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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眞寶前集

고문진보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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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磨崖碑
黃庭堅(山谷)
碑在道州浯溪上하니 刺史元結 製頌이요 顔眞卿하니 磨崖石而刻之 〇 唐天寶十四載 安祿山 陷洛陽하고 明年陷長安한대 玄宗幸蜀하고 太子卽位於靈武 明年 皇帝移軍鳳翔하여 其年 復兩京하고 上皇 還京師하니 元結 刻頌於浯溪石하니라
春風吹船著浯溪하니
扶藜上讀
平生半世看터니
摩挲石刻鬢如絲
明皇不作苞桑計하여注+苞桑計 : 易 其亡其亡이라야 繫于苞桑이라하니라
顚倒四海由祿兒注+祿兒 : 安祿山 本營州雜胡 出入禁中하여 通於貴妃하고 因請爲貴妃兒하니라
不守乘輿西하니
萬官奔竄鳥擇栖
撫軍監國太子事注+撫軍監國太子事 : 古 太子君行則守하고 有守則從하니 從曰撫軍이요 守曰監國이라
何乃取大物爲注+何乃趣(促)取大物爲 : 大物 帝位 〇 譏肅宗無所受命而自立이라

跼蹐還京師
內間張后色可否
外間李父頤指揮注+內間張后色可否 外間李父頤指揮 : 肅宗 立皇后張氏러니 私與政事하고 與李輔國相助하여 多以私謁撓權호되 帝不能制하니라
南內注+南內 : 唐長安三內 皇城 在西하니 曰西內 大明宮 在西內之東하니 曰東內 興慶宮 在東內之南하니 曰南內 肅宗旣立 尊明皇曰太上皇이라하다 自蜀歸하여 愛興慶宮하여 遂居之러니 李輔國 矯詔하여 遷上皇於西內하니라凄凉幾苟活이요
去事尤危
臣結舂陵二三策이요
臣甫杜鵑再拜詩
安知忠臣痛至骨
後世但賞瓊琚詞
同來野僧六七輩
亦有文士相追隨
斷崖蒼蘚對立久하니
涷雨爲洗
磨崖碑에 쓰다
황정견(산곡)
磨崖碑는 道州 浯溪의 위에 있으니, 자사인 元結이 頌을 지었고 顔眞卿이 글씨를 썼는 바, 벼랑의 돌을 갈아 새겼다.
〇 唐나라 天寶 14년(755)에 安祿山이 洛陽을 함락시키고 다음해에 長安을 함락시키니, 玄宗은 蜀땅으로 파천하였고 태자가 靈武에서 즉위하였다. 다음해에 황제는 군대를 鳳翔으로 이동시켜 이 해에 兩京(長安과 洛陽)을 수복하고 上皇이 京師로 돌아오니, 원결이 〈大唐中興頌〉을 지어 오계의 돌에 새겼다.
봄바람 배에 불어 浯溪에 도착하니
靑藜杖 짚고 올라가 中興碑 읽노라.
평소 半世 동안 墨本 보았는데
비석 어루만지는 지금 귀밑머리 실처럼 세었네.
明皇은 苞桑의 계책注+《周易》〈否卦 九五爻辭〉에 “망할까 망할까 하고 조심하여야 총생하는 뽕나무에 매어놓은 것처럼 국가가 튼튼하다.” 하였다. 하지 아니하여
四海가 顚倒되니 安祿山 아이注+安祿山은 본래 營州의 雜胡인데, 궁중에 출입하면서 楊貴妃와 사통하고 인하여 양귀비의 아들이 되기를 청하였다. 때문이라오.
아홉 사당 지키지 못하고 乘輿가 서쪽으로 播遷하니
수많은 관원들 도망하여 새가 둥지 찾듯 하였네.
군사들 어루만지고 나라 지킴 太子의 일이니注+옛날에 태자는 군주가 행차하면 나라를 지키고 지킬 사람이 있으면 군주를 수행하였으니, 수행하면 撫軍이라 하고 지키면 監國이라 하였다.
어찌하여 빨리 帝位 취하였는가.注+大物은 황제의 지위이다.
〇 肅宗이 명령을 받은 바가 없이 스스로 즉위하였음을 풍자한 것이다.

