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夏
에 歸粟于蔡
注+蔡爲楚所圍 飢乏 故魯歸之粟하다
[經]於越入吳
注+於 發聲也 [附注] 林曰 向曰越人 今曰於越 復從其舊號也 越未有聞也 昭定之春秋 吳楚爭而後 越入中國 昭五年會于瑣也 而亟稱人 後三十年而入吳 不復稱人矣 晉楚之初 春秋未以敵言之 戰于邲也 則楚稱子矣 吳楚之初 春秋未以敵言之 戰于柏擧也 則吳稱子矣 至於吳越 終春秋 不以敵言之也 是故越入吳書 吳入越不書하다
傳
[傳]五年春
에 王人殺子朝于楚
注+因楚亂也 終하다
傳
[傳]夏
에 歸粟于蔡
하야 注+亟 急也 [附注] 林曰 以周濟蔡人之亟難 矜哀蔡人之無資糧니라
傳
[傳]越入吳
하니 吳在楚也
注+[附注] 林曰 乘吳之在楚而入其國也라
傳
[傳]六月
에 季平子行東野
注+東野 季氏邑하고 還
타가 未至
하고 丙申
에 卒于房
하다
陽虎將以璵璠斂
注+璵璠 美玉 君所佩한대 仲梁懷弗與
注+懷 亦季氏家臣曰
注+昭公之出 季孫行君事 佩璵璠 祭宗廟 今定公立 復臣位 改君步 則亦當去璵璠이라
陽虎欲逐之
하야 告公山不狃
한대 不狃曰 彼爲君也
니 子何怨焉
注+不狃 季氏臣費宰子洩也 爲君不欲使僭가
旣葬
에 桓子行東野
注+桓子 意如子 季孫斯하야 及費
하다
勞仲梁懷
하니 仲梁懷弗敬
注+懷 時從桓子行 輕慢子洩하다
子洩怒
하야 謂陽虎
호되 子行之乎
注+行 逐懷也 爲下陽虎囚桓子起ᄂ저
傳
秦子蒲子虎帥車五百乘以救楚
注+五百乘 三萬七千五百人하다
子蒲曰
注+道 猶法術也 [附注] 林曰 言我未知制吳之法術라하고 使楚人先與吳人戰
하고 而自稷會之
하야 大敗夫槩王于沂
注+稷沂 皆楚地하다
吳人獲薳
於柏擧
注+薳射 楚大夫하니 其子帥奔徒
注+奔徒 楚散卒以從子西
하야 敗吳師於軍祥
注+楚地하다
傳
九月
에 夫槩王歸
하야 自立也
하야 以與王戰而敗
注+自立爲吳王 號夫槩하고 奔楚
하야 爲堂谿氏
注+傳終言之하다
吳師居麇
注+麇 地名하니 子期將焚之
注+[附注] 林曰 將以火攻吳師한대
子西曰 父兄親
焉
이어늘 不能收
하고 又焚之
면 不可
注+前年楚人與吳戰 多死麇中 言不可幷焚하다 子期曰 國亡矣
라
死者若有知也
면 可以歆舊祀
注+言焚吳復楚 則祭祀不廢리니 豈憚焚之
리오 焚之而又戰
하니 吳師敗
하다
又戰于公壻之谿
注+楚地名하야 吳師大敗
하니 吳子乃歸
하다
囚闉輿罷
러니 闉輿罷請先
하야 遂逃歸
注+輿罷 楚大夫 請先至吳而逃歸 言吳唯得楚一大夫 復失之 所以不克하다
葉公諸梁之弟后臧從其母於吳
러니 注+諸梁 司馬沈尹戌之子 葉公子高也 吳入楚 獲后臧之母 楚定 臧棄母而歸한대 葉公終不正視
注+不義之하다
傳
[傳]乙亥
에 陽虎囚季桓子及公父文伯
注+文伯 季桓子從父昆弟也 陽虎欲爲亂 恐二子不從 故囚之하고 而逐仲梁懷
注+[附注] 林曰 以其不順己故하다
己丑
에 盟桓子于稷門之內
注+魯南城門하고 庚寅
에 大
注+[附注] 林曰 詛 謂違盟者當受罰하다
逐公父歜及秦遄
하니 皆奔齊
注+歜 卽文伯也 秦遄 平子姑壻也 傳言季氏之亂하다
傳
吾聞之
컨대 不讓則不和
하고 不和
면 不可以遠征
注+[附注] 林曰 不能久遠征役이라하여늘
吳爭於楚
하니 必有亂
이오 有亂
이면 則必歸
리니 焉能定楚
注+[附注] 林曰 安能定楚之地리오
傳
王之奔隨也
에 將涉於成臼
注+江夏 竟陵縣西有臼水 出聊屈山 西南入漢러니 藍尹亹涉其帑
注+亹 楚大夫 [附注] 林曰 先在臼水 涉其妻子하고 不與王舟
하다
及寧
하야 王欲殺之
注+寧 安定也한대 子西曰 子常唯思舊怨以敗
라
君何效焉
이리오 王曰 善
타하고 使復其所
注+[附注] 林曰 使藍尹亹 復其所職하야 吾以志前惡
注+惡 過也 [附注] 林曰 我用此以識前日之過이라하다
王賞鬪辛王孫由于王孫圉鍾建鬪巢申包胥王孫賈宋木鬪懷
