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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7)

춘추좌씨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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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有二年春 薛伯定卒注+無傳 四年盟臯鼬 하다
[經]夏 葬薛襄公注+無傳하다
[經]叔孫州仇帥師墮郈注+墮 毁也 患其險固 故毁壞其城하다
[經]衛公孟彄帥師伐曹注+彄 孟縶子하다
[經]季孫斯仲孫何忌帥師墮費하다
[經]秋 大雩注+無傳 書 過하다
[經]冬十月癸亥 公會齊侯盟于黃注+無傳 結叛晉 하다
[經]十有一月丙寅朔 日有食之注+無傳하다
[經]公至自黃注+無傳하다
[經]十有二月 公圍成하다
[經]公至自圍成注+無傳 國內而書至者 成彊若列國 興動大衆 故出入皆告廟 하다
[傳]十二年夏 衛公孟彄伐曹하야 克郊注+郊 曹邑하고
滑羅注+羅 衛大夫 [附注] 林曰 滑羅爲師後殿이러니 未出 不退於列注+未出曹竟 羅不退在行列之後이어늘 其御曰 殿而在列하니 其爲無勇乎ᄂ저 羅曰 注+索 空也 厲 猛也 言伐小國 當如畏者以誘致之하리라
[傳]仲由爲季氏宰注+仲由 子路하야 將墮三都注+三都 費郈成也 彊盛將爲國害 故仲由欲毁之하니 於是叔孫氏墮郈하다
季氏將墮費한대 注+不狃 費宰也 輒不得志於叔孫氏하다
公與三子入于季氏之宮하야 登武子之臺하다
費人攻之 弗克하야 入及公側注+至臺下이어늘 仲尼命申句須樂頎下伐之注+二子 魯大夫 仲尼時爲司寇하니 費人北注+[附注] 林曰 敗北走 하다
國人追之하야 敗諸姑蔑하니 二子奔齊注+二子 不狃叔孫輒하다
遂墮費하다
將墮成하니 公斂處父謂孟孫호대 墮成이면 齊人必至于北門注+成在魯北竟故하리라
且成 孟氏之保障也 無成이면 是無孟氏也
子僞不知注+佯不知하라
我將不墮하리라
冬十二月 公圍成이나 弗克하다


