다고 하며 대립하였다.
역주73 特進 : 散官의 品階 가운데 하나이다.
역주74 御史彭思永蔣之奇以飛語污公 : 〈先公事跡〉에 자세하다.
역주75 3) 便道 : 順路의 뜻으로, 원래 가는 행로에서 별도의 길을 통해 다른 곳에 들르는 것이다.
역주76 乞壽州便私計 : 壽州가 潁州와 가깝기 때문에 이런 청을 한 것이다.
역주77 以子升朝 : 당시 奉議郞 輕車都尉였던 長子 歐陽發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7)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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