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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3)

춘추좌씨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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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有三年春 晉侯使郤錡來乞師注+將伐秦也 侯伯當召兵 而乞師 謙辭 하다
[經]三月公如京師注+伐秦道過京師 因朝王 하다
[經]夏五月 公自京師遂會晉侯齊侯宋公衛侯鄭伯曹伯邾人滕人伐秦하다
[經]曹伯卒于師注+五同盟 하다
[經]秋七月 公至自伐秦注+無傳 하다
[經]冬 葬曹宣公하다
[傳]十三年春 晉侯使郤錡來乞師러니 將事不敬注+將事 致君命 하다
孟獻子曰 郤氏其亡乎ᄂ저
身之幹也 身之基也어늘 郤子無基하다
且先君之嗣卿也 受命以求師 將社稷是衛어늘 而惰하니 棄君命也
不亡何爲注+郤錡 郤克子 故曰嗣卿 爲十七年晉殺郤錡傳 [附注] 朱曰 郤克爲晉景公正卿 錡實嗣之 리오
[傳]三月 公如京師할새 宣伯欲賜注+欲王賜己 하야 請先使注+[附注] 林曰 宣伯請奉命先使于王 하니 王以行人之禮禮焉注+不加厚 하고 孟獻子從하니 王以爲介而重賄之注+介 輔相威儀者 獻子相公以禮 故王重賜之하다
公及諸侯朝王하고 遂從劉康公成肅公會晉侯伐秦注+劉康公 王季子 劉成二公不書 兵不加秦 하다
成子受脤于社 不敬注+脤 宜社之肉也 盛以脤器 故曰脤 宜 出兵祭社之名 이어늘 劉子曰 吾聞之컨대 民受天地之中以生하니 注+[附注] 朱曰 中者 此心不偏不倚之理 民稟受於天地 以有生者也
是以有動作禮義威儀之則注+[附注] 朱曰 聖人因天地自然之理而爲之節文 以爲動作禮義威儀之法則 하야 以定命也注+[附注] 林曰 所以安定上天所賦之命而使之勿失
能者注+養威儀以致福 하고 不能者敗以取禍
是故君子勤禮하고 小人盡力이라
勤禮莫如致敬이오 盡力莫如敦篤이라
敬在養神注+[附注] 朱曰 君子無不致敬 而莫先於奉事神明 하고 篤在守業이라
國之大事 在祀與戎하니
祀有執膰注+膰 祭肉 하고 戎有受脤
神之大節也注+交神之大節 어늘
今成子惰하니 棄其命矣注+惰則失中和之氣 其不反乎注+爲成肅公卒于瑕張本 ᄂ저
[傳]夏四月戊午 注+呂相 魏錡子 蓋口宣己命
昔逮我獻公及穆公注+晉獻公秦穆公 相好 戮力同心하야 申之以盟誓하고 重之以昏姻注+穆公夫人 獻公之女 이라
天禍晉國하야 注+辟驪姬也 不言狄梁 擧所恃大國이로되 無祿하야 獻公卽世注+[附注] 林曰 晉無福祿 卽世 卒也 하니 穆公不忘舊德하야 俾我惠公用能奉祀于晉注+僖十年 秦納惠公이로되
又不能成大勳하야 而爲韓之師注+僖十五年 秦伐晉 獲惠公 [附注] 林曰 又不能終始成就其立惠之大功 하니라
亦悔于厥心하야 用集我文公注+集 成也 [附注] 林曰 秦穆公亦悔艾于厥心 用能成我文公而納之于晉하니 是穆之成也注+成功於晉
文公躬擐甲冑注+[附注] 林曰 擐 貫也 하고 注+草行爲跋 하야 踰越險阻하야 征東之諸侯注+[附注] 林曰 征伐東方之諸侯 秦居西方 故以諸侯爲東 하야 虞夏商周之胤 而朝諸秦注+[附注] 林曰 東方諸侯皆四代之嗣 諸侯朝秦事 無所攷 想當是時 必有往朝于秦者 하니 則亦旣報
鄭人怒君之疆場 我文公帥諸侯及秦圍鄭注+晉自以鄭貳於楚 故圍之 鄭非侵秦也 晉以此誣秦 事在僖三十年 이러니 秦大夫不詢于我寡君하고 擅及鄭盟注+詢 謀也 盟者秦伯 謙言大夫 하니 諸侯疾之하야 將致命于秦注+致死命而秦 時無諸侯 蓋諸侯遙致此意 이어늘
文公恐懼하야 綏靜諸侯하야 秦師克還無害하니 則是我有于西也注+造 成也 言晉有成功於秦
無祿하야 文公卽世 穆爲不弔注+不見하야 蔑死我君하고 寡我襄公注+寡 弱也 [附注] 朱曰 以文公死爲無知而輕蔑之 以襄公爲寡弱而陵忽之 하야 迭我殽地하고 我好注+[附注] 林曰 侵迭我晉國之殽地 奸犯斷絶我晉國舊日之和好 하야 伐我保城하고 殄滅我費滑注+伐保城 誣之 費滑 滑國都於費 今緱氏縣 하야 散離我兄弟하고 撓亂我同盟注+滑 晉同姓 [附注] 林曰 滑鄭皆從晉國 故云撓亂我同盟 하야 傾覆我國家
我襄公未忘君之舊勳注+納文公之勳 이나 而懼社稷之隕注+[附注] 朱曰 又恐晉爲秦所隕滅이라 是以有殽之師注+在僖三十三年하니라
猶願赦罪于穆公注+晉欲求解於秦 이로되 穆公不聽하고 而卽楚謀我하니라
天誘其衷하야 成王隕命注+秦使鬪克歸楚求成 事見文十四年 文元年 楚弑成王 하니 穆公是以不克逞志于我注+逞 快也하니라
穆襄卽世하고 康靈卽位注+文六年 晉襄秦穆皆卒 [附注] 林曰 秦康公文六年立 晉靈公文七年立
康公 我之注+晉外甥 이로되 又欲我公室하고 傾覆我社稷注+[附注] 林曰 謂文七年秦納公子雍事 此亦文致之辭 闕 猶掘也 翦 截斷也 하야 帥我以來하야 蕩搖我邊疆注+蝥賊 食禾稼蟲名 謂秦納公子雍하니
以有令狐之役注+在文七年 하니라
