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공자公子우友가 진陳나라에 가서 원중原仲을 장사 지냈다.注+원중原仲은 진陳나라 대부이다. 원原은 씨氏이고 중仲은 자字이다. 예禮에 신하가 죽은 뒤에는 이름을 부르지 않기 때문에 자字를 칭한 것이다. 계우季友가 예禮를 어겨가면서 외국外國대부大夫의 장례葬禮에 회장會葬하였으므로 그 일을 구체적으로 드러냈으니, 이 또한 비난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거경莒慶이 와서 숙희叔姬를 아내로 맞이해 갔다.注+전傳이 없다. 경慶은 거국莒國의 대부이다. 숙희叔姬는 장공莊公의 딸이다. 경卿이 자신의 아내를 맞이하는 경우에는 여자의 자字를 칭한다. 그 예例가 선공宣公 5년에 보인다.
기백杞伯이 와서 조현朝見하였다.注+전傳이 없다. 기국杞國을 ‘백伯’이라 칭한 것은 아마도 시왕時王(당시의 주왕周王)에 의해 강등降等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장공莊公이 성복城濮에서 제후齊侯와 회합會合하였다.注+전傳이 없다. 성복城濮은 위衛나라 땅이다. 이곳에서 회합한 것은 장차 위衛나라를 토벌하려 했기 때문이다.
傳
27년 봄에 장공莊公이 조洮에서 기杞백희伯姬를 만났으니 이는 부녀父女의 상봉相逢이지 국사國事가 아니었다.注+제후諸侯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천자天子는 덕의德義를 선양宣揚하는 일이 아니면 순수巡守하지 않고,注+천자天子가 순수巡守하는 것은 덕의德義를 선포宣布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제후諸侯는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니면 거동하지 않고, 경卿은 임금의 명을 받든 경우가 아니면 국경國境을 넘지 않는다.
傳
여름에 유幽에서 동맹同盟하였으니 이는 진陳나라와 정鄭나라가 복종했기 때문이다.注+장공莊公 22년에 진陳나라에 난리가 일어나자 경중敬仲이 제齊나라로 도망갔고, 장공莊公 25년, 곧 정문공鄭文公 4년에 정鄭나라가 초楚나라와 강화講和하였으므로 두 나라가 모두 제齊나라에 이심二心을 품었었는데, 이때에 와서 두 나라가 비로소 복종한 것이다.
傳
가을에 공자公子우友가 진陳나라로 가서 원중原仲을 장사 지냈으니 예禮가 아니다.
원중은 계우季友의 벗이다.
傳
겨울에 기杞백희伯姬가 왔으니, 부모에게 문안問安하러 온 것이다.注+‘영寧’은 부모父母의 안부安否를 묻는 것이다.
제후諸侯의 딸이 귀녕歸寧하는 것을 ‘내來’라 하고, 버림을 받아 쫓겨 오는 것을 ‘내귀來歸’라 하고,注+‘귀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다.부인夫人이 귀녕歸寧하는 것을 ‘여모如某’(아무 데로 갔다)고 하고, 버림을 받아 쫓겨 가는 것을 ‘귀우모歸于某’(아무 데로 돌아갔다)라 한다.
傳
진후晉侯가 괵국虢國을 토벌討伐하려 하자, 사위士蔿가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괵공虢公은 교만하니 만약 우리와의 전쟁에서 자주[驟]승리勝利한다면 반드시 그 백성들을 버릴 것입니다.注+백성을 버리고 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부주]林: 이때 괵국虢國이 자주 진晉나라를 침벌侵伐하였는데도 진晉나라가 보복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자주 승리勝利한 것이라는 말이다.
민중民衆을 잃은 뒤에 그를 친다면 우리를 막고자 하나 누가 그를 돕겠습니까.注+[부주]林: 누가 그와 함께 죽음을 바쳐 지키려 하겠느냐는 말이다.
예禮‧악樂‧자慈‧애愛는 전쟁에 앞서 반드시 쌓아야 하는 덕목德目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겸양謙讓하여 예禮가 있고, 화목和睦을 즐기고, 친척親戚을 사랑하고, 상사喪事를 슬퍼한 뒤에야 백성들을 사용해 전쟁할 수 있습니다.注+임금이 백성을 사용함에는 의義‧양讓‧애哀‧악樂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힘으로 강제强制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부주]朱: 예禮는 겸양謙讓을 숭상하기 때문에 ‘양사讓事’라 하고, 악樂으로 친척과 화합和合하기 때문에 ‘낙화樂和’라 한 것이다. 친척을 사랑하는 것이 ‘자慈’이고, 사랑이 지극한 뒤에야 상喪을 슬퍼할 수 있으니, 상喪을 슬퍼하는 것이 ‘애愛’이다.
注+괵국虢國이 의義‧양讓은 쌓지 않고 전쟁에만 힘쓴다는 말이다.[부주]林: 괵국虢國이 이 예禮‧악樂‧자慈‧애愛의 덕德은 쌓지 않고 자주 전쟁만을 일삼는다면 농시農時를 빼앗아 장차 기근饑饉의 우환憂患이 있을 것이니, 이른바 ‘전쟁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傳
주왕周王이 소백召伯료廖를 사신으로 보내어 제후齊侯에게 후백侯伯의(諸侯의 장長) 명을 내리고注+소백召伯료廖는 주왕周王의 경사卿士이다. 명을 내려 제후齊侯를 후백侯伯으로 삼은 것이다.위衛나라를 토벌하라고 청하였으니, 위衛나라가 왕자王子퇴頹를 주왕周王으로 세웠기 때문이다.注+왕자王子퇴頹를 세운 것은 장공莊公 19년에 있었다.
역주
역주1同盟을……것이다. :
會盟하는 나라들 위에 公字를 기록한 곳이 무수히 보이는데, 이곳의 ‘公’에만 의미를 부여하여 云云한 林氏의 말은 무엇을 말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역주2杞稱伯者 :
桓公 2년 經과 12년 經에 모두 杞侯로 칭하였는데, 이곳부터 《春秋》의 끝까지 모두 ‘杞伯’ 또는 ‘杞子’로 칭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당시의 周王에 의해 爵位가 깎여 侯에서 伯으로, 伯에서 다시 子로 格下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역주3戰所畜之 :
畜은 畜積이다. 평소 임금이 백성을 교육하여 백성들이 모두 이 네 가지 德을 蓄積한 뒤에야 그 백성들을 사용해 전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쟁에 앞서 반드시 쌓아야 하는 德目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4장차……것입니다 :
林氏는 ‘饑’를 饑饉으로 해석하였으나, 역자는 이 說을 따르지 않고 “饑는 口腹의 주림을 말한 것이 아니고, 士氣가 떨어짐을 말한 것이다. 이 ‘饑’는 《孟子》 〈公孫丑上浩然章〉에 ‘行有不慊於心則餒矣’의 ‘餒’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는 楊伯峻의 《春秋左傳注》에 따라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