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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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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元年注+隱公之始年 周王之正月也 凡人君卽位 欲其 故不言一年一月也 隱雖不卽位 然攝行君事 故亦例 在襄二十九年 卽位例 在隱莊閔僖元年 [附注] 林曰 孔子因魯史作春秋 故以魯紀年 而書王正月 見周之正朔 猶行於天下也 周正建子 正月 子月也 其曰 元年春王正月者 謂之體元居正告朔朝王 其義皆通 無事而書春王正月者 無事必書首時者 謹始也이라
[經]三月注+附庸之君 未王命 例稱名 能自通於大國 繼好息民 故書字貴之 名例 在莊五年 邾 今魯國鄒縣也 蔑 姑蔑 魯 魯國卞縣南 有姑城 [附注] 林曰 此私盟之始하다
[經]夏五月 鄭伯克段于鄢注+不稱國討 而言鄭伯 譏失敎也 段不弟 故不言弟 明鄭伯雖失敎 而段亦凶逆 以君討臣 而用二君之例者 言段强大雋傑 據大都以耦國 所謂得雋曰克也 國討例 在莊二十二年 得雋例 在莊十一年 母弟例 在宣十七年 鄭 在熒陽宛陵縣西南 鄢 今穎川鄢陵縣 [附注] 林曰 鄢 鄭地하다
[經]秋七月 天王使宰咺來歸惠公仲子之注+宰 官 咺 名也 咺贈死不及尸 弔生不及哀 豫凶事 故貶而名之 此天子大夫稱字之例 仲子者 桓公之母 婦人無諡 故以字配姓 來者 自外之文 歸者 不反之辭 [附注] 林曰 此王室下交諸侯之始하다
[經]九月 及宋人盟于宿注+客主無名 皆微者也 宿 小國 東平無鹽縣也 凡盟以國地者 國主亦與盟 例在僖十九年 宋今梁國睢陽縣 [附注] 林曰 魯宋宿三國 共爲盟 參盟之端 見矣 하다
[經]冬十有二月 祭伯來注+祭伯 諸侯爲王卿士者 祭 國 伯 爵也 傳曰 非王命也 釋其不稱使 [附注] 林曰 此私交之始하다
[經]公子益師卒注+曰 公不與小斂 故不書日 所以示薄厚也 春秋不以日月爲例 唯卿佐之喪 獨日以見義者 旣未足以褒貶人君 然亦非死者之罪 無辭可以寄文 而人臣輕賤 死日可略 故特假日以見義하다
[傳]元年春王周正月이라
注+言周以別夏殷 假攝君政 不修卽位之禮 故史不書於策 傳所以見異於常 [附注] 林曰 隱公將讓國於桓公 故假攝君事也일새니라
[傳]三月 公及邾儀父盟于蔑注+[附注] 林曰 及者 內爲主也하니 邾子克也注+克 儀父名
未王命이라 故不書爵하다
曰儀父 貴之也注+王未賜命以爲諸侯 其後儀父服事齊桓 以獎王室 王命以爲邾子 故莊十六年經 書邾子克卒니라
公攝位而欲求好於邾
故爲蔑之盟注+解所以與盟也하다
[傳]夏四月 費伯帥師城郞하다
不書 非公命也注+費伯 魯大夫 郞 魯邑 高平方與縣東南 有郁郞亭 傳曰 君擧必書 然則史之策書 皆君命也 今不書於經 亦因史之舊法 故傳釋之 諸魯事 傳釋不書 他皆放此일새니라
[傳]初 鄭武公娶于申하니 曰武姜注+申國 今南陽宛縣 [附注] 林曰 姜 申姓 武姜 從夫諡 朱曰 傳凡言初者 因此年之事 而推其所由始也이라
生莊公及共叔段注+段出奔共 故曰共叔 猶晉侯在鄂 謂之鄂侯하다 莊公하야 驚姜氏
故名曰寤生이라하고 遂惡之注+寐寤而莊公已生 故驚而惡之 [附注] 林曰 杜氏謂寤寐而莊公已生 非也 如此當喜 何得復驚而惡之 史記云 寤生 生之難 是也 此當爲難生 故武姜困而後寤하다
愛共叔段하야 欲立之注+欲立以爲大子하야 亟請於武公한대 公弗許注+[附注] 林曰 亟 數(삭)也하다
及莊公卽位하야 爲之請制注+[附注] 朱曰 武姜請於莊公 欲封叔段於制한데 公曰 制 巖邑也 虢叔死焉하니 佗邑이면 唯命注+虢叔 東虢君也 恃制巖險 而不修德 鄭滅之 恐段復然 故開以他邑 虢國 今熒陽縣 [附注] 朱曰 虢仲 虢叔 皆王季之子 一封東虢 一封西虢也하리이다
請京한대 使居之하고 謂之京城大叔注+公順姜請 使段居京 謂之京城大叔 言寵異於衆臣 京 鄭邑 今熒陽京縣이라하다
祭仲曰 都城過百雉 國之害也注+祭仲 鄭大夫 方丈曰堵 三堵曰雉 一雉之墻 長三丈高一丈 侯伯之城 方五里徑三百雉 故其大都 不得過百雉 [附注] 林曰 凡邑有宗廟先君之主曰都 無曰邑니이다
先王之制 大都不過參國之一注+三分國城之一이오 中五之一이오 小九之一이어늘 今京不度하니 非制也注+不合法度 非先王制 [附注] 朱曰 今京城過於百雉 不合法度
君將不堪注+[附注] 朱曰 言叔段據有大邑 將爲鄭國之害 莊公必不堪也이리이다 公曰 姜氏欲之어니 焉辟害리오
對曰 姜氏何厭之有릿까
不如早爲之所注+使得其所宜 [附注] 林曰 言武姜何厭足之有 不如早爲區處 使得其所하야 無使滋蔓이니이다
이면 難圖也注+[附注] 林曰 無使叔段之惡 如草之滋長蔓延 及蔓延難爲圖謀
猶不可除 況君之寵弟乎잇가 公曰 多行不義 必自斃리니 子姑待之注+斃 踣也 姑 且也하라
旣而大叔 命西鄙北鄙貳於己注+鄙 鄭邊邑 貳 兩屬 [附注] 林曰 令屬鄭之邑 兩屬於己한대 公子呂曰 國不堪貳 君將若之何注+公子呂 鄭大夫 [附注] 林曰 言國家不可使人有携貳兩屬之心
欲與大叔인댄 臣請事之注+[附注] 朱曰 君若欲以鄭國傳於叔段 則我請享叔段以爲君也어니와 若弗與인댄 則請除之하야 無生民心注+叔久不除 則擧國之民 當生他心하소서 公曰 無庸이라
將自及注+言無用除之 禍將自及하리라
大叔又收貳以爲己邑注+前兩屬者 今皆取以爲己邑하고 至于廩延注+言轉侵多也 廩延 鄭邑 陳留酸棗縣北 有延津하니 子封曰 可矣니이다
厚將得衆注+子封 公子呂也 厚 謂土地廣大이리이다 公曰 不義不暱하니 厚將崩注+不義於君 不親於兄 非衆所附 雖厚必崩 [附注] 林曰 言不義之人 不爲衆所親暱하리라
大叔完聚注+完城郭 하고 繕甲兵注+[附注] 林曰 繕治其甲冑與兵器하고 具卒乘注+步曰卒 車曰乘하야 將襲鄭注+[附注] 林曰 無鍾鼓曰襲 將掩鄭國之不備하니 夫人將啓之注+啓 開也 [附注] 林曰 夫人 卽武姜 將開段而道之러라
