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十有二年春王正月
에 郕伯來奔
하다注+稱爵 見公以諸侯禮迎之 [附注] 林曰 此郕大子朱儒也 其曰郕伯 見魯以諸侯之禮逆之也 是故郕大子朱儒 魯謂之郕伯 晉大子州蒲 魯謂之晉侯 徒見其悖禮焉爾
[經]夏
에 楚人圍巢
하다注+巢 吳楚間小國 廬江六縣東有居巢城
[經]秦伯使術來聘
하다注+術 不稱氏 史略文 [附注] 林曰 秦君臣始並見
[經]冬十有二月戊午
에 晉人秦人戰于河曲
하다注+不書敗績 交綏而退 不大崩也 稱人 秦晉無功 以微者告也 皆陳曰戰 例在莊十一年 河曲在河東蒲坂縣南
[經]季孫行父帥師城諸及鄆
하다注+鄆 莒魯所爭者 城陽姑幕縣南有員亭 員卽鄆也 以其遠偪外國 故帥師城之
傳
[傳]十二年春
에 郕伯卒
하다注+[附注] 林曰 朱儒之父卒
郕人立君
注+大子自安於外邑故하니 大子以夫鍾與
來奔
하다注+郕邽亦邑
傳
[傳]杞桓公來朝
하니 始朝公也
라注+公卽位 始來朝
不言杞
는 絶也
오注+旣許其絶 故不書杞 書叔姬
는 라注+女未笄而卒 不書
傳
[傳]楚令尹大孫伯卒
하고 成嘉爲令尹
注+若敖曾孫子孔하니 羣舒叛楚
하다注+群舒 偃姓 舒庸舒鳩之屬 今廬江南有舒城 舒城西南有龍舒
傳
[傳]夏
에 子孔執舒子平及
하고 遂圍巢
하다注+平 舒君名 宗巢二國 群舒之屬
傳
襄仲辭玉曰 君不忘先君之好
하야 照臨魯國
하야 鎭撫其社稷
하고 重之以大器
하니 寡君敢辭玉
하노라注+大器 也 不欲與秦爲好 故辭玉 [附注] 朱曰 重 申也 聘義曰 已聘而還圭璋 今云辭玉 則是先聘而辭之也 對曰 不腆敝器不足辭也
라注+腆 厚也
主人三辭
하니 賓答曰 寡君願徼福于周公魯公以事君
注+徼 要也 魯公 伯禽也 言願事君以幷蒙先君之福하야 不腆先君之敝器
를 使下臣致諸執事
하야 以爲
注+節 信也 出聘必告廟 故稱先君之器하야 要結
이라
襄仲曰 不有君子
면 其能國乎
아注+[附注] 朱曰 襄仲聞使臣之辭命和遜 故知秦有君子也
國無陋矣
注+[附注] 朱曰 言以此見 天下無僻陋無之國矣라하고 厚賄之
하다注+賄 贈送也
傳
[傳]秦爲令狐之役故
로 冬
에 秦伯伐晉
하야 取羈馬
하다注+令狐役 在七年 羈馬 晉邑
晉人禦之
할새 趙盾將中軍
하고 荀林父佐之
注+林父代先克하고 郤缺將上軍
注+代箕鄭하고 臾騈佐之
注+代林父하고 欒盾將下軍
注+欒枝子 代先蔑하고 胥甲佐之
注+胥臣子 代先都하고 范無恤御戎
注+代步招하야 以從秦師于河曲
하다
臾騈曰 秦不能久
리니 請深壘固軍以待之
하소서 從之
하다注+[附注] 朱曰 深壘 卽高壘 蓋溝深則壘高也 固軍 謂軍所舍處 欲其固也 待之 謂不與戰而待其自弊也
秦人欲戰
하야 秦伯謂士會曰 若何而戰
가注+晉士會 七年奔秦 對曰
趙氏新出其屬曰臾騈
이니 必實爲此謀
하야 將以老我師也
니이다注+臾騈 趙盾屬大夫 新出佐上軍
趙有側室曰穿
이니 晉君之壻也
니이다注+側室 支子 穿 趙夙庶孫 有寵而弱
하야 不在軍事
注+弱 年少也 又未嘗軍事 하고 好勇而狂
하며 且惡臾騈之佐上軍也
하니 若使輕者肆焉
이면 其可
리이다注+肆 暫往而退也 [附注] 林曰 言若使輕兵暫往攻之而速退 則激怒趙穿 可得一戰
十二月戊午
에 秦軍掩晉上軍
하니 趙穿追之
나 不及
하다注+上軍不動 趙穿獨追之
裹糧坐甲
은 固敵是求
注+[附注] 林曰 坐甲 戰士被甲不得復臥 坐而待敵也어늘 敵至不擊
하고 將何俟焉
가
軍吏曰 將有待也
니이다注+待可擊 穿曰 我不知謀
하니 將獨出
이라하고 乃以其屬出
하다
宣子曰 秦獲穿也
면 獲一卿矣
注+僖三十三年 晉侯以一命命郤缺爲卿 不在軍帥之數 然則晉自有散位從卿者니 秦以勝歸
면 我何以報
오하고 乃皆出戰
타가 交綏
하다注+司馬法曰 逐奔不遠 從綏不及 逐奔不遠則難誘 從綏不及則難陷 然則古名退軍爲綏 秦晉志未能堅戰 短兵未致 爭而兩退 故曰交綏
秦行人夜戒晉師
