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병오일丙午日에 위후衛侯훼燬가 형邢나라를 격멸擊滅하였다.注+위衛나라와 형邢나라는 같은 희성국姬姓國이다. 친족親族끼리 서로 격멸擊滅한 것을 미워하였다. 그러므로 ‘훼燬’라고 이름을 칭하여 죄罪를 돌린 것이다.
여름 4월 계유癸酉에 위후衛侯훼燬가 졸卒하였다.注+전傳이 없다. 노魯나라와 다섯 번 동맹同盟하였다.
송宋나라 탕백희蕩伯姬가 와서 며느리를 맞이하였다.注+백희伯姬는 노魯나라 딸로 송宋나라 대부大夫탕씨蕩氏의 아내가 된 자인데, 스스로 그 아들을 위해 와서 며느리를 맞이한 것이다. ‘며느리’라는 호칭은 시어머니가 생존生存했을 때 쓰는 말이다. 부인婦人이 국경國境을 넘어 가서 며느리를 맞이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그러므로 기록한 것이다.
송宋나라가 그 대부大夫를 죽였다.注+전傳이 없다. 무슨 일로 죽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例에 의하면 대부大夫가 무죄無罪하기 때문에 이름을 칭하지 않은 것이다.
가을에 초인楚人이 진陳나라를 포위하여 돈자頓子를 돈頓나라로 들여보냈다.注+돈자頓子가 진陳나라의 핍박逼迫으로 초楚나라로 출분出奔하였기 때문에 초楚나라가 진陳나라를 포위하고서 돈자頓子를 돈頓나라로 들여보낸 것이다. ‘드디어[遂]’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위圍와 납納이 동일同一한 일임을 밝힌 것이다. 자옥子玉을 ‘인人’으로 칭한 것은 통고通告한 문서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돈자頓子가 ‘돌아갔다[歸]’고 말하지 않은 것은 군사를 일으켜 들여보냈기 때문이다.
겨울 12월 계해일癸亥日에 공公이 위자衛子‧거경莒慶과 회합會合하여 조洮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조洮는 노魯나라 땅이다. 위문공衛文公을 이미 장사 지냈는데도 성공成公이 작爵을 칭하지 않은 것은 성공成公이 아버지 문공文公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명칭名稱을 낮추어 미성군未成君의 예例를 따랐기 때문에 ‘자子’라고 기록하여 그를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거경莒慶의 씨氏를 칭하지 않은 것은 아직 족族(氏)을 하사下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傳
25년 봄에 위인衛人이 형邢나라를 토벌하니 두 예禮가 국자國子를 따라 성城을 순시巡視하다가注+[부주]林: 이례二禮는 예지禮至 형제이다. 국자國子를 따라 성을 순시하며 수비守備를 경계警戒한 것이다. 두 사람이 좌우에서 국자國子의 겨드랑이를 끼고 성밖으로 나와 살해殺害하였다.注+[부주]林: 손으로 국자國子의 팔을 잡고서 성밖의 위군진영衛軍陣營으로 나온 것이다.
경經에 “정월正月병오일丙午日에 위후衛侯훼燬가 형邢나라를 멸滅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 동성국同姓國을 멸滅하였기 때문에 ‘훼燬’라고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예지禮至가 명문銘文을 짓기를 “내가 국자國子를 끼고 나와 죽이니 누구도 감히 나를 막지 못하였다.”注+예지禮至가 속임수를 써서 동성국同姓國을 멸滅한 것이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도리어 그 공功을 기물器物에 새긴 것을 미워한 것이다. [부주]林: 누구도 감히 나를 막지 못했다는 것은 자기의 용맹을 말한 것이다.고 하였다.
傳
진백秦伯이 군대를 황하黃河 가에 주둔시키고서 왕王을 호송護送해 경사京師로 들여보내려고 하자, 호언狐偃이 진후晉侯에게 말하기를, “제후의 패자霸者가 되기를 구하려면 왕사王事에 진력盡力하는 것만 한 게 없습니다.注+왕王을 경사京師로 들여보내는 일에 진력盡力하는 것이다.
제후諸侯가 신임信任할 것이고 또 대의大義에도 부합합니다.
