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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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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三年春王二月己巳 日有食之注+無傳 日行遲 一歲一周天 月行疾 一月一周天 一歲凡十二交會 然日月動物 雖行度有大量 不能不小有盈縮 故有雖交會而不食者 或有頻交而食者 唯正陽之月 君子忌之 故有伐鼓用幣之事 今釋例 以長歷推經傳月 此食 是二月朔也 不書朔 史失之 書朔日 例在桓十七年 하다
[經]三月庚戌 天王崩注+周平王也 實以壬戌崩 欲諸侯之速至 故遠日以赴 春秋不書實崩日而書遠日者 卽傳其僞 以懲臣子之過也 襄二十九年傳曰 鄭上卿有事 使印段如周會葬 今不書葬 魯不會하다
[經]夏四月辛卯 君氏 卒注+隱不敢從正君之禮 故亦不敢備禮於其母 하다
[經]秋 武氏子來求賻注+武氏子 天子大夫之嗣也 平王喪在殯 新王未得行其爵命 聽於冢宰 故傳曰王未葬 釋其所以稱父族 又不稱使也 魯不共奉王喪 致令有求 經直文以示不敬 故傳不復具釋也 [附注] 林曰 賻 助喪之物 此來求之始 하다
[經]八月庚辰 宋公和卒注+稱卒者 略外以別內也 元年 大夫盟於宿 故來赴以名 例在七年하다
[經]冬十有二月 齊侯鄭伯盟于石門注+來告 故書 石門 齊地 或曰 濟北盧縣故城西南濟水之門 [附注] 林曰 此特相盟之始 書石門以志諸侯之合 書鹹以志諸侯之散 以見春秋之終始鄭齊爲之也하다
[經]癸未 葬宋穆公注+無傳 魯使大夫會葬 故書 始死書卒 史在國承赴 爲君故 惡而(其)薨名 改赴書也 書葬則擧諡稱公者 會葬者在外 據彼國之辭也 書葬例在昭六年 하다
[傳]三年春王三月壬戌 平王崩이나 赴以庚戌이라 故書之하다
[傳]夏 君氏卒하니 聲子也
不赴于諸侯하고 不反哭于寢하고 不祔于姑 故不曰薨이요 不稱夫人이라 故不言葬注+夫人喪禮有三 薨則赴於同盟之國 一也 旣葬 日中自墓反 所謂反哭于寢 二也 而祔於祖姑 三也 若此則書曰夫人某氏薨 葬我小君某氏 此備禮之文也 其或不赴不祔 則爲不成喪 故死不稱夫人薨 葬不言葬我小君某氏 反哭則書葬 不反哭則不書葬 今聲子 三禮皆闕 釋例論之詳矣하고 不書姓하다
爲公故曰君氏注+不書姓 辟正夫人也 隱見爲君 故特書於經 稱曰君氏 以別凡妾媵 라하다
[傳]鄭武公莊公爲平王卿士注+卿士 王卿之執政者 言父子秉周之政 [附注] 朱曰 此亦推言其事之所由始也러니 王貳于虢注+虢 西虢公 亦仕王朝 王欲分政於虢 不復專任鄭伯한대 鄭伯怨王注+[附注] 朱曰 此鄭伯 指莊公也이어늘 王曰無之注+[附注] 朱曰 平王 紿曰 我無此意라하다
故周鄭交質注+[附注] 朱曰 平王 恐莊公不信 故交質其子 以堅其約하야 王子狐爲質於鄭하고 鄭公子忽爲質于周注+王子狐 平王子 [附注] 林曰 忽 鄭莊公子하다
王崩 周人將畀虢公政注+周人遂成平王本意한대 四月 鄭祭足帥師하야 取溫之麥하고 又取成周之禾注+四月 今二月也 秋今之夏也 麥禾皆未熟 言取者 蓋芟踐之 溫 今河內溫縣 成周 洛陽縣也 [附注] 朱曰 祭足 卽祭仲也하니 周鄭交惡注+兩相疾惡하다
君子曰
信不由中이면 質無益也注+[附注] 林曰 言周鄭之誠信 不出於中心 以子交質 無益於事
明恕而行注+[附注] 林曰 明則彼此相知 恕則彼此相諒하고 要之以禮注+[附注] 林曰 要結之以上下大小之禮節 雖無有質이라도 誰能間之리오
苟有明信注+[附注] 朱曰 誠使此心 明白而信實이면 澗谿沼沚之毛注+谿 亦澗也 沼 池也 沚 小渚也 毛 草也 [附注] 朱曰 毛 卽下文所謂菜也 蘋蘩蘊藻之菜注+蘋 大萍也 蘩 皤蒿 蘊藻 聚藻也 筐筥錡釜之器注+方曰筐 圓曰筥 無足曰釜 有足曰錡 潢汙行潦之水注+潢汙停水 行潦 流潦 可薦於鬼神이며 可羞於王公注+羞 進也이온 而況君子結二國之信하야 行之以禮 又焉用質注+通言盟約彼此之情 故云二國이리오
