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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2)

춘추좌씨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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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六年春王正月이라
[經]夏 公會齊侯宋公陳侯衛侯曹伯伐鄭하야 圍新城하다注+新城 鄭新密 今熒陽密縣
[經]秋 楚人圍許注+楚子不親圍 以圍者告 [附注] 林曰 夷狄始圍中國하니 諸侯遂救許하다注+皆伐鄭之諸侯 故不復更叙
[經]冬 하다注+無傳
[傳]六年春 晉侯使賈華伐屈하니 夷吾不能守하야 盟而行하다注+賈華 晉大夫 非不欲校 力不能守 [附注] 林曰 乃與屈人盟 必不背己而去
將奔狄하니 郤芮曰
後出同走 罪也注+嫌與重耳同謀而相隨 不如之梁이라
이라하니 乃之梁하다注+以梁爲秦所親幸 秦旣大國 且穆姬在焉 故欲因以求入
[傳]夏 諸侯伐鄭하니 以其逃首止之盟故也注+首止盟在五年
圍新密하니 鄭所以不時城也注+實新密而經言新城者 鄭以非時興土功 齊桓聲其罪以告諸侯
[傳]秋 하다注+[附注] 林曰 圍許以救鄭者 攻其所必救也
[傳]冬 蔡穆侯將許僖公以見楚子於武城하다注+楚子退舍武城 猶有忿志 而諸侯各罷兵 故蔡將許君歸楚 武城 楚地 在南陽宛縣北 [附注] 朱曰 蔡楚黨 故使許僖公降楚
하고 大夫衰絰하고 士輿櫬하다注+縛手於後 唯見其面 以璧爲贄 手縛 故銜之 櫬 棺也 將受死 故衰絰 [附注] 林曰 君將受死 故使大夫衰絰從 有喪者之服
楚子問諸逢伯注+逢伯 楚大夫 [附注] 林曰 問以受降之禮한대 對曰
武王克殷 微子啓如是注+微子啓 紂庶兄 宋之祖也어늘 武王親釋其縛하고 受其璧而祓之注+祓 除凶之禮하고 焚其櫬하고 禮而命之하야 使復其所하니다
楚子從之하다


6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이다.
여름에 희공僖公제후齊侯송공宋公진후陳侯위후衛侯조백曹伯과 연합해 나라를 토벌하여 신성新城을 포위하였다.注+신성新城나라의 신밀新密이다. 지금의 형양熒陽밀현密縣이다.
가을에 초인楚人나라를 포위하니注+초자楚子가 친히 포위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포위한 것으로 나라에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에 ‘초인楚人’으로 기록한 것이다. [부주]林: 이적夷狄이 비로소 중국中國을 포위한 것이다.제후諸侯가 드디어 나라를 구원하였다.注+모두 나라 토벌에 참여했던 제후諸侯이므로 다시 국명國名을 서술하지 않은 것이다.
겨울에 희공僖公나라 토벌에서 돌아왔다.注+이 없다.
6년 봄에 진후晉侯가화賈華를 보내어 을 치니 이오夷吾는 지킬 수가 없어서 굴인屈人과 맹약을 맺고서 떠났다.注+가화賈華나라 대부大夫이다. 이오夷吾는 대항하려 하였으나 지킬 힘이 없었다. 이는 중이重耳처럼 현명賢明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부주]林: 굴인屈人들과 반드시 자신을 배신背信하지 말라고 맹약한 뒤에 떠난 것이다.
으로 도망가려 하니, 극예郤芮가 말하였다.
“뒤에 나가면서 같은 곳으로 도망가는 것은 공모共謀했다는 를 인증하는 것이니注+중이重耳공모共謀하였기 때문에 따라갔다는 오해를 받는다는 말이다.나라로 가는 것만 못합니다.
나라는 나라와 친근親近하여 신임信任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드디어 나라로 갔다.注+나라는 나라와 친근親近하여 신임信任을 받고 있고, 나라는 대국大國인데다가 목희穆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목희穆姬를 통하여 진군秦君에게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여름에 제후諸侯나라를 토벌하였으니, 수지首止회맹會盟에서 도망갔기 때문이다.注+수지首止회맹會盟희공僖公 5년에 있었다.
신밀新密을 포위하였으니, 나라가 성을 쌓을 시기가 아닌데 성을 쌓았기 때문이다.注+사실은 신밀新密인데, 에 ‘신성新城’이라고 기록한 것은 나라가 때가 아닌데도 토목공사土木工事를 일으켰으므로 제환공齊桓公이 그 선포宣布제후諸侯에게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이다.
가을에 초자楚子나라를 포위하여 나라를 구원하려 하였는데, 제후諸侯나라를 구원하니, 초자楚子는 이내 돌아갔다. 注+[부주]林: 나라를 포위해 나라를 구원하려 한 것은 나라를 공격하면 제후諸侯가 반드시 구원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겨울에 채목후蔡穆侯허희공許僖公을 데리고 무성武城으로 가서 초자楚子알현謁見시켰다.注+초자楚子는 30리를 물러나 무성武城에 주둔하고서도 여전히 분한 마음을 가졌다. 제후諸侯가 각각 군대를 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채목공蔡穆公허희공許僖公을 데리고 초자楚子에게 간 것이다. 무성武城나라 땅으로 남양南陽완현宛縣 북쪽에 있다. [부주]朱: 나라는 나라의 맹방盟邦이기 때문에 허희공許僖公에게 나라에 항복降服하게 한 것이다.
이때 허남許男은 손을 뒤로 묶고 입에 옥벽玉璧을 물었으며, 대부大夫상복喪服을 입고 을 들고 따랐다.注+손을 뒤로 묶고 얼굴만을 내놓고서 폐백으로 바칠 옥벽玉璧을 입에 문 것이다. 손을 뒤로 묶었기 때문에 옥벽玉璧을 입에 문 것이다. 이다. 장차 죽임을 당할 것이므로 상복喪服을 입은 것이다. [부주]林: 임금이 장차 죽임을 당할 것이므로 대부大夫들에게 상복喪服을 입고 따르게 한 것이다. 최질衰絰을 당한 자가 입는 옷이다.
초자楚子허남許男의 처리를 봉백逢伯에게 묻자,注+봉백逢伯나라 대부이다. [부주]林: 항복을 받는 예를 물은 것이다.봉백逢伯이 대답하였다.
“옛날에 무왕武王나라를 이겼을 적에 미자微子가 이와 같이 하였는데,注+미자微子서형庶兄으로 나라의 시조始祖이다.무왕武王은 손수 그 결박을 풀어 주고 그 입에 물었던 구슬을 받아서 하고注+을 제거하는 이다. 을 불사르고 로 대우하고서 명을 내려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초자楚子는 그의 말을 따랐다.