문후文侯의 공업功業을 계승하여 제후諸侯에게 신의信義를 선양宣揚하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注+진문후晉文侯구仇가 주평왕周平王의 후백侯伯이 되어 주周나라 왕실王室을 보좌輔佐[匡輔]하였다. [부주]林: 왕사王事에 진력盡力하는 신의信義를 제후諸侯에 선포宣布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문공文公이 복언卜偃에게 거북점을 치게 하니, 복언卜偃이 “길吉합니다.
황제黃帝가 판천阪泉에서 싸울 때의 징조徵兆를 만났습니다.”注+황제黃帝가 신농神農의 후손 강씨姜氏와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전쟁해 승리하였는데, 지금 그 징조를 얻었기 때문에 길吉하다고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公이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하니注+문공文公은 이 징조가 자기에게 해당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복언卜偃이 “주례周禮가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지금의 왕王은 옛날의 제帝입니다.”注+주周나라의 덕德이 비록 쇠衰하였지만 천명天命이 바뀌지 않았으니, 지금의 주왕周王이 황제黃帝의 조짐에 해당한다는 말이고 진晉나라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공公이 “시초 점을 치라.”고 하니 복언卜偃이 시초 점을 쳐서 대유大有☲☰注+하괘下卦가 건乾이고 상괘上卦가 이離인 것이 대유大有이다.가 규睽☲☱注+하괘下卦가 태兌이고 상괘上卦가 이離인 것이 규睽이다. 대유大有의 구삼효九三爻가 변하여 규睽가 된 것이다.로 변한 괘卦를 만났다.
복언卜偃이 말하기를, “길吉합니다.
공公이 천자天子의 접대를 받는 괘卦를 만났으니,注+이것은 대유괘大有卦의 구삼효사九三爻辭이다. 삼三은 삼공三公이 위位를 얻은 것인데 변하여 태兌가 되었다. 태兌는 열悅이니 위位를 얻고서 기뻐하는 상象이다. 그러므로 왕王의 연향宴饗(접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전쟁에 승리하고서 왕의 접대를 받는다면 이보다 큰 길사吉事가 어디 있겠습니까?注+거북점과 시초점이 모두 길吉하다는 말이다.
또 이 괘卦는注+두 괘卦의 뜻을 한 데 묶어 말한 것이고, 한 효爻에 매어 말한 것이 아니다. 하늘(乾)이 연못(兌)이 되어 햇볕(離)을 받고 있으니 천자天子가 마음을 낮추고서[降心]공公을 영접迎接하는 상象입니다.
이 또한 좋지 않습니까?注+건乾은 하늘이고 태兌는 연못인데 건乾이 변하여 태兌가 되어 위로 해를 이고 있다. 이離는 해인데 하늘에 있는 해가 연못을 비추는 것이 위에 있는 천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기뻐하는 상象이니, 이것이 바로 천자天子가 마음을 낮추어 공公을 영접迎接하는 상象이다.
대유大有가 규괘睽卦로 변하였으나 끝내는 본괘本卦로 회복回復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注+규괘睽卦를 버리고 도로 대유괘大有卦로 논하더라도 천자天子가 강심降心하는 상象이 있다. 건乾은 존귀尊貴하고 이離는 비천卑賤한데 존귀尊貴한 몸을 굽혀 비천卑賤한 사람에게 낮추는 것도 ‘천자강심天子降心’의 뜻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진후晉侯가 진군秦軍에게 사양하고서 물길을 따라 내려갔다.注+진군秦軍에게 사양하여 돌려보내고서 물을 따라 내려갔기 때문에 ‘하下’라고 한 것이다. [부주]朱: 왕王을 들여보낸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이다.
3월 갑진일甲辰日에 양번陽樊에 주둔하여注+[부주]林: 진군晉軍이 주周나라 땅 양번陽樊에 주둔한 것이다.우군右軍은 온溫을 포위하고注+태숙太叔이 온溫에 있기 때문이다.좌군左軍는 왕王을 맞이해 들였다.
