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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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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九年春 齊人 殺無知注+無知弑君而立 未列於會 故不書爵 하다
[經]公及齊大夫盟于蔇注+齊亂無君 故大夫得敵於公 蓋欲迎子糾也 來者非一人 故不稱名 蔇 魯地 琅邪繒縣北 有蔇亭하다
[經]夏 公伐齊納子糾러니 齊小白入于齊注+二公子 有黨 故雖盟而迎子糾 當須伐乃得入 又出在小白之後 小白稱入 從國逆之文 本無位하다
[經]秋七月丁酉 葬齊襄公注+無傳 九月乃葬 亂故하다
[經]八月庚申 及齊師戰于乾時라가 我師敗績注+小白旣定 而公猶不退師 歷時而戰 戰遂大敗 不稱公戰 公敗諱之 乾時 齊地 時水 在樂安界 枝流旱則竭涸 故曰乾時하다
[經]九月 齊人取子糾殺之注+公子爲賊亂則書 齊實告殺 而書齊取殺者 時史惡齊志在譎以求管仲 非不忍其親 故極言之하다
[經]冬 浚洙注+無傳 洙水 在魯城北 下合泗 浚深之 爲齊備하다
[傳]九年春 雍廩殺無知하다
[傳]公及齊大夫盟于蔇하니 齊無君也ᄅ새라
[傳]夏 公伐齊納子糾러니 桓公自莒先入注+桓公 小白하다
[傳]秋 師及齊師戰于乾時타가 我師敗績하다
公喪戎路하고 傳乘而歸注+戎路 兵車 傳乘 乘他車하다
秦子梁子 以公旗辟于下道注+二子 公御及戎右也 以誤齊師 [附注] 林曰 公旣敗師 失其戎車 恐爲齊禽 故二子以公旗 辟于下道 以誤齊師 是以皆止注+止 獲也하다
鮑叔帥師來言曰 子糾 親也 請君討之注+鮑叔乘勝而進軍 志在生得管仲 故託不忍之辭
[附注] 林曰 鮑叔 卽叔牙
하고 管召 讎也 請受而甘心焉注+管仲射桓公 故曰讐 甘心 言欲快意戮殺之하노라
乃殺子糾于生竇注+生竇 魯地하니 召忽死之하고 管仲請囚하다
鮑叔受之하야 及堂阜而稅之注+堂阜 齊地 東莞蒙陰縣西北 有夷吾亭 或曰 鮑叔解夷吾縛於此 因以爲名 [附注] 朱曰 召忽 子糾之傅 故徇其主而死 管仲有輔佐桓公之志 故請囚하다
歸而以告曰 管夷吾治於高傒注+高傒 齊卿高敬仲也 言管仲治理政事之才 多於敬仲하니 使相可也니이다 公從之하다


장공 9년 봄에 제인齊人공손公孫무지無知를 죽였다.注+무지無知가 임금을 시해弑害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으나, 제후諸侯회맹會盟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위爵位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성공成公 16년에 보인다.
노장공魯莊公나라 대부와 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나라에 난리가 일어나 임금이 없기 때문에 대부大夫장공莊公과 상대한 것이니, 아마도 자규子糾를 임금으로 맞이하고자 하여 온 것인 듯하다. 온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을 칭하지 않은 것이다. 나라 땅이다. 낭야琅邪증현繒縣 북쪽에 기정蔇亭이 있다.
여름에 장공莊公나라를 토벌하여 자규子糾의 임금으로 들여보내고자 하였는데, 소백小白이 먼저 나라로 들어갔다.注+공자公子에게 각각 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결맹結盟하여 자규子糾를 임금으로 맞이하기로 하였으나 공벌攻伐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노군魯軍에 갔을 때는 이미 소백小白이 들어간 뒤였다. 소백小白이 ‘들어갔다[入] ’고 칭하여 국역國逆(本國에서 맞아들임)의 문체文體를 사용한 것은 본래 가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가 있었다면 ‘복귀復歸’라고 기록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가을 7월 정유일에 제양공齊襄公을 장사 지냈다.注+이 없다. 아홉 달 만에 장사 지낸 것은 난리 때문이었다.
8월 경신일에 나라 군대가 나라 군대와 건시乾時에서 전투하다가 아군我軍대패大敗하였다.注+소백小白이 이미 임금으로 정해졌는데도 장공莊公퇴군退軍하지 않고 오랫동안 전쟁戰爭하다가 마침내 그 전쟁에서 대패大敗하였다. 에 “장공莊公전쟁戰爭하였다.”고 칭하지 않은 것은 장공莊公패배敗北를 숨긴 것이다. 건시乾時나라 땅이다. 시수時水낙안樂安의 경계에 있는데, 지류支流에 가뭄이 들면 물이 마르기 때문에 ‘건시乾時’라고 한 것이다.