注+九子皆從王有大功者한대 子西曰 請舍懷也
注+ [附注] 林曰 請棄懷勿賞하소서 王曰 大德滅小怨
이 道也
注+ 是大德라
且
하니 其又爲諸
注+子旗 蔓成然也 以有德於平王 求欲無厭 平王殺之 在昭十四年아하고 遂逃賞
하다
王將嫁季羋
하니 季羋辭曰 所以爲女子
는 遠丈夫也
注+[附注] 林曰 遠丈夫以重男女之別也어늘 鍾建負我矣
라하니 以妻鍾建
하야 以爲樂尹
注+司樂大夫하다
傳
王之在隨也
에 注+脾洩 楚邑也 失王 恐國人潰散 故僞爲王車服 立國脾洩 以保安道路人이라가 聞王所在
하고 而後從王
하다
王使由于城麇
注+於麇築城러니 復命
이어늘 子西問高厚焉
하니 弗知
注+[附注] 林曰 城畢反命於君 子西問築城高厚幾許 由于不知其數하다
子西曰 不能
이면 如辭
注+言自知不能 當辭勿行니라
城不知高厚
하니 小大何知
注+[附注] 林曰 築城尙不知其高厚小大之數 當復與知何事 [附注] 朱曰 築城而不知其高厚丈尺 豈復知城之小大乎리오 對曰 固辭不能
注+[附注] 林曰 言我固嘗辭不能矣이로되 子使余也
注+[附注] 林曰 子 謂子西 必欲使余往也니라
王遇盜於雲中
에 余受其戈
하니 其所猶在
注+[附注] 朱曰 遭傷之處見存라하고 袒而視之背曰 此余所能也
어니와 脾洩之事
는 余亦弗能也
注+傳言昭王所以復國 有賢臣也라
傳
[傳]晉士鞅圍鮮虞
하야 報觀虎之敗也
注+三年 鮮虞獲晉觀虎라
5년 봄
주왕周王 3월 초하루
신해일辛亥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注+전傳이 없다.
여름에
채蔡나라에
양곡糧穀을 보내주었다.
注+채蔡나라가 초군楚軍에게 포위되어 굶주렸기 때문에 노魯나라가 양곡糧穀을 보내준 것이다.
월인越人이
오吳나라로 쳐들어갔다.
注+어於는 발어성發語聲이다. [부주]林: 전에는 ‘월인越人’이라 하고서 지금은 ‘어월於越’이라 한 것은 다시 〈월越나라의〉 구호舊號를 따른 것이다. 이는 월越나라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공昭公과 정공定公의 《춘추春秋》에는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패권霸權을 다툰 뒤에 월인越人이 중국中國으로 들어왔다. 소공昭公 5년에 있었던 쇄瑣의 회합會合에 월越나라 상수과常壽過를 비로소 경經에 기재하고 누차 ‘인人’으로 칭하였는데, 그로부터 30년 뒤인 〈정공定公 5년에〉 오吳나라로 쳐들어간 것을 기록함에는 다시 ‘인人’으로 칭하지 않았다. 진晉나라와 초楚나라가 패권霸權을 다툰 초기에는 《춘추春秋》에 진晉과 초楚를 대등[敵]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필邲의 전쟁에는 초楚를 ‘자子’로 칭하였고,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패권을 다툰 초기에는 《춘추春秋》에 오吳와 초楚를 대등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백거柏擧의 전쟁에는 오吳를 ‘자子’로 칭하였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에 대해서는 《춘추春秋》가 끝날 때까지 대등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월越나라가 오吳나라로 쳐들어간 것은 기록하고 오吳나라가 월越나라로 쳐들어간 것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6월 병신일丙申日에 계손의여季孫意如가 졸卒하였다.
