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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3)

춘추좌씨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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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九年春王正月 하다
[經]公會晉侯齊侯宋公衛侯鄭伯曹伯莒子杞伯同盟于蒲注+蒲 衛地 在長垣縣西南 하다
[經]公至自會注+無傳 하다
[經]二月 伯姬歸于宋注+宋不使卿逆 非禮 하다
[經]夏 季孫行父如宋注+女嫁三月 又使大夫隨加聘問 謂之致女 所以致成婦禮 篤昏姻之好하다
[經]晉人來媵注+媵伯姬也하다
[經]秋七月丙子 齊侯無野卒注+無傳 五同盟 丙子 六月一日 書七月 從赴 하다
[經]注+鄭伯旣受盟於蒲 又受楚賂會於鄧 故晉執之 稱人者 晉以無道於民告諸侯 例在十五年하다
[經]晉欒書帥師伐鄭하다
[經]冬十有一月 葬齊頃公注+無傳하다
[經]楚公子嬰齊帥師伐莒하니 庚申 莒潰注+民逃其上曰潰하다
[經]楚人入鄆注+鄆 莒別邑也 楚偏師入鄆 故稱人 하다
[經]秦人白狄伐晉하다
[經]鄭人圍許하다
[經]城注+魯邑也 在東海厚丘縣西南 閏月城 在十一月之後 十二月之前 故傳曰書時 [附注] 林曰 在東海廩丘縣西南 하다
[傳]九年春 杞桓公來逆叔姬之喪하니 請之也注+叔姬已絶於杞 魯復强請杞 使還取葬
杞叔姬卒 爲杞故也注+還爲杞婦 故卒稱杞 逆叔姬 爲我也注+旣棄而復逆其喪 明爲魯故
[傳]爲歸汶陽之田故 諸侯貳於晉注+歸田在前年 하니 晉人懼하야 會於蒲하야 以尋馬陵之盟注+馬陵盟在七年 하다
季文子謂范文子曰 하니 尋盟何爲注+競 强也
范文子曰 勤以撫之하고 寬以待之하고 堅彊以御之注+[附注] 林曰 堅忍强毅以駕御諸侯 하고 以要之注+[附注] 朱曰 質諸明神以要結諸侯 하고 柔服而伐貳注+[附注] 林曰 懷柔諸侯之服從者 討伐諸侯之攜貳者 德之次也
是行也 將始會吳로되 吳人不至注+爲十五年會鍾離傳 하다
[傳]二月 伯姬歸于宋注+爲致女復命起 하다
[傳]楚人以重賂求鄭하니 鄭伯會楚公子成于鄧注+爲晉人執鄭伯傳 하다
[傳]夏 季文子如宋致女하고 復命하니 公享之하다
賦韓奕之五章注+韓奕 詩大雅篇名 其五章 言蹶父嫁女於韓侯 爲女相所居 莫如韓樂 文子喩魯侯有蹶父之德 宋公如韓侯 宋如韓樂 하니 穆姜出于房하야 再拜曰 大夫勤辱이라
不忘先君하야 以及嗣君하고 施及未亡人注+穆姜 伯姬母 聞文子言宋樂 喜而出謝其行勞 婦人夫死 自稱未亡人 [附注] 林曰 伯姬宣公之女 故言不忘先君 成公之姊 故曰以及嗣君 하니 先君猶有望也注+言先君亦望文子之若此
敢拜大夫之重勤注+[附注] 林曰 하노라하고 又賦綠衣之卒章而入注+綠衣 詩 邶風也 取其我思古人 實獲我心 喩文子言得己意 하다
[傳]晉人來媵하니 禮也注+同姓故
