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十有五年春王正月
에 公如齊
하다注+無傳 例在文十五年
[經]三月
에 公會齊侯宋公陳侯衛侯鄭伯許男曹伯盟于牡丘
注+牡丘 地名 闕 [附注] 林曰 兵車之會三하고 遂次于匡
하다注+匡 衛地 在陳留長垣縣西南
公孫敖帥師及諸侯之大夫救徐
하다注+公孫敖 慶父之子 諸侯旣盟次匡 皆遣大夫將兵救徐 故不復具列國別也
[經]秋七月
에 齊師曹師伐厲
하다注+厲 楚與國 義陽隨縣北有厲鄕
[經]九月
에 公至自會
하다注+無傳 [附注] 林曰 桓公之會不至 至此始書 桓德衰矣
[經]季姬 歸于鄫
하다注+無傳 來寧不書 此書者 以明中絶
[經]己卯晦
에 震夷伯之廟
하다注+夷伯 魯大夫展氏之祖父 夷 諡 伯 字 震者 雷電擊之 大夫旣卒書字
[經]楚人敗徐于婁林
하다注+婁林 徐地 下邳僮縣東南有婁亭 [附注] 林曰 病齊也
晉侯
하다注+例 得大夫曰獲 晉侯背施無親 愎諫違卜 故貶絶 下從衆臣之例 而不言以歸 不書敗績 晉師不大崩 [附注] 林曰 秦始見經 此晉秦兵端之始 是故晉秦兵交 始於韓而終於
傳
[傳]十五年春
에 楚人伐徐
하니 徐卽諸夏故也
라注+[附注] 林曰 徐自三年取舒 以披楚黨 威公服楚 徐與有功焉
三月
에 盟于牡丘
하니 尋葵丘之盟
이오 且救徐也
라注+葵丘盟在九年
諸侯次于匡以待之
하다注+[附注] 林曰 穆伯 卽公孫敖 諸侯皆遣大夫將兵救徐 次于匡以待大夫之救 齊之怠荒可知矣
傳
[傳]秋
에 伐厲以救徐也
하다注+[附注] 林曰 大夫救徐 楚師不退 故二師伐厲以救徐
傳
[傳]晉侯之入也
에 秦穆姬
賈君焉
注+晉侯入在九年 穆姬 申生姊秦穆夫人 晉獻公次妃賈女也하고 且曰 盡納群公子
하라注+群公子 晉武獻之族 宣二年傳曰 驪姬之亂 詛無畜群公子
晉侯許賂中大夫
注+中大夫 國內執政里丕等 [附注] 林曰 許之以賂 求復國러니 旣而皆背之
하고 賂秦伯以河外列城五
호되 東盡虢略
하고 南及華山
하고 內及解梁城
이러니 旣而不與
注+河外 河南也 東盡虢略 從河南而東盡虢界也 解梁城 今河東解縣也 華山在弘農華陰縣西南하고 晉饑
에 秦輸之粟
注+在十三年이로되 秦饑
에 晉閉之糴
하다注+在十四年
卜徒父筮之
하니 吉
注+徒父 秦之掌龜卜者 卜人而用筮 不能通之占 故據其所見雜占而言之 이라
涉河
면 侯車敗
하리다 詰之
注+秦伯之軍涉河 則晉侯車敗也 秦伯不解 謂敗在己 故詰之한대
其卦遇蠱☶☴
注+巽下艮上蠱하니 曰千乘三去
注+[附注] 林曰 曰以下連三句 皆卜筮之繇辭 千乘 諸侯也 言千乘三度敗去니 三去之餘
에 獲其雄狐
라하니 夫
는 必其君也
니이다注+於周易 利涉大川 往有事也 亦秦勝晉之卦也 今此所言 蓋卜筮書雜辭 以狐蠱爲君 其義欲以喩晉惠公 其象未聞 [附注] 朱曰 狐邪媚之物而曰雄焉 故知是晉君也
蠱之貞
은 風也
오 其悔
는 山也
注+內卦爲貞 外卦爲悔 巽爲風 秦象 艮爲山 晉象니 歲云秋矣
라 我落其實而取其材
니
所以克也
니이다注+周九月 夏之七月 孟秋也 艮爲山 山有木 今歲已秋 風吹落山木之實 則材爲人所取 [附注] 朱曰 內卦爲主 故以占秦 外卦爲賓 故以占晉 然則晉山而秦風也 當秋之時 山木結實 爲風所摧而剝落 則材爲我所取矣
하다注+晉侯車三壞 [附注] 朱曰 應千乘三去之占
對曰 君實深之
하니 可若何
릿가 公曰 不孫
하다注+[附注] 林曰 惠公謂其應答不遜
卜右
한대 慶鄭吉
이로되 弗使
注+惡其不孫 不以爲車右 此夷吾之多忌하고 步揚御戎
하고 家僕徒爲右
注+步揚 郤犨之父하고 乘小駟
하니 鄭入也
라注+鄭所獻馬名小駟
古者大事
에 必乘其産
注+[附注] 林曰 其所乘馬 必用土地所生 朱曰 國之大事 在祀與戎 故征戰爲大事하니
生其水土而知其人心
하고 安其敎訓而服習其道
注+[附注] 林曰 生長其地 故於其道路 素相服習하야 唯所納之
하야 無不如志
이니이다注+[附注] 林曰 惟所用之 馳驅進退 無不如人之志
今乘異産以從戎事
하니 及懼而變
이면 將與人
注+變易人意 [附注] 林曰 及臨戎 畏懼而變其常度 將與人易心而變亂人意하야
亂氣狡憤
하야 陰血周作
하고 張脈僨興
하야 外彊中乾
注+狡 戾也 僨 動也 氣狡僨於外 則血脈必周身而作 隨氣張動 外雖有彊形 而內實乾竭하야 進退不可
하고 周旋不能
하리니 君必悔之
리이다
九月
注+[附注] 朱曰 今七月也 應歲云秋矣之占에 晉侯逆秦師
할새 使韓簡視師
注+韓簡 晉大夫韓萬之孫한대 復曰
出因其資
注+謂奔梁求秦하고 入用其寵
注+爲秦所納하며 饑食其粟
이니이다
三施而無報
라 是以來也
어늘 今又擊之
하니 我怠秦奮
이라 倍猶未也
니이다注+[附注] 林曰 我師不直其君 故懈怠 秦師怒晉無禮 故奮發 以此觀之 秦之鬪志 倍猶未止
公曰 一夫不可狃
어든 況國乎
아注+狃 忕也 言辟秦則使忕來 [附注] 朱曰 狃 狎也 言一夫尙不可狎而侮之 況我有一國 可受其狎侮而不敵乎 遂使請戰曰 寡人不佞
이 注+[附注] 林曰 能合其衆以拒秦師 不能散其衆 使之避秦니 君若不還
이면 無所逃命
하리라 秦伯使公孫枝對曰
君之未入
에 寡人懼之
하고 入而未定列
에 猶吾憂也
注+列 位也어니와
壬戌
에 戰于韓原
注+九月十三日할새 晉戎馬還濘而止
하다注+濘 泥也 還 便旋也 小駟不調 故隋泥中
公號慶鄭
한대 慶鄭曰 愎諫違卜
注+愎 戾也 [附注] 林曰 愎諫 謂違慶鄭之諫而乘小駟 違卜 謂卜右慶鄭吉而不使은 固敗是求
니 又何逃焉
이릿가 遂去之
하다
梁由靡御韓簡
하고 虢射爲右
注+[附注] 林曰 梁由靡爲韓簡御車 虢射爲韓簡車右하야 輅秦伯
하야 將止之
注+輅 迎也 止 獲也러니 鄭以救公誤之
하야 遂失秦伯
하다注+[附注] 林曰 慶鄭不知其將獲秦伯 呼使救惠公 遂誤其師 遂失秦伯所在
晉大夫反首
注+反首 亂頭髮下垂也 拔草舍止 하니 秦伯使辭焉曰
寡人之從君而西也
는 亦晉之妖夢是踐
이니 豈敢以至
리오注+狐突不寐而與神言 故謂之妖夢 申生言帝許罰有罪 今將晉君而西 踐 厭也 [附注] 朱曰 秦國在西方 穆公欲執晉侯西歸秦國 謙言從汝晉君而西也 豈敢以至 言不敢終執晉侯而歸秦也
晉大夫三拜稽首曰 君履后土而戴皇天
하니 皇天后土實聞君之言
하고 群臣敢在下風
이니이다注+[附注] 林曰 穆公云豈敢以至 是已有歸晉君之意 故群臣敢在秦之下風
穆姬聞晉侯將至
하고 以大子罃弘與女簡璧登臺而履薪焉
注+罃 康公名 弘 其母弟也 簡璧 罃弘姊妹 皆居之臺以抗之 穆姬欲自罪 故登臺而荐之以薪 左右上下者 皆履柴 乃得通 [附注] 林曰 愚按 穆姬爲惠公告罪 登臺履薪宜也 而帥子女以同登臺 蓋暗用制之術하고 使以免服衰絰逆
하고 且告
注+免衰絰 遭喪之服 令行人服此服迎秦伯 且告將以恥辱自殺曰
上天降災하야 使我兩君匪以玉帛相見하고 而以興戎하니
若晉君朝以入이면 則婢子夕以死하고 夕以入이면 則朝以死하리니 唯君裁之하소서
