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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7)

춘추좌씨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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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五年春王三月辛亥朔 日有食之注+無傳하다
[經]夏 歸粟于蔡注+蔡爲楚所圍 飢乏 故魯歸之粟하다
[經]於越入吳注+於 發聲也 [附注] 林曰 向曰越人 今曰於越 復從其舊號也 越未有聞也 昭定之春秋 吳楚爭而後 越入中國 昭五年會于瑣也 而亟稱人 後三十年而入吳 不復稱人矣 晉楚之初 春秋未以敵言之 戰于邲也 則楚稱子矣 吳楚之初 春秋未以敵言之 戰于柏擧也 則吳稱子矣 至於吳越 終春秋 不以敵言之也 是故越入吳書 吳入越不書하다
[經]六月丙申 季孫意如卒하다
[經]秋七月壬子 叔孫不敢卒注+無傳하다
[經]冬 晉士鞅帥師圍鮮虞하다
[傳]五年春 王人殺子朝于楚注+因楚亂也 終하다
[傳]夏 歸粟于蔡하야 注+亟 急也 [附注] 林曰 以周濟蔡人之亟難 矜哀蔡人之無資糧니라
[傳]越入吳하니 吳在楚也注+[附注] 林曰 乘吳之在楚而入其國也
[傳]六月 季平子行東野注+東野 季氏邑하고타가 未至하고 丙申 卒于房하다
陽虎將以璵璠斂注+璵璠 美玉 君所佩한대 仲梁懷弗與注+懷 亦季氏家臣注+昭公之出 季孫行君事 佩璵璠 祭宗廟 今定公立 復臣位 改君步 則亦當去璵璠이라
陽虎欲逐之하야 告公山不狃한대 不狃曰 彼爲君也 子何怨焉注+不狃 季氏臣費宰子洩也 爲君不欲使僭
旣葬 桓子行東野注+桓子 意如子 季孫斯하야 及費하다
子洩爲費宰하야 逆勞於郊하니 桓子敬之하다
勞仲梁懷하니 仲梁懷弗敬注+懷 時從桓子行 輕慢子洩하다
子洩怒하야 謂陽虎호되 子行之乎注+行 逐懷也 爲下陽虎囚桓子起ᄂ저
[傳]申包胥以秦師至하다
秦子蒲子虎帥車五百乘以救楚注+五百乘 三萬七千五百人하다
子蒲曰 注+道 猶法術也 [附注] 林曰 言我未知制吳之法術라하고 使楚人先與吳人戰하고 而自稷會之하야 大敗夫槩王于沂注+稷沂 皆楚地하다
吳人獲薳於柏擧注+薳射 楚大夫하니 其子帥奔徒注+奔徒 楚散卒以從子西하야 敗吳師於軍祥注+楚地하다
秋七月 子期子蒲滅唐注+從吳伐楚故하다
九月 夫槩王歸하야 自立也하야 以與王戰而敗注+自立爲吳王 號夫槩하고 奔楚하야 爲堂谿氏注+傳終言之하다
吳師敗楚師于雍澨러니 秦師又敗吳師하다
吳師居麇注+麇 地名하니 子期將焚之注+[附注] 林曰 將以火攻吳師한대
子西曰 父兄親이어늘 不能收하고 又焚之 不可注+前年楚人與吳戰 多死麇中 言不可幷焚하다 子期曰 國亡矣
死者若有知也 可以歆舊祀注+言焚吳復楚 則祭祀不廢리니 豈憚焚之리오 焚之而又戰하니 吳師敗하다
又戰于公壻之谿注+楚地名하야 吳師大敗하니 吳子乃歸하다
囚闉輿罷러니 闉輿罷請先하야 遂逃歸注+輿罷 楚大夫 請先至吳而逃歸 言吳唯得楚一大夫 復失之 所以不克하다
葉公諸梁之弟后臧從其母於吳러니 注+諸梁 司馬沈尹戌之子 葉公子高也 吳入楚 獲后臧之母 楚定 臧棄母而歸한대 葉公終不正視注+不義之하다
[傳]乙亥 陽虎囚季桓子及公父文伯注+文伯 季桓子從父昆弟也 陽虎欲爲亂 恐二子不從 故囚之하고 而逐仲梁懷注+[附注] 林曰 以其不順己故하다
冬十月丁亥 殺公何藐注+藐 季氏族하다
己丑 盟桓子于稷門之內注+魯南城門하고 庚寅注+[附注] 林曰 詛 謂違盟者當受罰하다
逐公父歜及秦遄하니 皆奔齊注+歜 卽文伯也 秦遄 平子姑壻也 傳言季氏之亂하다
[傳]楚子入于郢注+吳師已歸하다
初鬪辛聞吳人之爭宮也하고
吾聞之컨대 不讓則不和하고 不和 不可以遠征注+[附注] 林曰 不能久遠征役이라하여늘