지극히 어려운 일 하였으나 天幸일 뿐이니
上皇은 위축되어 京師로 돌아왔네.
안에서는 張后가 얼굴빛으로 可否를 결정하고
밖에서는 李輔國이 턱으로 지휘하였다오.注+肅宗이 皇后 張氏를 세웠는데, 사사로이 정사에 간여하고 李輔國과 서로 도와서 請託으로 권세를 어지럽히는 일이 많았으나 황제가 이를 제재하지 못하였다.
南內注+唐나라 長安에는 三內가 있었으니 皇城이 서쪽에 있었으므로 西內라 하였고, 大明宮은 동쪽에 있었으므로 東內라 하였고, 興慶宮은 東內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南內라 하였다. 숙종이 즉위한 다음 明皇을 높여 太上皇이라 하였다. 상황은 蜀땅으로부터 돌아와서 興慶宮을 사랑하여 마침내 거주하였는데, 뒤에 李輔國이 詔勅을 위조하여 上皇을 서내로 옮겼다.
가 처량하여 거의 구차히 살아갔으며
高將軍이 떠나가자 일이 더욱 위태로웠네.
臣 元結은 舂陵行 두세 쪽 올렸고
臣 杜甫는 杜鵑詩 재배하고 올렸다오.
어찌 忠臣들의 애통함 뼈에 사무침 알겠는가
후세에는 다만 옥같은 文章만 감상하네.
함께 온 野僧 육칠 명이요
또한 文士들 서로 따라왔다오.
절벽의 푸른 이끼 오랫동안 서서 대하니
소낙비 내려 前朝의 슬픔 씻어주네.
賞析
이 시는《山谷詩注》20권에 실려 있는데, 제목이〈書磨崖碑後〉로 되어 있다. 山谷이 60세 때인 崇寧 3년(1104) 3월에 磨崖碑를 보고 당시의 사적을 생각하여 지은 것이다. 마애비는 唐나라의 中興碑로 肅宗이 천하를 수복한 공을 절벽의 바위를 갈아 비로 만든 것인데, 元結이 頌을 짓고 顔眞卿이 글씨를 써서 돌에 새겼다. 元結의〈大唐中興頌〉은 본서의 후집 2권에 보인다.
역주
역주1 中興碑 : 곧 磨崖碑로 이 비문의 명칭이〈大唐中興頌〉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중흥은 멸망할 지경에 이른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움을 이른다.
역주2 墨本 : 먹으로 찍어낸 拓本을 이른다.
역주3 九廟 : 아홉 사당으로 원래 天子는 일곱 개의 사당을 모시는데, 당시 玄宗은 宣皇帝를 獻祖라 칭하고 光皇帝를 懿祖라 칭하여 아홉으로 만들었다.
역주4 : 促
역주5 事有至難天幸耳 : 元結의〈大唐中興頌〉에 “지극히 어려운 일을 하였으니, 宗廟가 다시 편안하고 玄宗과 肅宗 두 임금이 거듭 기뻐하였다.[事有至難 宗廟再安 二聖重歡]” 하였는 바, 이 말을 빌어 正道로 천하를 얻은 것이 아니요 다만 天幸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역주6 上皇 : 玄宗을 가리킨다. 당시 肅宗은 玄宗이 成都로 피난가자, 父皇의 명령도 없이 靈武에서 즉위하고 현종을 太上皇이라 칭하였다. 이후로 현종은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역주7 高將軍 : 右監門衛將軍으로 있던 高力士를 이른다. 고역사는 宦官 출신으로 玄宗의 신임이 두터웠는데 현종이 實權을 잃고 西內로 거처를 옮긴 지 10일 만에 李輔國에게 모함을 당하여 삭탈관직되고 巫州로 유배되었다. 李德弘의《艮齋集》續集 4권에 “上皇(玄宗)이 南內로 옮겨 兩宮(玄宗과 肅宗)의 일을 측량할 수가 없었다. 高力士가 상황의 옛 內侍로서 그 둘 사이에서 調律하였는데, 고역사가 죄를 지어 떠나자 상황의 형세가 더욱 위태롭게 되었다.” 하였다.
역주8 前朝 : 前王朝로 이 글을 지은 이가 宋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唐나라를 전조라 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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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마애비 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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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전집 책은 2017.12.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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