康猶不悛하고 入我河曲注+悛 改也 하야 伐我涑川하고 注+涑水出河東聞喜縣 西南至蒲坂縣入河 [附注] 朱曰 王官 地名하며 翦我羈馬注+[附注] 朱曰 羈馬 地名 其時秦取其地 하니
我是以有河曲之戰注+在文十二年하니라
東道之不通 則是康公絶我好也注+言康公自絶 故不復東通晉 니라
及君之嗣也注+君 秦桓公 我君景公引領西望曰
庶撫我乎注+望秦撫恤晉 ᄂ저 君亦不惠注+不肯稱晉望而共盟 하고 利吾有狄難注+謂晉滅潞氏時 하야 入我河縣하고 焚我箕郜注+[附注] 林曰 箕郜 晉二邑 焚 火攻之也 하야 芟夷我農功注+夷 傷也하고 虔劉我邊垂注+虔劉 皆殺也하니
我是以有注+聚 衆也 在宣十五年 [附注] 林曰 晉魏顆敗秦師于輔氏 하니라
君亦悔禍之延注+延 長也하야 而欲徼福于先君獻穆注+晉獻秦穆 하야 使伯車來命我景公注+伯車 秦桓公子 曰 吾與女同好棄惡하야 復修舊德하야 以追念前勳하리라
言誓未就 景公卽世注+[附注] 朱曰 當時約誓之言 未及成就 하니
是以有令狐之會注+令狐會在十一年 申厲公之命 宜言寡人 稱君誤也 하니라
君又不祥注+祥 善也 하고 背棄盟誓注+[附注] 林曰 十一年盟河西 秦伯歸而背晉成 하니라
白狄及君同州注+及 與也 [附注] 林曰 白狄與秦同居西方雍州 君之仇讐注+季隗 廧咎如赤狄之女也 白狄伐而獲之 納諸文公 [附注] 朱曰 白狄與晉爲昏姻 於傳無所考證 杜注以文公納季隗之事實之 然季隗乃赤狄之女 恐未必然 且此章多誣辭 蓋欲親狄以曲秦 故以狄爲昏姻耳 不足深辨 君來賜命曰 吾與汝伐狄이라하니 寡君不敢顧昏姻하고 畏君之威하야 而受命于吏하니라
君有二心於狄하야 曰晉將伐女라하니 하야
是用告我注+言狄雖應答秦 而心實憎秦無信 하니라
楚人惡君之二三其德也하야 亦來告我曰
秦背令狐之盟하고 而來求盟于我하야 昭告昊天上帝 秦三公楚三王注+三公 穆康共 三王 成穆莊 [附注] 林曰 盟必告天地祖宗 此下兩句 乃秦楚誓辭 曰余雖與晉出入注+出入猶往來 이나 注+[附注] 林曰 我唯視其利而從之 不以誠心與晉 라하니라
不穀惡其無成德注+[附注] 林曰 不穀乃楚共告晉自稱 이라
是用宣之하야 以懲不一注+[附注] 朱曰 因以此言 宣示諸侯 欲以懲戒用心不一之人 하노라
諸侯備聞此言하고 하야 暱就寡人注+疾 亦痛也 暱 親也 이라
寡人帥以聽命 唯好是求注+[附注] 林曰 晉諸侯伐秦以聽和戰之命 惟欲與秦求爲和好 君若惠顧諸侯하고 矜哀寡人하야 而賜之盟이면 則寡人之願也 其承寧諸侯以退注+承君之意 以寧靜諸侯 리라
豈敢徼亂注+徼 要也 이리오
君若不施大惠 寡人不佞 其不能以諸侯退矣로라
敢盡布之執事注+[附注] 朱曰 敢以所懷盡布露於秦君之執事者 하야 俾執事實圖利之注+俾 使也 하노라
秦桓公旣與晉厲公爲令狐之盟이로되 而又召狄與楚하야 欲道以伐晉하니 諸侯是以睦於晉注+晉辭多誣秦 故傳據此三事以正秦罪 [附注] 朱曰 又召白狄而求盟於楚 欲引導白狄與楚同伐晉國하니라
晉欒書將中軍하고 荀庚佐之注+庚代荀首 하며 士燮將上軍注+代荀庚 하고 郤錡佐之注+代士燮 하며 韓厥將下軍注+代郤錡하고 荀罃佐之注+代趙同하며 趙旃將新軍注+代韓厥하고 郤至佐之注+代趙括하며 郤毅御戎하고 欒鍼爲右注+郤毅 郤至弟 欒鍼 欒書子하다
孟獻子曰 晉帥乘和하니 師必有大功注+帥 軍帥 乘 車士 이라
五月丁亥 晉師以諸侯之師及秦師戰于麻隧하다
秦師敗績하니 獲秦成差及不更女父注+不更 秦爵 書戰 時公在師 復不須告 克獲有功 亦無所諱 蓋經文闕漏 傳文獨存 [附注] 林曰 戰敗績不書者 蓋以晉禀周命而伐秦 師有功 不使秦得與晉及諸侯戰也 하다
曹宣公卒于師하다
師遂濟涇하야 及侯麗而還注+涇水出安定 東南經扶風京兆高陸縣入渭也 하야 迓晉侯于新楚注+迓 迎也 旣戰 晉侯止新楚 故師還過迎之 麻隧侯麗新楚 皆秦地 하다
成肅公卒于瑕注+終劉子之言 瑕 晉地 하다
[傳]六月丁卯夜 鄭公子班自訾求入于大宮이나 不能하니 殺子印子羽注+訾 鄭地 大宮 鄭祖廟 十年班出奔許 今欲還爲亂 子印子羽 皆穆公子 [附注] 林曰 不能得入 하고 反軍于市注+[附注] 林曰 公子班自訾歸 屯軍于鄭國之市하다
己巳 子駟帥國人盟于大宮注+子駟 穆公子하야 遂從而盡焚之注+焚 燒之 [附注] 林曰 遂從公子班之師于市 而盡焚燒其市하고 殺子如子駹孫叔孫知注+子如 公子班 子駹 班弟 孫叔 子如子 孫知 子駹子 하다
[傳]曹人使公子負芻守하고 使公子欣時逆曹伯之喪注+二子 皆曹宣公庶子 하다
負芻殺其大子而自立也注+宣公大子 하다
諸侯乃請討之하니 晉人以其之勞 請俟他年하다
葬曹宣公하다
旣葬 子臧將亡注+子臧 公子欣時 하니 國人皆將從之注+不義負芻故 하다
成公乃懼注+成公 負芻하야 告罪하고 且請焉注+請留子臧 [附注] 林曰 告罪於子臧하니 乃反하야 而致其邑注+還邑於成公 爲十五年執曹伯傳하다


13년 봄에 진후晉侯극기郤錡를 보내어 원병援兵하였다.注+나라를 토벌討伐하기 위해서이다. 후백侯伯소병召兵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걸사乞師’라고 한 것은 겸사謙辭이다.