風有采蘩采蘋注+采蘩 采蘋 詩 國風 義取於不嫌薄物하고 雅有行葦泂酌注+詩 大雅也 行葦篇 義取忠厚也 泂酌篇 義取雖行潦可以共祭祀也하니 昭忠信也注+明有忠信之行 雖薄物皆可爲用 [附注] 朱曰 愚按 周 天子 鄭 諸侯 左氏不當竝稱周鄭 又不當曰結二國之信 周亦不當與侯國交質니라
[傳]武氏子來求賻하니 王未葬也注+[附注] 林曰 求賻以葬 王室事可知已ᄅ새니라
[傳]宋穆公疾 召大司馬孔父注+[附注] 林曰 孔父嘉 孔子六世祖也而屬殤公焉注+[附注] 朱曰 屬 謂付託於孔父 使立爲君也 曰 先君舍與夷而立寡人注+先君 穆公兄宣公也 與夷 宣公子 卽所屬殤公 寡人不敢忘하노라
若以大夫之靈으로 先君若問與夷 其將何辭以對
請子奉之하야 以主社稷하라
寡人雖死라도 亦無悔焉注+[附注] 林曰 亦無愧悔於先君之前이리라
對曰 群臣願奉馮也注+馮 穆公子莊公也니이다 公曰 不可하다
先君以寡人爲賢이라하야 使主社稷하시니 若棄德不讓이면 是廢先君之擧也 豈曰能賢注+言不讓則不足稱賢 [附注] 林曰 若我棄遜讓之德 不與殤公 是廢宣公擧賢之意也 豈曰能賢於人이리오
光昭先君之令德 可不務乎
吾子其無廢先君之功注+先君以擧賢爲功 我若不賢 是廢之하라하고 使公子馮出居于鄭注+辟殤公也하다
八月庚辰 宋穆公卒하니 殤公卽位하다
君子曰
宋宣公可謂知人矣로다
立穆公하야 其子饗之하니 命以義夫注+命出於義也 夫 語助인저
商頌曰 하야 百祿是荷라하니 其是之謂乎注+詩頌言殷湯武丁 受命皆以義 故任荷天之百祿也 帥義而行 則殤公宜受此命 宜荷此祿 公子馮不帥父義 忿而出奔 因鄭以求入 終傷咸宜之福 故知人之稱 唯在宣公也 殷禮有兄弟相及 不必傳子孫 宋其後也 故指稱商頌 [附注] 林曰 此言宣公以義制命 能使其子任荷天祿 合此詩之義也 朱曰 愚按 宣公遜國於弟 而使之逐其子 穆公遜國於姪 而使之殺其身 然則何百祿是荷之有 公羊傳曰 君子 宋之禍 宣公爲之也 斯言當矣 殤公遇弑 在桓公二年 인저
[傳]冬 齊鄭盟于石門하니 尋盧之盟也注+盧盟 春秋前 盧 齊地 今濟北盧縣故城
庚戌 鄭伯之車僨于濟注+旣盟而遇大風 傳記異也 十二月 無庚戌 日誤 [附注] 林曰 鄭莊公之車 仆于濟水 하다
[傳]衛莊公娶于齊東宮得臣之妹하니 曰莊姜注+得臣 齊大子也 大子不敢居上位 故常處東宮 [附注] 林曰 莊姜 從夫諡也 朱曰 此亦推言其事之始也 姝 女弟也이라
美而無子러니 衛人所爲賦碩人也注+碩人詩 義取莊姜美于色 賢于德 而不見答 終以無子 國人憂之니라
又娶于陳하니 曰厲嬀
生孝伯이나 早死注+陳 今陳國陳縣하고 其娣戴嬀 生桓公이어늘 莊姜以爲己子注+嬀 陳姓也 厲戴 皆諡 雖爲莊姜子 然大子之位未定하니라
公子州吁 嬖人之子也注+嬖 親幸也
有寵而好兵이로되 公弗禁하니 莊姜惡之注+[附注] 朱曰 惡州吁 恐其爲亂하니라
石碏諫曰 臣聞愛子하되 敎之以義方注+石碏 衛大夫 [附注] 朱曰 義以方外 所以制事之宜也하야 弗納於邪라하니
驕奢淫泆 所自邪也注+[附注] 朱曰 驕 謂恃己陵物 奢 謂夸矜僭上 淫 謂嗜慾過度 泆 謂放恣無藝 四者 邪之所從來也 四者之來 寵祿過也注+四者 皆自外至 故曰來니이다
將立州吁ᄂ댄 乃定之矣
若猶未也ᄂ댄 階之爲禍注+言將立爲大子 則宜早定 若不早定 州吁必緣寵而爲禍리이다
夫寵而不驕하며 驕而能降하며 降而不憾하며 憾而能眕者 鮮矣注+如此者少也 降其身則必恨 恨則思亂 不能自安自重 [附注] 林曰 得君寵愛而不驕矜 己驕而能自降其心 强降其心而不怨憾 有怨憾之心而能自重其身者 少矣니이다
