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四年春王正月
에 公會齊侯宋公陳侯衛侯鄭伯許男曹伯
하다
蔡潰
어늘注+民逃其上曰潰 例在文三年 遂伐楚
하야 次于陘
하다注+遂 兩事之辭 楚强 齊欲綏之以德 故不速進而次陘 陘楚地 潁川召陵縣南有陘亭
[經]夏
에 許男新臣卒
하다注+未同盟而赴以名 [附注] 林曰 卽許叔也
[經]楚屈完來
하다注+屈完 楚大夫也 楚子遣完如師以觀齊 屈完覩齊之盛 因而求盟 故不稱使 以完來盟爲文 齊桓退舍以禮楚 故盟召陵 召陵 潁川縣也
[經]秋
에 하다注+受齊命討陳之罪 而以與謀爲文者 時齊不行 使魯爲主 與謀例在宣七年
[經]冬十有二月
에 公孫玆帥師會齊人宋人衛人鄭人許人曹人侵陳
하다注+公孫玆 叔牙子叔孫戴伯
傳
[傳]四年春
에 齊侯以諸侯之師侵蔡
하니 蔡潰
하다注+[附注] 林曰 齊桓公霸諸侯攘夷狄尊天子 蔡自北杏一與中國之會 而棄我諸姬 甘心黨楚 故齊帥諸侯伐楚 而先事侵蔡 潰蔡者 先披楚之黨也
君處北海
하고 寡人處南海
하야 唯是風馬牛不相及也
注+楚界猶未至南海 因齊處北海 遂稱所近 牛馬風逸 蓋末界之微事 故以取喩 [附注] 林曰 牝牡相誘曰風 言雖馬牛風逸 牝牡相誘 亦不相及 喩齊楚遠不相干也 니 不虞君之涉吾地也
라
昔召康公命我先君大公
注+召康公 周大保召公奭也 曰 五侯九伯
을 女實征之
하야 以夾輔周室
注+五等諸侯 九州之伯 皆得征討其罪 齊桓因此命以夸楚하라하시고
賜我先君履
하되 東至于海
하고 西至于河
하고 南至于穆陵
하고 北至于無棣
하니라注+穆陵無棣 皆齊竟也 履 所踐履之界 齊桓又因以自言其盛 [附注] 林曰 索隱曰 無棣 在遼西孤竹 服虔以爲 大公受封竟界所至 不然也 蓋言其征伐所至之域也 愚按 是時管仲相齊 子文相楚 正是的對 楚旣以涉地何故爲問 則齊不應歷言受封境界以自狹 當以征討所至爲正
爾貢包茅不入
하야 王祭不共
이라 無以縮酒
하니 寡人是徵
하노라注+包 裹束也 茅 菁茅也 束茅而灌之以酒爲縮酒 尙書 包匭菁茅 茅之爲異未審 [附注] 林曰 徵 亦問也
昭王南征而不復
하시니 寡人是問
하노라注+昭王 成王之孫 南巡守 涉漢 船壞而溺 周人諱而不赴 諸侯不知其故 故問之
對曰 貢之不入
은 寡君之罪也
니 敢不共給
이리오마는 昭王之不復
은 君其問諸水濱
하라注+昭王時 漢非楚竟 故不受罪
師進
하야 次于陘
하다注+楚不服罪 故復進師 [附注] 林曰 楚語云 先君蚡冒之所以服陘隰也 陘必爲楚之要地 故齊以諸侯之師 進而據之焉
夏
에 楚子使屈完如師
注+如陘之師 觀强弱하니 師退
하여 次于召陵
하다注+完請盟故
齊侯陳諸侯之師
하고 與屈完乘而觀之
注+乘共載할새 齊侯曰
先君之好是繼
니 與不穀同好如何
오注+言諸侯之附從 非爲己 乃尋先君之好 謙而自廣 因求與楚同好 孤寡不穀 諸侯謙稱
君惠徼福於敝邑之社稷
注+[附注] 朱曰 徼 求也 言齊君惠我楚國 肯與同好 則楚國社稷之神 必福齊也하야 辱收寡君
이 寡君之願也
로소이다
以此衆戰이면 誰能禦之며 以此攻城이면 何城不克이리오
君若以德綏諸侯
면 誰敢不服
이리오마는 君若以力
이면 楚國方城以爲城