注+[附注] 林曰 兵交使在其間 故秦使行人夜戒晉師 與約戰期曰 兩軍之士
가 皆未憖也
니 明日請相見也
하노라注+憖 缺也
臾騈曰 使者目動而言肆
하니 懼我也
라注+目動 心不安 言肆 聲放失常節
將遁矣
니 薄諸河
면 必敗之
리이다注+薄 迫也 胥甲趙穿當軍門呼曰 死傷未收而棄之
는 不惠也
오 不待期而薄人於險
은 無勇也
라하니 乃止
하다注+晉師止 爲宣元年放胥甲傳
12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에
성백郕伯이 도망해 왔다.
注+작爵을 칭한 것은 문공文公이 제후諸侯의 예禮로 그를 영접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부주]林: 이는 성郕나라 태자太子주유朱儒이다. 그런데도 ‘성백郕伯’이라고 한 것은 노군魯君이 그를 제후諸侯의 예禮로 영접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성郕나라 태자太子주유朱儒를 노사魯史에 성백郕伯으로, 진晉나라 태자太子주포州蒲를 노사魯史에 진후晉侯로 기록하였다.(成公 10년) 사관史官이 공公의 뜻에 따라 기록하였으나 노魯나라의 패례悖禮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기백杞伯이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注+‘자子’로 칭하지 않고 다시 ‘백伯’으로 칭한 것은 이적夷狄의 예禮를 버렸기 때문이다.
2월
경자일庚子日에
자숙희子叔姬가
졸卒하였다.
注+이미 출가出嫁하여 남의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고 쫓겨났는데도 오히려 은애恩愛로 그 죽음을 기록한 것이다.
여름에
초인楚人이
소巢나라를 포위하였다.
注+소巢나라는 오吳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이다. 여강廬江육현六縣 동쪽에 거소성居巢城이 있다.
진백秦伯이
술術을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
注+술術의 씨氏를 칭稱하지 않은 것은 사관史官이 글을 생략省略한 것이다. [부주]林: 진秦나라의 군신君臣이 비로소 함께 보이기 시작하였다.
겨울 12월
무오일戊午日에
진인晉人과
진인秦人이
하곡河曲에서
전쟁戰爭하였다.
注+‘패적敗績’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양군兩軍이 함께 퇴각退却하여 크게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人’으로 칭한 것은 진晉나라와 진秦나라가 모두 전공戰功이 없었으므로 미천微賤한 자가 출전出戰한 것으로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이다. 양군兩軍이 모두 진陳을 친 뒤에 서로 공격하는 것을 ‘전戰’이라 한다. 그 예例가 장공莊公 11년 전傳에 보인다. 하곡河曲은 하동河東포판현蒲坂縣 남쪽에 있다.
계손행보季孫行父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제諸와
운鄆에
성城을 쌓았다.
注+운鄆은 거莒나라와 노魯나라가 서로 다투는 땅이다. 성양城陽고막현姑幕縣 남쪽에 원정員亭이 있다. 원員이 바로 운鄆이다. 그 곳이 멀리서 외국外國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성을 쌓은 것이다.
