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12년 봄에
초자楚子가
정鄭나라를 17일 동안
포위包圍하자,
정인鄭人이
초楚나라와
화평和平할 것을
점占치니
불길不吉하고,
종묘宗廟에 가서
통곡痛哭하고서
注+임臨은 곡哭하는 것이다. 대궁大宮은 정鄭나라 조상祖上의 묘廟이다. 병거兵車를 몰고 거리로 나아가 싸울 것을
점占치니
길吉하였다.
注+수레를 몰고 거리로 나가는 것은 장차 이주移住시킴을 당할 것이므로 편안히 살 수 없다는 뜻을 보이기 위함이다.
국중國中의 사람들이 모두
종묘宗廟로 가서
통곡痛哭하고 城의
여장女牆을 지키는 군사도 모두
통곡痛哭하니,
注+비陴는 성城 위의 여장女牆이다. 모두 통곡痛哭한 것은 초군楚軍에게 곤궁困窮함을 알리기 위함이다. 초자楚子는 이를 가엾게 여겨 군대를 물리고서
정鄭나라가
항복降服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정인鄭人이 항복하지 않고
성城을
수축修築하자,
초군楚軍은 다시
진군進軍하여
정鄭나라를
포위包圍하여 3개월 동안
공격攻擊해
승리勝利하고서
注+정인鄭人이 곤궁困窮하여 통곡痛哭하는 것을 가엾게 여겼기 때문에 군대를 물린 것인데, 정鄭나라가 여전히 항복降服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90일 동안 포위包圍한 것이다. 황문皇門으로 들어가
대로大路에 이르니,
注+아홉 채의 수레가 나란히 갈 수 있는 길을 ‘규逵’라 한다.
정백鄭伯이 윗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양羊을 끌고 와서
초자楚子를
영접迎接하며
注+윗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양羊을 끌고 간 것은 항복降服하고서 신복臣僕이 되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말하기를, “
고孤(諸侯의
자칭自稱)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따르지 않고
注+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군왕君王(楚王을 이름)을 잘 섬기지 않아,
군왕君王으로 하여금
노怒하여 우리나라에 오게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고孤의 죄罪이니, 감히 명命하는 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정鄭나라 백성들을
포로捕虜로 잡아
강남江南으로 데려가
해변海邊을 채우더라도
명命대로 따를 것이고,
注+[부주]朱: 가령 정鄭나라 백성을 포로捕虜로 잡아 대강大江의 남쪽으로 이주移住시켜 사람이 없는 해변海邊을 채우더라도 이 또한 명命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정鄭나라 땅을 깎아
제후諸侯에 나누어주고 우리 백성을
제후諸侯의
신첩臣妾이 되게 하더라도
명命대로 따르겠습니다.
注+전翦은 깎는 것이다. [부주]林: 정鄭나라 땅을 깎아 초楚나라에 순종順從하는 제후諸侯에게 주고, 정鄭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남자는 신臣이 되고 여자는 첩妾이 되게 하더라도 초군楚君의 명命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만약 지난날의
우호友好를 생각하는
은혜恩惠를 베푸시고,
注+초楚나라와 정鄭나라는 대대로 맹서盟誓한 우호友好가 있었다.여왕厲王,
선왕宣王,
환공桓公,
무공武公께
복福을
구求하기 위해
정鄭나라의
사직社稷을
멸滅하지 않고,
注+주여왕周厲王과 주선왕周宣王은 정鄭나라가 나온 조상祖上이고, 정환공鄭桓公과 정무공鄭武公은 처음 봉封해진 정鄭나라의 현군賢君이니, 초楚나라가 이 네 임금에게 복福을 구하고자 한다면 정鄭나라의 사직社稷을 멸망滅亡하지 않게 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민泯은 멸滅과 같다. 정鄭나라로 하여금 지난날의 잘못을 고치고서
초楚나라의
제현諸縣과 같이
군왕君王을 섬기게 하신다면
注+초楚나라가 아홉 나라를 격멸擊滅하고서 그 나라들을 초楚나라의 현縣으로 삼았으니, 정鄭나라도 그 나라들과 같이 되기를 원願한다는 말이다.이는
군왕君王의
은혜恩惠이고
고孤의
소원所願입니다.
그러나 감히 바랄 수 없으므로 감히 진심眞心을 토로吐露하오니, 군왕君王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라고 하였다.
초자楚子의 좌우左右가 “정백鄭伯의 요구要求를 허락許諾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나라를 공격攻擊해 얻으면 다시 용서容恕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초왕楚王이 말하기를, “그 임금이 능히 남에게 자신을 낮추니 반드시 그 백성들의 신임信任을 얻었을 것이다.
이런 나라를 어찌 얻기를 바라겠는가?”
注+[부주]朱: 기幾는 기冀(바람)와 같으니, 어찌 요행을 바라 정鄭나라를 취取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라고 하고서 30
리里를 물러나
정鄭나라에
화평和平을
허락許諾하였다.
注+일사一舍(30리)를 물러나 정鄭나라를 예우禮遇한 것이다.
초楚나라
반왕潘尪이
정鄭나라에 들어가
결맹結盟하고,
정鄭나라
자량子良이
초楚나라에
인질人質로 갔다.
注+반왕潘尪은 초楚나라 대부大夫이고, 자량子良은 정백鄭伯의 아우이다.
傳
여름 6월에
진군晉軍이
정鄭나라를
구원救援할 때
순임보荀林父가
중군대장中軍大將,
注+극결郤缺의 뒤를 이어 중군中軍을 거느린 것이다.선곡先縠이
부장副將이 되고,
注+체계彘季가 순임보荀林父의 뒤를 이어 중군中軍의 좌佐가 된 것이다. 사회士會가
상군대장上軍大將,
注+하곡河曲의 전쟁戰爭 때 극결郤缺이 상군장上軍將이었는데, 선공宣公 8년에 조돈趙盾의 뒤를 이어 집정執政이 되어 중군장中軍將이 되니, 사회士會가 그 뒤를 이어 상군장上軍將이 되었다. 극극郤克이
부장副將이 되고,
注+극극郤克은 극결郤缺의 아들로 유병臾騈의 뒤를 이어 상군좌上軍佐가 된 것이다. 조삭趙朔이
하군대장下軍大將,
注+조삭趙朔이 난순欒盾의 뒤를 이어 하군장下軍將이 된 것이다. 난서欒書가
부장副將이 되고,
注+난서欒書는 난순欒盾의 아들로 조삭趙朔의 뒤를 이어 하군좌下軍佐가 된 것이다.조괄趙括과
조영제趙嬰齊가
중군대부中軍大夫,
注+조괄趙括과 조영제趙嬰齊는 모두 조돈趙盾의 이모제異母弟이다. 공삭鞏朔과
한천韓穿이
상군대부上軍大夫,
순수荀首와
조동趙同이
하군대부下軍大夫,
注+순수荀首는 순임보荀林父의 아우이고, 조동趙同은 조영제趙嬰齊의 형兄이다. 한궐韓厥이
사마司馬가 되었다.