3월에 성공成公경사京師에 갔다.注+나라를 토벌討伐하러 가는 도중道中경사京師를 지나게 되었으므로 그 기회期會이용利用주왕周王조현朝見한 것이다.
여름 5월에 성공成公경사京師에서 출발出發해 가서 드디어 진후晉侯제후齊侯송공宋公위후衛侯정백鄭伯조백曹伯주인邾人등인滕人회합會合하여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조백曹伯군중軍中에서 하였다.注+나라와 다섯 차례 동맹同盟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공成公나라 토벌討伐에서 돌아왔다.注+이 없다.
겨울에 조선공曹宣公장사葬事 지냈다.
13년 봄에 진후晉侯극기郤錡를 보내어 원병援兵하였는데, 일을 봉행奉行[將事]하는 태도態度공경恭敬스럽지 못하였다.注+장사將事는 임금의 하는 것이다.
이를 본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극씨郤氏는 아마도 할 것이다.
는 몸을 세우는 척골脊骨과 같고, 은 몸을 지탱하는 기초基礎와 같은 것인데, 극자郤子기초基礎무시無視하였다.
그리고 극자郤子선군先君사경嗣卿으로, 임금의 을 받고 와서 출병出兵요청要請한 것은 사직社稷보위保衛하기 위함인데 태만怠慢하였으니, 이는 그 군명君命을 버린 것이다.
하지 않고 어쩌겠는가?”注+극기郤錡극극郤克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사경嗣卿’이라 한 것이다. 성공成公 17년에 나라가 극기郤錡를 죽인 배경背景이다. [부주]朱: 극극郤克진경공晉景公정경正卿이었는데, 극기郤錡가 아비의 뒤를 이었다.라고 하였다.
3월에 성공成公경사京師에 갈 때 선백宣伯주왕周王상사賞賜를 얻고자 하여注+주왕周王이 자기에게 상사賞賜하기를 바란 것이다. 먼저 사자使者로 가기를 하여注+[부주]林: 선백宣伯을 받들고 먼저 주왕周王에게 사자使者로 가기를 한 것이다. 경사京師로 가니, 주왕周王사자使者[行人]를 접대接待하는 예로 선백宣伯예우禮遇하고,注+후대厚待하지 않은 것이다. 뒤에 맹헌자孟獻子성공成公을 따라 경사京師로 가니, 주왕周王은 그를 노군魯君(임금의 행례行禮보조輔助하는 사람)라 하여 하게 예물禮物을 주었다.注+위의威儀보좌輔佐하는 사람이다. 맹헌자孟獻子성공成公로써 보좌輔佐[相]하였기 때문에 주왕周王하게 상사賞賜한 것이다.
성공成公제후諸侯와 함께 주왕周王조현朝見하고서 드디어 유강공劉康公성숙공成肅公을 따라 진후晉侯회합會合하여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유강공劉康公왕계자王季子이다. 유강공劉康公성숙공成肅公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직접 나라에 무력武力행사行使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병出兵하기에 앞서 성자成子에서 제육祭肉[脤]을 받을 때 공경恭敬하지 않으니,注+의사宜社에 올렸던 제육祭肉인데, 신기脤器(자개로 장식한 그릇)에 담기 때문에 ‘’이라 한다. 출병出兵할 때 에 지내는 제사祭祀이다. 유자劉子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사람은 천지天地중화中和된 기운을 받아 태어나니, 이것이 이른바 ‘’이다.注+[부주]朱: 은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는 이다. 백성은 천지天地에서 이 를 받아 태어난 자이다.
그러므로 동작動作(行動), 예의禮義(禮儀), 위의威儀(上下貴賤의 신분身分에 맞는 몸가짐) 등의 법칙法則이 있어注+[부주]朱: 성인聖人천지天地자연自然에 따라 절문節文(일에 따라 알맞게 조리條理함)을 만들어 동작動作, 예의禮義, 위의威儀법칙法則제정制定하였다는 말이다. 안정安定시키는 것이다.注+[부주]林: 하늘이 부여賦與안정安定시켜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유능有能는 이를 수양修養하여 을 부르고[致]注+위의威儀수양修養하여 을 부른다는 말이다. 유능有能하지 못한 는 이를 폐기廢棄[敗]하여 한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진력盡力[勤]하고, 소인小人본업本業진력盡力해야 한다.
진력盡力함에는 공경恭敬을 지극히 하는 것만 한 것이 없고, 본업本業진력盡力함에는 돈독敦篤만 한 것이 없다.
공경恭敬(공경을 행함)은 신명神明공양供養함에 있고,注+[부주]朱: 군자君子공경恭敬을 지극히 하지 않는 곳이 없으나, 신명神明을 받들어 섬기는 일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돈독敦篤본업本業을 지킴에 있다.
국가國家대사大事제사祭祀전쟁戰爭에 있는데, 제사祭祀에는 집번執膰가 있고,注+제육祭肉이다. 전쟁戰爭에는 수신受脤가 있는 것이 을 섬기는 큰 예절禮節이다.注+교접交接하는 중대重大한 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성자成子는 태만하여 그 을 버렸으니,注+태만怠慢하면 중화中和의 기운을 상실喪失한다. 아마도 이번 출전出戰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注+성숙공成肅公에서 죽은 장본張本이다. 고 하였다.
