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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7)

춘추좌씨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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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元年春王正月 公卽位注+無傳하다
[經]楚子陳侯隨侯許男圍蔡注+隨 世服於楚 不通中國 吳之入楚 昭王奔隨 隨人免之 卒復楚國 楚人德之 使列於諸侯 故得見經 定六年 鄭滅許 此復見者 蓋楚封之하다
[經]鼷鼠食郊牛하니 改卜牛하다
夏四月辛巳注+無傳 也 不言所食 所食非一處하다
[經]秋 齊侯衛侯伐晉注+[附注] 林曰 伐夷儀不書 書次五氏 伐河內不書 書次垂葮 公會齊衛于牽 帥狄師襲晉 戰于絳中 猶不書也 諸侯之無伯 春秋誠有不忍書也 必於是而後書春秋 益將終焉 是故春秋之初 諸侯無王者 齊鄭宋魯衛也 春秋之季 諸侯無伯者 亦齊鄭宋魯衛也하다
[經]冬 仲孫何忌帥師伐邾注+無傳하다
[傳]元年春 楚子圍蔡하니 報柏擧也注+在定四年
里而栽注+栽 設板築爲圍壘 周帀去蔡城一里 [附注] 林曰 栽 築墻長板也호되 廣丈高倍注+壘厚一丈 高二丈하고 夫屯晝夜九日注+夫 猶兵也 壘未成 故令人在壘裏屯守蔡하야 如子西之素注+子西本計 爲壘當用九日而成하니 蔡人男女以辨注+辨 別也 男女各別係纍而出降하다
使疆于江汝之間而還注+楚欲使蔡徙國在江水之北 汝水之南 求田以自安也 蔡權聽命 故楚師還하니
蔡於是乎請遷于吳注+楚旣還 蔡人更叛楚就吳 爲明年蔡遷州來傳하다
[傳]吳王夫差敗越于夫椒하니 報檇李也注+檇李 在定十四年 夫椒 吳郡吳縣西南大湖中椒山
遂入越하니 越子以甲楯五千保于會稽注+上會稽山也 在會稽山陰縣南하고 使大夫種因吳大宰嚭以行成注+[附注] 林曰 嚭 故楚臣 奔吳爲大宰 寵幸於夫差 故因之하다
吳子將許之한대 伍員曰 不可하다
臣聞之하니 樹德莫如滋 去疾莫如盡이라하니라
昔有過澆殺斟灌하고 以伐斟鄩注+澆 寒浞子 封於過者 二斟 夏同姓諸侯 襄四年傳曰 澆用師滅斟灌하야 滅夏后相注+夏后相 啓孫也 后相失國 依於二斟 復爲澆所滅하니라
后緡方娠이러니 逃出自竇注+后緡 相妻 娠 懷身也하야 歸于有仍注+后緡 有仍氏女하여 生少康焉하다
爲仍牧正注+牧官之長 하여 惎澆能戒之注+惎 毒也 戒 備也 [附注] 朱曰 言以澆爲毒害 而能戒備之하니 澆使椒求之注+椒 澆臣 [附注] 林曰 使求少康欲殺之어늘
逃奔有虞하야 爲之庖正하야注+虞舜後諸侯也 梁國有虞縣 庖正 掌膳羞之官 賴此以得除己害하다
虞思於是妻之以二姚注+思 有虞君也 虞思自以二女妻少康 姚 虞姓하고 而邑諸綸注+綸 虞邑하니 有田一成이오 有衆一旅注+方十里爲成 五百人爲旅
能布其德하고 而兆其謀注+兆 始하야 以收夏衆하고 撫其官職注+襄四年傳曰 靡自有鬲氏 收二國之燼以滅浞而立少康하며 使女艾諜澆注+女艾 少康臣 諜 候也 하고 使季杼誘豷注+豷 澆弟也 季杼 少康子后杼也하야 遂滅過戈하고 復禹之績注+過 澆國 戈 豷國하야 祀夏配天하야 不失注+物 事也하니라
今吳不如過하고 而越大於少康이어늘 或將豐之 不亦難乎注+言與越成 是使越豐大 必爲吳難
