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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7)

춘추좌씨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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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有四年春 衛公叔戍來奔하다
衛趙陽出奔宋注+陽 趙黶孫 書名者 親富不親仁하다
[經]二月辛巳 楚公子結陳公孫佗人帥師滅頓하고 以頓子牂歸하다
[經]夏 衛北宮結來奔注+亦黨公叔戍 皆惡之하다
[經]五月 於越敗吳于檇李注+於越 越國也 使罪人詐吳亂陳 故從未陳之例 書敗也 檇李 吳郡嘉興縣南醉李城 [附注] 林曰 此越句踐元年也 史記 吳闔廬聞越允常死 興師伐越 句踐襲敗吳師 射殺闔廬하다
[經]吳子光卒注+未同盟而赴以名하다
[經]公會齊侯衛侯于牽注+魏郡黎陽縣東北有牽城 [附注] 林曰 牽 衛地 齊魯爲會止此 하다
[經]公至自會注+無傳하다
[經]秋 齊侯宋公會于洮注+洮 曹地하다
[經]天王使石尙來歸脤注+無傳 石尙 天子之士 石氏尙名 脤 祭社之肉 盛以脤器 以賜同姓諸侯親兄弟之國 與之共福 [附注] 林曰 周魯之交止此하다
[經]衛世子蒯聵出奔宋하다
[經]衛公孟彄出奔鄭注+彄書名 與蒯瞶黨 罪之하다
[經]宋公之弟辰自蕭來奔注+無傳 稱宋公之弟 例在十年하다
[經]大蒐于比蒲注+[附注] 林曰 大蒐止此하다
[經]邾子來會公注+無傳 會公于比蒲 하다
[經]城莒父及霄注+無傳 公叛晉助范氏 故懼而城二邑也 此年無冬 史闕하다
[傳]十四年春 衛侯逐公叔戍與其黨하다
故趙陽奔宋하고 戍來奔注+終史魚之言하다
[傳]梁嬰父惡董安于하야 謂知文子曰 不殺安于하고 使終爲政於趙氏 趙氏必得晉國하리니 盍以其先發難也 討于趙氏注+[附注] 林曰 何不以安于先發范中行氏之難 討治趙氏 而使殺之
文子使告於趙孟曰 范中行氏雖信爲亂이나 安于則發之하니 是安于與謀亂也
晉國有命하니 始禍者死라하니라
二子旣伏其罪矣注+[附注] 林曰 范中行旣伏罪而出矣 敢以告注+告使討安于하노라
趙孟患之한대 安于曰 我死而晉國寧하고 趙氏定이면 將焉用生이리오
人誰不死리오
라하고 乃縊而死하다
趙孟尸諸市하고 而告於知氏曰 主命戮罪人하니 安于旣伏其罪矣
敢以告라하니 知伯從趙孟盟注+知伯 荀躒하다
而後趙氏定注+[附注] 林曰 賴以安定 祀安于於廟注+趙氏廟 [附注] 林曰 報其忠也하다
[傳]頓子牂欲事晉하야 背楚而絶陳好하니 二月 楚滅頓注+傳言小不事大 所以亡하다
[傳]夏 衛北宮結來奔하니 公叔戍之故也
[傳]吳伐越注+報五年越入吳하니 越子句踐禦之하야 陳于檇李注+句踐 越王允常子하다
句踐患吳之整也하야 이로되 不動注+使敢死之士往 輒爲吳所禽 欲使吳師亂取之 而吳不動하니 注+以劒注頸 [附注] 林曰 句踐又使有罪當死者 別爲三行하고 而辭曰 二君有治注+治軍旅 臣奸旗鼓注+犯軍令하야 不敏於君之行前하니
不敢逃刑이라 하노라하고 遂自剄也하니 師屬之目注+[附注] 林曰 吳師怪其所爲 皆注目而視之이어늘 越子因而伐之하야 大敗之하다
靈姑浮以戈擊闔廬注+姑浮 越大夫한대 闔廬傷將指어늘 取其一屨注+其足大指見斬 遂失屨 姑浮取之하다
타가 卒於陘하니 去檇李七里注+釋經所以不書滅