[傳]秋 鄭伯如晉하니 晉人討其貳於楚也하야 執諸銅鞮注+銅鞮 晉別縣 在上黨 하다
欒書伐鄭하니 鄭人使伯蠲行成이어늘 晉人殺之하니 非禮也
兵交 使在其間可也注+明殺行人例
楚子重侵陳以救鄭注+陳與晉故하다
[傳]晉侯觀于軍府라가 見鍾儀하고 問之曰 南冠而縶者 誰也注+南冠 楚冠 縶 拘執 有司對曰 鄭人所獻楚囚也니이다
使稅之注+鄭獻鍾儀 在七年 稅 解也 하고 召而弔之注+[附注] 林曰 召鍾儀而弔其被囚하니 再拜稽首하다
問其族하니 對曰 泠人也注+泠人 樂官 니이다
公曰 能樂乎 對曰 先父之職官也 敢有二事注+言不敢學他事릿가
使與之琴한대 操南音注+南音 楚聲 하다
公曰 君王何如注+[附注] 林曰 景公因問楚之君王何如人也 對曰 非小人之所得知也로이다
固問之한대 對曰 其爲大子也 師保奉之하야 以朝于嬰齊而夕于側也注+嬰齊 令尹子重 側 司馬子反 言其尊卿敬老 不知其他로이다
公語范文子한대 文子曰 楚囚 君子也로이다
言稱先職하니 不背本也 樂操土風하니 不忘舊也 稱大子하니 抑無私也注+舍其近事 而遠稱少小 以示性所自然 明至誠 名其二卿하니 尊君也注+니이다
不背本 仁也 不忘舊 信也 無私 忠也 尊君 敏也注+敏 達也 니이다
仁以接事하고 信以守之하며 忠以成之하고 敏以行之 事雖大 必濟注+言有此四德 必能成大事리니 君盍歸之하야 使合晉楚之成이닛고
公從之하야 重爲之禮하야 使歸求成注+爲下十二月晉楚結成張本 하다
[傳]冬十一月 楚子重自陳伐莒하야 圍渠丘하니 渠丘城惡하야 衆潰奔莒하다
戊申 楚入渠丘注+月六日하다
莒人囚楚公子平이어늘 楚人曰 勿殺하라
吾歸而俘注+[附注] 林曰 而 汝也하리라 莒人殺之하다
楚師圍莒하니 莒城亦惡하야 庚申 莒潰注+月十八日 어늘 楚遂入鄆注+[附注] 林曰 鄆亦莒邑 하니 莒無備故也注+終巫臣之言
君子曰
恃陋而不備 罪之大者也 備豫不虞 善之大者也
莒恃其陋하고 而不脩城郭하야 浹辰之間 而楚克其三都하니 無備也夫注+浹辰 十二日也 [附注] 林曰 浹 周匝也 辰 日辰也 浹辰 蓋謂自子至亥周匝十二日也 ᄂ저
詩曰 雖有絲麻注+[附注] 朱曰 絲可爲帛 麻可爲布 皆精細之物 無棄注+[附注] 林曰 雖粗物 亦不可棄 하고 하라
凡百君子 莫不代匱라하니 言備之不可以已也注+逸詩也 姬姜 大國之女 蕉萃 陋賤之人 [附注] 林曰 代匱 言有匱乏之時 須得人承代 니라
[傳]秦人白狄伐晉하니 諸侯貳故也
[傳]鄭人圍許하니 示晉不急君也注+此秋晉執鄭伯
是則公孫申謀之 曰 我出師以圍許注+示不畏晉 하고 하야 而紓晉使注+紓 緩也 勿亟遣使請晉 示欲更立君 晉必歸君注+爲明年晉侯歸鄭伯張本 하라라
[傳]城中城하니 時也
[傳]十二月 楚子使公子辰如晉하야 報鍾儀之使하고 請修好結成注+鍾儀奉晉命歸 故楚報之 하다


9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기백杞伯이 와서 숙희叔姬상구喪柩를 맞이해 돌아갔다.
성공成公진후晉侯제후齊侯송공宋公위후衛侯정백鄭伯조백曹伯거자莒子기백杞伯회합會合하여 에서 동맹同盟하였다.注+나라 땅으로 장원현長垣縣 서남쪽에 있다.
