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公會晉侯齊侯宋公衛侯鄭伯曹伯莒子杞伯同盟于蒲
注+蒲 衛地 在長垣縣西南 하다
[經]二月
에 伯姬歸于宋
注+宋不使卿逆 非禮 하다
[經]夏
에 季孫行父如宋
注+女嫁三月 又使大夫隨加聘問 謂之致女 所以致成婦禮 篤昏姻之好하다
[經]秋七月丙子
에 齊侯無野卒
注+無傳 五同盟 丙子 六月一日 書七月 從赴 하다
[經]
注+鄭伯旣受盟於蒲 又受楚賂會於鄧 故晉執之 稱人者 晉以無道於民告諸侯 例在十五年하다
[經]楚公子嬰齊帥師伐莒
하니 庚申
에 莒潰
注+民逃其上曰潰하다
[經]楚人入鄆
注+鄆 莒別邑也 楚偏師入鄆 故稱人 하다
[經]城
注+魯邑也 在東海厚丘縣西南 閏月城 在十一月之後 十二月之前 故傳曰書時 [附注] 林曰 在東海廩丘縣西南 하다
傳
[傳]九年春
에 杞桓公來逆叔姬之喪
하니 請之也
注+叔姬已絶於杞 魯復强請杞 使還取葬라
杞叔姬卒
은 爲杞故也
注+還爲杞婦 故卒稱杞오 逆叔姬
는 爲我也
注+旣棄而復逆其喪 明爲魯故라
傳
[傳]爲歸汶陽之田故
로 諸侯貳於晉
注+歸田在前年 하니 晉人懼
하야 會於蒲
하야 以尋馬陵之盟
注+馬陵盟在七年 하다
范文子曰 勤以撫之
하고 寬以待之
하고 堅彊以御之
注+[附注] 林曰 堅忍强毅以駕御諸侯 하고 以要之
注+[附注] 朱曰 質諸明神以要結諸侯 하고 柔服而伐貳
注+[附注] 林曰 懷柔諸侯之服從者 討伐諸侯之攜貳者 가 德之次也
라
是行也
에 將始會吳
로되 吳人不至
注+爲十五年會鍾離傳 하다
傳
[傳]楚人以重賂求鄭
하니 鄭伯會楚公子成于鄧
注+爲晉人執鄭伯傳 하다
傳
[傳]夏에 季文子如宋致女하고 復命하니 公享之하다
賦韓奕之五章
注+韓奕 詩大雅篇名 其五章 言蹶父嫁女於韓侯 爲女相所居 莫如韓樂 文子喩魯侯有蹶父之德 宋公如韓侯 宋如韓樂 하니 穆姜出于房
하야 再拜曰 大夫勤辱
이라
不忘先君
하야 以及嗣君
하고 施及未亡人
注+穆姜 伯姬母 聞文子言宋樂 喜而出謝其行勞 婦人夫死 自稱未亡人 [附注] 林曰 伯姬宣公之女 故言不忘先君 成公之姊 故曰以及嗣君 하니 先君猶有望也
注+言先君亦望文子之若此 라
敢拜大夫之重勤
注+[附注] 林曰 하노라하고 又賦綠衣之卒章而入
注+綠衣 詩 邶風也 取其我思古人 實獲我心 喩文子言得己意 하다
傳
[傳]秋
에 鄭伯如晉
하니 晉人討其貳於楚也
하야 執諸銅鞮
注+銅鞮 晉別縣 在上黨 하다
欒書伐鄭하니 鄭人使伯蠲行成이어늘 晉人殺之하니 非禮也라
傳
[傳]晉侯觀于軍府
라가 見鍾儀
하고 問之曰 南冠而縶者
는 誰也
注+南冠 楚冠 縶 拘執오 有司對曰 鄭人所獻楚囚也
니이다
使稅之
注+鄭獻鍾儀 在七年 稅 解也 하고 召而弔之
注+[附注] 林曰 召鍾儀而弔其被囚하니 再拜稽首
하다
公曰 能樂乎
아 對曰 先父之職官也
니 敢有二事
注+言不敢學他事릿가
公曰 君王何如
注+[附注] 林曰 景公因問楚之君王何如人也 오 對曰 非小人之所得知也
로이다
固問之
한대 對曰 其爲大子也
에 師保奉之
하야 以朝于嬰齊而夕于側也
注+嬰齊 令尹子重 側 司馬子反 言其尊卿敬老 오 不知其他
로이다
言稱先職
하니 不背本也
오 樂操土風
하니 不忘舊也
