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봄에 천왕天王이 남계南季를 노나라에 보내어 빙문聘問하였다.注+전傳이 없다. 남계南季는 천자天子의 대부大夫이다. 남南은 씨氏이고 계季는 자字이다.
3월 계유일에 크게 비가 내리며 천둥 번개가 쳤고, 경신일에 큰 눈이 내렸다.注+3월은 지금의 정월正月이다.
협挾이 졸卒하였다.注+전傳이 없다. 협挾은 노魯나라 대부大夫이다. 족族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족族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여름에 낭郎에 성을 쌓았다.
가을 7월이다.
겨울에 은공이 제후齊侯와 방防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방防은 노魯나라 땅이다. 낭야琅邪화현華縣 동남에 있다.
傳
9년 봄 3월 계유일에 크게 장마비가 내리며 천둥이 쳤다는 것은 시작한 날을 기록한 것이다.注+계유일을 기록한 것은 비가 시작한 날을 기록한 것이다. [부주]林: 경經에는 “크게 비가 내리며 천둥이 쳤다.”고 기록하였는데. 전傳에는 “장마가 지고 천둥이 쳤다.”고 하였으니, 이때부터 계속해 비가 내려 장마가 지고 또 천둥이 쳤음을 알 수 있다.
경진일에 큰 눈이 내렸다는 것도 이와 같다.
경經에 이를 기록한 것은 철이 정상을 잃었기 때문이다.注+하력夏曆의 정월正月은 미약微弱한 양陽이 비로소 생기는 때이니 천둥이 칠 수 없고, 이미 천둥이 쳤다면 큰 눈이 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모두 “철이 정상을 잃었다.”고 한 것이다.
비가 3일 이상 내리는 것을 장마라 하고,注+이것은 경經에 기록된 ‘임霖’字를 해석한 것인데, 현재 경經에 ‘임霖’字가 없는 것은 경문經文에 탈오脫誤가 생긴 것이다. 눈이 평지에 한 자[尺] 이상 쌓이는 것을 큰 눈[大雪]이라 한다.
傳
여름에 낭郞에 성을 쌓으니, 이를 기록한 것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傳
송상공宋殤公이 주왕周王께 조현朝見하지 않으니,注+주왕周王에게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은 것이다.정백鄭伯이 주왕周王의 좌경사左卿士로 주왕周王의 명을 받들어 송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정나라가 송나라를 토벌하였으되, 송나라는 정나라가 송나라의 외곽外廓까지 쳐들어왔을 때 노나라가 구원병救援兵을 보내주지 않은 일로 은공을 원망하여, 이번 일을 노나라에 통고하지 않으니,注+입부入郛의 전쟁은 은공 5년에 있었다. 은공이 7년에 주邾나라를 토벌하여 송宋나라를 즐겁게 하고자 하였으나, 송나라는 여전히 노나라와 불화不和하였다. 은공은 노하여 송나라와 사신使臣의 왕래를 끊었다.
傳
가을에 정인鄭人이 주왕周王의 명命을 받들고 노魯나라에 와서 송나라를 토벌하라고 통고하였다.注+사신使臣을 보내어 주왕周王의 명命을 전한 것이다. 송나라를 토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와서 송나라를 치라고 고한 것이다.
傳
겨울에 은공이 제희공齊僖公과 방防에서 회합會合하였으니, 이는 송나라 토벌할 일을 모의謀議하기 위함이었다.注+[부주]林: 춘추 초기에 제齊와 정鄭이 한편이었다. 그러므로 정鄭이 송나라를 토벌하라고 노魯에 고하자, 제희공齊僖公이 노魯와 회합會合하여 송나라 토벌할 일을 모의한 것이다.
