莫相疑行
杜甫
郭英(義)[乂]倅蜀하니 公與英乂不合하여 去成都時作이라
男兒生無所成頭皓白
하니牙齒欲落眞可惜
이라憶獻三賦蓬萊宮
하니注+憶獻三賦蓬萊宮 : 明皇天寶中에 太淸宮하고 享廟及郊하니 甫時獻하니라自怪一日聲輝赫
이라集賢學士如堵墻
하여觀我落筆中書堂
이라往時文彩動人主
러니此日飢寒趨路傍
이라나當面輸心背面笑
라寄謝悠悠世上兒
하노니不爭好惡莫相疑
하라
의심하지 말아달라고 읊은 노래
두보
郭英乂가 蜀땅의 원이 되었는데, 공이 곽영예와 뜻이 맞지 않아 成都를 떠날 때에 지은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 이룬 것 없이 머리만 희어지니
치아가 빠지려 해 참으로 애석하네.
저 옛날 蓬萊宮에 세 大禮賦 바쳤던 일 생각하니
注+明皇 天寶年間에 太淸宮에 朝獻하고 종묘에 제향하고 郊祭를 올리니, 杜甫가 이 때에 三大禮賦를 지어 올렸다.하루 아침에 명성이 빛남 스스로 괴이하게 여겼노라.
集賢殿의 학사들 담처럼 둘러서서
내가 中書堂에서 붓 들어 글 쓰는 것 구경하였네.
지난날에는 아름다운 文章 임금을 감동시켰는데
오늘날에는 굶주리고 헐벗으며 길가를 달리누나.
말년에 末契 가지고 少年에게 의탁하려 하나
대면하면 마음 주다가도 얼굴 돌리면 비웃네.
수많은 세상의 아이들에게 말하노니
좋아하고 싫어함 다투지 말아 의심하지 말아다오.
賞析이 시는《杜少陵集》14권에 실려 있는 바, 마지막 구인 ‘不爭好惡莫相疑’의 세 글자를 따서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安祿山의 난을 겪은 후 두보는 成都에 와서 살면서 成都尹 嚴武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永泰 元年(765) 엄무가 죽자, 5월에 30여세의 郭英乂가 성도윤이 되었다. 공은 곽영예와 알던 사이였으나 뜻이 서로 맞지 않아 마침내 成都의 草堂을 떠났는데, 이 시는 이때 지은 것이다.
蔡彭胤〈1669(현종 10)-1731(영조 7)〉의《希菴集》에 이 시에 차운한 시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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