乃舍諸靈臺
하다注+在京兆鄠縣 周之故臺 亦所以抗絶令不得通外內 [附注] 林曰 自曰上天降災以下止舍諸靈臺四十七字 檢古本皆無 尋杜注 亦不得有 是後人所加 不敢輒刪 姑存于此
大夫請以入
注+[附注] 林曰 秦大夫請執晉侯以入國하니 公曰
獲晉侯
는 以厚歸也
注+[附注] 林曰 以示厚獲俘囚而歸어늘 旣而喪歸
면 焉用之
注+若將晉侯入 則夫人或自殺며 大夫其何有焉
가注+何有 猶何得
且
注+謂反首拔舍 [附注] 林曰 謂反首拔舍以示重憂하고 注+[附注] 林曰 指皇天后土有同要質하니 不圖晉憂
면 重其怒也
오注+[附注] 朱曰 晉人慼憂如此 而我不圖謀之 則是增益晉人之忿怒也 我食吾言
이면 背天地也
라注+食 消也
重怒
는 難任
이오 背天
은 不祥
이니 必歸晉君
하리라注+任 當也
公子縶曰 不如殺之
하야 無聚慝焉
이니이다注+公子縶 秦大夫 恐夷吾歸復相聚爲惡 子桑曰 歸之而質其大子
면 必得大成
하리이다注+[附注] 朱曰 晉服秦 必成大和好也
晉未可滅
이어늘 而殺其君
이면 祗以成惡
이니이다注+祗 適也
且史佚有言曰 無始禍
注+史佚 周武王時大史佚하며 無怙亂
注+恃人亂爲己利하며 無重怒
라하니 重怒
는 難任
이오 陵人
은 不祥
이니이다
晉侯使郤乞告瑕呂飴甥
하고 且召之
注+郤乞 晉大夫也 瑕呂飴甥 卽呂甥也 蓋姓瑕呂 名飴甥 字子金 晉侯聞秦將許之平 故告呂甥 召使迎己한대
子金敎之言曰 朝國人而以君命賞
하라注+恐國人不從 故先賞之於朝 且告之曰 孤雖歸
나 辱社稷矣
니 其卜貳圉也
하라注+貳 代也 圉 惠公大子懷公
하다注+分公田之稅應入公者 爰之於所賞之衆 [附注] 林曰 爰 易也
呂甥曰 君亡之不恤하고 而群臣是憂하니 惠之至也라
將若君何
오注+[附注] 林曰 問國人將何以圖吾君 衆曰 何爲而可
오
對曰 征繕以輔孺子
하라注+征 賦也 繕 治也 孺子 大子圉
諸侯聞之
면 喪君有君
注+[附注] 朱曰 使外諸侯皆聞之 雖喪舊君 復有新君하고 群臣輯睦
하고 甲兵益多
라하야 好我者勸
하고 惡我者懼
注+[附注] 朱曰 使諸侯愛晉者 有所勸勉 惡晉者 有所畏懼하리니 庶有益乎
ㄴ저 衆說
하다
晉於是乎作
하다注+五黨爲州 州二千五百家也 因此又使州長各繕甲兵
初
에 晉獻公筮嫁伯姬於秦
하니 遇歸妹☳☱
注+兌下震上歸妹之睽☲☱
라注+兌下離上睽 歸妹上六變而爲睽
其繇曰 士刲羊
이라도 亦無衁也
하고 女承筐
이라도 亦無貺也
注+周易歸妹上六爻辭也 衁 血也 貺 賜也 刲羊 士之功 承筐 女之職 上六無應 所求不獲 故下刲無血 上承無實 不吉之象也 離爲中女 震爲長男 故稱士女라하니 西隣責言
을 不可償也
注+將嫁女於西 而遇不吉之卦 故知有責讓之言 不可報償 [附注] 林曰 兌西方也 兌爲口舌 以兌從震 是口舌雷動 今將嫁女於西 而遇西方口舌雷動之卦 故知有責讓之言 口舌旣動 雷震電明 故知不可報償며 歸妹之睽
는 猶無相也
니이다注+ 相 助也
震之離
는 亦離之震
이라注+二卦變而氣相通 [附注] 朱曰 歸妹上卦爲震 上六變而成離 睽之上卦爲離 亦能變而爲震 爲雷爲火
하며 爲嬴敗姬
注+嬴 秦姓 姬 晉姓 震爲雷 離爲火 火動熾而害其母 女嫁反害其家之象 故曰爲嬴敗姬하야
車說其輹
하고 火焚其旗
니 不利行師
하야 敗于宗丘
리이다注+ 丘猶邑也 震爲車 離爲火 上六爻在震則無應 故車脫輹 在離則失位 故火焚旗 言皆失車火之用也 車敗旗焚 故不利行師 火還害母 故敗不出國 近在宗邑
歸妹睽孤
하야 寇張之弧
注+此睽上九爻辭也 處睽之極 故曰睽孤 失位孤絶 故遇寇難而有弓矢之警 皆不吉之象니 姪其從姑
注+震爲木 離爲火 火從木生 離爲震妹 於火爲姑 謂我姪者 我謂之姑 謂子圉質秦라가 六年其逋
하야 逃歸其國
하야 而棄其家
注+逋 亡也 家謂子圉婦懷嬴 [附注] 林曰 數周必復易六位 故知從姑六年而必逋亡 朱曰 六年其逋 言子圉在秦六年 當逋逃也하고 明年其死於高梁之虛
하리이다注+惠公死之明年 文公入殺懷公于高梁 高梁 晉地 在平陽楊氏縣西南 凡筮者用周易 則其象可推 非此而往 則臨時占者 或取於象 或取於氣 或取於時日王相 以成其占 若盡附會以爻象 則構虛而不經 故略言其歸趣 他皆放此 [附注] 朱曰 易繫辭曰 極數知來之謂占 則易數固可以知來矣 然安有地名人事 預知於未來之先無一毫差者 此恐附會爲之 難以盡信
及惠公在秦曰 先君若從史蘇之占이면 吾不及此夫ㄴ저 韓簡侍라가 曰
物生而後에 有象하고 象而後에 有滋하고 滋而後에 有數니 先君之敗德을 及可數乎잇가
史蘇是占
을 勿從何益
注+言龜以象示 筮以數告 象數相因而生 然後有占 占所以知吉凶 不能變吉凶 故先君敗德 非筮數所生 雖復不從史蘇 不能益禍 [附注] 林曰 言先君所行 當致喪敗之德 及今言之 可一二數之乎 朱曰 天地生物之始 以氣化而生 人與萬物 旣生 乃有形象 形交氣感 遂以形化 而人與萬物 其象滋多 數始於一 自一以往 滋而十百千萬 其數不窮 人與萬物 皆不逃乎數也 惠公今日及禍 蓋由獻公殺嫡立庶 敗德所致也 非卜筮之罪也 蓋天下事物 雖不逃乎數 而禍福無不自己求之者 不專在於數也이리잇가
詩曰 下民之孽
은 匪降自天
이라 噂沓背憎
이 職競由人
이라하니이다注+詩 小雅 言民之有邪惡 非天所降 噂沓面語 背相憎疾 皆人競所主作 因以諷諫惠公有以召此禍也
傳
於是
에 展氏 有隱慝焉
이라注+隱惡 非法所得 尊貴罪所不加 是以聖人因天地之變 自然之妖 以感動之 知達之主 則識先聖之情以自厲 中下之主
傳
[傳]冬
에 宋人伐曹
하니 討舊怨也
라注+莊十四年 曹與諸侯伐宋
傳
[傳]十月
에 晉陰飴甥會秦伯
하야 盟于王城
하다注+陰飴甥 卽呂甥也 食采於陰 故曰陰飴甥 王城 秦地 馮翊臨晉縣東有王城 今名武鄕 [附注] 朱曰 王城 西周舊城也 平王東遷 故西周故地爲秦所有也
小人恥失其君而悼喪其親
注+痛其親爲秦所殺하야 不憚征繕以立圉也曰 必報讎
하리라
寧事戎狄
注+[附注] 林曰 言必爲君親力戰 以報秦之讎 寧可事戎狄以爲君 言欲致死於秦이리오하고 君子愛其君而知其罪
注+[附注] 林曰 知晉負秦 棄信背施幸災之罪하야 不憚征繕以待秦命
注+[附注] 林曰 以待秦歸惠公之命曰 必報德
하리라
有死無二
注+[附注] 林曰 言必爲君報秦之德 有死而已 無二心也라하니 以此不和
니이다
小人慼하야 謂之不免이라하고 君子恕하야 以爲必歸라하며
小人曰 我毒秦
하니 秦豈歸君
注+毒 謂三施不報이리오하고 君子曰 我知罪矣
니 秦必歸君
하리라
貳而執之하고 服而舍之면 德莫厚焉이오 刑莫威焉하야
服者懷德
하고 貳者畏刑
하리니 此一役也
注+言還惠公 使諸侯威服 復可當一事之功 [附注] 林曰 卽此歸惠公之一役에 秦可以霸
리라
納而不定
注+[附注] 朱曰 謂秦初納晉君 今而執之 是不安定之也하고 廢而不立
注+[附注] 朱曰 因遂廢之 不使復立爲君이면 以德爲怨