여름 4월 무오일戊午日진후晉侯여상呂相나라에 보내어 절교絶交통고通告하며注+여상呂相위기魏錡의 아들이다. 진후晉侯을 입으로 한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옛날 우리 선군先君헌공獻公귀국貴國선군先君목공穆公 때에 미쳐서는注+진헌공晉獻公진목공秦穆公이다. 서로 우호友好하여, 양국兩國이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합쳐서 맹서盟誓로써 양국兩國의 관계를 밝히고[申]혼인婚姻으로써 양국兩國의 관계를 거듭 공고鞏固히 하셨습니다.注+진목공秦穆公부인夫人진헌공晉獻公의 딸이다.
그런데 하늘이 우리 나라에 를 내려 문공文公나라로 출분出奔하고 혜공惠公나라로 출분出奔하였는데,注+여희驪姬해 도망간 것이다. 적국狄國양국梁國으로 갔던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믿었던 큰 나라만을 들어 말했기 때문이다. 불행[無祿]하게 또 헌공獻公께서 세상을 뜨시니,注+[부주]林: 나라에 복록福祿이 없다는 말이다. 즉세卽世이다. 귀국貴國목공穆公은 옛 우호友好[舊德]를 잊지 않고 우리 혜공惠公으로 하여금 나라의 제사祭祀를 받들게 하셨습니다.注+희공僖公 10년에 나라가 혜공惠公나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대공大功완수完遂하지 않고 다시 에서 전쟁戰爭하였습니다.注+희공僖公 15년에 나라가 나라를 쳐서 혜공惠公을 잡았다. [부주]林: 나라는 또 끝내 혜공惠公나라의 임금으로 세운 대공大功성취成就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뒤에 목공穆公진심眞心으로 후회後悔하고서 우리 문공文公성취成就시켰으니,注+이다. [부주]林: 진목공秦穆公진심眞心으로 뉘우치고 허물을 고쳐 우리 문공文公을 도와 나라로 들여보내어 임금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이는 목공穆公의 도움이었습니다.注+나라에서 성공成功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문공文公은 몸에 갑주甲冑를 두르고注+[부주]林: 은 꿰는 것이다.을 넘고 물을 건너 어렵고 험한 곳을 지나注+풀이 우거진 길을 가는 것[草行]을 ‘’이라 한다. 동방東方제후諸侯정벌征伐하여注+[부주]林: 동방東方제후諸侯정벌征伐한 것이다. 나라가 서방西方에 있기 때문에 제후諸侯를 ‘동방東方’이라 한 것이다. 후손後孫들을 나라에 조현朝見하게 하였으니,注+[부주]林: 동방東方제후諸侯는 모두 [四代]의 후사後嗣이다. 제후諸侯나라에 조현朝見한 일은 고증考證할 수 없으나, 당시에 반드시 나라에 가서 조현朝見제후諸侯가 있었기 때문에 상대相對에게 를 씌우기 위해 꾸며낸 말로[因文致之] 생각된다. 이미 옛 은덕恩德을 갚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인鄭人(秦君을 가리킴)의 변경邊境침범侵犯[怒]하였을 때에 우리 문공文公께서 제후諸侯군대軍隊를 거느리고 가서 진군秦軍과 함께 나라를 포위包圍하였는데,注+나라는 나라가 나라에 붙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위包圍한 것이고, 나라가 나라를 침범侵犯한 것이 아닌데, 나라는 침범侵犯했다는 말로 나라를 속인 것이다. 나라를 포위包圍한 일은 희공僖公 30년에 있었다. 나라 대부大夫가 우리 임금님과 상의商議하지도 않고 멋대로 나라와 결맹結盟하니,注+상의商議하는 것이다. 결맹結盟한 자는 진백秦伯이었는데, 겸손謙遜하게 ‘대부大夫’라고 한 것이다. 제후諸侯들은 이를 미워하여 나라 토벌討伐에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습니다.注+목숨을 바쳐 나라를 토벌討伐하겠다는 말이다. 이때 이곳에 제후諸侯가 없었으니, 제후諸侯가 멀리에서 이런 뜻을 [致]한 것인 듯하다.
그러자 우리 문공文公께서는 귀국貴國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제후諸侯들을 어루만져 안정安靜시켜 진군秦軍피해被害없이 돌아가게 하였으니, 우리가 서국西國(秦)에 대공大功[大造]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注+이니, 나라가 나라에 을 이룬 것이 있다는 말이다.
불행不幸히 우리 문공文公께서 세상을 뜨신 뒤에 귀국貴國목공穆公조문弔問도 하지 않고注+조상弔傷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죽은 우리 임금을 멸시蔑視하고 우리 양공襄公을 어리다고 무시無視하여注+이다. [부주]朱: 문공文公을 죽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겨 경멸輕蔑하고, 양공襄公유약幼弱하다고 하여 업신여겼다는 말이다. 우리의 효지殽地침범侵犯하고, 우리와의 우호友好거절拒絶[奸絶]하고서注+[부주]林: 우리 나라의 효지殽地침범侵犯습격襲擊[侵迭]하고, 우리 나라와 맺은 옛 우호友好침범侵犯단절斷絶하였다는 말이다. 우리의 보성保城토벌討伐하고 우리의 비활費滑격멸擊滅하여,注+보성保城토벌討伐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활국滑國비읍費邑도읍都邑하였기 때문에 ‘비활費滑’이라 한 것이다. 지금의 구지현緱氏縣이다. 우리 형제국兄弟國단합團合이산離散시키고 우리의 동맹同盟교란攪亂시켜注+나라의 동성국同姓國이다. [부주]林: 활국滑國나라가 모두 나라에 복종服從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동맹同盟교란攪亂시켰다고 한 것이다. 우리 국가國家전복顚覆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우리 양공襄公께서는 귀국貴國이 우리에게 끼친 옛 공덕功德을 잊지 않았지만注+진문공晉文公나라로 들여보낸 을 이른다. 사직社稷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注+[부주]朱: 또 나라가 나라에 멸망滅亡[隕滅]당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부득이 에서 전쟁戰爭을 했던 것입니다.注+효지殽地전쟁戰爭희공僖公 33년에 있었다.
