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무인일戊寅日에 송군宋軍이 제군齊軍과 언甗에서 전쟁戰爭하였는데 제군齊軍이 대패大敗하였다.注+무휴無虧가 죽자, 조曹나라‧위衛나라‧주邾나라는 먼저 떠났고, 노魯나라도 구원救援을 포기抛棄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송군宋軍이 홀로 제군齊軍과 전쟁戰爭한 것이다. 송공宋公을 칭하지 않은 것은 송공宋公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게 무너지는 것을 ‘패적敗績’이라 한다. 언甗는 제齊나라 땅이다.
적인狄人이 제齊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注+전傳이 없다. 네 공자公子의 무리를 구원救援한 것이다.
가을 8월 정해일丁亥日에 제환공齊桓公을 장사 지냈다. 注+11개월 만에 장사 지낸 것은 난리 때문이었다. 8월에는 정해일丁亥日이 없으니, 일진日辰이 틀린 것이다.
겨울에 형인刑人‧적인狄人이 위衛나라를 토벌하였다. 注+적狄을 인人으로 칭한 것은 사관史官이 문사文辭를 달리한 것인데, 전傳에 그에 대한 의례義例를 말하지 않았다. [부주]林: 이것이 적狄을 인人으로 칭한 시초始初이다.
傳
18년 봄에 송양공宋襄公이 제후諸侯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제齊나라를 토벌하니 3월에 제인齊人이 무휴無虧를 죽였다. 注+송宋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휴無虧를 죽인 것이다.
傳
정백鄭伯이 비로소 초楚나라에 조현朝見하니,注+중국中國에 패자霸者가 없었기 때문이다.초자楚子가 정백鄭伯에게 동銅를 주고는 곧 후회後悔하여, 정백과 맹약盟約하기를 “이 동銅으로 병기兵器를 만들지 말라.”注+초楚의 동銅으로 병기兵器를 만들면 예리銳利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정백鄭伯은 이 동銅으로 세 개의 종을 주조鑄造하였다.注+옛날에는 동銅으로 병기兵器를 만들었다. 전傳의 말은 초楚나라가 패자霸者로서의 원대遠大한 책략策略이 없다는 뜻이다.
傳
제인齊人이 효공孝公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네 공자公子 무리를 이기지 못하니, 네 공자公子의 무리가 드디어 송인宋人과 전쟁戰爭하였다.注+무휴無虧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네 공자公子’라고 한 것이다.
겨울에 형인邢人‧적인狄人이 위衛나라를 토벌하여 토포菟圃를 포위하였다.注+[부주]林: 위衛나라의 토포읍菟圃邑을 포위한 것이다.
위후衛侯가 부형父兄‧자제子弟 및 조정朝廷의 중인衆人들에게 나라를 사양하며 말하였다.
“진실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의 명을 따르겠다.”注+훼燬는 위문공衛文公의 이름이다.
중인衆人이 불가不可하다고注+위후衛侯의 사양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한 뒤에 자루訾婁에 군대를 포진布陣시키니注+군대를 자루訾婁에 포진布陣시킨 것이다. 자루訾婁는 위衛나라 읍邑이다.적군狄軍이 돌아갔다.注+적군狄軍이 돌아갔다고만 말하였으니, 형인邢人은 남아서 위군衛軍을 막은 것이다. 이는 형邢나라가 마침내 위衛나라에게 멸망滅亡된 이유를 말한 것이다.
傳
양백梁伯이 국토國土를 넓혔으나 백성을 그곳에 채우지 못하고서,注+성읍城邑을 많이 축조築造하였으나 백성을 이주移住시켜 그 곳을 채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신리新里’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진秦나라가 그곳을 취取하였다.注+[부주]林: 진秦나라가 그 성城이 빈 틈을 타 그 땅을 취한 것이다.
역주
역주1齊人殺無虧 :
李震相은 “無虧가 齊君이 된 것은 桓公의 命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간악한 嬖人들에 의해 推戴된 것이므로 國人들이 따르지 않고, 昭公을 세우는 것이 정당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宋나라가 쳐들어오는 기회를 이용해 國人들이 無虧를 죽인 것이다.”고 하였다.
역주2立孝公而還 :
17년 傳의 ‘齊侯의 夫人이 셋이다.’는 데서부터 18년 傳의 ‘孝公을 세우고서 還軍했다.’는 데까지에 대해 徐壽錫은 “이 傳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더욱 많다. 左氏의 記事에는 본래 거짓이 많지만, 公羊氏와 穀梁氏도 뜻을 설명한 것이 相反되는 점이 있으니, 經文을 참고해 보면 세 傳 모두 經文과 부합하지 않는다. 齊桓公이 죽은 지 한 달이 넘기도 전에 네 나라가 聯合해 齊나라를 토벌하기로 한 것은 무엇 때문에 그리 서둘렀다는 말인가? 公子昭가 宋나라로 도망가고 齊人이 無虧를 죽인 것은 모두 예사로운 일이 아닌데도 經文에 보이지 않고, 네 나라가 함께 토벌하기로 하고서 전쟁은 宋나라 홀로 한 것은 또 어째서인가? 無虧가 이미 죽었는데 魯軍이 齊軍을 구원했다는 것은 누구를 구원했다는 말이며, 齊軍이 이미 패전하여 嗣君을 세웠는데 狄人이 齊나라를 구원했다는 것은 또 누구를 구원했다는 말인가? 文辭는 간략하지만 일의 내용이 완비되도록 기록하는 聖人의 글이 결코 이와 같지는 않을 것 같은데 상고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역주3邢留拒衛 :
楊伯峻은 “狄軍이 돌아갔으면 邢軍도 반드시 돌아갔을 것인데, 杜注에 ‘邢軍은 남아서 衛軍을 막았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