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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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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年春王二月 公會齊侯鄭伯于中丘注+傳言正月會 癸丑盟 釋例 推經傳日月 癸丑是正月二十六日 知經二月誤하다
10년 봄 2월에 은공이 제후齊侯정백鄭伯중구中丘에서 회견會見하였다.注+에 “정월正月회합會合하고 계축일에 결맹結盟하였다.”고 한 것에 대해 《석례釋例》에 “의 날과 달을 추산推算해 보면 계축일은 정월正月 26일이다.”고 하였으니, 에 2월이라 한 것은 오류誤謬임을 알 수 있다.
[經]夏 翬帥師會齊人鄭人伐宋注+公子翬 不待公命 而貪會二國之君 疾其專進 故去氏 齊鄭以公不至 故亦更使微者從之伐宋 不言及 明翬專行 非鄧之謀也 及例在宣七年하다
여름에 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제인齊人정인鄭人과 연합하여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공자公子가 은공의 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가서 두 나라 임금과 회합하기를 탐하였으므로 제멋대로 간 것을 미워하였다. 그러므로 를 쓰지 않은 것이다. 은 은공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여 미천한 를 송나라 토벌하는 일에 따르게 한 것이다. 이라고 말하지 않아, 가 멋대로 한 짓이지 에서의 결맹 때 모의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선공宣公 7년에 보인다.
[經]六月 壬戌 公敗宋師于菅注+齊鄭後期 故公獨敗宋師 書敗 宋未陳也 敗例在莊十一年 菅 宋地하다 辛未 取郜하고 辛巳 取防注+鄭後至 得郜防二邑 歸功于魯 故書取 明不用師徒也 濟陰成武縣東南 有郜城 高平昌邑縣西南 有西防城 [附注] 林曰 郜防 宋二邑 鄭入之 以歸于我也 鄭取郜防 歸于我 不書鄭 譏不在鄭 晉取濟西汶陽邾田歸于我 不書晉 譏不在晉也 하다
6월 임술일에 은공隱公나라 군대를 에서 패배시키고서注+이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은공이 홀로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 군대를 패배敗北시킨 것이다. 에 패배시켰다고 기록한 것은 나라 군대가 을 치기 전에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장공莊公 11년에 보인다. 나라 땅이다. 신미일에 고읍郜邑를 취하고, 신사일에 방읍防邑을 취하였다.注+나라가 약속한 날짜가 지난 뒤에 와서 을 점령하고는 그 나라에 돌렸다. 그러므로 에 “했다.”고 기록하여 많은 군대를 사용하지 않은 것임을 밝혔다. 제음濟陰성무현成武縣 동남에 고성郜城이 있고, 고평高平창읍현昌邑縣 서남에 서방성西防城이 있다. [부주]林: 나라의 두 이다. 나라가 진입進入해 두 을 점령한 뒤에 두 읍을 나라에 준 것이다. 나라가 을 취하여 나라에 주었으나, 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무랄 만한 잘못이 나라에 있지 않기 때문이고,
[經]秋 宋人衛人入鄭하다
가을에 송인宋人위인衛人이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침입侵入하였다.
宋人蔡人衛人伐戴어늘 鄭伯伐取之하다注+三國伐戴 鄭伯因其不和 伐而取之 書伐 用師徒也 書取 克之易也 戴國 今陳留外黃縣東南 有戴城
송인宋人채인蔡人위인衛人이 연합하여 대국戴國을 치니, 정백이 이들을 쳐서 힘들이지 않고 승리하였다.注+세 나라가 대국戴國을 토벌하니, 정백鄭伯이 세 나라가 불화不和한 틈을 이용해 토벌하여 힘들이지 않고 승리하였다. 에 ‘’이라고 기록한 것은 많은 군대를 사용했다는 말이고, ‘’라고 기록한 것은 쉽게 승리했다는 말이다. 대국戴國은 지금 진류陳留외황현外黃縣 동남에 대성戴城이 있다.
[經]冬十月壬午 齊人鄭人入郕하다
겨울 10월 임오일에 제인齊人정인鄭人이 군대를 거느리고 성국郕國으로 쳐들어 갔다.
[傳]十年春王正月 公會齊侯鄭伯于中丘하다
10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에 은공이 제후齊侯정백鄭伯중구中丘에서 회합하였다.
