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春秋左氏傳(2)

춘추좌씨전(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춘추좌씨전(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有二年春王正月 郕伯來奔하다注+稱爵 見公以諸侯禮迎之 [附注] 林曰 此郕大子朱儒也 其曰郕伯 見魯以諸侯之禮逆之也 是故郕大子朱儒 魯謂之郕伯 晉大子州蒲 魯謂之晉侯 徒見其悖禮焉爾
12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성백郕伯이 도망해 왔다.注+을 칭한 것은 문공文公제후諸侯로 그를 영접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부주]林: 이는 나라 태자太子주유朱儒이다. 그런데도 ‘성백郕伯’이라고 한 것은 노군魯君이 그를 제후諸侯로 영접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 태자太子주유朱儒노사魯史성백郕伯으로, 나라 태자太子주포州蒲노사魯史진후晉侯로 기록하였다.(成公 10년) 사관史官의 뜻에 따라 기록하였으나 나라의 패례悖禮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經]杞伯來朝하다注+復稱伯 舍夷禮
기백杞伯이 와서 조현朝見하였다.注+’로 칭하지 않고 다시 ‘’으로 칭한 것은 이적夷狄를 버렸기 때문이다.
[經]二月庚子 子叔姬卒하다注+
2월 경자일庚子日자숙희子叔姬하였다.注+이미 출가出嫁하여 남의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고 쫓겨났는데도 오히려 은애恩愛로 그 죽음을 기록한 것이다.
[經]夏 楚人圍巢하다注+巢 吳楚間小國 廬江六縣東有居巢城
여름에 초인楚人나라를 포위하였다.注+나라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이다. 여강廬江육현六縣 동쪽에 거소성居巢城이 있다.
[經]秋 滕子來朝하다
가을에 등자滕子가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經]秦伯使術來聘하다注+術 不稱氏 史略文 [附注] 林曰 秦君臣始並見
진백秦伯을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注+하지 않은 것은 사관史官이 글을 생략省略한 것이다. [부주]林: 나라의 군신君臣이 비로소 함께 보이기 시작하였다.
[經]冬十有二月戊午 晉人秦人戰于河曲하다注+不書敗績 交綏而退 不大崩也 稱人 秦晉無功 以微者告也 皆陳曰戰 例在莊十一年 河曲在河東蒲坂縣南
겨울 12월 무오일戊午日진인晉人진인秦人하곡河曲에서 전쟁戰爭하였다.注+패적敗績’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양군兩軍이 함께 퇴각退却하여 크게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으로 칭한 것은 나라와 나라가 모두 전공戰功이 없었으므로 미천微賤한 자가 출전出戰한 것으로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이다. 양군兩軍이 모두 을 친 뒤에 서로 공격하는 것을 ‘’이라 한다. 그 장공莊公 11년 에 보인다. 하곡河曲하동河東포판현蒲坂縣 남쪽에 있다.
[經]季孫行父帥師城諸及鄆하다注+鄆 莒魯所爭者 城陽姑幕縣南有員亭 員卽鄆也 以其遠偪外國 故帥師城之
계손행보季孫行父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을 쌓았다.注+나라와 나라가 서로 다투는 땅이다. 성양城陽고막현姑幕縣 남쪽에 원정員亭이 있다. 이 바로 이다. 그 곳이 멀리서 외국外國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성을 쌓은 것이다.
[傳]十二年春 郕伯卒하다注+[附注] 林曰 朱儒之父卒
12년 봄에 성백郕伯하였다.注+[부주]林: 주유朱儒의 아버지가 한 것이다.
郕人立君注+大子自安於外邑故하니 大子以夫鍾與來奔하다注+郕邽亦邑
성인郕人이 다른 사람을 임금으로 세우니注+태자太子가 자기 혼자서 외읍外邑거처居處하였기 때문이다.태자太子부종夫鐘성규郕邽를 가지고 나라로 도망해 왔다.注+성규郕邽읍명邑名이다.
公以諸侯逆之하니 非禮也注+非公寵叛人
제후諸侯로 그를 맞이하였으니 가 아니다.注+반역자叛逆者존대尊待[寵]한 것을 비난한 것이다.