傳
12년 봄에
성백郕伯이
졸卒하였다.
注+[부주]林: 주유朱儒의 아버지가 졸卒한 것이다.
성인郕人이 다른 사람을 임금으로 세우니
注+태자太子가 자기 혼자서 외읍外邑에 거처居處하였기 때문이다.태자太子가
부종夫鐘과
성규郕邽를 가지고
노魯나라로 도망해 왔다.
注+성규郕邽도 읍명邑名이다.
공公이
제후諸侯의
예禮로 그를 맞이하였으니
예禮가 아니다.
注+공公이 반역자叛逆者를 존대尊待[寵]한 것을 비난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에 “
성백郕伯이 도망해 왔다.”고만 기록하고 가지고 온 땅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를
제후諸侯로
존대尊待한 것이다.
注+이미 그를 제후諸侯로 존대尊待하였기 때문에 다시 읍邑을 훔쳐 가지고 온 죄罪를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傳
기환공杞桓公이 와서
조현朝見하였으니 비로소
문공文公에게
조현朝見한 것이다.
注+문공文公이 즉위한 뒤에 비로소 와서 조현朝見한 것이다.
또
숙희叔姬와는
부부夫婦의 인연은
단절斷絶하되
노魯나라와의
혼인관계婚姻關係는
단절斷絶하지 않기를 요청하니
공公이 허락하였다.
注+혼인 관계를 단절하지 않겠다는 것은 숙희叔姬의 동생을 부인夫人으로 세우겠다는 말이다. ‘대귀大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돌아오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
기杞’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부부夫婦의 인연을 끊었기 때문이고
注+이미 부부의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기숙희杞叔姬’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
숙희叔姬’라고 기록한 것은
처녀處女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注+딸이 성년成年이 되기 전에[未笄] 죽으면 기록하지 않는다.
傳
초楚나라
영윤令尹대손백大孫伯이
졸卒하고
성가成嘉가
영윤令尹이 되니
注+약오若敖의 증손曾孫자공子孔이다.군서群舒가
초楚나라를
배반背叛하였다.
注+군서群舒는 언성偃姓으로 서용舒庸‧서구舒鳩 따위이다. 지금 여강廬江 남쪽에 서성舒城이 있고 서성舒城 서남쪽에 용서龍舒가 있다.
傳
여름에
자공子孔이
서자舒子평平과
종자宗子를 잡고, 드디어
소巢나라를 포위하였다.
注+평平은 서군舒君의 이름이다. 종宗과 소巢 두 나라도 군서群舒의 무리이다.
傳
가을에 등소공滕昭公이 와서 조현朝見하였으니 이 또한 비로소 문공文公에게 조현朝見한 것이다.
傳
진백秦伯이 서걸술西乞術을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고 또 진晉나라를 토벌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양중襄仲이
진백秦伯이 보낸
옥玉을 사양하며 말하기를 “
진군秦君께서
선군先君의
우호友好를 잊지 않으시고
노魯나라에
왕림枉臨하시어 우리나라[社稷]를
안무安撫하시고 거듭
대기大器를 주셨습니다만
과군寡君은 감히
옥玉을 사양하십니다.”
注+대기大器는 규장圭璋이다. 진秦나라와 우호友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옥玉을 돌려준 것이다. [부주]朱: 중重은 신申(거듭)이다. 《예기禮記》 〈빙의聘義〉에 “빙례聘禮를 마친 뒤에 규장圭璋을 되돌려 준다.”고 하였는데, 지금 옥玉을 사양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빙례聘禮를 거행하기 이전에 사양한 것이다.고 하니,
서걸술西乞術이 대답하기를 “변변치 못한
폐기敝器여서 사양하실 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注+전腆은 후厚(후함)이다. 고 하였다.
주인主人(襄仲)이 세 번 사양하니
빈賓(西乞術)이 대답하기를 “
과군寡君께서는
노군魯君과 잘 지내
주공周公과
노공魯公께 복을 구하기를 바라시어,
注+요徼는 요要(求)이다. 노공魯公은 백금伯禽이다. 노군魯君과 사이좋게 지내고 아울러 노魯나라 선군先君에게 복福을 받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변변치 못한
선군先君의
폐기敝器를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집사執事에게 바쳐
서절瑞節로 삼아
注+절節은 신信이다. 빙문聘問하기 위해 나갈 때는 반드시 종묘宗廟에 고告하기 때문에 선군先君의 기물器物이라고 칭한 것이다.우호友好를 맺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과군寡君의
명命으로 이
옥玉을 바쳐 두 나라 사이에
우호友好를 맺으려는 것입니다.