夫差使人立於庭注+夫差 闔廬嗣子하야 苟出入 必謂己曰 夫差
而忘越王之殺而父乎注+[附注] 林曰 而 汝也아하면 則對曰 唯 不敢忘이라하다
三年乃報越注+後三年 哀元年 하다
[傳]晉人圍朝歌하니 公會齊侯衛侯于脾上梁之間注+脾上梁間 卽牽하야 謀救范中行氏注+齊魯叛晉 故助范中行也하다
析成鮒小王桃甲率狄師以襲晉注+二子 晉大夫范中行氏之黨하야 戰于絳中이라가 不克而還하야 士鮒奔周注+[附注] 林曰 卽析成鮒하고 小王桃甲入于朝歌注+[附注] 林曰 歸范中行氏하다
齊侯宋公會于洮하니 范氏故也注+謀救范氏
[傳]衛侯爲夫人南子召宋朝注+南子 宋女也 朝 宋公子 舊通于南子 在宋呼之러니 會于洮注+[附注] 林曰 大子蒯聵獻盂于齊하야 過宋野注+蒯聵 衛靈公大子 盂 邑名也 就會獻之 故自衛行而過宋野할새 野人歌之曰 旣定爾婁豬어늘 盍歸吾艾豭注+婁豬 求子豬 以喩南子 艾豭 喩宋朝 艾 老也 [附注] 朱曰 艾豭 老牡豬也 蓋豬之求子者 得牡則定 意謂南子已厭足 何不令宋朝歸也
大子羞之하야 謂戲陽速曰 從我而朝少君注+速 大子家臣 [附注] 林曰 少君 卽夫人南子하야 少君見我 我顧어든 乃殺之하라 速曰 諾
乃朝夫人하니 夫人見大子하다
大子三顧로되 速不進하니 夫人見其色하고 啼而走注+見大子色變 知其欲殺己曰 蒯聵將殺余라하니 公執其手以登臺하다
大子奔宋하다
盡逐其黨하다
故公孟彄出奔鄭이라가 自鄭奔齊하다
大子告人曰 戲陽速禍余라하니 戲陽速告人曰 大子則禍余로다
大子無道하야 使余殺其母하니 余不許 將戕於余注+戕 殘殺也 若殺夫人이면 注+[附注] 林曰 若己殺其母南子 又將殺我以自解說이리라
余是故許而弗爲하야 以紓余死니라
諺曰 이라하니 注+使義可信 不必信言
[傳]冬十二月 晉人敗范中行氏之師於潞하야 獲籍秦高彊注+二子 黨范氏者 終景王言籍父無後하고 又敗鄭師及范氏之師于百泉注+鄭助范氏 故幷敗하다


14년 봄에 나라 공숙수公叔戍나라로 도망해 왔다.
나라 조양趙陽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注+조양趙陽조염趙黶의 손자이다. 이름을 기록한 것은 부인富人을 가까이하고 인인仁人을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월 신사일辛巳日나라 공자公子나라 공손타인公孫佗人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격멸擊滅하고서 돈자頓子을 데리고 돌아갔다.
여름에 나라 북궁결北宮結나라로 도망해 왔다.注+북궁결北宮結 역시 공숙수公叔戍이므로 모두 미워하여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5월에 어월於越취리檇李에서 오군吳軍패배敗北시켰다.注+어월於越나라이다. 월왕越王죄인罪人들을 보내어 나라를 속여 오군吳軍진영陣營을 어지럽게 하였다. 그러므로 을 치지 않고 공격한 를 따라 ‘’로 기록한 것이다. 취리檇李오군吳郡가흥현嘉興縣 남쪽의 취이성醉李城이다. [부주]林: 월왕越王구천句踐원년元年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오왕吳王합려闔廬월왕越王윤상允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치니, 구천句踐오군吳軍습격襲擊해 패배시키고서 합려闔廬사살射殺하였다.