公聞其期하고 曰 可矣라하고 命子封帥車二百乘以伐京注+古者 兵車一乘 甲士三人 步卒七十二人 [附注] 林曰 二百乘 蓋甲士六百人 步卒一萬四千四百人하다
京叛大叔段하니 段入于鄢이어늘
公伐諸鄢하니 五月辛丑 大叔出奔共注+共國 今汲郡共縣하다
書曰 鄭伯克段于鄢이라하니 段不弟 故不言弟하고 如二君이라 故曰克이라하다
注+傳言夫子作春秋 改舊史以明義 不早爲之所 而養成其惡 故曰失敎 段實出奔而以克爲文 明鄭伯志在於殺 難言其奔니라
遂寘姜氏于城潁注+城潁 鄭地 而誓之曰 不及黃泉이면 無相見也注+地中之泉 故曰黃泉라하고 旣而悔之하다
潁考叔爲潁谷封人注+封人 典封疆者 [附注] 林曰 潁谷 卽城潁之谷이러니 聞之하고 有獻於公注+[附注] 林曰 獻者 卑奉尊之辭 或以計謀 或以時物 皆曰獻하니 公賜之食한대
食舍肉이어늘
公問之한대 對曰 小人有母하야 皆嘗小人之食矣어니와 未嘗君之羹일새 請以遺之注+食而不啜羹 欲以發問也 宋華元 殺羊爲羹饗士 蓋古賜賤官之常 [附注] 林曰 食公所賜之食 而舍置其肉味하노이다
公曰 爾有母遺언마는 繄我獨無注+繄 語助로다
潁考叔曰 敢問何謂也注+據武姜在 設疑也잇고 公語之故하고 且告之悔한대
對曰 君何患焉이닛고
若闕地及泉하야 隧而相見이면 其誰曰不然注+隧 若今延道 [附注] 林曰 闕 掘也 若掘地及泉水之處 卽是黃泉 隧 地中道也이리잇가 公從之하다
公入而賦호되 大隧之中 其樂也 融融注+賦 賦詩也 融融 和樂也 [附注] 林曰 大隧之中 想當時所賦之詩 今無存不可復考 朱曰 莊公入隧道見武姜 乃作詩而歌之 其辭略曰 大隧之中云云 其樂也融融 此句 亦詩中要語이라하고 姜出而賦호되 大隧之外 其樂也 洩洩注+洩洩 舒散也 [附注] 林曰 大隧之外 想亦當時武姜所賦之詩 朱曰 莊公與武姜出隧道 又作歌詩 其辭略曰 大隧之外云云 其樂也洩洩 亦詩中要語이라하고
遂爲母子如初하다
君子曰注+[附注] 朱曰 按傳文所稱君子曰者 皆左氏設君子之言 以爲論斷 然其言多淺陋 不能折之以正大之理 後凡君子曰君子謂 皆放此
潁考叔 純孝也注+純 猶篤也
愛其母하야及莊公注+[附注] 林曰 施 猶廣也 言能廣施孝道 感悟莊公이로다 詩曰 孝子不匱하야 永錫爾類 其是之謂乎注+不匱 純孝也 莊公雖失之於初 孝心不忘 考叔感而通之 所謂永錫爾類 詩人之作 各以情言 君子論之 不以文害意 故春秋傳引詩 不皆與今說詩者同 他皆放此 [附注] 林曰 孝子之心 無有窮匱 長以己之孝誠 錫及其疇類 皆爲孝也ᄂ저
[傳]秋七月 天王使宰咺來歸惠公仲子之賵하니이오 且子氏未薨이라
注+惠公葬在春秋前 故曰緩也 子氏 仲子也 薨在二年 賵 助喪之物 [附注] 林曰 一擧兩 事皆非禮 故名咺示貶하다
天子七月而葬하니注+言同軌以別四夷之國 [附注] 林曰 中國廣大 不七月不足以盡遠人之情하고 諸侯五月하니 同盟至注+同在方嶽之盟 [附注] 林曰 五月而葬 殺於天子 同方嶽之盟 其地漸近 故五月可至 不言畢至 至不至 無所拘也하고 大夫三月하니 同位至注+古者 不踰時하고 士踰月하니 外姻至注+踰月 度月也 姻 猶親也 此言赴吊 各以遠近爲差 因爲葬節
贈死不及尸注+尸 未葬之通稱하고 弔生不及哀注+諸侯已上旣葬 則縗麻除無哭位 終喪하며 豫凶事하니 非禮也注+仲子在而來贈 故曰豫凶事니라
[傳]八月 紀人伐夷로되 夷不告 故不書注+夷國 在城陽莊武縣 紀國 在東莞劇縣 隱十一年傳例曰 凡諸侯有命 告則書 不然則否 史不書於策 故夫子亦不書于經 傳見其事 以明春秋例也 他皆放此하다
有蜚로되 不爲災ᄅ새 亦不書注+蜚 負蠜也 莊二十九年傳例曰 凡物不爲災 不書 又於此發之者 明傳之所據 非唯史策 兼采簡牘之記 他皆放此 [附注] 林曰 蜚 蓋食苗虫之屬 하다
[傳]惠公之季年 敗宋師于黃注+黃 宋邑 陳留外黃縣東 有黃城이러니 公立而求成焉하야
九月 及宋人盟于宿하니 始通也注+經無義例 故傳直言其歸趣而已 他皆放此
[傳]冬十月庚申 改葬惠公하다
公弗臨이라 故不書注+以桓爲大子 故隱公讓而不敢爲喪主 隱攝君政 故據隱而言 [附注] 林曰 臨 臨棺而哭하다
惠公之薨也 有宋師注+[附注] 林曰 敗黃之師하고 太子少하야 葬故有闕注+[附注] 林曰 桓公幼少 葬禮有所闕少이라
是以改葬하다
[傳]衛侯來會葬하다
不見公일새 亦不書注+諸侯會葬 非禮也 不得接公成禮 故不書於策 他皆放此 衛國 在汲郡朝歌縣하다
[傳]鄭共叔之 公孫滑出奔衛注+公孫滑 共叔段之子하니 衛人爲之伐鄭하야 取廩延注+[附注] 林曰 爲公孫滑 伐鄭報仇 하다
鄭人以王師虢師伐衛南鄙注+虢 西虢國也 弘農陝縣東南 有虢城 [附注] 林曰 凡師能左右之曰以 하고 請師於邾注+[附注] 林曰 鄭請濟師於邾 하다
邾子使私於公子豫注+公子豫 魯大夫 私請師하니 豫請往이어늘
公弗許하다 遂行하야 及邾人鄭人盟于翼注+翼 邾地하다
不書 非公命也일새니라
新作南門하다
不書 亦非公命也注+非公命不書三見者 皆興作大事 各擧以備文 [附注] 林曰 二事以見大夫專擅之端 일새니라
[傳]十二月 祭伯來하니 非王命也注+[附注] 林曰 以王臣 無王命而私交於魯 王室事可知矣
[傳]衆父卒注+衆父 公子益師字하다
公不與이라 故不書日注+禮 卿佐之喪 小斂大斂 君皆親臨之 崇恩厚也 始死 情之所篤 禮之所崇 故以小斂爲文 至於但臨大斂 及不臨其喪 亦同不書日 [附注] 林曰 謂經不書衆父卒日 蓋傳者釋經 有書日書月書時之例 하다


