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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3)

춘추좌씨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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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三年春王正月 公會晉侯宋公衛侯曹伯伐鄭注+宋衛未葬 而稱爵以接鄰國 非禮也 하다
[經]辛亥 葬衛穆公注+無傳하다
[經]二月 公至自伐鄭注+無傳
[經]甲子 新宮災하니 三日哭注+無傳 三年喪畢 宣公神主新入廟 故謂之新宮 書三日哭 善得禮 宗廟 親之神靈所馮居 而遇災 故哀而哭之 하다
[經]乙亥 葬宋文公注+無傳 七月而葬 緩 하다
[經]夏 公如晉하다
[經]鄭公子去疾帥師伐許注+[附注] 林曰 鄭始書大夫將 하다
[經]公至自晉注+無傳하다
[經]秋 叔孫僑如帥師圍棘注+棘 汶陽田之邑 在濟北蛇丘縣 하다
[經]大雩注+無傳 以過時書하다
[經]晉郤克衛孫良夫伐廧咎如注+赤狄別種 하다
[經]冬十有一月 晉侯使荀庚來聘하다
[經]衛侯使孫良夫來聘하다
[經]丙午 及荀庚盟注+[附注] 林曰 聘而遂盟之 於是始 하다
[經]丁未 及孫良夫盟注+先晉後衛 尊霸主 하다
[經]鄭伐許注+無傳 不書將帥 告辭略 [附注] 林曰 狄鄭也 楚之伯 鄭爲之也 由齊桓以來 爭鄭於楚 桓公卒 鄭始朝楚 諸夏之變於夷 鄭爲亂階也 至辰陵 鄭帥諸夏而事楚矣 敗晉于邲 盟十四國之君大夫于蜀 皆鄭爲之 是故狄秦而後狄鄭君 秦鄭 中國無左衽矣 하다
[傳]三年春 諸侯伐鄭하야 次于伯牛하니 討邲之役也注+伯牛 鄭地 邲役 在宣十二年
遂東侵鄭注+晉潛軍深入 하니 鄭公子偃帥師禦之注+偃 穆公子할새 使東鄙覆諸鄤注+覆 伏兵 하야 敗諸丘輿注+鄤丘輿 皆鄭地 晉偏軍爲鄭所敗 故不書 하다
皇戌如楚獻捷하다
[傳]夏 公如晉하니 拜汶陽之田注+前年晉使齊歸魯汶陽田故이라
[傳]許恃楚而不事鄭하니 鄭子良伐許注+[附注] 林曰 子良卽公子去疾 하다
[傳]晉人歸楚公子穀臣與連尹襄老之尸于楚하고 以求知罃注+邲之戰 楚獲知罃 하다
於是荀首佐中軍矣注+荀首 知罃父 故楚人許之하다
王送知罃曰 子其怨我乎 對曰 二國治戎 臣不才하야 不勝其任하야 以爲이로되 不以釁鼓注+以血塗鼓爲釁鼓 하고 使歸卽戮하니 君之惠也注+[附注] 林曰 使歸就戮于晉
臣實不才하니 又誰敢怨이릿가
王曰 然則德我乎
對曰 二國圖其社稷하고 而求紓其民注+紓 緩也 하야 各懲其忿하야 以相宥也注+宥 赦也하야 兩釋纍囚하야 以成其好注+纍 繫也
二國有好 臣不與及하니 注+言二國本不爲己 이릿가
王曰 子歸 何以報我 對曰 臣不任受怨하고 君亦不任受德注+[附注] 林曰 任 當也 言臣不當受怨楚之名 楚君亦不當受德臣之名 하니 無怨無德이라 不知所報니이다
王曰 雖然이나 必告하라
對曰 以君之靈으로 纍臣得歸骨於晉이면 寡君之以爲戮이라도 注+戮其不勝任
若從君之惠而免之하야 以賜君之注+稱於異國君曰外臣 [附注] 林曰 首 荀首 首其請於寡君而이라도 亦死且不朽
若不獲命注+君不許戮하야 而使嗣宗職注+嗣其祖宗之位職하야 次及於事注+[附注] 林曰 以次第而及於晉國之政事 하야 而帥偏師注+[附注] 林曰 卿當帥師 曰偏師者 不敢言全軍하야 以修封疆이면
