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봄에 제수濟水이서以西의 땅을 취取하였다.注+진晉나라가 조曹나라의 땅을 나누어 노魯나라에 주었기 때문에 그 땅을 조曹나라에 매어 기록하지 않은 것이고, 군대를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취取’라고 한 것이다.
공자수公子遂가 진晉나라에 갔다.
여름 4월에 네 번 복교卜郊하였으나 모두 불길不吉하자 생牲을 놓아주고,注+거북점을 ‘복卜’이라 한다. 부종不從은 불길不吉이다. 복교卜郊하였으나 불길不吉하였기 때문에 생牲을 놓아준 것이다. 면免은 종縱(놓아줌)과 같다. 오히려 세 곳에 망제望祭를 지냈다.注+전傳이 없다. 스스로 그 아들의 성혼成昏(結婚)을 위해 온 것이다.
가을 7월이다.
겨울에 기백희杞伯姬가 와서 며느리감을 구하였다.注+적인狄人의 난리를 피해 옮긴 것이다. 제구帝丘는 지금의 동군東郡복양현濮陽縣으로 제帝전욱顓頊의 고도故都이다. 그러므로 ‘제구帝丘’라고 한 것이다.
적인狄人이 위衛나라를 포위하였다.
12월에 위衛나라가 제구帝丘로 천도遷都하였다.注+적인狄人의 난리를 피해 옮긴 것이다. 제구帝丘는 지금의 동군東郡복양현濮陽縣으로 제帝전욱顓頊의 고도故都이다. 그러므로 ‘제구帝丘’라고 한 것이다.
傳
31년 봄에 제수濟水이서以西의 땅을 취하였으니 이는 조曹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은 것이다.注+희공僖公 28년에 진문공晉文公이 조曹나라를 토벌하고서 그 땅을 분할分割하였으나 경계境界를 정하지는 않았다. 이때에 와서 제후諸侯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희공僖公은 장문중臧文仲을 보내어 땅을 받아오게 하였다.
장문중臧文仲이 가다가 중관重館에 묵게 되었는데,注+고평高平방여현方與縣 서북쪽에 중향성重鄕城이 있다.중관인重館人이 고하기를 “진晉나라가 새로 제후諸侯를 얻었으니 반드시 공손한 나라를 친애親愛할 것이다.注+[부주]林: 반드시 공순恭順하고 예禮가 있는 사람을 친애親愛한다는 말이다.
빨리 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注+[부주]林: 먼저 간 자들이 땅을 전부 받아 가면 뒤에 간 자는 아마도 땅을 받는 일에 미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고 하였다.
문중文仲은 그의 말에 따라 서둘러 가서 조曹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았으니, 조수洮水 이남에서 동쪽으로 제수濟水에 이르기까지의 조曹나라 땅 전부였다.注+경經에 문중文仲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땅을 청하기 위해 갔을 뿐이고. 빙향聘享이나 회동會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수濟水는 형양熒陽에서 동으로 흘러 노魯나라의 서쪽을 지나 낙안樂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양중襄仲이 진晉나라에 가서 조曹나라의 땅을 나누어 준 데 대해 배사拜謝(謝禮)하였다.
傳
여름 4월에 네 번 복교卜郊하였으나 모두 불길不吉하자 희생犧牲을 놓아주었으니 예禮가 아니다.注+제후諸侯는 하늘에 교제郊祭를 지낼 수 없으나, 노魯나라는 주공周公 때문에 천자天子의 예악禮樂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제郊祭가 노魯나라의 상사常祀(해마다 지내는 일정한 제사)가 된 것이다.
그러고도 오히려 삼망제三望祭를 지냈으니 이 또한 예禮가 아니다.
예禮에 의하면 해마다 지내는 일정한 제사는 그 길흉吉凶을 점치지 않고注+반드시 그 철(봄철)에 지낸다. 그 제사에 쓸 생牲과 날짜만을 점치며注+생牲과 날짜를 점치는 것은 날과 소의 길흉吉凶을 알기 위함이다. 점쳐서 날짜를 정한 뒤에는 소[牛]를 ‘생牲’으로 칭한다.注+점을 쳐서 길일을 잡은 뒤에는 소를 ‘생牲’으로 개칭改稱한다는 말이다.
생牲이 이미 정해졌는데 교제郊祭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것은注+[부주]林: 날짜를 점치기 전에 소를 먼저 점친다. 지금 경經에 ‘면생免牲’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미 길일吉日을 얻어 소의 이름을 생牲으로 개칭改稱하였는데도 다시 교제郊祭의 가부可否를 점친 것이다. 윗사람이 태만해서이다.注+고전古典을 가벼이 여겨 귀龜(거북점)과 책策(蓍草占)을 모독冒瀆했다는 말이다.
망望은 교제郊祭의 작은 부분이니 교제郊祭를 지내지 않으면 망제望祭도 지내지 않아야 한다.
傳
가을에 진晉나라 청원淸原에서 군대를 사열査閱하고서 오군五軍으로 만들어 적인狄人을 방어할 때注+희공僖公 28년에 진晉나라는 삼행三行을 만들었었는데 이제 그것을 혁파革罷하고서 다시 상하上下의 신군新軍으로 편성編成한 것이다. 하동河東문희현聞喜縣 북쪽에 청원淸原이 있다.조쇠趙衰를 경卿으로 삼았다.注+희공僖公 27년에 조쇠趙衰를 경卿에 임명任命하자 조쇠趙衰는 난지欒枝에게 양보하였다. 그러므로 이제야 비로소 원原의 대부大夫로서 신군新軍의 원수元帥가 된 것이다.
