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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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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元年庚申春王正月 齊人救邢하다
[經]夏六月辛酉 葬我君莊公하다
[經]秋八月 公及齊侯盟于落姑注+落姑 齊地하다
[經]季子來歸注+季子 公子友之字 季子忠於社稷 爲國人所思 故賢而字之 齊侯許納 故曰歸 [附注] 林曰 奔陳如邾不書 賢季子 故全之也하다
[經]冬 齊仲孫來注+仲孫齊大夫 以事出疆 因來省難 非齊侯命 故不稱使也 還 使齊侯務寧魯難 故嘉而字之 來者事實 省難其志也 故經但書仲孫之來 而傳尋仲孫之志하다
[傳]元年春이라
不書卽位
亂故也注+國亂不得成禮
[傳]狄人伐邢注+狄伐邢 在往年冬이어늘 管敬仲言於齊侯曰
戎狄 豺狼이니 不可厭也注+敬仲 管夷吾 [附注] 林曰 戎狄性貪如豺狼然 不可得其厭足 言狄旣逞志於邢 又將荐食諸侯 諸夏 親暱하니 不可棄也注+諸夏 中國也 暱 近也 宴安 酖毒이니 不可懷也注+以宴安比之酖毒 [附注] 朱曰 縱戎狄而棄諸夏者 皆由懷於宴安也니이다
詩云 豈不懷歸리오마는 畏此簡書注+詩 小雅也 文王爲西伯 勞來諸侯之詩라하니이다
簡書 同惡相恤之謂也注+同恤所惡 [附注] 林曰 同好惡而相救恤之謂也 蓋戎狄亂華 人所同惡 所載 不過分災救患爾 請救邢以從簡書하소서 齊人救邢하다
[傳]夏六月 葬莊公하다
亂故 是以緩注+十一月乃葬하니라
[傳]秋八月 公及齊侯盟于落姑하니 請復季友也注+閔公初立 國家多難 以季子忠賢 故請覇主而復之
齊侯許之하고 使召諸陳하니 公次于郞以待之注+非師旅之事 故不書하다
季子來歸 嘉之也
[傳]冬 齊仲孫湫來省難注+湫 仲孫名하다
書曰仲孫 亦嘉之也
仲孫歸曰 不去慶父 魯難未已注+時慶父 亦已還魯리이다
公曰 若之何而去之 對曰 難不已 將自斃注+斃 踣也리니 君其待之하소서
公曰 魯可取乎 對曰 不可니이다
猶秉周禮하니 周禮 所以本也注+[附注] 林曰 周公典禮 所以爲立國之本니이다
臣聞之컨대 國將亡 本必先顚 而後枝葉從之라하니이다
魯不棄周禮하니 未可動也니이다
君其務寧魯難而親之하소서
親有禮하며 因重固注+能重能固 則當就成之 [附注] 林曰 魯國根本安重堅固 因而成就之 是因重固하며 間携貳注+離而相疑者 則當因而間之하며 覆昏亂注+覆 敗也 覇王之器也注+覇王所用 故以器爲喩이니이다
[傳]晉侯作二軍注+晉本一軍 見莊十六年 [附注] 林曰 周制 大國三軍 次國二軍 小國一軍 晉本大國 自曲沃武公覆滅宗國 魯莊公十六年 僖王命曲沃伯 以一軍爲晉侯 遂從小國之制 今始作二軍하야 公將上軍하고 太子申生將下軍하고 趙夙御戎하고 畢萬爲右注+爲公御右也 夙 趙衰兄 畢萬 魏犨祖父하야 以滅耿滅霍滅魏注+平陽皮氏縣東南 有耿鄕 永安顯東北 有霍大山 三國 皆姬姓하다
하야 爲大子城曲沃注+[附注] 林曰 先是莊公二十八年 使大子居曲沃 蓋未脩城 至是始爲之增築하고 賜趙夙耿하고 賜畢萬魏하야 以爲大夫하다
士蔿曰 大子不得立矣로다
分之都城하고 而位以卿하니 先爲之極이라 又焉得立注+位以卿 謂將下軍 [附注] 林曰 先爲大子之極處 又安得復立爲後 蓋天下事 未極則有增 已極則無以復加 此必然之理이리오
不如逃之하야 無使罪至 爲吳大伯
不亦可乎注+太伯 周大王之適子 知其父欲立季歷 故讓位而適吳
猶有令名하리니
與其及也注+言雖去 猶有令名 勝於留而及禍
且諺曰 心苟無瑕이면 何恤乎無家리오하니 天若祚大子 其無晉乎注+爲晉殺申生傳ᄂ저
卜偃曰 畢萬之後必大注+卜偃 晉掌卜大夫하리라
盈數也 大名也注+[附注] 朱曰 魏字之名 其義爲大어늘 以是始賞하니 天啓之矣로다
天子曰兆民이오 諸侯曰萬民이라 今名之大 以從盈數하니 其必有衆注+以魏從萬 有衆象하리라
畢萬筮仕於晉할새 遇屯☵☳注+震下坎上 屯之比☵☷注+坤下坎上 比 屯初九變而爲比하니
辛廖占之曰 吉注+辛廖 晉大夫이라
屯固比入하니 吉孰大焉