오자吳子하였다.注+동맹同盟하지 않았으되, 〈에 이름을 기록한 것은〉 이름을 기록해 부고赴告하였기 때문이다.
정공定公제후齊侯, 위후衛侯에서 회합하였다.注+위군魏郡여양현黎陽縣 동북에 견성牽城이 있다. [부주]林: 나라 땅이다. 나라와 나라의 회합이 여기에서 그쳤다.
정공定公회합會合에서 돌아왔다.注+이 없다.
가을에 제후齊侯송공宋公에서 회합會合하였다.注+나라 땅이다.
천왕天王석상石尙을 보내와서 을 주었다.注+이 없다. 석상石尙천자天子로, 이고 이다. (土地神)에 제사 지낸 고기인데, 그 고기를 신기脤器(자개로 장식한 그릇)에 담아 동성同姓제후諸侯와 친형제의 나라에 하사下賜하여 그들과 복록福祿을 함께한다. [부주]林: 나라와 나라의 교왕交往(相互往來)이 여기에서 그쳤다.
나라 세자世子괴외蒯聵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
나라 공맹구公孟彄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注+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괴귀蒯瞶을 지었으므로 그를 징벌懲罰한 것이다.
송경공宋景公의 아우 에서 나라로 도망해 왔다.注+이 없다. ‘송공宋公’라고 칭한 것은 그 정공定公 10년에 나와 있다.
비포比蒲에서 군사훈련軍事訓鍊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였다.注+[부주]林: 대수大蒐가 여기에서 그쳤다.
주자邾子가 와서 정공定公회합會合하였다.注+이 없다. 정공定公비포比蒲에서 회합會合한 것이다. 와서 조현朝見를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 한 것이다.
거보莒父을 쌓았다.注+이 없다. 정공定公나라를 배반하고 범씨范氏를 도왔기 때문에 두려워서 두 에 성을 쌓은 것이다. 이해 기록에 겨울이 없는 것은 사관史官이 빠트린 것이다.
14년 봄에 위후衛侯공숙수公叔戍와 그 을 축출하였다.
그러므로 조양趙陽나라로 출분出奔하고, 공숙수公叔戍는 우리나라로 도망해 왔다.注+끝내 공숙사어公叔史魚의 말과 같이 되었다.
양영보梁嬰父동안우董安于를 미워하여 지문자知文子에게 말하기를 “동안우董安于를 죽이지 않고 끝내 조씨趙氏 집안의 정사政事를 하게 한다면 조씨趙氏가 반드시 나라를 얻게 될 것이니, 어찌 동안우董安于가 먼저 화난禍難을 일으킨 일로써 조씨趙氏징벌懲罰하지 않으십니까?注+[부주]林: 어찌 동안우董安于가 먼저 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화난禍難유발誘發시킨 일로 조씨趙氏토치討治(懲罰)하여 조씨趙氏로 하여금 동안우董安于를 죽이게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라고 하니,
지문자知文子가 사람을 보내어 조맹趙孟에게 고하기를 “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가 비록 실로 반란叛亂을 일으켰으나, 실은 동안우董安于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한 것이니, 이는 동안우董安于도 함께 반란叛亂모의謀議한 것이오.
나라에 명령命令이 있으니 화난禍難을 먼저 일으킨 자는 사형死刑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자기들의 를 인정하였으니注+[부주]林: 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는 이미 를 인정하고서 출분出奔하였다는 말이다. , 감히 이 말(晉나라의 명령命令)로써 합니다.注+조씨趙氏에게 동안우董安于를 토벌하라고 고한 것이다. ”고 하였다.
조맹趙孟이 이를 근심하자, 동안우董安于가 말하기를 “내가 죽어서 나라가 편안해지고 조씨趙氏안정安定된다면 무엇 때문에 살려 하겠습니까?
사람은 누군들 죽지 않겠습니까?
