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春秋左氏傳(4)

춘추좌씨전(4)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춘추좌씨전(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有六年春王正月 葬晉悼公注+ 速也 하다
16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진도공晉悼公장사葬事 지냈다.注+달을 넘겨[踰月]장사葬事 지냈으니 너무 빨랐다.
[經]三月 公會晉侯宋公衛侯鄭伯曹伯莒子邾子薛伯杞伯小邾子于湨梁注+不書高厚 逃歸故也 湨水出河內軹縣 東南至溫入河 하다
3월에 양공襄公진후晉侯송공宋公위후衛侯정백鄭伯조백曹伯거자莒子주자邾子설백薛伯기백杞伯소주자小邾子격량湨梁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나라 고후高厚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회합會合에서 도망해 돌아갔기 때문이다. 격수湨水하내河內지현軹縣에서 발원發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에 이르러 황하黃河로 들어간다.
[經]戊寅 大夫盟注+諸大夫本欲盟高厚 高厚逃歸 故遂自共盟 雞澤會重序諸侯 今此間無異事 卽上諸侯大夫可知 [附注] 林曰 凡伯在焉而但曰諸侯者 無伯也 君在焉而但曰大夫者 無君也 是故自文而下盟于扈會于扈 則有斥言諸侯而不序 自襄而下湨梁之盟 則有斥言大夫而不序 하다
무인일戊寅日대부大夫들이 결맹結盟하였다.注+제후諸侯대부大夫들이 본래 고후高厚결맹結盟하고자 하였으나, 고후高厚가 도망해 돌아갔기 때문에 드디어 대부大夫들이 스스로 공맹共盟한 것이다. 계택雞澤회합會合(襄公 3년)에는 거듭 ‘제후諸侯대부大夫’라고 기록하였으나, 이번에는 그 사이(湨梁의 회합會合에서부터 대부맹大夫盟까지의 사이)에 다른 일이 없었으니, 위의 회합會合에 참여한 제후諸侯대부大夫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제후諸侯대부大夫’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부주]林: 후백侯伯(霸主)이 회맹會盟에 참여하였는데도 단지 ‘제후諸侯’로만 기록한 것은 후백侯伯무시無視한 것이고, 임금이 참여하였는데도 단지 ‘대부大夫’로만 기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공文公 이후로 ‘결맹結盟’(文公 7년)과 ‘회합會合’(文公 15년)에 참여한 ‘제후諸侯’를 지적해 말했어야 하는데도 제후諸侯들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양공襄公 이후로 격량湨梁결맹結盟에 참여한 ‘대부大夫’를 지적해 말했어야 하는데도 대부들을 기록하지 않았다.
[經]注+邾莒二國數侵魯 又無道於其民 故稱人以執 不以歸京師 非禮也 [附注] 林曰 執以歸 始此하다
진인晉人거자莒子주자邾子를 잡아 가지고 돌아갔다.注+ 두 나라가 자주 나라를 침공侵攻하였고, 또 그 백성들에게 무도無道하였기 때문에 ‘’이 잡았다고 한 것이다. 그들을 경사京師로 보내지 않았으니 가 아니다. [부주]林: 제후諸侯를 잡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經]齊侯伐我北鄙注+無傳 齊貳晉故 하다
제후齊侯가 우리나라의 북쪽 변읍邊邑침벌侵伐하였다.注+이 없다. 나라가 나라에 두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經]夏 公至自會注+無傳 하다
여름에 양공襄公회합會合에서 돌아왔다.注+이 없다.
[經]五月甲子 地震注+無傳 하다
5월 갑자일甲子日지진地震이 일어났다.注+이 없다.