其必蕃昌注+屯 險難 所以爲堅固 比 親密 所以得入하리라
震爲土注+震變爲坤하고 車從馬注+震 爲車 坤 爲馬하고 足居之注+震 爲足하고 兄長之注+震 爲長男하고 母覆之注+坤 爲母하고 衆歸之注+坤 爲衆하니 注+初一爻變 有此六義 不可易也하야 合而能固하며 安而能殺하니 公侯之卦也注+比合屯固 坤安震殺 故曰公侯之卦 [附注] 林曰 水地比 有合之義 雷屯 有固之義 以比承屯之變 故合而能固 比之下卦 有坤 坤爲土 安之象 屯之下卦 有震 震爲雷殺之義 以坤承震之變 故安而能殺 屯之初九曰 利建侯 比之大象曰 建萬國 親諸侯 亦公侯之卦로다
公侯之子孫 必復其始注+萬 畢公高之後 [附注] 朱曰 愚按 韓趙魏三家 其後 共分晉國 周威烈王 因命爲諸侯 左傳 載卜筮之事甚多 知莊公二十二年陳敬仲之筮 亦此類也 然此等 或幸而言中 又恐好事者追爲之 不可盡信하리라


원년 봄 주왕周王 정월에 제인齊人나라를 구원하였다.
여름 6월 신유일에 우리 임금 장공莊公을 장사 지냈다.
가을 8월에 민공閔公제후齊侯낙고落姑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낙고落姑나라 땅이다.
계자季子가 돌아왔다.注+계자季子공자公子이다. 계자季子사직社稷(國家)에 충성하여 국인國人들이 사모하였기 때문에 어질게 여겨 를 기록한 것이다. 제후齊侯가 노나라로 들여보내겠다고 허락하였기 때문에 ‘’라고 한 것이다.[부주]林: 계자季子나라로 도망갔다가 나라로 간 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계자季子를 어질게 여겼기 때문에 그를 흠이 없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겨울에 나라 중손仲孫이 왔다.注+중손仲孫나라 대부大夫이다. 그가 어떤 일로 출국出國하였다가 나라에 와서 화난禍難시찰視察하였으나, 제후齊侯을 받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使’라고 칭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로 돌아가서 제후齊侯에게 “힘을 다해 나라의 화난禍難을 안정시키소서.”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를 아름답게 여겨 를 기록한 것이다. ‘’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성난省難’은 그의 뜻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 “중손仲孫이 왔다.”라고 사실만을 기록하였는데, 에는 그의 뜻을 찾아 ‘성난省難(禍難을 살핌)’이라 한 것이다.
원년元年 봄이다.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가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注+나라가 어지러워 즉위의 거행擧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인狄人나라를 침공侵攻하자,注+이 지난 겨울에 형국邢國을 쳤다. 관경중管敬仲제후齊侯에게 말하기를,
융적戎狄시랑豺狼(승냥이와 이리)과 같으니 만족할 수 없고,注+경중敬仲관이오管夷吾이다.[부주]林: 융적戎狄은 성품이 탐욕스럽기가 시랑豺狼과 같아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이 이미 형국邢國에서 뜻을 이루었으니 또 장차 제후諸侯들의 땅을 잠식蠶食하려 들 것이라는 말이다. 제하諸夏는 서로 친근親近해야하니 버릴 수 없고,注+제하諸夏중국中國이다. 이다. 안일安逸독약毒藥과 같으니 생각할 수 없습니다.注+안락安樂짐독酖毒에 비유하였다.[부주]朱: 융적戎狄을 풀어놓고 제후諸侯를 버리는 것은 모두 안락을 생각하는 데서 연유한다.