句踐能親而務施호되 施不失人注+所加惠賜 皆得其人하고 注+推親愛之誠 則不遺小勞
與我同壤하야 而世爲仇讐注+猶言天與不取어늘
於是乎克而弗取하고 將又存之하니 違天而長寇讐
後雖悔之라도 注+食 消也 已 止也리니 姬之衰也 日可俟也注+姬 吳姓 言可計日而待리라
介在하야 而長寇讐하고 以是求伯하니 必不行矣리라 弗聽하다
退而告人曰 越十年生聚하고 而十年敎訓注+生民聚財 富而後敎之하리니 二十年之外 吳其爲沼乎注+謂吳宮室廢壞 當爲汙池 爲二十二年 越入吳起本ᄂ저
三月 越及吳平하다
吳入越이로되 不書 吳不告慶하고 越不告敗也注+嫌夷狄不與華同 故復發傳ᄅ새니라
[傳]夏四月 齊侯衛侯救邯鄲하야 圍五鹿注+趙稷以邯鄲叛 范中行氏之黨也 五鹿 晉邑하다
[傳]吳之入楚也注+在定四年 使召陳懷公한대 懷公朝國人而問焉曰 欲與楚者하고 欲與吳者하라
注+都邑之人 無田者隨黨而立 不知所與 故直從所居 田在西者居右 在東者居左하라 逢滑而進注+當公 不左不右曰 臣聞國之興也以福이오 其亡也以禍라하니
今吳未有福하고 楚未有禍하니 楚未可棄 吳未可從이라
而晉盟主也 若以晉辭吳 若何 公曰 하니 非禍而何注+楚爲吳所勝
對曰 國之有是多矣 何必不復注+[附注] 林曰 言國家有此成敗 其類甚多 豈必皆亡不能復振이리오
小國猶復이온 況大國乎
臣聞國之興也 하니 是其福也注+如傷 恐驚動 其亡也 以民爲土芥하니 是其禍也注+芥 草也
楚雖無德이나 亦不艾殺其民하고 吳日敝於兵하야 暴骨如莽注+草之生于廣野 莽莽然 故曰草莽하니 而未見德焉이라
天其或者正訓楚也注+使懼而改過 禍之適吳 注+言今至리오 陳侯從之하다
及夫差克越 乃修先君之怨注+[附注] 林曰 召陳不至 闔廬事也 故夫差爲修先君之怨 하다
秋八月 吳侵陳하니 修舊怨也注+傳言吳不修德而修怨 所以亡
[傳]齊侯衛侯會于乾侯注+[附注] 林曰 乾侯 晉地하니 救范氏也注+[附注] 林曰 范氏在朝歌 故救之
師及齊師衛孔圉鮮虞人伐晉하야 取棘蒲注+魯師不書 非公命也 孔圉 孔烝鉏曾孫 鮮虞 狄帥 賤故不言하다
[傳]吳師在陳하니 楚大夫皆懼曰 闔廬惟能用其民하야 以敗我於柏擧러니 今聞其嗣又甚焉이라하니 將若之何 子西曰
二三子恤不相睦하고 無患吳矣注+[附注] 林曰 言楚諸臣所當憂恤者 在於不相親睦 不必以吳爲患하라
昔闔廬食不二味하고 하며 注+平地作室 不起壇也하고 注+彤 丹也 鏤 刻也하며 宮室不觀注+觀 臺榭하고 舟車不飾하며 衣服財用 擇不取費注+選取堅厚 不尙細靡 하며 在國 天有菑癘注+癘 疾疫也 하야 而共其乏困하며 在軍 熟食者分而後敢食注+必須軍皆分熟食 不敢先食 分 猶徧也하고 其所嘗者 卒乘與焉注+所嘗 甘珍 非常食 [附注] 林曰 卒乘之賤 亦得與焉 하며 勤恤其民하야 而與之勞逸이라
是以民不罷勞하야 注+知身死不見曠棄 이어늘
吾先大夫子常易之하니 所以敗我也注+易 猶反也
今聞夫差 次有臺榭陂池焉注+積土爲高曰臺 有木曰榭 過再宿曰次 [附注] 林曰 鄣澤曰陂 積水曰池 言夫差三宿以上 卽備臺池之樂 하고 宿有妃嬙嬪御焉注+妃嬙 貴者 嬪御 賤者 皆內官 하며 一日之行 所欲必成하고 玩好必從하며 珍異是聚하고 觀樂是務하며 視民如讐하야注+[附注] 林曰 用之爭戰 日新不已이라
夫先自敗也已 安能敗我注+爲二十二年越滅吳起本리오
[傳]冬十月 晉趙鞅伐朝歌注+討范中行氏하다


원년元年주왕周王정월正月즉위卽位하였다.注+이 없다.