원년元年주왕周王 정월이다.注+은공隱公시년始年주왕周王정월正月이다. 임금이 즉위하면 체원거정體元居正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1년 1월이라고 하지 않는다. 은공이 비록 즉위식卽位式을 거행하지는 않았으나 임금의 일을 대리代理하였기 때문에 그 역시 조묘고삭朝廟告朔하였다. 고삭조정告朔朝正양공襄公 29년에 보이고, 즉위卽位은공隱公장공莊公민공閔公희공僖公원년元年에 보인다.[부주]林: 공자孔子나라 사기史記에 의거해 《춘추春秋》를 지었기 때문에 나라의 연대年代로 연대를 표기表記하였다. 그리고 왕정월王正月이라고 기록하여 나라의 정삭正朔천하天下통행通行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주정周正자월子月세수歲首로 삼았으니 정월正月자월子月이다. 《춘추》에 “원년元年왕정월王正月”이라고 한 것은 ‘체원거정體元居正’이라고 풀이하거나 ‘고삭조왕告朔朝王’이라고 풀이하거나 그 뜻이 모두 통한다. 아무 사건이 없는데도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기록한 것과 아무 일이 없는데도 반드시 사시四時수월首月을 기록한 것은 시작始作중시重視한 것이다.
3월에 은공이 주의보邾儀父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부용국附庸國의 임금이 천왕天王명작命爵을 받지 않았으면 이름을 칭하는 것이 이다. 그러나 주군邾君은 스스로 대국大國교통交通하여 우호友好를 계속하고 백성을 안식安息시켰으므로 를 기록하여 존귀하게 대우한 것이다. 이름을 기록한 장공莊公 5년에 보인다. 는 지금 나라 추현鄒縣이다. 고멸姑蔑나라 땅이다. 나라 변현卞縣 남쪽에 고성姑城이 있다.[부주]林: 이것이 사맹私盟의 시초이다.
여름 5월에 정백鄭伯에서 이겼다.注+정국鄭國토벌討伐하였다고 칭하지 않고 정백鄭伯이라고 말한 것은 아우를 잘못 가르친 것을 나무란 뜻이다. 도 아우답지 못했기 때문에 아우라고 말하지 않아서, 정백이 비록 교육을 잘못하기는 하였으나 흉역凶逆임을 밝혔다. 임금으로서 신하를 쳤는데 두 나라 임금이 서로 전쟁한 를 사용해서 이라고 한 것은 강대强大하고 걸출傑出한 사람으로 대도大都웅거雄據하여 국도國都와 같이 쌓았기 때문에, 이른바 “득준得雋(敵의 수령首領을 잡음)을 이라 한다.”는 를 사용한 것이다. 국토國討장공莊公 22년에 보이고, 득준得雋는 장공 11년에 보이고, 모제母弟선공宣公 17년에 보인다. 나라는 형양熒陽완릉현宛陵縣 서남에 있다. 은 지금의 영천潁川언릉현鄢陵縣이다. [부주]林: 나라 땅이다.
가을 7월에 천왕天王재훤宰咺을 보내와서 혜공惠公중자仲子을 주었다.注+관명官名이고, 인명人名이다. 사자死者에게 주는 물품을 장사葬事에 미쳐 주지 않았고, 산 사람에 대한 조상弔喪을 슬퍼할 때에 미쳐 하지 않았으며, 중자仲子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사자死者에게 주는 을 미리 전하였기 때문에 그를 깎아 내려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천자天子대부大夫에 대해 를 칭한 이다. 중자仲子환공桓公의 어머니이다. 부인婦人시호諡號가 없기 때문에 에 붙인 것이다. 는 밖으로부터 왔다는 말이고, 는 도로 가져가지 않는다는 말이다.[부주]林: 이것이 왕실王室이 아래로 제후諸侯교통交通한 시초이다.
9월에 은공隱公송인宋人宿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주객主客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모두 벼슬이 낮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宿은 작은 나라로 동평東平무염현無鹽縣이다. 그 나라 땅에서 결맹하면 그 나라의 임금도 결맹에 참여하는 것이 이다. 그 희공僖公 19년에 보인다. 나라는 지금의 양국梁國수양현睢陽縣이다.[부주]林: 宿 세 나라가 함께 결맹한 것이니, 삼국三國이 결맹한 것이 처음으로 보인다.
겨울 12월에 채백祭伯이 왔다.注+채백祭伯은 제후로서 왕의 경사卿士가 된 자이다. 국명國名이고 작명爵名이다. ‘왕명王命이 아니라’고 기록하여 ‘使’로 칭하지 않은 이유를 해석하였다.[부주]林: 이것이 사교私交의 시초이다.
공자 익사益師하였다.注+전례傳例에 “은공隱公소렴小斂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일死亡日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한 것은 군은君恩후박厚薄을 보이기 위한 이유다. 《춘추》에 를 삼지 않았으나, 경좌卿佐에만 유독 날짜를 기록하여 뜻을 드러낸 것은, 일의 득실得失로 임금을 포폄褒貶할 수 없고, 그렇다고 죽은 자의 죄도 아니니 무어라고 글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하는 임금에 비해 경천輕賤하기 때문에 죽은 날짜를 생략할 수 있으므로 특별히 날짜를 빌려 뜻을 드러낸 것이다.
원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이다.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은공이 섭위攝位하였기 때문이다.注+를 말하여 과 구별하였다. 임시로 임금의 정사政事대리代理하였을 뿐, 즉위의 를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관史官에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에 정상과 달랐음을 드러내었다.[부주]林: 은공이 장차 환공에게 나라를 사양하려 하였기 때문에 임시로 임금의 일을 대리한 것이다.