吳爭於楚하니 必有亂이오 有亂이면 則必歸리니 焉能定楚注+[附注] 林曰 安能定楚之地리오
王之奔隨也 將涉於成臼注+江夏 竟陵縣西有臼水 出聊屈山 西南入漢러니 藍尹亹涉其帑注+亹 楚大夫 [附注] 林曰 先在臼水 涉其妻子하고 不與王舟하다
及寧하야 王欲殺之注+寧 安定也한대 子西曰 子常唯思舊怨以敗
君何效焉이리오 王曰 善타하고 使復其所注+[附注] 林曰 使藍尹亹 復其所職하야 吾以志前惡注+惡 過也 [附注] 林曰 我用此以識前日之過이라하다
王賞鬪辛王孫由于王孫圉鍾建鬪巢申包胥王孫賈宋木鬪懷注+九子皆從王有大功者한대 子西曰 請舍懷也注+ [附注] 林曰 請棄懷勿賞하소서 王曰 大德滅小怨 道也注+ 是大德
申包胥曰 吾爲君也 非爲身也
君旣定矣 又何求리오
하니 其又爲諸注+子旗 蔓成然也 以有德於平王 求欲無厭 平王殺之 在昭十四年아하고 遂逃賞하다
王將嫁季羋하니 季羋辭曰 所以爲女子 遠丈夫也注+[附注] 林曰 遠丈夫以重男女之別也어늘 鍾建負我矣라하니 以妻鍾建하야 以爲樂尹注+司樂大夫하다
王之在隨也 注+脾洩 楚邑也 失王 恐國人潰散 故僞爲王車服 立國脾洩 以保安道路人이라가 聞王所在하고 而後從王하다
王使由于城麇注+於麇築城러니 復命이어늘 子西問高厚焉하니 弗知注+[附注] 林曰 城畢反命於君 子西問築城高厚幾許 由于不知其數하다
子西曰 不能이면 如辭注+言自知不能 當辭勿行니라
城不知高厚하니 小大何知注+[附注] 林曰 築城尙不知其高厚小大之數 當復與知何事 [附注] 朱曰 築城而不知其高厚丈尺 豈復知城之小大乎리오 對曰 固辭不能注+[附注] 林曰 言我固嘗辭不能矣이로되 子使余也注+[附注] 林曰 子 謂子西 必欲使余往也니라
人各有能有不能이라
王遇盜於雲中 余受其戈하니 其所猶在注+[附注] 朱曰 遭傷之處見存라하고 袒而視之背曰 此余所能也어니와 脾洩之事 余亦弗能也注+傳言昭王所以復國 有賢臣也
[傳]晉士鞅圍鮮虞하야 報觀虎之敗也注+三年 鮮虞獲晉觀虎


5년 봄 주왕周王 3월 초하루 신해일辛亥日일식日食이 있었다.注+이 없다.
여름에 나라에 양곡糧穀을 보내주었다.注+나라가 초군楚軍에게 포위되어 굶주렸기 때문에 나라가 양곡糧穀을 보내준 것이다.
월인越人나라로 쳐들어갔다.注+발어성發語聲이다. [부주]林: 전에는 ‘월인越人’이라 하고서 지금은 ‘어월於越’이라 한 것은 다시 〈나라의〉 구호舊號를 따른 것이다. 이는 나라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공昭公정공定公의 《춘추春秋》에는 나라와 나라가 패권霸權을 다툰 뒤에 월인越人중국中國으로 들어왔다. 소공昭公 5년에 있었던 회합會合나라 상수과常壽過를 비로소 에 기재하고 누차 ‘’으로 칭하였는데, 그로부터 30년 뒤인 〈정공定公 5년에〉 나라로 쳐들어간 것을 기록함에는 다시 ‘’으로 칭하지 않았다. 나라와 나라가 패권霸權을 다툰 초기에는 《춘추春秋》에 를 대등[敵]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의 전쟁에는 를 ‘’로 칭하였고, 나라와 나라가 패권을 다툰 초기에는 《춘추春秋》에 를 대등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백거柏擧의 전쟁에는 를 ‘’로 칭하였다. 나라와 나라에 대해서는 《춘추春秋》가 끝날 때까지 대등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나라로 쳐들어간 것은 기록하고 나라가 나라로 쳐들어간 것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6월 병신일丙申日계손의여季孫意如하였다.