[經]叔老會鄭伯晉荀偃衛寗殖宋人伐許注+ [附注] 林曰 鄭非主兵也 則曷爲書鄭伯 春秋不以大夫主諸侯 則推而屬之鄭也 春秋之大義 夷夏之卞君臣之分而已 是故僖十九年 盟于齊 陳非主盟也 不以夷狄主中國 則書會陳 今年伐許 鄭非主兵也 不以大夫主諸侯 則書會鄭 하다
숙로叔老정백鄭伯나라 순언荀偃나라 영식寗殖송인宋人회합會合하여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순언荀偃주병主兵이었으니 정백鄭伯의 위에 기록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바야흐로 숙로叔老정백鄭伯회합會合할 수 있는 를 보였기 때문에 순언荀偃을 아래에 기록한 것이다. [부주]林: 나라가 주병국主兵國이 아니었는데도 어째서 정백鄭伯을 앞에 기록하였는가? 《춘추春秋》의 서법書法대부大夫제후諸侯주도主導한 것을 인증認證하지 않으므로 순언荀偃주병主兵의 자리에서 밀어내어 정백鄭伯에게 소속所屬시킨 것이다. 춘추春秋대의大義이하夷夏(中華와 이적夷狄)의 분변과 군신君臣의 분수를 밝히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희공僖公 19년의 ‘맹우제盟于齊’에 나라가 주맹主盟한 것이 아니었는데도(楚나라가 주맹主盟하였음) 이적夷狄(楚나라를 이름)이 중국中國회맹會盟주관主管하는 것을 인증하지 않아 ‘회진會陳’으로 기록하였고, 금년 ‘벌허伐許’에 나라가 주병국主兵國이 아니었는데도 대부大夫제후諸侯주도主導한 것을 인증認證하지 않아 ‘회정會鄭’으로 기록한 것이다.
[經]秋 齊侯伐我北鄙 圍郕
가을에 제후齊侯가 우리나라의 북쪽 변읍邊邑침벌侵伐하여 성읍郕邑포위包圍하였다.
[經]大雩注+無傳 書過
우제雩祭를 거행하였다.注+이 없다. 시기時期가 지난 뒤에 지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經]冬 叔孫豹如晉
겨울에 숙손표叔孫豹나라에 갔다.
[傳]十六年春 葬晉悼公하다
16년 봄에 진도공晉悼公장사葬事 지냈다.
平公卽位注+平公 悼公子彪 하야 羊舌肸爲傅注+肸 叔向也 代士渥濁 하고 張君臣爲中軍司馬注+張老子 代其父 하고 祁奚韓襄欒盈士鞅爲公族大夫注+祁奚去中軍尉 爲公族大夫 去劇職 就間官 韓襄 無忌子 하고 虞丘書爲乘馬御注+代程鄭 하다
평공平公즉위卽位하여注+진평공晉平公진도공晉悼公의 아들 이다. 양설힐羊舌肸태부太傅로,注+숙향叔向이다. 사악탁士渥濁의 뒤를 이어 태부太傅가 된 것이다. 장군신張君臣중군사마中軍司馬로,注+장군신張君臣장로張老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의 뒤를 이은 것이다. 기해祁奚한양韓襄난영欒盈사앙士鞅공족대부公族大夫로,注+기해祁奚중군위中軍尉를 버리고 공족대부公族大夫가 되었으니, 고된 관직官職을 버리고 한가한 관직官職을 맡은 것이다. 한양韓襄한무기韓無忌의 아들이다. 우구서虞丘書승마어乘馬御로 삼았다.注+정정程鄭의 뒤를 이은 것이다.
改服脩官하고 烝于曲沃注+旣葬 改喪服 脩官 選賢能 曲沃 晉祖廟 烝 冬祭也 諸侯五月而葬 旣葬 卒哭作主 然後烝嘗於廟 今晉踰月葬 作主而烝祭 傳言晉將有湨梁之會 故速葬 하다
평공平公상복喪服길복吉服으로 갈아입고서 현능賢能한 사람을 선발選拔하고 곡옥曲沃에서 증제烝祭를 지냈다.注+장사葬事을 지낸 뒤에 상복喪服길복吉服으로 바꾸어 입은 것이다. 수관修官현능賢能한 사람을 선발選拔한 것이다. 곡옥曲沃나라 조상祖上가 있는 곳이다. 은 겨울 제사祭祀이다. 제후諸侯는 5개월 만에 장사葬事를 지낸다. 장사葬事를 지내고서 졸곡卒哭하고 신주神主를 만든 뒤에 증제烝祭상제嘗祭를 지내는 것인데, 지금 나라는 겨우 달을 넘겨 장사葬事 지내고서 신주神主를 만들어 증제烝祭를 지낸 것이다. 전문傳文나라가 장차 격량湨梁에서 회합會合거행擧行하려 하였기 때문에 시일時日을 앞당겨 빨리 장사葬事 지낸 것을 말한 것이다.