비록 전쟁戰爭은 하였지만 우리 양공襄公께서는 오히려 귀국貴國목공穆公용서容恕받기 바랐는데,注+나라가 나라에 화해和解를 구하고자 했다는 말이다. 목공穆公허락許諾하지 않고 나라와 결합結合[卽]하여 우리 나라를 치려고 계획計劃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와[天誘其衷]초성왕楚成王이 죽으니,注+나라가 투극鬪克나라로 돌려보내어 화평和平을 구하게 하였다. 이 일은 문공文公 14년에 보인다. 문공文公원년元年초인楚人성왕成王시해弑害하였다. 목공穆公은 우리나라를 치려던 뜻을 실현實現[逞]하지 못하였습니다.注+이다.
귀국貴國목공穆公아국我國양공襄公별세別世하고, 귀국貴國에는 강공康公아국我國에는 영공靈公즉위卽位하였습니다.注+문공文公 6년에 진양공晉襄公진목공秦穆公이 모두 죽었다. [부주]林: 진강공秦康公문공文公 6년에 즉위卽位하고, 진영공晉靈公문공文公 7년에 즉위卽位하였다.
강공康公아국我國외생外甥(甥姪)인데도注+진강공秦康公나라의 외생外甥(甥姪)이다. 우리의 공실公室치고 우리의 사직社稷전복顚覆시키고자 하여注+[부주]林: 문공文公 7년에 나라가 공자公子나라로 들여보낸 일을 이른다. 이 또한 상대相對에게 를 씌우기 위해 꾸며낸 말이다. 과 같고, 절단截斷이다. 우리의 모적蝥賊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변경邊境소요騷擾시켰습니다.注+모적蝥賊은 벼[禾]를 갉아먹는 해충害蟲인데, 나라가 공자公子을 들여보낸 것을 이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국貴國영호令狐에서 전쟁戰爭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注+영호令狐전쟁戰爭문공文公 7년에 있었다.
그런데도 강공康公은 잘못을 고치지 않고 우리의 하곡河曲으로 쳐들어와서注+회개悔改이다. 우리의 속천涑川토벌討伐하고, 우리의 왕관王官노략擄掠하고注+속수涑水하동河東문희현聞喜縣에서 발원發源하여 서남西南으로 흘러 포판현蒲坂縣에 이르러 황하黃河로 들어간다. [부주]朱: 왕관王官지명地名이다. 우리의 기마羈馬격멸擊滅하였습니다.注+[부주]朱: 기마羈馬지명地名인데, 그때 나라가 그 땅을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국貴國하곡河曲에서 전쟁戰爭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注+하곡河曲전쟁戰爭문공文公 12년에 있었다.
동방東方도로道路가 막힌 것(秦나라와 나라 사이에 사신使臣왕래往來가 끊긴 것)은 강공康公이 우리와 우호友好단절斷絶하였기 때문입니다.注+진강공秦康公이 스스로 나라와 국교國交단절斷絶하였기 때문에 다시 동쪽으로 나라와 교통交通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秦桓公을 가리킴)께서 군위君位계승繼承함에 미쳐注+진환공秦桓公이다. 우리 경공景公께서는 목을 늘이고 서쪽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아마도[庶] 우리를 위무慰撫할 것이다.’注+나라가 나라를 어루만져 구휼救恤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고 하였는데, 께서도 우리와 회맹會盟하려 하지 않고注+나라의 바람에 부응副應[稱]하여 동맹同盟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적인狄人이 있는 틈을 이용利用注+선공宣公 15년에 나라가 적적赤狄노씨潞氏격멸擊滅할 때를 이른 것이다. 우리의 하현河縣으로 쳐들어오고, 우리의 기읍箕邑고읍郜邑을 불사르고注+[부주]林: 나라의 두 이다. 은 불을 질러 공격[火攻]한 것이다. 우리의 농작물農作物을 베어 내고注+상해傷害이다. 우리의 변경邊境 백성들을 무찔러 죽였습니다.注+는 다 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씨輔氏에서 귀국貴國전쟁戰爭하였던 것입니다.注+군중軍衆이다. 보씨輔氏전쟁戰爭선공宣公 15년에 있었다. [부주]林: 나라 위과魏顆진군秦軍보씨輔氏에서 패배敗北시킨 일을 이른 것이다.
께서도 전쟁戰爭가 길어지는 것을 후회後悔하여,注+은 길어짐이다.양국兩國선군先君헌공獻公목공穆公기구祈求하기 위해注+진헌공晉獻公진목공秦穆公이다. 백거伯車사자使者로 보내 와서 우리 경공景公하기를,注+백거伯車진환공秦桓公의 아들이다. ‘나는 그대와 서로 우호友好[同好]하여 원한怨恨[惡]을 버리고, 다시 지난날의 우호友好중수重修하여 선군先君공덕功德추념追念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맹약盟約이 이루어지기 전에 경공景公께서 별세別世하였습니다.注+[부주]朱: 당시當時서약誓約하는 말이 미처 완성完成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임금(晉厲公)께서 귀국貴國영호令狐에서 회맹會盟하였던 것입니다.注+영호令狐회맹會盟성공成公 11년에 있었다. 진려공晉厲公진환공秦桓公에게 [申]한 것이니, 과인寡人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과군寡君’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께서는 또 좋지 못한 마음을 품고서注+이다. 맹약盟約을 저버렸습니다.注+[부주]林: 성공成公 11년에 하서河西에서 결맹結盟하였으나 진백秦伯은 돌아가서 나라와의 우호友好배반背反하였다.