초자楚子, 진후陳侯, 수후隨侯, 허남許男나라를 포위하였다.注+나라는 대대로 나라에 복종하여 중국中國교통交通하지 않았는데, 나라가 나라로 쳐들어와서 초소왕楚昭王나라로 도망갔을 때 수인隨人이 도와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나라가 마침내 나라를 회복回復할 수 있었다. 초인楚人수인隨人은덕恩德으로 여겨 나라를 제후諸侯에 끼게 하였다. 그러므로 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노정공魯定公 6년에 나라가 나라를 멸망滅亡시켰는데, 이곳 나라가 다시 나타난 것은 대개 나라가 다시 한 듯하다.
생쥐가 교제郊祭희생犧牲으로 바칠 소를 파먹으니, 다시 점을 쳐서 다른 소를 교우郊牛로 정하였다.
여름 4월 신사일辛巳日교제郊祭를 지냈다.注+이 없다. 에 이를 기록한 것은 시기時期가 지난 뒤에 교제郊祭를 지냈기 때문이다. 생쥐가 파먹은 곳을 말하지 않은 것은 파먹은 곳이 한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을에 제후齊侯위후衛侯나라를 토벌하였다.注+[부주]林: 〈정공定公 9년 에〉 이의夷儀를 토벌하였다고 기록하지 않고 오씨五氏에 주둔[次]하였다고 기록하고, 〈정공定公 13년 에〉 하내河內를 토벌하였다고 기록하지 않고 수단垂葮에 주둔[次]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정공定公 14년 에〉 정공定公제후齊侯, 위후衛侯에서 회합會合한 것만을 기록하고 적군狄軍을 거느리고 나라를 습격襲擊하여 강도絳都 안에서 교전交戰한 것은 오히려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는 제후諸侯(領袖)을 무시한 행위行爲를 《춘추春秋》에 차마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드시 금년今年 이후에 〈나라 토벌한 것을〉 《춘추春秋》에 기록한 것은 〈나라가〉 더욱 하여 패업霸業이 끝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초기初期을 무시한 제후諸侯, , , , 이고, 춘추春秋말기末期을 무시한 제후諸侯, , , , 이다.
겨울에 중손하기仲孫何忌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토벌하였다.注+이 없다.
원년元年 봄에 초자楚子나라를 포위하였으니 이는 백거柏擧에서의 패전敗戰보복報復하기 위함이었다.注+정공定公 4년에 있었다.
나라 도성都城 1 밖에 판자板子를 세우고서 보루堡壘를 쌓되注+판축板築을 설치하여 사면이 에워싸인 보루堡壘를 만든 것인데, 주잡周帀(둘레의 중심지)이 채성蔡城에서 1의 거리이다. [부주]林: 는 긴 판자板子로 담을 쌓는 것이다. , 두께를 1, 높이를 2으로 쌓고서注+보루堡壘의 두께가 1이고, 높이가 2이다. 역부役夫들이 밤낮 아흐레를 주둔하기를注+과 같다. 보루堡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시켜 보루堡壘 안에 주둔駐屯하여 채군蔡軍공격攻擊방수防守하게 한 것이다. 자서子西가 미리 세운 계획과 같이 하니注+자서子西의 본래 계획은 보루堡壘를 쌓는 데는 9이 걸려야 완성할 것으로 여긴 것이다. , 채인蔡人남녀男女를 각각 따로 묶어 가지고 나와 항복하였다.注+이다. 남녀男女를 각각 따로 묶어 가지고 나와 항복降服한 것이다.