故書曰 注+旣尊以爲諸侯 故不復見其竊邑之罪
그러므로 에 “성백郕伯이 도망해 왔다.”고만 기록하고 가지고 온 땅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를 제후諸侯존대尊待한 것이다.注+이미 그를 제후諸侯존대尊待하였기 때문에 다시 을 훔쳐 가지고 온 를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傳]杞桓公來朝하니 始朝公也注+公卽位 始來朝
기환공杞桓公이 와서 조현朝見하였으니 비로소 문공文公에게 조현朝見한 것이다.注+문공文公이 즉위한 뒤에 비로소 와서 조현朝見한 것이다.
且請하니 公許之하다注+不絶昏 立其娣以爲夫人
숙희叔姬와는 부부夫婦의 인연은 단절斷絶하되 나라와의 혼인관계婚姻關係단절斷絶하지 않기를 요청하니 이 허락하였다.注+혼인 관계를 단절하지 않겠다는 것은 숙희叔姬의 동생을 부인夫人으로 세우겠다는 말이다. ‘대귀大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돌아오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二月 叔姬卒하다
2월에 숙희叔姬하였다.
不言杞 絶也注+旣許其絶 故不書杞 書叔姬 注+女未笄而卒 不書
’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부부夫婦의 인연을 끊었기 때문이고注+이미 부부의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기숙희杞叔姬’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숙희叔姬’라고 기록한 것은 처녀處女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注+딸이 성년成年이 되기 전에[未笄] 죽으면 기록하지 않는다.
[傳]楚令尹大孫伯卒하고 成嘉爲令尹注+若敖曾孫子孔하니 羣舒叛楚하다注+群舒 偃姓 舒庸舒鳩之屬 今廬江南有舒城 舒城西南有龍舒
나라 영윤令尹대손백大孫伯하고 성가成嘉영윤令尹이 되니注+약오若敖증손曾孫자공子孔이다.군서群舒나라를 배반背叛하였다.注+군서群舒언성偃姓으로 서용舒庸서구舒鳩 따위이다. 지금 여강廬江 남쪽에 서성舒城이 있고 서성舒城 서남쪽에 용서龍舒가 있다.
[傳]夏 子孔執舒子平及하고 遂圍巢하다注+平 舒君名 宗巢二國 群舒之屬
여름에 자공子孔서자舒子종자宗子를 잡고, 드디어 나라를 포위하였다.注+서군舒君의 이름이다. 두 나라도 군서群舒의 무리이다.
[傳]秋 滕昭公來朝하니 亦始朝公也
가을에 등소공滕昭公이 와서 조현朝見하였으니 이 또한 비로소 문공文公에게 조현朝見한 것이다.
[傳]秦伯使西乞術來聘하고 且言將伐晉하다
진백秦伯서걸술西乞術을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고 또 나라를 토벌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襄仲辭玉曰 君不忘先君之好하야 照臨魯國하야 鎭撫其社稷하고 重之以大器하니 寡君敢辭玉하노라注+大器 也 不欲與秦爲好 故辭玉 [附注] 朱曰 重 申也 聘義曰 已聘而還圭璋 今云辭玉 則是先聘而辭之也 對曰 不腆敝器不足辭也注+腆 厚也
양중襄仲진백秦伯이 보낸 을 사양하며 말하기를 “진군秦君께서 선군先君우호友好를 잊지 않으시고 나라에 왕림枉臨하시어 우리나라[社稷]를 안무安撫하시고 거듭 대기大器를 주셨습니다만 과군寡君은 감히 을 사양하십니다.”注+대기大器규장圭璋이다. 나라와 우호友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을 돌려준 것이다. [부주]朱: (거듭)이다. 《예기禮記》 〈빙의聘義〉에 “빙례聘禮를 마친 뒤에 규장圭璋을 되돌려 준다.”고 하였는데, 지금 을 사양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빙례聘禮를 거행하기 이전에 사양한 것이다.고 하니, 서걸술西乞術이 대답하기를 “변변치 못한 폐기敝器여서 사양하실 만한 가치도 없습니다.”注+(후함)이다. 고 하였다.