하고 漢水以爲池
注+方城山 在南陽葉縣南 以言竟土之遠 漢水出武都 至江夏南入江 言其險固以當城池하리니 雖衆
이나 無所用之
리이다
傳
師出於陳鄭之間
이면 國必甚病
注+申侯 鄭大夫 當有共給之費故이어니와 若出於東方
하야 觀兵於東夷
하고 循海而歸
면 其可也
리라注+東夷 郯莒徐夷也 觀兵 示威 申侯曰 善
타하다
申侯見曰 師老矣
니 若出於東方而遇敵
이면 懼不可用也
注+[附注] 朱曰 恐吾師老不可用以戰鬪나
若出於陳鄭之間
하야 共其資糧屝屨
면 其可也
리이다注+扉 草屨 齊侯說
하야 與之虎牢
注+還以鄭邑賜之하고 執轅濤塗
하다注+[附注] 朱曰 爲明年濤塗譖申侯張本
傳
[傳]秋
에 伐陳
하니 討不忠也
라注+以濤塗爲誤軍道
傳
[傳]許穆公卒于師
어늘 葬之以侯
하니 禮也
라注+男而以侯禮 加一等
凡諸侯薨于朝會
면 加一等
注+諸侯命有三等 公爲上等 侯伯爲中等 子男爲下等하고 死王事
면 加二等
注+謂以死勤事하니 於是有以袞斂
이니라注+袞衣 公服也 謂加二等
傳
陳成
하니 歸轅濤塗
하다注+陳服罪 故歸其大夫 戴 諡也
傳
[傳]初에 晉獻公欲以驪姬爲夫人하야 卜之하니 不吉하고 筮之하니 吉하다
이니이다注+物生而後有象 象而後有滋 滋而後有數 龜象筮數 故象長數短 [附注] 林曰 象在先 數在後 故以先爲長 以後爲短 朱曰 卜人欲公從卜 故托言筮短龜長 其實龜筮無分長短
且其繇曰 專之渝
하야 하리라注+繇 卜兆辭 渝 變也 攘 除也 羭 美也 言變乃除公之美 [附注] 林曰 言獻公專愛 驪姬必將改變其心 專寵之變 將奪公之所美也 蓋指申生 言奪公之嫡也
一薰一蕕
면 十年尙猶有臭
注+薰 香草 蕕 臭草 十年有臭 言善易消 惡難除 [附注] 林曰 薰譬申生之徒 蕕譬驪姬之黨 言香臭共處 則香不勝臭 猶善不勝惡라하니 必不可
이니다
及將立奚齊
에 旣與中大夫成謀
注+[附注] 林曰 中大夫 里克也 獻公欲廢大子 憚里克未敢 里克曰 中立其免乎 是成謀也하고 姬謂大子曰
君夢齊姜
하니 必速祭之
하라注+齊姜 大子母 言求食
大子祭于曲沃
하고 歸胙于公
注+胙 祭之酒肉하니 公田
이라注+[附注] 朱曰 時獻公適出田獵
姬寘諸宮
이라가 六日
에 公至
하니 毒而獻之
하다注+毒酒經宿輒敗 而經六日 明公之惑
公祭之地
하니 地墳
注+[附注] 林曰 驪姬謂公酒食自外來 不可不試 故令公祭地 毒酒至地 地爲墳起하고 與犬
하니 犬斃
하고 與小臣
하니 小臣亦斃
하다注+[附注] 林曰 又以其肉與犬食之 中毒而死 又以酒肉與小臣食之 亦中毒而死
或謂大子
호되 子辭
면 君必辯焉
하리이다注+以六日之狀自理 大子曰
君老矣
니 吾又不樂
하노라注+吾自理則姬死 姬死則君必不樂 不樂 爲由吾也
君實不察其罪
注+[附注] 朱曰 言獻公不知我實無罪而信姬氏之讒 謂我欲弑君하시니 被此名也以出
이면 人誰納我
리오
姬遂譖二公子曰 皆知之
注+[附注] 林曰 言二公子皆知大子置毒之謀라하니 重耳奔蒲
하고 夷吾奔屈
하다注+二子時在朝 爲明年晉殺申生傳
4년 봄 주왕周王 정월에 공公이 제후齊侯‧송공宋公‧진후陳侯‧위후衛侯‧정백鄭伯‧허남許男‧조백曹伯과 연합하여 채蔡나라를 침공侵攻하였다.