나는 죽음이 너무 늦었습니다.”고 하고서 스스로 목매 죽었다.
조맹趙孟은 그의 시신尸身을 저자거리에 벌여놓고서 지씨知氏에게 고하기를 “(荀躒)께서 죄인罪人을 죽이라고 명하시니, 동안우董安于는 이미 그 를 받고 죽었습니다.
이에 감히 그 사실을 합니다.”고 하니, 지백知伯조맹趙孟에게 가서 맹약盟約하였다.注+지백知伯순락荀躒이다.
뒤에 조씨趙氏가 안정되자注+[부주]林: 동안우董安于의 도움을 힘입어 조씨趙氏안정安定된 것이다. , 조맹趙孟동안우董安于신위神位조씨趙氏의 사당에 모시고서 제사 지냈다.注+조씨趙氏조묘祖廟이다. [부주]林: 그 충성忠誠보답報答한 것이다.
돈자頓子나라를 섬기고자 하여, 나라를 배반하고 나라와 우호友好를 끊으니, 2월에 나라가 나라를 격멸擊滅하였다.注+전문傳文소국小國대국大國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한 것을 말한 것이다.
여름에 나라 북궁결北宮結나라로 도망해 왔으니, 이는 공숙수公叔戍 때문이다.
나라가 나라를 침벌侵伐하니注+정공定公 5년에 월군越軍나라에 침입侵入했던 것을 보복하기 위함이었다., 월자越子구천句踐오군吳軍방어防禦하기 위하여 취리檇李을 쳤다.注+구천句踐월왕越王윤상允常의 아들이다.
구천句踐오군吳軍군용軍容엄정嚴整한 것을 근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勇士[死士]들을 보내어 두 차례나 오군吳軍생포生捕해 오게 하였으되, 오군吳軍동요動搖하지 않으니注+용감勇敢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勇士들을 보내어 번번이 오군吳軍에게 사로잡히게 하여 오군吳軍으로 하여금 어지럽게 이들을 잡게 하고자 하였으나 오군吳軍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 구천句踐은 또 죄인罪人삼행三行으로 하여금 을 목에 대고서 오군吳軍 앞으로 가서注+을 목에 댐이다. [부주]林: 구천句踐은 또 가 있어 응당 죽을 자들로써 따로 삼행三行(세 소대小隊)을 편성編成한 것이다. “두 나라 임금께서 작전作戰하시는데注+군려軍旅(군대)를 다스림이다. , 우리들은 군령軍令을 범하여 임금님의 행진行陣 앞에서 민첩하지 못하였습니다.注+군령軍令을 범한 것이다.
감히 형벌刑罰을 피할 수 없으니 감히 죽겠습니다.”고 하고서 드디어 스스로 목을 베어 죽게 하니, 오군吳軍이 이를 괴상히 여겨 주목注目하자注+[부주]林: 오군吳軍이 그 행위行爲를 괴상하게 여겨 모두 주목注目해 본 것이다. , 월자越子는 그 틈을 이용해 공벌攻伐하여 오군吳軍을 대패시켰다.
영고부靈姑浮가 창으로 합려闔廬를 치니注+영고부靈姑浮나라 대부大夫이다. 합려闔廬는 엄지발가락에 상처를 입어 신발을 잃으니, 영고부靈姑浮합려闔廬의 한쪽 신발을 하였다.注+합려闔廬의 엄지발가락이 잘려나가 드디어 신발을 잃으니, 영고부靈姑浮가 그 신발을 취한 것이다.
합려闔廬는 돌아가다가 에서 하였으니 취리檇李에서 칠리七里거리距離였다.注+에 ‘’로 기록하지 않은 까닭을 해석한 것이다.
부차夫差는 사람을 궁정宮庭에 세워놓고서注+부차夫差합려闔廬사자嗣子이다. 자기가 들고 날 때에 반드시 자기에게 “부차夫差야!
너는 월왕越王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일을 잊었느냐?注+[부주]林: (너)이다. ”고 말하게 하고서,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부차夫差는 “예,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한 지 3년 만에 나라에 원수를 갚았다.注+후삼년後三年노애공魯哀公원년元年이다.
