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二十有七年春 公會杞伯姬于洮注+伯姬 莊公女 洮 魯地하다
[經]夏六月 公會齊侯宋公陳侯鄭伯하야 同盟于幽注+[附注] 林曰 衣裳之會五 齊初主盟 於是書公矣하다
[經]秋 公子友如陳하야 葬原仲注+原仲 陳大夫 原 氏 仲 字也 禮 臣旣卒不名 故稱字 季友違禮 會外大夫葬 具見其事 亦所以知譏하다
[經]冬 杞伯姬來注+傳例曰 歸寧하다
[經]莒慶來逆叔姬注+無傳 慶 莒大夫 叔姬 莊公女 卿自爲逆則稱字 例在宣五年하다
[經]杞伯來朝注+無傳 蓋爲時王所黜하다
[經]公會齊侯于城濮注+無傳 城濮 衛地 將討衛也하다
[傳]二十七年春 公會杞伯姬于洮하니 非事也注+非諸侯之事
天子非展義 不巡守注+天子巡守 所以宣布德義하고 諸侯非民事 不擧하고 卿非君命이면 不越竟이니라
[傳]夏 同盟于幽하니 陳鄭服也注+二十二年 陳亂而齊納敬仲 二十五年 鄭文公之四年 獲成於楚 皆有二心於齊 今始服也일새니라
[傳]秋 公子友如陳하야 葬原仲하니 非禮也
原仲 季友之舊也
[傳]冬 杞伯姬來하니 歸寧注+寧 問父母安否
凡諸侯之女 歸寧曰 來 出曰 來歸注+歸 不反之辭 夫人歸寧曰 如某 出曰歸于某라하나니라
[傳]晉侯將伐虢한대 士蔿曰 不可니이다
虢公驕하니 若驟得勝於我 必棄其民注+棄民不養之 [附注] 林曰 時虢屢伐晉 而晉不能報 是驟得勝於我也이리이다
無衆而後伐之 欲禦我ᄂ들 誰與注+[附注] 林曰 誰與之効死哉리잇가
夫禮樂慈愛 니이다
夫民讓事樂和愛親哀喪而後 可用也注+上之使民 以義讓哀樂爲本 言不可力强 [附注] 朱曰 禮尙謙讓 故曰讓事 樂以和親 故曰樂和 愛親 慈也 愛極然後哀喪 哀喪 謂愛也어늘
虢弗畜也하고 亟戰하니 將饑注+言虢不畜義讓而力戰 [附注] 林曰 虢弗畜此禮樂慈愛之道 而以數戰爲事 則妨奪農時 將有飢饉之患 此所謂兵戈之後 必有凶年 是也하리이다
[傳]王使召伯廖賜齊侯命注+召伯廖 王卿士 賜命爲侯伯하고 且請伐衛하니 以其立子頹也注+立子頹 在十九年


27년 봄에 장공莊公에서 백희伯姬와 만났다.注+백희伯姬장공莊公의 딸이다. 나라 땅이다.
여름 6월에 장공莊公제후齊侯송공宋公진후陳侯정백鄭伯회합會合하여 에서 동맹同盟하였다.注+[부주]林: 다섯 번째 의상지회衣裳之會이다. 나라가 처음으로
가을에 공자公子나라에 가서 원중原仲을 장사 지냈다.注+원중原仲나라 대부이다. 이고 이다. 에 신하가 죽은 뒤에는 이름을 부르지 않기 때문에 를 칭한 것이다. 계우季友를 어겨가면서 외국外國대부大夫장례葬禮회장會葬하였으므로 그 일을 구체적으로 드러냈으니, 이 또한 비난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겨울에 기백희杞伯姬가 왔다.注+전례傳例귀녕歸寧이라 하였다.
거경莒慶이 와서 숙희叔姬를 아내로 맞이해 갔다.注+이 없다. 거국莒國의 대부이다. 숙희叔姬장공莊公의 딸이다. 이 자신의 아내를 맞이하는 경우에는 여자의 를 칭한다. 그 선공宣公 5년에 보인다.
기백杞伯이 와서 조현朝見하였다.注+이 없다. 기국杞國을 ‘’이라 칭한 것은 아마도 시왕時王(당시의 주왕周王)에 의해 강등降等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장공莊公성복城濮에서 제후齊侯회합會合하였다.注+이 없다. 성복城濮나라 땅이다. 이곳에서 회합한 것은 장차 나라를 토벌하려 했기 때문이다.
27년 봄에 장공莊公에서 백희伯姬를 만났으니 이는 부녀父女상봉相逢이지 국사國事가 아니었다.注+제후諸侯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천자天子덕의德義선양宣揚하는 일이 아니면 순수巡守하지 않고,注+천자天子순수巡守하는 것은 덕의德義선포宣布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제후諸侯는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니면 거동하지 않고, 은 임금의 명을 받든 경우가 아니면 국경國境을 넘지 않는다.