초자楚子채인蔡人장강長江여수汝水 사이로 이주시키고서 환군還軍하였다.注+초자楚子나라로 하여금 강수江水의 북쪽과 여수汝水의 남쪽으로 나라를 옮겨 토지土地를 구하여 스스로 안착安着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나라가 임시방편臨時方便으로 나라의 명을 들었기 때문에 초군楚軍이 돌아간 것이다.
나라는 이에 나라로 옮겨 가기를 청하였다.注+초군楚軍이 돌아간 뒤에 채인蔡人은 다시 나라를 배반하고 나라에 붙었다. 명년明年나라가 주래州來천국遷國의 배경이다.
오왕吳王부차夫差부초夫椒에서 월군越軍을 패배시켰으니, 이는 취리檇李패전敗戰을 보복한 것이다.注+취리檇李전쟁戰爭정공定公 14년에 있었다. 부초夫椒오군吳郡오현吳縣 서남쪽에 위치한 대호大湖 가운데 있는 초산椒山이다.
드디어 나라로 쳐들어가니 월자越子는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든 군사 5천 인을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으로 가서 지키고 있으면서注+회계산會稽山으로 올라간 것이다. 회계會稽산음현山陰縣 남쪽에 있다. 대부大夫을 보내어 나라 태재大宰를 통해 강화講和청구請求하게 하였다.注+[부주]林: 는 옛날에 나라 신하로 나라로 도망해 와서 태재大宰가 되어 부차夫差총애寵愛를 받았기 때문에 〈대부大夫이〉 그를 통하게 한 것이다.
오자吳子가 그 청구를 허락하려 하자, 오원伍員이 말하기를 “안 됩니다.
신이 들으니 ‘은덕恩德을 베풂에는 그 은덕이 더욱 신장伸長되게 하는 것만 한 게 없고, 해악害惡을 제거함에는 그 해악이 다 제거되게 하는 것만 한 게 없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과국過國짐관斟灌을 죽이고서 짐심斟鄩을 공격하여注+한착寒浞의 아들로 해진 자이다. 짐관斟灌짐심斟尋나라의 동성제후同姓諸侯이다. 양공襄公 4년 에 “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짐관斟灌과 〈짐심씨斟尋氏를〉 격멸擊滅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하후夏后(夏나라 임금) 을 멸망시켰습니다.注+하후夏后(禹王의 아들)의 손자이다. 하후夏后이 나라를 잃고서 이 두 짐씨斟氏에게 의지하였다가 다시 에게 멸망滅亡당한 것이다.
이때 하후夏后의 아내 후민后緡이 임신 중이었는데 수챗구멍으로 도망쳐 나와注+후민后緡하후夏后의 아내이다. 임신姙娠이다. 나라로 가서注+후민后緡유잉씨有仍氏의 딸이다. 소강少康을 낳았습니다.
뒤에 소강少康나라의 목정牧正이 되어注+목정牧正목관牧官이다. 해독害毒으로 여겨 철저히 경계하니注+이다. 이다. [부주]朱: 독해毒害로 여겨 경계해 방비한 것이다. , 는 그 신하 를 보내어 소강少康을 잡아오게 하였습니다.注+의 신하이다. [부주]林: 를 보내어 소강少康을 잡아오게 하여 죽이고자 한 것이다.
그러자 소강少康나라로 도망가서 나라의 포정庖正(廚房長)이 되어 그 위해危害를 면하였습니다.注+후손後孫으로 제후諸侯가 된 나라이다. 양국梁國우현虞縣이 있다. 포정庖正선수膳羞(御膳)를 맡은 관원官員이다. 소강少康은 이에 힘입어 자신의 면제免除하게 된 것이다.