성공成公회맹會盟에서 돌아왔다.注+이 없다.
2월에 백희伯姬나라로 시집갔다.注+나라는 사자使者로 보내어 백희伯姬를 맞이하지 않았으니, 가 아니다.
여름에 계손행보季孫行父나라에 가서 치녀致女하였다.注+딸이 출가出嫁한 지 3개월 만에 또 대부大夫를 보내어 빙문聘問하는 것을 ‘치녀致女’라 하는데, 이는 부인婦人이 되는 를 이룬 것을 치하致賀하고 혼인婚姻우호友好돈독敦篤히 하기 위함이다.
진인晉人여인女人을 데리고 와서 잉녀媵女로 주었다.注+백희伯姬잉녀媵女로 준 것이다.
가을 7월 병자일丙子日제후齊侯무야無野하였다.注+이 없다. 성공成公과 다섯 차례 동맹同盟하였다. 병자일丙子日은 6월 1일인데, 7월로 기록한 것은 부고赴告를 따른 것이다.
진인晉人정백鄭伯을 잡았다.注+정백鄭伯이 이미 에서 나라의 맹약盟約접수接受하고서도 나라의 뇌물賂物을 받고 에서 나라와 회맹會盟하였기 때문에 진인晉人이 그를 잡은 것이다. ‘’으로 칭한 것은 나라가 ‘무도어민無道於民’으로 제후諸侯에게 부고赴告하였기 때문이다. 그 성공成公 15년에 보인다.
나라 난서欒書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겨울 11월에 제경공齊頃公장사葬事 지냈다.注+이 없다.
나라 공자公子영제嬰齊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토벌討伐하니, 경신일庚申日거인莒人궤산潰散하였다.注+백성들이 그 윗사람에게서 도망逃亡하는 것을 ‘’라 한다.
초인楚人으로 진입進入하였다.注+나라의 별읍別邑이다. 초군楚軍의 한 부대部隊으로 진입進入하였기 때문에 ‘’으로 한 것이다.
진인秦人백적白狄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정인鄭人나라를 포위包圍하였다.
중성中城을 쌓았다.注+나라 으로 동해東海후구현厚丘縣 서남쪽에 있다. 이것은 윤월閏月을 쌓은 것으로 11월 이후와 12월 이전이었기 때문에 에 ‘서시書時’라고 한 것이다. [부주]林: 동해東海늠구현廩丘縣 서남쪽에 있다.
9년 봄에 기환공杞桓公이 와서 숙희叔姬상구喪柩를 맞이하였으니, 이는 나라의 요청要請에 의한 것이다.注+숙희叔姬가 이미 기백杞伯부부夫婦인연因緣을 끊었으나, 나라가 다시 기백杞伯에게 강요强要숙희叔姬상구喪柩를 도로 가지고 가서 장사葬事 지내게 한 것이다.
기숙희졸杞叔姬卒’이라 한 것은 나라의 부인夫人이 되었기 때문이고,注+숙희叔姬가 도로 기백杞伯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그 에 ‘’라고 한 것이다.역숙희逆叔姬’라 한 것은 우리 나라가 요구要求했기 때문이다.注+이미 버렸으면서도 다시 그 상구喪柩를 맞이해 간 것은 나라의 요구要求 때문임을 밝힌 것이다.
문양汶陽토지土地나라에 돌려준 일로 제후諸侯나라에 두 마음을 품으니,注+문양汶陽토지土地를 돌려준 일은 전년前年에 있었다.진인晉人은 이를 두려워하여 에서 회합會合하여 마릉馬陵맹약盟約중수重修하였다.注+마릉馬陵맹약盟約성공成公 7년에 있었다.