가을 7월
임자일壬子日에
숙손불감叔孫不敢이
졸卒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겨울에 진晉나라 사앙士鞅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선우鮮虞를 포위하였다.
傳
5년 봄에
왕인王人(周나라
왕실王室의
관원官員)이
초楚나라에서
자조子朝를 죽였다.
注+초楚나라가 혼란한 틈을 이용한 것이다. 끝내 민마보閔馬父(閔子馬)의 말처럼 된 것이다.
傳
여름에
채蔡나라에
양곡糧穀을 보내어
위급危急[亟]을
구제救濟[周]하였으니, 이는
양식糧食[資]이 없는 것을 가엾게 여겨서이다.
注+극亟은 급急이다. [부주]林: 채인蔡人의 급난急難을 구제하고 양식糧食이 없는 채인蔡人을 가엾게 여긴 것이다.
傳
월군越軍이
오吳나라로 쳐들어갔으니, 이는
오군吳軍이
초楚나라에 들어가 있는 기회를 이용한 것이다.
注+[부주]林: 오군吳軍이 초楚나라에 가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오吳나라로 쳐들어간 것이다.
傳
6월에
계평자季平子가
동야東野를
순행巡行하고
注+동야東野는 계씨季氏의 읍邑이다. 돌아오다가
국도國都에 이르지 못하고
병신일丙申日에
방房(地名)에서
졸卒하였다.
양호陽虎가
여번璵璠(寶玉)를
관棺에 넣으려 하니
注+여번璵璠는 아름다운 옥玉으로 임금이 차는 것이다. ,
중량회仲梁懷가
동의同意[與]하지 않으며
注+회懷도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다. 말하기를 “걸음걸이를 바꾸었으니
옥玉도 바꾸어야 한다.
注+소공昭公이 출분出奔하고 국내에 없을 때는 계손季孫이 임금의 일을 대행代行하여 여번璵璠을 차고서 종묘宗廟에 제사를 지냈지만, 지금은 정공定公이 즉위卽位하여 계손季孫이 신하의 자리로 돌아가서 임금의 걸음걸이를 고쳤으니, 당연히 여번璵璠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 하였다.
양호陽虎는 그를
축출逐出하려고
공산불뉴公山不狃에게
고告하자,
불뉴不狃가 말하기를 “저 사람이
주군主君(季平子를 이름)을 위해 그러는 것이니 그대가 원망할 게 뭐 있습니까?
注+불뉴不狃는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으로 비재費宰인 자설子洩이다. 주군主君을 위해 참례僭禮를 사용하고자 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장사葬事를 지낸 뒤에
환자桓子가
동야東野를
순행巡行하여
注+환자桓子는 의여意如의 아들 계손사季孫斯이다.비읍費邑에 이르렀다.
자설子洩(不狃)이 비費의 읍재邑宰로 교외郊外까지 나와 맞이해 위로하니, 환자桓子는 그에게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중량회仲梁懷를 위로하니
중량회仲梁懷는
경의敬意를 표하지 않았다.
注+회懷가 이때 환자桓子를 따라갔다. 자설子洩을 경시輕視하여 업신여긴 것이다.
자설子洩은 노하여
양호陽虎에게 “그대는
중량회仲梁懷를
축출逐出하십이오.
注+행行은 회懷를 축출逐出함이다. 하문下文에 양호陽虎가 환자桓子를 잡아 가둔 원인이다. ”라고 하였다.
傳
진秦나라
자포子蒲와
자호子虎가
병거兵車 5
백百승乘을 거느리고서
초楚나라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왔다.