나라 임금 는 두 딸을 그의 아내로 주고注+유우국有虞國의 임금이다. 우사虞思가 스스로 두 딸을 소강少康의 아내로 준 것이다. 나라의 이다. 봉읍封邑으로 주니注+나라의 이다. , 소강少康토지土地 1민중民衆 1를 갖게 되었습니다.注+사방 10이고, 5백 이다.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고 비로소 나라를 회복恢復할 계획을 세워注+는 비로소이다. 나라 유민遺民들을 불러 모으고 관직官職에 있는 자들을 위무慰撫하는 한편注+양공襄公 4년 에 “(夏나라의 유신遺臣)가 유격씨有鬲氏에서 두 나라(斟灌과 짐심斟尋)의 유민遺民수합收合하여 한착寒浞격멸擊滅하고 소강少康을 세웠다.”고 하였다.여애女艾간첩間諜으로 보내어 의 동정을 살피게 하고注+여애女艾소강少康의 신하이다. 정탐偵探[候]함이다. 계저季杼를 보내어 의 아우 를 유인하게 하여注+의 아우이고, 계저季杼소강少康의 아들 후저后杼이다. 마침내 과국過國과국戈國을 멸망시키고서 우왕禹王업적業績(領土를 뜻함)을 수복收復하고는注+의 나라이고, 의 나라이다. 나라의 선조를 천제天帝합사合祀하여 옛 제도制度[舊物]를 잃지 않았습니다.注+이다.
지금 우리 나라는 과국過國보다 하지 못하고 나라는 소강少康보다 강대强大한데, 만약[或] 장차 〈저들의 요청을 허락하여〉 나라를 풍후豊厚하게 만들어준다면 우리나라의 환난患難이 되지 않겠습니까?注+나라와 강화講和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강대强大[豐大]하게 하는 것이니 반드시 나라의 환난患難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구천句踐친애親愛하고 시혜施惠하기를 힘쓰되, 시혜施惠할 만하지 못한 사람에게 시혜하지 않았고注+은혜를 입은 사람이 모두 은혜를 입힐 만한 사람들이었다는 말이다. , 공로功勞가 있는 사람은 버리지 않고 친애하였습니다.注+친애親愛성심誠心을 미루어 넓히면 작은 공로功勞가 있는 사람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나라는 우리나라와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으면서 대대로 원수로 지내왔습니다.注+하늘이 주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승리勝利하고서도 그 땅을 취하지 않고 도리어 저들을 존속시켜려 하시니, 이는 하늘의 뜻을 어기고 원수怨讐장구長久히 존속시키는 것입니다.
뒤에 비록 후회하여도 〈그 회한悔恨이 너무 깊어서 음식을 삭이듯이〉 삭일 수 없을 것이니注+이고, 이다. , 나라의 쇠망衰亡을 날을 꼽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注+나라의 이다. 멸망滅亡할 날을 꼽아 기다릴 수 있다는 말이다.
만이蠻夷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원수를 장구히 존속시키는 일로 패자霸者가 되기를 구하시니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으나, 부차夫差는 듣지 않았다.
오원伍員이 물러나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앞으로 나라는 10년 동안 출산出産을 장려하며 재력財力축적蓄積하고서 10년 동안 백성을 교육하고 병마兵馬훈련訓練시킬 것이니注+인구人口를 늘리고 재물을 적취積聚하여 백성들의 생활生活부유富裕해진 뒤에 교육한 것이다. , 20년 뒤에는 나라의 궁전宮殿이 아마도 소지沼池가 될 것이다.注+나라 궁실宮室파괴破壞되어 오지汙池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22년에 월군越軍나라로 쳐들어간 기본起本(原因)이다. ”고 하였다.
3월에 나라가 나라와 화평和平하였다.
나라가 나라로 쳐들어간 것을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가 승전을 통보通報하지 않았고 나라가 패전敗戰을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注+이적夷狄중화中華와 같이 여기지 않은 것으로 의심할 우려가 있으므로 다시 을 달은 것이다.
