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陵新亭
李白
金陵은 漢改秣陵하고 吳改建業하고 東晉改建康하고 隋改昇州하고 宋復改建康하고 元文宗改集慶하고 今爲應天府하니 吳東晉宋齊梁陳南唐建都之地라 元建江南諸道行御史臺於此라 故俗猶稱南臺云이라
金陵風景好
하니豪士集
이라擧目山河異
하니偏傷周顗
注+周顗 : 周顗는 字伯仁이니 山東人이라 東晉永昌初에 僕射하니라情
이라四坐
悲
하고不憂社稷傾
이라王公何慷慨
오注+ 王公何慷慨 : 王公은 名導요 字茂弘이니 琅耶人이라 相元帝中興하니 諡文獻公이라 按王導傳에 過江人士每至暇日이면 相邀하여 出新亭飮宴이러니 周顗中坐而嘆曰 風景은 不殊나 擧目에 有山河之異라하니 皆相視流涕하다 惟導愀然變色曰 當共戮力王室하여 克復神州니 何至作楚囚相對而泣耶아한대 衆收淚謝之하니라千載仰雄名
이라
金陵의 새 정자에서
이백
金陵은 漢나라는 秣陵이라 개칭하고 吳나라는 建業이라 개칭하고 東晉은 建康이라 개칭하고 隋나라는 昇州라 개칭하고 元나라 문종은 集慶이라 개칭하고 지금은 應天府가 되었으니, 오나라와 東晉ㆍ宋ㆍ齊ㆍ梁ㆍ陳ㆍ南唐이 도읍했던 곳이다. 元나라는 江南 諸道의 行御史臺를 이곳에 세웠다. 그러므로 세속에서 南臺라고 칭한다.
金陵은 풍경이 좋으니
호걸스러운 선비들 새 정자에 모였네.
눈을 들어 바라보니 山河가 옛날과 달라
유독 周顗
注+주의는 자가 백인이니 산동 사람이다. 東晉의 永昌 초년에 僕射(복야)가 되었다.의 마음 서글프게 하였네.
四方의 坐客들 楚나라 죄수처럼 슬퍼하고
社稷이 기욺 걱정하지 않았다오.
王公은 어이 그리 강개한가.
注+王公은 이름이 導요 자가 茂弘이니 낭야 사람이다. 元帝를 도와 중흥하게 하니 시호가 문헌공이다. 《王導傳》을 살펴보면 揚子江을 넘어온 人士들이 언제나 한가로운 날에는 서로 맞이하여 新亭에 나와 잔치하며 술을 마셨는데, 주의가 그 가운데 앉아 한탄하기를 “풍경은 다르지 않으나 눈을 들어 바라보면 山河의 다름이 있다.” 하니,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서로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 오직 왕도가 서글피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마땅히 함께 왕실에 힘을 다하여 神州를 수복하여야 할 것이니, 어찌 楚나라 죄수가 마주 대하고 우는 짓을 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은 눈물을 거두고 사례하였다.천년 뒤에 그의 훌륭한 이름 우러르네.
賞析金陵은 南京의 옛 이름인 바, 南朝의 수도로 오랫동안 번성했던 곳이나 陳나라가 멸망한 후로 황폐해지고 말았다. 이 시의 전반부는《晉書》〈王導傳〉의 기록을 그대로 서술하였고 마지막 두 구는 작자의 感慨를 함축하여 표현하였는데, 이는 이백 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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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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