계문자季文子범문자范文子에게 말하기를, “덕행德行[不競]하였으니, 지난 맹약盟約중수重修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注+함이다. 라고 하니,
범문자范文子가 말하기를, “근면勤勉으로 제후諸侯위무慰撫하고 관후寬厚제후諸侯대우待遇하고 견강堅强으로 제후諸侯를 다스리고注+[부주]林: 견인堅忍(굳게 참고 견딤)과 강의强毅(强直하고 과감果敢함)로써 제후諸侯공제控制(一定한 범위範圍를 넘지 못하도록 통제統制함)한다는 말이다. 맹서盟誓[神]로 제후諸侯약속約束(단속함)하며注+[부주]朱: 신명神明에게 맹서盟誓[質]하여 제후諸侯결속結束한다는 말이다. 복종服從하는 자는 회유懷柔하고 두 마음을 품은 자는 토벌討伐하는 것이注+[부주]林: 복종服從하는 제후諸侯회유懷柔하고 두 마음을 품은[攜貳]제후諸侯토벌討伐한다는 말이다. 덕행德行의 다음이다.”고 하였다.
진후晉侯는 이번 걸음에 비로소 나라와 회합會合하고자 하였으나, 오인吳人이 오지 않았다.注+성공成公 15년에 종리鍾離에서 회합會合의 배경이다.
2월에 백희伯姬나라로 시집갔다.注+하문下文치녀致女하고 복명復命한 것을 말하기 위해 글을 일으킨 것이다.
초인楚人나라에 많은 재물財物을 주면서 화친和親하기를 요구要求하니, 정백鄭伯나라 공자公子에서 회맹會盟하였다.注+진인晉人정백鄭伯을 잡은 의 배경이다.
여름에 계문자季文子나라에 가서 치녀致女하고 돌아와 복명復命하니, 성공成公연회宴會를 열어 그를 대접待接하였다.
연회宴會 자리에서 계문자季文子가 〈한혁편韓奕篇〉의 제 5을 읊으니,注+한혁韓奕〉은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篇名이다. 그 제 5궤보蹶父한후韓侯에게 딸을 시집보내고서 딸이 사는 것을 살펴보니 에서의 생활生活이 매우 안락安樂하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문자文子가 이 를 읊어, 노후魯侯궤보蹶父을 가졌고 송공宋公한후韓侯와 같고 나라는 처럼 안락安樂하다는 것을 비유譬喩하였다. 목강穆姜이 방에서 나와 재배再拜하며 말하기를, “대부大夫는 욕보셨소.
선군先君을 잊지 않는 그 충성忠誠사군嗣君에 미치고, 이 미망인未亡人에게까지 뻗쳐 미쳤으니,注+목강穆姜백희伯姬모후母后이다. 문자文子나라의 생활生活안락安樂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기뻐서 나와 그 노고勞苦감사感謝한 것이다. 남편이 죽은 부인은 스스로를 미망인未亡人이라고 칭한다. [부주]林: 백희伯姬선공宣公의 딸이기 때문에 선군先君을 잊지 않았다고 말하고, 성공成公의 누이이기 때문에 사군嗣君에 미쳤다고 말한 것이다. 선군先君께서도 오히려 대부大夫가 이렇게 하기를 바랐을 것이오.注+선군先君문자文子가 이렇게 하기를 바랐다는 말이다.
감히 대부大夫께서 거듭 수고한 것에 배사拜謝하오.”注+[부주]林: 감히 대부大夫가 거듭 수고한 것에 배사拜謝한다는 말이다. 라고 하고서, 또 〈녹의편綠衣篇〉의 졸장卒章을 읊고서 들어갔다.注+녹의綠衣〉는 《시경詩經》 〈패풍邶風〉의 편명篇名인데, 그 의 ‘내 고인古人을 생각하니 실로 내 마음을 아셨다.’는 말을 하여 문자文子의 말이 나의 뜻을 알았다는 것을 비유譬喩한 것이다.
진인晉人여인女人을 데리고 와서 잉녀媵女로 주었으니, 이다.注+동성同姓이기 때문에 잉녀媵女로 준 것이다.
가을에 정백鄭伯나라에 가니, 진인晉人은 그가 두 마음을 품고 나라에 붙은 것을 징벌懲罰하여 동제銅鞮에서 정백鄭伯을 잡았다.注+동제銅鞮나라의 별현別縣으로 상당上黨에 있다.