注+한궐韓厥은 한만韓萬의 현손玄孫이다.
진군晉軍이
황하黃河에 이르러
정鄭나라가 이미
초楚나라와
화평和平했다는 말을 듣고
환자桓子가
환군還軍하고자 하며 말하기를, “
정鄭나라가
초楚나라에
항복降服하기 전에 미쳐
구원救援하지 못했으면서 군대를 수고롭게 하여
전쟁戰爭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注+환자桓子는 순임보荀林父이다. 초勦는 괴롭히는 것이다.
초군楚軍이 돌아간 뒤에
출동出動하여도 늦지 않다.”
注+군대를 출동出動해 정鄭나라를 토벌討伐하는 것이다. [부주]朱: 불후不後는 늦지 않다는 말과 같다. 고 하니,
수무자隨武子가 말하기를,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注+무자武子는 사회士會이다.
내가 듣건대 ‘
용병用兵에는
적敵의 틈을 보아 움직인다.
注+흔釁은 죄罪이다.
덕행德行‧
형벌刑罰‧
정령政令‧
사무事務‧
전장典章‧
예의禮儀가
상도常道를 어기지 않은 나라는
대적對敵할 수 없다.’고 하니, 이런 나라는
정벌征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注+그런 나라를 정벌征伐하면 유죄有罪가 되고 유례有禮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초군楚君이 정鄭나라를 토벌討伐할 때 정鄭나라가 두 마음 품은 것에 노怒해 토벌討伐하다가 정백鄭伯이 몸을 낮추는 것을 보고는 가엾게 여겼습니다.
배반背叛하자 토벌討伐하였고 항복降服하자 용서하였으니, 덕행德行과 형벌刑罰이 구비具備[成]되었습니다.
배반背叛한 나라를 토벌討伐하는 것은 형벌刑罰이고 복종服從하는 나라를 회유懷柔하는 것은 덕행德行이니, 두 가지가 이미 수립樹立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昨年에
진陳나라에
침입侵入하고
注+하징서夏徵舒를 토벌討伐한 것이다. 금년에
정鄭나라에
침입侵入하였으되, 백성들이 피로하지 않아
초군楚君을 원망하는 말이 없으니,
注+독讟은 비방誹謗이다. 정령政令에
상도常道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注+경經은 상常이다.
형시진荊尸陣을 만들어
작전作戰을
거행擧行하므로
注+형荊은 초楚나라이고, 시尸는 진陣[陳]이다. 초무왕楚武王이 비로소 기존의 진법陣法을 고쳐 이 진법陣法을 만들고서 드디어 ‘형시荊尸’로 이름하였다. [부주]朱: 시尸는 초楚나라의 진명陣名이다. 상商‧
농農‧
공工‧
고賈가
생업生業을
폐廢하지 않고,
졸승卒乘이
화목和睦하니,
注+보병步兵을 ‘졸卒’이라 하고 거병車兵을 ‘승乘’이라 한다.각자各自의
업무業務를 서로
침범侵犯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注+간奸은 범犯하는 것이다.
위오蔿敖가
영윤令尹이 되어
초楚나라에 좋은
전장典章을
선택選擇하여,
注+재宰는 영윤令尹이고, 위오蔿敖는 손숙오孫叔敖이다. 군대가
출동出動할 때는
우군右軍은
주장主將의
거원車轅을
호위護衛하고,
좌군左軍은
야영野營할 때 깔고 잘 풀을 구하며,
注+수레 오른쪽에 있는 자는 원轅을 끼고서 전투戰鬪준비準備를 하고, 수레 왼쪽에 있는 자는 풀을 구하여 야영野營할 준비를 한다. 전傳에 ‘영윤令尹이 원轅의 방향方向을 남쪽으로 틀었다.’고 하였고, 또 ‘수레의 원轅의 방향을 고치게 했다.’고 하였으니, 초楚나라의 진陣에는 원轅의 방향方向을 주요主要하게 여긴 것이다. 전군前軍은
기旗를 들고 가면서
불의不意의
사태事態를 알리고,
注+여무慮無는 오늘날 군행軍行의 앞에 척후斥候를 두어 답복蹹伏(敵軍의 움직임을 정탐偵探함)하게 하되, 모두 붉은색과 흰색으로 만든 기旗를 가지고 가면서 기적騎敵을 발현發見하면 적기赤旗를 들고, 보적步敵을 발견하면 백기白旗를 들게 하고, 현재는 없으나[無] 갑자기 일어날 사태事態를 생각하였다가[慮], 비상사태非常事態가 발생하면 후군後軍에 알려 대비對備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모茅는 밝은 것이다. 혹자或者는 당시에 초楚나라는 모茅(띠)로 기旗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중군中軍은
작전계획作戰計劃을 세우고,
후군後軍은
강병强兵으로
부대部隊를 만들어
후미後尾를 지키며,
注+중군中軍이 계획計劃을 제정制定하고, 정병精兵으로 후군後軍을 삼는다는 말이다. 백관百官은 각자
직위職位를
상징象徵하는
기旗를 세우고서
직위職位에 맞게
행동行動하여
군정軍政이
경계警戒하지 않아도
완비完備되니,
注+물物은 유類와 같고, 계戒는 신칙申飭하는 것이다. [부주]朱: 물物은 정기旌旗이니, 백관百官이 각각 세운 기물旗物을 상징象徵해 행동하는 것이다.전장典章을 잘
운용運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초군楚君이
인재人才를
등용登用함에는
동성同姓 중에는 가까운
친족親族을
등용登用하고,
이성異姓 중에는
구신舊臣의
후예後裔를
등용登用하되,
注+친親한 사람과 소원疏遠한 사람을 함께 등용登用했다는 말이다. 등용함에 있어
덕德이 있는 사람을 잃지 않고,
상賞을 줌에 있어
공功이 있는 사람을 빠뜨리지 않으며,
노인老人에게는
우대優待를 더하고,
注+노인老人에게 은혜恩惠을 내림에는 공로功勞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그네에게는
은혜恩惠를 베풀며,
注+여객旅客으로 온 자에게는 은혜恩惠를 베풀어, 부역赴役을 면제免除[舍]하고 노역勞役을 시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은
복물服物(衣服과
기물器物)에 각각
복장服章(身分을 나타내는
복식服飾)이 있게 하여,
注+존비尊卑를 구별한 것이다.존귀尊貴한 자는 항상 그
존귀尊貴를 누리고,
비천卑賤한 자는 각각 그
등위等威(身分에
상응相應하는
위의威儀)가 있게 하였으니,
注+위의威儀에 등차等差가 있는 것이다. 예禮를 거스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초楚나라는 덕행德行이 수립樹立되고, 형벌刑罰이 시행施行되고, 정령政令이 이루어지고, 사무事務의 처리가 시의時宜에 맞고, 전장典章을 따르고, 예의禮儀에 순서가 있으니, 어찌 저들을 대적對敵할 수 있겠습니까?