이니 秦其不然
하리라
秦伯曰 是吾心也
라하고 改館晉侯
하고 饋七牢焉
하다注+牛羊豕各一爲一牢
陷君於敗
注+謂呼不往 誤晉師 失秦伯하고 敗而不死
하니
又使失刑
注+[附注] 林曰 君歸而出奔 又使不得正誤師之刑이면 非人臣也
라
丁丑
에 殺慶鄭而後入
하다注+丁丑 月二十九日 [附注] 林曰 惠公先殺慶鄭而後入國 以見其忌克終不化也
且吾聞唐叔之封也
에 箕子曰 其後必大
라하니 晉其庸可冀乎
아注+唐叔 晉始封之君 武王之子 箕子 殷王帝乙之子 紂之庶兄 [附注] 林曰 晉其庸可冀望乎 言未可收也
於是
에 秦始征晉河東
하고 置官司焉
하다注+征 賦也 [附注] 林曰 秦置官司以征河東之賦 此卽惠公許賂秦以河外列城五之地 至是始歸之秦也
15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에
희공僖公이
제齊나라에 갔다.
注+전傳이 없다. 제후諸侯가 5년에 두 차례 서로 조현朝見하는 것이 예禮이다. 그 예例가 문공文公 15년에 보인다.
초인楚人이
서徐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注+초楚나라가 서徐나라를 치기까지 하였으니 제환공齊桓公의 패업霸業[伯事]을 알만하다.
3월에
희공僖公이
제후齊侯‧
송공宋公‧
진후陳侯‧
위후衛侯‧
정백鄭伯‧
허남許男‧
조백曹伯과
회합會合하여
모구牡丘에서
注+모구牡丘는 지명地名인데 소재지所在地를 알 수 없어 기록하지 않았다. [부주]林: 이것이 세 번째 병거지회兵車之會이다.결맹結盟하고서, 드디어
광匡에
注+광匡은 위衛나라 땅으로 진류陳留장원현長垣縣 서남쪽에 있다.주둔駐屯하였다.
공손오公孫敖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제후諸侯의
대부大夫와 함께
서徐나라를 구원하였다.
注+공손오公孫敖는 경보慶父의 아들이다. 제후가 결맹結盟한 뒤에 광匡에 주둔하여 모두 대부大夫를 파견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서徐나라를 구원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국별國別로 자세히 열기列記하지 않은 것이다.
가을 7월에
제군齊軍과
조군曹軍이
여厲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注+여厲나라는 초楚나라의 동맹국同盟國이다. 의양義陽수현隨縣 북쪽에 여향厲鄕이 있다.
8월에
황충蝗蟲이 있었다.
注+전傳이 없다. 재해災害가 되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9월에
공公이
회합會合에서 돌아왔다.
注+전傳이 없다. [부주]林: 앞서 제환공齊桓公의 회맹會盟에서 돌아왔을 때는 ‘지至’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비로소 ‘지至’를 기록한 것은 환공桓公의 덕德이 쇠하였기 때문이다.
계희季姬가
증鄫나라로 돌아갔다.
注+전傳이 없다. 귀녕歸寧한 것은 기록하지 않고 이것을 기록한 것은 희공僖公이 중간에 혼인관계를 단절한 것을 밝힌 것이다.
그믐날
기묘일己卯日에
이백夷伯의
사당祠堂에 벼락이 쳤다.
注+이백夷伯은 노魯나라 대부大夫전씨展氏의 조부祖父이다. 이夷는 시호諡號이고 백伯은 자字이다. 진震은 벼락이 친 것이다. 대부大夫는 죽은 뒤에는 자字를 기록한다.
초인楚人이
누림婁林에서
서군徐軍을
패배敗北시켰다.
注+누림婁林은 서徐나라 땅이다. 하비下邳동현僮縣 동남쪽에 누정婁亭이 있다. [부주]林: 제齊나라를 괴롭힌 것이다.
11월 임술일壬戌日에 진후晉侯와 진백秦伯이 한韓에서 전쟁戰爭하였다.
진백秦伯이
진후晉侯을 사로잡았다.
注+대부大夫를 잡는 것을 ‘획獲’이라 하는 것이 예例인데, 진후晉侯가 은혜를 저버려 친근親近한 나라를 잃었고, 간언諫言을 듣지 않고 점占을 어겼기 때문에 심하게 깎아내려 아래로 신하의 예例를 따라 ‘이귀以歸’라고 말하지 않았다. ‘패적敗績’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진군晉軍이 크게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주]林: 진秦나라가 경經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번 전쟁이 진晉나라와 진秦나라가 계속 전쟁을 하게 된 시초이다. 그러므로 진晉나라와 진秦나라의 교전交戰이 한韓에서 시작하여 13국國의 공벌攻伐에서 끝났다.
傳
15년 봄에
초인楚人이
서徐나라를
토벌討伐하였으니, 이는
서徐나라가
제하諸夏에 붙었기 때문이다.
注+[부주]林: 서徐나라가 희공僖公 3년에 서舒나라를 취하여 초楚나라의 당黨을 분리分離시켰으니, 환공桓公이 초楚나라를 굴복시킨 데는 서徐나라의 공功이 적지 않다.
3월에
모구牡丘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이는
규구葵丘의
맹약盟約을 다시 다지고 또
서徐나라를
구원救援하기 위해서이다.
注+규구葵丘의 회맹會盟은 희공僖公 9년에 있었다.
맹목백孟穆伯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제후諸侯의 군대와 함께 서徐나라를 구원하였다.
제후諸侯들은
광匡에
주둔駐屯하여 그
결과結果를 기다렸다.
注+[부주]林: 목백穆伯은 공손오公孫敖이다. 제후諸侯가 모두 대부大夫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서徐나라를 구원하게 하고는 광匡에 주둔하여 대부들이 서徐나라를 구원하기를 기다렸으니, 제환공齊桓公이 안일安逸에 빠져 태만怠慢했음을 알 수 있다.
傳
경經에 삭朔과 일진日辰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사관史官이 누락漏落한 것이다.
傳
가을에
여厲나라를 쳐서
서徐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
注+[부주]林: 제후諸侯의 대부大夫들이 서徐나라를 구원하였으나, 초군楚軍이 물러가지 않기 때문에 제군齊軍과 조군曹軍이 여厲나라를 쳐서 서徐나라를 구원한 것이다.