3월에 은공이 주의보邾儀父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注+[부주]林: 내국內國회맹會盟주도主導한 것이다.주자극邾子克이다.注+은 의보의 이름이다.
의보가 주왕周王책명策命을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에 《춘추》에 그의 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의보라고 한 것은 그를 귀하게 여긴 것이다.注+천왕天王을 내려 제후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을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후에 의보가 제환공齊桓公을 섬겨 왕실王室을 돕자, 천왕이 명을 내려 주자邾子로 삼았다. 그러므로 장공莊公 16년 에 “주자극邾子克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은공이 섭위하여 우호友好를 맺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멸에서 결맹한 것이다.注+와 결맹한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여름 4월에 비백費伯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에 성을 쌓았다.
이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은공의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注+비백費伯나라 대부大夫이다. 노읍魯邑이다. 고평高平방여현方與縣 동남에 욱랑정郁郞亭이 있다. 장공莊公 23년 에 “임금의 거동擧動은 반드시 기록한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사관史官에 기록한 것은 모두 임금의 명에 의한 것이다. 지금 에 기록하지 않은 것도 사책史策의 옛 법을 따른 것이므로 전에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노나라의 여러 일들에 대해 불서不書라고 해석한 다른 곳도 그 가 모두 이와 같다.
당초에 정무공鄭武公신국申國에서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그가 무강武姜이다.注+신국申國은 지금의 남양南陽완현宛縣이다.[부주]林: 나라의 성이고, 무강은 남편의 시호를 따른 것이다. : 라고 말한 것들은 모두 이해의 일을 인하여 그 일이 시작된 내력을 추술推述한 것이다.
무강이 장공莊公공숙단共叔段注+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공숙共叔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진후晉侯에 있었으므로 악후鄂侯라고 한 것과 같다. 낳았는데 장공이 오생寤生하여 강씨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름을 ‘오생寤生’이라 하고서 그를 미워하였다.注+잠에서 깨어보니 장공이 이미 태어나 있었다. 그러므로 무강이 놀라서 그를 미워하였다는 말이다.[부주]林: 두씨杜氏가 “잠에서 깨어보니 장공이 이미 태어나 있었다.”고 한 것은 옳지 않다. 이와 같았다면 기뻐하는 것이 당연한데, 무엇 때문에 놀라서 미워했겠는가. 《사기史記》에는 “오생寤生난산難産이라.”고 하였으니 옳다. 이는 난산으로 보는 것이 옳으니, 무강이 산고産苦혼절昏絶한 뒤에 깨어난 것이다.
공숙단을 사랑하여 그를 세우고자하여注+그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자 한 것이다. 자주 무공에게 청하였으나 무공이 허락하지 않았다.注+[부주]林: 는 자주이다.
뒤에 장공이 즉위함에 미쳐 무강이 공숙단을 위해 제읍制邑을 청하니,注+[부주]朱: 무강이 장공에게 청하여 숙단을 제읍에 봉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장공이 말하기를 “제읍은 지세地勢가 험한 고을이어서 괵숙이 그 곳에서 죽었으니, 다른 고을을 청하신다면 명대로 따르겠습니다.”고 하였다.注+괵숙虢叔동괵東虢의 임금이다. 괵숙이 제읍의 험고險固함을 믿고 덕을 닦지 않으니, 이 괵을 토멸討滅하였다. 도 다시 그럴 것으로 염려되었기 때문에 다른 을 청하도록 깨우친 것이다. 괵국虢國은 지금의 형양현熒陽縣이다.[부주]朱: 괵중虢仲괵숙虢叔은 모두 왕계王季의 아들로 하나는 동괵東虢에, 하나는 서괵西虢에 봉해졌다.
경성京城을 청하니 그를 그 곳에 살게 하고는 그를 경성태숙京城太叔이라고 하였다.注+장공이 무강의 청에 따라 경성京城에 살게 하고, 그를 경성태숙京城太叔이라고 한 것은 중신衆臣보다 특별히 총애寵愛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정읍鄭邑인데, 지금의 형양熒陽경현京縣이다.
채중祭仲이 말하기를 “국도國都 이외의 도성都城백치百雉를 넘는 것은 국가에 가 됩니다.注+채중은 나라 대부大夫이다. 사방 1라 하고, 3라 한다. 1의 담장은 길이가 3이고 높이가 1이다. 은 사방이 5이고 지름이 3백 이므로 대도大都도 1백 를 넘을 수 없다. [부주]林: 종묘宗廟선군先君신주神主가 있는 곳을 라 하고 없는 곳을 이라 한다.
선왕의 제도에 대도大都의 성은 국도의 3분의 1,注+국성國城의 3분의 1이다.중도中都는 5분의 1, 소도小都는 9분의 1을 넘지 못하는 것인데, 지금 경성京城은 법도에 맞지 않으니 선왕의 제도가 아닙니다.注+법도에 맞지 않는 것은 선왕先王의 제도가 아니라는 말이다.[부주]林: 지금 경성이 1백 를 넘으니 법도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임금님께서 장차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注+[부주]朱: 숙단이 대읍大邑점유占有하였으니 장차 정나라의 해가 되어 장공이 반드시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고 하니, 장공이 말하기를 “어머니 강씨姜氏가 이렇게 하기를 바라니 내 어찌 를 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채중이 대답하기를, “강씨姜氏야 어찌 만족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일찍이 조처하여 그 세력이 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注+으로 하여금 알맞는 처소處所를 얻게 하는 것이다.[부주]林: 강씨姜氏야 어찌 만족이 있겠는가. 일찍이 조처하여 그 처소處所를 얻게 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뻗어나가면 도모圖謀하기 어렵습니다.注+[부주]林: 공숙단의 이 풀처럼 자라지 못하게 하라. 뻗어나면 도모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뻗어나면 풀도 제거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임금님의 총애寵愛하는 아우이겠습니까?”라고 하니, 장공이 말하기를 “불의한 짓을 많이 행하면 반드시 스스로 패망할 것이니, 그대는 우선 때를 기다리라.”고 하였다.注+는 넘어짐이고, 는 우선이다.
얼마 뒤에 태숙太叔의 서쪽 변방과 북쪽 변방에 명하여 양쪽에 소속되어 정장공의 통치를 받는 동시에 자기의 통치도 받게 하자,注+나라의 변읍邊邑이다. 는 두 곳에 소속되는 것이다.[부주]林: 정나라에 소속된 읍을 자기에게도 소속시켜 〈양쪽의 통치統治를 받게 한〉 것이다.공자려公子呂가 말하기를 “한 나라에 두 임금을 감당할 수 없으니, 께서는 이를 장차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注+공자려公子呂는 정나라 대부大夫이다.[부주]林: 국가國家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심二心을 품고 양쪽에 붙으려는 마음을 품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정나라를 태숙에게 주시고자 하신다면 신은 그를 임금으로 섬기겠습니다마는注+[부주]朱: 이 만약 정나라를 숙단에게 전하고자 한다면 나는 숙단을 받들어 임금으로 섬기겠다는 말이다. 만약 주려 하지 않으신다면그를 제거하시어 백성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소서.注+오래도록 태숙을 제거하지 않으면 온 나라 백성들이 다른 마음을 품을 것이라는 말이다.”라고 하니, 장공이 말하기를 “그럴 필요 없다.