시경詩經》에 ‘어찌 돌아가기를 생각지 않으리오마는, 이 간서簡書가 두렵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注+소아小雅출거편出車篇인데, 문왕文王서백西伯으로 있을 때 제후諸侯들을 위로慰勞이다.
간서簡書에 실린 내용은 악인惡人을 함께 미워하고 서로 구휼하자는 뜻이니,注+미운 상대에 대해 함께 근심한다는 말이다.[부주]林: 호오好惡를 함께하여 서로 구휼救恤한다는 말이다. 융적戎狄중화中華를 어지럽히는 것은 사람들이 함께 미워하는 바이니, 간서簡書기재記載된 것도 실로 재앙災殃분담分擔하여 환란患亂구제救濟하라는 내용에 불과할 뿐이다.형국邢國을 구원하여 간서를 따르소서.”라고 하니, 제인齊人형국邢國을 구원하였다.
여름 6월에 장공莊公을 장사 지냈다.
난리 때문에 늦어진 것이다.注+열 한 달이 되어서야 장사 지낸 것이다.
가을 8월에 민공閔公제후齊侯낙고落姑에서 결맹하였으니, 이는 제후齊侯에게 계우季友회국回國하도록 도와주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注+민공閔公이 처음 즉위하여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았다. 계자季子가 충성스럽고 현능賢能하였기 때문에 패주覇主제후齊侯에게 요청하여 귀국歸國시킨 것이다.
제후齊侯가 이를 허락하고서 나라로 사람을 보내어 계우季友를 불러 오게 하니, 민공閔公(머무름)하여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注+군대의 일이 아니면 원래 ‘’라고 기록하지 않는다.
에 ‘계자季子가 돌아왔다.’라고 기록한 것은 계우를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겨울에 나라 중손추仲孫湫나라로 와서 난리를 살폈다.注+중손仲孫의 이름이다.
에 ‘중손仲孫’이라고 를 기록한 것도 그를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중손仲孫나라로 돌아가서 말하기를 “경보慶父를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의 난리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注+이때 경보慶父도 이미 나라로 돌아왔다.
제환공齊桓公이 “어찌하면 그를 제거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중손仲孫이 “끊임없이 화난禍難을 일으키면 장차 스스로 쓰러질 것이니,注+는 엎어지는 것이다. 임금님께서는 그때를 기다리소서.”라고 대답하였다.
제환공齊桓公이 “이 기회에 나라를 취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중손仲孫이 대답하기를 “불가능합니다.
나라는 그래도 주례周禮를 지키고 있으니, 주례周禮는 나라를 존립存立시키는 근본입니다.注+[부주]林: 주공周公전례典禮는 나라를 존립存立시키는 근본이 된다는 말이다.
이 듣건대 ‘나라가 망할 때에는 큰 나무와 마찬가지로 근본이 먼저 쓰러진 뒤에 가지와 잎이 뒤따라 쓰러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라는 주례周禮를 버리지 않고 있으니,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그러니 임금님께서는 힘을 다해 나라의 화난禍難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가까이 하소서.
예의禮儀가 있는 나라를 가까이하고 정권政權이 안정되고 국력國力견고堅固한 나라를 의지하며,注+능히 자력自力으로 정권政權을 안정시키고 국력國力을 견고히 하는 나라는 그 나라가 뜻을 이루도록 도와야 한다는 말이다.[부주]林: 나라는 근본이 안정되고 견고하니 이를 인하여 성취成就시켜 주는 것이 바로 ‘인중고因重固’이다. 정권政權 내부에 분열分裂이 있는 나라를 이간시키고,注+갈리어 서로 의심하는 나라는 그 틈을 이용해 이간한다는 말이다. 혼란한 나라를 복망覆亡(敗亡)시키는 것이注+이다. 패왕覇王의 그릇입니다.注+패자覇者왕자王者가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로 비유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진후晉侯가 2을 만들어注+나라는 본래 1이었다. 장공莊公 16년에 보인다.[부주]林: 나라 제도에 대국大國은 3, 차국次國은 2, 소국小國은 1이다. 나라는 본래 대국大國이었으나, 곡옥曲沃무공武公종국宗國멸망滅亡시키고 노장공魯莊公 16년에 주희왕周僖王곡옥백曲沃伯에게 하여 1으로 진후晉侯로 삼은 뒤부터 드디어 소국小國의 제도를 따랐다가 지금에 와서 비로소 2을 만든 것이다. 헌공獻公상군上軍통솔統率하고 태자太子신생申生하군下軍을 통솔하고 조숙趙夙헌공獻公융거戎車를 몰고 필만畢萬거우車右가 되어注+헌공獻公가 된 것이다. 조쇠趙衰이고, 필만畢萬위주魏犨조부祖父이다. 경국耿國곽국霍國위국魏國격멸擊滅하였다.注+평양平陽피씨현皮氏縣 동남에 경향耿鄕이 있고, 영안현永安縣 동북에 곽대산霍大山이 있다. 세 나라는 모두 희성姬姓이다.