注+오백승五百乘은 3만 7500명이다.
자포子蒲가 말하기를 “우리는
오군吳軍의 전술[道]을 알지 못한다.
注+도道는 법술法術(方法)과 같다. [부주]林: 나는 오군吳軍을 제압制壓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고 하고서
초인楚人에게 먼저
오인吳人과
전투戰鬪하게 하고서
직稷에서
초군楚軍과
회합會合하여
기沂에서
부개왕夫槩王의 군대를
대패大敗시켰다.
注+직稷과 기沂는 모두 초楚나라 땅이다.
오인吳人이
백거柏擧에서
위석薳射을 사로잡으니
注+위석薳射은 초楚나라 대부大夫이다., 그 아들이
분산奔散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注+분도奔徒는 도산逃散하는 초楚나라 군졸軍卒이다.자서子西의 군대로 가서
군상軍祥에서
오군吳軍을 패배시켰다.
注+초楚나라 땅이다.
傳
가을 7월에
자기子期와
자포子蒲가
당唐나라를
격멸擊滅하였다.
注+오군吳軍을 따라 초楚나라를 쳤기 때문이다.
傳
9월에
부개왕夫槩王이
오吳나라로 돌아가서 스스로 임금이 되어,
오왕吳王합려闔廬와
전쟁戰爭하다가
패배敗北하고서
注+스스로 오왕吳王이 되어 호號를 부개夫槩라 하였다.초楚나라로 달아나
당계씨堂谿氏가 되었다.
注+전문傳文은 최종最終의 결과結果를 말한 것이다.
오군吳軍이 옹서雍澨에서 초군楚軍을 패배시키자, 진군秦軍이 다시 오군吳軍을 패배시켰다.
오군吳君이
균麇에
주둔駐屯하니
注+균麇은 지명地名이다.,
자기子期가
균麇을 불태우려 하였다.
注+[부주]林: 불로써 오군吳軍을 공격하려 한 것이다.
그러자
자서子西가 말하기를 “그곳에
부형父兄과
친척親戚의
시골尸骨이 널려 있는데, 수습하지 않고 도리어[又] 불을 놓는다면 〈그
시골尸骨까지 함께 탈 것이니〉 안 될 일이오.
注+전년前年에 초인楚人이 오군吳軍과 전투戰鬪할 때 균중麇中에서 죽은 자가 많으니, 그 시신屍身까지 함께 태울 수 없다는 말이다. ”라고 반대하니,
자기子期가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이들이 만약 앎이 있다면 〈불을 놓아
오군吳軍을 물리쳐야 나라가 보존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注+불로 오군吳軍을 공격하여 초楚나라를 수복收復하면 제사祭祀가 끊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알 것이니〉 어찌 불태워지는 것을 꺼리겠습니까?”라고 하고서, 불을 지르고서 또
공격攻擊하니
오군吳軍이 패배하였다.
또
공서公壻의
계곡谿谷에서 전투하여
注+초楚나라 지명地名이다.오군吳軍이
대패大敗하니,
오자吳子는 이에
오吳나라로 돌아갔다.
〈
초楚나라
대부大夫〉
인여파闉輿罷를 포로로 잡았더니,
인여파闉輿罷가 먼저
오吳나라로 가기를 청하여 〈
오吳나라로 가다가〉 드디어 도망해
초楚나라로 돌아갔다.
注+여파輿罷는 초楚나라 대부大夫이다. 먼저 오吳나라로 가기를 청하여 가다가 도망해 돌아온 것이다. 오吳나라가 오직 초楚나라의 한 대부大夫만을 잡았을 뿐인데, 다시 그를 놓쳤기 때문에 승리勝利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섭공葉公제량諸梁의 아우
후장后臧이 그 어머니와 함께
오吳나라로 잡혀가 있었는데, 기다리지 않고 도망쳐 돌아오니
注+제량諸梁은 사마司馬심윤沈尹술戌의 아들 섭공葉公자고子高이다. 오군吳軍이 초楚나라에 침입侵入하였을 때 후장后臧의 어머니를 잡아갔는데, 초楚나라가 안정安定되자 후장后臧은 어머니를 버리고 혼자 도망쳐 돌아왔다. ,
섭공葉公은
종신終身토록 그 아우를 바른 눈으로 보지 않았다.