오 稱大子
하니 抑無私也
注+舍其近事 而遠稱少小 以示性所自然 明至誠 오 名其二卿
하니 尊君也
注+니이다
不背本
은 仁也
오 不忘舊
는 信也
오 無私
는 忠也
오 尊君
은 敏也
注+敏 達也 니이다
仁以接事
하고 信以守之
하며 忠以成之
하고 敏以行之
면 事雖大
나 必濟
注+言有此四德 必能成大事리니 君盍歸之
하야 使合晉楚之成
이닛고
公從之
하야 重爲之禮
하야 使歸求成
注+爲下十二月晉楚結成張本 하다
傳
[傳]冬十一月에 楚子重自陳伐莒하야 圍渠丘하니 渠丘城惡하야 衆潰奔莒하다
吾歸而俘
注+[附注] 林曰 而 汝也하리라 莒人殺之
하다
楚師圍莒
하니 莒城亦惡
하야 庚申
에 莒潰
注+月十八日 어늘 楚遂入鄆
注+[附注] 林曰 鄆亦莒邑 하니 莒無備故也
注+終巫臣之言 라
恃陋而不備는 罪之大者也라 備豫不虞는 善之大者也라
莒恃其陋
하고 而不脩城郭
하야 浹辰之間
에 而楚克其三都
하니 無備也夫
注+浹辰 十二日也 [附注] 林曰 浹 周匝也 辰 日辰也 浹辰 蓋謂自子至亥周匝十二日也 ᄂ저
詩曰 雖有絲麻
注+[附注] 朱曰 絲可爲帛 麻可爲布 皆精細之物 나 無棄
蒯
注+[附注] 林曰 蒯 雖粗物 亦不可棄 하고 하라
凡百君子
는 莫不代匱
라하니 言備之不可以已也
注+逸詩也 姬姜 大國之女 蕉萃 陋賤之人 [附注] 林曰 代匱 言有匱乏之時 須得人承代 니라
傳
[傳]鄭人圍許
하니 示晉不急君也
注+此秋晉執鄭伯 라
是則公孫申謀之
라 曰 我出師以圍許
注+示不畏晉 하고 하야 而紓晉使
注+紓 緩也 勿亟遣使請晉 示欲更立君면 晉必歸君
注+爲明年晉侯歸鄭伯張本 하라라
傳
[傳]十二月
에 楚子使公子辰如晉
하야 報鍾儀之使
하고 請修好結成
注+鍾儀奉晉命歸 故楚報之 하다
9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에 기백杞伯이 와서 숙희叔姬의 상구喪柩를 맞이해 돌아갔다.
성공成公이
진후晉侯‧
제후齊侯‧
송공宋公‧
위후衛侯‧
정백鄭伯‧
조백曹伯‧
거자莒子‧
기백杞伯과
회합會合하여
포蒲에서
동맹同盟하였다.
注+포蒲는 위衛나라 땅으로 장원현長垣縣 서남쪽에 있다.
성공成公이
회맹會盟에서 돌아왔다.
注+전傳이 없다.
2월에
백희伯姬가
송宋나라로 시집갔다.
注+송宋나라는 경卿을 사자使者로 보내어 백희伯姬를 맞이하지 않았으니, 예禮가 아니다.
여름에
계손행보季孫行父가
송宋나라에 가서
치녀致女하였다.
注+딸이 출가出嫁한 지 3개월 만에 또 대부大夫를 보내어 빙문聘問하는 것을 ‘치녀致女’라 하는데, 이는 부인婦人이 되는 예禮를 이룬 것을 치하致賀하고 혼인婚姻의 우호友好를 돈독敦篤히 하기 위함이다.
진인晉人이
여인女人을 데리고 와서
잉녀媵女로 주었다.
注+백희伯姬의 잉녀媵女로 준 것이다.
가을 7월
병자일丙子日에
제후齊侯무야無野가
졸卒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성공成公과 다섯 차례 동맹同盟하였다. 병자일丙子日은 6월 1일인데, 7월로 기록한 것은 부고赴告를 따른 것이다.
진인晉人이
정백鄭伯을 잡았다.