癸丑 盟于鄧하야 爲師期注+尋九年會于防 謀伐宋也 公旣會而盟 盟不書 非後也 蓋公還 告會而不告盟 鄧 魯地하다
계축일에 에서 결맹結盟하고서 나라를 치기 위한 출병일出兵日을 정하였다.注+은공隱公 9년에 에서 있었던 회맹會盟을 다지고, 나라 토벌하기를 모의謀議한 것이다. 은공隱公회합會合을 마치고서 결맹結盟하였는데도 결맹結盟한 일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기일期日이 지난 뒤에 갔기 때문이 아니라 은공이 환국還國해서, 회합會合만 고하고 결맹結盟은 고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나라 땅이다.
[傳]夏五月 羽父先會齊侯鄭伯伐宋注+言先會 明非公本期 釋翬之去族하다
여름 5월에 우보羽父가 먼저 가서 제후齊侯정백鄭伯과 회합하여 나라를 토벌하였다.注+에 “먼저 가서 회합하였다.”고 기록하여 은공이 정한 본래의 기일期日이 아님을 밝히고, 을 기록하지 않은 이유를 해석하였다.
[傳]六月戊申 公會齊侯鄭伯于老桃注+會不書 不告於廟也 老桃 宋地 六月無戊申 戊申 五月二十三日 日誤하다
6월 무신일에 은공이 노도老桃에서 제후齊侯정백鄭伯과 회합하였다.注+에 회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종묘宗廟에 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도老桃나라 땅이다. 6월에는 무신일이 없다. 무신은 5월 23일이니, 날짜가 잘못되었다.
壬戌 公敗宋師于菅하다
임술일에 은공이 송나라 군대를 에서 패배시켰다.
庚午 鄭師入郜하야 辛未 歸于我하고 庚辰 鄭師入防하야 辛巳 歸于我注+壬戌 六月七日 庚午 十五日 庚辰 二十五日 鄭伯後期 而公獨敗宋師 故鄭頻獨進兵以入郜防 入而不有 命魯取之 推功上爵 讓以自替 不有其實 故經但書魯取 以成鄭志 善之也하다
경오일에 정나라 군대가 진입進入하여 신미일에 나라에 주고, 경진일에 정나라 군대가 진입進入하여 신사일에 노나라에 주었다.注+임술壬戌은 6월 7일, 경오는 15일, 경진庚辰은 25일이다. 정백鄭伯이 약속한 기일期日에 오지 않았으므로 은공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송나라 군대를 패배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정백鄭伯은 홀로 군대를 거느리고 자주 진격하여 에 진입하였고, 진입하여서는 자기가 점유占有하지 않고 나라에게 취하도록 하였다. 상작上爵에게 미루고 스스로 양보하여 그 곳을 떠나고 군실軍實(전쟁에서 얻은 토지土地)을 차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 “나라가 하였다.”고만 기록하여 나라의 뜻을 이루어 주었으니, 이는 정백鄭伯처사處事를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君子謂鄭莊公於是乎可謂正矣로다
이에 대해 군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정장공鄭莊公이 이 번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공정公正했다고 이를 수 있다.
以王命討不庭注+下之事上 皆成禮於庭中하야 不貪其土하고 以勞王爵하니 正之體也注+勞者 序其勤以答之 諸侯相朝 逆之以 謂之郊勞 魯侯爵尊 鄭伯爵卑 故言以勞王爵 [附注] 朱曰 以二邑歸魯 故曰以勞王爵
천왕天王의 명으로 조근朝覲하지 않는 제후를 토벌하였으면서도注+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섬기는 는 모두 왕정王庭에서 이루어진다.토지土地를 탐하지 않고 그 땅으로 왕작王爵을 위로하였으니, 정치政治대체大體를 얻었다고 하겠다.注+는 그 사람의 공로功勞서술敍述하여 보답하는 것이다. 제후가 조현朝見하기 위해 오면 옹희饔餼로 영접하는 것을 교로郊勞라 한다. 노후魯侯작위爵位가 높고 정백鄭伯은 작위가 낮기 때문에 “이로왕작以勞王爵”이라고 한 것이다. [부주]朱: 두 나라에 주었기 때문에 “이로왕작以勞王爵”이라 한 것이다.
[傳]蔡人衛人郕人不會王命注+不伐宋也 [附注] 林曰 三國不會伐宋 蓋九年鄭以王命來告伐宋 想皆告于諸侯 故曰不會王命하다
채인蔡人위인衛人성인郕人나라를 토벌討伐하라는 왕명王命을 받고도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회합會合하지 않았다.注+나라를 토벌하지 않은 것이다.[부주]林: 세 나라가 나라를 토벌하라는 왕명王命을 받고도 회합하지 않은 것이다. 은공隱公 9년에 정인鄭人왕명王命으로 와서 송나라를 토벌하라고 통고한 것으로 보아, 벌송伐宋의 일을 모든 제후에게 다 통고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불회왕명不會王命”이라고 한 것이다.