여름 4월에 제후齊侯위후衛侯한단邯鄲을 구원하기 위해 오록五鹿을 포위하였다.注+조직趙稷한단邯鄲의 백성을 거느리고서 반란을 일으켰다. 조직趙稷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이다. 오록五鹿나라 이다.
오군吳軍나라로 쳐들어갔을 적에注+정공定公 4년에 있었다.오자吳子(闔廬)가 사람을 보내어 진회공陳懷公을 부르니, 진회공陳懷公도성都城 사람들을 조당朝堂에 불러놓고서 묻기를 “나라를 가까이하고자 하는 자는 오른쪽에 서고, 나라를 가까이하고자 하는 자는 왼쪽에 서라.
나라 사람 중에 토지土地가 있는 자는 토지가 있는 곳에 따라 좌우左右로 나누어 서고, 토지가 없는 자는 족당族黨이 있는 곳에 따라 좌우로 나누어 서라.注+도읍都邑 안 사람 중에 토지土地가 없는 자들은 족당族黨을 따라 서고 편들 바를 모르기 때문에 곧 사는 곳에 따라 토지가 서쪽에 있는 자는 우측右側에 서고 토지가 동쪽에 있는 자는 좌측에 서게 한 것이다. ”고 하니, 봉활逢滑이 좌우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注+당공當公로 가지도 않고 로 가지도 않은 것이다.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국가가 흥성興盛하는 것은 에서 유래하고, 국가가 쇠망衰亡하는 것은 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지금 나라는 〈흥성할 만한〉 이 없고 나라는 〈쇠망衰亡할 만한〉 가 없으니, 나라를 아직은 버릴 수 없고 나라를 아직은 따를 수 없습니다.
나라가 맹주盟主이니 만약 나라를 핑계 대어 나라의 부름을 사절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회공懷公이 말하기를 “나라는 나라에 승리勝利를 안겨주고 임금은 도망갔으니 가 아니고 무엇인가?注+나라는 나라가 승리하는 바가 되었다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봉활逢滑이 대답하기를 “나라들에는 이런 일이 흔히 있었으니, 어찌 반드시 회복恢復하지 못하겠습니까?注+[부주]林: 국가國家에 이런 성패成敗가 있은 경우가 매우 많았으니, 어찌 반드시 모두 멸망하고 다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겠느냐는 말이다.
작은 나라도 오히려 회복하였는데 하물며 큰 나라이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국가가 흥성興盛할 때는 백성을 상처처럼 보아 안쓰럽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지 않으니 이것이 그 나라의 복이고注+여상如傷경동驚動할까 두려워함이다. , 국가가 쇠망할 때는 백성을 초개草芥처럼 여겨 함부로 부리니 이것이 그 나라의 이다.注+이다. ’고 하였습니다.
나라가 비록 은 없으나 그 백성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고, 나라는 날마다 전쟁으로 피폐하여 병사들의 시체가 황야에 풀처럼 널려 있으니注+풀이 드넓은 황야荒野에 나서 무성하게[莽莽然] 자라기 때문에 초망草莽이라 한다. 을 볼 수 없습니다.
하늘이 아마도 나라를 바르게 교훈하는 것인 듯하니注+나라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허물을 고치게 한 것이다. 나라로 갈 날이 얼마나 남았겠습니까?注+곧 닥친다는 말이다. ”라고 하니, 진후陳侯는 그의 말을 따랐다.
부차夫差나라를 이긴 뒤에 미쳐 선군先君의 원한을 보복하였다.注+[부주]林: 오라고 불렀으나 진후陳侯가 가지 않은 것은 합려闔廬 때의 일이다. 그러므로 부차夫差선군先君원한怨恨을 갚았다고 한 것이다.
가을 8월에 오군吳軍나라를 침공侵攻하였으니 과거의 원한을 보복하기 위함이었다.注+전문傳文나라가 을 닦지 않고 원한怨恨을 갚았기 때문에 하게 된 것을 말한 것이다.
제후齊侯위후衛侯건후乾侯에서 회합會合하였으니注+[부주]林: 건후乾侯나라 땅이다., 이는 범씨范氏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注+[부주]林: 범씨范氏조가朝歌에 있었기 때문에 구원한 것이다.