채군蔡軍이 흩어져 도망하자,
注+백성들이 그 임금에게서 도망하는 것을 ‘궤潰’라 한다. 예例가 문공文公 3년 전傳에 보인다. 드디어
초楚나라를
토벌討伐하여
형陘에 주둔하였다.
注+수遂는 두 일이 계속될 때 쓰이는 말이다. 초楚나라가 강强하기 때문에 제齊나라는 덕德으로 회유懷柔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급속히 진격進擊하지 않고 형陘에 주둔한 것이다. 형陘은 초楚나라 땅이다. 영천潁川소릉현召陵縣 남쪽에 형정陘亭이 있다.
여름에
허남許男신신新臣이
졸卒하였다.
注+동맹국同盟國이 아닌데도 이름으로 부고赴告하였기 때문에 경經에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부주]林: 신신新臣은 바로 허숙許叔이다.
초楚나라
굴완屈完이
제후諸侯의
군중軍中으로 와서 맹약하고,
소릉召陵에서
결맹結盟하였다.
注+굴완屈完은 초楚나라 대부大夫이다. 초자楚子가 굴완屈完을 제후諸侯의 군중軍中으로 보내어 제齊나라의 동정動靜을 살피게 하니, 굴완屈完이 제군齊軍의 강성强盛한 것을 보고 결맹結盟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사使’라고 칭하지 않고, 굴완屈完이 와서 결맹結盟한 것으로 글을 만든 것이다. 제환공齊桓公이 30리를 물러나 초楚나라를 예우禮遇하였기 때문에 소릉召陵에서 결맹結盟한 것이다. 소릉召陵은 영천현潁川縣이다.
제인齊人이
진陳나라
원도도轅濤塗를 잡았다.
注+원도도轅濤塗는 진陳나라 대부大夫이다.
가을에
강인江人‧
황인黃人과
진陳나라를 토벌하였다.
注+제齊나라의 명을 받아 진陳나라의 죄를 친 것인데 여모與謀(모의에 참여함)로 글을 만든 것은 이때 제齊나라는 가지 않고 노魯나라로 하여금 토벌을 주관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여모與謀의 예例는 선공宣公 7년에 보인다.
8월에
희공僖公이
초楚나라
토벌討伐에서 돌아왔다.
注+전傳이 없다. 종묘宗廟에 고한 것이다.
겨울 12월에
공손자公孫玆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제인齊人‧
송인宋人‧
위인衛人‧
정인鄭人‧
허인許人‧
조인曹人과 연합하여
진陳나라를
침공侵攻하였다.
注+공손자公孫玆는 숙아叔牙의 아들 숙손대백叔孫戴伯이다.
傳
4년 봄에
제후齊侯가
제후諸侯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채蔡나라를
침공侵攻하니
채사蔡師가 흩어져 도망하였다.
注+[부주]林: 제환공齊桓公은 제후諸侯의 패자霸者가 되어 이적夷狄을 물리치고 천자天子를 높였다. 채蔡나라는 북행北杏에서 한 번 중국中國의 회맹會盟에 참가한 뒤로는 우리 여러 희성국姬姓國을 버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초楚나라의 편이 되었다. 그러므로 제환공齊桓公이 제후諸侯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楚나라를 토벌할 때 먼저 채蔡나라를 쳐서 채蔡나라를 궤멸潰滅시킨 것은 먼저 초楚나라의 편을 갈라 놓은 것이다.
드디어 초楚나라를 토벌하니 초자楚子가 제후諸侯의 군중軍中으로 사신使臣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은
북해北海에 살고
과인寡人은
남해南海에 살아 바람난
우마牛馬도 서로 미칠 수 없는 먼 거리이니,
注+초楚나라의 경계가 남해南海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제齊나라가 북해北海에 있으므로 인해 가까운 곳을 들어 말한 것이다. 우마牛馬가 바람이 나서 달아나는 것은 동물세계動物世界의 작은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비유로 취한 것이다. [부주]林: 암수가 서로 유혹하는 것을 바람[風]이라 한다. 마소가 바람이 나 달아나서 암수가 서로 유혹하려 해도 거리가 멀어 미칠 수 없다는 말이니, 제齊나라와 초楚나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관계가 없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임금께서 우리의 땅에 오실 줄은 생각지 못하였소.