注+정백鄭伯이 이미 포蒲에서 진晉나라의 맹약盟約을 접수接受하고서도 초楚나라의 뇌물賂物을 받고 등鄧에서 초楚나라와 회맹會盟하였기 때문에 진인晉人이 그를 잡은 것이다. ‘인人’으로 칭한 것은 진晉나라가 ‘무도어민無道於民’으로 제후諸侯에게 부고赴告하였기 때문이다. 그 예例가 성공成公 15년에 보인다.
진晉나라 난서欒書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정鄭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겨울 11월에
제경공齊頃公을
장사葬事 지냈다.
注+전傳이 없다.
초楚나라
공자公子영제嬰齊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거莒나라를
토벌討伐하니,
경신일庚申日에
거인莒人이
궤산潰散하였다.
注+백성들이 그 윗사람에게서 도망逃亡하는 것을 ‘궤潰’라 한다.
초인楚人이
운鄆으로
진입進入하였다.
注+운鄆은 거莒나라의 별읍別邑이다. 초군楚軍의 한 부대部隊가 운鄆으로 진입進入하였기 때문에 ‘인人’으로 칭稱한 것이다.
진인秦人과 백적白狄이 진晉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중성中城을 쌓았다.
注+노魯나라 읍邑으로 동해東海후구현厚丘縣 서남쪽에 있다. 이것은 윤월閏月에 성城을 쌓은 것으로 11월 이후와 12월 이전이었기 때문에 전傳에 ‘서시書時’라고 한 것이다. [부주]林: 동해東海늠구현廩丘縣 서남쪽에 있다.
傳
9년 봄에
기환공杞桓公이 와서
숙희叔姬의
상구喪柩를 맞이하였으니, 이는
노魯나라의
요청要請에 의한 것이다.
注+숙희叔姬가 이미 기백杞伯과 부부夫婦의 인연因緣을 끊었으나, 노魯나라가 다시 기백杞伯에게 강요强要해 숙희叔姬의 상구喪柩를 도로 가지고 가서 장사葬事 지내게 한 것이다.
‘
기숙희졸杞叔姬卒’이라 한 것은
기杞나라의
부인夫人이 되었기 때문이고,
注+숙희叔姬가 도로 기백杞伯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그 졸卒에 ‘기杞’라고 칭稱한 것이다. ‘
역숙희逆叔姬’라 한 것은 우리
노魯나라가
요구要求했기 때문이다.
注+이미 버렸으면서도 다시 그 상구喪柩를 맞이해 간 것은 노魯나라의 요구要求 때문임을 밝힌 것이다.
傳
문양汶陽의
토지土地를
제齊나라에 돌려준 일로
제후諸侯가
진晉나라에 두 마음을 품으니,
注+문양汶陽의 토지土地를 돌려준 일은 전년前年에 있었다.진인晉人은 이를 두려워하여
포蒲에서
회합會合하여
마릉馬陵의
맹약盟約을
중수重修하였다.
注+마릉馬陵의 맹약盟約은 성공成公 7년에 있었다.
계문자季文子가
범문자范文子에게 말하기를, “
덕행德行이
쇠衰[不競]하였으니, 지난
맹약盟約을
중수重修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注+경競은 강强함이다. 라고 하니,
범문자范文子가 말하기를, “
근면勤勉으로
제후諸侯를
위무慰撫하고
관후寬厚로
제후諸侯를
대우待遇하고
견강堅强으로
제후諸侯를 다스리고
注+[부주]林: 견인堅忍(굳게 참고 견딤)과 강의强毅(强直하고 과감果敢함)로써 제후諸侯를 공제控制(一定한 범위範圍를 넘지 못하도록 통제統制함)한다는 말이다. 맹서盟誓[神]로
제후諸侯를
약속約束(단속함)하며
注+[부주]朱: 신명神明에게 맹서盟誓[質]하여 제후諸侯를 결속結束한다는 말이다. 복종服從하는 자는
회유懷柔하고 두 마음을 품은 자는
토벌討伐하는 것이
注+[부주]林: 복종服從하는 제후諸侯는 회유懷柔하고 두 마음을 품은[攜貳]제후諸侯는 토벌討伐한다는 말이다. 덕행德行의 다음이다.”고 하였다.
진후晉侯는 이번 걸음에 비로소
오吳나라와
회합會合하고자 하였으나,
오인吳人이 오지 않았다.