且夫賤妨貴하며 少陵長하며 遠間親하며 新間舊하며 小加大注+小國而加兵於大國 如息侯伐鄭之比하며 淫破義 所謂六逆也注+[附注] 林曰 以庶孼之賤而防害嫡長之貴 以卑少而陵犯尊長 以疏遠而離間親近 以新進而離間耆舊 以小國而加兵大國 以淫慾而破壞義理 此六者 皆逆天理 君義臣行하며 父慈子孝하며 兄愛弟敬 所謂六順也注+臣行君之義 [附注] 林曰 君能制命爲義 此六者 皆順天理 去順效逆 所以速禍也니이다
君人者禍是務去어늘 而速之하시니 無乃不可乎잇가
弗聽하다
其子厚與州吁游어늘 禁之不可注+[附注] 林曰 石厚不聽하다
桓公立 乃老注+老 致仕也 四年經 書州吁弑其君 故傳 先經以始事하다


3년 봄 주왕周王 2월 기사일에 일식이 있었다.注+이 없다. 해는 운행運行이 더디어 1년에 천체天體를 한 바퀴 돌고, 달은 운행이 빨라 한 달에 천체를 한 바퀴 도니, 해와 달이 1년에 모두 12번을 서로 만난다. 그러나 해와 달은 움직이는 물건이므로 비록 운행에 일정한 도수度數가 있기는 하지만 약간의 영축盈縮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일월日月이 서로 만나도 일식日食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혹은 만날 때마다 자주 일식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직 정양正陽의 달인 4월의 일식만은 군자君子가 꺼리는 바이기 때문에 에서 북을 울리고 종묘宗廟폐백幣帛을 바치는 일이 있다. 지금 《석례釋例》에는 “장력長曆으로 의 달을 추산推算해 보면 이 일식日食은 2월 삭일朔日에 있었다.”고 하였다. 삭일朔日간지干支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사관史官이 빠뜨린 것이다. 삭일의 간지를 기록하는 환공桓公 17년에 보인다.
3월 경술에 천왕天王하였다.注+주평왕周平王이다. 사실은 임술일에 하였으나, 제후들을 속히 오게 하기 위하여 원일遠日(近日의 반대)에 한 것으로 부고赴告한 것이다. 《춘추》에 실지로 한 날을 기록하지 않고 원일을 기록한 것은 바로 그것이 거짓임을 전하여 신자臣子의 잘못을 징계한 것이다. 양공襄公 29년 에 “나라 상경上卿이 일이 있어서(당시에 정간공鄭簡公출분出奔으로 상경上卿이 대신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인단印段을 대신 나라로 보내어 회장會葬하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주왕周王장사葬事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가 회장會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을에 무씨武氏의 아들이 와서 를 요구하였다.注+무씨武氏의 아들은 천자天子 나라 대부大夫의 아들이다. 평왕平王이 아직 빈궁殯宮에 있으므로 신왕新王작명爵命을 거행하지 못하고 모든 일을 총재冢宰에게 맡겼다. 그러므로 에 “을 아직 장사葬事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아비의 을 칭한 까닭과 또 使라고 칭하지 않은 까닭을 해석하였다. 상사喪事에 노나라가 장사에 필요한 물자를 바치지 않아 를 요구하게 만든 것을 에 솔직하게 기록하여 불경不敬을 드러냈기 때문에 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부주]林: 금전金錢이나 물자로 상가喪家를 돕는 것이다. 이것이 와서 요구한 시초이다.