승리勝利할
가능성可能性을 보면
진군進軍하고
승리勝利하기 어려움을 알면
퇴군退軍하는 것은
전쟁戰爭[軍]에 가장 좋은
전술戰術[政]이고,
약弱한 나라를
겸병兼竝하고
우매愚昧한 나라를
공격攻擊하는 것은
용병用兵[武]에 가장 좋은
전략戰略[經]이니,
注+매昧는 혼란昏亂이고 경經은 법法이다. 우선 군대를
정돈整頓(知難而退)하여
무武를
경영經營(兼弱攻昧)하소서.
注+고姑는 우선이다.[부주]林: 무비武備(軍備)를 경영經營해 다스린다는 말이다.
약弱하고 우매愚昧한 나라가 있는데, 굳이 초楚나라를 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중훼仲虺의 말에 ‘어지러운 나라를 취하고
망亡하는 나라를 업신여긴다.’고 하였으니, 이는
쇠약衰弱한 나라를
겸병兼竝한다는 말이고,
注+중훼仲虺는 탕왕湯王의 좌상左相으로 설薛나라의 조상祖上해중奚仲의 후예後裔이다. 〈
주송周頌작편酌篇〉에 ‘아 아름답다,
무왕武王이 군대를 쓰신 것이여.
은殷나라를
배반背叛한 나라들을 거느리고 가서
우매愚昧한 나라를
취取하였다.’
注+작汋은 《시경詩經》 〈주송周頌〉의 편명篇名이다. 삭鑠은 아름다움이니, 무왕武王이 하늘의 도道를 준행遵行하여 암매暗昧한 자의 악행惡行이 쌓이기를 기다린 뒤에 그를 공격攻擊해 취取한 것을 찬미讚美한 말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우매愚昧한 나라를
공격攻擊했다는 말이며,
注+기耆는 치致(行함)이니 암매暗昧한 자에게 토벌討伐을 행하는 것이다. 〈
주송周頌무편武篇〉에 ‘끝없는
공적功績이다.’
注+무武는 《시경詩經》 〈주송周頌〉의 편명篇名이다. 열烈은 업業이니, 무왕武王이 약국弱國을 겸병兼倂하고 암매暗昧한 나라를 취取하였기 때문에 끝없는 공업功業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고 하였으니,
약弱한 나라를
위무慰撫하고
우매愚昧한 나라를 쳐서
공적功績 이루기를 힘쓰는 것이 옳습니다.”
注+무왕武王의 공업功業을 따라 약弱한 제후諸侯를 어루만지고 암매暗昧한 제후諸侯를 공취攻取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고 하였다.
체자彘子가 말하기를, “안 됩니다.
注+체자彘子는 선곡先縠이다.
우리
진晉나라가
패자霸者가 된 것은 군대가
용무勇武하고
신하臣下가
진력盡力하였기 때문인데,
注+[부주]林: 진晉나라가 제후諸侯의 패자霸者가 된 까닭은 군대가 무용武勇스럽고 신하臣下들이 부지런히 힘썼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지금
제후諸侯를 잃는다면
진력盡力했다고 할 수 없고, 앞에
적敵이 있는데도 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용무勇武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로 인해 패자霸者의 지위地位를 잃는다면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합니다.
또
대군大軍을 이끌고 왔다가
적敵이
강强하다는 말을 듣고 물러가는 것은
대장부大丈夫가 할 일이 아닙니다.
注+대장부大丈夫가 아니라는 말이다.
임금의
명命을 받아 군대의
장수將帥가 되어서
대장부大丈夫답지 못한
행위行爲로 일을 끝내는 것은 여러분은 할 수 있으나 나는 할 수 없습니다.”
注+[부주]林: 여러분은 이런 치욕恥辱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라고 하고서,
체자彘子는
중군中軍부장副將에
속屬한 군대를 거느리고
황하黃河를 건너갔다.
注+좌佐는 체자彘子가 통솔統率한 군대이다. 제濟는 황하黃河를 건넌 것이다.
傳
이때
초자楚子는 군대를 거느리고
북상北上하여
연郔에
주둔駐屯[次]하였다.
注+연郔은 정鄭나라의 북쪽 땅이다.
심윤沈尹이
중군中軍을,
注+침沈은 침寢으로 쓰기도 하니, 침현寢縣으로 지금의 여음汝陰고시현固始縣이다. 자중子重이
좌군左軍을,
자반子反이
우군右軍을 거느리고서
황하黃河로 가서 말에 물을 먹이고
초楚나라로 돌아가려 하였다.
注+자반子反은 공자公子측側이다. [부주]林: 초군楚軍이 황하黃河에서 말에 물을 먹이고 돌아가려 한 것은 강성强盛함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진군晉軍이 이미
황하黃河를 건넜다는 말을 듣고
초왕楚王이
환군還軍하고자 하니,
폐인嬖人오참伍參은
전쟁戰爭하고자 하였다.