여름에 에서 동맹同盟하였으니 이는 나라와 나라가 복종했기 때문이다.注+장공莊公 22년에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자 경중敬仲나라로 도망갔고, 장공莊公 25년, 곧 정문공鄭文公 4년에 나라가 나라와 강화講和하였으므로 두 나라가 모두 나라에 이심二心을 품었었는데, 이때에 와서 두 나라가 비로소 복종한 것이다.
가을에 공자公子나라로 가서 원중原仲을 장사 지냈으니 가 아니다.
원중은 계우季友의 벗이다.
겨울에 백희伯姬가 왔으니, 부모에게 문안問安하러 온 것이다.注+’은 부모父母안부安否를 묻는 것이다.
제후諸侯의 딸이 귀녕歸寧하는 것을 ‘’라 하고, 버림을 받아 쫓겨 오는 것을 ‘내귀來歸’라 하고,注+’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다.부인夫人귀녕歸寧하는 것을 ‘여모如某’(아무 데로 갔다)고 하고, 버림을 받아 쫓겨 가는 것을 ‘귀우모歸于某’(아무 데로 돌아갔다)라 한다.
진후晉侯괵국虢國토벌討伐하려 하자, 사위士蔿가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괵공虢公은 교만하니 만약 우리와의 전쟁에서 자주[驟]승리勝利한다면 반드시 그 백성들을 버릴 것입니다.注+백성을 버리고 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부주]林: 이때 괵국虢國이 자주 나라를 침벌侵伐하였는데도 나라가 보복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자주 승리勝利한 것이라는 말이다.
민중民衆을 잃은 뒤에 그를 친다면 우리를 막고자 하나 누가 그를 돕겠습니까.注+[부주]林: 누가 그와 함께 죽음을 바쳐 지키려 하겠느냐는 말이다.
는 전쟁에 앞서 반드시 쌓아야 하는 덕목德目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겸양謙讓하여 가 있고, 화목和睦을 즐기고, 친척親戚을 사랑하고, 상사喪事를 슬퍼한 뒤에야 백성들을 사용해 전쟁할 수 있습니다.注+임금이 백성을 사용함에는 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힘으로 강제强制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부주]朱: 겸양謙讓을 숭상하기 때문에 ‘양사讓事’라 하고, 으로 친척과 화합和合하기 때문에 ‘낙화樂和’라 한 것이다. 친척을 사랑하는 것이 ‘’이고, 사랑이 지극한 뒤에야 을 슬퍼할 수 있으니, 을 슬퍼하는 것이 ‘’이다.
그런데 은 이 네 가지 덕목德目은 쌓지 않고서 자주 전쟁을 일으키니, 注+괵국虢國은 쌓지 않고 전쟁에만 힘쓴다는 말이다.[부주]林: 괵국虢國이 이 은 쌓지 않고 자주 전쟁만을 일삼는다면 농시農時를 빼앗아 장차 기근饑饉우환憂患이 있을 것이니, 이른바 ‘전쟁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주왕周王소백召伯를 사신으로 보내어 제후齊侯에게 후백侯伯의(諸侯의 ) 명을 내리고注+소백召伯주왕周王경사卿士이다. 명을 내려 제후齊侯후백侯伯으로 삼은 것이다.나라를 토벌하라고 청하였으니, 나라가 왕자王子주왕周王으로 세웠기 때문이다.注+왕자王子를 세운 것은 장공莊公 19년에 있었다.


역주
역주1 同盟을……것이다. : 會盟하는 나라들 위에 公字를 기록한 곳이 무수히 보이는데, 이곳의 ‘公’에만 의미를 부여하여 云云한 林氏의 말은 무엇을 말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역주2 杞稱伯者 : 桓公 2년 經과 12년 經에 모두 杞侯로 칭하였는데, 이곳부터 《春秋》의 끝까지 모두 ‘杞伯’ 또는 ‘杞子’로 칭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당시의 周王에 의해 爵位가 깎여 侯에서 伯으로, 伯에서 다시 子로 格下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역주3 戰所畜之 : 畜은 畜積이다. 평소 임금이 백성을 교육하여 백성들이 모두 이 네 가지 德을 蓄積한 뒤에야 그 백성들을 사용해 전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쟁에 앞서 반드시 쌓아야 하는 德目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4 장차……것입니다 : 林氏는 ‘饑’를 饑饉으로 해석하였으나, 역자는 이 說을 따르지 않고 “饑는 口腹의 주림을 말한 것이 아니고, 士氣가 떨어짐을 말한 것이다. 이 ‘饑’는 《孟子》 〈公孫丑上浩然章〉에 ‘行有不慊於心則餒矣’의 ‘餒’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는 楊伯峻의 《春秋左傳注》에 따라 번역하였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50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81, 1332호(두산위브파빌리온)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