雖遇執事注+遇楚將帥라도 其弗敢違注+違 辟也하고 其竭力致死하야 無有二心하야 以盡臣禮 所以報也니이다
王曰 晉未可與爭이라하고 重爲之禮而歸之하다
[傳]秋 叔孫僑如圍棘하야 取汶陽之田하다
이라 故圍之注+僑如 叔孫得臣子하다
[傳]晉郤克衛孫良夫伐廧咎如하니 討赤狄之餘焉注+宣十五年 晉滅赤狄潞氏 其餘民散入廧咎如 故討之이라
廧咎如潰하니 上失民也注+此傳 釋經之文 而經無廧咎如潰 蓋經闕此四字
[傳]冬十一月 晉侯使荀庚來聘하고 且尋盟注+尋元年赤棘盟 荀庚 林父之子 하다
衛侯使孫良夫來聘하고 且尋盟注+尋宣七年盟 하다
公問諸臧宣叔曰 中行伯之於晉也 其位在三注+下卿 이오 孫子之於衛也 位爲上卿이니 將誰先
對曰 次國之上卿 當大國之中하고 中當其下하고 下當其上大夫注+降一等 하며
小國之上卿 當大國之下卿하고 中當其上大夫하고 下當其下大夫注+降大國二等하니 上下如是 古之制也注+古制 公爲大國 侯伯爲次國 子男爲小國 니이다
衛在晉 不得爲次國注+春秋時 以强弱爲大小 故衛雖侯爵 猶爲小國 하고 晉爲盟主하니 其將先之注+計等則二人位敵 以盟主 故先晉하소서
丙午 盟晉하고 丁未 盟衛하니 禮也
[傳]十二月甲戌 晉作六軍注+爲六軍 僭王也 萬二千五百人爲軍하야 韓厥趙括鞏朔韓穿荀騅趙旃皆爲卿하니 賞鞍之功也注+韓厥爲新中軍 趙括佐之 鞏朔爲新上軍 韓穿佐之 荀騅爲新下軍 趙旃佐之 晉舊自有三軍 今增此 故爲六軍
[傳]齊侯朝于晉하야 注+行朝禮할새 郤克趨進曰 此行也 君爲 寡君未之敢任注+言齊侯之來 以謝婦人之笑 非爲修好 故云晉君不任當此惠이니다
晉侯享齊侯 齊侯視韓厥하니 韓厥曰 君知厥也乎잇가 齊侯曰 服改矣注+戎朝異服也 言服改 明識其人 로다
韓厥登擧爵曰 爲兩君之在此堂也注+[附注] 林曰 言臣之致死力於行陳之間 爲欲齊晉和好 兩君之會聚于此堂也니이다
[傳]荀罃之在楚也 鄭賈人有將寘諸褚中以出注+[附注] 林曰 褚 絮也 鄭之賈人貿易于楚 有將藏荀罃於褚絮之中以出歸晉 하다
旣謀之로되 未行 而楚人歸之하다
賈人如晉 荀罃善視之하야 如實出己하니 賈人曰 吾無其功하니 敢有其實乎
吾小人이라 不可以厚誣君子注+[附注] 林曰 不可以一時虛謀 重誣君子 受其實惠 라하고 遂適齊注+傳言知罃之賢 하다


3년 봄 주왕周王 정월에 성공成公진후晉侯송공宋公위후衛侯조백曹伯회합會合하여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송군宋君위군衛君선군先君장사葬事도 지내기 전에 인국隣國교접交接하였으니, 가 아니다.
신해일辛亥日위목공衛穆公장사葬事 지냈다.注+이 없다.
2월에 성공成公나라 토벌討伐에서 돌아왔다.注+이 없다.
갑자일甲子日신궁新宮이 불에 타니, 성공成公이 3일 동안 하였다.注+이 없다. 삼년상三年喪이 끝나 선공宣公신주神主를 새로 종묘宗廟에 모셔 들였기 때문에 그곳을 ‘신궁新宮’이라 한 것이다. ‘3일 동안 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에 맞은 것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종묘宗廟는 어버이의 영혼靈魂이 의지해 계시는 곳인데, 화재火災를 만났기 때문에 슬퍼서 한 것이다.