注+오참伍參은 오사伍奢의 조부祖父이다.
영윤令尹손숙오孫叔敖는 전쟁戰爭하려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작년昨年에 진陳나라에 진입進入하고 금년에 정鄭나라에 진입進入하였으니, 전쟁戰爭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만약 전쟁戰爭하였다가 승리勝利하지 못한다면 너(伍參)의 고기를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것이다.”라고 하니, 오참伍參이 말하기를, “만약 전쟁戰爭에 승리勝利한다면 손숙孫叔 당신은 계모計謀가 없는 것이 되고, 만약 패전敗戰한다면 나의 육신肉身은 진군晉軍의 수중手中에 있을 것인데, 어찌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영윤令尹은
환군還軍하기 위해 수레의
원轅을 남쪽으로 돌리고
군기軍旗의
방향方向을 남쪽으로 돌리니,
注+수레를 돌려 남쪽으로 향한 것이다. 패旆는 군대가 행군行軍할 때 맨 앞 수레에 꽂는 대기大旗이다. [부주]林: 손숙오孫叔敖는 전쟁戰爭하지 않으려고 수레를 돌려 남쪽으로 향하고, 군전軍前에 세운 대기大旗의 깃발 방향을 돌린 것이다. 오참伍參이
초왕楚王에게 말하기를,
“
진晉나라의
집정執政이 새로
임명任命된 자여서
군령軍令을 제대로
행사行使하지 못하고,
注+[부주]林: 진晉나라 순임보荀林父가 새로 중군장中軍將으로 진晉나라의 집정執政이 되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호령號令을 내릴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부장副將선곡先縠은 까다롭고
불인不仁하여
명령命令을 따르려 하지 않으며,
注+퍅愎은 사나운 것이다.
세
장수將帥(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의
장수將帥)는
전권專權을 가지고
행사行事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므로
注+자기가 마음대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군중軍衆이
명령命令을 따르려[聽]해도
명령命令을 내리는
주장主將[上]이 없으니
군중軍衆이 누구의
명령命令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注+체자彘子, 조동趙同, 조괄趙括의 말을 듣는다면 군중軍中에 상장上將이 없는 것이 되어, 군중軍衆으로 하여금 따를 바를 알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번에 가서 진격進擊하면 진군晉軍이 반드시 패전敗戰할 것입니다.
그리고 임금으로서 신하를 피해 도망한다면
사직社稷의
치욕恥辱을 어찌하시렵니까?”
注+[부주]林: 초왕楚王이 임금으로서 진晉나라의 제신諸臣을 피해 도망간다면 초楚나라 사직社稷의 치욕恥辱을 어찌하겠느냐는 말이다. 라고 하니,
초왕楚王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매우 상해
영윤令尹에게 일러
거원車轅을 돌려 북쪽을 향해
진군進軍하게 하고,
초자楚子는
관管에
주둔駐屯하여
진군晉軍을 기다렸다.
傳
이때
진군晉軍은
오산敖山과
호산鄗山 사이에
주둔駐屯하고 있었다.
注+형양熒陽경현京縣 동북쪽에 관성管城이 있다. 오산敖山과 호산鄗山은 형양현熒陽縣 서북쪽에 있다.
정鄭나라 황술皇戌이 진晉나라 군중軍中으로 가서 말하기를, “우리 정鄭나라가 초楚나라에 복종服從하는 것은 사직社稷을 보존保存하기 위함이고, 결코 진晉나라에 두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닙니다.
초군楚軍은 잦은
승전勝戰으로 교만해졌고, 그 군대는
출병出兵한 지 오래여서 지쳐 있는데다가
방비防備마저
설치設置하지 않고 있으니,
진군晉軍이
공격攻擊하고 우리
정군鄭軍이 뒤를 잇는다면
注+승承은 잇는 것이다. 초군楚軍은 반드시
패배敗北할 것입니다.”고 하자,
체자彘子가 말하기를, “
초군楚軍을
패배敗北시키고
정鄭나라를
복속服屬시키는 일이 이번 기회에 달렸으니,
황술皇戌의
요청要請을
허락許諾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난무자欒武子가 말하기를,
注+무자武子는 난서欒書이다. “
초楚나라는
용국庸國과의
전쟁戰爭에
승리勝利한 뒤로
注+문공文公 16년에 있었다. 그 임금은
국민國民을 다스리고
교훈敎訓하며
注+토討는 다스리는 것이다. [부주]朱: 초군楚君이 국인國人을 다스려 교훈敎訓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는 말이다. ‘백성의
생계生計는 쉽지 않고
화禍가 닥치는 것은
정定해진 날이 없으니,
경계警戒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으며,
注+우于는 왈曰이다. [부주]朱: 우于는 우吁와 같으니, 탄식하며 말한 것이다. 이 이하以下는 모두 초군楚君이 백성을 교훈敎訓한 말이다. 쉽지 않다[不易]는 것은 백성의 생활生活이 어려움을 이른 말이다. 화환禍患이 이르는 것은 예측豫測할 수 없으니, 항상 경계警戒하고 두려워해야 하고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는 말이다.
군중軍中에서는
군실軍實(兵士와
군기軍器)을 다스리고 거듭 경계하며
注+군실軍實은 군기軍器이다. ‘勝利는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注+[부주]朱: 이 이하는 모두 초군楚君이 병사兵士를 훈계訓戒한 말로 초楚나라가 비록 용국庸國을 이겼으나, 항상 승리勝利를 보장保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상주商紂는
백전백승百戰百勝하였으되 끝내
무후無後하였다.’
注+[부주]林: 옛날에 상주商紂는 백전백승百戰百勝한 위세威勢를 믿었으나, 뒤에 무왕武王이 격멸擊滅하여 끝내 그 제사祭祀가 끊겼다는 말이다. 고 하면서
약오若敖와
분모蚡冒가
필로篳路를 타고
남루藍縷한 옷을 입고서
산림山林을
개척開拓한 일로
훈계訓戒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注+약오若敖와 분모蚡冒는 모두 초楚나라의 선군先君이다. 필로篳路는 나무를 싣는 수레이고, 남루藍縷는 해진 옷이니, 이는 두 임금이 근검勤儉으로 국토國土를 개척開拓한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잠언箴言을 지어
경계警戒하기를 ‘백성의
생계生計는
근면勤勉에 달렸으니
근면勤勉하면
생계生計가
궁핍窮乏해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저들이
교만驕慢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注+잠箴은 경계이다.