난서欒書나라를 토벌討伐하니, 정인鄭人백견伯蠲을 보내어 화친和親요구要求하였는데 진인晉人이 그를 죽였으니, 가 아니다.
두 나라가 교전交戰할 때에도 사자使者는 그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것이다.注+행인行人(使者)을 죽인 를 밝힌 것이다.
나라 자중子重나라를 침공侵攻하여 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注+나라가 나라의 우호국友好國이기 때문에 침공侵攻한 것이다.
진경공晉景公군부軍府시찰視察하다가 종의鍾儀를 보고서 좌우左右에게 “남방南方을 쓰고 구속拘束되어 있는 자가 누구냐?”注+남관南冠초관楚冠이고, 구속拘束해 잡아둠이다.고 묻자, 좌우左右가 “정인鄭人이 바친 나라 포로捕虜입니다.”고 대답하였다.
경공景公은 그의 속박束縛을 풀어주게 하고注+나라가 종의鍾儀를 잡아 바친 일은 성공成公 7년에 있었다. 은 풀어줌이다. 그를 불러 위로慰勞하니,注+[부주]林: 종의鍾儀를 불러 그가 수금囚禁당한 것을 위로한 것이다. 종의鍾儀경공景公에게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경공景公이 그에게 (世官)을 물으니, 영인泠人(樂工)이라고 대답하였다.注+영인泠人악관樂官이다.
경공景公이 “음악音樂연주演奏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는 선부先父직관職官(官職)이었으니, 감히 다른 일을 배웠겠습니까?”注+감히 다른 일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경공景公이 사람을 시켜 그에게 거문고를 주게 하니, 그는 남방南方의 음악을 연주演奏[操]하였다.注+남음南音나라 음악音樂이다.
경공景公이 그에게 “너희 군왕君王은 어떤 사람이냐?”注+[부주]林: 경공景公이 그를 만난 기회에 나라 군왕君王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은 것이다. 고 묻자, 그는 “이는 소인小人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굳이 묻자, 그는 “소인小人이 알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태자太子로 있을 때 사보師保가 그분을 모시고 아침에는 영제嬰齊(子重)에게 가서 가르침을 청하고 저녁에는 (子反)에게 가서 가르침을 청한 것을 알 뿐이고,注+영제嬰齊영윤令尹자중子重이고, 사마司馬자반子反이다. 초군楚君노인老人존경尊敬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모르겠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경공景公이 이를 범문자范文子에게 이야기하니, 문자文子가 말하기를, “나라 포로는 군자君子입니다.
말할 때 선부先父직관職官을 말하였으니, 이는 근본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고, 음악을 연주할 때 고토故土의 음악을 연주하였으니, 이는 고국故國을 잊지 않은 것이고, 초군楚君태자太子 때를 말하였으니, 이는 사심私心이 없는 것이고,注+근래近來의 일을 버리고 멀리 어렸을 때의 일을 말한 것은 초왕楚王성품性稟이 본래 그러하다는 것을 드러내어, 자기가 초군楚君찬양讚揚한 말이 지성至誠(私心이 없음)임을 밝힌 것이다. 자기 나라 두 의 이름을 불렀으니, 이는 임금을 존경尊敬한 것입니다.注+진군晉君을 높였다는 말이다.
근본을 저버리지 않은 것은 이고, 구국舊國을 잊지 않은 것은 이고, 사심私心이 없는 것은 이고, 임금을 높이는 것은 (敏捷해 사리事理통달通達함)입니다.注+사리事理통달通達함이다.
으로 일을 처리處理[接]하고 으로 일을 지키고 으로 일을 완성完成하고 으로 일을 행한다면 아무리 큰일이라 해도 반드시 완성完成할 수 있으니,注+이 네 가지 이 있으면 반드시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군왕君王께서는 어찌 그를 나라로 돌려보내어 나라와 나라 사이에 우호友好를 이루게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니,
경공景公범문자范文子의 말에 따라 종의鍾儀를 중하게 예우禮遇하여 나라로 돌려보내어 나라를 위해 화친和親하게 하였다.注+아래 12월에 나라와 나라가 화친和親을 맺은 장본張本이다.