장차 스스로 화에 미치게 될 것이다.注+제거할 필요 없다. 가 장차 스스로에게 미칠 것이라는 말이다.”고 하였다.
얼마 뒤에 태숙이 또 양쪽에 소속됐던 땅을 거두어들여 자기 고을로 만들고,注+전에 양쪽이 소속되었던 을 이제 모두 취하여 자기의 읍으로 삼은 것이다. 또 그 영토領土늠연廩延까지 확장하자,注+점점 많은 땅을 침탈侵奪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늠연廩延은 정나라의 이다. 진류陳留산조현酸棗縣 북쪽에 연진延津이 있다.자봉子封이 말하기를 “손을 쓸 때가 되었습니다.
그냥 버려두면 태숙의 영토가 넓어져서 장차 많은 백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注+자봉은 공자려公子呂이다. 토지土地광대廣大함을 이름이다.”고 하니, 장공이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에게 의리義理을 지키지 않고 아우로서 형에게 친애親愛하지 않으니, 아무리 영토가 넓어도 장차 스스로 붕궤崩潰할 것이다.注+임금에게 의리를 지키지 않고 형에게 친애하지 않으면 대중이 따르지 않으니, 아무리 토지가 광대하여도 반드시 붕궤한다는 말이다.[부주]林: 의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대중의 친애를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고 하였다.
태숙太叔성곽城郭을 견고히 쌓고 군량軍糧을 모으고注+성곽城郭을 견고히 쌓고 인민人民을 모은 것이다. 갑옷과 무기를 수선하고注+[부주]林: 갑주甲冑병기兵器를 수선한 것이다. 군사와 병거兵車를 갖추어서注+보병步兵이라 하고, 병거兵車이라 한다.기습奇襲하려 하니,注+[부주]林: 종고鍾鼓를 울리지 않고 쳐들어가는 것을 이라 한다. 대비對備하고 있지 않는 나라를 습격襲擊하려 한 것이다.부인夫人내응內應하여 성문을 열어주기로 하였다.注+(열다)이다. [부주]林: 부인夫人은 바로 무강武姜이다. 무강武姜이 성문을 열어 을 인도하려 한 것이다.
장공이 그 시기時期를 듣고는 “손을 쓸 때가 되었다.”라 하고서, 자봉子封에게 명하여 병거兵車 2백 을 거느리고 가서 경성京城을 치게 하였다.注+옛날에 병거兵車 1에는 갑사甲士가 3인이고, 보졸步卒이 72인이었다. [부주]林: 2백 이면 갑사甲士가 6백 인이고, 보졸步卒이 1만 4천 4백 인이다.
경성京城 사람들이 태숙단太叔段을 배반하니, 단이 도망해 으로 들어갔다.
공이 또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언을 치니, 5월 신축일에 태숙이 공국共國注+공국共國은 지금의 급군汲郡공현共縣이다.으로 도주하였다.
춘추春秋》에 ‘정백鄭伯에서 (이김)하였다.’고 기록했으니, 이는 단이 아우답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우’라고 말하지 않았고, 형제가 다툰 것이 마치 두 나라 임금이 교전交戰한 것 같기 때문에 ‘’이라고 한 것이다.
정백鄭伯이라고 칭한 것은 동생을 잘못 가르친 것을 나무라고, 아울러 정장공鄭莊公본심本心임을 말한 것이다.
출분出奔을 말하지 않은 것은 곤란함이 있기 때문이다.注+의 말은 부자夫子가 《춘추》를 지으실 때 구사舊史의 글을 고쳐 의리를 밝혔다는 뜻이다. 일찍이 조처하지 않아 그의 양성養成하였기 때문에 잘못 가르쳤다고 한 것이다. 사실은 단이 출분出奔하였는데 ‘’으로 글을 만들어서 정백鄭伯의 뜻이 아우를 반드시 죽이고자 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출분出奔이라고 말하기 곤란했음을 밝혔다.
드디어 강씨姜氏성영城穎注+성영城穎나라 땅이다.안치安置하고서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서로 만나지 않을 것이다.注+땅 속의 물을 황천黃泉이라 한다.”고 맹세하고는 이내 후회하였다.
영곡潁谷봉인封人으로 있는 영고숙潁考叔注+봉인封人국경國境을 맡아 지키는 사람이다.[부주]林: 영곡穎谷은 바로 성영城穎의 골짜기이다. 이 소문을 듣고 장공에게 헌상獻上하는 기회를 이용해 뵙기를 청하니,注+[부주]林: 은 낮은 사람이 존귀尊貴한 사람에게 바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계모計謀를 바치거나 시물時物을 바치는 것을 모두 이라 한다. 장공이 영고숙에게 음식을 하사하였다.
영고숙이 음식을 먹으면서 고기는 먹지 않고 한 곳으로 모아 놓았다.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인小人에게는 어머니가 계신데 소인이 올리는 음식은 모두 맛보았으나 임금의 국은 맛보지 못하였으니 이 고기를 어머니께 갖다 드리고자 합니다.注+음식을 먹을 때 고의로 국을 마시지 않은 것은 임금이 그 까닭을 묻게 하기 위해서이다. 나라 화원華元을 잡아 국을 끓여서 들에게 먹였으니, 은 옛날에 일반적으로 천자賤者에게 내리던 식품食品이었던 듯하다. [부주]林: 장공莊公이 내린 음식을 먹을 때 고기는 먹지 않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공은 “그대에게는 가져다드릴 어머니가 있는데 나만이 홀로 없구나!注+어조사語助辭이다.”라고 하였다.
영고숙이 “감히 여쭙건대 무슨 말씀이신지요?注+무강武姜이 살아 있으므로 의심해 물은 것이다.”라고 하니, 장공은 그 까닭을 이야기하고 또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영고숙이 대답하기를 “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만약 물이 나는 데까지 땅을 파고 들어가서 굴속에서 서로 만나신다면 누가 황천黃泉에서 만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注+는 지금의 연도延道이다.[부주]林: 은 파는 것이다. 만약 물이 나는 곳까지 땅을 파면 그곳이 바로 황천黃泉이란 말이다. 지하도地下道이다.”라고 하니, 공이 그 말을 따랐다.