을해일乙亥日송문공宋文公장사葬事 지냈다.注+이 없다. 일곱 달 만에 장사葬事 지냈으니 늦은 것이다.
여름에 성공成公나라에 갔다.
나라 공자公子거질去疾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부주]林: 나라 대부大夫가 군대를 거느린 것을 비로소 기록記錄하였다.
성공成公나라에서 돌아왔다.注+이 없다.
가을에 숙손교여叔孫僑如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포위包圍하였다.注+문수汶水 북쪽 땅의 으로 제북濟北사구현蛇丘縣에 있다.
크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注+이 없다. 때가 지난 뒤에 지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나라 극극郤克나라 손량부孫良夫장구여廧咎如토벌討伐하였다.注+적적赤狄별종別種이다.
겨울 11월에 진후晉侯순경荀庚사자使者로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
위후衛侯손량부孫良夫사자使者로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
병오일丙午日순경荀庚결맹結盟하였다.注+[부주]林: 빙문聘問하고서 드디어 결맹結盟하는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정미일丁未日손량부孫良夫결맹結盟하였다.注+먼저 나라와 결맹結盟하고 뒤에 나라와 결맹結盟한 것은 패주霸主존대尊待한 것이다.
나라가 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이 없다. 나라를 친 나라의 장수將帥기록記錄하지 않은 것은 부고赴告생략省略하였기 때문이다. [부주]林: 나라 장수將帥기록記錄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융적戎狄으로 취급取扱한 것이니, 이는 나라가 나라를 패주霸主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제환공齊桓公 이래로 나라는 나라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나라와 서로 다투었는데, 환공桓公하자 나라는 비로소 나라에 입조入朝하였으니, 제하諸夏(中國)가 이적夷狄으로 한 것은 나라가 의 계기를 만든 것이다. 선공宣公 11년에 신릉辰陵에서 나라가 나라와 결맹結盟함에 이르러서는 나라가 제하諸夏를 이끌고서 나라를 섬겼다. 성공成公 2년에 나라가 에서 진군晉軍패배敗北시키고서 14의 임금 및 대부大夫에서 결맹結盟한 것도 모두 나라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융적戎狄으로 취급한 뒤에 정군鄭君융적戎狄으로 취급한 것이다. 만약 나라와 나라가 아니었다면 중국中國이 오랑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3년 봄에 제후諸侯나라를 토벌討伐하기 위해 백우伯牛주둔駐屯하였으니, 이는 전쟁戰爭에서 나라가 나라를 배반背叛하고 나라에 항복降服한 것을 징벌懲罰하기 위함이었다.注+백우伯牛나라 땅이다. 전쟁戰爭선공宣公 12년에 있었다.
드디어 동진東進하여 나라를 침공侵攻하니,注+나라가 군대를 은밀隱密이동移動시켜 깊이 들어간 것이다. 나라 공자公子이 군대를 거느리고 방어防禦할 때注+정목공鄭穆公의 아들이다. 동쪽 변경邊境의 군대를 매복埋伏시켜注+복병伏兵이다. 제후군諸侯軍구여丘輿에서 패배敗北시켰다.注+구여丘輿는 모두 나라 땅이다. 나라 편사偏師(일부의 군대)가 나라에 패배敗北했기 때문에 패전敗戰했다고 기록記錄하지 않은 것이다.
황술皇戌나라로 가서 헌첩獻捷하였다.
여름에 성공成公나라에 갔으니, 이는 문양汶陽의 땅을 되찾아 준 일에 배사拜謝(謝禮)하기 위함이었다.注+전년前年나라가 나라에게 문양汶陽의 땅을 나라에 돌려주게 하였기 때문이다.
나라가 나라를 믿고 나라를 섬기지 않으니, 나라 자량子良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注+[부주]林: 자량子良은 바로 공자公子거질去疾이다.
진인晉人나라 공자公子곡신穀臣연윤連尹양로襄老시신屍身나라에 돌려주고 지앵知罃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要求하였다.注+전쟁戰爭초군楚軍지앵知罃을 사로잡았다.