注+의롭지 못한 인간으로 여겨서이다.
傳
을해일乙亥日에
양호陽虎가
계환자季桓子 및
공보목백公父文伯을 잡아 가두고
注+문백文伯은 계환자季桓子의 종부형제從父兄弟(從兄弟)이다. 양호陽虎가 난亂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 두 사람이 따르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그러므로 잡아 가둔 것이다.,
중량회仲梁懷를
축출逐出하였다.
注+[부주]林: 중량회仲梁懷가 자기에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 10월
정해일丁亥日에
공하묘公何藐를 죽였다.
注+묘藐는 계씨季氏의 종족宗族이다.
기축일己丑日에
환자桓子와
직문稷門 안에서
맹약盟約하고
注+노성魯城의 남문南門이다. ,
경인일庚寅日에 많은[大] 사람과
저주詛呪하였다.
注+[부주]林: 저詛는 맹약盟約을 어기는 자는 응당 벌罰을 받을 것임을 이른다.
공부촉公父歜 및
진천秦遄을 축출하니, 이들은 모두
제齊나라로 도망갔다.
注+촉歜는 바로 문백文伯이고, 진천秦遄은 평자平子의 고서姑壻(姑母夫)이다. 전문傳文은 계씨季氏의 화란禍亂을 말한 것이다.
傳
초자楚子가
영도郢都로 들어갔다.
注+오군吳軍이 이미 돌아갔기 때문이다.
당초에 투신鬪辛이 오인吳人들이 궁실宮室을 다툰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듣건대 ‘겸양하지 않으면
화목和睦하지 못하고 화목하지 못하면
원정遠征할 수 없다.
注+[부주]林: 오래도록 전쟁戰爭할 수 없다는 말이다. ’고 하였다.
그런데
오인吳人이
초楚나라에 와서 서로 다투니 반드시
화란禍亂이 생길 것이요, 화란이 생기면 반드시 돌아갈 것이니, 어찌
초楚나라를
평정平定할 수 있겠는가?
注+[부주]林: 어찌 초楚나라 땅을 평정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
傳
초왕楚王이
수隨나라로 도망갈 때
성구成臼를 건너려 하였는데
注+강하江夏경릉현竟陵縣 서쪽에 구수臼水가 있는데, 요굴산聊屈山에서 발원發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한수漢水로 들어간다., 이때
남윤藍尹미亹가 자기의
처자妻子를 건너게 하려고
注+미亹는 초楚나라 대부大夫이다. [부주]林: 먼저 구수臼水로 가서 그 처자妻子를 건너게 한 것이다. 왕王에게 배[舟]를 주지 않았다.
초楚나라가 안정된 뒤에 미쳐
왕王이
미亹를 죽이려 하자
注+영寧은 안정安定이다. ,
자서子西가 말하기를 “
자상子常은 오직 옛
원한怨恨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 그를 본받으려 하십니까?”라고 하니,
왕王은 “좋은 말이다.”고 하고서
미亹를 원래의
직위職位로 회복시키고서
注+[부주]林: 남윤藍尹미亹를 전의 관직官職으로 복직復職시킨 것이다. “나는 이로써 지난날의 잘못을 기억하겠노라.
注+악惡은 과過(허물)이다. [부주]林: 나는 이로써 전일의 과오를 기억하겠다는 말이다.”고 하였다.
왕王이
투신鬪辛,
왕손유우王孫由于,
왕손어王孫圉,
종건鍾建,
투소鬪巢,
신포서申包胥,
왕손가王孫賈,
송목宋木,
투회鬪懷에게
상賞을 주려 하자
注+아홉 사람은 모두 왕王을 수종隨從한 큰 공功이 있는 자들이다. ,
자서子西가 “
투회鬪懷는
제외除外시키소서.
注+당초에 초왕楚王을 시해弑害하려고 모의謀議하였기 때문이다. [부주]林: 회懷는 〈수상자受賞者의 명단名單에서〉 빼버리고 상賞을 주지 말라는 말이다. ”라고 하니,
왕王이 말하기를 “큰
은덕恩德만을 생각하고 작은
원한怨恨은 덮어두는 것이 바른
도의道義이다.