“옛날에
소강공召康公이 우리
선군先君태공太公에게
명命하기를
注+소강공召康公은 주周나라 태보太保소공召公석奭이다. ‘5
후侯‧9
백伯을 그대가 실로
토벌討伐하여
왕실王室을
보좌輔佐하라.’고 하고서,
注+오등제후五等諸侯와 구주백九州伯의 죄를 모두 정토征討할 수 있는 것이다. 제환공齊桓公은 이 명命을 가지고 초楚나라에 과시誇示한 것이다.
우리
선군先君에게
정벌征伐할 수 있는 범위를
동東으로는 바다까지
서西로는
황하黃河까지
남南으로는
목릉穆陵까지
북北으로는
무체無棣까지로 정해 주셨다.
注+목릉穆陵과 무체無棣는 모두 제齊나라 경계이다. 이履는 정벌할 수 있는 땅의 경계이다. 제환공齊桓公은 또 이것을 가지고서 스스로 제齊나라의 강성함을 말한 것이다. [부주]林: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무체無棣는 요서遼西고죽孤竹에 있으니, 복건服虔이 ‘태공太公이 봉지封地로 받은 경계가 이곳까지이다.’고 한 것은 옳지 않다. 대체로 정벌해 갈 수 있는 지역을 말한 것이다.”고 하였다. 내가 고찰하건대 이때 관중管仲은 제齊나라의 승상이었고, 자문子文은 초楚나라의 승상이었으니, 서로 걸맞은 상대였다. 초楚나라가 이미 ‘우리의 땅에 온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고 보면 제齊나라는 봉지封地로 받은 경계를 차례로 말하여 스스로의 활동 범위를 좁히지 않았을 것이니, 정벌할 수 있는 경계로 보는 것이 옳다.
,
과인寡人은 이 죄를 묻노라.
注+포包는 싸서 묶은 다발이고, 모茅는 정모菁茅이다. 다발로 묶은 띠 위에 술을 부어 거르는 것을 축주縮酒라 한다. 《상서尙書》에 말한 ‘포궤정모包匭菁茅’가 모茅의 이명異名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부주]林: 징徵도 묻는 것이다.
그리고
소왕昭王이
남방南方을
순수巡狩하다가 돌아오지 못하셨으니,
과인寡人은 이것도 묻노라.”
注+소왕昭王은 성왕成王의 손자이다. 소왕昭王이 남방을 순수巡狩할 때 한수漢水를 건너다가 배가 부서져 익사溺死하였으나, 주인周人이 이를 숨기고 부고赴告하지 않으니, 제후諸侯는 그 까닭을 몰랐다. 그러므로 물은 것이다.
그러자
초楚나라
사자使者가 “
공물貢物을 바치지 않은 것은 우리 임금의
죄罪이니, 감히 바치지 않겠는가마는
소왕昭王이 돌아가지 못한 것은 물가에 가서 물어 보라.”라고 하였다.
注+소왕昭王 때는 한수漢水가 초楚나라의 경내境內가 아니었기 때문에 죄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제후諸侯의 군대가 전진하여
형陘에 주둔하였다.
注+초楚나라가 죄罪를 승복承服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군대를 전진시킨 것이다. [부주]林: 《초어楚語》에 “선군先君분모蚡冒가 형습陘隰을 굴복시킨 방법이다.”고 하였으니, 형陘은 필시 초楚나라의 요지要地인 듯하다. 그러므로 제齊나라가 제후의 군대를 거느리고 전진하여 그곳을 점거占據한 것이다.
여름에
초자楚子가
굴완屈完을
제후諸侯의
군중軍中으로 보내니,
注+형陘에 주둔한 제후諸侯의 군중軍中으로 보낸 것은 제후군諸侯軍의 강약强弱을 살피기 위함이었다.제후諸侯의 군대가
퇴각退却하여
소릉召陵에 주둔하였다.