主人三辭하니 賓答曰 寡君願徼福于周公魯公以事君注+徼 要也 魯公 伯禽也 言願事君以幷蒙先君之福하야 不腆先君之敝器 使下臣致諸執事하야 以爲注+節 信也 出聘必告廟 故稱先君之器하야 要結이라
주인主人(襄仲)이 세 번 사양하니 (西乞術)이 대답하기를 “과군寡君께서는 노군魯君과 잘 지내 주공周公노공魯公께 복을 구하기를 바라시어,注+(求)이다. 노공魯公백금伯禽이다. 노군魯君과 사이좋게 지내고 아울러 나라 선군先君에게 을 받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변변치 못한 선군先君폐기敝器하신下臣으로 하여금 집사執事에게 바쳐 서절瑞節로 삼아注+이다. 빙문聘問하기 위해 나갈 때는 반드시 종묘宗廟하기 때문에 선군先君기물器物이라고 칭한 것이다.우호友好를 맺도록 하셨습니다.
所以藉寡君之命하야 結二國之好注+藉 薦也
그러므로 과군寡君으로 이 을 바쳐 두 나라 사이에 우호友好를 맺으려는 것입니다.注+(바침)이다.
是以敢致之하노라
그러므로 감히 이 을 바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襄仲曰 不有君子 其能國乎注+[附注] 朱曰 襄仲聞使臣之辭命和遜 故知秦有君子也
양중襄仲이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겠는가?注+[부주]朱: 양중襄仲사신使臣의 온화하고 겸손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라에 군자君子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國無陋矣注+[附注] 朱曰 言以此見 天下無僻陋無之國矣라하고 厚賄之하다注+賄 贈送也
나라는 비루鄙陋한 나라가 아니다.”注+[부주]朱: 이로써 보면 천하天下에 아무리 지역地域궁벽窮僻하고 풍속風俗비루鄙陋한 나라라 하더라도 문사文辭숭상崇尙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는 말이다.고 하고서 서걸술西乞術이 돌아갈 때 많은 예물을 주어 보냈다.注+예물禮物을 주어 보내는 것이다.
[傳]秦爲令狐之役故 秦伯伐晉하야 取羈馬하다注+令狐役 在七年 羈馬 晉邑
나라는 영호令狐에서의 패전敗戰한 연고로 진백秦伯나라를 토벌해 기마羈馬하였다.注+영호令狐의 전쟁은 문공文公 7년에 있었다. 기마羈馬나라 이다.
晉人禦之할새 趙盾將中軍하고 荀林父佐之注+林父代先克하고 郤缺將上軍注+代箕鄭하고 臾騈佐之注+代林父하고 欒盾將下軍注+欒枝子 代先蔑하고 胥甲佐之注+胥臣子 代先都하고 范無恤御戎注+代步招하야 以從秦師于河曲하다
진인晉人진군秦軍방어防禦하는데 조돈趙盾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순임보荀林父가 그의 (副帥)가 되고,注+임보林父선극先克을 대신한 것이다.극결郤缺상군上軍을 거느리고注+기정箕鄭을 대신한 것이다.유병臾騈가 되고,注+임보林父를 대신한 것이다.난순欒盾하군下軍을 거느리고注+난지欒枝의 아들로 선멸先蔑을 대신한 것이다.서갑보胥甲父가 되고,注+서신胥臣의 아들로 선도先都를 대신한 것이다.범무휼范無恤융거戎車가 되어注+보초步招를 대신한 것이다.하곡河曲에서 진군秦軍을 맞아 싸웠다.
臾騈曰 秦不能久리니 請深壘固軍以待之하소서 從之하다注+[附注] 朱曰 深壘 卽高壘 蓋溝深則壘高也 固軍 謂軍所舍處 欲其固也 待之 謂不與戰而待其自弊也
유병臾騈이 “진군秦軍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니 보루堡壘를 높이 쌓고 군진軍陣경비警備를 단단히 하고서 기다리소서.”라고 하니, 그의 말을 따랐다.注+[부주]朱: 심루深壘고루高壘이다. 해자가 깊으면 보루堡壘가 높아지는 것이다. ‘고군固軍’은 군대가 머문 곳에 경비를 견고히 하는 것이다. ‘대지待之’는 저들과 전쟁하지 않고, 저들 스스로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秦人欲戰하야 秦伯謂士會曰 若何而戰注+晉士會 七年奔秦 對曰
진인秦人교전交戰하고자 하여 진백秦伯사회士會에게 “어떻게 하면 전쟁할 수 있겠는가?”고 물으니,注+나라의 사회士會문공文公 7년에 나라로 도망갔다.사회士會가 대답하였다.