傳
진후晉侯가
진晉나라로 들어갈 때
진목희秦穆姬가
가군賈君을 부탁하고,
注+진후晉侯가 들어간 것은 희공僖公 9년이 있었다. 목희穆姬는 신생申生의 누이이고 진목공秦穆公의 부인夫人이다. 가군賈君는 진헌공晉獻公의 차비次妃로 가賈나라의 딸이다. 또 “
군공자群公子를 모두 불러 들이라.”
注+군공자群公子는 진晉나라 무공武公과 헌공獻公의 자손이다. 선공宣公 2년 전傳에 “여희驪姬의 난리 때 군공자群公子를 기르지 말라고 맹세하였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후晉侯는 가군賈君을 간음姦淫하고, 또 군공자群公子를 불러들이지도 않았다.
진후晉侯는
중대부中大夫들에게
뇌물賂物을 주기로 허락해 놓고는
注+중대부中大夫는 국내國內의 정치를 담당한 이극里克과 비정丕鄭 등이다. [부주]林: 뇌물을 주기로 허락하고서 귀국시켜 주기를 요구한 것이다. 임금이 된 뒤에는 모두
배신背信하였고,
진백秦伯에게
하외河外의 다섯
성城을
뇌물賂物로 주되 동쪽으로는
괵虢나라의 경계까지 전부와 남쪽으로는
화산華山까지와
하내河內의
해량성解梁城까지 주겠다고 허락해 놓고는 들어와 임금이 된 뒤에는 주지 않았으며,
注+하외河外는 하남河南이다. 동쪽으로 괵虢나라의 경계까지 전부라는 말은 하남河南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 괵虢나라의 경계까지를 다 준다는 말이다. 해량성解梁城은 지금의 하동河東해현解縣이다. 화산華山은 홍농弘農화음현華陰縣 서남쪽에 있다. 진晉나라에
기근饑饉이 들었을 때
진秦나라는 양곡을 보내 주었는데,
注+희공僖公 13년에 있었다.진秦나라에
기근饑饉이 들자
진晉나라는
양곡糧穀 보내는 것을 막았다.
注+희공僖公 10년에 있었다.
그러므로 진백秦伯이 진晉나라를 토벌討伐한 것이다.
복사卜士도보徒父가 이번 전쟁의
길흉吉凶을
점占치니
길吉하였다.
注+도보徒父는 진晉나라의 귀복龜卜을 맡은 사람이다. 거북점 치는 일을 맡은 사람이 시초점을 치다 보니 삼역三易의 점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본 잡점雜占에 의거해 말한 것이다.
“
황하黃河를 건너면
후거侯車가
패퇴敗退할 것입니다.”고 하니,
진백秦伯이 꾸짖었다.
注+진백秦伯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면 진후晉侯의 수레가 패퇴敗退한다는 뜻인데, 진백秦伯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자신의 수레가 패퇴敗退하는 것으로 오해誤解하였기 때문에 꾸짖은 것이다.
세 번 패퇴敗退하면 반드시 진晉나라 임금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
괘卦가
고괘蠱卦(☶☴)를 만났으니,
注+손괘巽卦가 하괘下卦이고 간괘艮卦가 상괘上卦인 것이 고괘蠱卦이다. 그
괘사卦辭에 ‘
천승千乘이 세 번
패퇴敗退할 것이니
注+[부주]林: 왈曰 이하의 세 문구文句는 모두 복서卜筮의 점사占辭이다. 천승千乘은 제후諸侯이니, 천승千乘이 세 번 패주敗走한다는 말이다. 세 번
패퇴敗退한 뒤에 그
웅호雄狐를 잡는다.’고 하였으니, 저
호고狐蠱는
진晉나라 임금이 틀림없습니다.
注+《주역周易》 고괘蠱卦괘사卦辭에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고 하였는데, 그 단사彖辭에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가서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것도 진군秦軍이 진군晉軍을 이기는 점괘占卦이다. 지금 여기에 말한 것들은 복서서卜筮書의 잡사雜辭인 듯하다. 호고狐蠱를 임금으로 여긴 것은 진혜공晉惠公을 비유하고자 한 뜻이지만 그런 상象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부주]朱: 여우는 사악邪惡한 동물動物인데 ‘웅雄’이라 하였기 때문에 진군晉君을 비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蠱의
정貞(內卦)은 바람이고,
회悔(外卦)는
산山인데,
注+내괘內卦를 정貞이라 하고, 외괘外卦를 회悔라 한다. 손괘巽卦는 바람으로 진秦나라를 상징象徵한 것이고, 간괘艮卦는 산山으로 진晉나라를 상징한 것이다. 지금 철이 이미 가을이 되었으니, 우리(바람)가 그 나무의 열매를 떨어뜨리고 그 재목을 취하는
상象입니다.
그러므로 이길 수 있습니다.
注+주정周正의 9월은 하정夏正의 7월로 맹추孟秋이다. 간괘艮卦는 산山으로 산에는 나무가 있다. 지금 철이 이미 가을이 되었으니, 바람이 불어 산의 나무에 달린 열매를 떨어뜨리면 사람들은 그 수목樹木을 베어 간다는 말이다. [부주]朱: 내괘內卦는 주인主人이 되기 때문에 진秦나라의 점占이 되고, 외괘外卦는 객客이 되기 때문에 진晉나라의 점이 된다. 그렇다면 진晉나라는 산山이고 진秦나라는 바람이니, 가을철을 당하여 산의 나무에 달린 열매가 바람에 의해 떨어지면 재목材木은 우리가 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열매가 떨어지고 나무가 없어진다면 패배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과연
진군晉軍은 세 번
패퇴敗退하여
한韓에 이르렀다.
注+진후晉侯의 수레가 세 번 망가진 것이다.[부주]朱: 천승千乘이 세 번 패퇴敗退한다는 점이 맞은 것이다.
“적군敵軍이 깊이 들어왔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경정慶鄭이 “임금께서 실로 저들을 깊이 들어오게 만든 것이니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혜공惠公은 “
불손不遜하다.”고 하였다.
注+[부주]林: 혜공惠公은 그의 대답을 불손不孫하게 여긴 것이다.
거우車右로 누가 좋을지를 점치니
경정慶鄭이
길吉하였는데도 그를
거우車右로 쓰지 않고,
注+불손不孫함을 미워하여 그를 거우車右로 삼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이오夷吾가 의심이 많은 점이다.보양步揚을
융거戎車의
어자御者로,
가복도家僕徒를
거우車右로 삼고,
注+보양步揚은 극주郤犨의 아비이다.소사小駟를 탔으니
정鄭나라가 바친 말이다.
注+정鄭나라가 바친 말의 이름이 소사小駟이다.
“옛날에는
대사大事 때에 반드시
본국本國에서 생산된 말을 탔습니다.
注+[부주]林: 수레에는 반드시 본국本國에서 생산生産된 말을 사용한다는 말이다.[부주]朱: 국가國家의 대사大事는 제사祭祀와 전쟁戰爭이기 때문에 전쟁戰爭을 대사大事라고 한다.
그 말은
본국本國의
수토水土에서
출생出生하여
주인主人의 마음을 잘 알고,
주인主人의
훈련訓練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본국本國의
도로道路에 익숙하므로
注+[부주]林: 본국本國에서 생장生長하였기 때문에 평소부터 그 도로에 익숙하다는 말이다. 오직 주인이 명하는 대로 받아들여 주인의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注+[부주]林: 부리는 대로 되어 달리고 나가고 물러나는 것이 주인의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외국산外國産을 타고서 전쟁戰爭하려 하시니, 전쟁할 때 만약 말이 겁을 먹고 변한다면 주인主人의 뜻을 어길 것입니다.
어지러운 기운이 사납게 움직이고
체내體內의 피가 전신에
발작發作하고
혈관血管이
팽창膨脹해 일어나서 겉은 강해 보이나 속은 기운이
고갈枯渴되어,
注+사람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부주]林: 전쟁에 임하여 말이 겁을 먹고 평소의 태도를 변하여 말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과 바뀌어 사람의 생각을 변란變亂시킨다는 말이다.注+교狡는 사나운 것이고, 분憤은 움직이는 것이다. 사나운 기운이 겉에 움직이면 혈맥血脈이 반드시 전신全身에 일어나서 기운을 따라 팽창하고 움직이니, 겉은 강한 모습이 있지만 속은 실로 고갈되었다는 말이다. 진퇴進退도 할 수가 없고
주선周旋도 할 수 없을 것이니 임금께서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9월에
注+[부주]朱: 지금의 7월이니, ‘지금 철이 가을이 되었다.’는 점이 들어맞았다.진후晉侯가
진군秦軍을 맞아 싸우려 할 때
한간韓簡을 보내어
적정敵情을
정탐偵探하게 하였는데,
注+한간韓簡은 진晉나라 대부 한만韓萬의 손자이다.한간韓簡이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군대는 우리보다 적으나 투지鬪志를 가진 병사兵士는 우리의 갑절이나 됩니다.”