이때 순수荀首나라의 중군좌中軍佐였기 때문에注+순수荀首지앵知罃의 아버지이다. 초인楚人이 이 요구要求허락許諾하였다.
초왕楚王지앵知罃을 보낼 때 “그대는 나를 원망怨望하는가?”라고 묻자, 지앵知罃이 대답하기를, “두 나라가 교전交戰[治戎]할 때 재능才能이 없어 자신의 임무任務감당堪當하지 못해 포로捕虜가 되었는데도 집사執事께서 나를 죽여 피를 받아 흔고釁鼓하지 않고注+피를 받아 북에 바르는 것을 흔고釁鼓라 한다. 나라로 돌아가 형륙刑戮을 받게 하시니, 이는 군왕君王은혜恩惠입니다.注+[부주]林: 나라로 돌아가서 죽음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은 실로 재능才能이 없어 이리된 것이니, 감히 누구를 원망怨望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초왕楚王이 “그렇다면 나에게 은덕을 입었다고 여기는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두 나라가 사직社稷안녕安寧을 꾀하고 백성의 고통苦痛을 풀어주기[紓] 위해注+는 느슨히 함이다. 각각 분노忿怒억제抑制[懲]하고 서로 용서하여,注+는 용서함이다. 양국兩國이 서로 포로捕虜[纍囚]를 석방釋放하고 우호友好를 이루기로 하였으나,注+에 갇힘이다.
두 나라가 우호友好를 맺은 것은 과는 관계關係가 없으니, 그 누구에게 감히 은덕恩德을 입었다고 하겠습니까?”注+두 나라가 우호友好를 맺은 것은 본래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초왕楚王이 “그대가 돌아가면 무엇으로 나에게 보답報答하겠는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군왕君王원망怨望한 일이 없고 군왕君王께서도 에게 은덕恩德을 입힌 일이 없어注+[부주]林: 이니, 나라를 원망怨望한다는 이름을 받는 것이 부당不當하고, 군왕君王께서도 에게 은덕恩德을 입혔다는 이름을 받는 것이 부당不當하다는 말이다. 원망怨望도 없고 은덕恩德도 없는데, 보답報答할 바를 모르겠습니다.”고 하였다.
초왕楚王이 “비록 그렇지만 그대의 생각을 반드시 나[不穀]에게 하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군왕君王은총恩寵[靈]으로 포로捕虜가 된 이 몸[骨]을 보존保存나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 임금께서 을 죽이더라도 신은 몸은 죽어도 군왕君王의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고[死且不朽],注+임무任務감당堪當하지 못한 를 물어 죽이는 것이다.
만약 우리 임금께서 군왕君王은혜恩惠를 생각해 사면赦免하고서 군왕君王외신外臣순수荀首에게 주시면注+대부大夫이국異國의 임금에게 본국本國신하臣下지칭指稱할 때 외신外臣이라 한다. [부주]林: 순수荀首이다. 순수荀首가 우리 임금께 하여 종묘宗廟에서 죽이더라도 은 몸은 죽어도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순수荀首가 임금의 을 받지 못해注+진군晉君이 죽이기를 허락許諾하지 않는 것이다. 을 죽이지 않고 종직宗職승계承繼시켜注+조종祖宗지위地位관직官職승계承繼하는 것이다. 차례가 되어 군사軍事에 참여하여注+[부주]林: 차례가 되어 나라의 정사政事참여參與하는 것이다. 편사偏師를 거느리고注+[부주]林: 응당應當 군대를 통솔統率하는데, ‘편사偏師’라고 한 것은 감히 전군全軍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봉강封疆수비守備하게 된다면
그때 비록 집사執事를 만나더라도注+나라 장수將帥를 만나는 것이다. 감히 피하지 않고注+하는 것이다.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을 것이고,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신하臣下를 다하는 것으로 군왕君王보답報答하겠습니다.”고 하니,
초왕楚王은 “나라와는 다툴 수 없다.”고 하고서 지앵知罃하게 예우禮遇하여 돌려보냈다.
가을에 숙손교여叔孫僑如포위包圍하여 문양汶陽의 땅을 하였다.