注+굴완屈完이 결맹結盟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제후齊侯가
제후諸侯의 군대를
포진布陣하고서
굴완屈完과 한 수레에
동승同乘하여 군대를
사열査閱할 때
注+승乘은 수레에 함께 탄 것이다.제후齊侯가 말하였다.
“내가 군대를 이끌고 이곳까지 온 것이 어찌 나 개인을 위해서이겠는가?
注+제후諸侯가 나에게 의지해 순종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선군先君 때의 우호友好를 다시 다지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불곡不穀이라고 겸칭謙稱하여 스스로의 입지立地를 넓히고서 이어 초楚와 우호友好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고孤‧과寡‧불곡不穀은 모두 제후諸侯의 겸칭謙稱이다.
우리 선군先君들께서 맺은 우호友好를 계승繼承하기 위함이니, 나와 우호友好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임금님께서 우리나라에
왕림枉臨[惠]하시어 우리나라의
사직社稷에
복福을 구하시고
注+[부주]朱: 요徼는 구하는 것이니, 제군齊君이 우리 초楚나라에 은혜를 베풀어 기꺼이 우호友好를 맺는다면 초楚나라 사직社稷의 신神이 반드시 제齊나라에게 복福을 줄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 임금님을 거두어 주시는 것이 우리 임금님의 바람입니다.”
“이 무리를 거느리고서 전쟁한다면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며, 이 무리를 거느리고서 성을 공격한다면 어떤 성인들 함락陷落하지 못하겠는가?”
“임금님께서 만약 덕德으로 제후諸侯들을 회유懷柔한다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임금님께서 만약 무력을 사용하신다면 우리 초楚나라는 방성산方城山을 성城으로 삼고 한수漢水를 해자로 삼을 것이니, 군대가 아무리 많아도 사용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굴완屈完이
제후諸侯와
결맹結盟하였다.
注+방성산方城山은 남양南陽섭현葉縣 남쪽에 있다. 이는 강토疆土가 광원廣遠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한수漢水는 무도武都에서 발원發源해서 강하江夏에 이르러 남쪽으로 흘러 장강長江으로 들어간다. 이는 그 험고險固함이 성지城池와 맞먹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傳
진陳나라 원도도轅濤塗가 정鄭나라 신후申侯에게 말하기를
“군대가
진陳나라와
정鄭나라 사이로
행군行軍하면 우리
양국兩國이 틀림없이 심한
피해被害를 입을 것이지만
注+신후申侯는 정鄭나라 대부이다. 당연히 비용을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행군行軍하여
동이東夷에게
무력武力을
과시誇示하고서
해변海邊을 따라
회군回軍한다면 우리
양국兩國에는 아무 피해가 없을 것이다.”고 하니,
注+동이東夷는 담이郯夷‧거이莒夷‧서이徐夷이다. 관병觀兵은 위력威力을 과시하는 것이다.신후申侯가 “좋다.”고 하였다.
원도도轅濤塗가
제후齊侯에게
고告하니
제후齊侯가 허락하였다.
注+동쪽으로 행군行軍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신후申侯가
제후齊侯를
알현謁見하고서 말하기를 “군대가
출정出征한 지 오래되어 모두 지쳐 있으니 만약 동쪽으로 행군하다가 적이라도 만난다면 군대를 쓸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注+[부주]朱: 우리 군대가 지쳤으므로 이들을 사용해 전투할 수 없을까 두렵다는 말이다.
진陳나라와
정鄭나라 사이로
행군行軍하면서
군량軍糧‧신발 등을 공급받는다면 아무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注+비扉는 짚신이다.제후齊侯는 기뻐하여
신후申侯에게
호뢰虎牢를 주고,
注+정鄭나라의 읍邑을 도로 그에게 상賞으로 준 것이다.원도도轅濤塗를 잡아 가두었다.
注+[부주]朱: 명년明年에 원도도轅濤塗가 신후申侯를 참소한 장본張本이다.
傳
가을에
진陳나라를
토벌討伐하였으니, 이는
원도도轅濤塗의
불충不忠을
토벌討伐한 것이다.