돌아와서 태자太子를 위해 곡옥曲沃에 성을 쌓고,注+[부주]林: 이보다 앞서 노장공魯莊公 28년에 태자太子곡옥曲沃거주居住하게 하였는데, 그때는 수축修築하지 않았다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증축增築한 것인 듯하다.조숙趙夙에게 을 하사하고 필만畢萬에게는 를 하사하여 각각 대부大夫로 삼았다.
그러자 사위士蔿가 말하기를 “태자太子는 임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도성을 나누어 주고 또 지위地位를 주어 이미 정상頂上의 지위에 올랐으니, 또 어찌 임금이 될 수 있겠는가?注+위이경位以卿하군下軍을 통솔한 것을 이른다.[부주]林: 먼저 태자太子로서 극처極處에 올랐으니, 또 어찌 후계자後繼者가 되어 임금이 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대체로 천하天下의 일은 극처極處에 이르기 전에는 보태짐이 있지만 이미 극처極處에 이르면 다시 더 보탤 수 없는 것이 필연의 이치이다.
그러니 환란患亂이 닥치기를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일찍 도망가서 가 이르지 않게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오태백吳太伯처럼 되는 것 또한 좋지 않은가?注+태백太伯주태왕周太王적자適子로 아버지가 계력季歷후계자後繼者로 세우고자 하는 것을 알고는 태자太子의 자리를 아우 계력季歷에게 사양하고 로 도망하였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아름다운 명성名聲이 남을 것이다.注+비록 떠나더라도 아름다운 명성名聲이 있을 것이니, 그냥 머물러 있다가 를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다.
또 속담에 ‘마음속에 잘못이 없다면 어찌 집[家]이 없는 것을 걱정하랴?’라고 하였으니, 하늘이 만약 태자太子를 돕는다면 태자太子나라에 있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注+나라가 태자太子를 죽인 의 배경이다.
복언卜偃이 말하기를 “필만畢萬의 후손이 반드시 흥성興盛할 것이다.注+복언卜偃복서卜筮를 맡은 나라 대부大夫이다.
은 가득 찬 숫자이고 는 ‘’의 명칭名稱인데,注+[부주]朱: ‘’字의 명칭名稱은 그 뜻이 ‘’이다.’의 뜻을 가진 를 비로소 으로 주었으니, 이는 그의 후손이 흥성할 것을 하늘이 계시啓示한 것이다.
천자天子통치統治하는 백성을 조민兆民이라 하고, 제후諸侯통치統治하는 백성을 만민萬民이라 하는데, 지금 명칭名稱(魏)을 가득 찬 숫자(萬)에 딸리게 하였으니, 그는 반드시 대중大衆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注+에게 딸리게 하였으니, 대중大衆이 있다.
당초에 필만畢萬나라에 벼슬하는 것이 한지 한지를 놓고 시초점蓍草占을 칠 적에 둔괘屯卦☵☳注+하괘下卦이고 상괘上卦둔괘屯卦이다비괘比卦☵☷注+하괘下卦이고 상괘上卦비괘比卦인데, 둔괘屯卦초구효初九爻가 변하여 비괘比卦가 된 것이다.를 만났다.
신료辛廖가 이 점괘占卦를 풀이하기를 “하다.注+신료辛廖나라 대부이다.
견고堅固이고 진입進入이니, 이보다 큰 이 어디 있겠는가.
그 후손이 반드시 번창繁昌할 것이다.注+험난險難이므로 견고堅固가 되고, 친밀親密이므로 진입進入이 된다.