警守而下하야 會于湨梁注+順河東行 故曰下 [附注] 林曰 儆戒晉國守備 하야 命歸侵田注+諸侯相侵取之田 하다
국도國都경계警戒해 지키게 하고서 하수河水를 따라 내려가 격량湨梁에서 제후諸侯들과 회합會合하여,注+하류河流를 따라 동쪽으로 갔기 때문에 ‘(내려감)’라고 한 것이다. [부주]林: 경계警戒나라를 수비守備한 것이다. 침탈侵奪한 땅을 돌려주라고 하였다.注+제후諸侯가 서로 침공侵攻탈취奪取한 땅을 이른다.
以我故 執邾宣公莒犂比公注+犂比 莒子號也 十二年十四年 莒人侵魯 前年 邾人伐魯 晉將爲魯討之 悼公卒 不克會 故平公終其事 하고 且曰通齊楚之使注+邾莒在齊楚往來道中 故幷以此責之 經書執在大夫盟下 旣盟而後告 라하다
우리나라 때문에 주선공邾宣公거리비공莒犂比公을 잡으면서注+이비犂比거자莒子이다. 양공襄公 12년과 14년에 거인莒人나라를 침공侵攻하고, 전년前年주인邾人나라를 침벌侵伐하니, 나라가 나라를 위해 나라와 나라를 토벌討伐하려 하였으나 진도공晉悼公의 죽음으로 인해 제후諸侯회합會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진평공晉平公이 그 일을 종결終結한 것이다. 나라‧나라와 사신使臣교통交通하였기 때문이다.”注+나라와 나라가 나라와 나라가 왕래往來하는 도중道中에 있기 때문에 아울러 이 말(齊나라‧나라와 사신使臣교통交通하였다는 말)로 꾸짖은 것이다. 에 ‘’을 ‘대부맹大夫盟’ 밑에 기록한 것은 결맹結盟한 뒤에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傳]晉侯與諸侯宴于溫할새 使諸大夫舞曰 注+歌古詩 當使各從義類 하라
진후晉侯제후諸侯들과 에서 연회宴會할 때 대부大夫들에게 춤을 추게 하며 말하기를 “를 노래하되 반드시 춤의 동작動作조화調和되게 부르라.”注+고시古詩를 노래하되 각각 의류義類(뜻이 서로 같은 것)를 따르게 한 것이다.고 하였다.
齊高厚之詩不類注+齊有二心故 어늘 荀偃怒하야 且曰 諸侯有異志矣注+[附注] 林曰 言諸侯不同心以事晉矣 라하고 使諸大夫盟高厚한대 高厚逃歸注+齊爲大國 高厚若此 知小國必當有從者 하다
나라 고후高厚가 맞지 않으니,注+나라가 두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순언荀偃이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제후諸侯 중에 딴마음을 품은 자가 있을 것이다.”注+[부주]林: 제후諸侯가 한마음으로 나라를 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고 하고서 대부大夫들로 하여금 고후高厚결맹結盟하게 하자, 고후高厚가 도망해 나라로 돌아갔다.注+대국大國나라의 고후高厚가 이와 같이 하였으니 반드시 나라를 따르는 소국小國이 있을 줄을 안 것이다.
於是叔孫豹晉荀偃宋向戌衛寗殖鄭公孫蠆小邾之大夫盟曰 注+自曹以下 大夫不書 故傳擧小邾以包之 이라하다
이때에 숙손표叔孫豹나라 순언荀偃, 나라 상술向戌, 나라 영식寗殖, 나라 공손公孫, 소주국小邾國대부大夫맹약盟約하기를 “맹주盟主불충不忠하는 나라를 함께 토벌討伐할 것이다.”注+나라 이하의 대부大夫들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주小邾를 들어 나머지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고 하였다.
[傳]注+許欲叛楚 하다
허남許男나라로 나라를 옮겨 주기를 청하였다.注+나라가 나라를 배반背叛하고자 해서이다.
諸侯遂遷許한대 許大夫不可어늘 晉人歸諸侯注+唯以其師討許之不肯遷 하다
제후諸侯가 드디어 나라를 옮기려 하자 나라 대부大夫가 반대하니 진인晉人제후諸侯들을 돌려보냈다.注+진인晉人제후군諸侯軍을 돌려보내고〉 오직 자기들의 군대만으로, 옮기려 하지 않는 나라의 대부大夫들을 토벌하려 한 것이다.
鄭子蟜聞將伐許하고 遂相鄭伯以從諸侯之師注+鄭與許有宿怨 故其君親行 하다
나라 자교子蟜는, 제후諸侯나라를 토벌討伐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정백鄭伯을 도와 제후諸侯의 군대를 따라 출병出兵하였다.注+나라는 나라와 묵은 원한怨恨이 있기 때문에 그 임금이 직접 간 것이다.