傳
북융北戎이 정鄭나라를 침공하니注+[부주]林: 북융北戎이라고 말하여 중국中國에 섞여 사는 융戎과 구별하였다.정백鄭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할 때 북융北戎의 군대를 근심하여, “저들은 보병步兵이고 우리는 거병車兵이니 저들이 뒤에서 갑자기 우리를 침공할까 두렵다.注+도徒는 보병步兵이다. 질軼는 돌연突然이다. [부주]林: 전거戰車는 진퇴進退가 용이하지 않으므로 보병의 침공侵攻을 받을까 두려워한 것이다.”고 하자,
공자公子돌突이 말하기를 “용감하되 강剛한 의지가 없는 전사戰士를 시켜 적敵을 시험해 보고는 속히 후퇴하게 하시고,注+공자公子돌突은 정여공鄭厲公이다. 상嘗은 시험하는 것이다. 용감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강剛한 의지가 없으면 후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주]林: 용감하여 경솔히 나아가면 적敵의 허실虛實을 시험할 수 있고, 강剛한 의지가 없어 쉽게 후퇴하면 적敵의 추격追擊을 유인할 수 있다.군君께서는 세 곳에 군대를 매복埋伏하고서 적敵을 기다리소서.注+복覆은 복병伏兵이다. [부주]朱: 먼저 세 곳에 군대를 매복埋伏하고서 융병戎兵의 추격을 기다리라는 말이다.
북융의 군대는 경솔하여 질서가 정연整然하지 않고, 탐욕스러워 서로 친목親睦하지 않으므로注+[부주]林: 융병戎兵은 경솔하여 그 대오隊伍가 정연整然하지 않고, 융戎은 천성天性이 이익을 탐하여 서로 친목親睦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승리해도 전공戰功을 서로 사양하지 않고, 패전해도 서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앞에 가던 자가 노획虜獲할 것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해 전진前進하고,注+[부주]林: 전면前面에 있는 융인戎人이 노획虜獲할 것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해 먼저 전진한다는 것은 바로 승리해도 서로 사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전진하다가 복병伏兵을 만나면 반드시 신속히 도망갈 것입니다.
후면後面의 융군戎軍이 구원하지 않는다면 융병戎兵은 후속부대後屬部隊가 없을 것이니, 우리가 통쾌하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注+영逞은 해결解結함이다. [부주]林: 통쾌하게 보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주朱: 이렇게 한 뒤에야 환난患難을 풀 수 있다는 말이다.”고 하니, 정백이 그의 건의를 따랐다.
과연 공자公子돌突의 말처럼 전진하던 융병戎兵이 복병을 만나자 도망갔다.
축담祝聃이 추격追擊하여注+축담祝聃은 정鄭나라 대부大夫이다.융병戎兵을 가운데 두고서 전후에서 공격攻擊하여 모두 다 죽이니,注+세 곳에 군대를 매복한 뒤에 축담祝聃이 용감하나 강剛한 의지가 없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먼저 융을 침공侵攻하고는 속히 도망와서 제2 복병伏兵과 만났다. 후면後面의 복병이 일어나자 추격하던 융병戎兵이 발길을 돌려 도망하니 축담祝聃이 반격反擊하였다. 전후前後와 중간 세 곳에서 모두 공격하였기 때문에 ‘충융사衷戎師’라고 한 것이다. 에殪는 죽임이다. [부주]林: 충융사衷戎師는 복병伏兵이 융사의 중간을 마구 공격한 것이다. 제 1 복병은 융戎의 선두先頭를 공격하고, 축담祝聃은 제 3 복병과 그 후미後尾를 공격하고, 제 2 복병은 그 중간을 공격하여 전前‧후後‧중中 세 곳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융사戎師를 가운데 두고 전후에서 공격했다.”고 한 것이다. 주朱: 충융사衷戎師는 융병戎兵을 세 복병伏兵의 중앙에 두었다는 말이다.후방後方에 있던 융군도 모두 도주하였다.注+후방後方에 주둔하고 있는 융戎의 군대가 다시 계속해 진격進擊하지 않은 것이다.
11월 갑인일에 정인鄭人이 다시 도주하는 융병을 공격하여 대패시켰다.注+이는 모두 춘추 때의 일이다. 경經에 정문正文이 없는데도 전傳에 기록한 것은 서문序文에 이른바 “반드시 널리 기록하고 구체적으로 말하여 학자學者들로 하여금 그 일의 시초始初를 추구追究하여 그 일의 결과를 추단推斷하고 그 지엽枝葉을 찾아 그 근본이 끝난 곳을 탐구하게 하려 했다.”는 뜻이다. 이 밖에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