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十有六年春王正月
에 葬晉悼公
注+ 速也 하다
[經]三月
에 公會晉侯宋公衛侯鄭伯曹伯莒子邾子薛伯杞伯小邾子于湨梁
注+不書高厚 逃歸故也 湨水出河內軹縣 東南至溫入河 하다
[經]戊寅
에 大夫盟
注+諸大夫本欲盟高厚 高厚逃歸 故遂自共盟 雞澤會重序諸侯 今此間無異事 卽上諸侯大夫可知 [附注] 林曰 凡伯在焉而但曰諸侯者 無伯也 君在焉而但曰大夫者 無君也 是故自文而下盟于扈會于扈 則有斥言諸侯而不序 自襄而下湨梁之盟 則有斥言大夫而不序 하다
[經]
注+邾莒二國數侵魯 又無道於其民 故稱人以執 不以歸京師 非禮也 [附注] 林曰 執以歸 始此하다
[經]叔老會鄭伯晉荀偃衛寗殖宋人伐許
注+ [附注] 林曰 鄭非主兵也 則曷爲書鄭伯 春秋不以大夫主諸侯 則推而屬之鄭也 春秋之大義 夷夏之卞君臣之分而已 是故僖十九年 盟于齊 陳非主盟也 不以夷狄主中國 則書會陳 今年伐許 鄭非主兵也 不以大夫主諸侯 則書會鄭 하다
傳
平公卽位
注+平公 悼公子彪 하야 羊舌肸爲傅
注+肸 叔向也 代士渥濁 하고 張君臣爲中軍司馬
注+張老子 代其父 하고 祁奚韓襄欒盈士鞅爲公族大夫
注+祁奚去中軍尉 爲公族大夫 去劇職 就間官 韓襄 無忌子 하고 虞丘書爲乘馬御
注+代程鄭 하다
改服脩官
하고 烝于曲沃
注+旣葬 改喪服 脩官 選賢能 曲沃 晉祖廟 烝 冬祭也 諸侯五月而葬 旣葬 卒哭作主 然後烝嘗於廟 今晉踰月葬 作主而烝祭 傳言晉將有湨梁之會 故速葬 하다
警守而下
하야 會于湨梁
注+順河東行 故曰下 [附注] 林曰 儆戒晉國守備 하야 命歸侵田
注+諸侯相侵取之田 하다
以我故
로 執邾宣公莒犂比公
注+犂比 莒子號也 十二年十四年 莒人侵魯 前年 邾人伐魯 晉將爲魯討之 悼公卒 不克會 故平公終其事 하고 且曰通齊楚之使
注+邾莒在齊楚往來道中 故幷以此責之 經書執在大夫盟下 旣盟而後告 라하다
傳
[傳]晉侯與諸侯宴于溫
할새 使諸大夫舞曰
注+歌古詩 當使各從義類 하라
齊高厚之詩不類
注+齊有二心故 어늘 荀偃怒
하야 且曰 諸侯有異志矣
注+[附注] 林曰 言諸侯不同心以事晉矣 라하고 使諸大夫盟高厚
한대 高厚逃歸
注+齊爲大國 高厚若此 知小國必當有從者 하다
於是叔孫豹晉荀偃宋向戌衛寗殖鄭公孫蠆小邾之大夫盟曰
注+自曹以下 大夫不書 故傳擧小邾以包之 이라하다
傳
諸侯遂遷許
한대 許大夫不可
어늘 晉人歸諸侯
注+唯以其師討許之不肯遷 하다
鄭子蟜聞將伐許
하고 遂相鄭伯以從諸侯之師
注+鄭與許有宿怨 故其君親行 하다
穆叔從公
注+從公歸 하고 齊子帥師會晉荀偃
注+[附注] 林曰 齊子 卽叔老 하다
書曰會鄭伯
은 爲夷故也
注+夷 平也 春秋於魯事 所記不與外事同者 客主之言 所以爲文 固當異也 魯卿每會公侯 春秋無譏 故於此示例 不先書主兵之荀偃 而書後至之鄭伯 時皆諸侯大夫 [附注] 林曰 義取皆平 故得會鄭伯 然於義無取 라