가 되고,注+이 변하여 이 된 것이다. 수레가 말을 따르고,注+은 수레가 되고, 은 말이 된다. 두 발이 땅을 밟고 있고,注+은 발이 된다. 양육養育하고,注+장남長男이 된다. 어머니가 보호保護하고,注+가 된다. 대중大衆귀의歸依하니,注+이 된다. 육체六體가 바뀌지 않아注+초효初爻가 변하였으나 이 육의六義는 바뀔 수 없다는 말이다. 대중을 화합시켜 굳게 지킬 수 있고, 한 백성은 편안히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고 악인惡人은 죽여 위엄을 보일 수 있으니, 이는 공후公侯괘상卦象이다.注+이고 이며, 이고 이므로 ‘공후公侯괘상卦象’이라고 한 것이다.[부주]林: 수지비괘水地比卦에는 의 뜻이 있고, 수뢰둔괘水雷屯卦에는 견고의 뜻이 있는데, 둔괘屯卦가 변하여 비괘比卦가 되었기 때문에 대중大衆규합糾合하여 견고히 지킬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하괘下卦곤괘坤卦인데, 곤괘坤卦이 있고, 하괘下卦진괘震卦인데, 진괘는 의 뜻이 있다. 그런데 진괘震卦가 변하여 곤괘坤卦가 되었기 때문에 한 사람은 편안히 살도록 은혜를 베풀고 악인惡人은 죽여 위엄을 보인다고 한 것이다. 둔괘屯卦초구효사初九爻辭에 “를 세우는 것이 이롭다.”고 하였고, 비괘比卦대상大象에 “만국萬國을 세우고 제후諸侯친애親愛한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공후公侯괘상卦象이다.
공후公侯의 자손이 반드시 그 처음의 위치로 회복할 것이다.”고 하였다.注+필공畢公후손後孫이다. 전문傳文의 자손이 많아질 장본張本을 말한 것이다.[부주]朱: 내가 고찰하건대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지난 뒤에 대부大夫가 함께 나라 땅을 나누어 가지니, 주위열왕周威烈王하여 제후諸侯로 삼았다. 《좌전左傳》에 복서卜筮의 일을 기재記載한 것이 매우 많으니, 노장공魯莊公 22년에 보이는 진경중陳敬仲의 점[筮]도 이런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복서卜筮의 말들은 혹 요행으로 맞은 것도 있으나, 또 호사자好事者추후追後에 위조한 것도 있는 듯하니, 다 믿을 수 없다.


역주
역주1 元年春……亂故也 : 조선 徐壽錫의 《潁水全集》에는 “閔公 역시 前年에 즉위한 것이다. 國政을 담당한 慶父가 어린 임금을 세우는 것이 자신에게 有利하다고 여겨 序列을 무시하고 閔公을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2 簡書 : 대쪽에 기록한 告誡‧策命‧盟誓‧徵召 등의 文書를 이름인데, 여기서는 諸侯가 危急한 사정을 알리어 救援을 청하는 文書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3 : 군대가 3일 이상 주둔하는 것을 ‘次’라 하는 것이 例이다. 閔公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주둔하여 意外의 사태를 대비하였기 때문에 ‘次’라고 기록한 것이다.
역주4 不如逃之……與其及也 : 楊伯峻의 《春秋左傳注》에 의하면 ‘與其及也’는 倒置句로 ‘不如逃之’의 위에 와야 한다고 하였다. 楊氏의 說에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5 六體不易 : 六體는 卦의 여섯 爻이다. 屯卦의 六五(六은 陰爻이고 五는 제 五爻임)가 變하여 比卦가 되었으나, 이상에 열거한 車‧馬‧足‧長男‧母‧衆의 뜻은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日本學者竹添光鴻의 《左氏會箋》에는 “屯卦의 初爻에 侯를 세우는 것이 이로운 象이 있는데, 比卦로 변하였어도 나라를 세우고 제후를 親愛하는 뜻이 있으니, 비록 변하였어도 뜻은 동일하기 때문에 ‘不易’이라 한 것이다. 이것은 震이 坤으로 변한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지 이상에 열거한 여섯 글귀를 말한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역주6 : 대본에는 ‘雲’으로 되어 있으나 《左傳杜林合注》本에 의거하여 ‘水’로 고쳐 번역하였다.
역주7 傳爲魏之子孫衆多張本 : 傳文은 公侯의 자손이 다시 公侯가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단지 자손이 많아진다는 것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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