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十有七年春正月丙辰
에 公會齊侯紀侯盟于黃
注+黃 齊地하다
[經]二月丙午
에 公會邾儀父盟
趡
注+邾 魯地 稱字 義與蔑盟同 二月無丙午 丙午 三月四日也 日月必有誤하다
[經]夏五月丙午
에 及齊師戰于奚
注+奚 魯地 皆陳曰戰 [附注] 林曰 此齊魯交兵之始 齊魯之兵 始於奚而終於하다
[經]六月丁丑
에 蔡侯封人卒
注+十一年 大夫盟于折하다
[經]秋八月
에 蔡季 自陳歸于蔡
注+季 蔡侯弟也 言 爲陳所納하다
[經]癸巳
에 葬蔡桓侯
注+無傳 稱侯 三月而葬 速하다
[經]冬十月朔
에 日有食之
注+甲乙者 歷之紀也 晦朔者 日月之會也 日食不可以不存晦朔 晦朔須甲乙而可推 故日食必以晦朔日爲例하다
傳
[傳]十七年春
에 盟于黃
하니 平齊紀
요 且謀衛故也
注+齊欲滅紀 衛逐其君라
傳
[傳]及邾儀父盟于趡
하니 尋蔑之盟也
注+蔑盟 在隱元年라
傳
[傳]夏
에 及齊師戰于奚
하니 疆事也
注+爭疆界也라
公曰 疆埸之事
는 愼守其一
注+[附注] 林曰 謹守其一定之疆界하야 而備其不虞
注+虞 度也 不度(탁) 猶不意也하고 姑盡所備焉
이라가 事至而戰
이니 又何謁焉
注+齊背盟而來 公以信待 故不書侵伐고
傳
秋
에 蔡季自陳歸于蔡
注+桓侯無子 故召季而立之 季內得國人之望 外有諸侯之助 故書字 以善得衆 稱歸 以明外納라하니 蔡人嘉之也
注+嘉之 故以字告라
傳
[傳]伐邾
하니 宋志也
注+邾宋爭疆 魯從宋志 背趡之盟라
傳
[傳]冬十月朔
에 日有食之
하니 不書日
注+[附注] 林曰 不書甲乙之日은 官失之也
注+[附注] 林曰 日官失其甲乙之日라
天子有日官
하고 諸侯有日御
注+日官日御 典歷數者하니 日官居卿以底日
이 禮也
注+日官 天子掌歷者 不在六卿之數 而位從卿 故言居卿也 底 平也 謂平歷數라 日御不失日
하야 以授百官于朝
注+日官平歷以班諸侯 諸侯奉之 不失天時 以授百官니라
傳
[傳]初에 鄭伯將以高渠彌爲卿한대 昭公惡之하야 固諫이나 不聽하다
昭公立
에 懼其殺己也
하야 辛卯
에 弑昭公而立公子亹
注+公子亹 昭公弟하다
傳
君子謂昭公知所惡矣
로다 公子達
注+公子達 魯大夫曰 高伯其爲戮乎
인저
已甚矣
注+復 重也 本爲昭公所惡 而復弑君 重爲惡也 [附注] 林曰 高伯 卽高渠彌로다
17년 봄 정월 병진일에
환공桓公이
제후齊侯‧
기후紀侯와 회합하여
황黃에서 결맹하였다.
注+황黃은 제齊나라 땅이다.
2월 병오일에
환공桓公이
주邾의보儀父와
추趡에서 결맹하였다.
注+주邾는 노魯나라 땅이다. 자字를 칭한 것은 은공隱公원년元年에 멸蔑의 결맹結盟에 자字를 칭한 뜻과 같다. 2월에는 병오일이 없고, 병오일은 3월 4일이니, 날과 달에 틀림없이 오류誤謬가 있다.
여름 5월 병오일에
제齊나라 군대와
해奚에서 전쟁하였다.
注+해奚는 노魯나라 땅이다. 양군兩軍이 모두 진陣을 친 뒤에 전투戰鬪하는 것을 ‘전戰’이라 한다.[부주]林: 이것이 제齊와 노魯가 교전交戰한 시초이다. 제齊와 노魯의 교전은 해奚의 전쟁이 처음이고 애릉艾陵의 전쟁이 마지막이다.
6월 정축일에
채후蔡侯봉인封人이
졸卒하였다.
注+환공桓公 11년 노魯나라 대부와 절折에서 결맹하였다.
가을 8월에
채계蔡季가
진陳나라에서
채蔡나라로 돌아갔다.
注+계季는 채후蔡侯의 아우이다. ‘귀歸’라고 말한 것은 진陳나라에 의해 들여보내졌기 때문이다.
계사일에
채환후蔡桓侯를 장사 지냈다.
注+전傳이 없다. ‘후侯’라고 칭한 것은 아마도 오류誤謬인 듯하다. 3개월 만에 장사지냈으니, 너무 빨랐다.
노魯나라가 송인宋人‧위인衛人과 함께 주邾를 토벌하였다.