夏六月
에 次于棫林
하야 庚寅
에 伐許
하고 次于函氏
注+棫林函氏 皆許地 하다
晉荀偃欒黶帥師伐楚
하야 以報宋揚梁之役
注+晉師獨進 揚梁役在十二年 하다
傳
[傳]楚公子格帥師
하야 及晉師戰于湛阪
注+襄城昆陽縣北有湛水 東入汝 타가 楚師敗績
하니 晉師遂侵方城之外
注+不書 不告 하고 復伐許而還
注+許未遷故 하다
傳
[傳]秋
에 齊侯圍郕
注+郕 魯孟氏邑 貳晉 故伐魯 하니 孟孺子速徼之
注+孟獻子之子莊子速也 徼 要也 하다
齊侯曰 是好勇
하니 去之以爲之名
注+[附注] 林曰 以師去之 不與之戰 以成其名 이라하다
傳
[傳]冬
에 穆叔如晉聘
하고 且言齊故
注+言齊再伐魯 [附注] 林曰 穆叔 卽叔孫豹 한대 晉人曰 以寡君之未禘祀
注+禘祀 三年喪畢之吉祭 와 與民之未息
注+新伐許及楚 일새라
不然
이면 不敢忘
이리라 穆叔曰 以齊人之朝夕釋憾於敝邑之地
라 是以大請
注+[附注] 林曰 是以大有請於晉國 이라
敝邑之急
은 朝不及夕
일새 引領西望曰 庶幾乎
注+庶幾晉救 ᄂ저 比執事之閒
이면 恐無及也
注+[附注] 林曰 若欲待晉國閒暇之時 恐魯已亡無及於事 리라
見中行獻子
하고 賦圻父
注+圻父 詩小雅 周司馬掌封之兵甲 故謂之圻父 詩人責圻父爲王爪牙 不脩其職 使百姓受困苦之憂 而無所止居 [附注] 朱曰 獻子 荀偃也 其父荀林父 曾將中軍 因號中行氏 한대 獻子曰 偃知罪矣
라 敢不從執事以同恤社稷
하야 而使魯及此
注+及此憂 [附注] 朱曰 豈敢不從魯國諸臣 以同憂恤社稷之難 而乃使魯人無所止居乎 리오
見范宣子
하고 賦鴻鴈之卒章
注+鴻鴈 詩小雅 卒章曰 鴻鴈于飛 哀鳴嗸嗸 唯此哲人 謂我劬勞 言魯憂困嗸嗸然 若鴻鴈之失所 大曰鴻 小曰鴈 [附注] 朱曰 宣子 士匄 한대 宣子曰 匄在此
하니 敢使魯無鳩乎
注+鳩 集也 아
16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에
진도공晉悼公을
장사葬事 지냈다.
注+달을 넘겨[踰月]장사葬事 지냈으니 너무 빨랐다.
3월에
양공襄公이
진후晉侯‧
송공宋公‧
위후衛侯‧
정백鄭伯‧
조백曹伯‧
거자莒子‧
주자邾子‧
설백薛伯‧
기백杞伯‧
소주자小邾子와
격량湨梁에서
회합會合하였다.
注+제齊나라 고후高厚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회합會合에서 도망해 돌아갔기 때문이다. 격수湨水는 하내河內지현軹縣에서 발원發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온溫에 이르러 황하黃河로 들어간다.
무인일戊寅日에
대부大夫들이
결맹結盟하였다.