趙氏新出其屬曰臾騈이니 必實爲此謀하야 將以老我師也니이다注+臾騈 趙盾屬大夫 新出佐上軍
조씨趙氏가 새로 유병臾騈이라는 부하[屬]를 발탁拔擢[出]하였는데, 실로 이 자가 이런 계책計策을 꾸며 우리 군대를 지치게[老] 하려는 것입니다.注+유병臾騈조돈趙盾속대부屬大夫로 새로 진출進出하여 상군上軍가 되었다.
趙有側室曰穿이니 晉君之壻也니이다注+側室 支子 穿 趙夙庶孫 有寵而弱하야 不在軍事注+弱 年少也 又未嘗軍事 하고 好勇而狂하며 且惡臾騈之佐上軍也하니 若使輕者肆焉이면 其可리이다注+肆 暫往而退也 [附注] 林曰 言若使輕兵暫往攻之而速退 則激怒趙穿 可得一戰
조씨趙氏에게는 穿이라는 측실側室이 있는데 진군晉君의 사위로注+측실側室지자支子이다. 穿조숙趙夙서손庶孫이다. 총애를 받고 있으나 나이가 어려 군사軍事를 알지 못하고注+연소年少한 것이다. 또 전쟁을 격은 적이 없어 군사軍事를 모른다는 말이다. 용맹을 좋아하여 함부로 잘난 체하며[狂], 또 유병臾騈상군上軍가 된 것을 미워하니, 경예병輕銳兵을 시켜 한번 공격하고는 즉시 후퇴後退해 오게 한다면 전쟁戰爭할 수 있을 것입니다.”注+는 갔다가 즉시 후퇴後退하는 것이다. [부주]林: 경예병輕銳兵을 시켜 잠시 가서 공격하고는 속히 후퇴해 오게 하여 조천趙穿격노激怒시킨다면 일전一戰할 수 있다는 말이다.
秦伯以璧祈戰于河하다注+禱求勝
진백秦伯옥벽玉璧황하黃河에 던져 전쟁戰爭승리勝利를 빌었다.注+승리勝利기구祈求한 것이다.
十二月戊午 秦軍掩晉上軍하니 趙穿追之 不及하다注+上軍不動 趙穿獨追之
12월 무오일戊午日진군秦軍나라 상군上軍습격襲擊하니 조천趙穿진군秦軍을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注+상군上軍은 움직이지 않고 조천趙穿이 혼자 추격한 것이다.
하야 怒曰
조천趙穿은 돌아와서 화를 내며 말하였다.
裹糧坐甲 固敵是求注+[附注] 林曰 坐甲 戰士被甲不得復臥 坐而待敵也어늘 敵至不擊하고 將何俟焉
양식糧食을 싸서 메고 갑옷을 입은 채 앉아 있는 것은 진실로 을 잡기 위해서인데注+[부주]林: 좌갑坐甲전사戰士들이 갑옷을 입으면 다시 누울 수 없기 때문에 앉아서 을 기다리는 것이다. 지금 이 왔는데도 추격하지 않고 장차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軍吏曰 將有待也니이다注+待可擊 穿曰 我不知謀하니 將獨出이라하고 乃以其屬出하다
군리軍吏가 “아마 기다리는 바가 있어서일 것입니다.”注+공격할 시기를 기다린다는 말이다.고 하니, 조천趙穿이 말하기를 “나는 계모計謀를 모르니 혼자라도 나가서 싸우려 한다.”고 하고서 그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갔다.
