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二年春注+戎狄夷蠻 皆氐羌之別種也 戎而書會者 順其俗以爲禮 皆謂居中國若戎子駒支者 陳留濟陽縣東南 有戎城 潛 魯地 [附注] 林曰 此外交之始也 是故會戎于潛 春秋之始 會吳黃池 春秋之終 此春秋之所以終始也 하다
[經]夏五月 莒人入向注+向 小國也 譙國龍亢縣東南 有向城 莒國 今城陽莒縣也 將卑師少 稱人 不地曰入 例在襄十三年 [附注] 林曰 此入國之始也 하다
[經]注+無駭 魯卿 極 附庸小國 無駭 不書氏 未賜族 賜族例 在八年 [附注] 林曰 無駭帥師 大夫專兵之端見矣하다
[經]秋八月庚辰 公及戎盟于唐注+高平方與縣北 有武唐亭 八月 無庚辰 庚辰 七月 九日也 日月必有誤 [附注] 林曰 唐 魯地 此盟戎之始也 하다
[經]九月 紀裂繻來逆女注+裂繻 紀大夫 傳曰 卿爲君逆也 以別卿自逆也 逆女 或稱使或不稱使 婚禮 不稱主人 史各隨其實而書 非例也 他皆放此 하다
[經]冬十月 伯姬歸于紀注+無傳 伯姬 魯女 裂繻所逆者 하다
[經]注+子帛 裂繻字也 莒魯有怨 紀侯旣昏于魯 使大夫盟莒以和解之 子帛爲魯 結好息民 故傳曰魯故也 比之內大夫 而在莒子上 稱字以嘉之也 字例 在閔元年 密 莒邑 城陽淳于縣東北 有密鄕 [附注] 林曰 하다
[經]十有二月乙卯 夫人子氏 薨注+無傳 桓未爲君 仲子不應稱夫人 隱讓桓以爲大子 成其母喪 以赴諸侯 故經於此稱夫人也 不反哭 故不書葬 例在三年 하다
[經]鄭人伐衛注+凡師有鍾鼓曰伐 例在莊二十九年 [附注] 林曰 伐 天子之權 此諸侯專征伐之始하다
[傳]二年春 公會于潛하니 修惠公之好也
戎請盟이어늘 公辭注+許其脩好 而不許其盟 禦夷狄者 하다
[傳]이러니 向姜不安莒而歸注+[附注] 林曰 姜 向女姓 不安莒者 琴瑟不和 故不安於莒 而歸其父母之國어늘 莒人入向하야 以姜氏還注+傳言失昏姻之義 凡得失小 故經無異文 而傳備其事 案文則是非足以爲戒 他皆放此하다
[傳]司空無駭 入極하니注+魯司徒 司馬 司空 皆卿也 庈父 費伯也 前年城郞 今因得以勝極 故傳於前年發之 하다
[傳]戎請盟이어늘 盟于唐하니 復修戎好也
[傳]九月 紀裂繻 來逆女하니 卿爲君逆也
[傳]冬 紀子帛莒子 盟于密하니 魯故也
[傳]注+治元年取廩延之亂


2년 봄에 은공이 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은 모두 저강氐羌별종別種이다. 인데도 회합會合을 기록한 것은 저들의 중국中國의 풍속을 따라 를 행하였기 때문이니, 모두 중국에 거주居住하는 융자戎子구지駒支 등을 이른다. 진류陳留제양현濟陽縣 동남에 융성戎城이 있다. 나라 땅이다. [부주]林: 이것이 가 융과 외교外交한 시초이다. 그러므로 에서 회합한 것은 춘추의 초기이고, 황지潢池에서 회합한 것은 춘추의 종기終期이니, 이것이 춘추의 시종始終이다.
여름 5월에 거인莒人으로 들어갔다.注+은 작은 나라이다. 초국譙國용항현龍亢縣 동남에 향성向城이 있다. 거국莒國은 지금의 성양城陽거현莒縣이다. 장수將帥작위爵位가 낮고 군사가 적기 때문에 ‘’이라고 칭한 것이다. 땅을 점유占有하지 않은 것을 이라 한다. 그 양공襄公 13년에 보인다. [부주]林: 이것이 남의 나라로 들어간 시초이다.