注+제후諸侯의 대부大夫들이 본래 고후高厚와 결맹結盟하고자 하였으나, 고후高厚가 도망해 돌아갔기 때문에 드디어 대부大夫들이 스스로 공맹共盟한 것이다. 계택雞澤의 회합會合(襄公 3년)에는 거듭 ‘제후諸侯의 대부大夫’라고 기록하였으나, 이번에는 그 사이(湨梁의 회합會合에서부터 대부맹大夫盟까지의 사이)에 다른 일이 없었으니, 위의 회합會合에 참여한 제후諸侯의 대부大夫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제후諸侯의 대부大夫’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부주]林: 후백侯伯(霸主)이 회맹會盟에 참여하였는데도 단지 ‘제후諸侯’로만 기록한 것은 후백侯伯을 무시無視한 것이고, 임금이 참여하였는데도 단지 ‘대부大夫’로만 기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공文公 이후로 ‘호扈의 결맹結盟’(文公 7년)과 ‘호扈의 회합會合’(文公 15년)에 참여한 ‘제후諸侯’를 지적해 말했어야 하는데도 제후諸侯들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양공襄公 이후로 격량湨梁의 결맹結盟에 참여한 ‘대부大夫’를 지적해 말했어야 하는데도 대부들을 기록하지 않았다.
진인晉人이
거자莒子와
주자邾子를 잡아 가지고 돌아갔다.
注+주邾와 거莒 두 나라가 자주 노魯나라를 침공侵攻하였고, 또 그 백성들에게 무도無道하였기 때문에 ‘인人’이 잡았다고 칭稱한 것이다. 그들을 경사京師로 보내지 않았으니 예禮가 아니다. [부주]林: 제후諸侯를 잡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제후齊侯가 우리나라의 북쪽
변읍邊邑을
침벌侵伐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제齊나라가 진晉나라에 두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여름에
양공襄公이
회합會合에서 돌아왔다.
注+전傳이 없다.
5월
갑자일甲子日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注+전傳이 없다.
숙로叔老가
정백鄭伯‧
진晉나라
순언荀偃‧
위衛나라
영식寗殖‧
송인宋人과
회합會合하여
허許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注+순언荀偃이 주병主兵이었으니 정백鄭伯의 위에 기록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바야흐로 숙로叔老가 정백鄭伯과 회합會合할 수 있는 예例를 보였기 때문에 순언荀偃을 아래에 기록한 것이다. [부주]林: 정鄭나라가 주병국主兵國이 아니었는데도 어째서 정백鄭伯을 앞에 기록하였는가? 《춘추春秋》의 서법書法은 대부大夫가 제후諸侯를 주도主導한 것을 인증認證하지 않으므로 순언荀偃을 주병主兵의 자리에서 밀어내어 정백鄭伯에게 소속所屬시킨 것이다.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는 이하夷夏(中華와 이적夷狄)의 분변과 군신君臣의 분수를 밝히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희공僖公 19년의 ‘맹우제盟于齊’에 진陳나라가 주맹主盟한 것이 아니었는데도(楚나라가 주맹主盟하였음) 이적夷狄(楚나라를 이름)이 중국中國의 회맹會盟을 주관主管하는 것을 인증하지 않아 ‘회진會陳’으로 기록하였고, 금년 ‘벌허伐許’에 정鄭나라가 주병국主兵國이 아니었는데도 대부大夫가 제후諸侯를 주도主導한 것을 인증認證하지 않아 ‘회정會鄭’으로 기록한 것이다.
가을에 제후齊侯가 우리나라의 북쪽 변읍邊邑을 침벌侵伐하여 성읍郕邑을 포위包圍하였다.
우제雩祭를 거행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시기時期가 지난 뒤에 지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傳
평공平公이
즉위卽位하여
注+진평공晉平公은 진도공晉悼公의 아들 표彪이다. 양설힐羊舌肸을
태부太傅로,
注+힐肸은 숙향叔向이다. 사악탁士渥濁의 뒤를 이어 태부太傅가 된 것이다. 장군신張君臣을
중군사마中軍司馬로,
注+장군신張君臣은 장로張老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의 뒤를 이은 것이다. 기해祁奚‧
한양韓襄‧
난영欒盈‧
사앙士鞅을
공족대부公族大夫로,
注+기해祁奚가 중군위中軍尉를 버리고 공족대부公族大夫가 되었으니, 고된 관직官職을 버리고 한가한 관직官職을 맡은 것이다. 한양韓襄은 한무기韓無忌의 아들이다. 우구서虞丘書를
승마어乘馬御로 삼았다.