혜공惠公이 무슨 까닭이냐고 묻자 한간韓簡이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타국他國에 나가 계실 때는
진秦나라의 도움에 의지하였고,
注+양梁나라로 도망가서 진秦나라에게 구원救援을 요구한 것을 말한다.진晉나라로 들어올 때는
진秦나라의
총애寵愛을 입었으며,
注+진백秦伯이 혜공惠公을 진晉나라로 들여보내어 임금으로 세워 준 것을 말한다.기근饑饉이 들었을 때에는
진秦나라의 곡식을 먹었습니다.
이 세 번의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들이 온 것인데, 지금 또 저들을
공격攻擊하려 하니,
아군我軍은
해태懈怠하여
사기士氣가 떨어졌고,
진군秦軍은
분개憤慨하여
사기士氣가
진작振作되었으니, 갑절로도 오히려 비유가 부족합니다.”
注+[부주]林: 아군我軍은 임금을 정직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해태懈怠하고, 진군秦軍은 진후晉侯의 무례無禮에 분노憤怒하기 때문에 분발奮發하니, 이로 본다면 진군秦軍의 투지鬪志는 진군晉軍에 비해 갑절로도 오히려 그 비유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혜공惠公은 “평범한 한 사내도 업신여겨
모욕侮辱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나라를 가진 임금이겠는가.”
注+유狃는 방자放恣함이니, 진군秦軍을 피하면 저들의 방자함을 부르게 된다는 말이다. [부주]朱: 유狃는 업신여김이니, 평범한 한 사내도 업신여겨 모욕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나라를 가진 내가 저들의 업신여김을 받고서 대적對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라 하고서 드디어
진군秦軍의
진영陣營으로 사람을 보내어 싸움을 청하기를 “
과인寡人이 변변치 못하지만 무리를 모을 수는 있으나 흩을 수 없으니,
注+[부주]林: 무리를 모아 진군秦軍을 막을 수는 있으나 무리를 해산解散해 진군秦軍을 피하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군君께서 만약 돌아가지 않는다면 싸우자는
군君의
명命을 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니,
진백秦伯은
공손지公孫枝를 보내어 대답하였다.
“
군君이
진晉나라로 들어가지 못했을 때는
과인寡人은
군君을 위해 두려워하였고, 들어갔으나 임금의 자리를 정하지 못했을 때도 오히려 나는
군君을 위해 근심하였소.
注+열列은 임금의 자리이다.
그러나 지금은 임금의 자리가 정해졌으니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한간韓簡은 물러나와 말하기를 “나는 포로가 되면 다행이겠다.”
注+포로가 되면 다행이겠다는 말은 반드시 패전敗戰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술일壬戌日에
양군兩軍이
한원韓原에서
교전交戰할 때
注+9월 13일이다.진후晉侯의
융마戎馬가 진흙 가운데 빠져 빙빙 돌기만 하고 나오지 못하였다.
注+영濘은 진흙이고, 환還은 도는 것이다. 소사小駟가 훈련訓練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진흙 가운데 빠진 것이다.
혜공惠公이 큰 소리로
경정慶鄭을 부르니
경정慶鄭은 “
간언諫言을 거스르고
점占을 어긴 것은
注+퍅愎은 거스르는 것이다. [부주]林: 퍅간愎諫은 경정慶鄭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고서 소사小駟를 탄 것을 이름이고, 위복違卜은 거우車右를 점칠 때 경정慶鄭이 길吉하였는데도 그를 거우車右로 삼지 않은 것을 이름이다. 본래
패전敗戰을
자초自招한 것인데 또 무엇 때문에 도망가려 하십니까.”라고 하고는 드디어 그곳을 떠났다.
양유미梁由靡가
한간韓簡의 수레를 몰고
괵석虢射이
거우車右가 되어
注+[부주]林: 양유미梁由靡가 한간韓簡의 어자御者가 되고 괵석虢射이 한간韓簡의 거우車右가 된 것이다.진백秦伯을 맞아 싸우다가
진백秦伯을 거의 잡게 되었는데,
注+노輅는 맞이하는 것이고, 지止는 잡는 것이다.경정慶鄭이
혜공惠公을
구원救援하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일을 그르쳐서 마침내
진백秦伯을 놓쳤다.
注+[부주]林: 경정慶鄭은 그들이 진백秦伯을 거의 잡게 된 줄을 모르고서 고함쳐 불러 혜공惠公을 구원하게 하였다가 마침내 일을 그르쳐 진백秦伯이 간 곳을 잃게 한 것이다.
진백秦伯이
진후晉侯를 잡아 데리고 돌아갔다.
注+경經에 기록한 11월 임술일壬戌日은 14일이다. 경經의 기록은 부고赴告에 따른 것이다.
진晉나라
대부大夫들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막사幕舍을 뜯어 가지고
혜공惠公의 뒤를 따르니,
注+반수反首는 두발頭髮을 어지럽게 아래로 늘어뜨리는 것이다. 발拔은 풀이고, 사舍는 머무는 것이다. 괴형훼복壞形毁服한 것이다. 진백秦伯이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위로해 말하였다.
과인寡人이 그대들의 임금을 따라 서쪽으로 가는 것은 단지[亦]
진晉나라의
요몽妖夢을
압식壓息하려는 것뿐이니 어찌 그대들의 임금을 데리고서
진秦나라까지야 가겠는가.”
注+호돌狐突이 자지도 않으면서 신神과 말하였기 때문에 요몽妖夢이라고 한 것이다. 신생申生이 ‘상제上帝가 나에게 죄罪가 있는 자를 처벌하기로 허락하셨다.’고 하였으니, 지금 진군晉君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는 것은 신생의 말을 압식壓息시키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천踐은 압厭이다. [부주]朱: 진秦나라는 서방西方에 있다. 진목공秦穆公은 진후晉侯를 잡아 서쪽 진秦나라로 돌아가려 하면서도 겸손하게 ‘그대들의 임금을 따라 서쪽으로 간다.’고 말한 것이다. ‘기감이지豈敢以至’는 감히 끝내 진후晉侯를 잡아 가지고 진秦나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자
진晉나라
대부大夫들이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임금님께서는 땅을 밟고 하늘을 이셨으니 하늘과 땅도 실로 임금님의 말씀을 들었고, 저희 신하들도 감히 아래에서 들었습니다.”
注+[부주]林: 목공穆公이 ‘기감이지豈敢以至’라고 한 말에는 이미 진군晉君을 돌려보내려는 뜻이 있기 때문에 군신群臣이 감히 진백秦伯의 하풍下風에 있으니 하풍下風을 순응順應해 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목희穆姬는
진후晉侯가 잡혀 온다는 말을 듣고
태자太子앵甇‧
홍弘과 딸
간벽簡璧을 데리고
대臺로 올라가 섶을 밟고서,
注+앵甇은 강공康公의 이름이고, 홍弘은 강공康公의 동모제同母弟이고, 간벽簡璧은 앵甇‧홍弘의 자매姊妹이다. 옛날에는 궁형宮刑과 폐형閉刑을 받은 사람을 모두 대臺에 살리면서 교통交通을 막았다. 목희穆姬가 스스로 죄罪를 받고자 하였기 때문에 대臺에 올라 섶을 깔았으니, 좌우와 상하에 있는 자들이 모두 섶을 밟은 뒤에야 교통할 수 있다. [부주]林: 내 생각에는 목희穆姬가 혜공惠公을 위해 죄罪를 고告한 뒤에 대臺로 올라간 것은 옳았지만 자녀子女를 거느리고 함께 대臺로 올라간 것은 은밀하게 협박脅迫의 방법을 쓴 것이다.사자使者에게
면免(문)하고
최질衰絰을 입고 가서
진백秦伯을 맞이하고 또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注+면免과 최질衰絰은 상喪을 당했을 때 입는 옷이다. 사자使者에게 이 옷을 입고 가서 진백秦伯을 맞이하고, 또 치욕恥辱 때문에 자살自殺하려 한다고 고하게 한 것이다.
