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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1)

춘추좌씨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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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九年春 天王使南季來聘注+無傳 南季 天子大夫也 南 氏 季 字也하다
[經]三月 癸酉 大雨震電하고 庚辰 大雨雪注+三月 今正月 하다
[經]挾卒注+無傳 挾 魯大夫 未賜族 하다
[經]夏 城郞하다
[經]秋 七月이라
[經]冬 公會齊侯于防注+防 魯地 在琅邪華縣東南 하다
[傳]九年春王三月癸酉 大雨霖以震 書始也注+書癸酉 始雨日 [附注] 林曰 經書大雨震電 傳言霖以震 見自此連綿雨霖且震也
庚辰 大雨雪 亦如之하니
書 時失也注+夏之正月 微陽始出 未可震電 旣震電 又不當大雨雪 故皆爲時失
凡雨 自三日以往爲霖注+此解經書霖也 而經無霖字 經誤이오 平地尺爲大雪이라
[傳]夏 城郞하니 不時也
[傳]宋公不王注+不共王職이어늘 鄭伯爲王左卿士하야 以王命討之하다
伐宋이로되 宋以入郛之役怨公하야 不告命注+入郛 在五年 公以七年伐邾 欲以說宋 而宋猶不和也하니 公怒하야 絶宋使하다
[傳]秋 鄭人以王命來告伐宋注+遣使致王命也 伐宋未得志 故復更告之 하다
[傳]冬 公會齊侯于防하니 謀伐宋也注+[附注] 林曰 春秋之初 齊鄭一黨也 故鄭告伐宋 而齊僖公會魯以謨之
[傳]北戎侵鄭注+[附注] 林曰 言北戎 以別戎之雜處中國者也하니 鄭伯禦之할새 患戎師曰 彼徒我車 懼其侵軼我也注+徒 步兵也 軼 突也 [附注] 林曰 懼車戰難於進退 爲步兵之所侵突
公子突曰 使勇而無剛者 嘗寇而速去之注+公子突 鄭厲公也 嘗 試也 勇則能往 無剛不恥退 [附注] 林曰 勇而輕進 可以試敵之堅瑕 無剛易退 則可以致敵之追躡하고 君爲三覆以待之注+覆 伏兵也 [附注] 朱曰 言先伏兵三處 以待戎之逐我하소서
戎輕而不整하고 貪而無親注+[附注] 林曰 言戎兵輕易而不整其行伍 戎性貪利而不相親附하야 勝不相讓하고 敗不相救하니
先者見獲이면 必務進注+[附注] 林曰 戎人之在前者 見有所獲 必務先進 此言勝不相讓이오 進而遇覆이면 必速奔하리이다
後者不救 則無繼矣리니 乃可以逞注+逞 解也 [附注] 林曰 乃可以快志於戎 朱曰 如此然後 可以解患이니이다 從之하다
戎人之前遇覆者奔어어늘
祝聃逐之注+祝聃 鄭大夫하야 衷戎師하고 前後擊之하야 盡殪注+爲三部伏兵 祝聃 帥勇而無剛者 先犯戎而速奔 以遇二伏兵 至後伏兵起 戎還走 祝聃反逐之 戎前後及中 三處受敵 故曰衷戎師 殪 死也 [附注] 林曰 衷戎師 伏兵橫擊戎師之中 第一伏擊其前 祝聃與第三伏 擊其後 幷第二伏 擊其中 戎前後中三處受敵 故曰衷戎師 前後擊之 朱曰 衷戎師 謂戎兵在三伏兵之中也하니 戎師大奔注+後駐軍不復繼也하다
十一月甲寅 鄭人大敗戎師注+此皆春秋時事 雖經無正文 所謂必廣記而備言之 將令學者 原始要終 尋其枝葉 究其所窮 他皆放此하다