注+정정程鄭의 뒤를 이은 것이다.
평공平公은
상복喪服을
길복吉服으로 갈아입고서
현능賢能한 사람을
선발選拔하고
곡옥曲沃에서
증제烝祭를 지냈다.
注+장사葬事을 지낸 뒤에 상복喪服을 길복吉服으로 바꾸어 입은 것이다. 수관修官은 현능賢能한 사람을 선발選拔한 것이다. 곡옥曲沃은 진晉나라 조상祖上의 묘廟가 있는 곳이다. 증烝은 겨울 제사祭祀이다. 제후諸侯는 5개월 만에 장사葬事를 지낸다. 장사葬事를 지내고서 졸곡卒哭하고 신주神主를 만든 뒤에 묘廟에 증제烝祭와 상제嘗祭를 지내는 것인데, 지금 진晉나라는 겨우 달을 넘겨 장사葬事 지내고서 신주神主를 만들어 증제烝祭를 지낸 것이다. 전문傳文은 진晉나라가 장차 격량湨梁에서 회합會合을 거행擧行하려 하였기 때문에 시일時日을 앞당겨 빨리 장사葬事 지낸 것을 말한 것이다.
국도國都를
경계警戒해 지키게 하고서
하수河水를 따라 내려가
격량湨梁에서
제후諸侯들과
회합會合하여,
注+하류河流를 따라 동쪽으로 갔기 때문에 ‘하下(내려감)’라고 한 것이다. [부주]林: 경계警戒해 진晉나라를 수비守備한 것이다. 침탈侵奪한 땅을 돌려주라고
명命하였다.
注+제후諸侯가 서로 침공侵攻해 탈취奪取한 땅을 이른다.
우리나라 때문에
주선공邾宣公과
거리비공莒犂比公을 잡으면서
注+이비犂比는 거자莒子의 호號이다. 양공襄公 12년과 14년에 거인莒人이 노魯나라를 침공侵攻하고, 전년前年에 주인邾人이 노魯나라를 침벌侵伐하니, 진晉나라가 노魯나라를 위해 거莒나라와 주邾나라를 토벌討伐하려 하였으나 진도공晉悼公의 죽음으로 인해 제후諸侯의 회합會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진평공晉平公이 그 일을 종결終結한 것이다. “
제齊나라‧
초楚나라와
사신使臣을
교통交通하였기 때문이다.”
注+주邾나라와 거莒나라가 제齊나라와 초楚나라가 왕래往來하는 도중道中에 있기 때문에 아울러 이 말(齊나라‧초楚나라와 사신使臣을 교통交通하였다는 말)로 꾸짖은 것이다. 경經에 ‘집執’을 ‘대부맹大夫盟’ 밑에 기록한 것은 결맹結盟한 뒤에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傳
진후晉侯가
제후諸侯들과
온溫에서
연회宴會할 때
대부大夫들에게 춤을 추게 하며 말하기를 “
시詩를 노래하되 반드시 춤의
동작動作과
조화調和되게 부르라.”
注+고시古詩를 노래하되 각각 의류義類(뜻이 서로 같은 것)를 따르게 한 것이다.고 하였다.
제齊나라
고후高厚의
시詩가 맞지 않으니,
注+제齊나라가 두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순언荀偃이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
제후諸侯 중에 딴마음을 품은 자가 있을 것이다.”
注+[부주]林: 제후諸侯가 한마음으로 진晉나라를 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고 하고서
대부大夫들로 하여금
고후高厚와
결맹結盟하게 하자,
고후高厚가 도망해
제齊나라로 돌아갔다.
注+대국大國인 제齊나라의 고후高厚가 이와 같이 하였으니 반드시 제齊나라를 따르는 소국小國이 있을 줄을 안 것이다.
이때에
숙손표叔孫豹가
진晉나라
순언荀偃,
송宋나라
상술向戌,
위衛나라
영식寗殖,
정鄭나라
공손公孫채蠆,
소주국小邾國의
대부大夫와
맹약盟約하기를 “
맹주盟主에
불충不忠하는 나라를 함께
토벌討伐할 것이다.”