9월에 제인齊人자규子糾를 잡아 죽였다.注+공자公子이 되어 난리를 일으키면 기록한다. 나라가 실로 ‘죽였다[殺] ’고 통고通告하였는데, ‘나라가 잡아 죽였다.’고 기록한 것은, 당시 사관史官나라의 뜻이 속임수를 써서 관중管仲을 데려가려는 데 있고, 그 친족親族을 차마 죽이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님을 미워하였기 때문에 솔직하게 말하여 경계의 뜻을 담은 것이다.
겨울에 수수洙水준설浚渫하였다.注+이 없다 수수洙水노성魯城 북쪽에 있는데, 흘러가다가 사수泗水합류合流한다. 깊이 준설浚渫한 것은 나라의 침공侵攻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9년 봄에 옹름雍廩무지無知를 죽였다.
장공莊公나라 대부와 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이는 나라에 임금이 없기 때문이다.
여름에 장공莊公나라를 토벌하여 자규子糾나라의 임금으로 들여보내려 하였더니, 환공桓公거국莒國에서 먼저 나라로 들어갔다.注+환공桓公소백小白이다.
가을에 나라 군대가 나라 군대와 건시乾時에서 전투하다가 나라 군대가 대패大敗하였다.
장공莊公융로戎路를 잃고서 다른 수레를 타고 돌아왔다.注+융로戎路병거兵車이다. 전승傳乘은 다른 수레를 탄 것이다.
진자秦子양자梁子장공莊公를 가지고 하도下道(사잇길)로 피해 제군齊軍을 유인하였으므로注+두 사람은 장공莊公융우戎右이다. 제군齊軍현혹眩惑시킨 것이다.[부주]林: 장공莊公이 이미 전쟁에 패배敗北하고 그 수레까지 잃었으니, 혹시 나라에 잡힐까 두려웠기 때문에 두 사람이 장공莊公를 가지고 하도下道로 피하여 제군齊軍을 그르친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나라의 포로가 되었다.注+는 잡히는 것이다.
포숙鮑叔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자규子糾친족親族이니 노군魯君께서 그를 죽이고,注+포숙鮑叔승세勝勢를 타고 진군進軍한 것은 그 뜻이 관중管仲을 산 채로 데려가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친족親族자규子糾을 차마 직접 죽일 수 없다는 말로 핑계 댄 것이다.[부주]林: 포숙鮑叔은 바로 숙아叔牙이다. 관중管仲소홀召忽은 원수이니 우리가 인수引受해다가 속시원히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다.注+관중管仲제환공齊桓公에게 활을 쏜 일이 있기 때문에 원수라고 한 것이다. 감심甘心은 통쾌하게 죽이는 것이다.
이에 생두生竇에서 자규子糾를 죽이니,注+생두生竇나라 땅이다. 소홀召忽자규子糾를 위해 죽고 관중管仲나라의 포로捕虜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포숙鮑叔이 그를 인수引受해 가다가 당부堂阜에 이르러 그의 결박結縛을 풀어주었다.注+당부堂阜나라 땅이다. 동완東莞몽음현蒙陰縣 서북에 이오정夷吾亭이 있는데, 혹자或者는 “포숙鮑叔이 여기에서 이오夷吾결박結縛를 풀어주었기 때문에 ‘이오夷吾’라고 이름한 것이다.”고 하였다.[부주]朱: 소홀召忽자규子糾의 스승이다. 그러므로 그 주인을 따라 죽은 것이다. 관중管仲제환공齊桓公보좌輔佐할 뜻이 있었기 때문에 포로가 되기를 요청한 것이다.
포숙이 돌아가서 제환공齊桓公에게 고하기를 “관이오管夷吾치국治國의 재능이 고혜高傒보다 뛰어나니,注+고혜高傒나라의 고경중高敬仲이다. 관중管仲정사政事를 다스리는 재주가 경중敬仲보다 뛰어나다는 말이다. 그를 승상丞相으로 삼으소서.” 하니, 환공桓公이 그의 말을 따랐다.


역주
역주1 例在成十六年 : 成公 16년 傳의 “若有罪則君列諸會矣”라 한 杜注에 “諸侯가 비록 임금을 弑害하고 簒奪한 罪가 있다 하더라도 侯伯들이 이미 그와 會見하였으면 더 이상 討罪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역주2 : 대본에는 ‘名’으로 되어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各’으로 바로잡았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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