9년 봄에 천왕天王남계南季를 노나라에 보내어 빙문聘問하였다.注+이 없다. 남계南季천자天子대부大夫이다. 이고 이다.
3월 계유일에 크게 비가 내리며 천둥 번개가 쳤고, 경신일에 큰 눈이 내렸다.注+3월은 지금의 정월正月이다.
하였다.注+이 없다. 나라 대부大夫이다. 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여름에 에 성을 쌓았다.
가을 7월이다.
겨울에 은공이 제후齊侯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나라 땅이다. 낭야琅邪화현華縣 동남에 있다.
9년 봄 3월 계유일에 크게 장마비가 내리며 천둥이 쳤다는 것은 시작한 날을 기록한 것이다.注+계유일을 기록한 것은 비가 시작한 날을 기록한 것이다. [부주]林: 에는 “크게 비가 내리며 천둥이 쳤다.”고 기록하였는데. 에는 “장마가 지고 천둥이 쳤다.”고 하였으니, 이때부터 계속해 비가 내려 장마가 지고 또 천둥이 쳤음을 알 수 있다.
경진일에 큰 눈이 내렸다는 것도 이와 같다.
에 이를 기록한 것은 철이 정상을 잃었기 때문이다.注+하력夏曆정월正月미약微弱이 비로소 생기는 때이니 천둥이 칠 수 없고, 이미 천둥이 쳤다면 큰 눈이 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모두 “철이 정상을 잃었다.”고 한 것이다.
비가 3일 이상 내리는 것을 장마라 하고,注+이것은 에 기록된 ‘’字를 해석한 것인데, 현재 에 ‘’字가 없는 것은 경문經文탈오脫誤가 생긴 것이다. 눈이 평지에 한 자[尺] 이상 쌓이는 것을 큰 눈[大雪]이라 한다.
여름에 에 성을 쌓으니, 이를 기록한 것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송상공宋殤公주왕周王조현朝見하지 않으니,注+주왕周王에게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은 것이다.정백鄭伯주왕周王좌경사左卿士주왕周王의 명을 받들어 송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정나라가 송나라를 토벌하였으되, 송나라는 정나라가 송나라의 외곽外廓까지 쳐들어왔을 때 노나라가 구원병救援兵을 보내주지 않은 일로 은공을 원망하여, 이번 일을 노나라에 통고하지 않으니,注+입부入郛의 전쟁은 은공 5년에 있었다. 은공이 7년에 나라를 토벌하여 나라를 즐겁게 하고자 하였으나, 송나라는 여전히 노나라와 불화不和하였다. 은공은 노하여 송나라와 사신使臣의 왕래를 끊었다.
가을에 정인鄭人주왕周王을 받들고 나라에 와서 송나라를 토벌하라고 통고하였다.注+사신使臣을 보내어 주왕周王을 전한 것이다. 송나라를 토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와서 송나라를 치라고 고한 것이다.
겨울에 은공이 제희공齊僖公에서 회합會合하였으니, 이는 송나라 토벌할 일을 모의謀議하기 위함이었다.注+[부주]林: 춘추 초기에 이 한편이었다. 그러므로 이 송나라를 토벌하라고 에 고하자, 제희공齊僖公회합會合하여 송나라 토벌할 일을 모의한 것이다.
북융北戎나라를 침공하니注+[부주]林: 북융北戎이라고 말하여 중국中國에 섞여 사는 과 구별하였다.정백鄭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할 때 북융北戎의 군대를 근심하여, “저들은 보병步兵이고 우리는 거병車兵이니 저들이 뒤에서 갑자기 우리를 침공할까 두렵다.注+보병步兵이다. 돌연突然이다. [부주]林: 전거戰車진퇴進退가 용이하지 않으므로 보병의 침공侵攻을 받을까 두려워한 것이다.”고 하자,
공자公子이 말하기를 “용감하되 한 의지가 없는 전사戰士를 시켜 을 시험해 보고는 속히 후퇴하게 하시고,注+공자公子정여공鄭厲公이다. 은 시험하는 것이다. 용감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한 의지가 없으면 후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주]林: 용감하여 경솔히 나아가면 허실虛實을 시험할 수 있고, 한 의지가 없어 쉽게 후퇴하면 추격追擊을 유인할 수 있다.께서는 세 곳에 군대를 매복埋伏하고서 을 기다리소서.注+복병伏兵이다. [부주]朱: 먼저 세 곳에 군대를 매복埋伏하고서 융병戎兵의 추격을 기다리라는 말이다.
북융의 군대는 경솔하여 질서가 정연整然하지 않고, 탐욕스러워 서로 친목親睦하지 않으므로注+[부주]林: 융병戎兵은 경솔하여 그 대오隊伍정연整然하지 않고, 천성天性이 이익을 탐하여 서로 친목親睦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승리해도 전공戰功을 서로 사양하지 않고, 패전해도 서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앞에 가던 자가 노획虜獲할 것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해 전진前進하고,注+[부주]林: 전면前面에 있는 융인戎人노획虜獲할 것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해 먼저 전진한다는 것은 바로 승리해도 서로 사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전진하다가 복병伏兵을 만나면 반드시 신속히 도망갈 것입니다.
후면後面융군戎軍이 구원하지 않는다면 융병戎兵후속부대後屬部隊가 없을 것이니, 우리가 통쾌하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注+해결解結함이다. [부주]林: 통쾌하게 보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이렇게 한 뒤에야 환난患難을 풀 수 있다는 말이다.”고 하니, 정백이 그의 건의를 따랐다.
과연 공자公子의 말처럼 전진하던 융병戎兵이 복병을 만나자 도망갔다.
축담祝聃추격追擊하여注+축담祝聃나라 대부大夫이다.융병戎兵을 가운데 두고서 전후에서 공격攻擊하여 모두 다 죽이니,注+세 곳에 군대를 매복한 뒤에 축담祝聃이 용감하나 한 의지가 없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먼저 융을 침공侵攻하고는 속히 도망와서 제2 복병伏兵과 만났다. 후면後面의 복병이 일어나자 추격하던 융병戎兵이 발길을 돌려 도망하니 축담祝聃반격反擊하였다. 전후前後와 중간 세 곳에서 모두 공격하였기 때문에 ‘충융사衷戎師’라고 한 것이다. 는 죽임이다. [부주]林: 충융사衷戎師복병伏兵이 융사의 중간을 마구 공격한 것이다. 제 1 복병은 선두先頭를 공격하고, 축담祝聃은 제 3 복병과 그 후미後尾를 공격하고, 제 2 복병은 그 중간을 공격하여 세 곳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융사戎師를 가운데 두고 전후에서 공격했다.”고 한 것이다. : 충융사衷戎師융병戎兵을 세 복병伏兵의 중앙에 두었다는 말이다.후방後方에 있던 융군도 모두 도주하였다.注+후방後方에 주둔하고 있는 의 군대가 다시 계속해 진격進擊하지 않은 것이다.
11월 갑인일에 정인鄭人이 다시 도주하는 융병을 공격하여 대패시켰다.注+이는 모두 춘추 때의 일이다. 정문正文이 없는데도 에 기록한 것은 서문序文에 이른바 “반드시 널리 기록하고 구체적으로 말하여 학자學者들로 하여금 그 일의 시초始初추구追究하여 그 일의 결과를 추단推斷하고 그 지엽枝葉을 찾아 그 근본이 끝난 곳을 탐구하게 하려 했다.”는 뜻이다. 이 밖에 다른 곳도 모두 이와 같다.



춘추좌씨전(1)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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