注+조曹나라 이하의 대부大夫들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傳에 소주小邾를 들어 나머지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고 하였다.
傳
허남許男이
진晉나라로 나라를 옮겨 주기를 청하였다.
注+허許나라가 초楚나라를 배반背叛하고자 해서이다.
제후諸侯가 드디어
허許나라를 옮기려 하자
허許나라
대부大夫가 반대하니
진인晉人은
제후諸侯들을 돌려보냈다.
注+〈진인晉人은 제후군諸侯軍을 돌려보내고〉 오직 자기들의 군대만으로, 옮기려 하지 않는 허許나라의 대부大夫들을 토벌하려 한 것이다.
정鄭나라
자교子蟜는,
제후諸侯가
허許나라를
토벌討伐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정백鄭伯을 도와
제후諸侯의 군대를 따라
출병出兵하였다.
注+정鄭나라는 허許나라와 묵은 원한怨恨이 있기 때문에 그 임금이 직접 간 것이다.
노魯나라
목숙穆叔은
양공襄公을 따라
귀국歸國하고,
注+양공襄公을 따라 귀국歸國한 것이다. 제자齊子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진晉나라
순언荀偃과
회합會合하였다.
注+[부주]林: 제자齊子는 숙로叔老이다.
경經에 ‘
회정백會鄭伯’이라고 기록한 것은
정백鄭伯을 대부들과
평등平等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注+이夷는 공평公平이다. 《춘추春秋》에 노魯나라 일에 대해 기록한 것이 외국外國의 일을 기록한 것과 같지 않은 것은 주객主客을 구분한 말이다. 그러므로 글을 만든 것이 다른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노魯나라 경卿이 매양 공公‧후侯와 회합會合한 것을 《춘추春秋》에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 예例를 보인 것이다. 주병主兵한 순언荀偃을 앞에 기록하지 않고 뒤에 온 정백鄭伯을 앞에 기록한 것은 이때 회합에 참여한 자들이 모두 제후諸侯의 대부大夫였으니, 뜻을 취한 것이 모두 평등平等하였기 때문에 정백鄭伯과 회합會合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주]林: 두주杜注에 ‘의취개평고득회정백義取皆平故得會鄭伯’이라 하였으나, 뜻을 취한 것이 없다.
여름 6월에
진군晉軍이
역림棫林에
주둔駐屯하여
경인일庚寅日에
허許나라를 토벌하고서,
함씨函氏에 주둔하였다.
注+역림棫林과 함씨函氏는 모두 허許나라 땅이다.
진晉나라
순언荀偃과
난염欒黶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초楚나라를 토벌하여,
송宋나라
양량揚梁에서 있었던
전쟁戰爭을
보복報復하였다.
注+진晉나라 군대 단독單獨으로 진격進擊한 것이다. 양량揚梁의 전쟁戰爭은 양공襄公 12년에 있었다.
傳
초楚나라
공자公子격格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담판湛阪에서
진군晉軍과
전투戰鬪하다가
注+양성襄城곤양현昆陽縣 북쪽에 담수湛水가 있는데 동쪽으로 흘러 여수汝水로 들어간다.초군楚軍이
대패大敗하니,
진군晉軍은 드디어
방성方城 밖을
침공侵攻하고,
注+《춘추春秋》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통고通告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허許나라를 토벌하고서 돌아왔다.
注+허許나라가 옮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토벌한 것이다.
傳
가을에
제후齊侯가
노魯나라의
성읍郕邑을 포위하니
注+성郕은 노魯나라 맹씨孟氏의 읍邑이다. 제齊나라가 진晉나라를 배반背叛하였기 때문에 노魯나라를 토벌討伐한 것이다. 노魯나라
맹유자孟孺子속速이
제군齊軍의 허리(중간)를 잘라
공격攻擊하였다.
注+맹헌자孟獻子의 아들 장자莊子속速이다. 요徼는 적군敵軍의 허리(중간)를 잘라 공격攻擊하는 것이다.