注+자藉는 천薦(바침)이다.
그러므로 감히 이 옥玉을 바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양중襄仲이 말하기를 “
군자君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겠는가?
注+[부주]朱: 양중襄仲은 사신使臣의 온화하고 겸손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진秦나라에 군자君子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진秦나라는
비루鄙陋한 나라가 아니다.”
注+[부주]朱: 이로써 보면 천하天下에 아무리 지역地域이 궁벽窮僻하고 풍속風俗이 비루鄙陋한 나라라 하더라도 문사文辭를 숭상崇尙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는 말이다.고 하고서
서걸술西乞術이 돌아갈 때 많은 예물을 주어 보냈다.
注+회賄는 예물禮物을 주어 보내는 것이다.
傳
진秦나라는
영호令狐에서의
패전敗戰한 연고로
진백秦伯이
진晉나라를 토벌해
기마羈馬를
취取하였다.
注+영호令狐의 전쟁은 문공文公 7년에 있었다. 기마羈馬는 진晉나라 읍邑이다.
진인晉人이
진군秦軍을
방어防禦하는데
조돈趙盾이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순임보荀林父가 그의
좌佐(副帥)가 되고,
注+임보林父가 선극先克을 대신한 것이다.극결郤缺이
상군上軍을 거느리고
注+기정箕鄭을 대신한 것이다.유병臾騈이
좌佐가 되고,
注+임보林父를 대신한 것이다.난순欒盾이
하군下軍을 거느리고
注+난지欒枝의 아들로 선멸先蔑을 대신한 것이다.서갑보胥甲父가
좌佐가 되고,
注+서신胥臣의 아들로 선도先都를 대신한 것이다.범무휼范無恤이
융거戎車에
어御가 되어
注+보초步招를 대신한 것이다.하곡河曲에서
진군秦軍을 맞아 싸웠다.
유병臾騈이 “
진군秦軍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니
보루堡壘를 높이 쌓고
군진軍陣의
경비警備를 단단히 하고서 기다리소서.”라고 하니, 그의 말을 따랐다.
注+[부주]朱: 심루深壘는 고루高壘이다. 해자가 깊으면 보루堡壘가 높아지는 것이다. ‘고군固軍’은 군대가 머문 곳에 경비를 견고히 하는 것이다. ‘대지待之’는 저들과 전쟁하지 않고, 저들 스스로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진인秦人은
교전交戰하고자 하여
진백秦伯이
사회士會에게 “어떻게 하면 전쟁할 수 있겠는가?”고 물으니,
注+진晉나라의 사회士會가 문공文公 7년에 진秦나라로 도망갔다.사회士會가 대답하였다.
“
조씨趙氏가 새로
유병臾騈이라는 부하[屬]를
발탁拔擢[出]하였는데, 실로 이 자가 이런
계책計策을 꾸며 우리 군대를 지치게[老] 하려는 것입니다.
注+유병臾騈은 조돈趙盾의 속대부屬大夫로 새로 진출進出하여 상군上軍의 좌佐가 되었다.
조씨趙氏에게는
천穿이라는
측실側室이 있는데
진군晉君의 사위로
注+측실側室은 지자支子이다. 천穿은 조숙趙夙의 서손庶孫이다. 총애를 받고 있으나 나이가 어려
군사軍事를 알지 못하고
注+약弱은 연소年少한 것이다. 또 전쟁을 격은 적이 없어 군사軍事를 모른다는 말이다. 용맹을 좋아하여 함부로 잘난 체하며[狂], 또
유병臾騈이
상군上軍의
좌佐가 된 것을 미워하니,
경예병輕銳兵을 시켜 한번 공격하고는 즉시
후퇴後退해 오게 한다면
전쟁戰爭할 수 있을 것입니다.”