穆叔從公注+從公歸 하고 齊子帥師會晉荀偃注+[附注] 林曰 齊子 卽叔老 하다
나라 목숙穆叔양공襄公을 따라 귀국歸國하고,注+양공襄公을 따라 귀국歸國한 것이다. 제자齊子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 순언荀偃회합會合하였다.注+[부주]林: 제자齊子숙로叔老이다.
書曰會鄭伯 爲夷故也注+夷 平也 春秋於魯事 所記不與外事同者 客主之言 所以爲文 固當異也 魯卿每會公侯 春秋無譏 故於此示例 不先書主兵之荀偃 而書後至之鄭伯 時皆諸侯大夫 [附注] 林曰 義取皆平 故得會鄭伯 然於義無取
에 ‘회정백會鄭伯’이라고 기록한 것은 정백鄭伯을 대부들과 평등平等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注+공평公平이다. 《춘추春秋》에 나라 일에 대해 기록한 것이 외국外國의 일을 기록한 것과 같지 않은 것은 주객主客을 구분한 말이다. 그러므로 글을 만든 것이 다른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나라 이 매양 회합會合한 것을 《춘추春秋》에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 를 보인 것이다. 주병主兵순언荀偃을 앞에 기록하지 않고 뒤에 온 정백鄭伯을 앞에 기록한 것은 이때 회합에 참여한 자들이 모두 제후諸侯대부大夫였으니, 뜻을 취한 것이 모두 평등平等하였기 때문에 정백鄭伯회합會合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주]林: 두주杜注에 ‘의취개평고득회정백義取皆平故得會鄭伯’이라 하였으나, 뜻을 취한 것이 없다.
夏六月 次于棫林하야 庚寅 伐許하고 次于函氏注+棫林函氏 皆許地 하다
여름 6월에 진군晉軍역림棫林주둔駐屯하여 경인일庚寅日나라를 토벌하고서, 함씨函氏에 주둔하였다.注+역림棫林함씨函氏는 모두 나라 땅이다.
晉荀偃欒黶帥師伐楚하야 以報宋揚梁之役注+晉師獨進 揚梁役在十二年 하다
나라 순언荀偃난염欒黶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토벌하여, 나라 양량揚梁에서 있었던 전쟁戰爭보복報復하였다.注+나라 군대 단독單獨으로 진격進擊한 것이다. 양량揚梁전쟁戰爭양공襄公 12년에 있었다.
[傳]楚公子格帥師하야 及晉師戰于湛阪注+襄城昆陽縣北有湛水 東入汝 타가 楚師敗績하니 晉師遂侵方城之外注+不書 不告 하고 復伐許而還注+許未遷故 하다
나라 공자公子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담판湛阪에서 진군晉軍전투戰鬪하다가注+양성襄城곤양현昆陽縣 북쪽에 담수湛水가 있는데 동쪽으로 흘러 여수汝水로 들어간다.초군楚軍대패大敗하니, 진군晉軍은 드디어 방성方城 밖을 침공侵攻하고,注+춘추春秋》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통고通告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나라를 토벌하고서 돌아왔다.注+나라가 옮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토벌한 것이다.
[傳]秋 齊侯圍郕注+郕 魯孟氏邑 貳晉 故伐魯 하니 孟孺子速徼之注+孟獻子之子莊子速也 徼 要也 하다
가을에 제후齊侯나라의 성읍郕邑을 포위하니注+나라 맹씨孟氏이다. 나라가 나라를 배반背叛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토벌討伐한 것이다. 나라 맹유자孟孺子제군齊軍의 허리(중간)를 잘라 공격攻擊하였다.注+맹헌자孟獻子의 아들 장자莊子이다. 적군敵軍의 허리(중간)를 잘라 공격攻擊하는 것이다.
齊侯曰 是好勇하니 去之以爲之名注+[附注] 林曰 以師去之 不與之戰 以成其名 이라하다
제후齊侯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용맹을 좋아하니 우리가 이곳을 떠나 저의 명성名聲을 이루어 주리라.”注+[부주]林: 그와 전투戰鬪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이곳을 떠나 그의 명성名聲을 이루어 주겠다는 말이다. 고 하였다.
速遂塞海陘而還注+海陘 魯隘道 하다
은 드디어 해형海陘을 막고서 돌아왔다.注+해형海陘나라의 좁은 길이다.