선대부先大夫자범子犯의 말에 ‘군대는 명분名分이 바르면[直]사기士氣가 왕성旺盛[壯]하고, 명분名分이 바르지 못하면[曲]사기士氣가 쇠衰[老]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덕德을 행하지 않으면서
초楚나라와
원한怨恨을 맺기를
구求[徼]한다면 우리는
명분名分이 바르지 못하고
초楚나라는
명분名分이 바른 것이 되니,
사기士氣가
쇠衰하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注+부덕不德은 무력武力으로 제후諸侯와 다툼을 이른다. 요徼는 요要(求함)이다.
초군楚君이
친위병親衛兵을 나누어
좌우左右 두
광廣으로 만들었는데,
注+초군楚君의 친위병親衛兵이다. 광廣에는
졸卒(兵車 30
승乘)이 있고,
졸卒에는 두
편偏(15乘)이 있습니다.
注+15승乘이 1광廣이다. 사마법司馬法에 “1백 인人이 1졸卒이고, 25인人이 1양兩이며, 병거兵車 15승乘이 대편大偏이다.”고 하였으니, 지금 15승乘을 1광廣으로 삼은 것도 옛 편법偏法을 따른 것이다. 다시 25인人을 승부承副로 삼은 것이다. [부주]朱: 지금의 광법廣法으로 논論하면 병거兵車 1승乘마다 졸卒 1백 인人이 딸린다. 주周나라 제도制度는 병거兵車 15승乘을 대편大偏으로 삼고, 졸卒 25인人을 양兩으로 삼았는데, 초楚나라는 50인人을 양兩으로 삼았다. 옛날의 편법偏法으로 논論하면 1졸卒 1백 인人 이외에 또 이 50인人의 양兩이 있다. 대체로 초楚나라 제도는 병거兵車 1승乘이 주周나라의 병거兵車 2승乘의 인수人數를 겸한 것이다. 주周나라 제도는 병거兵車 1승乘에 75인人이 딸렸는데, 초楚나라 제도는 병거兵車 1승乘에 150인人이 딸렸다. 이 설說은 당태종唐太宗이 이정李靖과 문답問答한 글에 보이니, 주소注疏의 설說은 옳지 않다.
우광右廣이 먼저
병거兵車를
가동駕動하여 새벽부터
정오正午까지
수위守衛하면
注+[부주]朱: 날마다 우광右廣은 새벽닭이 울 때 말에 수레를 매어 수비守備하다가 시각時刻을 계산하여 정오正午에 이르면 수비守備를 멈춘다. 좌광左廣이 그 뒤를 이어
황혼黃昏까지
수위守衛하며,
注+[부주]朱: 좌광左廣이 우광右廣과 교대交代해 말에 수레를 매어 수비守備하다가 일몰日沒에 이르면 수비守備를 멈춘다. 밤에는
내관內官(近臣)이 돌아가며
경비警備를 담당하여
注+내관內官은 근신近臣이다. 서序는 차례이다. [부주]朱: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내관內官들이 차례를 정해 그 밤을 담당擔當해 수비守備하는 것으로, 오늘날 교대交代로 돌아가며 숙직宿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의외意外의
사태事態[不虞]를
대비對備하니,
방비防備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량子良은
정鄭나라의
양신良臣이고,
사숙師叔은
초楚나라의
존귀尊貴한 사람인데,
注+사숙師叔은 반왕潘尪이다. 초인楚人들이 존귀尊貴하게 여기는 사람이란 말이다. 사숙師叔이
정鄭나라로 들어가
결맹結盟하고
자량子良이
초楚나라로 가서
인질人質이 되었으니,
초楚나라와
정鄭나라의
관계關係가
친밀親密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鄭나라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우리에게
전쟁戰爭하도록
권勸하는 것은 우리가 이기면 우리에게 붙고 이기지 못하면 드디어
초楚나라에 붙으려고
注+[부주]朱: 지금 정鄭나라가 황술皇戌를 보내어 와서 우리에게 초楚나라와 전쟁戰爭하기를 권勸하는 것은, 우리가 승리勝利하면 정鄭나라는 우리에게 귀부歸附하고 우리가 승리勝利하지 못하면 정鄭나라는 드디어 초楚나라에 복종服從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우리의
승패勝敗를 보아
거취去就를
결정決定하려는 것이니,
정인鄭人의 말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注+[부주]朱: 우리의 승부勝負로써 자기들의 거취去就를 결정決定하려는 듯하니, 황술皇戌의 요청要請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조괄趙括과 조동趙同이 말하기를, “군대를 거느리고 온 것은 오직 적敵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이니, 적敵을 쳐 승리勝利하고 속국屬國을 얻을 수 있다면 다시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반드시
체자彘子의 말을 따르십시오.”
注+득속得屬은 정鄭나라를 복속服屬시키는 것이다. 라고 하자,
지계知季가 말하기를, “
조동趙同[原]과
조괄趙括[屛]은
화禍를
자초自招하는 무리이다.”
注+지계知季는 장자莊子이고, 원原은 조동趙同이고, 병屛은 조괄趙括이다. 도徒는 무리이다. [부주]林: 구咎는 체자彘子를 가리킨 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장자趙莊子가 말하기를, “
난백欒伯의 말이 훌륭하니,
注+장자莊子는 조삭趙朔이고, 난백欒伯은 무자武子이다. 그의 말대로
실천實踐하면 반드시
진晉나라의
국운國運은
장구長久할 것입니다.”
注+실實은 충充(實踐)과 같다. 난서欒書의 신행身行(行動)이 능히 이 말을 실천實踐한다면 진晉나라의 집정執政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傳
진晉나라
위기魏錡가
공족대부公族大夫가 되기를 구하였으나 되지 않자
注+위기魏錡는 위주魏犫의 아들이다. 공족대부公族大夫가 되고자 한 것이다.노怒하여
진군晉軍을
패배敗北시키고자 하였다.