장공이 굴 속으로 들어가서 를 읊기를 “큰 굴 속에 들어오니 즐거운 마음 융융融融하다.注+를 읊는 것이다. 융융融融화락和樂한 모양이다.[부주]林: ‘대수지중大隧之中’의 는 당시에 읊은 인 듯한데, 지금 남아 있지 않으니 다시 상고할 수가 없다. : 장공莊公수도隧道로 들어가서 무강武姜을 만나 보고는 시를 지어 노래한 것인데, 그 가사歌辭요약要約하여 ‘대수지중大隧之中’云云이라고 한 것이다. ‘기악야융융其樂也融融’이란 속의 요어要語이다.”고 하였고, 강씨가 밖으로 나와서 시를 읊기를 “굴 밖으로 나오니 즐거운 마음 예예洩洩하다.注+예예洩洩는 속에 쌓였던 응어리가 흩어지는 모양이다.[부주]林: ‘대수지외大隧之外도 당시에 무강武姜이 읊은 인 듯하다. : 장공과 무강이 수도에서 나와서 또 가시歌詩를 지었는데, 그 가사歌辭를 요약하여 ‘대수지외大隧之外’云云이라고 한 것이다. ‘기악야설설其樂也洩洩’도 속의 요어要語이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모자가 과거처럼 화목和睦하게 지냈다.
군자君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論評하였다.注+[부주]朱: 고찰하건대 한 ‘군자왈君子曰’은 아마도 좌씨左氏군자君子의 말을 가탁假託하여 논단論斷한 것인 듯하다. 그러나 그 말이 대부분 천루淺陋하여 정대正大의리義理절충折衷하지 못하였다. 뒤에 나오는 ‘군자왈君子曰’과 ‘군자위君子謂’도 모두 이와 같다.
“영고숙은 순효純孝이다.注+독실篤實과 같다.
그 어머니 사랑하는 효성孝誠을 미루어 넓혀 장공에게 영향影響을 끼쳤으니,注+[부주]林: 는 넓힘이니, 효도를 널리 베풀어 장공莊公을 감동시켜 깨닫게 했다는 말이다. 시경詩經》에 ‘효자의 효심孝心은 끝이 없어서 영원히 너의 동류同類에게 영향影響을 끼친다.’고 한 것이 아마도 이를 이른 듯하다.”注+다함이 없는 효심孝心순효純孝이다. 장공이 비록 처음에는 잘못하였으나 효심孝心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영고숙穎考叔감동感動시킨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영석이류永錫爾類(영원히 너와 같은 효심孝心을 가진 자에게 영향을 끼침)’이다. 시인詩人의 작품은 각각 자신의 감정을 말한 것이니, 군자君子논평論評함에 있어 글자에 얽매어 전체의 뜻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춘추전春秋傳》에 를 인용한 것이 대부분 오늘날 해설解說하는 자들의 말과 같지 않다. 기타의 도 모두 이와 같다. [부주]林: 효자의 마음은 끝이 없어서 영원히 나의 효성孝誠으로 효심을 가진 무리에게 영향影響을 끼쳐 모두 효자孝子가 되게 한다는 말이다.
가을 7월에 천왕이 재훤宰咺을 노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혜공과 중자의 을 주었으니 그 시기가 늦었고, 또 자씨子氏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을 주었다.
그러므로注+혜공惠公장례葬禮는 춘추 이전에 있었다. 그러므로 늦었다고 한 것이다. 자씨子氏중자仲子인데, 은공隱公 2년에 죽었다. 상가喪家부조扶助하는 물건이다.[부주]林: 동시에 거행한 두 가지 일이 모두 비례非禮이기 때문에 이라고 이름을 기록하여 나무라는 뜻을 보인 것이다.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천자天子는 7개월 만에 장사 지내니 동궤同軌가 모두 오고,注+동궤同軌라고 말하여 사방의 오랑캐 나라와 구별하였다.[부주]林: 중국中國광대廣大하니 7개월이 아니고서는 먼 곳 사람들이 다 와서 애도哀悼을 표할 수가 없다. 제후는 5개월 만에 장사 지내니 동맹국同盟國이 오고,注+함께 방악方嶽맹약盟約을 맺은 나라이다. [부주]林: 5개월은 천자天子에 비해 2개월이 준 것이다. 함께 맹약盟約을 맺은 나라는 그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5개월이면 올 수 있다. 모두 온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오거나 오지 않거나 구애되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대부大夫는 3개월 만에 장사 지내니 같은 지위에 있는 관원官員이 오고,注+옛날에는 행역行役에 철을 넘기지 않았다.는 달을 넘겨 장사 지내니 인척이 온다.注+유월踰月은 달을 넘기는 것이다. 과 같다. 이는 조상弔喪 오는 것을 각각 거리의 원근遠近으로 도착하는 날짜를 차등하여 장사 지내는 절도節度로 삼았다는 말이다.
사자死者를 위해 물품을 주되 장사 지내기 전에 미치지 못하였고,注+는 장사 지내기 이전의 시신尸身을 이르는 통칭通稱이다.생자生者조문弔問하되 슬퍼할 때에 미치지 못하였으며,注+제후 이상은 장사 지내고 나면 최복衰服을 벗고 곡위哭位를 없애고서 양암諒闇에서 3년의 상례喪禮를 마친다.흉사凶事를 미리 행하였으니 예가 아니다.注+중자仲子가 살아 있는데도 와서 을 주었기 때문에 흉사凶事를 미리 행하였다고 한 것이다.
8월에 기인紀人이국夷國토벌討伐하였으나 이국夷國에 통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注+이국夷國성양城陽장무현莊武縣에 있고, 기국紀國동완東莞극현劇縣에 있다. 은공隱公 11년 전례傳例에 “각 제후국諸侯國에 큰 사건이 생겼을 때 그 일을 통고하면 기록하고 통고하지 않으면 기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기인紀人이국夷國을 토벌한 이 사건이 사책史策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부자夫子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에서는 그 사건을 드러내어 《춘추》의 를 밝혔다.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
가 있었으나 재해災害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또한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注+부번負蠜이다. 장공莊公 29년 전례傳例에 “식물植物재해災害를 입지 않으면 기록하지 않는다.”고 하고서, 또 여기에서 그 를 드러낸 것은 인거引據한 것이 사책史策만이 아니라 간독簡牘의 기록도 아울러 채택採擇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부주]林: 는 아마도 를 갉아먹는 벌레 따위인 듯하다.
혜공惠公 말년에 송사宋師注+송읍宋邑이다. 진류陳留외황현外黃縣 동쪽에 황성黃城이 있다.에서 패배시켰는데, 은공隱公이 즉위하여 강화講和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래서 9월에 송인宋人宿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두 나라가 비로소 통호通好한 것이다.注+의례義例가 없기 때문에 에 그 결과만을 말했을 뿐이다.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
겨울 10월 경신일에 혜공을 개장改葬하였다.
은공이 곡림哭臨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注+환공桓公을 태자로 세웠기 때문에 은공이 사양하고서 감히 상주喪主 노릇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은공이 임금의 정사政事를 대리하였기 때문에 은공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부주]林: 앞에 가서 하는 것이다.