무해無駭가 군사를 거느리고 으로 쳐들어갔다.注+무해無駭나라의 이다. 은 작은 부용국附庸國이다. 무해無駭에게 를 쓰지 않은 것은 사족賜族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족賜族은공隱公 8년에 보인다. [부주]林: 무해가 군대를 거느린 것에서 대부大夫가 제멋대로 군대를 움직인 단서를 볼 수 있다.
가을 8월 경진일에 은공이 융과 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고평高平방여현方與縣 북쪽에 무당정武唐亭이 있다. 8월에는 경진일이 없고 경진은 7월 9일이니, 날짜에 착오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부주]林: 나라 땅이다. 이것이 결맹結盟시초始初이다.
9월에 나라 열수裂繻가 와서 여자를 맞이하였다.注+열수裂繻기국紀國대부大夫이다. 에 “이 임금을 위해 맞이한 것이다.”고 하여, 이 자신의 아내를 맞이한 것과 구별하였다. 여자를 맞이하기 위해 오는 사람에게 그 나라 임금이 그를 사신使臣으로 보냈다는 ‘使’字를 쓰기도 하고 이를 쓰지 않기도 하며, 혼례婚禮주인主人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사관史官이 각각 그 사실에 따라 기록한 것이니 포폄褒貶는 아니다.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
겨울 10월에 백희伯姬로 시집갔다.注+이 없다. 백희伯姬나라의 딸로 열수裂繻가 맞이한 여자이다.
자백子帛거자莒子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자백子帛열수裂繻이다. 나라와 나라는 묵은 원한이 있기 때문에 기후紀侯나라와 혼인婚姻한 뒤에 대부大夫를 시켜 거자莒子결맹結盟하게 하여 두 나라 사이를 화해和解시키려 한 것이다. 이에 자백子帛이 노나라를 위해 우호를 맺고 백성을 안식시켰기 때문에 에 “나라 때문이다.”고 한 것이다. 자백子帛나라의 대부大夫처럼 대우하여 거자莒子 위에 기록하고 를 칭하여 훌륭하게 여겼다. 를 칭하는 민공閔公원년元年에 보인다. 나라의 으로 성양城陽순우현淳于縣 동북에 밀향密鄕이 있다. [부주]林: 이것이 외국과 특상맹特相盟한 시초이다.
12월 을묘에 부인夫人자씨子氏하였다.注+이 없다. 환공桓公이 아직 임금이 되지 않았으니 중자仲子부인夫人이라 칭할 수 없다. 그러나 은공隱公이 나라를 사양하려고 환공桓公을 태자로 세웠기 때문에 부인夫人로 그 어머니의 을 치르려고 제후諸侯에게 부고赴告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 이를 부인夫人이라 칭한 것이다. 그러나 반곡反哭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사葬事지낸 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 은공隱公 3년에 보인다.
정인鄭人를 쳤다.注+전쟁戰爭종고鍾鼓를 울리며 쳐들어가는 것을 이라 한다. 그 장공莊公 29년에 보인다.[부주]林: 정벌征伐천자天子의 권한인데, 이것이 제후가 제멋대로 정벌한 시초이다.
2년 봄에 은공隱公에서 회합하였으니, 이는 혜공惠公 시대의 우호를 중수重修하기 위함이었다.
융이 결맹을 요청하였으나 은공이 사절하였다.注+수호修好는 허락하고 그 결맹은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이적夷狄을 다스리는 방법은 점차적으로 들어 주고 단번에 만족하게 들어 주지 않아야 하기[不一而足] 때문이다.