注+성공成公 15년에 종리鍾離에서 회합會合한 전傳의 배경이다.
傳
2월에
백희伯姬가
송宋나라로 시집갔다.
注+하문下文에 치녀致女하고 복명復命한 것을 말하기 위해 글을 일으킨 것이다.
傳
초인楚人이
정鄭나라에 많은
재물財物을 주면서
화친和親하기를
요구要求하니,
정백鄭伯이
초楚나라
공자公子성成과
등鄧에서
회맹會盟하였다.
注+진인晉人이 정백鄭伯을 잡은 전傳의 배경이다.
傳
여름에 계문자季文子가 송宋나라에 가서 치녀致女하고 돌아와 복명復命하니, 성공成公이 연회宴會를 열어 그를 대접待接하였다.
연회宴會 자리에서
계문자季文子가 〈
한혁편韓奕篇〉의 제 5
장章을 읊으니,
注+〈한혁韓奕〉은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篇名이다. 그 제 5장章은 궤보蹶父가 한후韓侯에게 딸을 시집보내고서 딸이 사는 것을 살펴보니 한韓에서의 생활生活이 매우 안락安樂하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문자文子가 이 시詩를 읊어, 노후魯侯는 궤보蹶父의 덕德을 가졌고 송공宋公은 한후韓侯와 같고 송宋나라는 한韓처럼 안락安樂하다는 것을 비유譬喩하였다. 목강穆姜이 방에서 나와
재배再拜하며 말하기를, “
대부大夫는 욕보셨소.
선군先君을 잊지 않는 그
충성忠誠이
사군嗣君에 미치고, 이
미망인未亡人에게까지 뻗쳐 미쳤으니,
注+목강穆姜은 백희伯姬의 모후母后이다. 문자文子가 송宋나라의 생활生活이 안락安樂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기뻐서 나와 그 노고勞苦에 감사感謝한 것이다. 남편이 죽은 부인은 스스로를 미망인未亡人이라고 칭한다. [부주]林: 백희伯姬가 선공宣公의 딸이기 때문에 선군先君을 잊지 않았다고 말하고, 성공成公의 누이이기 때문에 사군嗣君에 미쳤다고 말한 것이다. 선군先君께서도 오히려
대부大夫가 이렇게 하기를 바랐을 것이오.
注+선군先君도 문자文子가 이렇게 하기를 바랐다는 말이다.
감히
대부大夫께서 거듭 수고한 것에
배사拜謝하오.”
注+[부주]林: 감히 대부大夫가 거듭 수고한 것에 배사拜謝한다는 말이다. 라고 하고서, 또 〈
녹의편綠衣篇〉의
졸장卒章을 읊고서 들어갔다.
注+〈녹의綠衣〉는 《시경詩經》 〈패풍邶風〉의 편명篇名인데, 그 시詩의 ‘내 고인古人을 생각하니 실로 내 마음을 아셨다.’는 말을 취取하여 문자文子의 말이 나의 뜻을 알았다는 것을 비유譬喩한 것이다.
傳
진인晉人이
여인女人을 데리고 와서
잉녀媵女로 주었으니,
예禮이다.
注+동성同姓이기 때문에 잉녀媵女로 준 것이다.
傳
가을에
정백鄭伯이
진晉나라에 가니,
진인晉人은 그가 두 마음을 품고
초楚나라에 붙은 것을
징벌懲罰하여
동제銅鞮에서
정백鄭伯을 잡았다.
注+동제銅鞮는 진晉나라의 별현別縣으로 상당上黨에 있다.
난서欒書가 정鄭나라를 토벌討伐하니, 정인鄭人이 백견伯蠲을 보내어 화친和親을 요구要求하였는데 진인晉人이 그를 죽였으니, 예禮가 아니다.
두 나라가
교전交戰할 때에도
사자使者는 그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것이다.
注+행인行人(使者)을 죽인 예例를 밝힌 것이다.
초楚나라
자중子重이
진陳나라를
침공侵攻하여
정鄭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
注+진陳나라가 진晉나라의 우호국友好國이기 때문에 침공侵攻한 것이다.
傳
진경공晉景公이
군부軍府를
시찰視察하다가
종의鍾儀를 보고서
좌우左右에게 “
남방南方의
관冠을 쓰고
구속拘束되어 있는 자가 누구냐?”