혜공이 하였을 때에 송나라와 전쟁戰爭중이었고,注+[부주]林: 에서 송사宋師를 패배시킨 전쟁이다.태자太子환공桓公이 어렸기 때문에 장례葬禮미비未備한 점이 있었다.注+[부주]林: 환공桓公이 어렸기 때문에 장례葬禮미비未備하고 부족한 점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장改葬한 것이다.
위후衛侯가 와서 회장會葬하였다.
은공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또한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注+제후諸侯제후諸侯장례葬禮회장會葬하는 것은 가 아니므로 은공隱公을 만나 를 행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책史策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 위국衛國급군汲郡조가현朝歌縣에 있다.
나라 공숙共叔반란叛亂을 일으켰을 때 공손활公孫滑나라로 도망가니,注+공손활公孫滑공숙단共叔段의 아들이다.위인衛人이 그를 위해 정나라를 쳐서 늠연廩延탈취奪取하였다.注+[부주]林: 공손활을 위해 정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은 것이다.
그러자 정인鄭人천왕天王의 군대와 나라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 남쪽 변방을 공격하면서注+서괵국西虢國이다. 홍농弘農섬현陝縣 동남쪽에 괵성虢城이 있다. [부주]林: 군대를 마음대로 부리는 것을 ‘’라 한다. 한 편으로 나라에 출병出兵을 요청하였다.注+[부주]林: 나라가 나라에 증원군增援軍을 요청한 것이다.
주자邾子공자예公子豫에게 사람을 보내어 사적私的으로 군대를 요청하니,注+공자예公子豫나라 대부大夫이다. 사사로이 군대를 요청한 것이다. 공자예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기를 청하였다.
은공이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드디어 멋대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주인邾人정인鄭人注+나라 땅이다.에서 결맹結盟하였다.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은공이 명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 남문南門을 지었다.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이 또한 은공이 명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注+이 명이 아니기 때문에 에 기록하지 않았다.’는 말이 에 세 번 보인다. 이는 모두 큰 역사役事를 일으킨 것이므로 각각 들어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부주]林: 이 두가지 일로써 대부大夫가 제멋대로 행동한 단서端緖를 드러내었다.
12월에 채백祭伯이 왔으니 이는 천왕天王이 명한 일이 아니었다.注+[부주]林: 천왕天王의 신하로 왕명王命을 무시하고 사사로이 나라와 교제交際하였으니, 왕실王室의 일을 알 만하다.
중보衆父하였다.注+중보衆父공자익사公子益師이다.
은공이 소렴小斂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일死亡日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注+경좌卿佐소렴小斂대렴大斂 때에 모두 임금이 직접 참여하는 것은 독실히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처음 죽었을 때에 이 더욱 돈독하고 가 더욱 융숭隆崇하기 때문에 소렴小斂으로 글을 만든 것이다. 단지 대렴大斂에만 참여하거나 그 에 가지 않으면 모두 사망일死亡日을 기록하지 않는다. [부주]林: 이는 중보衆父사망일死亡日을 기록하지 않은 이유를 말한 것이다. 을 지은 자가 을 기록하고, 을 기록하고, 를 기록하는 가 있음을 해석한 것이다.


역주
역주1 春王正月 : 이에 대해서는 說이 분분하다. 그러나 大別하면 春은 夏正의 春이고 月은 周正의 月이라는 설이 하나이고, 春과 月이 모두 夏正이라는 설이 하나이고, 春과 月이 모두 周正이라는 설이 하나이다. 이는 千古의 疑案이므로 可否를 논할 수 없어 다만 杜注에 따라 周正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하는 讀者는 조선 南九萬의 《藥泉集》春秋春王正月記疑, 宋文欽의 《閑靜堂集》春秋論, 李圭景의 《五洲衍文長箋散稿》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역주2 體元居正 : 天地의 元氣를 本體로 삼아 항상 正道로 처신하며 政敎를 펴는 것이다. 대체로 帝王의 卽位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역주3 朝廟告朔 : 天子가 曆을 諸侯에게 頒賜하면 제후는 그 曆을 받아 祖廟에 보관하였다가 朔日이 되면 宗廟에 朔日을 告하고, 그 달의 政事를 살핀 뒤에 종묘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다. 《左傳文公六年經閏月不告朔注》
역주4 告朔朝正 : 宗廟에 朔日을 告하고서 朝廷에서 政事를 살핌이다. 朝正은 視朝와 같은 뜻이다.
역주5 公及邾儀父盟于蔑 : 朴世采의 《春秋補編》에는 “모든 盟約을 기록함에 있어 內國이 會盟을 主導했으면 ‘及’이라 稱하고, 外國이 주도했으면 ‘會’라 칭한다. 비록 魯나라 땅에서 會盟했을 경우에도 外國이 주도했으면 ‘及’이라고 칭하니, 이는 저 外國人이 와서 미쳤다는 뜻이고, 두 나라 이상이 會盟했를 경우에는 ‘會’라고 칭하니, 이는 외국의 회맹에 가서 會合했다는 뜻이다. 邾는 附庸國이고, 儀父는 邾子克의 字이다. 부용국의 임금은 字를 칭하여 周王의 신하와 동일하게 대우하고, 夷狄의 임금은 이름을 칭하여 中國의 諸侯보다 낮춘다.”는 程子의 說을 인용해 補註하였다.
역주6 : 대본에는 ‘城’으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傳正義》(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地’로 바로잡았다.
역주7 : 喪家에 주는 車馬 등의 물품이다. 《公羊傳》 〈隱公元年〉에 ‘車馬를 賵이라 하고, 財貨를 賻라 한다.’라고 하였다.
역주8 傳例 : 上下의 傳文을 例로 삼은 것을 注에서는 모두 傳例라 하였다.
역주9 : 대본에는 ‘託’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하여 ‘記’로 고쳐 번역하였다.
역주10 일의 得失 : 〈孔疏〉에 의하면 得은 임금이 신하에 대해 恩寵이 있는 것이고, 失은 은총이 없는 것이다.