8월 경진에 송공宋公하였다.注+’이라고 칭한 것은 외국外國 임금의 죽음을 낮게 표현하여 아국我國 임금의 죽음과 차별한 것이다. 원년元年나라 대부大夫나라 대부와 宿에서 결맹하였기 때문에 송공宋公의 이름을 기록해 부고赴告한 것이다. 그 가 7년에 보인다.
겨울 12월에 제후齊侯정백鄭伯석문石門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와서 하였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석문石門나라 땅이다. 혹자는 제북濟北노현盧縣고성古城서남西南에 위치한 제수濟水이라고 하였다. [부주]林: 이것이 특상맹特相盟의 시초이다. 석문石門회맹會盟을 기록하여 제후의 화합和合을 드러내고, 을 기록하여 제후의 이산離散을 드러내어, 춘추春秋종시終始나라와 나라가 주도했음을 나타내었다.
계미에 송목공宋穆公을 장사지냈다.注+이 없다. 나라에서 대부大夫를 보내어 회장會葬하였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처음에 죽은 것을 ‘’이라고 기록한 것은 사관史官국내國內에서 부고赴告를 받고는 아국我國 임금과 차별해야 하기 때문에 ‘’이라는 명칭을 꺼려 부고에 기록된 로 고쳐 기록한 것이고, 장사葬事를 기록함에는 시호諡號를 들어 이라고 칭한 것은 회장會葬하기 위해 간 자가 외국外國에 있으므로 그 나라 입장立場에서 한 말이다. 그 소공昭公 6년에 보인다.
3년 봄 주왕周王 3월 임술일에 평왕平王하였으나, 경술일로 부고하였기 때문에 에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여름에 군씨君氏하였으니 성자聲子이다.
제후에게 부고赴告하지 않고, 정침正寢반곡反哭하지 않고, 고묘姑廟부제祔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라 하지 않았고, 부인夫人이라 칭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사葬事를 말하지 않았고,注+부인夫人상례喪禮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하면 동맹국同盟國에 부고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이고, 장사지낸 뒤 그날 중으로 묘소에서 돌아와 정침正寢에서 우제虞祭를 지내는 것이 이른바 ‘정침正寢반곡反哭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두 번째 이고, 졸곡卒哭하고서 조고祖姑부제祔祭하는 것이 그 세 번째 이다. 이 세 가지 예를 모두 행하였으면 ‘부인夫人모씨훙某氏薨’‧‘장아소군모씨葬我小君某氏’라고 기록하니, 이는 를 갖추었을 때의 문투文套이다. 혹 동맹국에 부고하지 않고 조고祖姑부제祔祭하지 않았으면 상례喪禮를 갖추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부인훙夫人薨’이라고 칭하지 않고, 장사에도 ‘장아소군모씨葬我小君某氏’라 말하지 않는다. 반곡反哭하였으면 장사葬事를 기록하지만 반곡하지 않았으면 장사를 기록하지 않는다. 지금 성자聲子에 이 세 가지 를 모두 거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석례釋例》에 자세히 하였다.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공隱公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군씨君氏라고 칭한 것이다.注+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정부인正夫人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은공隱公이 현재의 임금이기 때문에 특별히 에 기록하고, ‘군씨君氏’라고 칭하여, 뭇 첩잉妾媵과 차별하였다.