백적白狄과 같은 옹주雍州에 살고注+이다.[부주]林: 백적白狄나라와 함께 서방西方옹주雍州거주居住한다는 말이다. 있지만 과는 원수怨讐이고 우리와는 혼인婚姻한 사이인데,注+계외季隗장구여적적廧咎如赤狄의 딸인데, 백적白狄장구여廧咎如토벌討伐계외季隗를 잡아다가 진문공晉文公에게 아내로 바쳤다. [부주]朱: 백적白狄나라와 혼인婚姻한 일을 에서 고증考證할 수 없기 때문에 두주杜注에는 진문공晉文公계외季隗를 아내로 받아들인 일로 혼인婚姻한 사이임을 증명證明[實]하였으나, 계외季隗적적赤狄의 딸이니,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에는 근거根據 없는 말[誣辭]이 많다. 대체로 나라는 을 가까이하여 나라의 부정직不正直함을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혼인婚姻한 사이라고 말한 것뿐이니, 깊이 변론辯論할 것이 없다.께서 사자使者를 보내 와서 을 내리기를, ‘나는 그대와 함께 백적白狄토벌討伐하고자 한다.’고 하니, 우리 임금께서는 위력威力이 두려워 감히 혼인관계婚姻關係를 돌아보지 않고 사자使者[吏]가 하는 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께서는 또 적인狄人에게 두 마음을 품고서 적인狄人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너희 나라를 치려 한다.’고 하니, 적인狄人이 겉으로는 그 을 받아들였으나[應] 속으로는 신의信義를 지키지 않는 것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통고通告하였습니다.注+이 비록 나라에 응답應答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사실 나라의 신의信義가 없는 것을 미워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초인楚人도 이랬다저랬다 하는 행위行爲[德]를 미워하여 역시 사자使者를 보내 와서 우리에게 통고通告하기를,
나라가 영호令狐맹약盟約을 저버리고 우리 나라에 사자使者를 보내 와 결맹結盟요구要求하였는데, 맹약盟約할 때 저 나라는 호천상제昊天上帝나라의 삼공三公, 나라의 삼왕三王께 밝게 하기를注+삼공三公목공穆公, 강공康公, 공공共公이고, 삼왕三王성왕成王, 목왕穆王, 장왕莊王이다. [부주]林: 맹서盟誓할 때는 반드시 천지天地조종祖宗한다. 아래의 두 는 바로 나라와 나라가 맹서盟誓한 말이다. ‘내가 비록 나라와 왕래往來하지만注+출입出入왕래往來와 같다. 나는 오직 이익만을 볼 뿐이다.’注+[부주]林: 우리는 오직 이익利益만을 보아 나라와 상종相從할 뿐이고, 성심誠心으로 나라와 우호友好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불곡不穀(楚王의 자칭自稱)은 진군秦君에게 성덕成德(美德)이 없는 것이 미웠다.注+[부주]林: 불곡不穀초공왕楚共王나라에 하면서 자칭自稱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를 공포公布[宣]하여 언행言行일치一致하지 않은 자를 징계懲戒하는 것이다.’注+[부주]朱: 진군秦君의 이 말을 제후諸侯에게 공표公表용심用心이 한결같지 않은 사람을 징계懲戒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고 하였습니다.
제후諸侯들도 모두[備] 이 말을 들었기 때문에 통분痛憤에 달하여[痛心疾首] 모두 귀국貴國을 버리고 과인寡人을 가까이하였습니다.注+이다. 이다.
과인寡人제후諸侯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을 기다리는[聽] 것은 오직 우호友好하기 위함이니,注+[부주]林: 나라가 제후諸侯를 거느리고 나라를 토벌討伐하기 위해 와서 화전和戰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나라와 화목和睦하게 지내기를 하고자 해서일 뿐이라는 말이다. 께서 제후諸侯를 돌아보고 과인寡人을 가엾게 여겨 결맹結盟해 주신다면 이는 바로 과인寡人의 바람이니, 의 뜻을 받들어 제후諸侯안정安靜시켜 퇴군退軍할 것입니다.注+진군秦君의 뜻을 받들어 제후諸侯안정安靜시키겠다는 말이다.
어찌 감히 전란戰亂을 바라겠습니까?注+(바람)이다.
그러나 만약 께서 큰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부재不才과인寡人제후諸侯를 거느리고 물러갈 수 없습니다.
감히 속마음을 다 집사執事(秦君을 지칭指稱함)께 토로吐露하여注+[부주]朱: 감히 품은 생각을 진군秦君집사執事에게 다 토로吐露했다는 말이다. 집사執事로 하여금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인지를 착실着實히 생각하게 하는 바입니다.”注+使(하여금)이다. 라고 하였다.
진환공秦桓公은 이미 진려공晉厲公영호令狐에서 결맹結盟했으면서도 적인狄人초인楚人를 불러 그들을 인도引導나라를 토벌討伐하려 하니, 제후諸侯는 이로 인해 나라와 화목和睦하였다.注+나라의 사명辭命나라를 속인 것이 많기 때문에 에 이 세 가지 일에 의거依據나라의 를 다스린[正] 것이다. [부주]朱: 또 백적白狄을 부르고 나라와 결맹結盟하기를 하여, 백적白狄나라를 인도引導해 함께 나라를 토벌討伐하려고 한 것이다.
이때 진군晉軍난서欒書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순경荀庚가 되었으며,注+순경荀庚순수荀首의 뒤를 이어 가 된 것이다. 사섭士燮상군上軍을 거느리고注+사섭士燮순경荀庚의 뒤를 이어 상군上軍을 거느린 것이다. 극기郤錡가 되었으며,注+극기郤錡사섭士燮의 뒤를 이어 가 된 것이다. 한궐韓厥하군下軍을 거느리고注+한궐韓厥극기郤錡의 뒤를 이어 하군下軍을 거느린 것이다. 순앵荀罃가 되었으며,注+순앵荀罃조동趙同의 뒤를 이어 가 된 것이다. 조전趙旃신군新軍을 거느리고注+조전趙旃한궐韓厥의 뒤를 이어 신군新軍을 거느린 것이다.극지郤至가 되었으며,注+극지郤至조괄趙括의 뒤를 이어 가 된 것이다. 극의郤毅융거戎車가 되고 난침欒鍼거우車右가 되었다.注+극의郤毅극지郤至의 아우이고, 난침欒鍼난서欒書의 아들이다.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진군晉軍장수將帥사졸士卒[乘]이 화목和睦하니, 진군晉軍은 반드시 대공大功을 세울 것이다.”注+군수軍帥이고, 거병車兵이다. 고 하였다.
5월 정해일丁亥日진군晉軍제후군諸侯軍을 거느리고 진군秦軍마수麻隧에서 전쟁戰爭하였다.
