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冬十月壬午
에 公子遂會晉趙盾盟于衡雍
하다注+壬午 月五日
乙酉
에 公子遂會
盟于暴
하다注+乙酉 月八日也 暴 鄭地 公子遂不受命而盟 宜去族 善其解國患 故稱公子以貴之
[經]宋人殺其大夫司馬
하니 宋司城來奔
하다注+司馬死不舍節 司城奉身而退 故皆書官而不名 貴之
傳
[傳]八年春
에 晉侯使解揚歸匡戚之田于衛
注+匡本衛邑 中屬鄭 孔達伐不能克 今晉令鄭還衛 及取戚田 皆見元年 [附注] 林曰 解揚 晉大夫하고 且復致公壻池之封
하니 自申至於虎牢之竟
이라注+公壻池 晉君女壻 又取衛地以封之 今幷還衛也 申 鄭地 傳言趙盾所以能相幼主而盟諸侯 [附注] 林曰 申虎牢 皆鄭邑 蓋此地 皆公壻池之封也
傳
[傳]夏
에 秦人伐晉
하야 取武城
하야 以報令狐之役
하다注+令狐役在七年
傳
[傳]冬
에 襄仲會晉趙孟盟于衡雍
하니 報扈之盟也
라注+[附注] 林曰 以扈盟後至 故盟衡雍以報之
遂會伊雒之戎
하다注+伊雒之戎 將伐魯 公子遂不及復君 故專命與之盟
書曰 公子遂
라하니 珍之也
라注+珍 貴也 大夫出竟 有可以安社稷利國家者 專之可
傳
[傳]穆伯如周弔喪
이라가 不至
하고 以幣奔莒
하야 從己氏焉
하다注+己氏 莒女
傳
昭公不禮焉
注+昭公嫡祖母이어늘 夫人因戴氏之族
注+華樂皇皆戴族하야 以殺襄公之孫孔叔公孫鍾離及大司馬公子卬
하니 皆昭公之黨也
라
司馬握節以死
라 故書以官
하다注+節 國之符信也 握之以死 示不廢命
司城蕩意諸來奔
에 效節於府人而出
注+效 猶致也 意諸 公子蕩之孫일새 公以其官逆之
하고 皆復之
하다
亦書以官
하니 也
라注+卿違從大夫 公賢其效節 故以本官逆之 請宋而復之 司城官屬悉來奔 故言皆復
傳
[傳]夷之蒐
에 晉侯將登箕鄭父先都
注+登之於上軍也 夷蒐在六年하고 而使士縠梁益耳將中軍
注+士縠本司空 [附注] 林曰 使二子爲中軍將佐한대 先克曰 狐趙之勳
을 不可廢也
라하니 從之
하다注+狐偃趙衰有從亡之勳 [附注] 林曰 六年 以狐射姑趙盾爲中軍將佐
先克奪蒯得田於菫陰
이라注+七年 晉禦秦師於菫陰 以軍事奪其田也 先克 中軍佐 故箕鄭父先都士縠梁益耳蒯得作亂
하다注+爲明年殺先克張本
가을 8월 무신일戊申日에 천왕天王이 붕崩하였다.
겨울 10월
임오일壬午日에
공자수公子遂가
진晉나라
조돈趙盾과 만나
형옹衡雍에서
결맹結盟하였다.
注+임오壬午는 10월 5일이다.
을유일乙酉日에
공자수公子遂가
낙융雒戎과
폭暴에서
회합會合하였다.
注+을유乙酉는 10월 8일이다. 폭暴은 정鄭나라 땅이다. 공자수公子遂가 군명君命도 받지 않고 임의任意로 회맹會盟하였으니 그의 족族(公子)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가 국가의 우환憂患을 해결解決한 것을 잘한 일로 여겨 ‘공자公子’라고 칭하여 그를 존귀尊貴하게 여긴 것이다.
공손오公孫敖가
경사京師에 가다가
경사京師로 가지 않고
중도中途에서 되돌아와서
병술일丙戌日에
거莒나라로 도망갔다.
注+출出을 말하지 않은 것은 군명君命을 받고 나갔다가 밖에서 도망하였기 때문이다.
황충蝗蟲의
재해災害가 발생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재해災害가 되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송인宋人이 그
대부大夫사마司馬를 죽이니,
송宋나라
사성司城이
노魯나라로 도망해 왔다.
注+사마司馬는 죽으면서도 부절符節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사성司城은 직분職分을 다하고서[奉身] 물러났기 때문에 모두 관명官名을 기록하고 이름을 기록하지 않아 존귀尊貴하게 여긴 것이다.
傳
8년 봄에
진후晉侯가
해양解揚을 보내어
광匡과
척戚 두 곳의 땅을
위衛나라에 돌려주고,
注+광匡은 본래 위衛나라 읍邑이었는데 중간에 정鄭나라로 귀속歸屬되었다. 위衛나라 대부大夫공달孔達이 광읍匡邑을 쳤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진晉나라가 정鄭나라로 하여금 그 땅을 위衛나라에 되돌려 주게 하였다. 광읍匡邑과 척전戚田을 취한 것은 모두 원년元年에 보인다.[부주]林: 해양解揚은 진대부晉大夫이다. 또 다시
공서公壻지池의
봉지封地를 돌려주었으니
신申에서
호뢰虎牢의 경계까지였다.