겨울 11월에 나라 자중子重나라를 토벌討伐하기 위해 나라에서 출발出發하여 거구渠丘포위包圍하니, 거구渠丘불실不實[惡]하여 거군莒軍궤산潰散나라의 국성國城으로 도망갔다.
무신일戊申日초군楚軍거구渠丘입성入城하였다.注+무신일戊申日은 11월 6일이다.
거인莒人나라 공자公子을 사로잡으니, 초인楚人이 “그를 죽이지 말라.
우리도 너희들의 부로俘虜를 돌려주겠다.”注+[부주]林: (너)이다. 고 말하였으나, 거인莒人은 그를 죽였다.
초군楚軍거성莒城포위包圍하니, 거성莒城 또한 불실不實[惡]하여 경신일庚申日거군莒軍궤산潰散하자,注+경신일庚申日은 11월 18일이다. 초군楚軍이 드디어 입성入城하였으니,注+[부주]林: 나라 이다. 이는 나라에 방비防備가 없었기 때문이다.注+무신巫臣의 말이 들어맞았다.
군자君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論評하였다.
“먼 변방邊方에 있는 작은 나라(辟陋)임을 믿고 방비防備하지 않는 것은 중에 큰 이고, 의외意外사태事態대비對備하는 것은 중에 큰 이다.
나라는 먼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임을 믿고 성곽城郭수축修築하지 않아, 12일 만에 초군楚軍이 세 도시都市함락陷落하였으니, 이는 나라에 방비防備가 없었기 때문이다.注+협신浹辰은 12일이다. [부주]林: 은 한 바퀴 도는 것이고, 일진日辰이니, 협신浹辰자일子日로부터 해일亥日까지 한 바퀴 돌아 12이 되는 것을 이른 것이다.
에 ‘비록 실[絲]과 삼[麻]이 있다 하더라도注+[부주]朱: 실은 베를 짤 수 있고 삼은 삼베를 짤 수 있으니, 모두 관괴菅蒯에 비해 정세精細한 물건이다. 솔새[菅]와 기름사초[蒯]를 버리지 말고,注+[부주]林: 관괴菅蒯는 모두 거칠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쓸 수 있는[粗用] 풀이다. 비록 조열粗劣한 물건이지만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비록 희녀姬女강녀姜女가 있다 하더라도 초췌憔悴여자女子를 버리지 말라.
모든 군자君子는 저것이 결핍缺乏[匱]되었을 때 이것으로 대용代用하지 않음이 없나니.’라고 하였으니, 이는 방비防備를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注+이것은 일시逸詩이다. 희강姬姜대국大國여인女人이고, 초췌蕉萃누추陋醜하고 비천卑賤여인女人이다. [부주]林: 대궤代匱결핍缺乏[匱]될 때가 있으면 반드시 사람이 있어야 대신 그 뒤를 이을 수 있다는 말이다.
진인秦人백적白狄나라를 토벌討伐하였으니, 이는 제후諸侯나라에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정인鄭人나라를 포위包圍하였으니, 이는 나라가 나라에게 잡혀간 임금의 귀국歸國한 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다.注+이 해 가을에 나라가 정백鄭伯을 잡았다.
이것은 공손公孫계략計略이었는데, 그는 “우리가 출병出兵나라를 포위包圍하고,注+나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마치 다른 이를 임금으로 세우려는 것처럼 위장僞裝[爲]하여 나라에 사신使臣 보내는 일을 늦추면注+는 늦추는 것이다. 나라에 급히 사신使臣을 보내어 임금을 돌려보내 달라고 하지 말고, 다른 이를 다시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는 뜻을 보인다는 말이다. 나라는 반드시 우리 임금을 돌려보낼 것이다.”注+명년明年진후晉侯정백鄭伯을 돌려보낸 장본張本이다. 고 하였다.