정무공鄭武公정장공鄭莊公를 이어 평왕平王경사卿士가 되었는데,注+경사卿士주왕周王으로 집정자執政者이다. 무공武公장공莊公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나라의 정권政權을 잡았음을 말한 것이다.[부주]林: 이 또한 그 일이(周와 이 서로 미워하여 인질을 교환하게 된 일) 일어나게 된 배경背景을 설명한 것이다. 평왕이 장공莊公에게 주었던 정권政權양분兩分하여 괵공虢公에게 그 반을 주려하자,注+서괵공西虢公이니, 그 또한 주왕周王조정朝廷에 벼슬하고 있었으므로, 평왕平王괵공虢公에게도 정권政權을 나누어 주고, 더이상 정백鄭伯만을 전임專任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정백鄭伯이 평왕을 원망하니,注+[부주]朱: 여기의 정백鄭伯장공莊公을 가리킨 것이다. 평왕은 “그럴 뜻이 없다.”고 하였다.注+[부주]朱: 평왕이 ‘나는 그런 뜻이 없다.’는 거짓말로 정백鄭伯을 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와 나라가 인질人質을 교환하여注+[부주]朱: 평왕은 장공이 믿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에 아들을 서로 인질로 교환하여 그 약속을 견고堅固히 하려 한 것이다.왕자王子나라의 인질人質이 되고, 나라 공자公子나라의 인질人質이 되었다.注+왕자 는 평왕의 아들이다.[부주]林: 은 정장공의 아들이다.
평왕이 죽은 뒤에 주인周人괵공虢公에게 정권을 맡기려 하니,注+주인周人이 평왕의 본의本意(遺志)를 실현하려 한 것이다. 4월에 나라 채족祭足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에 침입하여 보리를 하고, 가을에 또 성주成周에 침입해 벼를 취하니,注+4월은 지금의 2월이고, 가을은 지금의 여름이다. 보리와 벼가 다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취했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베어 짓밟은 것인 듯하다. 은 지금의 하내河內온현溫縣이고, 성주成周낙양현洛陽縣이다.[부주]林: 채족祭足은 바로 채중祭仲이다. 주나라와 정나라가 서로 미워하였다.注+두 나라가 서로 미워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군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論評하였다.
“믿음이 중심中心에서 나오지 않으면 인질人質은 아무 도움이 없다.注+[부주]林: 나라와 나라의 신의信義중심中心에서 나오지 않았으면서 아들을 인질로 교환했으니 일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서로의 처지를 밝게 살피고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일을 처리하며注+[부주]林: 밝게 살피면 피차를 서로 알고, 내 마음을 미루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면 피차를 서로 이해하게 된다. 예로써 서로 단속한다면注+[부주]林: 상하 대소의 예절禮節결속結束하는 것이다. 비록 인질이 없다 하더라도 누가 그 사이를 이간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공명하고 진실하다면注+[부주]朱: ‘가령 이 마음이 명백明白하고 진실眞實하다면’이라는 말이다.간계소지澗谿沼沚에서 자라는 수초水草와,注+谿인데, 산골 도랑이다. 는 연못이고, 는 작은 저수지渚水池이다. 이다.[부주]朱: 는 바로 하문下文에 말한 이다.빈번온조蘋蘩蘊藻 등의 야채野菜와,注+대평大萍이고 파호皤蒿이고 온조蘊藻취조聚藻이다.광거기부筐筥錡釜 등의 용기用器注+모난 것을 이라 하고 둥근 것을 라 하며, 발이 없는 솥을 라 하고 발이 있는 솥을 라 한다.황오행로潢汙行潦의 물도注+황오潢汙는 고여 있는 물이고 행료行潦는 흐르는 물이다. 모두 귀신에게 제물祭物로 바칠 수 있고 왕공에게 올릴 수 있는데,注+는 올리는 것이다. 하물며 군자가 두 나라 사이에 신의信義를 맺어 로써 행한다면 또 인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注+맹약盟約피차彼此의 심정을 함께 말하였기 때문에 두 나라라고 한 것이다.
시경詩經》의 에는 채번采蘩채빈편采蘋篇이 있고,注+채번采蘩채빈采蘋은 《시경詩經국풍國風인데, 박물薄物을 꺼리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에는 행위行葦형작편泂酌篇이 있으니,注+시경詩經》 〈대아大雅〉이다. 행위편行葦篇충후忠厚의 뜻을 취한 시이고, 〈형작泂酌〉篇은 비록 길가에 흐르는 물도 길어다 제사에 쓸 수 있다는 뜻을 취한 시이다. 이는 모두 충신忠信을 밝힌 이다.注+충신忠信스러운 행실이 있으면 아무리 박물薄物이라 하더라도 모두 쓰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부주]朱: 내가 고찰하건대 천자天子이고 제후諸侯이니, 좌씨左氏병칭並稱해서는 안 되고, 또 ‘두 나라의 신의信義를 맺는다.’고 해서도 안 되며, 나라도 제후국諸侯國인질人質을 교환해서도 안 된다.