초군楚軍에
도전挑戰하겠다고
청請하거늘
허락許諾하지 않고,
사자使者로 가겠다고 청하거늘 허락하였다.
注+[부주]林: 사자使者로 가기를 청請한 것은 화친和親을 청하기 위해 왔던 초楚나라 사자使者의 답사答使로 가기를 청請한 것이다.
드디어 초군楚軍으로 가서 교전交戰하기를 청請하고 돌아오는데, 초楚나라 반당潘黨이 그를 추격追擊하였다.
형택熒澤에 이르러 위기魏錡는 여섯 마리의 사슴을 보고서 그 중 한 마리를 쏘아 잡아 가지고, 수레를 돌려 쫓아오는 반당潘黨에게 그 사슴을 주며 말하기를, “그대가 전쟁戰爭 중에 있으니 수인獸人이 신선新鮮한 짐승 고기를 공급供給하지 못하지 않았겠소.
그러므로 감히 이 사슴을
종자從者들의 반찬거리로 드리오.”
注+형택熒澤은 형양현熒陽縣 동쪽에 있다. 새로 잡은 짐승을 ‘선鮮’이라 한다. 여섯 마리를 발견하고서 한 마리만 잡은 것은 활을 쏘는 솜씨가 초군楚軍(楚의 악백樂伯)만 못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라고 하니,
숙당叔黨은
부하部下들에게
명命하여
추격追擊을 멈추게 하였다.
注+숙당叔黨은 반당潘黨으로 반왕潘尪의 아들이다. [부주]林: 위기魏錡를 보내 주고 다시 추격追擊하지 말도록 명命한 것이다.
조전趙旃도
경卿이 되기를 구하였으나 되지 않았고,
注+조전趙旃은 조천趙穿의 아들이다. 또
도전挑戰해 온
초인楚人을 놓친 것에 노하여,
초군楚軍에
도전挑戰하겠다고 청하거늘 허락하지 않고,
초군楚軍에
사자使者로 가서
초인楚人을 불러
결맹結盟하러 오게 하겠다고 청하거늘 허락하니,
조전趙旃은
위기魏錡와 함께 모두
명命을 받고
초군楚軍으로 갔다.
注+[부주]林: 조전趙旃과 위기魏錡가 모두 명命을 받고 초군楚軍의 진영陣營으로 간 것이다.
극헌자郤獻子가 말하기를, “
원한怨恨을 품은 두 사람이 갔으니,
注+헌자獻子는 극극郤克이다. [부주]朱: 두 사람은 모두 진晉나라에 원한怨恨이 있는 자인데, 지금 그들을 초군楚軍의 진영陣營으로 가게 하였으니, 반드시 초군楚軍을 노怒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방비防備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失敗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자,
체자彘子가 말하기를, “
정인鄭人이 우리에게
교전交戰하기를
권勸할 때 감히 따르지 않고,
초인楚人이
화친和親하기를 요구할 때
우호友好를 맺지 않은 것은
군중軍中에
전략戰略[成命]이 없기 때문이니,
방비防備를 많이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사계士季가 말하기를, “방비防備하는 것이 좋다.
만약 저 두 사람이
초인楚人을
노怒하게 하여
초인楚人이 우리의 대비가 없는 틈을 타
기습奇襲한다면 우리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군대를 잃게 될 것이니
注+승乘은 등登(즉시 공격함)과 같다. 방비防備하는 것이 좋다.
초인楚人이 과연
악의惡意가 없다면
방비防備를
해제解除하고
결맹結盟하더라도
수호修好에 무슨
해害가 있겠는가?
注+[부주]林: 만약 초인楚人에게 악의惡意가 없다면 병비兵備를 제거除去하고 서로 어울려 결맹結盟하더라도 두 나라의 우호友好에 무슨 해害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만약 초인楚人이 악의惡意를 품고서 온다 하더라도 방비防備가 있으면 실패失敗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제후諸侯가
상견相見할 때에도 군대의
호위護衛를
철거撤去하지 않는 것은 만일의
사태事態를
경계警戒하기 위함이다.”
注+철徹은 제거除去하는 것이다. [부주]林: 또 비록 제후諸侯가 화목和睦과 우호友好의 예禮로 상견相見하더라도 임금의 행차行次에는 군대가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대의 호위護衛를 철거撤去하지 않는 것은 경계警戒를 지극히 하기 위함이라고 한 것이다.고 하였으나,
체자彘子는 반대하고
注+방비防備를 설치設置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방비防備를
설치設置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계士季는
공삭鞏朔과
한천韓穿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오산敖山 앞 일곱 곳에
복병伏兵을 설치하게 하였다.
注+수帥는 거느리는 것이다. 복覆은 일곱 곳에 복병伏兵을 둔 것이다. [부주]林: 상군上軍의 장수將帥사계士季가 유독 공삭鞏朔과 한천韓穿에게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오산敖山 앞 일곱 곳에 군대를 매복埋伏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군上軍은 패배敗北하지 않았고, 조영제趙嬰齊도 그 부하部下를 보내어 먼저 황하黃河가로 가서 배를 준비準備하게 하였기 때문에 패전敗戰하고도 황하黃河를 먼저 건넜다.
傳
병진일丙辰日에
초군楚軍의
치중輜重이
필邲에 이르니,
注+중重은 치중輜重(軍需物資를 실은 수레)이다.초군楚軍은 드디어
형옹衡雍에
주둔駐屯하였다.
반당潘黨이 말하기를, “
군왕君王께서는 어찌
무군武軍을
축조築造해
注+군영軍營을 축조築造해 무공武功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군晉軍의
시체屍體를
수습收拾하여
경관京觀을 만들지 않으십니까?
注+적敵의 시체屍體를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봉분封墳을 만든 것을 ‘경관京觀’이라 한다.
신臣이 듣건대 적敵에게 승전勝戰하면 반드시 자손子孫에게 보여 무공武功을 잊지 않게 한다고 합니다.”고 하니, 초자楚子가 말하기를, “이는 네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글자의
구조構造로 말하면
지止와
과戈가 합한 것이 ‘
무武’이다.