가을 7월 임자일壬子日숙손불감叔孫不敢하였다.注+이 없다.
겨울에 나라 사앙士鞅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선우鮮虞를 포위하였다.
5년 봄에 왕인王人(周나라 왕실王室관원官員)이 나라에서 자조子朝를 죽였다.注+나라가 혼란한 틈을 이용한 것이다. 끝내 민마보閔馬父(閔子馬)의 말처럼 된 것이다.
여름에 나라에 양곡糧穀을 보내어 위급危急[亟]을 구제救濟[周]하였으니, 이는 양식糧食[資]이 없는 것을 가엾게 여겨서이다.注+이다. [부주]林: 채인蔡人급난急難을 구제하고 양식糧食이 없는 채인蔡人을 가엾게 여긴 것이다.
월군越軍나라로 쳐들어갔으니, 이는 오군吳軍나라에 들어가 있는 기회를 이용한 것이다.注+[부주]林: 오군吳軍나라에 가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나라로 쳐들어간 것이다.
6월에 계평자季平子동야東野순행巡行하고注+동야東野계씨季氏이다. 돌아오다가 국도國都에 이르지 못하고 병신일丙申日(地名)에서 하였다.
양호陽虎여번璵璠(寶玉)를 에 넣으려 하니注+여번璵璠는 아름다운 으로 임금이 차는 것이다. , 중량회仲梁懷동의同意[與]하지 않으며注+계씨季氏가신家臣이다. 말하기를 “걸음걸이를 바꾸었으니 도 바꾸어야 한다.注+소공昭公출분出奔하고 국내에 없을 때는 계손季孫이 임금의 일을 대행代行하여 여번璵璠을 차고서 종묘宗廟에 제사를 지냈지만, 지금은 정공定公즉위卽位하여 계손季孫이 신하의 자리로 돌아가서 임금의 걸음걸이를 고쳤으니, 당연히 여번璵璠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 하였다.
양호陽虎는 그를 축출逐出하려고 공산불뉴公山不狃에게 하자, 불뉴不狃가 말하기를 “저 사람이 주군主君(季平子를 이름)을 위해 그러는 것이니 그대가 원망할 게 뭐 있습니까?注+불뉴不狃계씨季氏가신家臣으로 비재費宰자설子洩이다. 주군主君을 위해 참례僭禮를 사용하고자 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장사葬事를 지낸 뒤에 환자桓子동야東野순행巡行하여注+환자桓子의여意如의 아들 계손사季孫斯이다.비읍費邑에 이르렀다.
자설子洩(不狃)이 읍재邑宰교외郊外까지 나와 맞이해 위로하니, 환자桓子는 그에게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중량회仲梁懷를 위로하니 중량회仲梁懷경의敬意를 표하지 않았다.注+가 이때 환자桓子를 따라갔다. 자설子洩경시輕視하여 업신여긴 것이다.
자설子洩은 노하여 양호陽虎에게 “그대는 중량회仲梁懷축출逐出하십이오.注+축출逐出함이다. 하문下文양호陽虎환자桓子를 잡아 가둔 원인이다. ”라고 하였다.
신포서申包胥진군秦軍을 거느리고 왔다.
나라 자포子蒲자호子虎병거兵車 5을 거느리고서 나라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왔다.注+오백승五百乘은 3만 7500명이다.
자포子蒲가 말하기를 “우리는 오군吳軍의 전술[道]을 알지 못한다.注+법술法術(方法)과 같다. [부주]林: 나는 오군吳軍제압制壓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고 하고서 초인楚人에게 먼저 오인吳人전투戰鬪하게 하고서 에서 초군楚軍회합會合하여 에서 부개왕夫槩王의 군대를 대패大敗시켰다.注+는 모두 나라 땅이다.
오인吳人백거柏擧에서 위석薳射을 사로잡으니注+위석薳射나라 대부大夫이다., 그 아들이 분산奔散하는 군대를 거느리고注+분도奔徒도산逃散하는 나라 군졸軍卒이다.자서子西의 군대로 가서 군상軍祥에서 오군吳軍을 패배시켰다.注+나라 땅이다.
가을 7월에 자기子期자포子蒲나라를 격멸擊滅하였다.注+오군吳軍을 따라 나라를 쳤기 때문이다.