역주
역주1 公至自伐鄭 : 朴致遠은 “鄭나라가 中夏를 배반하고 夷狄인 楚나라에 복종한 罪가 있으니, 齊桓公이 鄭나라를 討罪하려면 어찌 핑계 댈 말이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農時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討伐한 것이다.’고 한 左氏의 말은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역주2 言不如重耳之賢 : 重耳는 君父의 명은 對抗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고서 담을 넘어 도망갔는데, 夷吾는 대항하려 하였으니, 重耳에 비해 夷吾가 賢明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역주3 梁近秦而幸焉 : 梁나라는 嬴姓의 나라로 僖公 19년에 秦나라에 의해 滅亡되었다. 幸은 信任이다.
역주4 楚子圍許以救鄭……乃還 : 楚나라의 盟邦인 鄭나라를 諸侯가 공격하자, 楚나라는 鄭나라를 구원할 목적으로 齊나라의 盟邦인 許나라를 포위하여, 鄭나라 공격하는 諸侯의 군대가 鄭나라에서 撤收해 許나라를 구원하게 한 것이다. 楚子는 목적이 이루어지자 還軍하였다는 말이다.
역주5 許男面縛銜璧 : 李震相은 “《左傳》에 실린 許男이 楚子를 謁見할 때 손을 뒤로 묶고 玉璧을 입에 문 일에 대해 趙氏와 劉氏는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하였다. 楚子는 許나라를 포위하여 鄭나라를 구원하려 하였고, 諸侯가 許나라를 구원하자 楚子는 즉시 돌아갔으니, 許나라가 무엇이 두려워서 蔡侯를 따라 楚나라에 가서 亡國의 임금이 항복하는 禮를 행하였겠는가? 만약 許나라가 楚나라에 항복하였다면 明年에 齊人이 무엇 때문에 鄭나라만 토벌하고 許나라는 토벌하지 않았겠는가? 洮‧葵丘의 會盟과 山戎(北戎)을 토벌할 때와 鹹‧牡丘의 회합에 許男이 끼지 않은 적이 없으니, 面縛含璧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趙氏는 《左氏異文箋》을 지은 淸나라의 趙坦이고 劉氏는 《左傳舊疏考證》을 지은 劉文淇이다 洮의 會盟은 僖公 8년에, 葵丘의 회맹은 僖公 9년에, 北戎의 토벌은 僖公 10년에, 鹹의 회합은 僖公 13년에, 牡丘의 회맹은 僖公 15년에 보인다.

춘추좌씨전(2)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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