注+원도도轅濤塗가 행군行軍하는 길을 그르쳤다고 여겨서이다.
傳
허목공許穆公이
군중軍中에서
졸卒하였으므로
후侯의
예禮로
장사葬事 지냈으니
예禮에 맞았다.
注+남작男爵인데 후작侯爵의 예로 장사 지낸 것은 한 등급을 올려 준 것이다.
제후諸侯가
조현朝見이나
회맹會盟 중에 죽으면 한
등급等級 올려 주고,
注+제후諸侯의 명命에는 세 등급이 있는데, 공公이 상등上等이고 후侯‧백伯이 중등中等이고, 자子‧남男이 하등下等이다.왕사王事에 죽으면 두
등급等級을 올려 주니,
注+죽음으로써 왕사王事에 힘을 다했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에 한해
곤복袞服으로
염殮할 수 있다.
注+곤의袞衣는 공公의 의복衣服이니, 두 등급을 올려 준다는 말이다.
傳
겨울에 숙손대백叔孫戴伯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제후諸侯의 군대와 연합聯合해 진陳나라를 침공侵攻하였다.
진陳나라가
화친和親을 요청하니
원도도轅濤塗를
진陳나라로 돌려보냈다.
注+진陳나라가 죄罪를 승복承服하였기 때문에 그 대부大夫를 돌려보낸 것이다. 대戴는 시호諡號이다.
傳
당초에 진헌공晉獻公이 여희驪姬를 부인夫人으로 삼고자 하여 거북점을 치니 불길不吉하고 시초점蓍草占을 치니 길吉하였다.
“시초점은 맞는 확률이 낮고 거북점은 확률이 높으니, 높은 쪽을 따르는 것만 못합니다.
注+태초太初에 동물動物‧식물植物이 생긴 뒤에 형상形象이 생겼고, 형상이 생긴 뒤에 동식물動植物이 점차 많아졌고, 많아진 뒤에 다소多少의 수數가 생겼다. 거북점은 형상을 가지고 길흉吉凶을 점치고, 시초점은 숫자數字를 가지고 화복禍福을 점친다. 그러므로 형상으로 점치는 것이 맞는 확률이 높고, 숫자로 점치는 것이 확률이 낮다는 말이다. [부주]林: 형상이 먼저 생기고, 수가 뒤에 생겼기 때문에 먼저 생긴 형상이 맞는 확률이 높고, 뒤에 생긴 수가 맞는 확률이 낮다는 말이다.[부주]朱: 복인卜人은 헌공獻公이 거북점을 따르기를 원했기 때문에 시초점은 맞는 확률이 낮고 거북점은 확률이 높다고 핑계 댄 것일 뿐이고, 실은 거북점과 시초점의 장단長短을 구분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요繇에 ‘오로지 그만을
총애寵愛하면 마음이 변하여
공公의 숫양[羭]을 빼앗을 것이다.
注+요繇는 점사占辭이다. 투渝는 변變함이고, 양攘은 제거함이고, 유羭는 아름다움이다. 여희驪姬의 마음이 변하여 공公이 아름답게 여기는 사람을 제거한다는 말이다. [부주]林: 헌공獻公이 오로지 여희驪姬만을 총애하면 여희驪姬는 반드시 마음을 바꾸어 먹을 것이라는 말이다. 오로지 여희驪姬만을 총애하면 여희驪姬의 마음이 변하여 장차 공이 아름답게 여기는 것을 빼앗아 간다는 것은 신생申生을 가리킨 것이니, 공公의 적자嫡子를 빼앗아 간다는 말이다.
향초香草와
악초惡草를 한 그릇에 담아두면 10년이 지나도 오히려
악취惡臭가 난다.’고 하였으니,
注+훈薰은 향초香草이고, 유蕕는 취초臭草이다. 10년이 지나도 악취惡臭가 난다는 것은 선善은 소멸消滅되기 쉽고, 악은 제거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부주]林: 훈薰은 신생申生의 무리를 비유하고, 유蕕는 여희驪姬의 무리를 비유한 것이다. 향초香草와 취초臭草를 한 그릇에 담아두면 향취香臭가 악취惡臭를 이길 수 없는 것이 선인善人이 악인惡人을 이길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절대로 안 됩니다.”