傳
여름 4월 정사일丁巳日에 왕王이 왕성王城으로 들어가서 태숙太叔을 온溫에서 잡아 습성隰城에서 죽였다.注+[부주]朱: 진인晉人이 죽인 것이다.
무오일戊午日에 진후晉侯가 왕王께 조현朝見하니 왕王이 단술을 접대하고 유宥를 명命하였다.注+향례享禮를 거행한 뒤에 단술을 접대하고 또 추가로 폐백幣帛을 내려 기쁨을 도운 것이다. 유宥는 돕는 것이다.
문공文公이 수장隧葬을 청하자, 왕王은 허락하지 않으며注+땅에 굴을 파서 통로通路을 만드는 것을 ‘수隧’라 하는데 이는 왕王의 장례葬禮이다. 제후諸侯는 모두 영구靈柩를 밧줄에 매달아 하관下棺한다. 말하기를, “이는 왕王의 전장典章(制度)이다.注+왕자王者는 전장典章이 제후諸侯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주周나라의 덕德을 대신할 자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두 왕王이 있는 것은 숙부叔父도 싫어할 것이다.”注+[부주]林: 주周나라의 덕이 비록 쇠하였으나, 천하에 아직 주周나라의 덕을 대신할 자가 나오지 않았는데, 진후晉侯가 천자天子의 예禮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이는 두 왕王이 있는 것이 된다. 천하에 두 왕이 있는 것은 제후諸侯들이 싫어할 뿐만이 아니라 진후晉侯 스스로도 싫어할 것이라는 말이다.고 하고서, 양번陽樊‧온溫‧원原‧찬모欑茅 등의 땅을 주니, 진晉나라가 이때부터 비로소 남양南陽으로 영토를 개척開拓(擴張)하였다.注+진晉나라의 산남수북山南水北에 있기 때문에 ‘남양南陽’이라 한 것이다.
양번인陽樊人이 복종하지 않자 진군晉軍이 포위하니, 창갈倉葛이 고함쳐 말하기를注+창갈倉葛은 양번인陽樊人이다. “덕德으로 중국中國을 회유懷柔하고 형벌刑罰로 사이四夷를 위협威脅하는 것인데, 우리를 무력으로 위협하니 우리가 복종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곳의 주민住民 중에 왕王의 친척親戚이 아닌 자가 누가 있기에 우리를 포로로 잡으려고 하는가?”注+[부주]林: 이 곳에 사는 자 중에 왕실王室의 친척親戚과 인척姻戚이 아닌 자가 누가 있느냐. 그런데 어째서 우리를 잡아 포로로 삼으려 하느냐는 말이다.고 하였다.
이에 진후晉侯는 그 곳의 백성을 축출逐出하였다.注+그 땅만을 취했을 뿐이다. [부주]林: 진후晉侯가 창갈倉葛의 말을 듣고는 억지로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양번陽樊의 주민住民들을 이주移住시키고 그 땅만을 취했을 뿐이다.
傳
가을에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약鄀나라를 토벌하였다.注+약鄀나라는 본래 상밀商密에 있는 진秦나라와 초楚나라의 경계 사이의 소국小國이었는데, 뒤에 남군南群약현鄀縣으로 옮겼다.
초楚나라의 투극鬪克과 굴어구屈禦寇가 신申나라‧식息나라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상밀商密을 지키고 있었다.注+투극鬪克은 신공申公자의子儀이고, 굴어구屈禦寇는 식공息公자변子邊이다. 상밀商密은 약鄀나라의 별읍別邑으로 지금의 남향南鄕단수현丹水縣이다. 수戍는 수守이다. 두 사람이 석析에 군대를 주둔하고서 상밀商密을 후원後援한 것이다.
진인秦人은 초병楚兵을 피해 대로大路를 버리고 석析으로 길을 잡아 통과通過하다가 후미진 물굽이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결박結縛해 가지고 끌고 가서 상밀商密을 포위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성하城下로 가까이 다가갔다.注+석析은 초楚나라 읍邑으로 일명一名이 백우白羽인데, 지금의 남향南鄕석현析縣이다. 외隈는 은폐隱蔽된 곳이다. 많은 사람을 결박結縛한 것은 석析에서 승전勝戰하고서 포로로 잡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함이고, 어두워진 뒤에 성 밑으로 다가간 것은 상밀인商密人이 그 결박된 자들이 석인析人이 아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부주]林: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결박한 것은 후미진 곳으로 들어가서 많은 아군我軍을 결박한 것이다.