“하늘이 재앙을 내려 우리 두 나라 임금으로 하여금 서로 옥백玉帛을 주고받는 예禮로 만나게 하지 않고 전쟁으로 만나게 하였습니다.
만약 진군晉君이 아침에 들어오면 나는 저녁에 죽을 것이고 저녁에 들어오면 아침에 죽을 것이니 임금님께서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진백秦伯은
혜공惠公을
영대靈臺에
안치安置하였다.
注+영대靈臺는 경조京兆호현鄠縣에 있는 주周나라의 고대古臺인데, 역시 내외內外가 교통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막았다. [부주]林: ‘왈상천강재曰上天降災’로부터 ‘사제영대舍諸靈臺’까지 47자字는 고본古本을 검색檢索해 보아도 없고, 두주杜注에 찾아보아도 없으니, 이는 후인後人이 추가追加한 말이다. 그러나 감히 산삭刪削할 수 없어 우선 여기에 남겨 둔다.
대부大夫들이 데리고 들어가기를 청하니
注+[부주]林: 진秦나라 대부大夫들이 진후晉侯를 데리고 국도國都로 들어가기를 청한 것이다.목공穆公이 말하였다.
“
진후晉侯를 잡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큰
수확收穫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인데,
注+[부주]林: 큰 포로를 잡아 돌아오는 것을 보이려 했다는 말이다. 데리고 돌아간 뒤에
상喪이 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注+만약 진후晉侯를 데리고 들어가면 혹 부인夫人이 자살自殺할지 모른다는 말이다. 대부들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注+하유何有는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와 같은 말이다.
또
진인晉人들이 슬픔과 근심으로 나를 감동시키고
注+반수발사反首拔舍한 것을 이름이다. [부주]林: 반수발사反首拔舍하여 중대한 근심을 보인 것을 이름이다.천지天地가 그 약속을 지키라고 나에게 요구하니,
注+[부주]林: 하늘과 땅이 함께 증인證人이 된 것을 가리킨 것이다.진晉나라 사람들의 근심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노여움을
가중加重시키는 것이요,
注+[부주]朱: 진인晉人들의 슬픔과 근심이 이러한데도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진인晉人들의 분노忿怒를 더욱 증가增加시키는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내 말을 저버리면 천지를 배반하는 것이다.
注+식食은 소멸消滅이다.
진晉나라 사람들의 분노를 가중시키면 감당하기 어렵고 천지를 배반하면 상서롭지 못하니, 반드시
진군晉君을 돌려보낼 것이다.”
注+임任은 감당함이다.
그러자
공자公子집縶는 “다시 무리를 모아 나쁜 짓을 못하도록 죽이느니만 못합니다.”고 하고,
注+공자公子집縶은 진秦나라 대부大夫이다. 이오夷吾가 돌아가면 다시 무리를 모아 나쁜 짓을 할까 두렵다는 말이다.자상子桑은 “그를
진晉나라로 돌려보내고 그
태자太子를
인질人質로 삼으면 반드시 크게 유리한
강화講和를 맺을 수 있습니다.
注+[부주]朱: 진晉나라가 진秦나라에 복종服從하면 반드시 크게 화평和平과 우호友好를 이룬다는 말이다.
진晉나라를
멸망滅亡시킬 수 없는데 그 임금을 죽인다면 두 나라의 관계만 나빠질 뿐입니다.
注+지祗는 다만이다.
또
사일史佚의 말에 ‘
화난禍難을 시작하지 말며,
注+사일史佚은 주무왕周武王 때의 태사太史로 이름이 일佚이다.환란患亂을 믿지 말며,
注+남의 환란患亂을 나의 이익으로 믿는 것이다.분노忿怒를
가중加重시키지 말라.’고 하였으니, 분노를 가중시키면 감당하기 어렵고, 남을 능멸하면 상서롭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진백秦伯은 진晉나라와의 화평和平를 허락하였다.
진후晉侯가
극걸郤乞을 보내어
하려이생瑕呂飴甥에게 알리고 그를
진秦나라로 불러오게 하였다.
注+극걸郤乞은 진晉나라 대부大夫이다. 하려이생瑕呂飴甥은 바로 여생呂甥이니, 아마도 성姓이 하려瑕呂이고 이름이 이생飴甥이고 자字가 자금子金인 듯하다. 진후晉侯는 진백秦伯이 화평和平을 허락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여생呂甥에게 알려 진秦나라로 오도록 불러 자기를 맞이하게 한 것이다.
자금子金이
극걸郤乞에게
혜공惠公을 대신해
군신群臣에게 할 말을 가르쳐 주기를 “
국인國人을
조정朝廷에 모아 놓고 임금의 명으로
상賞을 주고,
注+국인國人이 따르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먼저 조정朝廷에서 상賞을 주게 한 것이다. 또 임금의
명命이라 하고 저들에게 ‘
과인寡人이 비록 돌아간다 하더라도
사직社稷을
욕辱되게 하였으니
태자太子어圉를 나 대신 임금으로 세우라.’
注+이貳는 대代이다. 어圉는 혜공惠公의 태자太子로 뒷날의 회공懷公이다.고 하라.”고 하였다.
그대로 하니 사람들은 모두 통곡하였다.
注+임금이 환국還國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한 것이다.
진晉나라는 이때 비로소
원전제도爰田制度를 만들었다.
注+으레 국가로 납입納入할 공전公田의 조세租稅를 나누어 시상施賞할 사람들에게 주는 것으로 제도를 바꾼 것이다. [부주]林: 원爰는 바꾸는 것이다.
여생呂甥이 말하기를 “임금님께서는 망명亡命 중에 계시면서도 자신은 근심하지 않고 신하들만을 걱정하시니 지극한 은혜이다.
장차 임금님께 무엇으로 보답겠는가?”
注+[부주]林: 국인國人에게 장차 우리 임금님을 위해 어떻게 도모圖謀해야 하겠느냐고 물은 것이다.라고 하자,
대중大衆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여생呂甥이 대답하기를 “
부세賦稅를
징수徵收하고
군비軍備를
수선修繕하여
유자孺子를
보좌輔佐하는 것이다.
注+정征은 부세를 걷는 것이고 선繕은 다스리는 것이다. 유자孺子은 태자太子어圉이다.
제후諸侯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임금을 잃었으나 다시 임금을 가졌고
注+[부주]朱: 나라 밖의 제후諸侯들로 하여금 비록 옛 임금을 잃었으나 다시 새 임금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듣게 한다는 말이다. 신하들이 화목하고
갑병甲兵이 더욱 많아졌다.’고 하여 우리를 좋아하는 나라는 우리를
권면勸勉할 것이고 우리를 미워하는 나라는 우리를 두려워할 것이니
注+[부주]朱: 진晉나라를 사랑하는 제후諸侯에게는 권면勸勉하는 바가 있게 하고, 진晉나라를 미워하는 제후에게는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한다는 말이다. 아마도 나라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니
대중大衆이 기뻐하였다.
진晉나라는 이때에 비로소
주병제도州兵制度를 만들었다.
注+5당黨이 1주州이고, 1주州는 2천 5백 가家이다. 이로 인해 또 주州의 장관長官에게 각각 갑병甲兵을 수선修繕하게 한 것이다.
당초當初에
진헌공晉獻公이
백희伯姬를
진秦나라로 시집보내는 것에 대해
시초점蓍草占을 치게 하니
귀매괘歸妹卦注+태괘兌卦가 상괘上卦이고 진괘震卦가 하괘下卦인 것이 귀매괘歸妹卦이다.가
규괘睽卦로 변한
괘卦가 나왔다.
注+태괘兌卦가 하괘下卦이고 이괘離卦가 상괘上卦인 것이 규괘睽卦인데, 귀매괘歸妹卦의 상육上六이 변하여 규괘睽卦가 된 것이다.
사소史蘇가
점占을 풀이하기를 “
불길不吉합니다.
注+사소史蘇는 진晉나라의 복서卜筮를 맡은 태사太史이다.