注+마침내 그 형兄을 따라 왕王을 대난大難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니, 이것이 대덕大德이다. ”고 하였다.
신포서申包胥가 말하기를 “내가 〈진秦나라로 가서 원병援兵을 청한 것은〉 임금님을 위해서이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임금님께서 이미 안정安定을 찾으셨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더구나[且] 나는
자기子旗를 나무랐으니, 어찌 또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注+자기子旗는 만성연蔓成然이다. 평왕平王을 〈도와 임금이 되게 한〉 공덕功德이 있다 하여 욕구欲求가 끝이 없어서 평왕平王이 그를 죽였다. 이 일은 소공昭公 14년 전傳에 보인다. ”라고 하고서 드디어
상賞을 피해 도망하였다.
왕王이
계미季羋를 시집보내려 하자,
계미季羋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
여자女子는
장부丈夫(남자)를 멀리해야 하는데
注+[부주]林: 장부丈夫(남자)를 멀리하여 남녀男女의 분별을 존중尊重한다는 말이다. ,
종건鍾建이 나를 업은 일이 있습니다.”고 하니,
계미季羋를
종건鍾建의 아내로 주고서 그를
악윤樂尹으로 삼았다.
注+음악音樂을 맡은 대부大夫이다.
傳
초소왕楚昭王이
수隨나라에 있을 때,
자서子西는 〈
왕王이 계시는 것처럼
위장僞裝하여〉
왕王의 수레와
복장服裝을 만들고
비설脾洩에 나라를 세워
도로道路에 떠도는
군민軍民을 보호하다가
注+비설脾洩은 초楚나라 읍邑이다. 왕王을 잃었으니 국인國人이 궤산潰散할까 두려웠다. 그러므로 〈왕王이 계신 것처럼〉 위장僞裝하여 왕王의 거복車服을 만들고 비설脾洩에 나라를 세워서 도로道路에 떠도는 사람들을 보호해 안정시킨 것이다. 소왕昭王이 있는 곳을 안 뒤에는
소왕昭王을 찾아갔다.
소왕昭王이
유우由于를 보내어
균麇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注+균麇에 성城을 쌓은 것이다., 〈
유우由于가
축성築城을 끝내고 돌아와서〉
복명復命하자,
자서子西가 성의 높이와 두께를 물으니 알지 못하였다.
注+[부주]林: 축성築城을 마치고 초군楚君에게 복명復命할 때 자서子西가 ‘쌓은 성城의 높이와 두께가 몇 척尺이냐.’고 묻자, 유우由于는 그 척수尺數를 알지 못한 것이다.
자서子西가 말하기를 “능력이 없으면 당연히[如] 사양했어야 합니다.
注+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알았으면 당연히 사양하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이다.
성城의 높이와 두께도 모르니 크고 작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注+[부주]林: 성城을 쌓으면서 성城의 고후高厚와 소대小大의 척수尺數도 몰랐으니 다시 무슨 일을 알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부주]朱: 성城을 쌓으면서 성城의 고후高厚의 척수尺數를 몰랐으니 어찌 다시 성城의 대소大小를 알겠느냐는 말이다. ”라고 하니,
유우由于가 대답하기를 “능력이 없다고 굳이 사양하는데도
注+[부주]林: 나는 능력이 없다고 고사固辭하였다는 말이다. 당신이 나를 보냈습니다.
注+[부주]林: 자子는 자서子西를 이른다. 당신이 반드시 나를 보내고자 하였다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각각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왕王께서
운중雲中에서
도적盜賊을 만났을 때 내가 도적의 창을 받았는데 그때 입은 상처가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注+[부주]朱: 상처를 입은 자리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말이다. ”고 하고서 웃통을 벗어 그 등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런 일은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바이지만
비설脾洩의 일은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注+전문傳文은 소왕昭王이 나라를 되찾은 것은 현신賢臣이 있었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고 하였다.
傳
진晉나라
사앙士鞅이
선우鮮虞를 포위하였으니, 이는
관호觀虎의
패배敗北를 보복하기 위함이었다.
注+노정공魯定公 3년에 선우鮮虞가 진晉나라 관호觀虎를 포로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