겨울 10월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注+갑을甲乙(干支)은 역曆을 기록하는 법이고, 회삭晦朔(그믐과 초하루)은 해와 달이 만나는 시기이니, 일식에는 회삭晦朔을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회삭晦朔에는 반드시 갑을甲乙이 있어야 추산推算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식에는 반드시 회삭을 기록하는 것을 예例로 삼는다.
傳
17년 봄에 환공이
제후齊侯‧
기후紀侯와
황黃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이는
제齊나라와
기紀나라를
화평和平시키고, 또
위衛나라의 일을 모의하기 위함이었다.
注+제齊나라는 기紀나라를 토멸討滅하고자 하고, 위衛나라는 그 임금을 축출하였기 때문이다.
傳
환공이
주邾의보儀父와
유趡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이는
멸蔑에서 맺은
맹약盟約을 거듭 다지기 위함이었다.
注+멸蔑의 결맹은 은공隱公원년元年에 있었다.
傳
여름 5월에
제齊나라 군대와
해奚에서 전쟁하였으니, 이는
국경분쟁國境紛爭이었다.
注+경계境界를 다툰 것이다.
이때 제인齊人이 노魯나라의 국경을 침범하니, 국경을 지키는 관리官吏가 와서 고하였다.
그러자
환공桓公이 말하기를 “
강역疆埸의 일은 우리 쪽
경계境界를 조심해 지켜
注+[부주]林: 삼가 일정한 경계를 지키는 것이다. 불우不虞의
사태事態에
대비對備하고,
注+우虞는 헤아림이니, 부도不度는 불의不意와 같다. 우선 대비에 힘을 다하였다가 사건이 발생하면 전쟁하는 것이니, 무엇 때문에 와서
지시指示를 청하느냐.”고 하였다.
注+제齊나라가 맹약을 저버리고 쳐들어왔으나, 환공이 신의信義로써 상대하였기 때문에 ‘침벌侵伐’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傳
채환후蔡桓侯가 졸卒하니 채인蔡人이 진陳나라에 가 있는 채계蔡季를 불러 들였다.
“가을에
채계蔡季가
진陳나라에서
채蔡나라로 돌아왔다.”라고 하였으니,
注+환후桓侯에게 아들이 없기 때문에 계季를 불러 들여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계季가 안으로는 국인國人의 신망信望을 얻고, 밖으로는 제후諸侯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자字를 기록하여 대중의 마음을 얻은 것을 칭찬하고, ‘귀歸’라고 칭하여 외국外國이 들여보낸 것임을 밝혔다. 이는
채인蔡人이 그를 아름답게 여겨서
자字를 기록해
노魯나라에 통고하였기 때문이다.
注+그를 아름답게 여겼기 때문에 자字를 써서 통고한 것이다.
傳
노魯나라가
주邾를 토벌하였으니, 이는
송宋나라의 뜻을 따른 것이다.
注+주邾와 송宋이 국경國境을 다투자 노魯나라는 유趡의 맹약을 저버리고 송宋나라의 뜻에 따라 주邾를 친 것이다.
傳
겨울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는데,
경經에
일진日辰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注+[부주]林: 갑을甲乙(干支)로 날짜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사관史官이 잊고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注+[부주]林: 일관日官이 날짜의 갑을을 잊은 것이다.
천자天子에게는
일관日官이 있고 제후에게는
일어日御가 있으니,
注+일관日官과 일어日御는 역수曆數를 맡은 자이다. 일관日官은
경卿의 위치에 있으면서
역법曆法을
추산推算하여
역曆을 만드는 것이
예禮이고,
注+일관日官은 천자天子 나라의 역수曆數를 맡은 자로 육경六卿의 수數에 끼지는 못하지만 지위가 경卿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경卿의 위치에 있다고 한 것이다. 저底는 평平이니 역수曆數를 추산推算하여 역曆을 만드는 것이다. 일어日御는
매일每日의
간지干支를 잊지 않고 조정에서 백관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注+일관日官이 역수曆數를 추산推算해 역曆을 만들어서 제후에게 나누어 주면 제후는 그 역曆을 받들어 천시天時를 잊지 않고 백관에게 알려 준다는 말이다.
傳
당초에 정백鄭伯이 고거미高渠彌를 경卿으로 삼으려 하자 소공昭公이 그를 미워하여 굳이 간하였으나 정백은 듣지 않았다.
뒤에 소공이 즉위하자
고거미高渠彌는
소공昭公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신묘일에 소공을
시해弑害하고
공자公子미亹注+공자公子미亹는 소공昭公의 아우이다.를 임금으로 세웠다.
傳
이에 대하여 군자는 “소공은 미워할 상대를 알았다.”고 하였고,
공자公子달達注+공자公子달達은 노魯나라 대부이다.은 “
고백高伯은 아마도
주륙誅戮될 것이다.
자기를 미워한 원한을 보복한 것이 너무 심하였다.”고 하였다.
注+부復는 거듭이다. 본래 소공昭公의 미움을 받은 데다가 다시 임금을 시해弑害하였으니, 거듭 악惡을 저지른 것이다.[부주]林: 고백高伯은 바로 고거미高渠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