진군秦軍대패大敗하니 진군晉軍나라 성차成差불경不更여보女父포로捕虜로 잡았다.注+불경不更나라의 작명爵名이다. ‘’과 ‘패적敗績’을 에 기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두씨杜氏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나라가 옳고[直]나라가 그르기[曲] 때문이라고 하자니, 희공僖公 15년에 있었던 전쟁戰爭은 〈나라가 옳고 나라가 그른데도〉 ‘전우한戰于韓’이라 기록하였고, 〈부고赴告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자니〉 그때 성공成公군중軍中에 있었으니 다시 할 필요가 없었고, 〈을 이루지 못하고 패전敗戰한 것을 숨기기 위해서라고 하자니〉 승전勝戰[克]해 포로捕虜를 잡은 은 《춘추春秋》에 숨긴 바가 없다. 〈재삼再三 헤아려 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경문經文에는 누락漏落되고 전문傳文에만 실린 것인 듯하다. [부주]林: ‘’과 ‘패적敗績’을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가 주왕周王께 여쭈어 을 받고 나라를 정벌征伐하였으므로 출사出師명분名分정당正當[直]하여 전공戰功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나라를 나라 및 제후諸侯전쟁戰爭할 수 있는 위치位置인증認證하지 않기 위해서인 듯하다.
조선공曹宣公군중軍中에서 하였다.
진군晉軍은 드디어 경수涇水를 건너 후려侯麗까지 쳐들어갔다가 돌아와注+경수涇水안정安定에서 발원發源하여 동남쪽으로 부풍扶風경조京兆고륙현高陸縣을 거쳐 위수渭水로 흘러든다. 신초新楚에서 진후晉侯를 맞이하였다.注+는 맞이하는 것이다. 전쟁戰爭한 뒤에 진후晉侯신초新楚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진군晉軍이 돌아와 신초新楚로 가서 진후晉侯를 맞이한 것이다. 마수麻隧, 후려侯麗, 신초新楚는 모두 나라 땅이다.
성숙공成肅公에서 하였다.注+〈위 전문傳文에 ‘금성자타今成子惰기기명의棄其命矣기불반호其不反乎’라고 한〉 유자劉子의 말을 종결終結한 것이다. 나라 땅이다.
6월 정묘일丁卯日 밤에 나라 공자公子자지訾地에서 대궁大宮으로 들어가기를 청구請求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자인子印자우子羽를 죽이고注+나라 땅이다. 대궁大宮나라 조묘祖廟이다. 성공成公 10년에 자반子班나라로 출분出奔하였는데, 이번에 돌아와서 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자인子印자우子羽는 모두 정목공鄭穆公의 아들이다. [부주]林: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회군回軍하여 시가市街주둔駐屯[軍]하였다.注+[부주]林: 공자公子자지訾地에서 돌아와 나라의 시가市街에 군대를 주둔駐屯시킨 것이다.
기사일己巳日자사子駟국인國人을 거느리고 대궁大宮에서 결맹結盟하고서注+자사子駟정목공鄭穆公의 아들이다. 드디어 자반子班추격追擊해 그 시가市街를 다 불태우고,注+은 불태우는 것이다. [부주]林: 드디어 공자公子의 군대를 추격追擊시가市街로 가서 그 시가市街를 모두 불태운 것이다.자여子如, 자방子駹, 손숙孫叔, 손지孫知를 죽였다.注+자여子如공자公子이고, 자방子駹공자公子의 아우이며, 손숙孫叔자여子如의 아들이고, 손지孫知자방子駹의 아들이다.
조인曹人공자公子부추負芻에게 거수居守(서울에 머물러 나라를 지킴)하게 하고, 공자公子흔시欣時를 보내어 조백曹伯상구喪柩를 맞이해 오게 하였다.注+두 사람은 모두 조선공曹宣公서자庶子이다.
가을에 부추負芻태자太子를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注+조선공曹宣公태자太子이다.
제후諸侯가 그를 토벌討伐하기를 청하니, 진인晉人마수麻隧전쟁戰爭으로 피로疲勞하다는 이유로 후년後年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겨울에 조선공曹宣公장사葬事 지냈다.
장사葬事를 마친 뒤에 자장子臧출분出奔하려 하니,注+자장子臧공자公子흔시欣時이다. 국인國人(國都의 주민住民)이 모두 그를 따라가고자 하였다.注+부추負芻를 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조성공曹成公(負芻)은 겁이 나서注+성공成公부추負芻이다. 자기의 하고 출분出奔하지 말기를 요청要請하니,注+자장子臧에게 머물기를 요청要請한 것이다. [부주]林: 자장子臧에게 고백告白한 것이다.자장子臧은 돌아와서 자기의 채읍采邑부추負芻에게 돌려주었다.注+채읍采邑조성공曹成公에게 돌려준 것이다. 성공成公 15년에 조백曹伯을 잡은 배경背景이다.


역주
역주1 廬[盧] : 저본에는 ‘廬’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盧’로 바로잡았다.
역주2 所謂命也 : 命은 하늘이 사람에게 賦與한 五常의 德이다. 《左氏會箋》
역주3 養之以福 : 養은 하늘에서 받은 ‘中’을 修養하는 것이다. 《左氏會箋》
역주4 祀有執膰 戎有受脤 : 執膰과 受脤은 모두 祭祀를 마치고 받은 祭肉을 손에 들고 參祭한 사람들이 相見하는 것이다. 膰은 熟肉이고 脤은 生肉이다.
역주5 晉侯使呂相絶秦 : 晉侯는 晉厲公이다. 前年에 秦나라가 晉나라와 令狐에서 結盟하기로 約定하고서 晉侯가 먼저 到着했다는 이유로 秦伯은 約定을 어기고 臣下를 보내어 結盟하게 하였다. 그 뒤로도 秦나라는 晉나라를 友好國으로 待遇하지 않으니 晉侯가 呂相을 보내어 斷交를 通告한 것이다.
역주6 文公如齊 惠公如秦 : 文公과 惠公의 出奔은 僖公 6년에 있었다.
역주7 跋履山川 : 跋履는 踐履와 같다. 草行爲跋은 水行爲涉을 相對해 말한 것인데, 杜氏가 跋을 草行으로 解釋한 것은 옳지 않다. 《左氏會箋》
역주8 因文致之 : 因文致之는 未詳이다. 法을 함부로 適用해 남에게 罪를 씌우는 것을 ‘文致’라 하니, 혹 文致의 뜻이 아닐까 하여 이상과 같이 飜譯하였다.