注+사肆는 갔다가 즉시 후퇴後退하는 것이다. [부주]林: 경예병輕銳兵을 시켜 잠시 가서 공격하고는 속히 후퇴해 오게 하여 조천趙穿을 격노激怒시킨다면 일전一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진백秦伯은
옥벽玉璧을
황하黃河에 던져
전쟁戰爭의
승리勝利를 빌었다.
注+승리勝利를 기구祈求한 것이다.
12월
무오일戊午日에
진군秦軍이
진晉나라
상군上軍을
습격襲擊하니
조천趙穿이
진군秦軍을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注+상군上軍은 움직이지 않고 조천趙穿이 혼자 추격한 것이다.
“
양식糧食을 싸서 메고 갑옷을 입은 채 앉아 있는 것은 진실로
적敵을 잡기 위해서인데
注+[부주]林: 좌갑坐甲은 전사戰士들이 갑옷을 입으면 다시 누울 수 없기 때문에 앉아서 적敵을 기다리는 것이다. 지금
적敵이 왔는데도 추격하지 않고 장차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군리軍吏가 “아마 기다리는 바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注+공격할 시기를 기다린다는 말이다.고 하니,
조천趙穿이 말하기를 “나는
계모計謀를 모르니 혼자라도 나가서 싸우려 한다.”고 하고서 그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갔다.
그러자
선자宣子가 말하기를 “
진군秦軍이
조천趙穿을 잡는다면 우리나라의 한
경卿을 잡는 것이니
注+희공僖公 33년에 진후晉侯가 일명一命으로 극결郤缺을 임명任命하여 경卿으로 삼고도 군수軍帥의 수數에는 넣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진晉나라에는 본래부터 이름만 있고 실직實職이 없는[散位]경卿이 있었다.진군秦軍이
승리勝利하고 돌아간다면 우리는 우리나라의
부로父老들에게 무어라고
보고報告하겠는가?”라고 하고서
전군全軍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다가
양군兩軍이
동시同時에
퇴각退却하였다.
注+사마법司馬法에 “옛날에는 도망가는 적敵을 멀리까지 추격하지 않고, 후퇴하는[綏] 적을 따라잡지 않았다. 도망가는 적을 멀리 추격하지 않으면 적敵이 우리를 유인誘引하기 어렵고, 후퇴하는 적을 따라잡지 않으면 적이 우리의 성城을 함락陷落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옛날에는 퇴군退軍하는 것을 ‘수綏’라고 한 것이다. 진晉과 진秦 두 나라는 전쟁戰爭하려는 뜻이 굳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기를 서로 마주치기도 전에 양군兩軍이 앞 다투어 퇴각退却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수交綏(兩軍이 동시同時에 퇴각退却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진秦나라의
행인行人(使者)이 밤에
진군晉軍에 가서
注+[부주]林: 교전交戰하는 사이에도 사자使者는 왕래往來하기 때문에 진秦나라가 밤에 행인行人을 진군晉軍으로 보내어 교전交戰할 시기時期를 약속하게 한 것이다.고告하기를 “
양국兩國군대軍隊에 모두
결손缺損(憖)이 없으니
注+은憖은 결손缺損이다. 내일
전장戰場에서 서로 만나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유병臾騈이 말하기를 “
사자使者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움직이고 말소리가 침착하지 않으니,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注+목동目動은 마음이 불안不安한 것이고 언사言肆는 소리가 방자放恣하여 상도常度를 잃은 것이다.
장차 도망치려는 것이니 저들을
황하黃河로 몰아붙이면
注+박薄은 박迫(逼迫)이다. 반드시
패배敗北시킬 수 있습니다.”고 하자,
서갑胥甲과
조천趙穿이
군문軍門을 막아서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
사상자死傷者를
수습收拾하지 않고 버리는 것은 은혜롭지 않은 짓이고 약속한 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진인秦人을 험한 곳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용맹이 없는 짓이다.”고 하니
진군晉軍은 추격을
정지停止하였다.
注+진군晉軍이 진군秦軍을 황하黃河로 몰아붙이는 일을 정지停止한 것이다. 선공宣公원년元年에 서갑胥甲을 추방追放한 전傳의 배경이다.
뒤에 진군秦軍은 또 진晉나라를 침공侵攻하여 하瑕로 쳐들어갔다.
傳
경經에 이를 기록한 것은 때에 맞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