밤이 되자 구덩이를 파고 희생犧牲을 잡아 피를 마시고서 맹서盟書를 희생 위에 올려놓고서 자의子儀‧자변子邊과 결맹結盟하는 것처럼 위장僞裝하니,注+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어 맹약盟約에 쓰고 남은 피를 그 구덩이에 묻고서 맹서盟書를 그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상밀인商密人이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진군秦軍이 이미 석析을 취하였다.
수인戍人이 우리를 배반背叛하였다.”고 하고서 진군秦軍에 투항投降하였다.注+[부주]林: 결박된 포로를 보았기 때문에 석析을 취한 것으로 의심한 것이고, 결맹하는 증거를 보았기 때문에 자의子儀‧자변子邊 두 사람이 이미 무리와 함께 배반한 것으로 의심한 것이다.
진군秦軍은 신공申公자의子儀와 식공息公자변子邊을 포로捕虜로 잡아 데리고 돌아갔다.注+상밀商密이 항복한 뒤에 석析에 있던 초楚나라의 수병戍兵도 패전敗戰하였기 때문에 진군秦軍이 두 사람을 포로로 잡은 것이다.
초楚나라의 영윤令尹자옥子玉이 진군秦軍을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注+다시 진晉나라를 말하지 않은 것은 이번 전쟁에 진秦나라가 군대를 지휘指揮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진陳나라를 포위하여 돈자頓子를 돈頓나라로 들여보냈다.注+돈頓나라를 위해 진陳나라를 포위한 것이다.
傳
겨울에 진후晉侯가 원原을 포위할 때에 사흘 치의 식량만 가지고 가도록 명하였더니 사흘이 되어도 원인原人이 항복하지 않자 진후晉侯는 철군撤軍을 명하였다.
이때 원原에 잠입潛入했던 첩자諜者가 나와서注+첩諜은 간첩間諜이다. “원인原人이 항복하려 합니다.”고 하니, 군리軍吏가 “저들의 항복을 기다리소서.”라고 하였다.
공公이 말하기를, “신信은 나라의 보배로 백성들이 비호庇護(保護)받는 것인데,注+[부주]林: 백성이 신信이 없으면 스스로 존립存立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信으로써 자기 몸을 보호하는 것이다.원原을 얻는다 하더라도 신信을 잃는다면 무엇으로 백성을 비호하겠는가?
잃는 것이 더욱 많을 것이다.”注+[부주]林: 원국原國을 얻는 것은 얻는 것이 적고, 신信을 잃는 것은 잃는 것이 많다는 말이다.라고 하고서 일사一舍를 물러나니 원인原人이 항복하였다.
진후晉侯는 원백原伯관貫을 기冀로 옮기고서注+원백原伯관貫은 원原을 지키던 주周나라 대부大夫이다.[부주]林: 진晉나라 땅으로 옮긴 것이다.조쇠趙衰를 원대부原大夫로, 호진狐溱을 온대부溫大夫로 삼았다.注+호진狐溱은 호모狐毛의 아들이다.
傳
위인衛人이 거莒나라를 우리와 화평和平하도록 주선하였다.
12월에 조洮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이는 위문공衛文公이 주선하려던 우호友好를 중수重修하고, 또 거莒나라와 화평하기 위함이었다.注+거莒나라는 희공僖公원년元年에 있었던 역酈의 전쟁으로 인해 노魯나라를 원수로 여겼다. 위문공衛文公이 두 나라를 화해和解시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그 아들 성공成公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명칭名稱을 낮추고서 회맹會盟의 일을 주선하였다. 그러므로 전傳에 “수문공지호脩文公之好”라고 한 것이다.