뒤에 여희驪姬는 해제奚齊를 낳고, 그 동생은 탁자卓子를 낳았다.
해제奚齊를
태자太子로 세우려할 때에 미쳐 이미
중대부中大夫와 계획을 정하고서
注+[부주]林: 중대부中大夫는 이극里克이다. 헌공獻公은 태자太子를 폐廢하고 싶었지만 이극里克을 꺼려 감히 폐廢하지 못하자, 이극里克은 “내가 중립中立을 지켜야 화禍를 면할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계획을 정한 것이다.여희驪姬가
태자太子에게 말하였다.
“임금께서 꿈에
제강齊姜을 보셨다고 하니
태자太子는 속히 제사를 지내시오.”
注+제강齊姜은 태자太子의 어머니이다. 이는 음식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태자太子가
곡옥曲沃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서
헌공獻公에게
조胙를 올리니,
注+조胙는 제사 지낸 술과 고기이다. 이때
헌공獻公은 사냥을 나가고 없었다.
注+[부주]朱: 이때 헌공獻公은 마침 사냥을 나가고 없었다.
여희驪姬가 그것을
궁중宮中에 두었다가 6일 만에
헌공獻公이 돌아오자 그
조胙에
독毒을 쳐서 올렸다.
注+독을 친 술은 하루 밤만 지나도 바로 색깔이 변하는데 6일이 지난 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헌공獻公의 미혹迷惑함을 밝힌 것이다.
헌공獻公이 그 술을 땅에 뿌리니 땅이 끓어오르고,
注+[부주]林: 여희驪姬는 헌공獻公에게 “밖에서 들어온 주식酒食은 시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고서 공公에게 술을 땅에 뿌리게 한 것이다. 독주毒酒가 땅에 닿자 땅이 끓어오른 것이다. 그 고기를 개에게 주니 개가 죽고, 그 고기와 술을
소신小臣에게 주니
소신小臣도 죽었다.
注+[부주]林: 또 그 고기를 개에게 주어서 먹게 하니 개가 중독中毒되어 죽고, 또 그 술과 고기를 소신小臣에게 주어 먹게 하니 소신도 중독中毒되어 죽었다.
여희驪姬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 음모陰謀는 태자太子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태자太子가
신성新城으로 도망가니
注+신성新城은 곡옥曲沃이다.헌공獻公은
태자太子의 스승
두원관杜原款을 죽였다.
어떤 사람이
태자太子에게 말하기를 “
태자太子께서 변명하시면 임금께서 반드시
죄罪의
유무有無를
분변分辨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자,
注+궁중宮中에 6일 동안 두었던 상황狀況을 가지고 변명辨明[自理]하라는 말이다.태자太子가 말하였다.
“임금께서는 여희驪姬가 없으면 편히 거처居處하지 못하시고 배불리 자시지도 않으신다.
내가 무죄無罪함을 밝힌다면 여희驪姬는 반드시 죄罪를 받게 될 것이다.
임금께서는 늙으셨으니
여희驪姬를 잃으면 반드시 즐거워하지 않으실 것이고 이렇게 되는 것을 나도 즐거워하지 않는다.”
注+내가 변명하면 여희驪姬는 죽을 것이고, 여희驪姬가 죽으면 임금께서는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이러한 일이 생기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임금께서 실로 나에게 죄가 없음을 살피시지 못하시니,
注+[부주]朱: 헌공獻公은 나에게 참으로 죄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희씨姬氏의 참소만을 믿고서 내가 임금을 시해弑害하려 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이런
죄명罪名을 쓰고서 도망간다면 누가 나를 받아주겠는가?”
12월 무신일戊申日에 태자太子가 신성新城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여희驪姬가 드디어 “두
공자公子도 모두 이
음모陰謀를 알고 있었다.”
注+[부주]林: 두 공자公子도 모두 태자太子가 독을 친 음모陰謀를 알고 있다는 말이다.고
참소讒訴하니,
중이重耳는
포성蒲城으로 도망가고,
이오夷吾는
굴읍屈邑으로 도망갔다.
注+두 공자公子가 이때 조정朝廷에 있었다. 이것이 명년明年에 진晉나라가 신생申生을 죽인 전傳의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