중성中城을 쌓았으니, 이를 기록한 것은 때에 맞았기 때문이다.
12월에 초자楚子공자公子사자使者나라에 보내어 종의鍾儀사자使者로 보낸 일에 회보回報하고, 옛 우호友好중수重修하여 화평和平을 맺기를 하였다.注+종의鍾儀진후晉侯을 받들고 돌아왔기 때문에 초자楚子가 이를 회보回報한 것이다.


역주
역주1 杞伯來逆叔姬之喪以歸 : 叔姬가 과연 罪가 있어 돌아왔다면 杞伯이 喪柩를 맞이해 가서는 안 되고, 만약 罪 없이 돌아왔다면 杞伯이 아내를 내친 것은 실로 禮를 犯한 것이니, 叔姬에게 罪가 있었건 없었건 간에 罪를 얻는 자는 杞伯이다. 그러므로 《春秋》에 그 始末을 기록하여 杞伯의 罪를 드러낸 것이다. 朴致遠 《雪溪隨錄》
역주2 致女 : 《左氏會箋》에 의하면 며느리가 들어온 지 석 달 만에 宗廟에 謁見시키고, 宗廟에 謁見한 뒤에 남편과 잠자리를 하고서 비로소 夫人이 된다. 宗廟에 謁見하기 전에는 그 나라의 夫人이 되어 그곳에 남느냐 아니면 쫓겨나 돌아오느냐가 未定이기 때문에 딸을 시집보낸 나라에서는 이때를 기다려 大夫를 보내어 딸을 그 나라에 바치는[致]禮를 거행하는데, 이를 ‘致女’라 한다.
역주3 晉人執鄭伯 : 成公 15년 傳에 “임금이 그 백성에게 無道하여[無道於其民]諸侯가 그 나라를 討伐해 그 임금을 잡으면 ‘某人이 某侯를 잡았다’고 기록한다.”고 하였다.
역주4 中城 : 《穀梁傳》에 의하면 中城은 바로 魯나라의 內城이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中城은 바로 魯나라 都城曲阜의 內城이다. 〈楊注〉
역주5 北[此] : 저본에는 ‘北’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此’로 바로잡았다.
역주6 德則不競 : 不競은 衰頹의 뜻이다. 晉나라가 魯나라를 脅迫해 汶陽의 땅을 齊나라에 돌려주게 한 것은 晉나라가 信義를 저버린 行爲로 스스로 德行을 衰頹시켰다는 말이다.
역주7 明神 : 明神은 盟誓의 뜻이니, 盟約에는 반드시 神에게 밝게 盟誓하기 때문이다.
역주8 士[土] : 저본에는 ‘士’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土’로 바로잡았다.
역주9 敢拜大夫之重有勤勞 : 文子가 上卿으로 伯姬의 婚事를 主管하였는데, 지금 또 宋나라에 가서 致女하였기 때문에 거듭 수고했다고 한 것이다. 《左氏會箋》
역주10 尊晉君也 : 임금 앞에서는 비록 아버지라 하여도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임금을 높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鍾儀도 子重과 子反의 이름을 불러 晉君을 높인 것이다.
역주11 管[菅] : 저본에는 ‘管’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菅’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2 管[菅] : 저본에는 ‘管’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 의거하여 ‘菅’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3 皆草之可爲粗用者 : 菅과 蒯는 모두 多年草로 자리를 짜거나 신을 삼을 수 있다.
역주14 雖有姬姜 無棄蕉萃 : 姬는 周姓이고 姜은 齊姓인데, 古人들은 姬姜을 美人의 代稱으로 많이 使用하였다. 蕉萃는 顔色이 파리한 모양이다. 이는 비록 아름다운 婦人이 있어도 아름답지 못한 婦人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역주15 爲將改立君者 : 여기서 爲는 僞의 假借字이다.

춘추좌씨전(3)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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