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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眞寶前集

고문진보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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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妃曲
王安石
明妃出嫁與胡兒하니
氈車百兩皆胡姬
含情欲語獨無處하여
傳與琵琶心自知
黃金捍撥春風手
彈看飛鴻勸胡酒
하고
沙上行人却回首
漢恩自淺胡自深하니
人生樂在相知心이라
可憐靑冢注+靑冢 : 單于死 子達이어늘 昭君 謂達曰 將爲漢 將爲胡오한대 曰爲胡니이다 昭君 服毒而死하니 擧國葬之하다 胡中多白草어늘 而此冢草獨靑이라 故曰靑冢이라已蕪沒이나
尙有哀絃留至今이라
명비곡
왕안석
明妃가 오랑캐 아이에게 출가하니
털방석 수레 백량에는 모두 오랑캐 여인들 뿐이었네.
情 머금고 말하려 하나 말할 곳 없어
비파에 전하여 마음 속으로 혼자만 알고 있었네.
황금 채 잡고 봄바람처럼 온화한 손으로
비파타면서 나는 기러기 보며 오랑캐에게 술 권하니
漢나라 궁전의 시녀들 속으로 눈물 떨구고
사막의 길 가는 사람들도 고개 돌렸다오.
漢나라 은혜 얕고 오랑캐 은혜 깊으니
人生의 즐거움 서로 마음을 알아줌에 있다오.
가련하게도 靑冢注+선우가 죽자 아들 達이 즉위하였는데, 昭君이 달에게 이르기를 “너는 장차 漢나라를 위할 것인가? 장차 오랑캐를 위할 것인가?” 하니, “오랑캐를 위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소군이 독약을 먹고 죽으니, 온나라가 슬퍼하고 장례하였다. 오랑캐 지방에는 흰 풀이 많았는데 소군의 무덤의 풀만이 홀로 푸르렀으므로 청총이라 하였다. 이미 황폐하였으나
아직도 애처로운 거문고가락 지금까지 남아 있네.
賞析
이 시는《王臨川集》4권에 실려 있다. 제목 밑의 주에 “漢 元帝가 王昭君을 흉노에 시집보내니, 寧胡閼氏(영호연지)라 칭하였다. 왕소군이 漢나라의 은혜를 그리워하여 마침내 비파를 타 그 恨을 노래하니, 이것을〈昭君怨〉이라 부른다. 이후로 시인들이 이를 소재로 시를 지어 애처로워했다.” 하였다.
첫째수의 ‘人生失意無南北’과 둘째수의 ‘漢恩自淺胡自深’에 대하여 四佳 徐居正〈1420(세종 2)-1488(성종 19)〉은 일찍이《東人詩話》에서 “논평하는 자들은 王安石의 이러한 思考는 반역할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하였다. 金隆〈1525(중종 20)-1594(선조 27)〉은 《勿巖集》2권에서 “古人들은 왕안석의 이 시가 辭格이 超逸하여 歐陽修의〈명비곡〉에 뒤지지 않는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詩는 뜻을 표현하는 것이니, 마음에는 邪와 正이 있으므로 歌詠에 나타나는 것도 美와 惡이 있게 된다.”라고 하면서 ‘佳人萬里傳消息 好在氈城莫相憶 咫尺長門閉阿嬌 人生失意無南北’와 ‘漢恩自淺胡自深 人生樂在相知心’은 왕안석의 마음의 邪를 드러낸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어서 “왕소군은 죽어서도 한나라를 잊지 않았으니 왕소군의 원한은 오랑캐에 시집간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나라로 돌아갈 수 없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고금에 왕소군의 일을 읊은 자들이 그를 위해 슬퍼하고 한나라와 오랑캐의 은혜의 경중을 언급한 자가 없었는데, 왕안석은 유독 이렇게 보았으니, 만약 그가 靖康의 變에 처하였다면 반드시 金나라에 항복하여 金나라의 은혜에 감복했을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鵝溪 李山海〈1538(중종 33)-1609(광해군 1)〉 역시 왕안석과 비슷한 내용의 시를 지었는데, 一菴 辛夢參이 이를 함께 비판하였으므로 참고로 소개한다.