무씨武氏의 아들이 노나라에 와서 부의賻儀를 요구했으니, 평왕의 장례葬禮를 치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注+[부주]林: 부의賻儀를 요구하여 장사 지내려 하였으니, 왕실王室의 사정을 알 만하다.
송목공宋穆公이 중해지자 대사마大司馬공보孔父를 불러注+[부주]林: 공보가孔父嘉공자孔子의 6세조世祖이다.상공殤公을 부탁하며注+[부주]朱: 공보孔父에게 여이與夷를 임금으로 세우도록 부탁한 것이다. 말하기를 “선군先君께서 여이與夷를 버리고 과인寡人을 세우신 그 은덕恩德注+선군先君목공穆公선공宣公이다. 여이는 선공宣公의 아들로 바로 공보孔父에게 부탁한 상공殤公이다. 과인은 감히 잊을 수 없노라.
만약 대부의 덕택으로 내가 천수를 다하고 죽어서 지하로 갔을 때 선군께서 여이에 관해 물으시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겠는가?
그대는 여이를 받들어 사직을 주재主宰케 하라.
그리 된다면 과인은 죽어도 후회가 없겠노라.注+[부주]林: 선군先君 앞에 부끄럽거나 후회됨이 없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공보가 대답하기를 “모든 신하들은 (莊公)을 받들기를 원합니다.注+목공穆公의 아들 장공莊公이다.”고 하니, 목공이 말하기를 “안 된다.
선군께서 과인을 하다고 여겨 나에게 사직을 주재主宰케 하셨으니, 만약 내가 그 은덕을 저버리고 여이에게 양위讓位하지 않는다면 이는 현자賢者를 세우신 선군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니, 어찌 현능賢能하다 하겠는가.注+여이與夷에게 양위讓位하지 않으면 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부주]林: 내가 만약 나에게 양위讓位하신 선군先君의 덕을 버리고서 상공殤公에게 양위하지 않는다면 이는 선공宣公이 나를 하다고 여겨 세우신 뜻을 저버리는 것이니, 어찌 내가 남보다 하다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선군의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 밝히기를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대는 부디 선군의 공덕功德폐기廢棄하지 말라.注+선군은 현자를 세우는 것을 공으로 여겼으니, 내가 만약 하지 못하다면 이는 선군의 공덕을 폐기하는 것이다.”고 하고서, 공자公子나라로 가서 살게 하였다.注+상공殤公을 피해 떠나게 한 것이다.
8월 경진일에 송목공이 하니, 상공殤公이 즉위하였다.
이에 대해 군자君子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송선공宋宣公은 사람을 잘 알아보았다고 할 수 있다.
아우 목공穆公을 세워서 그 아들 상공殤公이 마침내 군위君位를 누리게 하였으니, 이는 그 유명遺命도의道義에 맞았기 때문이다.注+도의道義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어조사語助辭이다.
상송商頌〉에 ‘나라는 천명天命수수授受한 것이 모두 도의道義에 맞았기 때문에 많은 복록福祿을 받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이런 경우를 이른 것이다.注+시경詩經》 〈상송商頌〉에 나라는 무정武丁천명天命을 받은 것이 모두 도의道義에 맞았기 때문에 하늘의 백록百祿을 받았다고 하였으니, 도의에 따라 행하면 상공殤公도 당연히 이런 과 이런 복을 받을 것인데, 공자公子도의道義에서 나온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않고서, 분한 마음을 품고서 나라로 달아나서는 나라의 힘을 빌어 들어와 임금이 되기를 구하여, 마침내 함의咸宜을 손상시켰다. 그러므로 사람을 알아보았다는 칭찬은 오직 선공宣公에게만 해당한다. 나라의 이 아우에게 전하였고 반드시 자손子孫에게만 전하지 않았다. 나라는 나라의 후손이므로 〈상송商頌〉을 지칭한 것이다. [부주]林: 이는 선공宣公도의道義로써 하여 그 아들에게 천록天祿을 받게 한 것이 이 의 뜻과 부합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 내가 고찰하건대 선공은 그 아우에게 양위하여 아우로 하여금 자식을 내치게 하였고, 목공穆公은 조카에게 양위하여 조카가 시해弑害당하게 하였으니, 그렇다면 백록百祿을 받은 것을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공양전公羊傳》에 “군자君子대거정大居正하니, 나라의 선공宣公이 만든 것이다.”고 한 이 말이 옳다. 상공이 시해당한 것은 노환공魯桓公 2년에 보인다.