注+남관南冠은 초관楚冠이고, 집縶은 구속拘束해 잡아둠이다.고 묻자,
좌우左右가 “
정인鄭人이 바친
초楚나라
포로捕虜입니다.”고 대답하였다.
경공景公은 그의
속박束縛을 풀어주게 하고
注+정鄭나라가 종의鍾儀를 잡아 바친 일은 성공成公 7년에 있었다. 탈稅은 풀어줌이다. 그를 불러
위로慰勞하니,
注+[부주]林: 종의鍾儀를 불러 그가 수금囚禁당한 것을 위로한 것이다. 종의鍾儀는
경공景公에게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경공景公이 그에게
족族(世官)을 물으니,
영인泠人(樂工)이라고 대답하였다.
注+영인泠人은 악관樂官이다.
경공景公이 “
음악音樂을
연주演奏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는
선부先父의
직관職官(官職)이었으니, 감히 다른 일을 배웠겠습니까?”
注+감히 다른 일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경공景公이 사람을 시켜 그에게 거문고를 주게 하니, 그는
남방南方의 음악을
연주演奏[操]하였다.
注+남음南音은 초楚나라 음악音樂이다.
경공景公이 그에게 “너희
군왕君王은 어떤 사람이냐?”
注+[부주]林: 경공景公이 그를 만난 기회에 초楚나라 군왕君王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은 것이다. 고 묻자, 그는 “이는
소인小人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굳이 묻자, 그는 “
소인小人이 알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태자太子로 있을 때
사보師保가 그분을 모시고 아침에는
영제嬰齊(子重)에게 가서 가르침을 청하고 저녁에는
측側(子反)에게 가서 가르침을 청한 것을 알 뿐이고,
注+영제嬰齊는 영윤令尹자중子重이고, 측側은 사마司馬자반子反이다. 초군楚君은 경卿과 노인老人을 존경尊敬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모르겠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경공景公이 이를 범문자范文子에게 이야기하니, 문자文子가 말하기를, “초楚나라 포로는 군자君子입니다.
말할 때
선부先父의
직관職官을 말하였으니, 이는 근본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고, 음악을 연주할 때
고토故土의 음악을 연주하였으니, 이는
고국故國을 잊지 않은 것이고,
초군楚君의
태자太子 때를 말하였으니, 이는
사심私心이 없는 것이고,
注+근래近來의 일을 버리고 멀리 어렸을 때의 일을 말한 것은 초왕楚王의 성품性稟이 본래 그러하다는 것을 드러내어, 자기가 초군楚君을 찬양讚揚한 말이 지성至誠(私心이 없음)임을 밝힌 것이다. 자기 나라 두
경卿의 이름을 불렀으니, 이는 임금을
존경尊敬한 것입니다.
注+진군晉君을 높였다는 말이다.
근본을 저버리지 않은 것은
인仁이고,
구국舊國을 잊지 않은 것은
신信이고,
사심私心이 없는 것은
충忠이고, 임금을 높이는 것은
민敏(敏捷해
사리事理에
통달通達함)입니다.
注+민敏은 사리事理에 통달通達함이다.
인仁으로 일을
처리處理[接]하고
신信으로 일을 지키고
충忠으로 일을
완성完成하고
민敏으로 일을 행한다면 아무리 큰일이라 해도 반드시
완성完成할 수 있으니,
注+이 네 가지 덕德이 있으면 반드시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군왕君王께서는 어찌 그를
초楚나라로 돌려보내어
진晉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우호友好를 이루게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니,
경공景公은
범문자范文子의 말에 따라
종의鍾儀를 중하게
예우禮遇하여
초楚나라로 돌려보내어
진晉나라를 위해
화친和親을
구求하게 하였다.
注+아래 12월에 진晉나라와 초楚나라가 화친和親을 맺은 장본張本이다.
傳
겨울 11월에 초楚나라 자중子重이 거莒나라를 토벌討伐하기 위해 진陳나라에서 출발出發하여 거구渠丘를 포위包圍하니, 거구渠丘의 성城이 불실不實[惡]하여 거군莒軍이 궤산潰散해 거莒나라의 국성國城으로 도망갔다.
무신일戊申日에
초군楚軍이
거구渠丘에
입성入城하였다.
注+무신일戊申日은 11월 6일이다.