진후晉侯가 시인寺人발제勃鞮에게 원수原守(原의 태수太守) 선발選拔에 대해 물으니,注+발제勃鞮는 피披이다. 대답하기를, “전에 조쇠趙衰가 호손壺飱을 가지고 주군主君을 종행從行할 때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지 않았습니다.”注+그는 청렴하고 어질어 임금을 잊지 않았다는 말이다. 경俓은 행行이다. [부주]林: 손飱은 포餔(저녁밥)인데 물에 말은 밥이다. 조쇠趙衰가 전에 병에 밥을 담아 가지고서 떠도는 문공文公을 따라 다닐 때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감히 먹지 않았다는 말이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를 원原의 대부大夫로 삼아 원原에 거처居處하게 하였다.注+피披의 말을 따른 것이다. 조쇠趙衰는 대공大功이 있었지만 오히려 작은 선행善行으로 발탁拔擢한 것은 작은 공로功勞도 잊지 않는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역주
역주1歸 :
亡命한 임금을 本國이 맞이해 다시 임금으로 세우는 것을 ‘入’이라 하고, 망명에서 돌아와 復位하는 것을 ‘復歸’라 하고, 諸侯가 武力을 사용하지 않고 言語로 설득하여 들여보내는 것을 ‘歸’라 하고, 망명한 本人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本國으로 쳐들어가는 것을 ‘復入’이라 한다. 〈成公 18년 傳〉
역주2衛文公旣葬……未賜族 :
君의 生存時에는 嗣子를 ‘世子’라 칭하고, 군이 죽으면 아들 아무[子某]라 칭하고, 장사 지낸 뒤에는 ‘子’라 칭하고 해를 넘긴[踰年] 뒤에는 ‘公’이라 칭한다. 〈《春秋公羊傳》 莊公 32년〉. 先君이 죽고 嗣君이 뒤를 이으면 旣葬未葬에 관계없이 당년에는 ‘子’라 칭하고, 踰年하면 ‘爵’을 칭하는 것이 《春秋》의 例이다. 그런데 杜氏는 장사를 지내면 脫喪하는 것으로 誤認하여 ‘爵’을 칭하지 않고 ‘子’라고 칭한 이유를 衛文公이 莒나라와 魯나라의 和解를 주선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成公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두 나라를 화해시키려고 이번 會盟을 주선하면서 스스로 喪中에 있는 것처럼 명칭을 낮춘 것으로 설명하였다. 宣公 11년에 陳成公이 辰陵의 會盟에 참여하였을 때 陳靈公의 葬前이었으나 踰年하였기 때문에 經에 ‘陳侯’라 기록하였고, 成公 3년 經에 “公이 晉侯‧宋公‧衛侯‧曹伯과 聯合하여 鄭나라를 토벌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때 宋文公과 衛穆公이 모두 葬前이었으나 踰年하였기 때문에 宋共公과 衛定公의 爵을 기록한 것이다. 未成君은 아직 踰年하지 않아 정식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때이다. 賜族은 隱公 8년 傳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3古[吉] :
저본에는 ‘古’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吉’로 바로잡았다.
역주4卜筮 :
전쟁에 승리한다는 것은 거북점[卜]의 점괘이고, 왕이 접대한다는 것은 蓍草占[筮]의 점괘이다.
역주5大有去睽而復 :
去를 버린다는 뜻으로 본 杜注의 해석은 옳지 않은 듯하다. 大有去睽는 大有之睽와 같은 말로 變의 뜻으로 보는 것이 옳다. 大有는 富有의 뜻으로 바로 天子를 의미하는 말이니, 天子가 지금은 나와 있지만 끝내는 돌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역주11掘地爲坎……加盟書其上 :
盟約의 儀式은 먼저 구덩이를 파고서 그 옆에서 희생을 잡아 왼쪽 귀를 잘라 소반에 담고, 피를 뽑아 그릇에 담는다. 그리고 盟書(載書)를 읽어 神에게 告한 뒤에 맹약에 참가한 사람들이 일일이 피를 조금씩 마시는데 이를 歃血이라 한다. 삽혈이 끝나면 盟書의 正本은 희생 위에 올려놓고서 그 희생과 함께 땅에 묻고, 맹약에 참가한 자들에게는 각각 副本 한 통씩을 주어 가지고 돌아가 간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