겨울에 제나라와 정나라가 석문石門에서 회맹會盟하였으니,注+에서의 결맹結盟은 춘추 이전에 있었다. 나라 땅이다. 지금의 제북濟北노현盧縣고성古城이다. 이는 에서의 결맹을 중수重修한 것이다.
경술일에 정백鄭伯의 수레가 제수濟水에 엎어졌다.注+회맹會盟을 마친 뒤에 큰 바람을 만났기 때문에 괴이怪異함을 기록한 것이다. 12월에 경술일이 없으니 날짜가 잘못되었다.[부주]林: 정장공鄭莊公의 수레가 제수濟水에 엎어진 것이다.
위장공衛莊公나라 동궁東宮득신得臣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그가 장강莊姜이다.注+득신得臣나라 태자太子이다. 태자는 감히 상위上位에 거처할 수 없으므로 항상 동궁東宮에 거처한다.[부주]林: 장강莊姜은 남편의 시호諡號를 따른 것이다. : 이 또한 그 일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는 여동생이다.
미인美人이었으나 아들이 없으니, 나라 사람이 그를 가엾게 여겨 석인시碩人詩를 지었다.注+석인시碩人詩는 장강이 미색美色현덕賢德을 갖추었으나 보답을 받지 못하여 끝내 아들을 두지 못하니 국인國人이 근심한 뜻을 취한 것이다.
위장공이 또 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그가 여규厲嬀이다.
효백孝伯을 낳았으나 효백이 일찍 죽었고,注+은 지금의 진국陳國진현陳縣이다.여규厲嬀의 동생 대규戴嬀환공桓公을 낳으니, 장강은 환공을 자기의 아들로 삼았다.注+나라의 이다. 는 모두 시호諡號이다. 환공桓公이 비록 장강의 아들이 되었으나 태자太子해진 것은 아니었다.
공자주우公子州吁폐인嬖人의 아들이다.注+는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장공은 그를 총애하여 그가 병사兵事를 좋아하는데도 금하지 않으니, 장강이 그를 미워하였다.注+[부주]林: 주우州吁를 미워한 것은 그가 을 일으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석작昔碏하기를 “이 듣건대 ‘자식을 사랑하되 로운 방도方道로 가르쳐서注+석작石碏나라 대부大夫이다. [부주]朱: 도의道義로써 외모外貌방정方正하게 가지는 것이 일을 도리에 맞게 처리하는 근원이다.사악邪惡한 길로 들지 않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은 바로 사악邪惡유래由來하는 원인이고,注+[부주]朱: 는 자기를 믿고 상대를 업신여기는 것이고, 는 뽐내며 윗사람을 참소하는 것이고, 은 욕심이 과도過度한 것이고, 은 방자함이 그지없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사악邪惡유래由來하는 원인이다. 이 네 가지가 오는 것은 총록寵祿이 지나치기 때문입니다.注+네 가지는 모두 밖에서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라고 한 것이다.
주우州吁를 세우고자 하시다면 즉시 그를 태자로 정하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실 수 없다면 주우는 지나친 총록을 발판으로 화란禍亂을 일으킬 것입니다.注+주우州吁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자 한다면 일찍이 그를 태자로 정함이 마땅하니, 만약 일찍이 정하지 않는다면 주우는 반드시 총애를 이용하여 화란禍亂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대체로 총애를 받으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교만하면서도 자신을 낮추며, 자신을 낮추면서도 분한忿恨하지 않으며, 분한하면서도 자중自重하는 자는 드뭅니다.注+이와 같은 사람은 드물다는 말이다. 자기의 몸을 낮추면 반드시 분한忿恨하고, 분한하면 화란禍亂 일으키기를 생각하여 자중自重하지 못한다. [부주]林: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교만해 뽐내지 않으며, 이미 교만하면서도 스스로 마음을 낮추며, 억지로 마음을 낮추면서도 원한怨恨하지 않으며, 원한의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 몸을 자중自重하는 자는 드물다.