그
괘사卦辭에 ‘사내가 양을 잡아도 피가 보이지 않고 여자가 광주리를 들고 있어도 줄 물건이 없다.’고 하였으니,
注+《주역周易》 귀매괘歸妹卦의 상육上六효사爻辭이다. 황衁은 피이고, 황貺은 주는 것이다. 양羊을 잡는 것은 남자의 일이고, 광주리를 드는 것은 여자의 일이다. 상육上六은 응應이 없기 때문에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양을 잡아도 피가 없고 위에서 광주리를 들어도 담겨지는 것이 없으니 불길不吉한 상象이다. 이괘離卦는 중녀中女가 되고 진괘震卦는 장남長男이 되기 때문에 사녀士女라고 칭한 것이다. 서쪽 이웃이 책망하는 말을
보상報償할 수 없으며
注+서쪽에 있는 진秦나라로 딸을 시집보내려 하는데 불길不吉한 괘卦를 만났기 때문에 꾸짖는 말을 보상報償할 수 없을 것을 안 것이다. [부주]林: 태괘兌卦는 서방西方이고 구설口舌도 된다. 아래의 태괘兌卦가 위의 진괘震卦에 붙었으니, 바로 구설口舌이 뇌동雷動하는 상象이다. 지금 딸을 서쪽으로 시집보내려 하는데 서방西方에서 구설口舌이 진동하는 괘卦를 만났기 때문에 꾸짖는 말이 있을 것을 안 것이고, 구설口舌이 이미 진동하여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것과 같기 때문에 보상할 수 없을 것을 안 것이다.귀매괘歸妹卦가
규괘睽卦로 변한 것은 도움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注+귀매괘歸妹卦는 여자가 시집가는 괘卦이고, 규괘睽卦는 괴리乖離되는 상象이다. 그러므로 도움이 없다고 한 것이다. 상相은 조助이다.
진괘震卦가
이괘離卦로 변한 것도
이괘離卦가
진괘震卦로 변한 것과 같아서
注+이 두 괘卦가 변하였으나 기운은 서로 통한다.[부주]朱: 귀매괘歸妹卦의 상괘上卦인 진괘震卦의 상육上六이 변하여 이괘離卦가 되었으니, 규괘睽卦의 상괘上卦인 이괘離卦도 변하여 진괘震卦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뇌雷가 되고
화火가 되니
영씨嬴氏에 의해
희씨姬氏가
패배敗北할 것입니다.
注+영嬴은 진秦나라의 성姓이고, 희姬는 진晉나라의 성姓이다. 진震은 뇌雷이고 이離는 화火이다. 화火가 성하여 그 어미를 해치는 것이 시집간 딸이 도리어 그 친가親家를 해치는 상象이기 때문에 영씨嬴氏에 의해 희씨姬氏가 패망敗亡한다고 한 것이다.
수레에
당면當免[輹]가 벗겨지고 불이 깃발을 태우니 전쟁에 불리하여
종구宗丘에서 패배할 것입니다.
注+복輹은 수레 밑을 묶는 것이다. 구丘는 읍邑과 같다. 진괘震卦는 거車가 되고 이괘離卦는 화火가 되는데, 상육上六의 효爻가 진괘震卦에 있어서는 응應이 없기 때문에 수레에 복輹이 벗겨지는 상象이고, 이괘離卦에 있어서는 위치位置를 잃었기 때문에 불이 깃발을 태우는 상象이니, 수레와 불이 모두 용도用途를 잃은 것을 말한 것이다. 수레가 망가지고 깃발이 불에 타기 때문에 전쟁에 불리不利하고, 불이 도리어 그 어미를 해치기 때문에 나라를 벗어나지 않고 가까운 종읍宗邑에서 패전敗戰한다는 말이다.
귀매괘歸妹卦는
규고睽孤하여
구적寇敵이 시위를 당기는
상象이니
注+이 말은 규괘睽卦상구上九의 효사爻辭이다. 규괘睽卦의 극상極上에 있기 때문에 ‘규고睽孤’라고 한 것이다. 자리를 잃고 외로이 멀리 떠났기 때문에 구적寇敵의 난리를 만나 궁시弓矢의 경보警報가 있다는 것이니 모두 불길不吉한 상象이다. 조카가
고모姑母에 의지하다가
注+진괘震卦는 목木이고 이괘離卦는 화火이니 화火는 목木에서 생긴다. 이괘離卦는 진매震妹가 되니 화火에게는 고모姑母가 된다. 나를 조카라고 하는 사람을 나는 그를 고모라고 하니 진秦나라에 인질人質이 된 태자太子어圉를 이름이다. 6년 만에 도망해 자기 나라로 돌아와서는 그 아내를 버리고
注+포逋는 도망하는 것이다. 가家는 자어子圉의 부인婦人회영懷嬴을 이름이다. [부주]林: 수數는 한 바퀴 돌면 반드시 되돌아와서 육효六爻의 위치가 바뀌기 때문에 고모姑母를 따른 지 6년이면 반드시 도망해 올 것을 안 것이다.[부주]朱: 6년 만에 도망한다는 것은 자어子圉가 진秦나라에 있은 지 6년 만에 도망한다는 말이다. 다음 해에
고량高梁의 언덕에서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注+혜공惠公이 죽은 다음 해에 문공文公이 들어가서 회공懷公을 고량高梁에서 죽였다. 고량高梁은 진晉나라 땅으로 평양平陽양씨현楊氏縣 서남쪽에 있다. 시초점을 치는 자들이 《주역周易》을 사용하면 그 상象을 미루어 알 수 있지만, 《주역周易》을 사용하지 않고 임시로 점을 치는 자들은 혹은 상象에서 취하기도 하고, 혹은 기氣에서 취하기도 하며, 혹은 시일왕상時日王相에서 취하기도 하여 점사占辭을 만든다. 그런데 이 점사占辭를 모두 효상爻象으로 부회附會한다면 허구虛構이고 정도正道가 아니기 때문에 그 결과만을 간략하게 말하였다. 다른 곳도 이와 같다. [부주]朱: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극수지래極數知來를 점占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역수易數로써 진실로 미래未來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찌 지명地名과 인사人事까지 사전事前에 조금의 틀림도 없이 미리 알 수 있겠는가. 이는 부회附會해 만든 것이니 다 믿기 어렵다.
혜공惠公이 진秦나라에 있을 적에 “선군先君이 만일 사소史蘇의 점占을 따랐다면 내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자, 한간韓簡이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말하였다.
“거북점은 형상形象으로 길흉吉凶을 보이고, 시초점은 수數로 길흉吉凶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물事物이 생긴 뒤에 형상形象이 있고 형상形象이 있은 뒤에 점점 많아지고 많아진 뒤에 수數가 생겼으니, 선군先君의 패덕敗德을 어찌 수數로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소史蘇의 점을 따랐다 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되었겠습니까.
注+거북점은 상象으로 길흉吉凶을 보여 주고, 시초점은 수數로 길흉吉凶을 알려 주니, 상象과 수數가 서로 의지해 생긴 뒤에 점占이 있게 되었다. 점占은 길흉吉凶을 아는 방법이지 길흉吉凶을 변화變化시킬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군先君의 패덕敗德은 시초점의 수數에서 생긴 것이 아니니, 비록 사소史蘇의 점占을 따르지 않았다 해서 화禍가 더 보태질 수 없다는 말이다. [부주]林: 선군先君이 행한 일은 패망敗亡를 부를 만한 악덕惡德이었으나, 지금에 와서 일일이 세어 말할 있겠느냐는 말이다.[부주]朱: 천지天地가 비로소 만물萬物을 낼 때 기화氣化로써 만물萬物을 내었는데 만물이 태어난 뒤에 형상形象이 있게 되었으며, 형체形體가 기운과 교감交感해 드디어 형화形化하여 사람과 만물의 형상이 점점 많아졌으며, 수數는 1에서 시작하여 1에서부터 앞으로 나가면서 점점 불어나서 십十, 백百, 천千, 만萬에 이르러 그 수가 끝이 없으니 사람과 만물이 모두 수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혜공惠公이 지금 화禍에 미친 것은 헌공獻公이 적자嫡子를 죽이고 서자庶子를 태자太子로 세운 패덕敗德의 소치所致이고 복서卜筮의 죄罪가 아니다. 천하天下의 사물事物이 비록 수數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화복禍福은 모두 자기가 구하는 것이고 오로지 수數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시詩에 ‘백성들의
재앙災殃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면전面前에서는 좋은 말만하다가 돌아서서는 서로 미워하기만을 오로지 힘쓰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注+시詩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시월지교편十月之交篇〉이다. 백성들에게 사악邪惡함이 있는 것은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면전面前에서는 서로 모여 좋게 말하다가 돌아서서는 서로 미워하는 짓을 모든 사람들이 다투어 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 시詩를 인용해 혜공惠公이 이런 화禍를 부른 점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간한 것이다.