9월에 부개왕夫槩王나라로 돌아가서 스스로 임금이 되어, 오왕吳王합려闔廬전쟁戰爭하다가 패배敗北하고서注+스스로 오왕吳王이 되어 부개夫槩라 하였다.나라로 달아나 당계씨堂谿氏가 되었다.注+전문傳文최종最終결과結果를 말한 것이다.
오군吳軍옹서雍澨에서 초군楚軍을 패배시키자, 진군秦軍이 다시 오군吳軍을 패배시켰다.
오군吳君주둔駐屯하니注+지명地名이다., 자기子期을 불태우려 하였다.注+[부주]林: 불로써 오군吳軍을 공격하려 한 것이다.
그러자 자서子西가 말하기를 “그곳에 부형父兄친척親戚시골尸骨이 널려 있는데, 수습하지 않고 도리어[又] 불을 놓는다면 〈그 시골尸骨까지 함께 탈 것이니〉 안 될 일이오.注+전년前年초인楚人오군吳軍전투戰鬪할 때 균중麇中에서 죽은 자가 많으니, 그 시신屍身까지 함께 태울 수 없다는 말이다. ”라고 반대하니, 자기子期가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이들이 만약 앎이 있다면 〈불을 놓아 오군吳軍을 물리쳐야 나라가 보존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注+불로 오군吳軍을 공격하여 나라를 수복收復하면 제사祭祀가 끊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알 것이니〉 어찌 불태워지는 것을 꺼리겠습니까?”라고 하고서, 불을 지르고서 또 공격攻擊하니 오군吳軍이 패배하였다.
공서公壻계곡谿谷에서 전투하여注+나라 지명地名이다.오군吳軍대패大敗하니, 오자吳子는 이에 나라로 돌아갔다.
나라 대부大夫인여파闉輿罷를 포로로 잡았더니, 인여파闉輿罷가 먼저 나라로 가기를 청하여 〈나라로 가다가〉 드디어 도망해 나라로 돌아갔다.注+여파輿罷나라 대부大夫이다. 먼저 나라로 가기를 청하여 가다가 도망해 돌아온 것이다. 나라가 오직 나라의 한 대부大夫만을 잡았을 뿐인데, 다시 그를 놓쳤기 때문에 승리勝利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섭공葉公제량諸梁의 아우 후장后臧이 그 어머니와 함께 나라로 잡혀가 있었는데, 기다리지 않고 도망쳐 돌아오니注+제량諸梁사마司馬심윤沈尹의 아들 섭공葉公자고子高이다. 오군吳軍나라에 침입侵入하였을 때 후장后臧의 어머니를 잡아갔는데, 나라가 안정安定되자 후장后臧은 어머니를 버리고 혼자 도망쳐 돌아왔다. , 섭공葉公종신終身토록 그 아우를 바른 눈으로 보지 않았다.注+의롭지 못한 인간으로 여겨서이다.
을해일乙亥日양호陽虎계환자季桓子공보목백公父文伯을 잡아 가두고注+문백文伯계환자季桓子종부형제從父兄弟(從兄弟)이다. 양호陽虎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 두 사람이 따르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그러므로 잡아 가둔 것이다., 중량회仲梁懷축출逐出하였다.注+[부주]林: 중량회仲梁懷가 자기에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 10월 정해일丁亥日공하묘公何藐를 죽였다.注+계씨季氏종족宗族이다.
기축일己丑日환자桓子직문稷門 안에서 맹약盟約하고注+노성魯城남문南門이다. , 경인일庚寅日에 많은[大] 사람과 저주詛呪하였다.注+[부주]林: 맹약盟約을 어기는 자는 응당 을 받을 것임을 이른다.
공부촉公父歜진천秦遄을 축출하니, 이들은 모두 나라로 도망갔다.注+는 바로 문백文伯이고, 진천秦遄평자平子고서姑壻(姑母夫)이다. 전문傳文계씨季氏화란禍亂을 말한 것이다.
초자楚子영도郢都로 들어갔다.注+오군吳軍이 이미 돌아갔기 때문이다.
당초에 투신鬪辛오인吳人들이 궁실宮室을 다툰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듣건대 ‘겸양하지 않으면 화목和睦하지 못하고 화목하지 못하면 원정遠征할 수 없다.注+[부주]林: 오래도록 전쟁戰爭할 수 없다는 말이다. ’고 하였다.
