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公伐杞
注+無傳 [附注] 林曰 自是內不書君將 征伐在大夫也 宣公而下 征伐在大夫 是故自伐邾取繹 凡取皆不書其人 自伐杞 凡伐 皆不書公하다
[經]秋七月
에 邾人戕鄫子于鄫
注+傳例曰 自外曰戕 邾大夫就鄫殺鄫子하다
[經]甲戌
에 楚子旅卒
注+未同盟而赴以名 吳楚之葬 僭而不典 故絶而不書 同之夷蠻 하다
[經]歸父還自晉
에 至笙
하야 遂奔齊
注+大夫還 不書 春秋之常也 今書歸父還奔 善其能以禮退 不書族者 非常所及 今特書 略之 笙 魯境外 故不言出 하다
傳
[傳]十八年春에 晉侯衛大子臧伐齊하야 至于陽穀하다
齊侯會晉侯盟于繒
注+[附注] 林曰 齊服晉 故會晉侯 盟于繒하고 以公子疆爲質于晉
하니 晉師還
하다
蔡朝南郭偃逃歸
注+晉旣與齊盟 守者解緩 故得逃 하다
傳
[傳]夏
에 公使如楚乞師
하니 欲以伐齊
注+公不事齊 齊與晉盟 故懼而乞師于楚 不書 微者行 하다
傳
凡自虐其君曰弑
오 自外曰戕
注+弑戕 皆殺也 所以別內外之名 弑者積微而起 所以相測量 非一朝一夕之漸 戕者 卒暴之名이라
傳
[傳]楚莊王卒
하야 楚師不出
하니 旣而用晉師
注+成二年戰鞍是 하다
楚於是乎有蜀之役
注+在成二年冬 蜀 魯地 泰山博縣西北有蜀亭하다
傳
[傳]公孫歸父以襄仲之立公也
로 有寵
注+歸父 襄仲子 이라하야
欲去
하야 以張公室
注+時三桓强 公室弱 故欲去之 以張大公室하야 與公謀
하고 而聘于晉
하니 欲以晉人去之
라
傳
季文子言於朝曰 使我殺適立庶
하야 以失大援者
는 仲也夫
注+適謂子惡 齊外甥 襄仲殺之而立宣公 南通於楚 旣不固 又不能堅事齊晉 故云失大援也 [附注] 林曰 季文子怨歸父欲去三桓 故借此以爲之罪 ᄂ저 臧宣叔怒曰 當其時不能治也
하니 後之人何罪
오
子欲去之
면 許請去之
注+宣叔 文仲子 武仲父 許其名也 時爲司寇 主行刑 言子自以歸父害己欲去者 許請爲子去之하리라하고 遂逐東門氏
注+襄仲居東門 故曰東門氏하다
子家還
에 及笙
注+子家 歸父하야 壇帷
하고 復命於介
注+除地爲壇而張帷 介 副也 將去 使介反命於君하다 旣復命
注+[附注] 林曰 旣致使命於其副介에 袒括髮
注+以麻約髮하고 卽位哭
하고 三踊而出
注+依在國喪禮 設哭位 公薨故하야 遂奔齊
하다
18년 봄에 진후晉侯가 위세자衛世子장臧과 함께 제齊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선공宣公이
기杞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부주]林: 이때부터 노魯나라의 출정出征에 정벌征伐한 임금과 장수將帥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는 정벌征伐의 권한權限이 대부大夫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선공宣公 이후로는 정벌征伐의 권한權限이 대부大夫에게 있었기 때문에 주邾나라를 토벌討伐하여 역繹을 취取한 뒤로는 모든 취取에 모두 취取한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고, 기杞나라를 토벌討伐한 뒤로는 모든 토벌討伐에 모두 공公을 기록하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주인邾人이
증국鄫國에서
증자鄫子를
장살戕殺하였다.
注+전례傳例에 “외국인外國人이 와서 그 나라 임금을 살해殺害하는 것을 ‘장戕’이라 한다.”고 하였다. 주邾나라의 대부大夫가 증국鄫國으로 가서 증자鄫子를 살해殺害한 것이다.
갑술일甲戌日에
초자楚子여旅가
졸卒하였다.
注+동맹同盟하지 않았으나 이름을 기록해 부고赴告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오군吳君과 초군楚君의 장사葬事에는 왕호王號를 참용僭用하여 전례典禮를 어겼기 때문에 폄절貶絶(貶下)해 기록하지 않고, 이만夷蠻과 동일하게 취급取扱하여 명호名號(王의 호칭號稱)를 구한 것을 징계懲戒하였다.
겨울 10월 임술일壬戌日에 선공宣公이 노침路寢에서 훙薨하였다.
귀보歸父가
진晉나라에서 돌아올 때
생笙에 이르러 드디어
제齊나라로 달아났다.
注+대부大夫의 귀환歸還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춘추春秋》의 상례常例인데, 지금 귀보歸父의 귀환歸還과 출분出奔을 기록한 것은 그가 예禮로써 물러난 것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고, 족族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상례常例로 언급言及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 단지 ‘귀보歸父’라고만 기록하고 ‘공손公孫’은 생략省略한 것이다. 생笙은 노魯나라의 경외境外이다. 그러므로 ‘출出’이라고 하지 않았다.
傳
18년 봄에 진후晉侯가 위태자衛太子장臧과 제齊나라를 토벌討伐하여 양곡陽穀에 이르렀다.
제후齊侯가
진후晉侯와
회합會合하여
증繒에서
결맹結盟하고서
注+[부주]林: 제齊나라가 진晉나라에 항복降服하였기 때문에 진후晉侯와 회합會合하여 증繒에서 결맹結盟한 것이다. 공자公子강疆을
진晉나라에
인질人質로 보내니
진군晉軍이 돌아갔다.