注+문文은 글자이다. [부주]朱: 지止와 과戈 두 글자를 합쳐서 무자武字를 만든 것은 병란兵亂을 종식終息시키는 뜻을 취取한 것인 듯하다.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송頌을 짓기를, ‘
간과干戈를 거두어 간직하고
궁시弓矢를 통속에 넣고서,
注+집戢은 간직하는 것이고, 고櫜은 자루에 넣어 간직하는 것이다. 시詩는 무왕武王이 포란暴亂한 나라를 주멸誅滅하고 병란兵亂을 종식終息한 것을 찬미讚美한 것이다. 내 아름다운
덕德이 있는 사람을 구하여 이
중하中夏에
인정仁政을 베푸니 진실로
왕업王業을 이루어
천하天下를
보유保有하였다.’
注+사肆는 수遂(드디어)이고, 하夏는 대大이다. 무왕武王이 병란兵亂을 종식終息한 뒤에 또 능히 미덕美德을 구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커져서 진실로 왕자王者가 되어 천하天下를 보유保有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라고 하였고,
또 〈
무武〉를 지어 그
졸장卒章에 ‘그
공功을 세우는 데 이르렀다.’
注+무武는 〈주송周頌〉의 편명篇名이다. 기耆는 치致이다. 무왕武王이 주紂를 주벌誅罰하고서 그 공功을 세우는 데[定] 이르렀다는 말이다. 고 하였고,
그 3
장章에 ‘
근로勤勞하신
문왕文王의
덕德을
포진布陳(시행해 보임)하고서, 내 가서
주紂를
정벌征伐하여 백성을
안정安定시켰다.’
注+기삼其三은 제 3편篇이다. 포鋪는 포布(펴는 것)이고, 역繹은 진陳(베푸는 것)이고, 시時는 시是이고, 사思는 어사語辭이다. 무왕武王이 인정仁政을 펴고 교화敎化를 베풀어 천하天下가 귀의歸依해 안정安定을 찾게 한 것을 찬미讚美한 것이다. 고 하였으며,
그 6
장章에 ‘
만방萬邦을 편안하게 하니
풍년豊年이 자주 들었다.’
注+기육其六은 제 6편篇이다. 수綏는 안安이고, 누屢는 자주이다. 무왕武王이 이미 천하天下를 안정安定시키니, 자주 풍년豊年이 들었다는 말이다. 여기의 삼三과 육六의 수數는 지금의 《시경詩經》 송頌의 편차篇次와 같지 않다. 고 하였으니,
저 ‘
무武’라는 것은
포악暴惡을
금지禁止하고,
전쟁戰爭을
정지停止하고[戢兵],
천하天下를
보유保有[保大]하고,
공功을 세우고[定功], 백성을
안정安定시키고,
제후諸侯를 화목하게 하고[和衆],
재물財物을
풍족豊足하게 하는 것이다.
注+이것이 무武의 일곱 가지 덕德이다.
그러므로
자손子孫으로 하여금 그 빛난
공功[章]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다.
注+편장篇章에 드러내어 자손子孫으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두 나라 병사兵士들의 해골骸骨이 산야山野에 나뒹굴게 하였으니, 이는 포악暴惡이고, 무력武力을 과시誇示[觀兵]하여 제후諸侯를 위협威脅하였으니, 이는 전쟁戰爭을 정지停止하지 않은 것이다.
포악暴惡을 범하고
전쟁戰爭을
정지停止하지 않았으니 어찌
천하天下를
보유保有할 수 있으며,
진晉나라가 여전히 남아 있으니 어찌
공功을 세울 수 있으며, 백성의 바람을 어긴 것이 많으니 백성이 어찌
안정安定할 수 있으며,
注+[부주]朱: 전쟁戰爭을 하여 백성의 생업生業을 잃게 하였으니, 백성의 바람을 어긴 것이 많다는 말이다. 덕德도 없으면서 억지로
제후諸侯들과
패자霸者가 되기를 다투었으니 어찌
제후諸侯들과
화목和睦할 수 있으며, 남의
위기危機를 나의 이익으로 여기고,
注+기幾는 위태로움이다. 남의
우란憂亂을 나의
안정安定으로 여기고, 이를 나의
영예榮譽로 삼았으니 어찌
재물財物을
풍족豊足하게 할 수 있겠는가?
注+군대가 출동出動하면 농사農事가 흉년凶年이 든다는 말이다.
무武에는 일곱 가지 덕德이 있는데, 나에게는 그 중 한 가지도 없으니, 무엇을 자손에게 보여주겠는가?
선군先君의
사당祠堂을 세워
승전勝戰을
고告할 뿐이고,
注+선군先君께 제사祭祀하여 승전勝戰을 고告한다는 말이다. [부주]林: 필邲에 초楚나라 선군先君의 궁宮(祠堂)을 세우고서 정鄭나라를 복속服屬시키고 진晉나라를 이긴 일을 선군先君께 고告할 뿐이라는 말이다. 대개 옛날에는 출병出兵할 때 반드시 천묘遷廟의 신주神主를 싣고 간 듯하다. 지금 선군先君의 사당祠堂을 세우고서 성사成事를 고告한다는 것은 싣고 간 신주神主를 사당祠堂에 모셔 놓고 고告하는 제사祭祀를 올릴 뿐이라는 말이다. 이번의
승리勝利[武]는 나의
무공武功이 아니다.
옛날의 명왕明王은 불경不敬한 나라를 정벌征伐해 그 수괴首魁[鯨鯢]를 죽여 무덤을 높이 쌓아 대중大衆에게 보여 큰 치욕恥辱[大戮]을 받게 하였다.
그러므로
경관京觀을 만들어
음특淫慝한 자를
징계懲戒한 것이다.
注+경예鯨鯢는 대어大魚의 이름인데, 소국小國을 집어삼키는 불의不義한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
진晉나라는
죄罪를
범犯한 것이 없고,
注+진晉나라는 죄罪을 범犯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백성들은 모두
충성忠誠을 다해
군명君命에 죽었으니, 또 무엇 때문에
경관京觀을 만들겠는가?”라고 하고는
황하黃河의
신神에게
제사祭祀를 지내고,
선군先君의
사당祠堂을 세워
승전勝戰을
고告하고 돌아갔다.
注+전문傳文은 초장왕楚莊王이 예禮가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흥성興盛하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傳
가을에 진군晉軍이 환국還國하여 환자桓子가 죽기를 청請하니, 진후晉侯가 허락許諾하려 하였다.