제후齊侯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용맹을 좋아하니 우리가 이곳을 떠나 저의
명성名聲을 이루어 주리라.”
注+[부주]林: 그와 전투戰鬪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이곳을 떠나 그의 명성名聲을 이루어 주겠다는 말이다. 고 하였다.
속速은 드디어
해형海陘을 막고서 돌아왔다.
注+해형海陘은 노魯나라의 좁은 길이다.
傳
겨울에
목숙穆叔이
진晉나라에 가서
빙문聘問하고, 또
제齊나라가
노魯나라를
침공侵攻할 것을 말하자,
注+제齊나라가 재차 노魯나라를 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부주]林: 목숙穆叔은 바로 숙손표叔孫豹이다. 진인晉人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아직
체제禘祭를 지내지 못하셨고
注+체사禘祀는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뒤에 지내는 길제吉祭이다. 백성들이 아직
휴식休息도 하지 못하였으므로
注+새로 허許나라와 초楚나라를 토벌討伐하였기 때문이다. 출병出兵해
귀국貴國을 도와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감히
귀국貴國의
환란患亂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목숙穆叔이 말하기를 “
제인齊人이 아침저녁으로 우리나라 땅을
침공侵攻하여
원한怨恨을 풀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정중히 청하는 바입니다.
注+[부주]林: 이러므로 크게 진晉나라에 청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위급危急한
상황狀況은 아침에 저녁을 기약할 수 없으므로 백성들이 목을 늘여 서쪽을 바라보며 ‘
진晉나라가 거의 우리를
구원救援할 것이다.’
注+진인晉人이 와서 구원救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고 하는데, 만약
집사執事가 한가할 때에 미쳐 우리나라를
구원救援한다면 아마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注+[부주]林: 만약 진晉나라가 한가해질 때를 기다려 노魯나라를 구원救援하고자 한다면 노魯나라는 이미 망亡하여 사기事機(機會)에 미칠 수 없을까 두렵다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중항헌자中行獻子를 만나 ‘
기보圻父’를 읊자,
注+기보圻父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이다. 주周나라 사마司馬는 봉기封畿(王畿)의 병갑兵甲을 관장管掌하기 때문에 그를 ‘기보圻父’라 한다. 시인詩人이, 기보圻父가 왕王의 조아爪牙로서 그 직무職務를 수행修行하지 않아 백성으로 하여금 곤난困難과 노고勞苦의 우환憂患을 당하여 머물러 살 곳이 없게 한 것을 꾸짖은 시詩이다. [부주]朱: 헌자獻子는 순언荀偃이다. 그의 아버지 순임보荀林父가 중군中軍을 거느린 적이 있었으므로 인해 중행씨中行氏로 호칭號稱한 것이다. 헌자獻子가 말하기를 “나는 내 죄를 아니 감히
집사執事를 따라 함께
사직社稷(魯나라를 이름)의 어려움을
구휼救恤하지 않아
노魯나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겠습니까?”
注+어찌 우환憂患에 미치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부주]朱: 어찌 감히 노魯나라의 제신諸臣을 따라 함께 사직社稷(魯나라를 이름)의 위난危難을 구휼救恤하지 않아 노인魯人으로 하여금 머물러 살 곳이 없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고 하였다.
범선자范宣子를 만나 ‘
홍안鴻鴈’의
졸장卒章을 읊으니
注+홍안鴻鴈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이다. 졸장卒章에 “홍안鴻鴈이 날면서 우는 소리 구슬프네. 이 명철明哲한 이만이 우리들 고생한다 하네.”라고 하였으니, 이는 노魯나라 사람들이 우환憂患과 고난苦難을 당하여 한탄하는 것이 마치 홍안鴻鴈이 살 곳을 잃고 구슬피 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큰 놈을 ‘홍鴻’이라 하고, 작은 놈을 ‘안鴈’이라 한다. [부주]朱: 선자宣子는 사개士匄이다. 선자宣子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있으니 어찌 감히
노魯나라를
안정安定시키지 않겠습니까.”
注+구鳩는 안집安集(安定)이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