宣子曰 秦獲穿也 獲一卿矣注+僖三十三年 晉侯以一命命郤缺爲卿 不在軍帥之數 然則晉自有散位從卿者 秦以勝歸 我何以報오하고 乃皆出戰타가 交綏하다注+司馬法曰 逐奔不遠 從綏不及 逐奔不遠則難誘 從綏不及則難陷 然則古名退軍爲綏 秦晉志未能堅戰 短兵未致 爭而兩退 故曰交綏
그러자 선자宣子가 말하기를 “진군秦軍조천趙穿을 잡는다면 우리나라의 한 을 잡는 것이니注+희공僖公 33년에 진후晉侯일명一命으로 극결郤缺임명任命하여 으로 삼고도 군수軍帥에는 넣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나라에는 본래부터 이름만 있고 실직實職이 없는[散位]이 있었다.진군秦軍승리勝利하고 돌아간다면 우리는 우리나라의 부로父老들에게 무어라고 보고報告하겠는가?”라고 하고서 전군全軍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다가 양군兩軍동시同時퇴각退却하였다.注+사마법司馬法에 “옛날에는 도망가는 을 멀리까지 추격하지 않고, 후퇴하는[綏] 적을 따라잡지 않았다. 도망가는 적을 멀리 추격하지 않으면 이 우리를 유인誘引하기 어렵고, 후퇴하는 적을 따라잡지 않으면 적이 우리의 함락陷落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옛날에는 퇴군退軍하는 것을 ‘’라고 한 것이다. 두 나라는 전쟁戰爭하려는 뜻이 굳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기를 서로 마주치기도 전에 양군兩軍이 앞 다투어 퇴각退却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수交綏(兩軍이 동시同時퇴각退却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秦行人夜戒晉師注+[附注] 林曰 兵交使在其間 故秦使行人夜戒晉師 與約戰期曰 兩軍之士 皆未憖也 明日請相見也하노라注+憖 缺也
나라의 행인行人(使者)이 밤에 진군晉軍에 가서注+[부주]林: 교전交戰하는 사이에도 사자使者왕래往來하기 때문에 나라가 밤에 행인行人진군晉軍으로 보내어 교전交戰시기時期를 약속하게 한 것이다.하기를 “양국兩國군대軍隊에 모두 결손缺損(憖)이 없으니注+결손缺損이다. 내일 전장戰場에서 서로 만나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臾騈曰 使者目動而言肆하니 懼我也注+目動 心不安 言肆 聲放失常節
유병臾騈이 말하기를 “사자使者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움직이고 말소리가 침착하지 않으니,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注+목동目動은 마음이 불안不安한 것이고 언사言肆는 소리가 방자放恣하여 상도常度를 잃은 것이다.
將遁矣 薄諸河 必敗之리이다注+薄 迫也 胥甲趙穿當軍門呼曰 死傷未收而棄之 不惠也 不待期而薄人於險 無勇也라하니 乃止하다注+晉師止 爲宣元年放胥甲傳
장차 도망치려는 것이니 저들을 황하黃河로 몰아붙이면注+(逼迫)이다. 반드시 패배敗北시킬 수 있습니다.”고 하자, 서갑胥甲조천趙穿군문軍門을 막아서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사상자死傷者수습收拾하지 않고 버리는 것은 은혜롭지 않은 짓이고 약속한 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진인秦人을 험한 곳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용맹이 없는 짓이다.”고 하니 진군晉軍은 추격을 정지停止하였다.注+진군晉軍진군秦軍황하黃河로 몰아붙이는 일을 정지停止한 것이다. 선공宣公원년元年서갑胥甲추방追放의 배경이다.
秦師夜遁하다
진군秦軍은 밤을 이용해 도망하였다.
復侵晉하야 入瑕하다
뒤에 진군秦軍은 또 나라를 침공侵攻하여 로 쳐들어갔다.
[傳]城諸及鄆하다
에 성을 쌓았다.
時也
에 이를 기록한 것은 때에 맞았기 때문이다.
역주
역주1 從而志之 : 朱儒는 실로 郕나라의 太子인데, 公이 諸侯의 禮로 迎接하여, 이미 君으로 尊待하였기 때문에 史官도 公의 뜻에 따라 伯으로 기록했다는 말이다.