그런데 오인吳人나라에 와서 서로 다투니 반드시 화란禍亂이 생길 것이요, 화란이 생기면 반드시 돌아갈 것이니, 어찌 나라를 평정平定할 수 있겠는가?注+[부주]林: 어찌 나라 땅을 평정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초왕楚王나라로 도망갈 때 성구成臼를 건너려 하였는데注+강하江夏경릉현竟陵縣 서쪽에 구수臼水가 있는데, 요굴산聊屈山에서 발원發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한수漢水로 들어간다., 이때 남윤藍尹가 자기의 처자妻子를 건너게 하려고注+나라 대부大夫이다. [부주]林: 먼저 구수臼水로 가서 그 처자妻子를 건너게 한 것이다. 에게 배[舟]를 주지 않았다.
나라가 안정된 뒤에 미쳐 를 죽이려 하자注+안정安定이다. , 자서子西가 말하기를 “자상子常은 오직 옛 원한怨恨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 그를 본받으려 하십니까?”라고 하니, 은 “좋은 말이다.”고 하고서 를 원래의 직위職位로 회복시키고서注+[부주]林: 남윤藍尹를 전의 관직官職으로 복직復職시킨 것이다. “나는 이로써 지난날의 잘못을 기억하겠노라.注+(허물)이다. [부주]林: 나는 이로써 전일의 과오를 기억하겠다는 말이다.”고 하였다.
투신鬪辛, 왕손유우王孫由于, 왕손어王孫圉, 종건鍾建, 투소鬪巢, 신포서申包胥, 왕손가王孫賈, 송목宋木, 투회鬪懷에게 을 주려 하자注+아홉 사람은 모두 수종隨從한 큰 이 있는 자들이다. , 자서子西가 “투회鬪懷제외除外시키소서.注+당초에 초왕楚王시해弑害하려고 모의謀議하였기 때문이다. [부주]林: 는 〈수상자受賞者명단名單에서〉 빼버리고 을 주지 말라는 말이다. ”라고 하니, 이 말하기를 “큰 은덕恩德만을 생각하고 작은 원한怨恨은 덮어두는 것이 바른 도의道義이다.注+마침내 그 을 따라 대난大難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니, 이것이 대덕大德이다. ”고 하였다.
신포서申包胥가 말하기를 “내가 〈나라로 가서 원병援兵을 청한 것은〉 임금님을 위해서이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임금님께서 이미 안정安定을 찾으셨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더구나[且] 나는 자기子旗를 나무랐으니, 어찌 또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注+자기子旗만성연蔓成然이다. 평왕平王을 〈도와 임금이 되게 한〉 공덕功德이 있다 하여 욕구欲求가 끝이 없어서 평왕平王이 그를 죽였다. 이 일은 소공昭公 14년 에 보인다. ”라고 하고서 드디어 을 피해 도망하였다.
계미季羋를 시집보내려 하자, 계미季羋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여자女子장부丈夫(남자)를 멀리해야 하는데注+[부주]林: 장부丈夫(남자)를 멀리하여 남녀男女의 분별을 존중尊重한다는 말이다. , 종건鍾建이 나를 업은 일이 있습니다.”고 하니, 계미季羋종건鍾建의 아내로 주고서 그를 악윤樂尹으로 삼았다.注+음악音樂을 맡은 대부大夫이다.
초소왕楚昭王나라에 있을 때, 자서子西는 〈이 계시는 것처럼 위장僞裝하여〉 의 수레와 복장服裝을 만들고 비설脾洩에 나라를 세워 도로道路에 떠도는 군민軍民을 보호하다가注+비설脾洩나라 이다. 을 잃었으니 국인國人궤산潰散할까 두려웠다. 그러므로 〈이 계신 것처럼〉 위장僞裝하여 거복車服을 만들고 비설脾洩에 나라를 세워서 도로道路에 떠도는 사람들을 보호해 안정시킨 것이다. 소왕昭王이 있는 곳을 안 뒤에는 소왕昭王을 찾아갔다.
소왕昭王유우由于를 보내어 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注+을 쌓은 것이다., 〈유우由于축성築城을 끝내고 돌아와서〉 복명復命하자, 자서子西가 성의 높이와 두께를 물으니 알지 못하였다.注+[부주]林: 축성築城을 마치고 초군楚君에게 복명復命할 때 자서子西가 ‘쌓은 의 높이와 두께가 몇 이냐.’고 묻자, 유우由于는 그 척수尺數를 알지 못한 것이다.
자서子西가 말하기를 “능력이 없으면 당연히[如] 사양했어야 합니다.注+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알았으면 당연히 사양하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이다.