“어느 날 우연히《鵝溪集》을 보다가 王昭君에 대해 지은 시를 보았는데, 이 시에 ‘삼천의 궁녀들 궁궐에 갇혀 지척에 있으면서도 지존을 뵐 길 없었네. 당년에 이역땅에 던져지지 않았다면 한나라 궁궐에 소군이 있음을 누가 알았으랴.[三千粉黛鎖金門 咫尺無緣拜至尊 不是當年投異域 漢宮誰識有昭君]’ 하였고, 또 이르기를 ‘세간의 恩愛는 원래 정해진 것이 없으니 반드시 오랑캐 땅이 타향은 아니라오. 어찌 깊은 궁궐에서 외로이 달을 짝하여 일생토록 군왕을 가까이 모시기 어려운 것만 못할까.[世間恩愛元無定 未必氈域是異鄕 何似深宮孤伴月 一生難得近君王]’라고 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그 마음의 은미한 부분을 알았다. 소군이 입궁하던 날 평생토록 변치 않을 대의를 마음속에 두었으니, 어찌 군왕이 가까이하고 가까이하지 않는 것에 따라 지조를 바꾸겠는가. 선비가 산림에 처하여 깊이 숨고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은 처녀가 시집가기 전에 규방에서 몸을 삼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비록 혼란한 세상에 처하더라도 한 사람을 섬기고 두 사람을 섬기지 않는 절개를 굳게 지켜, 마치 伯夷와 叔齊가 殷나라를 위해 굶어 죽으면서 만고에 군신의 대의를 밝힌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만약 소군이 恩愛의 있고 없음에 따라 정조를 바꾸어 오랑캐의 배필이 됨을 다행으로 여겼다고 한다면 윤리강상을 해치는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소군이 시집간 것은 비록 임금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으나 오히려 한나라를 잊지 아니하여 죽어서도 靑塚에 이름을 남겼다. 그런데 지금 시를 지은 자는 배필을 얻은 것을 다행이라 하여 도리어 소군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王介甫(왕안석)의 시에 ‘漢恩自淺胡自深’ ‘人生得意無南北’과 동일한 마음이니, 애석하다. 이에 시 한 수를 지어 의리를 저버리는 세상 사람들을 경계시키노라.
정녀의 지조 은일의 선비에게서 볼 수 있으니 오직 대의를 밝혀야 마음이 편안한 법. 만약 총애를 따라 일신의 계책을 꾀한다면 들개들이 인륜을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貞女志操逸士看 唯明大義是心安 若隨寵愛謀身計 人紀何殊視野犴]”
이외에 權近〈1352(공민왕 1)-1409(태종 9)〉의《陽村集》4권에도〈明妃曲〉이라는 제목으로 “꽃같은 얼굴 한 번 웃음 오랑캐를 위함 아니라, 오랑캐의 마음 기쁘게 하여 한나라의 적 제거하려 해서이네.[花顔一笑非爲胡 務悅胡心除漢敵]”라고 하여 왕소군의 충심을 찬미한 내용이 보이며, 成俔의《虛白堂集》風雅錄 1권〈明妃曲〉에는 “미앙궁의 삼천궁녀 중에 유독 시름을 한 몸에 모았네. 평소 아리따운 자색 자부하였으니 어찌 화공이 잘못 그리리라 생각했겠나.[未央宮裏三千人 獨將患苦叢妾身 平生自持嬋姸色 豈悟丹靑誤失眞]” 하였다.
역주
역주1 漢宮侍女暗垂淚 : 金隆의《勿巖集》4권에 “자신의 淪落함을 스스로 슬퍼하였으므로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 것이다.” 하였다.

고문진보전집 책은 2017.12.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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