거인莒人이 초楚나라 공자公子평平을 사로잡으니, 초인楚人이 “그를 죽이지 말라.
우리도 너희들의
부로俘虜를 돌려주겠다.”
注+[부주]林: 이而는 여汝(너)이다. 고 말하였으나,
거인莒人은 그를 죽였다.
초군楚軍이
거성莒城을
포위包圍하니,
거성莒城 또한
불실不實[惡]하여
경신일庚申日에
거군莒軍이
궤산潰散하자,
注+경신일庚申日은 11월 18일이다. 초군楚軍이 드디어
운鄆에
입성入城하였으니,
注+[부주]林: 운鄆도 거莒나라 읍邑이다. 이는
거莒나라에
방비防備가 없었기 때문이다.
注+무신巫臣의 말이 들어맞았다.
군자君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論評하였다.
“먼 변방邊方에 있는 작은 나라(辟陋)임을 믿고 방비防備하지 않는 것은 죄罪 중에 큰 죄罪이고, 의외意外의 사태事態에 대비對備하는 것은 선善 중에 큰 선善이다.
거莒나라는 먼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임을 믿고
성곽城郭을
수축修築하지 않아, 12일 만에
초군楚軍이 세
도시都市를
함락陷落하였으니, 이는
거莒나라에
방비防備가 없었기 때문이다.
注+협신浹辰은 12일이다. [부주]林: 협浹은 한 바퀴 도는 것이고, 신辰은 일진日辰이니, 협신浹辰은 자일子日로부터 해일亥日까지 한 바퀴 돌아 12일日이 되는 것을 이른 것이다.
시詩에 ‘비록 실[絲]과 삼[麻]이 있다 하더라도
注+[부주]朱: 실은 베를 짤 수 있고 삼은 삼베를 짤 수 있으니, 모두 관괴菅蒯에 비해 정세精細한 물건이다. 솔새[菅]와 기름사초[蒯]를 버리지 말고,
注+[부주]林: 관괴菅蒯는 모두 거칠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쓸 수 있는[粗用] 풀이다. 비록 조열粗劣한 물건이지만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비록
희녀姬女와
강녀姜女가 있다 하더라도
초췌憔悴한
여자女子를 버리지 말라.
모든
군자君子는 저것이
결핍缺乏[匱]되었을 때 이것으로
대용代用하지 않음이 없나니.’라고 하였으니, 이는
방비防備를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注+이것은 일시逸詩이다. 희강姬姜은 대국大國의 여인女人이고, 초췌蕉萃는 누추陋醜하고 비천卑賤한 여인女人이다. [부주]林: 대궤代匱는 결핍缺乏[匱]될 때가 있으면 반드시 사람이 있어야 대신 그 뒤를 이을 수 있다는 말이다.
傳
진인秦人과 백적白狄이 진晉나라를 토벌討伐하였으니, 이는 제후諸侯가 진晉나라에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傳
정인鄭人이
허許나라를
포위包圍하였으니, 이는
정鄭나라가
진晉나라에게 잡혀간 임금의
귀국歸國을
급急한 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注+이 해 가을에 진晉나라가 정백鄭伯을 잡았다.
이것은
공손公孫신申의
계략計略이었는데, 그는 “우리가
출병出兵해
허許나라를
포위包圍하고,
注+진晉나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마치 다른 이를 임금으로 세우려는 것처럼
위장僞裝[爲]하여
진晉나라에
사신使臣 보내는 일을 늦추면
注+서紓는 늦추는 것이다. 진晉나라에 급히 사신使臣을 보내어 임금을 돌려보내 달라고 청請하지 말고, 다른 이를 다시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는 뜻을 보인다는 말이다. 진晉나라는 반드시 우리 임금을 돌려보낼 것이다.”
注+명년明年에 진후晉侯가 정백鄭伯을 돌려보낸 장본張本이다. 고 하였다.
傳
중성中城에 성城을 쌓았으니, 이를 기록한 것은 때에 맞았기 때문이다.
傳
12월에
초자楚子가
공자公子신辰을
사자使者로
진晉나라에 보내어
종의鍾儀를
사자使者로 보낸 일에
회보回報하고, 옛
우호友好를
중수重修하여
화평和平을 맺기를
청請하였다.
注+종의鍾儀가 진후晉侯의 명命을 받들고 돌아왔기 때문에 초자楚子가 이를 회보回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