[傳]秋 七月庚寅 鄭師入郊하야 猶在郊注+鄭師還 駐兵於遠郊 [附注] 林曰 伐宋還 入鄭之遠郊하니 宋人衛人入鄭注+宋衛奇兵乘虛入鄭하다
가을 7월 경인일에 정나라 군대가 송나라에서 철수撤收본국本國원교遠郊로 들어와서는 그대로 원교遠郊에 주둔하니,注+나라 군대가 돌아와서 군대를 원교遠郊에 주둔시킨 것이다. [부주]林: 나라를 토벌하고서 환군還軍하여 정나라의 원교遠郊로 들어온 것이다.송인宋人위인衛人이 정나라로 쳐들어갔다.注+기습군奇襲軍으로 나라의 국도國都가 빈 틈을 타서 나라로 쳐들어간 것이다.
蔡人從之하야 伐戴注+從宋衛伐戴也하다
채인蔡人은 뒤늦게 와서 의 군대를 따라 를 쳤다.注+를 따라 를 친 것이다.
八月壬戌 鄭伯圍戴하고 癸亥 克之하야 取三師焉注+三國之軍在戴 故鄭伯合圍之 師者 軍旅之通稱하다
8월 임술일에 정백鄭伯이 군대를 거느리고서 를 포위하고, 계해일에 승리하여 세 나라 군대를 모두 포로로 잡았다.注+세 나라 군대가 에 있기 때문에 정백鄭伯이 그곳을 포위한 것이다. 군려軍旅(군대‧전쟁‧군사軍事)의 통칭通稱이다.
宋衛旣入鄭하고 而以伐戴召蔡人注+伐戴 乃召之하니 蔡人怒
송‧위가 정나라로 쳐들어가 승리한 뒤에 를 공격하는 일로 채인蔡人을 부르니注+를 칠 때서야 부른 것이다. 채인이 노하였다.
故不和而敗注+言鄭取之易也 [附注] 林曰 蔡人怒宋衛不同其入鄭之功 하다
그러므로 세 나라 군대가 화합하지 못하여 패전敗戰한 것이다.注+나라가 쉽게 취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부주]林: 채인蔡人가 정나라에 쳐들어가는 을 함께 하지 않았다고 노한 것이다.
[傳]九月戊寅 鄭伯入宋注+報入鄭也 九月無戊寅 戊寅 八月二十四日 하다
9월 무인일戊寅日에 정백이 송으로 쳐들어갔다.注+정나라에 쳐들어왔던 것을 보복한 것이다. 9월에는 무인일이 없다. 무인은 8월 24일이다.
[傳]冬 齊人鄭人入郕하니 討違王命也
겨울에 제인齊人정인鄭人나라로 쳐들어갔으니, 이는 나라가 왕명王命을 어겼기 때문에 토벌한 것이다.
역주
역주1 及에 대한 例 : 모든 出兵에 있어 모의에 참여하였으면 ‘及’이라 하고, 참여하지 않았으면 ‘會’라 한다.
역주2 敗에 대한 例 : 모든 전쟁에 敵이 陣을 치기 전에 공격해 승리하는 것을 ‘敗某師’(아무 군대를 패배시켰다)라고 하고, 모두 陣을 친 뒤에 공격하는 것을 ‘戰’이라 하고, 크게 崩潰당하는 것을 ‘敗績’이라 하고, 敵의 總帥를 잡는 것을 ‘克’이라 하고, 伏兵으로 습격해 적을 패배시키는 것을 ‘取某師’(아무 군대를 取하였다)라 하고, 天王의 군대가 패배당하는 것을 ‘王師가 아무에게 敗績했다.’고 한다. 《春秋左傳莊公十一年傳》
역주3 晉나라가……때문이다 : 林氏는 晉이 노나라를 위해 邾나라를 쳐서 邾의 땅을 탈취하여 漷水以西를 노나라에 주었으나, 襄公 19년 經에 단지 “取邾田自漷水”라고 만 기록하고 晉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晉에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사국의 國名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여 과연 이런 해석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역주4 饔餼 : 外國使臣을 융숭한 禮로 접대하는 것이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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