거자莒子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향강向姜이 거나라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아注+[부주]林: 향녀向女이다. 나라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부부夫婦금슬琴瑟이 좋지 않기 때문에 거나라에 사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아서 부모의 나라로 돌아간 것이다.으로 돌아가자, 여름에 거인莒人이 군사를 거느리고 으로 들어가서 강씨姜氏를 데리고 돌아왔다.注+의 뜻은 혼인婚姻의 의리를 상실한 것을 말한 것이다. 득실得失이 크지 않기 때문에 문사文辭를 달리 만들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에는 그 일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였으니, 전문傳文을 자세히 살펴보면 시비是非가 판별되어 경계할 바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
사공무해司空無駭가 군사를 거느리고 으로 쳐들어가니, 비금보費庈父(費伯)가 하였다.注+나라는 사도司徒사마司馬사공司空이 모두 이다. 금보庈父비백費伯이다. 전년前年을 쌓았는데, 금년에 그 성으로 인해 멸망滅亡시켰기 때문에 전년의 에 그 일을 말한 것이다.
결맹結盟을 요청하자 가을에 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다시 수호修好한 것이다.
9월에 열수裂繻가 와서 나라 딸을 맞이하였으니, 으로서 임금을 위해 맞이한 것이다.
겨울에 자백子帛거자莒子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이는 나라 때문이었다.
정인鄭人를 쳤으니, 이는 공손활公孫滑의 반란을 토벌討伐한 것이다.注+원년에 늠연廩延탈취奪取한 반란의 죄를 다스린 것이다.


역주
역주1 公會戎于潛 : 中國에서 멀리 사는 西戎은 衣服‧飮食‧言語‧贄幣가 중국과 달라 중국과 會盟할 수 없으므로 杜氏는 이 융을 중국에 와서 사는 羌의 別種이라 한 것이다.
역주2 無駭帥師入極 : 朴致遠의 《雪溪隨錄》에 “제 마음대로 極으로 쳐들어간 것인가? 아니면 君命을 받고 쳐들어간 것인가? 前年 겨울 10월에 公子豫가 제 마음대로 군대를 거느리고 갔던 것으로 보면 無駭도 제 마음대로 쳐들어간 것인 듯한데, 四傳에 모두 제 마음대로 했다는 말이 없으니,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역주3 紀子帛莒子盟于密 : 조선 朴世采의 《春秋補編》에는 ‘帛’字 위에 어떤 나라 이름이 빠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程子의 說을 인용하여, “紀子‧某伯‧莒子 세 사람이 結盟한 것이다. 杜預가 子帛을 裂繻의 字라 한 것은 옳지 않다. 《춘추》에 大夫를 제후 위에 기록한 例는 없다.”고 하였고, 《雪溪隨錄》에서도 이와 같이 말하였다.
역주4 特相盟 : 魯나라 임금이 다른 한 나라 임금과 회합하는 것이다. 두 나라만이 회합할 경우 서로 主人 되기를 사양하기 때문에 회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春秋左氏傳桓公二年傳》 참조
역주5 : 원래는 西方에 살던 민족의 총칭으로 춘추시대에 그 일부가 中原으로 진입하여 漢族과 섞여 살았는데, 己氏戎‧北戎‧允戎‧伊洛戎‧犬戎‧驪戎‧蠻戎 등이 있었다.
역주6 不一而足 : 《公羊傳》文公 9년 傳에 보이는데, 점차적으로 들어 주어야 하고 단번에 만족하게 들어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후세에서는 사물이나 방법이 많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다는 말로 쓰인다.
역주7 莒子……向 : 莒子는 莒나라의 임금으로 姓은 己이며, 向은 莒나라의 남쪽에 있는 작은 나라로 姓은 姜이다.
역주8 費庈父勝之 : 勝은 滅이다. 문공 15년 傳에 “凡勝國曰滅之”라고 하였다. 〈楊注〉
역주9 鄭人……亂也 : 公孫滑은 共叔段의 아들로 叔段이 실패한 뒤에 衛나라로 亡命하여, 위나라의 도움을 받아 鄭나라를 공격해서 廩延을 탈취하였기 때문에 이번에 鄭나라가 衛나라를 공격하여 보복한 것이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