12년 봄에 설백薛伯하였다.注+이 없다. 정공定公 4년에 고유臯鼬에서 동맹同盟하였다.
여름에 설양공薛襄公을 장사 지냈다.注+이 없다.
숙손주구叔孫州仇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후읍郈邑을 허물었다.注+는 허묾이다. 후성郈城험고險固한 것을 근심하였기 때문에 그 을 허문 것이다.
나라 공맹구公孟彄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토벌하였다.注+공맹구公孟彄맹집孟縶의 아들이다.
계손사季孫斯중손하기仲孫何忌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비읍費邑을 허물었다.
가을에 우제雩祭를 지냈다.注+이 없다. 이를 기록한 것은 시기時期가 지난 뒤에 지냈기 때문이다.
겨울 10월 계해일癸亥日정공定公제후齊侯와 만나 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이 없다. 나라를 배반背叛하기로 결정結定한 것이다.
11월 초하루 병인일丙寅日일식日食이 있었다.注+이 없다.
정공定公에서 돌아왔다.注+이 없다.
12월에 정공定公성읍成邑을 포위하였다.
정공定公성읍成邑의 포위에서 돌아왔다.注+이 없다. 국내國內인데도 ‘’라고 기록한 것은 성읍成邑강대彊大함이 열국列國과 같아서 대군大軍동원動員하였으므로 나가고 들어올 때 모두 종묘宗廟에 고하였기 때문이다.
12년 여름에 나라 공맹구公孟彄나라를 토벌하여 에서 승리하였다.注+나라 이다.
환군還軍할 때 활라滑羅전군殿軍(後尾를 맡는 군대)이 되기로 하였는데注+활라滑羅나라 대부大夫이다. [부주]林: 활라滑羅가 군대의 후미後尾을 맡는 전군殿軍이 되기로 한 것이다. , 위군衛軍이 아직 나라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을 때 활라滑羅대열隊列에서 물러나 후미後尾로 가지 않으니注+아직 나라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을 때 활라滑羅항렬行列에서 물러나 후미後尾로 가지 않은 것이다. , 그 어자御者가 말하기를 “전군殿軍이면서 대열隊列에 계시니, 〈사람들은〉 아마도 용맹勇猛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활라滑羅가 말하기를 “실제도 없으면서 용맹하다는 명성名聲을 얻기보다 차라리 용맹이 없다는 비난을 받겠다.注+(부질없음)이고, 용맹勇猛이니, 소국小國을 토벌함에는 두려워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적을 유인誘引해 오게 하여야 된다는 말이다. ”고 하였다.
중유仲由계씨季氏가 되어注+중유仲由자로子路이다.삼도三都를 허물려 하니注+삼도三都비읍費邑, 후읍郈邑, 성읍成邑이다. 강성彊盛하여 장차 국가國家가 될 것이므로 중유仲由가 그 을 허물고자 한 것이다. , 이에 숙손씨叔孫氏후읍郈邑의 성을 허물었다.
계씨季氏비읍費邑을 허물려 하자, 공산불뉴公山不狃숙손첩叔孫輒비인費人을 거느리고 와서 나라를 습격襲擊하였다.注+공산불뉴公山不狃읍재邑宰이다. 숙손첩叔孫輒숙손씨叔孫氏에게 뜻을 얻지 못하였다.
정공定公이 난리를 피해 계손季孫, 숙손叔孫, 맹손孟孫과 함께 계씨季氏의 집으로 가서 무자武子로 올라갔다.
비인費人진공進攻을 이기지 못하여 비인費人정공定公 곁에까지 쳐들어오자注+ 아래까지 이른 것이다. , 중니仲尼신구수申句須악기樂頎에게 명하여 내려가 토벌하게 하니注+두 사람은 나라 대부大夫이다. 중니仲尼가 이때 사구司寇였다. , 비인費人패주敗走하였다.注+[부주]林: 패배하여 달아난 것이다.
국인國人이 그들을 추격하여 고멸姑蔑에서 패배시키니 공산불뉴公山不狃숙손첩叔孫輒나라로 달아났다.注+두 사람은 공산불뉴公山不狃숙손첩叔孫輒이다.
드디어 비읍費邑을 허물었다.
성읍成邑을 허물려 하니, 공렴처보公斂處父맹손孟孫에게 말하기를 “성읍成邑의 성을 헐면 제인齊人이 반드시 북문北門으로 쳐들어올 것입니다.注+성읍成邑나라 북쪽 국경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성읍成邑맹씨孟氏보장保障(보호하는 장벽障壁)이니, 성읍成邑이 없으면 이는 맹씨孟氏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모른 체하고 계십시오.注+모른 체하라는 말이다.
나는 장차 헐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12월에 정공定公성읍成邑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殿 : 行軍할 때 後尾에서 敵軍의 追擊을 막아 前軍을 掩護하는 部隊를 이른다.
역주2 與其素厲 寧爲無勇 : 滑羅는 曹나라가 弱小하여 반드시 逐擊兵이 없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殿軍이 되어 〈실제도 없으면서〉 勇猛하다는 명성을 얻기보다 차라리 용맹이 없다는 비난을 얻겠다고 한 것이니, 殿軍의 名譽를 헛되게 하지 않고자 한 것이다. 杜注에 ‘誘致’로 해석한 것은 穿鑿(牽强附會)이라고 한 《左氏會箋》의 설을 취해 번역하였다.
역주3 公山不狃叔孫輒帥費人而襲魯 : 이때 子路가 費邑의 城을 허물기 위해 이미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서 國都가 비었으므로 公山不狃 등이 이 기회를 이용해 쳐들어온 듯하다. 〈楊注〉

춘추좌씨전(7)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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