채조蔡朝와
남곽언南郭偃이 도망해 돌아갔다.
注+진晉나라가 제齊나라와 결맹結盟하자, 지키는 자가 해이解弛해져 느슨히 지켰기 때문에 도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傳
여름에
선공宣公이
초楚나라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원군援軍을
청請하였으니, 이는
제齊나라를
토벌討伐하고자 해서였다.
注+선공宣公이 제齊나라를 섬기지 않으니, 제齊나라가 진晉나라와 동맹同盟하였다. 그러므로 선공宣公은 겁이 나서 초楚나라에 원군援軍을 청請한 것이다. 사자使者로 간 사람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미천微賤한 자가 갔기 때문이다.
傳
가을에 주인邾人이 증국鄫國으로 가서 증자鄫子를 장살戕殺하였다.
범례凡例에 의하면
내국인內國人이 그 임금을
학살虐殺하는 것을 ‘
시弑’라 하고,
외국인外國人이 와서 그 나라 임금을 죽이는 것을 ‘
장戕’이라 한다.
注+시弑와 장戕은 모두 살해殺害하는 것인데, 내국인內國人이 죽였느냐 외국인外國人이 죽였느냐를 구별하는 명칭名稱이다. 시弑는 역심逆心이 조금씩 쌓여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측량測量(長時間을 두고 헤아림)하고,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진행進行되는 것이 아니다. 장戕은 갑자기 살해殺害하는 명칭名稱이다.
傳
초장왕楚莊王이
졸卒하여
초군楚軍이
출동出動하지 않으니,
노魯나라는 얼마 뒤에
진군晉軍을
이용利用하였다.
注+성공成公 2년에 안鞍에서 전쟁戰爭한 것이 이것이다.
초楚나라는 이로 인해
촉蜀을 치는
전쟁戰爭을 일으켰다.
注+촉蜀의 전쟁戰爭은 성공成公 2년 겨울에 있었다. 촉蜀은 노魯나라 땅으로 태산泰山박현博縣 서북쪽에 촉정蜀亭이 있다.
傳
공손公孫귀보歸父는
양중襄仲이
선공宣公을 세웠기 때문에
선공宣公의
총애寵愛를 받았다.
注+귀보歸父는 양중襄仲의 아들이다.
귀보歸父는
삼환三桓을
제거除去하고
공실公室의
권위權威를
신장伸張시키고자 하여,
注+이때 삼환三桓은 강强하고 공실公室은 약弱하였다. 그러므로 삼환三桓을 제거除去하여 공실公室을 강성强盛[張大]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선공宣公과
모의謀議하고서
진晉나라에
빙문聘問하였으니, 이는
진인晉人의 힘을 빌어
삼환三桓을
제거除去하고자 해서였다.
傳
계문자季文子가
조정朝廷에서 말하기를, “우리로 하여금
적자適子(文公의
태자太子악惡)를 죽이고
서자庶子(宣公)를 세워
대국大國의
외원外援을 잃게 한 것은
양중襄仲이다.”
注+적자適子는 태자太子악惡을 이른다. 악惡은 제후齊侯의 생질甥姪인데, 양중襄仲이 그를 죽이고 선공宣公을 세우고서 남쪽으로 초楚나라와 통호通好하였으나, 이미 나라를 강고强固히 하지 못하였고, 또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를 견실堅實히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대국大國의 외원外援을 잃었다고 한 것이다. [부주]林: 계문자季文子는 귀보歸父가 삼환三桓을 제거除去하려는 것을 원망怨望하였기 때문에 양중襄仲의 죄罪를 빌려다가 귀보歸父의 죄罪로 삼고자 한 것이다.고 하니,
장선숙臧宣叔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그
당시當時에는
양중襄仲의
죄罪를 다스리지 않았으니, 그 아들(後人)에게 무슨
죄罪가 있는가?
그러나 그대가 그를
제거除去하고자 한다면 내가 그를
제거除去하겠다.”
注+선숙宣叔은 문중자文仲子로 무중武仲의 부친父親이다. 허許는 그의 이름이다. 이때 사구司寇가 되어 행형行刑을 주관主管하였기 때문에 ‘그대는 귀보歸父가 그대를 해칠 사람으로 여겨 제거除去하고자 한다면 내가[許] 그대를 위해 그를 제거除去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라고 하고서, 드디어
동문씨東門氏(襄仲의
족속族屬)를
축출逐出하였다.
注+양중襄仲이 동문東門에 살았기 때문에 동문씨東門氏라 한 것이다.
자가子家(歸父)가 돌아올 때
생笙에 이르러
注+자가子家는 귀보歸父이다. 단壇을 쌓아 휘장을 치고서
개사介使(副使)에게
注+땅을 깨끗이 쓴 뒤에 단壇을 만들고서 휘장을 친 것이다. 개介는 부사副使이다. 떠나려 할 때 개사介使로 하여금 임금께 복명復命하게 한 것이다. 복명復命한 뒤에
注+[부주]林: 이미 그 사명使命을 자기의 부사副使에게 전傳[致]한 것이다. 윗옷의 왼쪽 소매를 벗고 머리를 삼으로 묶고서
注+삼으로 머리를 묶은 것이다. 자기 자리로 가서
선공宣公을 위해
곡哭하고 발을 세 번 구르고 나와서,
注+국내國內에 있을 때의 상례喪禮에 의해 곡위哭位를 설치設置한 것은 선공宣公이 훙薨하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제齊나라로 도망갔다.
경經에 ‘귀부환자진歸父還自晉’이라고 기록한 것은 그를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