진인晉人조가朝歌를 포위하니, 정공定公상량上梁 사이에서 제후齊侯, 위후衛侯회합會合하여注+상량上梁 사이는 바로 견읍牽邑이다.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를 구원하기를 상의하였다.注+나라와 나라가 나라를 배반하였다. 그러므로 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를 도운 것이다.
석성부析成鮒소왕도갑小王桃甲적군狄軍을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기습奇襲하여注+두 사람은 나라 대부大夫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이다. 강도絳都 안에서 교전交戰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환군還軍하여, 사부士鮒나라로 도망하고注+[부주]林: 바로 석성부析成鮒이다. , 소왕도갑小王桃甲조가朝歌로 들어갔다.注+[부주]林: 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에게 귀의歸依한 것이다.
가을에 제후齊侯송공宋公에서 회합하였으니, 이는 범씨范氏 때문이었다.注+범씨范氏를 구원하는 일을 상의하기 위함이었다.
위후衛侯부인夫人남자南子를 위하여 송조宋朝나라로 불러왔더니注+남자南子나라 여인女人이고, 나라 공자公子로 오래전부터 남자南子을 통한 자이다. 나라에 있는 를 불러온 것이다. , 〈제후齊侯송공宋公과〉 에서 회합할 때注+[부주]林: 부인夫人으로 하여금 에서 송조宋朝를 만나게 한 것이다. 태자太子괴외蒯聵나라에 우읍盂邑을 바치기 위해 로 가는 길에 나라 촌야村野를 지나는데注+괴외蒯聵위영공衛靈公태자太子이다. 읍명邑名이다. 회합會合하고 있는 로 가서 바친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출발하여 나라의 촌야村野를 지난 것이다. , 촌야村野 사람이 노래하기를 “너의 암퇘지 이미 안정되었는데, 어찌 우리 늙은 수퇘지 돌려보내지 않느냐?注+누저婁豬발정發情한 암퇘지이니, 남자南子를 비유한 것이고, 애가艾豭송조宋朝를 비유한 것이다. 이다. [부주]朱: 애가艾豭는 늙은 수퇘지이다. 대체로 발정한 암퇘지는 수퇘지를 만나면 안정이 되니, 남자南子가 이미 성욕性慾을 만족히 채웠는데, 어찌 송조宋朝를 돌려보내지 않느냐는 뜻이다. ”고 하였다.
이 노래를 들은 태자太子수치羞恥스럽게 여겨 희양속戲陽速에게 이르기를 “〈귀국歸國한 뒤에〉 너는 내가 소군少君을 뵈러 갈 때 함께 따라가서注+희양속戲陽速태자太子가신家臣이다. [부주]林: 소군少君은 바로 부인夫人남자南子이다. 소군少君이 나를 접견接見할 때 내가 뒤를 돌아보거든 너는 즉시 소군少君을 죽여라.”고 하니, 희양속戲陽速은 “그리하겠다.”고 승낙하였다.
귀국歸國한 뒤에〉 곧 두 사람이 함께 가서 부인夫人을 뵈니, 부인夫人태자太子를 접견하였다.
태자太子가 세 번 뒤를 돌아보았으나 희양속戲陽速이 앞으로 나오지 않으니, 부인夫人태자太子의 얼굴빛을 보고서 울면서 달려가서注+태자太子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을 보고서 태자太子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안 것이다.영공靈公에게 “괴외蒯聵가 나를 죽이려 한다.”고 말하니, 영공靈公부인夫人의 손을 잡고서 위로 올라갔다.
태자太子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
영공靈公태자太子을 모두 축출하였다.
그러므로 공맹구公孟彄나라로 달아났다가 나라에서 다시 나라로 달아난 것이다.
태자太子가 어떤 사람에게 “희양속戲陽速이 나에게 를 입혔다.”고 하니, 희양속戲陽速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태자太子가 나에게 를 떠넘기려 한 것이다.