[傳]冬 穆叔如晉聘하고 且言齊故注+言齊再伐魯 [附注] 林曰 穆叔 卽叔孫豹 한대 晉人曰 以寡君之未禘祀注+禘祀 三年喪畢之吉祭 與民之未息注+新伐許及楚 일새라
겨울에 목숙穆叔나라에 가서 빙문聘問하고, 또 나라가 나라를 침공侵攻할 것을 말하자,注+나라가 재차 나라를 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부주]林: 목숙穆叔은 바로 숙손표叔孫豹이다. 진인晉人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아직 체제禘祭를 지내지 못하셨고注+체사禘祀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뒤에 지내는 길제吉祭이다. 백성들이 아직 휴식休息도 하지 못하였으므로注+새로 나라와 나라를 토벌討伐하였기 때문이다. 출병出兵귀국貴國을 도와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不然이면 不敢忘이리라 穆叔曰 以齊人之朝夕釋憾於敝邑之地 是以大請注+[附注] 林曰 是以大有請於晉國 이라
그렇지 않다면 감히 귀국貴國환란患亂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목숙穆叔이 말하기를 “제인齊人이 아침저녁으로 우리나라 땅을 침공侵攻하여 원한怨恨을 풀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정중히 청하는 바입니다.注+[부주]林: 이러므로 크게 나라에 청한다는 말이다.
敝邑之急 朝不及夕일새 引領西望曰 庶幾乎注+庶幾晉ᄂ저 比執事之閒이면 恐無及也注+[附注] 林曰 若欲待晉國閒暇之時 恐魯已亡無及於事 리라
우리나라의 위급危急상황狀況은 아침에 저녁을 기약할 수 없으므로 백성들이 목을 늘여 서쪽을 바라보며 ‘나라가 거의 우리를 구원救援할 것이다.’注+진인晉人이 와서 구원救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고 하는데, 만약 집사執事가 한가할 때에 미쳐 우리나라를 구원救援한다면 아마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注+[부주]林: 만약 나라가 한가해질 때를 기다려 나라를 구원救援하고자 한다면 나라는 이미 하여 사기事機(機會)에 미칠 수 없을까 두렵다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見中行獻子하고 賦圻父注+圻父 詩小雅 周司馬掌封之兵甲 故謂之圻父 詩人責圻父爲王爪牙 不脩其職 使百姓受困苦之憂 而無所止居 [附注] 朱曰 獻子 荀偃也 其父荀林父 曾將中軍 因號中行氏 한대 獻子曰 偃知罪矣 敢不從執事以同恤社稷하야 而使魯及此注+及此憂 [附注] 朱曰 豈敢不從魯國諸臣 以同憂恤社稷之難 而乃使魯人無所止居乎 리오
중항헌자中行獻子를 만나 ‘기보圻父’를 읊자,注+기보圻父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이다. 나라 사마司馬봉기封畿(王畿)의 병갑兵甲관장管掌하기 때문에 그를 ‘기보圻父’라 한다. 시인詩人이, 기보圻父조아爪牙로서 그 직무職務수행修行하지 않아 백성으로 하여금 곤난困難노고勞苦우환憂患을 당하여 머물러 살 곳이 없게 한 것을 꾸짖은 이다. [부주]朱: 헌자獻子순언荀偃이다. 그의 아버지 순임보荀林父중군中軍을 거느린 적이 있었으므로 인해 중행씨中行氏호칭號稱한 것이다. 헌자獻子가 말하기를 “나는 내 죄를 아니 감히 집사執事를 따라 함께 사직社稷(魯나라를 이름)의 어려움을 구휼救恤하지 않아 나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겠습니까?”注+어찌 우환憂患에 미치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부주]朱: 어찌 감히 나라의 제신諸臣을 따라 함께 사직社稷(魯나라를 이름)의 위난危難구휼救恤하지 않아 노인魯人으로 하여금 머물러 살 곳이 없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고 하였다.