극인棘人복종服從하지 않기 때문에 포위包圍한 것이다.注+교여僑如숙손득신叔孫得臣의 아들이다.
나라 극극郤克나라 손량부孫良夫장구여廧咎如토벌討伐하였으니, 이는 적적赤狄잔여세력殘餘勢力토벌討伐하기 위함이었다.注+선공宣公 15년에 나라가 적적赤狄노씨潞氏격멸擊滅하니, 노씨潞氏여민餘民이 흩어져 장구여廧咎如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이번에 장구여廧咎如토벌討伐한 것이다.
장구여廧咎如궤멸潰滅하였으니, 이는 윗사람이 민심民心을 잃었기 때문이다.注+경문經文해석解釋한 것인데, 경문經文에 ‘장구여궤廧咎如潰’라는 말이 없으니, 아마도 에 이 네 글자가 빠진 것인 듯하다.
겨울 11월에 진후晉侯순경荀庚을 보내 와서 빙문聘問하고 또 전일前日맹약盟約중수重修하였다.注+성공成公원년元年적극赤棘에서 맺은 맹약盟約중수重修한 것이다. 순경荀庚순임보荀林父의 아들이다.
위후衛侯손량부孫良夫를 보내 와서 빙문聘問하고 또 전일의 맹약盟約중수重修하였다.注+선공宣公 7년에 맺은 맹약盟約중수重修한 것이다.
성공成公장선숙臧宣叔에게 “중행백中行伯나라에서 그 지위地位가 세 번째이고,注+하경下卿이다. 손자孫子나라에서 그 지위地位상경上卿이니, 장차 누구와 먼저 하여야 하겠는가?”라고 묻자,
선숙宣叔이 “차국次國상경上卿대국大國중경中卿해당該當하고 중경中卿하경下卿에 해당하고 하경下卿상대부上大夫에 해당하며,注+등급等級을 낮춘다.
소국小國상경上卿대국大國하경下卿에 해당하고 중경中卿상대부上大夫에 해당하고 하경下卿하대부下大夫에 해당하니,注+대국大國에 비해 두 등급等級을 낮춘다. 위차位次상하上下가 이와 같은 것이 옛 제도制度입니다.注+제도制度에 의하면 의 나라는 대국大國이고, 의 나라는 차국次國이고, 의 나라는 소국小國이다.
나라는 나라에 비해 차국次國도 될 수 없고,注+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나라의 강약强弱대소大小기준基準으로 삼았기 때문에 나라가 비록 후작侯爵이었지만 오히려 소국小國이 된 것이다. 나라는 맹주盟主이니, 아마도 나라 사자使者와 먼저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注+관등官等계산計算하면 두 사람의 지위地位대등對等하지만 나라가 맹주盟主였기 때문에 먼저 나라와 결맹結盟한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병오일丙午日나라와 결맹結盟하고, 정미일丁未日나라와 결맹結盟하니, 에 맞는 일이었다.
12월 갑술일甲戌日나라가 군대를 육군六軍으로 만들어注+육군六軍으로 만든 것은 참람僭濫하게 제도制度를 사용한 것이다. 1만 2천 5백 이다. 한궐韓厥, 조괄趙括, 공삭鞏朔, 한천韓穿, 순추荀騅, 조전趙旃을 모두 으로 삼았으니, 이는 전공戰功포상褒賞한 것이다.注+한궐韓厥이 새 중군中軍이 되고 조괄趙括가 되었으며, 공삭鞏朔이 새 상군上軍이 되고 한천韓穿가 되었으며, 순추荀騅가 새 하군下軍이 되고 조전趙旃가 된 것이다. 나라에는 이전부터 삼군三軍이 있었는데, 지금 새로 삼군三軍을 더하였기 때문에 육군六軍이 된 것이다.