역주9 舊德 : 秦나라가 惠公과 文公을 晉나라로 들여보낸 恩德을 이른다.
역주10 䚷[討] : 저본에는 ‘䚷’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討’로 바로잡았다.
역주11 大造 : 大功德이다.
역주12 弔傷 : 弔는 喪人를 慰勞하는 것이고, 傷은 亡者를 哀悼하는 것이다. 〈疏〉
역주13 奸絶 : 奸絶의 奸을 〈正義〉에는 奸亂(침범해 어지럽히다)으로 解釋하였고, 林注에는 奸犯斷絶(침범해 단절하다)로 해석하였으나, 〈楊注〉와 《左氏會箋》 및 其他註釋書에는 모두 扞의 假借字로 보아 ‘拒絶’ 또는 ‘斷絶’로 解釋하였다. 譯者는 〈楊注〉 등의 解釋을 取해 ‘拒絶’로 飜譯하였다.
역주14 自出 : 姉妹의 所生을 ‘出’이라 한다.
역주15 闕翦 : 〈楊注〉에는 “闕翦은 損害의 뜻이다.”고 하였다. 이 說을 取해 ‘해침’으로 飜譯하였다.
역주16 蝥賊 : 蝥는 벼의 뿌리를 갉아먹는 害蟲이고 賊은 벼의 마디를 갉아먹는 害蟲인데, 國家를 危害하는 사람을 比喩하는 말로 쓰인다.
역주17 伐[是] : 저본에는 ‘伐’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是’로 바로잡았다.
역주18 俘我王官 : 俘는 백성들을 强制로 잡아 捕虜로 삼는 것이다.
역주19 稱盟 : 杜注에 稱을 副應으로 解釋한 것은 옳지 않다. 稱은 擧이니, 稱盟은 盟會를 擧行하는 것이다. 〈楊注〉 이 說을 取해 飜譯하였다.
역주20 輔氏之聚 : 輔氏之聚는 바로 輔氏之戰이다. 戰爭에는 軍衆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戰을 ‘聚’라고도 한다. 〈楊注〉
역주21 我寡君 : 이 글에 ‘寡君’이라 稱한 곳이 세 군데이고 ‘我君’이라 稱한 곳이 한 군데이니, 使臣(呂相)의 말 같기도 하고, ‘寡人’이라 稱한 곳이 다섯 군데이니, 또 晉君의 말 같기도 하다. 이것이 옛 사람이 글을 嚴密하게 쓰지 못한 곳이다. 馬宗璉의 〈補注〉에는 이 글을 두 段落으로 나누어 前半의 ‘昔逮我獻公’에서부터 ‘寡君不敢顧昏姻’까지를 잘라서 呂相의 말로 보고, 後半의 ‘君有二心於狄’에서부터 ‘實圖利之’까지를 잘라서 呂相이 晉厲公을 대신해 秦나라를 꾸짖은 말로 보았다. 그러나 반드시 正確한 것은 아니다. 〈楊注〉
역주22 干[于] : 저본에는 ‘干’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 의거하여 ‘于’로 바로잡았다.
역주23 我昏姻也 : 廧咎如는 白狄이다. 만약 白狄의 딸이 아닌 赤狄의 딸을 잡아다가 晉文公에게 아내로 바친 것이라면 어찌 婚姻한 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左氏會箋》
역주24 狄應且憎 : 杜氏는 應을 應答으로 解釋하였으나, 譯者는 《左氏會箋》의 說을 取해 ‘受’의 뜻으로 飜譯하였다. 《左氏會箋》에 “〈廣雅〉에 ‘應은 受이다.’라고 하였으니, 狄人이 秦君의 말을 받아들였으나, 또 마음속으로는 秦君이 信義가 없는 것을 미워하였기 때문에 使者를 보내어 晉나라에 通告한 것이다.”고 하였다.
역주25 曰余雖與晉出入 余唯利是視 : 이것은 秦나라가 楚나라에 告한 말을 楚나라가 晉나라에 通告한 것이다.
역주26 斯是用痛心疾首 : 斯는 語辭이다. 痛心疾首는 切齒腐心의 뜻이다. 《左氏會箋》
역주27 師[帥] : 이 林注는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는 실려 있지 않다. ‘師’는 〈楊注〉에 의거하여 ‘帥’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역주28 戰敗績不書……傳文獨存 : 이 杜注는 補充을 하지 않고는 무슨 뜻인지 전혀 理解할 수 없다. 그러므로 〈疏〉를 參考해 補充해 飜譯하였다. 杜注의 理解를 돕기 위해 〈疏〉를 紹介한다. 〈疏〉에 “傳에는 戰爭과 敗績을 말하였는데, 經에는 이를 기록하지 않은 것에 대해 杜氏는 그 뜻을 硏究[推]해 보았으나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므로, 秦나라는 曲하고 晉나라는 直하였으므로 曲으로 直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經에 戰爭한 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解釋하자니, 僖公 15년에 있었던 韓의 戰爭은 秦나라가 直하고 晉나라가 曲하였는데도 經에 ‘戰于韓’이라고 기록하였고, 이번 戰爭을 魯나라에 通告하지 않았기 때문에 經에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解釋하자니, 당시에 魯君이 軍中에 있었으니 다시 通告할 필요가 없었고, 功을 이루지 못하고 敗戰한 것을 숨긴 것으로 解釋하자니, 勝戰해 捕虜를 잡은 功을 세운 것은 《春秋》에 숨긴 바가 없다. 두세 번 생각해 보아도 그 까닭을 알 수 없기 때문에 ‘經文에는 漏落되었고, 傳文에만 실린 것인 듯하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29 𤜯[役] : 저본에는 ‘𤜯’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役’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0 宜[直] : 저본에는 ‘宜’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 의거하여 ‘直’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1 直[且] : 저본에는 ‘直’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 의거하여 ‘且’로 바로잡았다.
역주32 𤜯[役] : 저본에는 ‘𤜯’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役’으로 바로잡았다.

춘추좌씨전(3)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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