역주2 旣嫁成人……猶以恩錄其卒 : 子叔姬는 魯文公의 딸로 杞桓公의 夫人인데, 夫婦 사이가 和睦하지 못해 버림을 받았다. 杜注에 말한 ‘旣嫁成人’은 이미 시집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는 말이다. 成人은 成于敵體의 뜻이고 敵體는 夫婦의 뜻이니 夫婦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猶以恩錄其卒’은 叔姬는 이미 出嫁했다가 쫓겨났는데도 오히려 出嫁하지 않고 집에 있는 恩愛로운 딸처럼 딸[子]로 기록하였다는 말이다. 출가한 딸이 죽으면 大功服을 입고 成年이 되었으나[笄] 아직 出嫁하지 않은 딸이 죽으면 朞年服을 입는다. 여기에 이미 ‘子가 卒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 당연히 그 本服인 朞年服을 입었을 것이다. 《正義》
역주3 郕邽 : 〈古經解鉤沉〉에 “郕邽도 읍명이다. 一說에는 ‘郕邦의 寶圭이다.’고 하였다. 太子가 그 寶圭를 훔쳐가지고 혼자서 夫鍾에 거처하였기 때문에 國人이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郕伯이 죽자 국인이 다른 사람을 임금으로 세우니, 太子는 그 國寶와 夫鍾을 가지고 魯나라로 도망해 온 것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郕邽에는 두 해석이 있는데, 杜氏는 아래의 글에 ‘不書地云云’하여 地만 말하고 寶器는 말하지 않은 것에 의거해 前說을 취해 郕邽도 邑이라고 해석하였으나, 考證이 정확하지 않은 듯하다. 일설에는 “鄭穆公의 妾이 圭嬀이니, 圭도 작은 나라인데, 郕나라가 圭나라를 兼倂하고서 圭字에 邑을 붙여 邽字로 만든 것인 듯하다.”고 하였으나, 이 설도 의심스럽다. 과연 郕나라가 圭나라를 滅하였다면 반드시 郕나라 太子가 魯나라로 도망오기 전에 있었어야 하는데 襄公 19년 傳에 圭嬀라는 호칭이 보이니 圭나라가 郕나라에 倂合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郕邽는 郕나라의 寶器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左傳》 古本에는 郕邽로 되어 있지 않았는데 杜氏가 잘못 邑名이란 해석을 따랐기 때문에 후세에 傳寫하는 자가 읍을 붙여 邽字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또 邽가 태자 소유의 邑이고 보면 郕나라의 邑임을 알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郕字를 붙여 밝힐 필요가 있겠는가? 楊伯峻의 《春秋左傳注》 및 《左氏會箋》을 참고하여 역주하였다.
역주4 郕人立君……尊諸侯也 : 朱孺의 夫鍾은 晉나라 太子申生의 新城과 같다. 國都에 있기가 불안하여 스스로 夫鍾으로 와서 거처하다가 季冬에 郕伯이 卒하자 太子는 國都로 돌아가 喪事를 치르고서 卽位하였다. 그러나 國人이 반란을 일으켜 다른 사람을 임금으로 세우니, 태자는 다시 夫鍾으로 도망해 와서 外國의 힘을 빌려 復位를 도모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두 邑을 根據地로 삼고서 魯나라로 도망해 온 것이다. 卽位한 지가 이미 1년이 넘었고 보면 지금 비록 位를 잃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郕나라의 임금인데, 더구나 그가 소유한 두 읍이 郕나라의 땅이고 보면 국토를 가진 임금이니, 諸侯의 禮로 맞이하고 郕伯으로 기록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罪가 없기 때문이다. 李震相 《春秋集傳》
역주5 絶叔姬而無絶昏 : 李震相은 부부의 정은 끊되 혼인 관계는 存續하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역주6 不書大歸 未歸而卒 : 大歸는 夫人이 離婚 당하여 친정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經에 叔姬의 大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魯나라로 돌아오기 전에 杞나라에서 죽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역주7 言非女也 : 이미 出嫁한 딸이고 處女로 있는 딸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주8 宗子 : 宗國의 임금이다.
역주9 圭璋 : 玉으로 만든 貴重한 器物로 聘問하기 위해 온 外國使臣이 주인 나라의 임금에게 바치는 것이다. 《禮記》 〈聘義〉 疏에 의하면 禮를 重히 여기고 財物을 가벼이 여기는 뜻에서, 使臣이 돌아가려 할 때 主國의 임금이 卿을 賓館으로 보내어 聘禮 때 올린 圭璋을 도로 돌려준다고 하였다.
역주10 瑞節 : 朝聘할 때 가지고 가서 信標로 사용하는 玉으로 만든 符節이다.
역주11 好命 : 友好이다.
역주12 :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말을 아름답게 수식하는 文辭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13 涉知 : 일을 겪어 아는 것이다.

춘추좌씨전(2)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