제후齊侯조현朝見하기 위해 나라로 가서 수옥授玉하려 할 때注+조현朝見거행擧行하려 한 것이다.극극郤克이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제후齊侯에게 말하기를, “(齊侯를 가리킴)께서 이번에 오신 것은 부인婦人이 비웃어 모욕侮辱한 일을 사과謝過하기 위함이니, 우리 임금께서 담당擔當하실 일이 아닙니다.”고 하였다.注+제후齊侯가 온 것은 부인婦人이 비웃은 것을 사과謝過하기 위함이고 수호修好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에 진군晉君이 이 혜사물惠賜物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진후晉侯연회宴會를 열어 제후齊侯대접待接할 때 제후齊侯한궐韓厥을 눈여겨보니, 한궐韓厥이 “군왕君王께서 나를 아십니까?”라고 묻자, 제후齊侯가 “복장服裝이 바뀌었구려.”注+군중軍中에 있을 때와 조정朝廷에 있을 때는 입는 복장服裝이 다르기 때문에 복장服裝이 바뀌었으나 그 사람은 분명히 알겠다는 말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한궐韓厥당상堂上으로 올라가서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전투戰鬪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것은 바로 두 임금께서 이 에서 연회宴會를 열어 우호友好하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注+[부주]林: 군진軍陣 사이에서 죽을 힘을 다한 것은 나라와 나라가 우호友好를 맺어 두 나라 임금이 이 에 모이게 하고자 해서였다는 말이다. 하였다.
순앵荀罃나라에 잡혀 있을 때 나라 상인商人[賈人]이 순앵荀罃을 자루 속에 넣어 탈출脫出시키려고 하였다.注+[부주]林: 는 솜[絮]이다. 나라 상인商人나라에 무역貿易하러 갔다가 순앵荀罃을 보고서, 그를 솜 속에 숨겨 탈출脫出시켜 나라로 돌려보내려 한 것이다.
이미 계획計劃을 세웠으나, 그 계획計劃실행實行하기 전에 초인楚人순앵荀罃을 돌려보냈다.
상인商人나라에 가자, 순앵荀罃이 그를 잘 대우待遇[視]하여 실제實際로 자기를 구출救出해 준 것처럼 대우하니, 상인商人이 말하기를, “나는 그런 공로功勞가 없는데, 감히 그런 공로功勞가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대우待遇를 받을 수 있습니까?
나는 소인小人이니 군자君子를 속일 수 없습니다.”注+[부주]林: 한 때의 허모虛謀로 거듭 군자君子를 속여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은혜恩惠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라고 하고서 드디어 나라로 갔다.注+전문傳文지앵知罃의 어짊을 말한 것이다.


역주
역주1 〈微〉 : 저본에는 ‘微’가 없으나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2 俘馘 : 사로잡은 敵을 ‘俘’라 하고, 敵을 죽여 왼쪽 귀를 자른 것을 ‘馘’이라 하는데, 여기의 ‘俘馘’은 俘虜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3 執事 : 貴人을 직접 指稱하기 罪悚하여 그 左右를 指稱하는 말로, 貴人에 대한 敬稱이다.
역주4 其誰敢德 : 누구에게 恩德을 입었다고 感謝하겠느냐는 말이다.
역주5 不穀 : 不善의 뜻으로 君王이 자신에 대한 謙稱으로 쓰는 말이다.
역주6 死且不朽 : 몸은 비록 죽어 썩지만 끼치신 은혜는 영원히 썩지 않는다는 말로 죽어도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이다. 〈疏〉
역주7 外臣首 : 임금 앞에서는 臣下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禮이기 때문에 知罃이 그 아버지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역주8 以戮於宗 : 宗子는 宗族의 構成員을 生殺할 수 있는 權限이 있다. 荀首는 宗子였기 때문에 知罃을 宗族의 宗廟에서 殺戮할 수 있다. 《左傳直解》
역주9 棘不服 : 棘人이 服從하지 않은 것은 稅畝하는 苛酷한 政治를 두려워해서인 듯하다. 《左氏會箋》
역주10 將授玉 : 授玉은 朝禮의 儀式으로 諸侯가 朝見할 때 서로 玉을 授受하는 것이다.
역주11 婦人之笑辱 : 宣公 17년에 郤克이 齊나라에 使臣으로 갔을 때 齊侯의 母親이 비웃은 일을 이른다.
역주12 臣之不敢愛死 : 成公 2년에 있었던 鞍의 戰爭 때 韓厥이 齊侯를 追擊한 일을 이른다.

춘추좌씨전(3)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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