그러자
사정자士貞子가
간諫하기를, “안 됩니다.
注+정자貞子는 사악탁士渥濁이다.
성복城濮의
전쟁戰爭 때
진군晉軍이
승전勝戰하고서 3일 동안
초군楚軍의
군량軍糧을 먹었는데도
注+희공僖公 28년에 있었다. [부주]朱: 진군晉軍이 3일 동안 초인楚人의 양곡糧穀을 먹은 것이다.문공文公께서는 오히려 근심하는 기색이 있자
좌우左右가 ‘기쁜 일이 있는데 근심하시니 만약 근심할 일이 있으면 기뻐하시겠습니까?’
注+근심하고 기뻐하는 것이 때를 잃었다는 말이다. 라고 하니,
문공文公께서 말씀하시기를, ‘
초楚나라에
득신得臣이 아직 살아 있으니 근심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注+헐歇은 끝나는 것이다.
짐승도 궁지窮地에 몰리면 덤비는데, 하물며 일국一國의 재상宰相이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초楚나라가
자옥子玉(得臣)을 죽임에 미쳐
注+자옥子玉은 득신得臣이다. 문공文公께서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드러내시며 ‘이제는 다시 나를
해害칠 자가 없다.’
注+기쁨이 안색顔色에 드러난 것이다. 고 하셨으니, 이는 우리
진晉나라가 두 번
승리勝利하고
초楚나라가 두 번
패배敗北한 것입니다.
注+[부주]朱: 성복城濮의 전쟁戰爭에 진晉나라가 이미 초楚나라에 승리勝利하였는데, 또 자옥子玉이 죽었으니, 이는 진晉나라가 또 초楚나라에 승리勝利한 것이라는 말이다.
초楚나라는 이로 인해 두
대代 동안
국세國勢가
강성强盛하지 못하였습니다.
注+초楚나라 성왕成王 때부터 목왕穆王 때까지이다.
지금 하늘이 우리
진晉나라를 크게
경계警戒하는 것 같은데,
注+경警은 경계警戒이다. 또
순임보荀林父를 죽이시어
초楚나라에게 거듭
승리勝利하게 한다면 우리
진晉나라가 어찌 오랫동안
강성强盛하지 못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순임보荀林父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 나아가서는 충성忠誠을 다하기를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자신의 허물을 보완補完하기를 생각하였으니, 이는 사직社稷을 보위保衛할 신하인데 어찌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그의
패전敗戰은
일식日食,
월식月食과 같으니 어찌
일월日月본연本然의
광명光明에
손상損傷이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진후晉侯는 그를 원래의
직위職位로
회복恢復시켰다.
注+진경공晉景公이 패업霸業을 상실喪失하지 않은 원인原因을 말한 것이다.
傳
겨울에 초자楚子가 소국蕭國을 토벌討伐하니, 송宋나라 화초華椒가 채인蔡人을 거느리고 와서 소국蕭國을 구원救援하였다.
소인蕭人이 초楚나라 웅상의熊相宜와 공자公子병丙을 사로잡으니, 초왕楚王이 소인蕭人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라.
내가 물러가겠다.”고 하였으나, 소인蕭人은 그들을 죽였다.
그러자 초왕楚王은 노怒하여 드디어 소국蕭國을 포위包圍하니 소군蕭軍이 무너졌다.
초楚나라
신공申公무신巫臣이 말하기를, “군대 중에 추위에 떠는 자가 많습니다.”고 하니,
초왕楚王이
삼군三軍을
순시巡視하며 군대를
위무慰撫하고
권면勸勉하니
注+어루만지고 위로慰勞해 권면勸勉한 것이다. 삼군三軍의 군사들은 모두 솜옷을 입은 것처럼 따뜻해 하였다.
注+광纊은 솜이다. 군사들이 기뻐하여 추위를 잊었다는 말이다.
드디어 소국蕭國의 도성都城으로 육박肉薄하였다.
소국蕭國의
환무사還無社가
초楚나라
사마司馬묘卯에게 말하여
신숙전申叔展을 고함쳐 부르게 하니,
注+환무사還無社는 소국蕭國의 대부大夫이고, 사마司馬묘卯와 신숙전申叔展은 모두 초楚나라 대부大夫이다. 환무사還無社는 평소 신숙전申叔展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사마司馬묘卯를 통通해 그를 부른 것이다. 신숙전申叔展이 “
맥국麥麴이 있는가?”라고 묻자,
환무사還無社가 “없다.”
注+맥국麥麴과 국궁鞠窮은 습기濕氣를 막는 약재藥材이다. 신숙전申叔展이 환무사還無社를 흙탕물 속으로 도망시키려고 이런 말을 하였으나, 환무사還無社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없다’고 한 것이다. 군중軍中에서는 감히 정직正直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은어隱語[謬語]를 사용使用한 것이다. 고 하였다.
신숙전申叔展이 다시 “산국궁山鞠窮이 있는가.”라고 묻자, 환무사還無社가 “없다.”고 하였다.
신숙전申叔展이 다시 “
하어복질河魚腹疾을 어찌할 생각인가?”
注+신숙전申叔展이 환무사還無社에게 습기濕氣를 막는 약재藥材가 없으면 장차 병病이 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라고 하니,
환무사還無社가 “
폐정廢井을 보거든 나를
구출救出하라.”
注+환무사還無社가 그 뜻을 깨닫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려 하였기 때문에 신숙전申叔展에게 폐정廢井을 보거든 나를 건져 달라고 요구要求한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내는 것을 ‘증拯’이라 한다. 고 하였다.
그러자 신숙전申叔展이 “그대가 들어 있는 폐정廢井 위에 띠로 질絰을 만들어 걸어 두어라.
폐정廢井 위에서
곡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나일 것이다.”
注+신숙전申叔展이 또 환무사還無社에게 띠를 꼬아 폐정廢井에 표시表示를 해 두라고 가르치고서, 우물 위에서 곡哭을 하면 우물 안에서 응답應答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고 하였다.
신숙전申叔展이 그
폐정廢井을 보니 띠로 만든
질絰이 있으므로
호곡號哭하면서
환무사還無社를
구출救出하였다.
注+호號는 곡哭하는 것이다. 전문傳文은 소인蕭人이 나라를 지킬 마음이 없었던 것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