의 높이와 두께도 모르니 크고 작음을 어찌 알겠습니까?注+[부주]林: 을 쌓으면서 고후高厚소대小大척수尺數도 몰랐으니 다시 무슨 일을 알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부주]朱: 을 쌓으면서 고후高厚척수尺數를 몰랐으니 어찌 다시 대소大小를 알겠느냐는 말이다. ”라고 하니, 유우由于가 대답하기를 “능력이 없다고 굳이 사양하는데도注+[부주]林: 나는 능력이 없다고 고사固辭하였다는 말이다. 당신이 나를 보냈습니다.注+[부주]林: 자서子西를 이른다. 당신이 반드시 나를 보내고자 하였다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각각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께서 운중雲中에서 도적盜賊을 만났을 때 내가 도적의 창을 받았는데 그때 입은 상처가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注+[부주]朱: 상처를 입은 자리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말이다. ”고 하고서 웃통을 벗어 그 등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런 일은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바이지만 비설脾洩의 일은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注+전문傳文소왕昭王이 나라를 되찾은 것은 현신賢臣이 있었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고 하였다.
나라 사앙士鞅선우鮮虞를 포위하였으니, 이는 관호觀虎패배敗北를 보복하기 위함이었다.注+노정공魯定公 3년에 선우鮮虞나라 관호觀虎를 포로로 잡았다.


역주
역주1 越常壽過始見於經 : 昭公 5년 經에 常壽過를 ‘越人’으로 칭한 것을 이른다.
역주2 閔馬父之言 : 昭公 22년 傳에 “子朝는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고 한 閔馬父의 말을 이른다.
역주3 以周亟 矜無資 : 糧穀을 보내주어 危急한 처지에 있는 蔡人을 救濟한 것은 糧食이 없는 蔡人을 딱하게 여겨서라는 말이지, 林氏의 말처럼 危急한 처지에 있는 蔡人을 救濟하고 糧食이 없는 蔡人을 가엾게 여겼다는 말이 아니다.
역주4 改步改土[玉] : 저본에는 改玉의 ‘玉’자가 ‘土’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改步改玉은 步幅을 바꾸었으니 佩玉도 바꾸어야 한다는 말로 임금의 일을 代行하는 자리에서 물러나 신하의 지위로 돌아왔으니 임금의 佩玉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禮記》 〈玉藻〉에 “임금이 尸와 함께 걸을 때에 임금은 接武(尸가 디딘 발자국의 반을 밟고 감)하고, 大夫는 繼武(尸가 디딘 발자국의 끝을 밟고 감)하고, 士는 中武(尸가 디딘 발자국에서 발 하나의 간격을 두고 따라감)한다.”고 하였으니, 각각 步幅에 廣狹이 다르다. 보폭의 廣狹을 바꾸었으면 당연히 佩玉의 등급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역주5 我未知吳道 : 秦軍은 吳軍과 交戰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吳軍의 戰法을 모른다는 말이다. 《左氏會箋》
역주6 : 석
역주7 暴骨 : 收拾하지 않아 草野에 버려진 채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는 屍身을 이른다.
역주8 不待而歸 : 그 어머니가 釋放될 때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도망쳐 돌아온 것이다.
역주9 : 盟約을 어기는 자에게 罰을 내리라고 神에게 祈求함이다.
역주10 以初謀弑王也 : 작년에 楚昭王이 鄖으로 도망갔을 때 鄖公辛의 아우 懷가 그 兄에게 昭王을 죽이자고 한 일을 이른다.
역주11 終從其兄 免王大難 : 懷가 마침내 그 兄과 함께 昭王을 모시고 隨나라로 도망가서 昭王을 禍難에서 벗어나게 하였다는 말인데, 傳文에는 ‘鬪辛이 그 아우 巢와 함께 昭王을 모시고 隨나라로 도망갔다.’고 하였고, 懷도 함께 모시고 갔다고 말하지 않았다.
역주12 吾尤子旗 : 申包胥가 子旗를 나무란 일은 傳文에 보이지 않는다.
역주13 子西爲王輿服以保路 國于脾洩 : 杜注에 따라 以保路와 國于脾洩를 倒置시켜 번역하였다. 王의 所在를 알 수 없으니, 人心이 動搖할 것을 憂慮한 子西는 임금이 있는 것처럼 僞裝하여 王의 車服을 만들고 脾洩에 政府를 세워서 道路人(떠도는 사람들)을 보호해 안정시켰다는 뜻이다.

춘추좌씨전(7)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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