傳
겨울에 적인狄人이 위衛나라를 포위하니 위衛나라가 제구帝丘로 천도遷都할 때 천도遷都의 길흉吉凶에 대해 점을 치니, 국운國運이 3백 년은 갈 것이라고 하였다.注+[부주]林: 제구帝丘에 도읍都邑하면 3백 년 동안 안정安定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위성공衛成公의 꿈에 강숙康叔이 나타나 말하기를 “상相이 나의 제사를 빼앗아 먹는다.”注+상相은 하후夏后계啓(禹王의 아들)의 손자로 제구帝丘에 거주居住했었다.고 하였다.
공公이 상相에게 제사 지내라고 명하니 영무자寗武子가 반대하며 말하였다.
“귀신鬼神은 그 족류族類가 아니면 그 제사를 흠향歆享하지 않는 것인데注+흠歆은 향饗과 같다. [부주]朱: 위衛나라는 하夏나라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제사 지낸다 하더라도 하夏나라의 선왕先王은 반드시 그 제사를 흠향歆享하지 않는다는 말이다.기杞나라와 증鄫나라는 무슨 일로 상相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注+기杞나라와 증鄫나라는 하夏나라의 후손이니 당연히 상相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상相이 이곳에서 제사를 받아먹지 못한 지 오래이니 우리 위衛나라의 죄罪가 아닙니다.注+제구帝丘에서 상相의 제사를 지내지 않은 지가 오래이고 위衛나라가 절사絶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명사命祀를 범犯할 수 없으니注+천자天子의 명命을 받아 봉해진 제후諸侯는 각각 상사常祀(정해진 제사)가 있다. 제사 지내라는 명命을 고치소서.”注+하瑕는 문공文公의 아들이다. 전傳의 글은 하瑕를 받아들이게 된 장본張本을 말한 것이다. 설가洩駕도 정鄭나라 대부大夫이다. 은공隱公 5년에도 설가洩駕가 보이는데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사람이니 아마도 동일인同一人이 아닌 듯하다.
傳
정鄭나라의 설가洩駕가 공자公子하瑕를 미워하고 정백鄭伯도 그를 미워하였다.
그러므로 공자公子하瑕가 초楚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注+전傳이 없다. 문공文公이다. 노魯나라와 세 차례 동맹同盟하였다.
역주
역주1取濟西田 :
濟水 이서의 땅은 원래 魯나라의 땅이었으나, 曹나라에게 빼앗긴 지 오래되었다. 晉侯가 曹伯을 잡고서 曹나라가 侵奪했던 땅을 諸侯들에게 되돌려 주었으므로 魯나라가 이 땅을 取한 것이다. 우리의 땅을 되찾은 것인데 取하였다고 한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 찾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李震相 《春秋集傳》
역주2四卜郊……猶三望 :
禮에 의하면 天子만이 夏正 11월에 南郊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正月上旬의 辛日에 上帝께 祈穀祭를 지낼 수 있으니, 諸侯인 魯나라가 郊祭를 지내는 것은 禮가 아니다. 천자는 교제를 지낸 뒤에 반드시 사방의 山川에 望祭를 지내는데, 여기에 ‘三望’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魯나라 서쪽에 있는 泰山과 동쪽에 있는 渤海와 북쪽에 있는 黃河에만 望祭를 지낸 것인 듯하다. 李震相 《春秋集傳》
역주3四卜郊……乃免牲 :
郊는 하늘에 올리는 제사이다. 卜郊는 祭日을 잡기 위해 점을 친 것이 아니고, 郊祭를 지내는 것이 吉한지의 여부에 대해 점을 친 것이다. 네 번의 점이 모두 不吉하였기 때문에 郊祭에 쓰기로 했던 犧牲을 놓아주고 郊祭를 지내지 않은 것이다.
역주4分野 :
古代에 中國全域을 하늘의 12 星次에 나누어 配屬한 天文學用語인데, 이를테면 秦나라의 分野는 鶉首, 周나라는 鶉火, 燕나라는 析木, 吳나라와 越나라는 星紀 따위이다.
역주5魯[祀] :
저본에는 ‘魯’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祀’로 바로잡았다.
역주6祀[魯] :
저본에는 ‘祀’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魯’로 바로잡았다.
역주8非聘享會同也 :
聘享은 聘問간 사람이 그 나라의 임금에게 禮物을 올리는 享禮이다. 聘問에는 반드시 享禮가 있기 때문에 聘享을 붙여서 쓴 것이다. 會同은 諸侯가 天子께 朝見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朝聘의 뜻으로 쓰인다.
역주9諸侯不得郊天……故郊爲魯常祀 :
周公이 어린 成王을 대신해 天下를 다스리고 禮樂을 제정하였으므로 成王은 周公이 天下에 큰 功勞가 있다하여 魯公(伯禽)에게 명하여 대대로 周公의 宗廟에 天子의 禮樂을 사용하게 하였기 때문에 魯나라가 天子만이 지낼 수 있는 郊祭를 지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