역주11 不書卽位攝也 : 이에 대해서는 많은 異說이 있다. 何休는 “옛날에 周公도 섭정하였으나 죽음을 崩이라고 기록하지 않았는데, 지금 은공은 살아서는 侯로 칭하고 죽음을 薨으로 칭한 것은, 주공은 어린 成王을 임금으로 모시고서 그 정사만을 대리했을 뿐이며, 또 섭정에서 물러난 뒤에 죽었기 때문에 薨이라고 칭하고 崩이라고 칭하지 않았고, 隱公은 정사뿐만이 아니라 그 君位까지 代理하였고, 또 君位에 있을 때 죽었기 때문에 살아서는 公이라 칭하고 죽음을 薨이라 칭한 것이다.”고 하였다. 《春秋左傳正義元年疏》
胡安國은 “國君은 前王이 죽은 1년 뒤에 改元하고서 반드시 종묘에 고하는 禮를 행하고, 時政의 기록을 맡은 나라의 史官은 반드시 즉위의 일을 기록하는 것인데, 隱公卽位에 대한 기록이 빠진 것은 仲尼가 削除한 것이다.”고 하였다. 《胡氏春秋傳元年注》
조선의 朴致遠은 “《춘추》에 은공의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에 대해 左氏는 攝政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약 섭정이었기 때문에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면 이는 은공이 임금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은공이 임금이 되지 않았다면 《춘추》에 어째서 ‘公’이라 기록하고 어째서 ‘薨’이라고 기록하였는가? 반드시 섭정이 아니다. 《춘추》에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여러 임금들의 始終을 고찰해 보면 모두 위로는 天子의 命을 받지 않았고 안으로는 先君을 承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雪溪隨錄春秋》
또 丁若鏞은 “魯나라 12公 중에 오직 隱公‧莊公‧閔公‧僖公의 경우만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선유들은 ‘장공‧민공‧희공의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弑逆한 뒤에 君位에 올랐기 때문이고, 은공의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임금의 일을 대리했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나,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예로부터 섭정의 禮는 그 정사만을 대리하였고 그 名稱까지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舜이 섭정할 때 帝라고 칭하지 않았고, 伊尹‧周公이 섭정할 때 王이라고 칭하지 않았는데, 오직 노은공의 섭정에 대해서만은 公이라고 칭하였으니, 그 명칭까지 아울러 소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에는 은공의 즉위식이 이미 前年에 거행되었고, 惠公 또한 신하에게 시해된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느냐 하면, 은공 원년 겨울 10월에 혜공을 改葬하였는데, 개장한 임금들은 모두 시해당한 임금들이다. 宣公 11년에 子家의 難에 죽은 鄭幽公을 개장하였고, 襄公 28년에 崔杼의 난에 죽은 齊莊公을, 昭公 13년에 公子比의 난에 죽은 楚靈王을, 또 이해에 楚子에게 살해된 蔡襄公을 개장하였다. 壽命대로 살다가 잘 죽은 임금은 반드시 임금의 禮로 장사지내니, 개장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노혜공의 개장이 어찌 시해되었다는 確證이 아닌가. 임금이 시해되면 나라가 어지럽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백성들이 의심하기 때문에 즉위식을 거행한다. 魯成公 18년 正月庚申日에 晉나라 사람이 그 임금 厲公州蒲를 시해하자 2월 을유일에 悼公이 조정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렇다면 은공‧장공‧민공‧희공도 즉위식을 거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즉위식을 거행했는데도 《춘추》에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임금이 죽은 지 1년이 지나기 전에 즉위한 것이 正道가 아니고 한 해에 두 임금이 있는 것도 정도가 아니다. 정도가 아닌데도 기록한다면 숨겨야 할 나라의 좋지 못한 일을 숨기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與猶堂全書春秋考證》
또 琴英澤은 “제후가 位를 承繼함에 있어 안으로는 先君에게 나라를 물려받고, 위로는 천자의 명을 받은 뒤에야 史記에 襲封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다. 隱公은 惠公의 아들로 혜공이 죽은 뒤에 大夫들의 推戴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뿐, 물려받은 일도 천자의 명을 받은 일도 없었으니, 君臣父子의 大倫이 은공에 이르러 비로소 없어졌다. 《舊史》에는 필시 은공의 즉위에 대한 기록이 있었을 것인데, 내치고 《춘추》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聖人께서 大義로 決斷하시어 削除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晩萬齋集雜著春秋大義》
역주12 寤生 : 조선의 李恒福은 “寤生은 難産이다.”고 하였고 《魯史零言》, 朴致遠은 “睡眠 중에 아이가 出生했으면 깨어난 뒤에 놀라는 것은 常情이다.”고 하였다. 《雪溪隨錄》 그러나 譯者는 “寤는 ‘牾’의 假借字이니 寤生은 逆産이다.”고 한 楊伯峻의 說이 옳다고 생각한다.
역주13 蔓이면 草도 : 조선의 丁若鏞은 옛 사람에게 들은 말이라 하면서 “蔓에 句를 떼고 草에 句를 떼어야 하니, 뻗어나면 비록 풀이라 하더라도 제거할 수 없다는 말이다.”고 하였다. 지금 그 說에 따라 번역하였다. 《與猶堂全書春秋考證十二》
역주14 : 杜注에는 人民을 모은 것으로 해석하였으나, 楊伯峻의 설을 취하여 軍糧을 모은 것으로 번역하였다.
역주15 稱鄭伯……謂之鄭志 : 共叔段에게 이미 ‘아우’라는 말을 쓰지 않아 貶下하였으니, 鄭나라가 단을 쳤다고 글을 만드는 것이 마땅한데, 鄭伯이라고 칭하여 그를 폄하한 것은 아우를 잘못 가르친 죄를 나무란 뜻이다. 사실은 정백이 치려하자 段은 交戰도 하지 않고 共으로 도망하였는데, 전쟁에 승리해 적을 포로로 잡았다는 뜻인 ‘克’으로 글을 만든 것은 孔子의 뜻이 아니고, 정백의 뜻이 아우를 반드시 죽이고자 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孔子께서 이렇게 기록하여 鄭伯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역주16 不言出奔難之 : 杜注에는 이 句를 위의 ‘謂之鄭志’와 한 文段으로 묶어 정백의 뜻이 반드시 아우를 죽이고자 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出奔이라고 말하기 곤란해서였다는 뜻으로 해석하였으나, 역자의 생각으로는 이럴 경우 ‘謂之’ 두 글자의 해석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역자는 ‘謂之鄭志’를 위 句에 매어 번역하고, ‘不言出奔難之’는 獨自의 句로 보아, 共叔段이 出奔한 데에는 莊公도 책임이 있는데, 출분이라고 기록할 경우 공숙단에게만 죄가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史官이 붓을 대기가 곤란했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楊注〉
역주17 同軌 : 수레의 軌道가 같다는 말인데, 곧 天子의 統治圈 안에 있는 諸侯를 이른다.
역주18 行役 : 使命을 띠고 外國으로 가거나 出戰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19 諒闇 : 天子가 喪中에 거처하는 곳이다.
역주20 方嶽 : 東嶽泰山, 西嶽華山, 南嶽衡山, 北嶽恒山인데, 여기서는 바로 그 지방의 제후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옛날에는 天子가 5년마다 사방을 두루 巡狩하여 각 방악 밑에서 그 곳 제후들의 朝見을 받고서 治績을 고찰하여 黜陟의 政事를 행하였다.
역주21 : 대본에는 ‘難’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하여 ‘亂’으로 고쳤다.
역주22 小斂 : 屍體에 옷을 입히고 이불로 싸는 것을 小斂이라 하고, 시체를 棺에 넣는 것을 大斂이라 한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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