노군魯軍제군齊軍, 나라 공어孔圉, 선우인鮮虞人회합會合하여 나라를 쳐서 극포棘蒲를 취하였다.注+노사魯師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애공哀公으로 출동出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어孔圉공증서孔烝鉏증손曾孫이다. 선우鮮虞적군狄軍이니, 하기 때문에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오군吳軍나라에 주재駐在하니 나라 대부大夫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합려闔廬가 그 백성을 잘 사용하여 우리를 백거柏擧에서 패배시켰는데, 지금 듣자니 그 후사後嗣는 도리어 그보다 심하다 하니, 이 일을 장차 어쩌면 좋겠습니까?”라고 하니, 자서子西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들은 서로 화목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마십시오.注+[부주]林: 나라 제신諸臣들이 마땅히 걱정해야 할 바는 서로 친목親睦하지 못하는 데 있으니, 나라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과거에 합려闔廬는 밥을 먹을 때 두 가지 반찬을 먹지 않고 앉을 때 자리를 겹으로 깔지 않았으며, 궁실宮室을 높은 위에 세우지 않았고注+평지平地궁실宮室을 세우고 을 쌓지 않은 것이다. 기명器皿에는 옻으로 칠을 하거나 무늬를 조각彫刻을 하지 않았으며注+단청丹靑이고 조각彫刻이다. , 궁실宮室누대樓臺정각亭閣건조建造하지 않았고 배와 수레에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注+누대樓臺정자亭子[榭]이다. , 의복衣服재용財用(用器)은 견실堅實한 것을 택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았으며注+질기고 두꺼운 것을 골라 쓰고, 섬세纖細하고 미려靡麗(華麗)한 것을 숭상하지 않은 것이다. , 국내國內에 있을 때에 천재天災역병疫病유행流行하면注+질역疾疫(流行病)이다. 친히 순행巡行하면서 고아孤兒과부寡婦위무慰撫하고 그들에게 부족한 물품을 공급供給하였으며, 군중軍中에 있을 때에는 익힌 음식을 병사兵士들에게 두루 나누어준 뒤에 감히 먹었으며注+반드시 군사들이 모두 익힌 음식을 두루 나누어 먹기를 기다리고 감히 먼저 먹지 않은 것이다. (두루)과 같다. , 그가 맛보는 진미珍味졸승卒乘들도 모두 맛보게 하였으며注+맛본 것은 맛난 진기珍奇식품食品이고 항상 먹는 음식이 아니다. [부주]林: 비천卑賤졸승卒乘진미珍味를 맛보는 데 참여한 것이다. , 그 백성들을 성심으로 구휼救恤하여 백성들과 노일勞逸(苦樂)을 함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피로해하지 않고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注+자신의 죽음이 헛되이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을 안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선대부先大夫자상子常은 이와 반대로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가 실패하게 된 까닭입니다.注+과 같다.
지금 듣건대 부차夫差는 이틀 이상 머무는 곳에는 누대樓臺와 연못을 축조築造하고注+흙을 높이 쌓을 것을 ‘’라 하고, 수목樹木이 있는 것을 ‘’라 하고, 이틀 이상을 묵는 것을 ‘’라 한다. [부주]林: 장택鄣澤(둑이 있는 못)을 ‘’라 하고, 물을 가둔 것을 ‘’라 한다. 부차夫差가 3일 이상 묵는 곳에는 누대樓臺피지陂池의 즐거움을 갖추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잠자리에는 비장妃嬙빈어嬪御가 모시며注+비장妃嬙한 자이고, 빈어嬪御한 자인데, 모두 내관內官이다. , 하루 동안의 출행出行에도 하고자 한 일을 반드시 이루고 완호품玩好品을 반드시 가지고 가며, 진기珍奇한 물건만을 모으고 관락觀樂(觀覽과 연락宴樂)만을 일삼으며, 백성을 원수처럼 보아 백성을 날마다 새로운 곳에 쓴다고 합니다.注+[부주]林: 백성들을 쟁전爭戰에 사용하여 날마다 새로운 전쟁에 사용하고 그침이 없다는 말이다.
