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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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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四年春正月 公狩于郎注+冬獵曰狩 行 得田狩之時 故傳曰 書 時 禮也 周之春 夏之冬也 田狩從夏時 郞非國內之狩地 故書地하다
[經]夏 天王使宰渠伯糾來聘注+宰 官 渠 氏 伯糾 名也 王官之宰 當以才授位 而伯糾攝父之職 出聘列國 故書名以譏之 國史之記 必書年以集此公之事 故春秋有空時而無事者 今不書秋冬首月 史闕文 他皆放此하다
[傳]四年春正月 公狩于郞하니 注+郞非狩地 故時合禮
[傳]夏 周宰渠伯糾來聘하니 父在 故名이라
[傳]秋 秦師侵芮라가 敗焉하니 小之也注+秦以芮小 輕之 故爲芮所敗
[傳]冬 王師秦師圍魏하여 執芮伯以歸注+三年 芮伯出居魏 芮更立君 秦爲芮所敗 故以芮伯歸 將欲納之하다


4년 봄 정월에 환공桓公에서 사냥하였다.注+겨울 사냥을 ‘’라 한다. 삼구三驅를 행하였고 사냥한 것이 때에 맞았기 때문에 에 “기록한 것은 시기가 에 맞았기 때문이다.”고 한 것이다. 주력周曆정월正月하력夏曆의 겨울이다. 사냥은 하시夏時(夏曆)를 따른다. 국내國內의 사냥터가 아니기 때문에 지명地名을 기록한 것이다.
여름에 천왕天王거백규渠伯糾나라에 보내어 빙문하였다.注+관명官名이고, 이고, 백규伯糾는 이름이다. 왕관王官(王朝의 관원官員)의 는 재능에 따라 직위職位을 주어야 하는데, 백규는 아비의 직무職務을 대행하여 열국列國으로 빙문聘問을 나갔기 때문에 이름을 기록하여 비난한 것이다. 국사國史의 기록에는 반드시 연대를 기록하여 당시 임금의 일을 한 곳에 모으고, 수시首時를 기록하여 1년을 이룬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는 기사記事가 없어도 수시首時를 기록하는 것인데, 지금 가을과 겨울의 수월首月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사관史官의 잘못으로 글을 빠뜨린 것이다.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
4년 봄 정월에 환공이 에서 사냥하였으니, 이를 기록한 것은 사냥한 시기가 에 맞았기 때문이다.注+은 사냥할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기가 에 맞았다고만 기록한 것이다.
여름에 나라 거백규가 와서 빙문聘問하였으니, 그의 아비가 생존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가을에 진사秦師예국芮國을 침공하였다가 패전敗戰하였으니, 이는 을 가볍게 보았기 때문이다.注+나라는 나라가 작다 하여 가볍게 여겼다. 그러므로 도리어 나라에 패배한 것이다.
겨울에 왕사王師진사秦師나라를 포위하여 예백芮伯를 잡아가지고 돌아갔다.注+환공桓公 3년에 예백芮伯나라로 도망가서 거류居留하니, 는 다른 사람을 다시 임금으로 세웠다. 나라는 예국芮國의 현재 임금에게 패전敗戰당하였기 때문에 예백을 데리고 귀국하여 장차 그를 의 임금으로 들여보내려 한 것이다.


역주
역주1 三驅之禮 : 옛날 帝王들이 사냥하던 禮로, 사냥할 때 三面만을 包圍하여 짐승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前面은 열어 놓았던 제도이다. 《周易比卦九五傳》
역주2 書首時以成此年之歲 : 四時가 모두 갖추어져야 1년을 이룰 수 있으므로 首時를 기록하는 것은 1년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역주3 書時禮也 : 《公羊傳》과 《正義》를 상고해 보면, 임금의 사냥은 近郊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데, 멀리 郎에까지 가서 사냥하였기 때문에 地名을 기록하여 나무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사냥한 장소와 시기가 모두 禮에 맞으면 《春秋》에 기록하지 않는 것이 常例인데, 여기에 장소와 시기를 기록한 것은 장소는 합당하지 않았으나 시기만은 禮에 맞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역주4 : 대본에는 ‘唯’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書’로 바로잡았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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