見范宣子하고 賦鴻鴈之卒章注+鴻鴈 詩小雅 卒章曰 鴻鴈于飛 哀鳴嗸嗸 唯此哲人 謂我劬勞 言魯憂困嗸嗸然 若鴻鴈之失所 大曰鴻 小曰鴈 [附注] 朱曰 宣子 士匄 한대 宣子曰 匄在此하니 敢使魯無鳩乎注+鳩 集也
범선자范宣子를 만나 ‘홍안鴻鴈’의 졸장卒章을 읊으니注+홍안鴻鴈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이다. 졸장卒章에 “홍안鴻鴈이 날면서 우는 소리 구슬프네. 이 명철明哲한 이만이 우리들 고생한다 하네.”라고 하였으니, 이는 나라 사람들이 우환憂患고난苦難을 당하여 한탄하는 것이 마치 홍안鴻鴈이 살 곳을 잃고 구슬피 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큰 놈을 ‘’이라 하고, 작은 놈을 ‘’이라 한다. [부주]朱: 선자宣子사개士匄이다. 선자宣子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있으니 어찌 감히 나라를 안정安定시키지 않겠습니까.”注+안집安集(安定)이다. 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踰月而葬 : 晉悼公이 작년 11월에 卒하였고, 금년 正月에 葬事 지냈으니, 3개월 만에 葬事 지낸 것이다. 杜氏가 ‘踰月’이라 한 것은 옳지 않다. 諸侯는 死後 5개월 만에 葬事 지내는 것이 禮인데, 3개월 만에 葬事 지냈으니, 너무 빨리 지낸 것이다.
역주2 晉人執莒子邾子以歸 : 成海應은 “傳에 ‘두 임금이 그 백성에게 無道하였다.’는 말이 없는데, 杜氏는 ‘稱人’의 例에 구애되어, ‘無道於其民’으로 해석하여 두 나라 임금을 誣陷하였다.”고 한 高閌의 說을 취해 “잡아서 京師로 보내지 않은 것이 正禮가 아니기 때문에 ‘晉人’이라 칭하고 두 나라 임금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고 하였다. 《杜注考異》
역주3 荀偃主兵……故荀偃在下 : 〈正義〉에 의하면 征伐를 기록함에 있어 主兵者를 먼저 기록하는 것이 《春秋》의 例이다. 비록 大夫가 主兵하고 諸侯가 따랐더라도 主兵者를 먼저 기록하니, 僖公 27년의 ‘楚人, 陳侯, 蔡侯, 鄭伯, 許男이 宋나라를 包圍했다.’고 한 것이 바로 그 事例이다. 그러나 禮에 ‘卿이 公‧侯와는 會合할 수 없으나 伯‧子‧男과는 會合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바야흐로 叔老가 鄭伯과 會合할 수 있는 例를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荀偃을 물려 아래에 기록하였다는 말이다.
역주4 歌詩必類 : 杜氏는 ‘類’를 ‘恩好之義類(恩愛하고 友好하는 義理와 서로 같은 것)’로 解釋하였으나, 譯者는, 그 노래가 반드시 춤과 서로 配合하는 것이라고 한 〈楊注〉의 說을 取해 노래의 가락이 춤의 動作에 調和되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역주5 同討不庭 : 不庭은 天子의 朝廷에 朝覲하지 않는 諸侯(服從하지 않는 나라)를 이르는데, 여기서는 盟主인 晉나라에 服從하지 않는 나라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6 許男請遷于晉 : 成公 15년에 許靈公이 鄭나라의 威脅을 피하려 하자, 楚나라가 許나라를 葉으로 옮겨 주니, 이때부터 許나라는 楚나라의 附庸이 되었다. 이번에 許나라가 晉나라에게 許나라를 옮겨 주기를 청한 것은 楚나라를 멀리 떠나 晉나라에 服從하고자 해서이다. 〈楊注〉
역주7 義取皆平 得會鄭伯 : 成海應은 “鄭伯을 大夫들과 平等한 同格이 되게 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 것이다.”고 하면서 傅遜의 “杜注에 云云한 말은 옳지 않다. 主兵者를 앞에 기록하는 것은 그 班列이 같은 경우이다. 諸侯는 諸侯와 匹敵하고 大夫는 大夫와 匹敵하니, 名位가 匹敵하지 않으면 卿이 비록 主兵하였더라도 諸侯의 아래에 기록한다. 文公 14년에 趙盾이 비록 新城의 會盟을 主管하였으나 曹伯 아래에 기록한 것이 그 例이다.”고 한 說을 인용하였다. 《杜注考異》 譯者는 이 설을 취해 번역하였다. 杜注의 ‘義取皆平’은 무엇을 말한 것인지 未詳이다.
역주8 未[來] : 저본에는 ‘未’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來’로 바로잡았다.
역주9 幾[畿] : 저본에는 ‘幾’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畿’로 바로잡았다.

춘추좌씨전(4)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