注+공서公壻지池는 진군晉君의 사위이다. 또 위衛나라 땅을 취하여 공서公壻지池에게 봉지封地로 주었던 것까지 지금 아울러 위衛나라에 돌려준 것이다. 신申은 정鄭나라 땅이다. 전傳의 말은 조돈趙盾이 능히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제후의 맹주盟主가 되게 한 것을 말한 것이다. [부주]林: 신申과 호뢰虎牢는 모두 정鄭나라 땅인데, 이 땅은 모두 공서公壻지池의 봉지封地인 듯하다.
傳
여름에
진인秦人이
진晉나라를 토벌해
무성武城을 취하여
영호令狐의 전쟁을 보복하였다.
注+영호令狐의 전쟁은 문공文公 7년에 있었다.
傳
가을에
양왕襄王이
붕崩하였다.
注+공손오公孫敖가 조상弔喪하기 위해 주周나라에 간 전傳의 배경이다.
傳
진인晉人이
호扈의
회맹會盟에
공公이 늦게 갔다는 이유로 와서
노魯나라를
징벌懲罰하였다.
注+전년前年에 있었던 호扈의 회맹會盟에 공公이 늦게 갔었다.
傳
겨울에
양중襄仲이
진晉나라
조맹趙孟과 만나
형옹衡雍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이는
호扈의
회맹會盟에 늦게 간 잘못을
보상報償한 것이다.
注+[부주]林: 호扈의 회맹會盟에 늦게 갔기 때문에 형옹衡雍에서 결맹結盟하여 그 잘못을 보상報償한 것이다.
드디어
이락伊雒의
융戎과
회합會合하였다.
注+이수伊水와 낙수雒水유역流域에 사는 융족戎族이 노魯나라를 침벌侵伐하려 하니, 공자수公子遂는 임금께 복명復命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므로 군명君命을 받지 않고 임의任意[專命]로 저들과 회맹會盟한 것이다.
경經에 ‘
공자수公子遂’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그를 존귀하게 여긴 것이다.
注+진珍은 귀貴이다. 대부大夫가 나라 밖으로 나갔을 때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國家를 이롭게 할 일이 있으면 군명君命을 받지 않고 임의任意로 처리하는 것이 옳다.
傳
목백穆伯이
조상弔喪하기 위해
주周나라에 가다가
경사京師로 가지 않고 가지고 간
예물禮物을 가지고
거莒나라로 도망하여
기씨己氏를 찾아갔다.
注+기씨己氏는 거녀莒女이다.
傳
송양공宋襄公의 부인夫人은 주양왕周襄王의 누이이다.
송공宋公이
예우禮遇하지 않자,
注+부인夫人은 소공昭公의 적조모嫡祖母이다.부인夫人은
대씨戴氏의
종족宗族을 이용해[因]
注+화씨華氏‧악씨樂氏‧황씨皇氏가 모두 대씨戴氏의 종족宗族이다.양공襄公의 손자
공숙孔叔‧
공손公孫종리鍾離와
대사마大司馬공자公子앙卬을 죽였으니, 이들은 모두
소공昭公의
당黨이었다.
사마司馬는
부절符節을 손에 쥐고 죽었기 때문에
경經에
관직官職을 기록한 것이다.
注+절節은 국가國家의 부신符信이다. 부신符信을 쥐고 죽은 것은 군명君命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사성司城탕의제蕩意諸는
노魯나라로 도망해 올 때
부절符節을
부인府人에게
반납返納하고 나왔기 때문에
注+효效는 치致(바침)와 같다. 의제意諸는 공자公子탕蕩의 손자이다.노문공魯文公은 그를 본래의
관직官職으로 맞이하였고, 그
관속官屬들도 모두 본래의 관직으로
대우待遇하였다.
이 또한
경經에 관직을 기록하였으니, 두 사람 모두를
존귀尊貴하게 여긴 것이다.
注+경卿이 도망해 오면 한 등급 낮추어 대부大夫의 예禮로 대우待遇하는 것이 관례慣例이다. 그러나 노문공魯文公은 그가 부절符節을 반납返納하고 나온 것을 훌륭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를 본래의 관직官職으로 영접하고서, 송宋나라에 요청해 그의 관직官職을 회복回復시킨 것이다. 사성司城의 관속官屬이 모두 도망해 왔기 때문에 ‘개복지皆復之’라고 한 것이다.
傳
이夷의
훈련訓鍊 때
진후晉侯는
기정보箕鄭父와
선도先都의
품계品階를 올려 주고
注+상군上軍으로 올리려 한 것이다. 이夷의 훈련은 문공文公 6년에 있었다.사곡士縠과
양익이梁益耳에게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려 하자,
注+사곡士縠은 본래 사공司空이었다. [부주]林: 두 사람을 중군中軍의 장將과 좌佐로 삼으려 한 것이다.선극先克이 말하기를 “
호언狐偃과
조쇠趙衰의
공功을
폐기廢棄해서는 안 됩니다.”고 하니,
진후晉侯는 그의 말을 따랐다.
注+호언狐偃과 조쇠趙衰는 진문공晉文公이 망명亡命했을 때 수종隨從한 공로功勞가 있다. [부주]林: 문공文公 6년에 호역고狐射姑를 중군장中軍將으로, 조돈趙盾을 중군좌中軍佐로 삼았다.
선극先克이
근음菫陰에 있는
괴득蒯得의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注+문공文公 7년에 근음菫陰에서 진군秦軍을 방어防禦할 때 군사軍事로 인해 그의 땅을 빼앗은 것이다. 이때 선극先克은 중군좌中軍佐였다.기정보箕鄭父‧
선도先都‧
사곡士縠‧
양익이梁益耳‧
괴득蒯得이
반란叛亂을 일으켰다.
注+명년明年에 선극先克을 죽인 장본張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