傳
이백夷伯의 사당祠堂에 벼락이 쳤으니 이는 죄罪를 내린 것이다.
이 때에
전씨展氏에게 남이 모르는
죄악罪惡이 있었다.
注+은악隱惡은 법法으로 형벌刑罰할 수 없고, 존귀尊貴한 사람에게는 형벌刑罰을 시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천지天地의 변고變故과 자연自然의 요상妖祥을 인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지혜가 밝고 이치에 통달通達한 임금은 선성先聖의 뜻을 알아 스스로 격려激勵할 것이고, 중등中等과 하등下等의 임금들도 요상妖祥을 믿고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니, 신도神道가 교화敎化를 돕는 데는 오직 변고變故와 요상妖祥을 보이는 것이 그 효과가 깊다.
傳
겨울에
송인宋人이
조曹나라를 쳤으니 이는 옛
원한怨恨을 갚기 위해 친 것이었다.
注+장공莊公 14년에 조曹나라가 제후諸侯와 연합聯合하여 송宋나라를 쳤다.
傳
초楚나라가
서徐나라를
누림婁林에서
패배敗北시켰으니 이는
서徐나라가
구원救援을 믿었기 때문이다.
注+제齊나라의 구원救援을 믿은 것이다.
傳
10월에
진晉나라
음이생陰飴甥이
진백秦伯과
회합會合하여
왕성王城에서
결맹結盟하였다.
注+음이생陰飴甥은 바로 여생呂甥이다. 음陰을 채읍采邑으로 받았기 때문에 음이생陰飴甥이라고 한 것이다. 왕성王城은 진秦나라 땅이다. 풍익馮翊임진현臨晉縣 동쪽에 왕성王城이 있는데, 지금은 무향武鄕으로 불린다. [부주]朱: 왕성王城은 서주西周의 고성古城이다. 주평왕周平王이 동천東遷하였기 때문에 서주西周의 옛 땅이 진秦나라의 소유所有가 된 것이다.
진백秦伯이 “진晉나라는 화목和睦한가?”라고 묻자, 여생呂甥이 대답하였다. “화목하지 못합니다.
소인小人은 그 임금 잃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그 친척이
전사戰死한 것을 슬퍼하여
注+그 친척親戚이 진군秦軍에게 살해殺害된 것을 애통哀痛해 한다는 말이다. 세금을 내고
무기武器수선修繕하는 일을 꺼리지 않고,
태자太子어圉를 임금으로 세우기를 바라며 말하기를 ‘반드시 원수를 갚을 것이다.
어찌
이적夷狄을 섬기겠는가.’
注+[부주]林: 반드시 임금과 친척을 위해 힘을 다해 싸워 진秦나라에 원수를 갚을지언정 어찌 이적夷狄을 임금으로 섬기겠느냐는 말이니, 진秦나라와의 싸움에 목숨을 바치고자 한다는 뜻이다.라 하고,
군자君子는 임금을 사랑하지만 그 죄를 알기 때문에
注+[부주]林: 진晉나라가 진秦나라를 배반하여 신의信義와 은혜를 저버리고 진秦나라의 재앙災殃을 요행으로 여긴 죄罪를 안다는 말이다. 세금을 내고
무기武器수선修繕하는 일을 꺼리지 않고서
진秦나라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注+[부주]林: 혜공惠公을 돌려보내겠다는 진秦나라의 명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말하기를 ‘반드시
진秦나라의
은혜恩惠를
보답報答할 것이다.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으리라.’
注+반드시 임금을 위해 진秦나라의 은덕恩德을 보답할 것이다. 죽음이 있을 뿐, 두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말이다.고 하니, 이 때문에
화목和睦하지 못합니다.”
진백秦伯이 말하였다 “그대 나라 사람들은 그대 임금이 어찌 될 것으로 생각하는가?”
“소인小人은 슬퍼하면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고, 군자君子는 자신들의 마음으로 진秦나라의 마음을 헤아려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소인小人은 ‘우리나라가
진秦나라를 해쳤으니
진秦나라가 어찌 우리 임금을 돌려보내겠는가.’
注+독毒은 세 번의 은혜를 보답하지 않은 것을 이름이다.라 하고,
군자君子는 ‘우리가
죄罪를 알고 있으니
진秦나라는 반드시 우리 임금을 돌려보낼 것이다.
두 마음을 품으면 잡아가고 복종하면 석방釋放하는 것은 이보다 후한 덕이 없고 이보다 엄한 형벌이 없다.
복종하는 자들은 그
덕德을 생각할 것이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그 형벌을 두려워할 것이니, 이 한 번의 일로
注+혜공惠公을 돌려보내어 제후諸侯를 위복威服시키는 것이 다시 한 가지 일의 공업功業에 해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부주]林: 바로 혜공惠公을 돌려보내는 한 가지 일이다.진秦나라가
패자霸者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秦나라에서 우리 임금을
진晉나라로 들여보내어 임금이 되게 하고서 그의
군위君位를
안정安定시키지 않고,
注+[부주]朱: 진秦나라가 당초에 진군晉君을 들여보내 놓고서 이번에 잡아 가둔 것이 그를 안정시키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를
폐기廢棄하고서
복위復位시키지 않는다면
注+[부주]朱: 그대로 마침내 폐위廢位시키고 다시 임금으로 복위復位시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은덕恩德을
원한怨恨으로 만드는 것이니,
진秦나라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진백秦伯은 “이것이 바로 나의 생각이다.”고 하고서
진후晉侯의
처소處所를 바꾸어 주고, 7
뇌牢를 보내 주었다.
注+우牛‧양羊‧시豕 각각 1두頭가 1뇌牢이다.
아석蛾析이
경정慶鄭에게 “어째서 도망가지 않는가?”라고 하자,
注+아석蛾析은 진晉나라 대부大夫이다.경정慶鄭이 대답하였다.
“임금을
패전敗戰에 빠뜨렸고,
注+임금이 구해 달라고 부르는데도 가지 않고, 또 진군晉軍의 일을 그르쳐 진백秦伯을 놓치게 한 것을 이름이다. 임금이
패전敗戰하였는데 죽지도 않았다.
그런데 또 도망하여 형벌도 시행할 수 없게 한다면
注+[부주]林: 임금이 돌아오자 도망가면 또 군사軍事를 그르친 죄罪를 처벌할 수 없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신하로서 신하의 도리를 행하지 않는다면 도망간들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정축일丁丑日에
경정慶鄭을 죽인 뒤에
국도國都로 들어갔다.
注+정축丁丑은 11월 29일이다. [부주]林: 혜공惠公이 먼저 경정慶鄭을 죽이고서 국도國都로 들어갔으니, 남을 의심하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그의 버릇이 끝내 변화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이해에 진晉나라에 또 기근饑饉이 드니, 진백秦伯은 또 진晉나라에 곡식을 보내며 말하였다.
“나는 그 임금은 원망하지만 그 백성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리고 또
당숙唐叔이
봉封해질 때
기자箕子가 ‘그 자손이 반드시
강대强大해질 것이다.’고 하였으니,
진晉나라를 어찌
점령占領하기를 바라겠는가.
注+당숙唐叔은 진晉나라에 처음 봉封해진 임금으로 무왕武王의 아들이다. 기자箕子는 은왕殷王제을帝乙의 아들이고 주紂의 서형庶兄이다. [부주]林: 진晉나라를 어찌 바랄 수 있겠느냐는 말은 거두어들여 자기의 나라로 만들 수 없다는 말이다.
우선 진晉나라에 은덕을 베풀어 유능有能한 임금이 나오기를 기다리겠다.”
이때
진秦나라는 비로소
진晉나라
하동河東에
부세賦稅를
징수徵收하고
관사官司를
설치設置하였다.
注+정征은 부賦이다. [부주]林: 진秦나라가 관사官司를 설치하여 하동河東의 부세賦稅를 징수하였다. 이곳은 바로 혜공惠公이 진秦나라에 뇌물로 주기로 허락한 하외河外의 다섯 성城의 땅으로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진秦나라에 귀속歸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