부차夫差는 자신을 먼저 패망시킬 것이니 어찌 우리를 패망시킬 수 있겠습니까?注+애공哀公 22년에 나라가 나라를 멸망시킨 기본起本이다.
겨울 10월에 나라 조앙趙鞅조가朝歌를 토벌하였다.注+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를 토벌한 것이다.


역주
역주1 書過 : 桓公 5년 傳에 “凡祀啓蟄而郊龍見而雩始殺而嘗閉蟄而烝過則書(무릇 제사는 驚蟄이 되면(正月) 郊祭를 지내고, 蒼龍星이 나타나면(4월) 雩祭를 지내고, 가을의 쌀쌀한 기운이 비로소 일어나면(8월) 嘗祭를 지내고, 벌레가 땅속으로 들어가면(10월) 烝祭를 지낸다. 시기가 지난 뒤에 지내면 기록한다.)”고 하였다.
역주2 除其害 : 除는 避이니, 內官이 되어 澆의 害를 피하였다는 말이다. 《左氏會箋》
역주3 舊物 : 古禮에 따라 天祭에 先祖를 合祀한 것이라고 한 〈楊注〉의 설을 취해 舊物을 옛 制度로 번역하였다.
역주4 親不棄勞 : 功勞가 있는 사람은 버리지 않고 親愛하였다는 말이다. 〈楊注〉
역주5 不可食已 : 깊은 悔恨이 가슴에 맺혀 음식처럼 소화할 수 없다는 말이다. 〈正義〉
역주6 蠻夷 : 楚나라와 越나라를 이른다. 吳나라는 楚나라와 越나라 사이에 位置하였다.
역주7 欲與楚者右……無田從黨 : 陳侯가 南面하였으니, 그 오른쪽이 楚나라이고, 그 왼쪽이 吳나라이다. 토지가 서쪽에 있는 것은 楚나라와 隣接하고 동쪽에 있는 것은 오나라와 隣接한 것이다. 〈楊注〉 黨은 族黨의 黨이니, 토지가 없는 자는 토지가 있는 족당을 따라 서게 한 것이다. 《左氏會箋》
역주8 當公 : 두 나라 중에 어느 나라도 가까이하지 않고 中立을 지킨 것이다.
역주9 國勝君亡 : 楚나라는 吳나라에 勝利를 안겨주고, 楚君은 도망갔다는 말이다. 〈楊注〉
역주10 視民如傷 : 帝王이 백성을 상처처럼 보아 안쓰럽게 여기고 함부로 부리지 않는 것이다. 《孟子》 〈離婁下〉에 “文王視民如傷”이란 말이 보인다.
역주11 其何日之有 : 며칠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左氏會箋》
역주12 居不重席 : 앉을 때 바닥에 깐 자리 위에 다시 한 장의 자리나 방석을 깔지 않은 것이다.
역주13 室不崇壇 : 古代에 貴族들이 집을 지을 때에는 반드시 먼저 平地보다 높게 壇을 쌓고서 그 위에 집을 세웠는데, 闔廬는 평지에 집을 세우고 단을 쌓지 않았다. 이는 그가 儉素했음을 말한 것이다. 〈楊注〉
역주14 器不彤鏤 : 器物에 붉은 옻칠을 하거나 꽃무늬를 새기지 않은 것이다. 〈楊注〉
역주15 親巡孤寡 : 巡은 巡行하여 백성을 慰撫함이다. 〈楊注〉
역주16 上[士] : 저본에는 ‘上’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士’로 바로잡았다.
역주17 死知不曠 : 曠은 空이다. 자신이 죽더라도 그 죽음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고 반드시 임금의 보답을 받을 것을 알았다는 말이다. 參考文獻 《左氏會箋》
역주18 用之日新 : 民力을 사용하여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에 使役하여 끝날 때가 없다는 말이다.

춘추좌씨전(7)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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