그리고 또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해치며, 젊은이가 어른을 능멸하며, 소원한 자가 친근한 자를 이간離間하며, 신인新人구인舊人을 이간하며, 약소弱小한 자가 한 자를 침공하며,注+소국小國대국大國침공侵攻하는 것은, 음란淫亂도의道義파괴破壞하는 것이 이른바 육역六逆이고,注+[부주]林: 비천한 서얼庶孼이 존귀한 적장자嫡長子를 해치고, 비소卑小한 자가 존장尊長을 능멸하고, 소원한 자가 친근한 사람을 이간하고, 신진新進기구耆舊를 이간하고, 소국이 대국을 침공侵攻하고, 음욕淫慾의리義理를 파괴하는 이 여섯 가지는 모두 천리를 거역하는 것이다. 임금은 롭고 신하는 의를 행하며, 아비는 자애慈愛롭고 자식은 효도하며,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경하는 것이 이른바 육순六順이니,注+신하가 임금의 의로운 명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다. [부주]林: 임금이 도리를 헤아려 명령하는 것이 이다. 이 여섯 가지는 모두 천리天理를 순종하는 것이다. 육순을 버리고 육역을 본받는 것이 를 부르는 원인입니다.
남의 임금이 된 사람은 화를 제거하는데 힘을 다해야 하는데, 도리어 화를 부르시니, 불가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공은 석작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았다.
석작의 아들 석후石厚가 주우와 교유交遊하니, 석작이 이를 금지禁止하였으나 듣지 않았다.注+[부주]林: 석후石厚가 듣지 않은 것이다.
환공이 즉위하자 석작은 곧 고로告老하였다.注+치사致仕하는 것이다. 은공隱公 4년 에 “주우州吁가 그 임금을 시해弑害하였다.”고 기록하였기 때문에 에, 에 앞서 그 일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역주
역주1 隱公이……않은 것이다 : 은공은 스스로 攝位로 처신하고 정식 임금으로 감히 自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어머니의 喪에 감히 夫人의 禮를 갖출 수 없었다는 말이다.
역주2 鹹의 會盟 : 春秋末期인 定公 7년에 있었다.
역주3 : 安神祭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精氣는 가지 못하는 곳이 없으니, 자식 된 자가 그 어버이의 신이 방황할 것을 염려하여 안정시킨다는 뜻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옛날에는 각자의 身分에 따라 虞祭의 回數가 달라서 士는 三虞, 大夫는 五虞, 諸侯는 七虞였다.
역주4 正寢 : 亡人의 靈位를 설치한 几筵이다.
역주5 卒哭 : 虞祭를 지낸 뒤에 지내는 제사이다. 졸곡 전에는 喪主가 슬프면 無時로 哭하지만 이 제사를 지낸 뒤에는 무시로 하는 곡을 그치고 조석으로만 곡한다. 《禮記》 〈雜記〉에 의하면 士는 달을 넘겨 葬事지내고 그 달에 卒哭하며, 大夫는 3개월 만에 장사지내고 5개월 만에 졸곡하며, 제후는 5개월 만에 장사지내고 7개월 만에 졸곡한다. 그러나 후세에는 사망한 7일 만에 졸곡한다.
역주6 得保首領以沒 : 당시의 상투어로 善終을 이른다. 領은 목이니, 목을 보전한다는 것은 被殺되지 않는 것을 이른다. 〈楊注〉
역주7 殷受命咸宜 : ‘受’는 傳授의 뜻이고, ‘宜’는 義이다. 《詩經》의 本意는 殷나라가 天命을 받은 것이 모두 도리에 맞았다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命을 천명이 아닌 왕위를 전하는 遺命의 뜻으로 보는 것이 옳다. 殷나라의 王位는 兄에게서 아우에게로 전수되었는데, 宋宣公도 아들에게 전하지 않고 아우에게 전하였기 때문에 이 詩를 인용해 讚美한 것이다.
역주8 大居正 : 君子는 正道를 遵守하는 것을 위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이 말은 《公羊傳》 〈隱公三年〉에 보이는데, 그 注에는 “嫡子를 正位에 세우는 것을 위대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역주9 : 當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10 息侯……같은 類 : 隱公 11년 傳에 보인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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