태자太子무도無道하여 나에게 자기 어머니를 죽이라고 하니,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태자는 아마 나를 죽였을 것이고注+잔혹殘酷하게 죽임이다. , 내가 만약 부인夫人을 죽였다면 태자는 아마도 나에게 죄를 씌우고 자기는 죄에서 벗어났을 것이다.注+[부주]林: 만약 내가 그 어머니 남자南子를 죽였다면 태자太子는 또 장차 나를 죽여 스스로 해설解說(解明)하려 하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그러므로 허락만 하고 실행하지 않아 나의 죽음을 늦춘 것이다.
속담俗談에 ‘백성은 신의信義로 몸을 보존하다.’고 하였으니, 나는 신의信義로써 몸을 보존하였다.注+가령 가 믿을 만하면 말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고 하였다.
겨울 12월에 진인晉人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의 군대를 에서 패배시키고서 적진籍秦고강高彊을 사로잡고注+두 사람은 범씨范氏를 도운 자이다. 끝내 소공昭公 15년 에 ‘적보籍父(籍秦의 아버지)는 무후無後할 것이다.’고 한 주경왕周景王의 말과 같이 되었다. , 또 정군鄭軍범씨范氏의 군대를 백천百泉에서 패배시켰다.注+나라가 범씨范氏를 도왔기 때문에 함께 패배한 것이다.


역주
역주1 來而不用朝禮 故曰 會 : 軍事訓鍊하는 곳으로 와서 會見의 禮만을 거행하고 朝見의 禮를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會’라 한 것이다. 〈正義〉
역주2 吾死莫(모) : 莫은 暮의 本字이니, 나의 죽음이 늦었다는 말이다. 대개 이때 董安于의 나이가 매우 많았던 듯하다. 〈楊注〉
역주3 使死士再禽焉 : 禽은 吳나라의 士卒을 生捕함이다. 句踐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勇士들을 보내어 재차 吳軍의 陣營을 侵犯하여 吳軍의 前列에 있는 군사를 잡아 가지고 돌아오게 하여, 吳軍으로 하여금 놀라 혼란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吳軍이 끝내 동요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吳軍의 嚴整함이다.’고 한 《左氏會箋》의 說을 취해 번역하였다.
역주4 使罪人三行 屬劒於頸 : 三行은 罪人들로 編成된 세 小隊를 이른다. 《左氏會箋》에 의하면 1小隊가 먼저 가서 칼을 목에 대고 이상과 같이 말하고서 스스로 목을 베어 죽게 하고, 2소대와 3소대가 연이어 가서 스스로 목을 베어 죽게 한 것이다. 이것은 吳軍을 해치는 것이 아니고 매우 괴상한 일이기 때문에 吳軍이 괴이하게 여겨 注目해 본 것이다.
역주5 敢歸死 : 襄公 3년 傳의 ‘請歸死于司寇’를 杜注에 ‘致尸於司寇使戮之’라 하였으니, 여기의 ‘歸死’도 ‘致尸於吳司寇使戮之(죽음(尸身)을 吳나라 司寇에 보내어 戮屍하게 하라.)’의 뜻이 아닌지 모르겠다.
역주6 使夫人會宋朝于洮 : 林注는 옳지 않다. ‘召宋朝’와 ‘會于洮’는 별개의 일이다.
역주7 將以余說(탈) : 南子를 죽였다면 죄를 나에게 돌리고서 자기는 죄에서 解脫하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楊注〉
역주8 民保於信 : 백성은 반드시 信義가 있은 뒤에야 그 몸을 보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左氏會箋》
역주9 吾以信義 : 事宜를 헤아려 행하는 것이 義이다. 義를 따라 잃지 않았기 때문에 ‘信義’라 한 것이니, 信義 또한 信이다. 吾以信義는 과연 信義로써 몸을 保存할 수 있었다는 말과 같다. 《左氏會箋》

춘추좌씨전(7)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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